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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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캐나다는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춘기 시절엔 모험심이 강해져서 그런가 낯선 외국에서의 삶이 지금의 지루한 현실을 끝장낼 수 있는 커다란 기회라 여기게 된다. 내가 그랬다. 캐나다는 그런 곳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직장 관계로 몇 년간 거기에 계셔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허락되었다. 동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졸랐다. 하지만 거부되었다. 교육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대화가 거의 없는 나와 단 둘이 지내는 것을 거북해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자기 관리가 되지 않는 내가 더욱 나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본디 못하게 하면 거기로 향한 열망은 더욱 거세어지는 법이다. 그것도 던지기만 하면 바로 넣을 수 있는 농구 골대와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엄청 싸웠다. 하지만 사춘기의 저항이란 게 다 그렇듯이 대야의 가득한 물에 스포이트로 우유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이 효과는 미미했다.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악을 쓰든 모르쇠와 침묵으로 응대했고 결국 내가 먼저 제 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진 혼자 떠나셨다. 난 배웅하러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그게 내 저항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입 안의 톱밥을 씹는 듯한 나날인데도 가정은 평온을 되찾아갔다. 상실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당한 자의 몫일 뿐이라는 걸 그 때 새록새록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로드킬'당한 사슴의 사진이었다. 편지엔 아버지가 운전 중에 도로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들이받고 말았다고 적혀있었다. 평생 벌점 하나 받지않을 정도로 모범운전자였던 아버지로서는 비록 동물이긴하나 자신의 운전으로 하나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사진은 얼마나 놀랐는지 알림과 동시에 가족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내겐 다르게 보였다. 그건 나 같았다. 차가운 눈 바닥에 쓰러진 좌절된 내 소망의 시체. 이루지못한 꿈이 파열된 주검이 되어 거기 버려져 있었다. 위로의 말을 기대하셨던 아버지에겐 죄송하지만 그것으로 밖에는 안보였다. 앞서도 말했듯 아픔은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사람은 가시에 찔린 조그만 아픔조차 대신해 줄 수 없다. 누구도 사슴 대신 죽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그 사슴은 과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 예측했을까? 어느 겨울 밤, 먹이 혹은 쉴 곳을 찾아 늘 건너가곤 했던 그 곳에서 뜻밗에 나타난 한 동양인의 차에 치어 죽게되리라고 과연 알 수 있었을까? 몰랐으리라. 내가 그냥 손만 뻗으면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캐나다로의 이주가 물거품이 될 줄 몰랐듯이, 아버지가 늘 다니던 퇴근 길에서 한 생명을, 그것도 머나 먼 이국의 땅에서 빼앗게 되리라는 걸 몰랐듯이. 삶이 무서운 것은 늘 이렇게 뜻밗의 곤경을 어딘가에 준비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가운데 치즈가 놓인 쥐덫과도 같이. 사슴의 죽음은 그것 때문에 내겐 더욱 모골이 송연한 장면이었다. 삶의 무자비한 손 끝에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한 '리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디어 라이프(Dear Life)'는 캐나다 작가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먼저 사슴의 삶을 뜻하는 'Deer Life'로 들렸다. 왕의 목덜미를 겨냥한 다모클레스의 칼과도 같이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의 곤경 앞에서 무방비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하디 연약한 그 사슴과도 같은 우리네 삶을 연상시켰다. 비록 제목은 달랐지만 예측은 들어맞았다. 소설이 정말 그런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실린 14개의 단편들은 모두 어느 순간 닥쳐올지 모르는 '로드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첫 시작을 여는 단편 '일본에 가 닿기를'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안정된 삶을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모험을 요구하는 뜻밗의 유혹이거나 '자갈'의 주인공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일어난 사고로 가족을 잃는 뜻밗의 비극이기도 했다. 아니면 '코리'에서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고이거나. 혹은 '돌리'에서처럼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옛 애인이거나 '기차'에서처럼 문득 듣게 된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 고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디어 라이프'는 살면서 갑자기 당하게 될 지도 모를 '로드킬'들을 하나의 슬프고 아련한 꿈이거나 잠시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신음을 내게 만드는 나쁜 꿈처럼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처럼 갑작스런 이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늘 그 장소과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거나 혹은 '기차'의 잭슨처럼 어디서도 머무를 수 없게 만드는 그리고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리아처럼 쌓인 세월이 반창고가 되어준 듯 어느덧 그 아픔에 익숙해질 순 있지만 그래도 갑자기 어느 저녁무렵 문득 까닭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그렇게 우리를 '상실 전문가'로 만드는 것들을...

  지금 그에게 있는 것.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결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p. 118)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거기에 '상실'도 그렇다고 하고 싶다. 그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 사진들을 죽 대하면서 똑똑히 깨달았다. 한 번 도려낸 상실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저 우리는 '자갈'에 나오는 닐의 조언대로 그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아픔을 조금씩 마모시켜 갈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 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p. 142)

 내게 캐나다가 그랬듯이, 우리에겐 누구나 '아문센'이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에서 주인공이 찾고자 했던 병원 같은 곳이 있다. 아무리 원하지만 어떻게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 늘 나와는 저만치의 간극으로만 남게 되는 어떤 사람이거나 것들이.

 닐은 그 간극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닿고자 하는 마음을 오컴의 면도날처럼 잘라버리면 편해진다고. 행복은 의도된 착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어쩌면 위안이기도 한 이 말에 그러나 난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상실된 것을 어떻게든 메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뭔가 관점이 협소하다고 느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한다. '로드킬'을 막기위해 표지판을 세우듯, 덤불 속에 웅크린 보이지 않는 늑대를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뒤 미지의 보복이 두려워 도시를 만들었던 것처럼 프로이트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한 걸 가만히 들여다볼라치면 우리의 안정이란 게 오로지 불안이 잠재된 외부를 잘라내는 것으로만 얻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한 것은 닐의 조언 그대로였던 것이다. 간극이 놓여진 이유를 이해하기 보다는 무시해버림으로써 얻어진 테우리 속의 일시적 행복. 2001년의 9.11이나 2011년 일본 쓰나미에서 보듯 단지 세계가 거대한 힘으로 건드리지 않을 때에만 겨우 존재할 수 있는. 배가 아플 때 발라주는 '빨간 약'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랬다. 비슷한 방법으로 '로드킬'을 피하려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엘리스터와의 사랑을 위해 메리를 배반했고 '기차'의 잭슨은 다시 부머랭처럼 돌아온 옛사랑을 져버렸다. '코리'의 주인공이 뒤늦게 깨닫게 된 사건의 진실도 결국은 애인의 배신이었다. '디어 라이프'의 단편들은 자주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안식처'의 재스퍼 이모부가 속한 공동체가 잘보여 주듯이 종교란 것도 알고보면 외부를 잘라버림으로써 구가하는 내적 만족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엔 '자기 중심적'이란 게 자리잡고 있다. 내가 아버지가 보내온 사진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 감정만 투사했듯이, 삶의 모든 경험을 혼자 짊어져야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유용한 쪽으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앨리스 먼로의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의 사진들을 대하다보면 그녀가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떠가는 배의 속도로 서서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간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우리가 너무 우리만의 아픔에 골몰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도록 만든다. '로드킬'은 당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도 어쩌면 그 '로드킬'의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로 갈수록 점점 쌓여져 가는 '로드킬'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걸 느끼게 된다. 사건의 중심은 천천히 '당한 나'에게서 '가한 나'로 옮겨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했을 때는 보였던 아픔이 가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당한 사람은 사라지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너의 행복을 보존하기 위해 간극을 잘라버려라'라고 했던 닐의 조언에 충실했던 우리들은 피해자인 그들에게도 똑같이 대했던 것이다. 보지 않고 잊어버리면 그 뿐이었다. 없는 셈치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p. 389)

  언젠가 우연히 버스 안에서 중학교 동창생 하나를 만났다. 한동안 나를 정말 못살게 굴던 녀석이었다.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었던 나는 녀석에게 그 때 왜 그랬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때는 그런 장난 으례 다 치는 것 아니냐, 뭘 그런 것까지 다 담아두고 있냐'며 날 타박했다. 황당했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지? 난 그 시간에 교실로 들어온 햇살의 밝기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 일을 쉽게 잊었다. 늘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순진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편한 것만 기억했다. '뇌과학' 책을 보니 아예 우리의 두뇌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고 불확실한 자연에 스스로를 길들여가다 보니 그렇게 진화했다고.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언젠가 가해자의 모습이 되어 누군가를 '로드킬'시켰을 지 모른다. 일부러 서둘러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자전적이라는 마지막 단편 '디어 라이프'에서 앨리스 먼로가 자신의 어머니가 한 일을 떠올릴 때 나 역시 이런 생각으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 뒤에 놓인 그 긴 망각의 그림자 속에 어떤 내가 가한 '로드킬'의 희생자들이 있을지 몰라서.

 결국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와 만나게 하는 책이었다. 난 여지껏 삶에서 잃어버린 것과 치뤄야만 했던 대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내가 빼앗은 것과 타인에게 입혀버린 손해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캐나다에 보내달라고 악다구니 할 때의 부모님이 과연 어떠한 마음이셨을지 하는 것들을. '호수가 보이는 풍경'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문제는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것 처럼 그렇게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더이상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자리로 옮겨 갔다. '시선'의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세이디라는 여인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세이디는 '로드킬'을 당했다.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충격과 처음으로 시신을 마주한다는 공포 앞에서 주인공은 세이디의 눈꺼풀이 조금 들썩이는 걸 본다. 엘리스 먼로는 그 눈의 크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이 그녀라면, 당신이 그녀의 몸 속에 들어갔다면 속눈썹 사이로 밖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만. 어디가 밝고 어디가 어두운 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만. (p.350)

 이 단편집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우리가 타인에게 배려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만 더 내 내부를 허물어 타인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닐의 조언보다는 더 '로드킬'에 대한 불안과 아픔을 줄이는 길이 아닐까 싶어진다. '시선'의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그 '들썩임'을 기억한다. 언제나 그 타자의 입장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들썩임'을. 앨리스 먼로의 이 소설도 내게 그러할 것 같다. 언제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사슴의 사진처럼.
 
 언젠가 정말로 캐나다에 가게 된다면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싶다. 거기서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하고 살면서 내 아픔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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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21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써야지 하고 읽어보면서 다른 일을...^^
캐나다 하면 빨강머리 앤이 생각나는군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정말 있을까요 이 말 보니까 에드워드 왕자군요 앤이 살던 초록지붕집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찾아온다고...

캐나다에 가 보고 싶으셨군요

자신이 슬픈 일을 겪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 있지만 자신한테 안 좋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죠 그래야 나중에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않죠


희선

ICE-9 2013-12-22 22:44   좋아요 0 | URL
와! 저도 빨강머리 앤 정말 좋아해요. 그 뒷 이야기까지 다 읽었을 정도록^ ^ 그린 게이블즈가 유명한 관광 명소라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그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긍정하면서 조금씩 바깥으로 넓혀가야겠죠. 책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좀 더 타인과 공감하면서 배려의 폭을 넓혀 가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