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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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지금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철학자 중의 하나다. 아감벤의 저서를 읽어보았다면 '벌거벗음'이야말로 아감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유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아감벤의 주저이자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호모 사케르'에서 그가'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도대체 '벌거벗음'이 무엇이기에 아감벤은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호모 사케르'에서 그는 먼저 고대 그리스의 생명관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명을 두 가지 용어로 구별하여 사용했는데 하나는 '조에'라고 해서 모든 생명체에 공통되는 그저 '살아있다'라는 의미로 썼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라고 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를 가리키기 위해 썼다. 그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서서히 가치 있는 삶만이 진정한 삶으로 존중받는데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목적 중시 태도가 근본적으로 문제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삶은 하나의 지속이며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고 존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데 이러한 분리적 사고와 목적 중시 태도는 삶을 파편화시키고 그 파편화된 삶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이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분리된 삶을 결합하여 '삶-의-형태'로 삶을 바라보게 만들고 '벌거벗음'이라는 상태는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현시된 육체 자체가 모든 의미이므로 삶을 목적 혹은 결과를 통해 바라보게 하지 않고 그 순수한 지속에서 혹은 순수한 경험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에게 '벌거벗음'은 사유 자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사유란 '우리가 가진 삶의 형태를 [삶을 그 형태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맥락으로, 즉 '삶-의 -형태'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에게 사유란 한 개인이 행사하는 정신적 능력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인간 지성의 잠재적 성격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 나아가서는 실험이다. 아감벤이 굳이 경험이나 실험이라는 말을 쓴 것은 사유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그 사유를 할 때의 개인이 무엇보다 '사유하기'를 스스로 체험하는 까닭이다.


 '단지 내가 항상 그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역량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내가 겪고 이해한 것 속에서 매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을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이런 의미에서 사유가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형태는 그 자신의 사실성과 사물성에 있어서 '삶-의-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삶-의-형태'에서는 벌거벗은 생명 같은 뭔가를 고립시키는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여기서 아감벤의 사유란 들뢰즈의 탈주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아감벤이 사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푸코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고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취향 그리고 욕망마저 마치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인양 생산하고 있는 권력의 그물망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의 사유는 우리를 '지금-여기'의 절대적 외부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권력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던 삶을 하나로 이어붙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어떤 정체성으로서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순수하게 지속하는 '벌거벗은' 나로 인지한다, 나를 구성하고 내게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을 주입하여 맹목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권력에 대한 저항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기에 '벌거벗음'은 아감벤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타율화되고 궤적화되지 않은. 시민이 아니라 인민(여기서 인민이란 아감벤에 따르면 법에 의해 포획되지 않은, 즉 시민이 아닌 '비시민'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 자체)으로 구축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2009년에 나온 'NUDITA', 즉 '벌거벗음'은 이러한 성격을 모두 10장에 걸쳐서 다양한 맥락으로 풀어간 책이다. 앞서 '역사'를 언급했지만 '벌거벗음'으로 회귀하려는 아감벤은 우리의 굳어진 역사나 시간 개념도 거부한다. '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다(모두 정체성과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듯이 고유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도 달리 이해해야 한다. 그 시간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1장과 2장이다. 1장은 지금은 사라진 종교 상의 예언을 통해 구원이 창조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2장은 동시대성에 대해 진정한 동시대인이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현존하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뒤나 너머에 있는 어둠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예언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때는 오로지 그 예언이 성취된 때이다. 아감벤은 예언이 점점 쇠망하고 그 자리를 철학이 대신했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편린을 본다. 바로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쓴 11번째 테제 말이다. 즉 아감벤이 설명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계란 바로 해석과 실천의 관계에 다름아니다. 그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무덤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바로 이것을 아감벤은 창조와 구원의 관계로 말한 것이다. 구원이 창조에 앞선다는 것은 예언의 참 가치가 오로지 예언이 실현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실제 행동으로 전화되어야 그 해석 역시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음의 사유'를 두고 아감벤이 굳이 실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아감벤이 첫 머리부터 창조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사유가 행여나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이 오로지 해석으로만 그칠 수 있음을 염려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사유는 현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즉 아주 적극적인 작업이다. 실험이란 말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험은 가장 적극적인 검증 행위이니까 말이다. 즉 아감벤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적극적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돌파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적극성은 그 다음의 논의인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앞서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지금 눈 앞에 있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어둠을 보려 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어둠의 인식 또한 사유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각신경생리학의 논의에 따르면 어둠을 인식하는 일은 타성이나 수동적인 양상을 띠지 않는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특별한 활동과 능력을 내포한다. (P. 27)

 

 

 여기서 내포가 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의지의 개입 임을 부러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의 강조는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대한 논의에서도 계속된다. 아감벤은 주인공 K를 지금까지의 주류적인 해석 입장과는 달리 그를 무고한 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K를 고발한 사람은 K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시다시피 아감벤에게 법은 부정적인 것이다. 법은 고유한 가치로 충만한 개인을 자신의 그물망으로 포획하여 단순한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피고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맥락은 법이 정한 형벌의 세 가지 요건, 즉 구성요건과 위법성 그리고 책임에 의해 필요한 것만 걸려지고 모조리 싹뚝 잘려 나간다.



레미제라블의 자비에르 경감을 떠올려 보자. 그에게 있어 장발장은 그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한들 자신이 기필코 체포해야 하는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장발장이 거쳐온 삶의 이야기는 자베르에게 있어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그는 오로지 법이 규정한 조문만으로 그를 판단한다. 법이 규정한 정체성이 장발장 고유의 정체성을 지배해 버린다. 법이 개인에게 하는 일이라는 게 이렇다. 푸코가 말했던 권력 효과. 그래서 K는 그 법을 거부하고 아니, 근본부터 뒤흔들어 전복시키려고 스스로를 무고했다는 것이다.(이 책에서는 거짓 고발자라고 하고 있으나 우리 형법에는 그것을 무고죄라 하고 있으므로 '무고'라 말하기로 한다.) K의 자신에 대한 무고가 그런 힘을 갖는 것은 법은 오로지 '고소'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사실 법이 전면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는 언제나 고소가 이뤄질 때다. 성문법이 없어 오로지 기존의 판례에 근거해 판결하는 미국에서는 법현실주의라는 독특한 법철학 사조가 생겨났는데 거기 대표적 인물인 홈즈 판사는 법은 판결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감벤의 말은 그것과 비슷하다. 그 판결은 오로지 고소가 있고서야 태어나니 아감벤의 말 그대로 법의 존재란 고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고소가 되는 순간 법은 개인에 대해 막강한 힘을 얻는다. 피고가 된 개인을 소환해 그에게 진실을 추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법 앞에서 개인은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는데 법은 바로 그 고백을 이끌어 내는 힘을 가지고 진실을 토하게 만들어 주체를 새롭게 구성한다. 물론 그 진실은 어디까지나 법만이 원하는 진실로, 그 힘에 의해 장발장은 동정의 여지가 많은 '호모 사케르'에서 '죄인'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K는 스스로를 무고함으로써 오히려 법을 혼란에 빠뜨려 버린다. 무고는 죄가 없는 자를 고소 했을 때 성립되는데 자기 무고가 죄로 인정되면 그것은 더이상 무고가 아니게 된다. 즉, 법이 K에게 자백을 받아 죄를 인정하는 순간 죄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K의 전략을 통해 아감벤은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권력이 아무리 강고해 보인다 하더라도 주체의 적극적인 움직임 앞에서 또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를 논의하는 5장에서는 아예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P. 75)'이라고까지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권력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지시켜 우리를 무능력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사실 우리 삶의 왜소함과 불안은 대부분 자신이 무능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감벤은 그것을 전혀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현대의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그 '비능력'인데 이것은 무엇보다 현대가 그 옛날 누군가가 외쳤던 '하면 된다'라는 구호처럼 개인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한 마디로 과잉된 믿음이 가져온 부작용이다. 


 자기 배역의 불안정성이나 불확실성과 반비례해서 오만해지는 단역 배우는 우리 시대의 직업과 소명, 직업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사이의 결정적인 혼동을 잘 드러낸다. 바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 오늘 나를 검진하고 있는 의사가 내일 영상예술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를 죽이는 사형집행인이 카프카의 '소송'처럼 실제로는 가수일 수 있다는 의혹,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연성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유연성이 바로 오늘날  시장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이다. (P. 76)


 즉 그러한 과잉된 믿음 또한 권력에 의해 생산된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산되어 이제는 오히려 우리의 진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식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본 탓에 그것에 왜곡되어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그저 무능력과 왜소함만 각인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 왜곡의 장막을 찢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벌거벗음의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에게 사유란 손가락이며 갈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벌거벗음의 사유가 가진 정당성이 입증되고 난 뒤, 7장인 '벌거벗음'에서는 본격적으로 '벌거벗음의 사유'가 진행된다. 2005년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에서 벌거벗음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인지 본 다음 선악과를 통해 벌거벗음을 최초로 알았던 창세기의 신화를 경유해 그 의미를 탐색한다. 벌거벗음은 다름아닌 지속적인 무화(NULLIFY)라는 것을 말이다.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


 벌거벗음의 진정한 의미는 보이면서 감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이에게 하나의 의미로 규정짓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외부에 있는 어딘가로 달아나거나 무언가를 가져와 지금 떠오른 대상에 대한 나의 규정을 스스로 지우게 만든다. 그것은 머물지 못하게 한다. 반복적인 단절을 낳는다. 나 스스로를 결코 수동적인 감상자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이제 대상이 아닌 나에게서 만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맨 앞으로 돌아간다. 벌거벗음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오직 가능한 것은 스스로 경험과 실험을 통해 창조해 나가는 것 뿐이다. 어둠을 보려는 능력처럼 말이다.


 이 말이 오해를 낳을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 때의 창조는 규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타자를 내 자의대로 반죽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아감벤이 '벌거벗음'을 이렇게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의 절대적인 비규정성에 있다. 우리의 창조는 그것에 한계지워진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에 이름을 짓더라도 이미 그것의 비규정성을 자각한 우리들은 지금의 내 규정이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것임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절대적 타자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지금의 내 규정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으며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한시적인 것임을 충분히 납득한다. 그런 면에서의 창조다. 아감벤이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비인식 영역'의 인식.


 사실상 우리가 무지할 수 있는 방법이 정확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지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비인식 영역에 대한 분절은 우리가 가진 모든 인식 조건이며 시금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이상으로 할 수 있는 한 줄여가며 아감벤의 '벌거벗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소개해 보았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아감벤 사유의 진전이라기 보다는 사유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에 실린 글을 통해 그동안 아감벤이 했던 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책을 리뷰할 땐 언제나 마지막 부분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뭔가 멋있게 마무리를 하고 싶은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갈무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투박하게나마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아감벤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는 '벌거벗음'에 대해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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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2-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이 책을 서점에서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번역만 매끄럽게 됐다면 냉큼 집어 오겠습니다.ㅎ

ICE-9 2015-02-23 00:37   좋아요 0 | URL
앗! 저야말로 yamoo님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번역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다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무난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