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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처음으로 패러다임을 말한 바 있었던 토마스 쿤에 따르면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있게 마련이며 그건 인식의 틀과 진리들을 독점하므로 당대의 사람들은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즉 패러다임이 허용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패러다임에 맞는 사실만을 자기의 진실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삶은 스스로 만든 가치관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규정한 가치관으로 형성될 때가 많다. 특히나 지금처럼 개인의 삶이 언제든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쉽게 추락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근본적 감정이 불안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현대에 이르러 그대로 진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불안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홀로 남겨졌다고 느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소속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안하기에 현대인들은 어디에든 껌처럼 달라붙으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가 소비지상주의에 빠지게 된 것도 사실은 불안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쇼핑 공간은 그저 '소비자'라는 것말고는 다른 정체성이 없는 곳이다. 그렇게 단순히 소비하는 행위 하나로만 거기에 속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 쉽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쇼핑에 빠져든다.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지름신의 영접'은 이 순간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만큼 현대는 불안이 넘치며 자기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잠시만 혼자가 되어도 얼른 스마트폰을 통해 누군가에게 연결되려하는 것 역시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사회일수록 패러다임의 힘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때문이다. 불안할수록 사회는 보수화된다고 하는데 그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역사적으로도 공황이 가져온 불안이 결국은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을 낳고 말았으니까. 단순히 어딘가 속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릇된 선택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열망을 양산하는 이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가 파악하는 것이다. 질병은 언제나 그 근원이 되는 요인을 치료해야만 진정으로 완치된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불안의 뿌리가 되는 원인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완전한 치유란 없다. 소속감은 그저 잠시의 통증을 없애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그 불안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인문이다. 원래 인문이라는 말을 낳은 르네상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대한 소속감으로 통일했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존재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인을 건져내었다. 계몽은 빛이 가져온 해방을 뜻하는데 빛은 다름아닌 사물의 개별성을 드러내며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란 개인을 짓누르는 거대한 소속감부터로의 해방이었다. 한 마디로 패러다임을 무너뜨려 그 안에 갇혀있던 개인들을 모조리 다 탈출시킨 것이다. 인문이란 말은 거기서 유래했고 그 힘을 가져온 것 또한 인문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문을 찾는 것은 그런 역사적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문이란 무엇인가? 다르게 보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며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경계 바깥으로 홀연히 넘어갈 수 있는 용기이며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인문은 부정성에 있다. 그 부정을 통해 달리 생각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그러한 부정으로서의 인문을 잘 보여준다. '투명사회'는 그동안 우리의 열망이었다. 참 많이도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 안전에 직결된 정책들이 그들만의 밀실에서 짬짜미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길 바랐다. 그게 신뢰의 유일한 근거였기에 더욱 그랬다. 믿을 수 없는 이에게 우리가 흔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 말하듯이.
하지만 한병철은 그걸 오해라고 말한다. 아니 위험한 생각이라 경고한다. 그건 사실 사회가 보다 손쉬운 지배를 위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게 만들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 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p. 14~ 15)
한병철은 투명하게 된다는 것의 보다 근본적인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가 '세월호 침몰'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한 상황에서 설사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환영에 불과하다. 마술과 같다. 마술도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행해지며 그만큼 투명하지만 정작 그것이 맹점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눈 앞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에 집중하는 사이 정작 트릭을 만드는 다른 손은 보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 앞의 '투명성'이란 이만큼만 보여지도록 허용된 것일뿐 진실 그대로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보여준 이들은 그 조작된 투명성을 가지고 이제 그만 우리의 입을 닫으라 강제한다. 투명성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납득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말 잘듣는 청맹과니가 될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병철의 책은 패러다임을 흔든다. 전작, '피로사회'가 성과주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다면 '투명사회'는 '투명성 집착'의 패러다임을 흔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세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던 르네상스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인문이라 할 만하다. 한병철이 이렇게 뒤흔드는 것은 알게 모르게 현대 사회에 만연된 파시즘적 경향을 대중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다. 그건 미세한 테크놀로지로 은밀하게 행해지기에 대중들이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들이 그렇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전체가 된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은 없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P. 101 ~ 102)
투명성은 그동안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의 투명성이란 통제와 감시의 위장일 뿐이다. 기술은 우리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도록 도와주었지만 그건 어딘가에서 낱낱이 기록되어 감시의 수단이 되고 있고 기술은 또한 우리를 그 어디든 연결시켜주었지만 그만큼 쉽게 통제의 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렸다. 이런 은밀하게 일하는 손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보여지는 현상에만 너무 집착한 탓이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인문이란 새로운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유난히 보여지는 것에 집착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사실 보여지는 것과 가리워진 것의 접합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보여지는 하나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 배후에 가리워진 것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실은 모든 걸 보면서도 청맹과니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배후의 가리워진 것을 보지 못함이다. 허용하고 조작된 현상만 보고 쉽게 전부라 여기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한병철은 제대로 보는 법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배후에 가려진 것도 함께 볼 것을 말했던 메를로 퐁티처럼 그 역시 타자를 함께 볼 것을 강조한다. 그도 말한다. 진정한 시선을 타자를 보는 것에 있다고.
예전에는 더 많은 시선,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타자의 출현을 알리는 시선이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인간의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오히려 세계 전체를 시선이 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시선으로서의 타자는 도처에 있다.(P. 147)
디지컬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 (...)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 간다.(P. 149)
왜 이렇게 타자가 중요한가? 오로지 타자만이 우리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부재가 전체주의화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곧 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잘 논증한 것처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나를 객체화하면서 반성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자신을 객체화시킬 수 없는 즉자적 존재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자적 존재라 말했다. 그게 정신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P. 186~187)
조르주 아감벤도 현대인의 이러한 경험의 빈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감벤은 현대인은 자전적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므로 현대는 자서전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말까지 했다. 철학에서 경험은 자신을 자신답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주체성을 형성하고 보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경험의 진정한 의미다. 그 경험은 대부분 타자와 대면하여 결국은 나 자신을 깍아내는 것이므로 부정의 경험이요, 고통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정신은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엔 그런 것이 없다. '좋아요' 버튼만 있는 페이스북처럼 과잉된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부정의 경험이 없는 긍정은 라캉이 말한 자기가 보는 것을 무조건 나와 동일시하는 상상계의 거울과 같아서 거대한 파문이 만든 하나의 동심원에 불과한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그 타자로 인해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나가 될 수 있는데도 타자는 깨끗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선도 없고 경험도 없다. 온갖 정보를 다 습득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은 쇼핑과 더불어 현대인들이 소속감으로 자신의 불안을 잊으려 널리 하는 행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그것이 위험한 독약임을 경고한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진으로 생각했지만 한병철은 거꾸로 '감시와 통제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P.212)'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굳어진 통념을 흔든다. 이면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것을 그만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투명성'이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가질 경우 뒤따를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을 경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은 제안이다. 거기에 은밀히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투명성과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복원하자는.
그래서 이제 이 책은 나의 사유를 요청한다. 정신의 진정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궁극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싫어요'의 사유를 하게 만드는 것. 그러한 부정성을 통하여 그동안 묻혀졌던 진정한 나 자신을 한 번 도려내어 보는 것. 강요된 전적인 투과를 거부하는 불투명성의 몸짓을 하는 것. 그러한 도려냄과 몸짓을 통해 '타자'를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진정 맞추고 싶은 과녁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불안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커졌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여기는 수험생이 더 초조한 것처럼.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도 현대에 이르러 죽음이 깨끗이 배제되고 오로지 현세의 삶만이 유일하게 되자 불안 역시도 그만큼 증가했다고 말한 바 있다. 타자를 배제한 채, 지금 있는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나만 절대라고 여길 때 엄습하는 불안의 그림자 역시 더욱 짙어지는 것 같다. 결국 불안이란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눈, 저 너머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체에서 배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타자와 대면할 것을 요청하는 이 책의 말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다. 인문이 우리의 불안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 힘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