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가운데 밀리언셀러 클럽 134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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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매튜 스커더가 자신의 창조주 로렌스 블록을 70년대에 실제로 만났더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미스터리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하드보일드 탐정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으니 고맙다면서 악수나 포옹을 할 것 같다고? 아니, 그건 오산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읽어보았다면 분명 이런 내 짐작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렌스 블록의 얼굴에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볼 거라는 걸.

 

 

 그래도 로렌스 블록은 기꺼이 이해하리라.

 자기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테니. 로렌스 블록은 그의 상처와 속죄를 가지고 주머니를 채웠고 94년엔 미국의 작가협회가 일찌감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할만큼 유명세 또한 누리지 않았던가. 너무 로렌스 블록을 나무라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의 한가운데'를 읽고나니 그의 고독과 슬픔이 더욱 진하게 다가와서 나라도 나서서 정말 작가에게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하고 삿대질 해주고픈 심정이니까.

 

 

 

 이 소설에서 그는 두 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는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그의 삶이란 속죄의 삶이었다. 원래 그는 잘나가던 형사였다. 어느 날 그는 현장에서 강도를 추격하다 강도를 향해 두 발의 총을 쏜다. 한 발은 원했던 대로 강도에게 맞았지만 다른 한 발은 그렇지 않았다. 길가에 있던 어린 소녀의 눈에 맞아 소녀는 죽는다. 경찰 조직은 그에게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정했지만 스커더는 그럴 수 없었다. 설령 고의는 없었다고 해도 자신으로 인해 끝장나버린 소녀의 죽음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죽음이든 그대로 무시될 수는 없다.'

 시리즈 내내 이어질 이러한 그의 정의를 그는 몸소 실천한다. 자신을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이제까지 누리고 있었던 모든 안락한 삶과도 결별하는 것이다. 경찰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아내와 아이들에게서마저 떠나간다. 고독한 사립탐정으로 사는 것. 그것은 그의 속죄였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10월이 온다. '죽음의 한가운데'는 10월의 정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시의 10월은 1년 중 가장 쾌적한 때'라면서...

 

 

 과연 그에게 두 가지 좋은 일이 찾아온다.

 그에게 있어 좋은 일이란 많은 보수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외로움의 코트를 잠시 벗어둘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두 명의 여인이 앞에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의뢰로 미행했던 여자, 포샤 카. 그녀는 특이한 성적 경향을 지닌 손님만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다. 원래 경찰이었던 이번 일의 의뢰인은 특별검사와 함께 굉장한 규모의 경찰 비리를 들춰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의뢰인을 협박범으로 고소한 것이다. 스커더는 그녀를 직접 만나 '왜'라고 묻는다. 그녀는 거짓 고소임을 시인하면서 배후에 뭔가 큰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암시를 남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암시도. 그러면서 스커더를 은밀하게 유혹해 온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자꾸 끌리는 자신을 스커더는 이상하게 여긴다. 결국 유혹을 물리치고 떠나려는 스커더에게 포샤 카는 '자신에게 10월은 가장 슬픈 때'라고 말한다. 왜냐고 스커더가 묻자. 포샤 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겨울이 오고 있으니까."(p.24)

 

 

 그 말은 예언이었을까? 스커더는 뒤에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용의자로 자신의 의뢰인이 체포되었다는 말도. 스커더는 아연 실색한다. 꿈까지 꾸면서 강하게 끌렸던 그녀를 그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아니, 지켜줄 수 없다. 스커더 자신이 발사한 첫 번째 총알의 트라우마.

 

 

 구치소에서 만난 의뢰인은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고 한다.

 이번엔 진범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의뢰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스커더였지만 의뢰인에 대해 분노한 경찰이 하나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게을리하는 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의뢰를 수락한다. 어쨌든 그 어떤 죽음도 이대로 그냥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의뢰인은 자기 아내가 집에서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 말한다. 아내의 이름은 다이애나. 달의 여신이자 사냥꾼 여신의 이름을 가졌다. 고독한 자에게 달은 단 하나의 벗이자 위안의 벗이다. 스커더는 다이애나에게 끌린다. 비로소 자신의 이 고독을 가시게 할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제 인생에서 마치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처음부터 그런 기회는 계속 있었겠지만,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만 잡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그 기회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걸 깨닫게 해 준 계기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p. 188)

 

 

 다이내나가 스커더에게 한 말은 스커더가 다이애나에 대해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다이애나라는 이름이 가진 또 다른 의미 그대로 '헌팅'당한 것이다. 그렇게 포샤 카의 유혹은 거부했던 스커더는 다이애나의 유혹은 받아들인다. 그건 자기만큼이나 절박한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공감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둘은 키스하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속죄의 여로는 거기서 멈출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독과 상처는 조금 마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스 블록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스커더가 사랑에 빠져 있는 사이, 잇달아 죽음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블록은 그 순서를 마치 스커더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타인의 죽음들이 초래된 것처럼 만들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마땅히 그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그 타인들이란 의뢰인을 무죄로 방면시킬 수 있는 유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죽었다는 건 그만큼 의뢰인이 감옥에서 풀려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그대로 스커더가 양심의 가책없이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정확히 1 대 1 대응하는 살인과 사랑의 함수 관계. 스커더의 보통 삶에 대한 욕망이 증가할수록 살인 또한 늘어나는...

 

 

 결국 파국이 온다. 스포일러 상 밝힐 수 없지만 결코 다이애나와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파국이. 결국 그건 자신에게 영원히 트라우마가 될 두 번째 총알이었던 것이다. 현재 속죄의 삶을 가져온 경찰 시절에 발사한 두 번째 총알처럼.

 

 

 그에게 벗어날 길은 허락되지 않는다.

 짧은 10월의 쾌적함은 긴 겨울의 고통만 남겼을 뿐이다. 가장 눈물이 많고 상처가 많은 탐정. '죽음의 한가운데'는 이제 겨우 시리즈 두 번째의 작품이다. 아직도 그가 흘릴 눈물과 가지게 될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 그는 영원히 속죄의 여정을 걸어 갈 운명이다.

 

  "사람은 운명을 바꾸지 못해. 운명이 사람을 가끔씩 바뀌게는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지."(p. 234)

 

 

  세번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탓에 단정내리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가 자신이 걸어 온 속죄의 여정을 확고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바로 이 두 번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모습이 지금까지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극히 매튜 스커더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게 된 결정적 한 방이었으니까.

 

 

 하드보일드는 어디까지나 초연함에 있었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대쉴 해미트의 무표정한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어떤 경우든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립탐정들이 유일하게 자신의 '모럴'을 지킬 수 있었던 길이었다. 챈들러의 말로우도, 맥도널드의 루 아처도 그랬다.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역할이었다. 그건 작품에서 철저하게 상대방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근사한 여인이 유혹해오더라도 절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의 스커더처럼 문득 느낀 유혹에 대한 상념으로 괴로워하고 아예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대의 하드보일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1976년에 나왔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때는 아직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보일드의 근본 규칙을 허물어뜨리면서까지 로렌스 블록은 혁신을 단행했던 것이다. 지극히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사립탐정으로.

 

 

 한 마디로 하드보일드의 뉴 웨이브!

 이 같은 뉴 웨이브는 아마도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부적 자극 때문이었을 지 모른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몽키스 레인코트'처럼 외부 사회의 변화는 하드보일드적 태도의 변화를 요청하는 법이니까. 사실 당시 사회에 그토록 만연된 아픔을 앞에 두고서 언제까지나 냉정한 관찰자인 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 앞에서 네 아픔의 원인은 이런 것이야 말해주는 사람은 그저 재수없는 녀석일 뿐이다. 그들이 아픔을 호소하는 건 그 원인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한 마디 따스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니던가. 로렌스 블록이 현명했다면 자신의 사립탐정도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 준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같은 상처를 가진 자만이 더욱 타인이 받은 상처에 공감할 수 있고 보듬어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하드보일드 역사상 유래없는 공감의 탐정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의 한 가운데'는 유일무이한 매튜 스커더의 하드보일드적 정체성이 완성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만연된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다. '긴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많은 죽음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는 이유로 작은 불똥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마저 차별받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긴 겨울의 고통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오로지 외부의 것으로만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그러므로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죽음에게조차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그 의미를 세상에 남기기 위하여 분투하는 매튜 스커더를 난 지지할 수 밖에 없고 이왕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외로워하며 울고, 상처받고 실연당하는, 그렇게 아주 인간적인 온기마저 느껴지는 탐정이기에 더더욱. 겨울이면 누구나 무언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법이 아니던가.

 

 

 끝으로 인상 깊게 읽었던 장면 한 토막.

 

 

 "가끔은 달의 인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바보 같죠?"

 "글쎄, 바다는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밀물과 썰물이 있는 거고. 달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확실해요. 경찰들은 다 알아요. 범죄율은 달에 따라 변해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특히 기이한 범죄들이 그렇죠. 보름달이 뜨면 사람들은 기괴한 짓을 해요."

 "예를 들면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키스하는 거."(p. 190)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한 번 응용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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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0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잠깐 차이로 해가 바뀌었습니다 첫날 빨리 인사하고 싶어서요^^ 제가 책을 읽고 쓸 때 조금 괴로워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겠습니다 잘 못 쓰더라도 즐겁게 해야겠습니다 쓰고 나서가 아니고...^^

헤르메스 님은 어떠신가요 책읽고 쓰기 즐거우세요 책 읽기를 먼저 즐겨서 잘 쓰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도 책 즐겁게 보시고 쓰기도 즐겁게 하세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가보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쉴 때는 잘 쉬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ICE-9 2014-01-06 01:29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합니다. 저야 뭐, 책 읽는 건 대부분 즐겁죠. 하지만 쓰는 건 아직 그리 다 즐거운 건 아닌 것 같아요ㅠ ㅠ 엉덩이 근력을 보다 기르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랍니다. 희선님도 2014년엔 더욱 즐거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