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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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핍과 순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 중의 하나로 시작한다. 쓰쿠루가 스무 살을 넘긴 그 해, 늘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뒤로 하루키는 왜 주인공 쓰쿠루가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짙은 구름으로 소용돌이치는 허무였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p. 9)' 밖에는 없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들려준다. 한 마디로 그건 상실 때문이었다. 그토록 완벽했던 '일체감'과 '조화로운 어울림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공동체로부터 쓰쿠루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쫓겼던 것이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아카, 아오, 구로, 시로. 모두 적색, 청색, 하얀색 그리고 검은색을 뜻하는 이름으로 그렇게 모두들 색채가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 이름에겐 그런 색채가 없었다. 그는 그걸 늘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름에 색채가 없는 만큼 자신의 삶에 뭔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게 있다고 여겼다. 다른 친구들은 이름의 색깔 그대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저 혼자 '텅 빈 그릇'처럼 산다고 여겼다. 쓰쿠루가 내쫓겼을 때, 죽음을 계속 생각할 만큼 억울하고 아팠지만 쓰쿠루가 단 한 번도 친구들에게 왜 그러는지 다그쳐 묻는다거나 스스로를 변호하려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형도 시인이 언젠가 '내 영혼은 온통 검은 페이지니 누가 들여다보려 하겠는가?'했던 것처럼 스스로 색채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리 당한 것이라 스스로 납득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왜 제목이 하필이면 '색채가 없는'이 되었는지 이해할 듯하다. 즉 다자키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16년동안 다자키가 한 것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늘 사람들이 도착하게 되는 '역'을 만드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살았다. 그는 '우연히 주어진 땅'이라 여기는 '도쿄'에서 '망명자'로 살아왔다. 되도록 '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체류허가를 박탈당하지 않도록(p.421)' 조심스럽게 말이다. 한 마디로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그가 그 곳에서만은 강제 출국 당하지 않도록 기를 쓰고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스무 살 때의 아픔이 아직도 번번이 목에 걸려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은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과 정면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수영장 밑바닥에 오래 가라앉아 있는 돌처럼 묵혀둘 뿐이다. 하지만 쓰쿠루가 다시금 새롭게 만나게 된 여인 '사라'의 말대로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p.51)다. 아무리 깊이 묵혀두고 애써 잊어버리려 하여도 한 번 일어난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쓰쿠르의 노력은 위험을 만났을 때 타조가 하는 짓과 같다. 자신의 적에게서 위협을 느낄 때 타조는 달려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땅에다 눈을 감고 얼굴을 박는다고 한다. 그렇게 눈감아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진짜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타조의 짓이 적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듯 쓰쿠루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진정으로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가려면 얼레에 매인 실을 끊어야 하듯이 진정으로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면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과거의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가 늘 함께 있고 싶은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라가 바로 그 여인이다. 그건 늘 수영장 물 아래 밑바닥에서 두 귀를 막고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에게 있어 삶이 모처럼 선사해 준 부활의 기회였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삼켜서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먼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것부터 토해내어야 한다. 뚜껑을 덮어두고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그 과거의 상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례를 떠난다. 그건 과거로의 여정이다. 그 순례의 쓰쿠루는 연어 인간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추방한 그 장본인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산란하기 위하여 자기 내부에 가득 깃들어 있었던 아픔을 '컥컥' 토해내는 여정인 것이다.

 

 앞서 '색채가 없는'이란 말은 결핍을 본질로 하고 있는 다자키 쓰쿠루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뒤이어 제목에 '순례'가 나오는지도 수긍이 간다. '순례'란 궁극적으로 보자면 다름 아닌 결핍의 효과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걸. 따지고 보면 우리의 발길을 바깥으로 이끄는 것은 현재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순례의 발걸음은 그렇게 텅 빈 그릇과 같은 삶을 메우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 하루키가 바로 그 충족을 위하여 다자키 쓰쿠루를 순례로 이끌었던 것인가를. 과연 이 소설은 쓰쿠르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색채'를 찾아주는 이야기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하루키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2. 하라다 그는 왜 그렇게 사라졌는가? 혹시 괴테의 '파우스트' 변주는 아닌지?

 

그 말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상의 '뒤틀림'이다. 어쩌면 당신 역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참으로 기묘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따라다니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바로 하라다의 존재다. 도대체 그는 왜 나온 것일까? 소설의 중반에서 그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끝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쓰쿠루에게 완벽했던 고등학교의 공동체적 경험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즉 '순례의 해'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지만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종적을 감춘다. 베르만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순례의 해'는 이어지지만 그는 나오지 않는다. 문득 지금은 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고 있을 '보이저2호'가 생각난다. 거기엔 혹시나 만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들에게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로 문명화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그게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것만은 살아남을 것이다. 존재했던 인류의 메아리로써. 하라다 역시 사라진 뒤에는 메아리로 존재할 뿐이다. 소설 후반에 쓰쿠르가 수영장에서 우연히 하라다와 닮은 이를 보고는 그 역시 자신의 목에 걸린 가시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하라다란 이름도 색채가 있다. 그건 회색이다. 쓰쿠루를 결정적으로 추방시킨 장본인이 바로 검은색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시로'라는 걸 떠올려보면 회색은 그 검은색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색이므로 어쩌면 하라다와 시로는 일종의 존재의 연속으로 모두 쓰쿠르에게 메울 길 없는 상실을 가져다주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기엔 또 뭔가 부족한 게 있다. 하라다가 들려주는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의 에피소드다. 도대체 특정 개인에게 죽음을 건네줄 능력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있으며 또 그런 자들은 사람들이 가진 색채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왜 나온 것일까? 그 이야기의 의미나 진실 역시도 두 번 다시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라다는 음반과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바로 이런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어정쩡하게 끝나버리는, 그래서 뭔가 뒤틀려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구성을 소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하루키는 왜 하라다를 등장시켰으며 이런 에피소드를 본격적인 순례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배치한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있어 얼른 들어오는 것은 '미도리카와'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도 색채가 있다. 바로 녹색이다. 그 녹색의 이름을 가진 자가 회색의 이름을 가진(정확하게는 하라다의 아버지. 이름은 같다.)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를테면 자네는 악마라는 걸 믿나?"(p.102)

 

 아! 이 말에서 깨닫게 된다. 하루키의 미도리카와 에피소드는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변형한 것임을. 단서는 이미 하루키에 의해 주어져 있다. 저 '악마'라는 말 외에도 미도리카와가 '녹색'이고 하라다는 '회색'임을 감안한다면, 이 말은 저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명한 문장, '모든 진리는 회색이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 그대로가 아닌가! 미도리카와가 죽음을 건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만큼 극적인 삶의 변화를 메피스토텔레스 역시도 파우스트에게 건네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하루키의 의도는 보다 분명해진다. 미도리카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에게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려는 것임을.

 

 하라다는 바로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그 때문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결핍을 메우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깨닫게 된다. 보다 더 큰 절망의 원인은 결핍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에 있었음을.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와 같다. 한 마디로 구원은 그 부족한 것을 메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킬 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바로 그 말을 위해서 하루키는 기꺼이 하라다를 영원히 부재하는 존재로 남겨두는 구성상의 뒤틀림을 무릅썼다. '상실'이라는 그 상태 자체에 우리의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시선 자체에 우리의 아픔마저도 달려 있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3. 정말은 그 바라보는 시선에...

 

 그렇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우리가 살면서 필연코 직면하게 되는 결핍과 상실을 그저 메우고 치유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쓰쿠르가 소설 후반에 하게 되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멀리 핀란드에 이르는 순례의 여정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은 왜 하루키는 그 시선을 문제삼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건 분명 이 소설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전의 소설들, 그러니까 1995년,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가스 살포로 인해 이제까지의 문학적 태도를 그동안의 '디태치먼트(무관심)'에서 '커미트먼트(전념, 헌신)'으로 전면 수정한 그에게 있어 그 첫 일보가 되는 '태엽감는새'부터 얼마전에 나온 '1Q84'까지는, 그 결핍과 상실을 메우는 일이 중요했다. 하루키는 그동안 바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해서 써왔던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외부로, 타인으로 향하는 소설을 써 왔지만 그 동기는 어디까지나 지금 문득 안아버린 결핍과 상실을 메우고 치유하는데 있었다. 이는 물론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가스 살포 사건이 새삼스레 확인시킨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 앞에서 이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하루키 스스로의 응답이었다. 그는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가 무엇보다 오래도록 고착화되었던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에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 폐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외부로, 바깥으로,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더 이상 그런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소설 후반에 펼쳐지는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언뜻 보아서는 전작의 태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하루키의 세심한 연출과 대화에 주목하면 뚜렷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바로 이 소설은 '위로'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로 이어지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정이 아닌 위로의 여정이다. 물론 위로도 치유의 일종일지 모른다. 하지만 둘이 전적으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이 둘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그건 아마도 위로든 치유든 그 받는 대상에 대한 평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치유는 그 받는 대상 스스로 부정토록 여기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위로는 그 스스로 긍정하도록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직접 남을 위로할 때를 떠올려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위로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되는 것이 그 받는 대상 스스로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그와 같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 모두는 늘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쓰쿠루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쓰쿠루는 색채가 없는 그가 색채가 선명한 친구들로 인해 모자람이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것이 바로 쓰쿠루였다고. 이를테면 그는 구로가 만든 도자기의 색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색채는 남편의 작품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양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어떻게 부각할 것인가, 그것이 색채에 주어진 역할이었다. 색채는 아주 엷고 과묵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문양의 배경을 이루었다.(P. 329)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타인들을 빛나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빛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거꾸로 나눠주는 존재였다. 쓰쿠루는 자신의 색채 없음으로 그 공동체로 부터 추방당했다고 여겼지만 아카는 그토록 완벽했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결정적으로 그렇게 빛을 나눠주던 쓰쿠루가 도쿄로 홀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핀란드에서 하얀색의 이름, 구로는 그 시절 쓰쿠루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주변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사랑받고 긍정받는 존재였다. 텅 비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텅 비어있을 수 있어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은 구로도 그렇다. 하얀색 역시도 배경이 되어 다른 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렇게 구로는 쓰쿠루와 가장 유사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눈부시게 빛나던 소녀 시로 곁에서 늘 부속물 같은 존재로 취급 받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그대로 납득한 가운데 시로를 더욱 잘 보살피던 소녀였다. 이런 관계였기에 어쩌면 쓰쿠루와 구로 둘이 그런 관계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쓰쿠루와 비슷했던 구로였으나 결국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그건 그녀 표현에 따르자면 '나쁜 난쟁이'를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Q84'에 나왔던 '리틀 피플'의 변형으로 보이는 그 나쁜 난쟁이'는 뭐라고 명확하게 정체가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 존재의 있고 없고는 어디까지나 시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래에 던지는 막연한 불안감의 시선이 바로 그 나쁜 난쟁이들을 불러온다. 구로는 결코 쓰쿠루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시로의 곁을 떠나게 된 것도 언제까지 시로를 돌봐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로 역시 그러하다. 소설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이 바로 시로의 삶이다. 그 때 가장 빛났고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시로가 가장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로는 이렇게 말한다.

 

"유즈(시로)는 더 이상 백설공주가 아니었어. 아니면 백설공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지쳐 버렸는지도 몰라. 너 또한 일곱 난쟁이라는 역할에 지쳐 버렸고."(P. 354)

 

 그녀들을 지치게 만든 결정적인 장본인이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시로는 당장이라도 파국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고 구로는 이대로 시로만 돌보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불안했다. 미래에 던지는 그 불안의 투사, 자꾸만 부정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나쁜 난쟁이들의 정체였던 것이다. 이제 더이상 그런 나쁜 난쟁이들에게 흔들리는 '구로'가 아닌  쓰쿠루처럼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드는 의연한 '에리'가 된 그녀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나쁜 난쟁이들을 조심하라고.

 

 여기에 하루키의 진심이 있는 것 같다. 왜 그가 이토록 세세하게 시선을 문제삼는지도 바로 여기서 그 이유가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미래에 던지는 불안의 시선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것과 연결되어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게 함이다. 세상엔 정답 같은 게 없다. 완벽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자명한 진리다. 하지만 우리들은 마치 그런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 완벽한 삶이 있다고 여긴다.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나와의 간극. 바로 그것이 우리 아픔과 절망의 원인이다. 완벽함이 있는 곳에 고통과 절망이 있다. 가장 눈부신 빛의 가장자리가 가장 어두운 법이듯이 말이다. 시로가 그랬듯이 눈부신 색채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둡고 힘들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 완벽이라는 것, 정답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가상이기 때문이다. 아오가 팔고 있는 '렉서스'의 의미처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어. 렉서스란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아오는 웃었다.

"자주 듣는 말인데, 의미는 애당초 없어. 그냥 만든 말이야. 뉴욕의 광고 회사가 도요타의 의뢰를 받아 만든 말이야. 아주 고급스럽고 의미가 깊은 듯한 울림이 좋은 말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야."(P. 210)

 

 그렇게 완벽함이란 만들어진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실제로 부터 보증받지 못하는 것이기에 시로가 그랬듯 그 중심에 설수록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라가 '잘 가 카롤라, 반가워 렉서스.'라고 했듯이, 에리가 '잘 가 소설, 반가워 도자기'라고 또 반복했던 것처럼 정답과 같은 완벽함이란 이다지도 쉽게 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시선이다. '언제 또 변할지 모른다'라는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그저 불안할 뿐이지만 '언제 변하든 상관없다. 난 그대로 받아들일테니'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그런 말이 하필이면 가장 변화를 긍정하는 사라와 에리가 똑같이 반복한다는 것은 바로 이 시선이야말로 하루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렉서스'에 깃든 의미는 손가락이 여섯 개인 '다지증' 에피소드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쓰쿠루는 일하고 있던 한 역사의 역장으로 부터 역에 버려져 있던 잘려나간 '여섯번째 손가락'을 발견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다지 특이한 경우도 아니고 통계적으로 거의 500명 가운데 한 사람은 거기에 해당될 정도로 확률적으로 흔한데도 우리가 그토록 여섯번째 손가락을 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렇게 성년이 되어 스스로 잘라서 버리거나 어릴 때 부모들이 잘라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왜 잘라버리는 것일까요?' 묻는 쓰쿠루에게 역장은 다섯 손가락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전에 아오를 만날 때 쓰쿠루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고등학교의 완벽한 공동체를 다섯 손가락에 비유했던 것이다. 또한 쓰쿠루는 언젠가 꾸었던 시로와 구로가 모두 나와 정사를 벌이는 꿈에서 그녀들의 손가락들을 특히 강조해 말하기도 한다. 그만틈 여기에서의 다섯 손가락은 완벽함과의 상관물이었다. 거꾸로 잘려나가는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 완벽함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아서 제거되는 것들의 상징인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제거되었던 쓰쿠루도 스스로를 그런 '여섯번째 손가락'으로 여겼다. 그렇게 잘려나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그는 꿈을 꾼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데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이 옆에서 악보를 기막히게 넘겨주는 꿈을. 하지만 그 꿈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를 지겨워한다. 이 꿈은 그대로 완벽함의 가상에 희생당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의 능수능란한 악보 넘김은 피아노 연주가 비유하는 완벽함에 있어서 손가락이 다섯개나 여섯개인지는 하등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함의 가상에 집착하고 있는 대중들은 그 연주에 아무런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대놓고 기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완벽함의 가상과 여섯번째 손가락들의 대립이 전면화되는 가운데 청중들로부터 '그로테스크할만큼 증폭되고 과장된 소음과 기침 소리와 불만의 신음 소리만이 그의 귀에 들리지만' 쓰쿠루는 연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그 음악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꿋꿋하게 자기 식대로 연주를 계속한다.

 

 이렇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쓰쿠루가 달인이다. 아오와 아카 그리고 에리가 쓰쿠루를 만날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여전히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구나!'가 바로 그 말이다. 이것이 하루키의 정답이다. 그건 이미 쓰쿠루란 이름 자체에 나와 있기도 하다. '쓰쿠루'란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인데 쓰쿠르 스스로는 그 '만들다'를 스스로 '무형에서 형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라 정의한다. 완벽함이란 설계도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형성해가는 그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이름인 것이다. 쓰쿠루의 삶도 그랬다. 어디와 닮으려 애쓰는게 아니라 무형의 공간 위에다 '역'이라는 유형의 공간을 만들어왔던 것처럼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저 한 발, 한 발 착실히 내딛여 왔던 것이다. 물론 그라고 해서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라'와 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혹시 시로를 죽인 게 자신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는 결국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삶이란 거대 여정에 있어 저마다 소중한 한 걸음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늘 규칙적으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된 손목 시계 처럼 오히려 그 모자람을, 불편함을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제 깨닫는다. 핀란드에서 에리가 말했던 대로 '참을성 있게 어린 새에게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어미 새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이러한 쓰쿠루의 모습은 마지막 사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P. 436)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뒤이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눈부신 색채로 만개한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 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 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P.437)

   

 하루키가 감동적으로 보여주듯이 삶의 모든 걸음이 다 소중하다. 삶이 가진 모든 모습이 다 가치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시선은, 그렇게 나쁜 난쟁이들에게 유혹당해 불안한 마음을 나와 미래에다 투사하는 시선은 삶의 색채를 나누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져야 할 것과 기피해야할 것을 나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루키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게 나누는 것만큼 우리의 삶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타인이 가진 색깔을 볼 수 있었던 미도리카와가 줄 수 있었던게 오로지 죽음뿐이었듯이 말이다. 그런 미도리카와조차 이렇게 충고한다. "논리의 실을 이용하여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P. 116)라고. 그러므로 삶의 모든 순간을 결핍'과 상실이라는 어두운 색깔로 채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감정들을 낳게 하는 '완벽함'이란 정답 또한 '렉서스'만큼이나 의미없는 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키의 조언대로 시선을 완벽함을 찾거나 먼 미래에 두는 게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는 우리의 발 바로 앞으로. 내게 없다고 해서 안달하지도 않고 잃어버릴까 불안해하지도 않으면서 확실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지 않도록' 해주는 구원의 걸음이다. 정말로 신의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실은 없다. 오로지 계속되는 삶을 누리는 '춤'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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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것도 어느 정도 살아봐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쓰쿠루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은 본래 헤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자라는 것이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