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945년. 그러니까 일본이 패전하여 전쟁이 끝났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으로 이제는 명실공히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는 더없이 싱글벙글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야 자신이 꿈꾸던 미스터리 소설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대로 칩거하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 나갔고 그 결실로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두 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혼진 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나비부인 살인사건' 이다. 특별히 이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번에 나온,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걸 끝으로 그 길었던 명탐정의 여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즉 그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사실은 바로 그 첫 작품 중 하나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을 일종의 리메이크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이 가지는 연관성은 이 작품을 읽게 되시면 유사한 사건이 나타나므로 바로 아시게 될 것이지만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를 도와주는 도도로키 경부가 그렇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이 도도로키는 '여왕벌'에 이르러서야 등장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출연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작품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도도로키 경부는 경시청에서 일하면서 탐정역인 유리 작가를 돕는 역할로 나온다.(물론 그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를 돕는 것과 동일한 역할인 것이다. 또한 전개 방식도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하다. 일단 첫 살해된 시체의 등장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점이 비슷하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은 공연 준비가 한창중인 극장이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예전엔 유명한 호겐 가문의 저택이었으나 전쟁으로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린 집이다. 그렇다면 완전 다르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아니다. 시체가 드러날 때 거기엔 그 시체와 관련있는 사람들과 누군가로 부터 촬영 의뢰를 받고 들어간 세 명의 사진기사들까지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세 명의 사진기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이기도 한 '풍령'처럼 머리만 매달려 있는데도 놀라거나 달아나지 않고 의뢰한 대로 사진을 찍기까지 한다. 아마도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의 연출이 란포의 작품에도 있었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 작품이 바로 '석류' 란 작품이다. '석류'에서도 한 경관이 순찰 도중 버려진 집에서 살해된 시체를 발견하는데 거기엔 시체만 있지 않다. 공교롭게도 한 화가가 시체를 앞에 두고 잔뜩 귀기어린 얼굴로 열심히 그 시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인데 연출되는 방식이 유사하므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어쩌면 이 '석류'에서 아이디어를 빌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러고 보니 이 소설 역시도 '트렌트의 마지막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공공연히 나오는데 그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도 그러하다(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작품은 밝히지 않는다).)

 

  아무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한데 그건 사건의 중심에 음악과 관련된 하나의 단체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제목을 딴 것에서도 감지되듯이 '오페라' 공연단이 나오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앵그리 파이러츠('분노한 해적들')'라는 재즈밴드가 나온다. 머리만 남아 매달려 있는 이는 원래 그 재즈밴드의 리더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 살해당한 나비 부인 역시 그 오페라 공연단의 리더이다. 이 역시 비슷하다. 더구나, 이것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오페라와 재즈 모두 서양으로부터 들어왔을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야 비로소 일본에 널리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페라와 재즈 둘 다 변해버린 일본을 나타내는 단적인 상징이다. 그런 존재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 둘이 내적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에 중요한 캐릭터가 가지는 유사성도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사건의 의뢰자이자 중요한 목격자이며 결국엔 살해당하고 마는 혼조 나오키치와 '나비부인 살인사건'에서 중요한 화자인 나비 부인의 매니저 '쓰찌야 교조'는성격이나 분위기에 있어 그야말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스포일러상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이 둘이 사건과 얽혀있는 관계의 궁극적인 모습마저 참으로 유사하다.

 이 정도로의 열거로 이 둘의 유사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리메이크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려두어야겠다. 그는 이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를 개작하여 '이누가미 일족'으로 만든 바도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리메이크라면 의문이 하나 든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이다.(물론 요코미조 세이시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이후에 긴다이치 코스케가 나오는 '악령도'라는 걸출한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 악령도의 사건을 맡는 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사건을 해결하기 전으로 한다. 즉 악령도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긴 했지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마지막으로 맡은 사건임에는 변함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 마지막에 가장 처음에 나온 '나비 부인 살인사건'을 다시금 새롭게 쓴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쓰여진 시점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바로 전쟁 직후라는 것. 그러니까 전쟁이 몰고 온 거센 시대적 변화의 한 가운데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역시도 시작부터 그 변화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상 위에는 도쿄의 구역 지도(...)가 두 장 놓여있다. 오래된 쪽은 쇼와 28년(1953년)에 발행된 것이고, 최근 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쇼와 48년(1973년)판이다. 두 지도를 놓고 비교해보니 전쟁 전부터 전쟁 후, 그리고 전쟁 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쿄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해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p.7)

 

 한데,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유리 선생은 전에 고지마찌에 살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이내 고지마찌의 집을 남에게 맡긴 다음 자신은 구니다찌로 옮겨간 것이다. 그 때 나는 선생의 너무도 세심한 처사를 비웃기까지 했으나 그후 거듭되는 공습에 비웃었던 나는 오히려 세 번씩이나 피해를 입은 반면 세심했던 유리 선생의 고지마찌 저택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세상은 참으로 심술궂은 모양이다. 세 번씩이나 공습을 당한 탓에 알거지가 되어버리자 전에 비웃었던 일도 있고해서 유리 선생을 만나는 것이 쑥스러웠다.

 

 이렇게 둘의 시작이 비슷하다. 모두 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를 먼저 제시 혹은 암시하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변화'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있어 변화란 그것도 전쟁으로 인한 변화란, 무엇보다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첫 작품' 혼진 살인사건' 때 부터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야기한 변화의 정체를 밝혀내고 거기에 대해 정작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누누히 탐색해 왔다. 다시 말해, 좀 거친 일반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나비부인 살인사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옥문도'에서처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이전까지의 일본을 통째로 뒤바꿔 버리는 변화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그 결단을 위한 사유의 여정들인 셈이었다. 시리즈 대부분 드러난 범죄들은 결단을 강요하는 변화의 현시였으며 그것은 대부분 시리즈의 주요 희생자가 되었던 여성의 신체로 상징되어 나타났다. 이리 되었던 것은 여성이야말로 전쟁으로 인해 가장 급격한 지위의 변화가 일어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듣기에 전후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던 것이 여성들의 간통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많은 남자들이 죽은 탓인데 아무튼 여성들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아 나갔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였고 또한 쟁취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여성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성취 행동은 이제까지 전통적 일본 여성상에 여성들을 가두어 두고 있었던(요코미조 세이시에 나오는 희생자가 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모두 남성 중심 사회 안에서 가두어져 있거나 고립된 존재이다) 일본 남성들을 충격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젖도록 했는데 '혼진 살인사건'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것을 자기 작품의 또 다른 주 동력원으로 삼았다.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 주요 범죄자들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토록 많은 작품에 걸쳐 이루어졌던 여성 살해를 일종의 처형처럼 묘사한다. 즉 전쟁이 야기시킨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익숙한 일본 전통적 질서를 존속시키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처형인 것이다. 그건 '혼진 살인사건'에서 부터 이미 나타났으며 뒤이은 '옥문도'는 그걸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여기엔 정체성의 혼돈이 있었다. 여성들은 이제 달라진 일본의 정체성을 뜻했고, 남성들은 너무나 달라져서 자신이 알던 일본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과거에 버려졌다 현재에 쓸쩍 '끼어든 존재'와 같았고 작품에서 자주 나타났던 사생아의 존재란 다름아닌 여성의 또 다른 변형인 셈이었다. 이러한 사생아들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대부분 기존 질서에 안착한 사람들에게 '그 존재 때문에 우리 가문이 망하면 어쩌나' 식으로 불안과 의혹의 존재가 되는데 이는 정확히 남성들의 불안이 굴절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불안을 애써 '치욕'으로 은폐하는데 그것은 그 사생아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로지 제거하고픈 그들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만적 술책과도 같았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의 도가니에 있었다.

 

 문제는 긴다이치 코스케 역시 일종의 사생아, 그렇게 이식된 존재라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마치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78년에 이른 오늘까지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가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뿐만아니다. 참으로 박정하게도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영원히 거주할 자기 집 한 칸 조차 선물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여전히 얹혀살고 있다. 그렇게 내내 '나는 이식된 존재로소이다'를 그가 머리를 벅벅 긁을 때마다 떨어지는 비듬만큼이나 확실하게 드러내며 평생을 혼자서 군주를 잃은 사무라이처럼 유랑하듯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게 살면 절로 불안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이식된 존재들은 언제 잘려나갈지 모르는 가지가 되어버린 듯이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대항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바 있지만 스스로가 안고 있는 불안이 기껏 찾은 해결책은 또 다시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늘 변화무상한 정체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좋을지 각각 서로 반대편에 두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드러낸다.

 

 나는 나대로 그(긴다이치 코스케)의 공명담을 기록으로 남길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의 뇌세포 속에서 사건이 해결에 가까워졌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는 구제할 길 없는 고독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라고. 분명 그는 사건 그 자체를 해결해도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뿐 아니라 거기에서 또 새로운 드라마, 그가 해결한 사건보다 한층 무서운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p. 12~ 13)

 

 이렇게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시리즈 내내 그 궁극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내려진 모든 해답 뒤엔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의혹이 붙었다. 말하자면 그 의혹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그는 시리즈를 거듭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가지는 의미는 명확해 진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건이라면 결국 여기서의 해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탐색의 최종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요코미조 미스터리의 집대성'이라는 증명 시리즈로 유명한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가 찾아낸 최후의 해답, 그가 전하고픈 최후의 전언이 각인된 작품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 작품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그 사생아성 또는 '이식성(移植性)' 을 그야말로 한껏 드러낸다. 그건 시작에서 부터 나온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시작은 사건의 주 무대가 펼쳐지는 호겐 가문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거기서 우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인물들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게 되는데 그건 모두 '끼어든 존재'라는 것이다. 즉 주요한 등장인물들 중 '적자'가 없다. 양자건, 사생아건 모두 편입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이식(移植)의 존재들' 이다. 이러한 '이식성(移植性)'은 작품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재즈밴드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재즈 역시도 미국으로 부터 이식된 문화이기 때문이다.(또한 스포일러상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후반에 드러나는 중요한 비밀 역시도 이러한 '이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이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물음은 그 전까지와는 다르다. 이것은 이 작품만이 가지는 독특성 때문이다. 그 독특성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 간직된 그 세월의 길이가 다른 작품들하고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의 진정한 해결 하기까지에 걸리는 시간은 무려 '19년 8개월' 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해결에 소여된 누적된 세월의 길이가 이 작품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식된 존재들은 과연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가?' 이다. 그는 왜 이것을 묻는 것인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시작부터 '변화가 가져온 두려움을 어떻게 풀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즉 변화를 긍정시키는데 있어 '이식'이 향후 어떻게 되었나 그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큼 설득력이 있는 것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나 자체로서 변화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데 참조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나온 해가 1978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나왔고 그만큼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가져온 변화 뒤 일본이 걸어온 여정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 모든 관찰의 결과 내린 해답이었고 그건 무엇보다 '실재(real)'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관념 속에서 해답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확신 속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론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시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미련 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이식의 존재들은 '혼진 살인사건'의 세 손가락 사나이에서 부터 내내 있어왔다. 긴다이치 코스케 자신 역시도 '이식의 존재'였다. 대부분 그 이식의 존재들은 기존 사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같은 이식의 존재였던 긴다이치 코스케의 도플갱어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자기 분신의 행동들을 보면서 어떤 게 이식의 존재로서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인지 탐색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 근저에는 언제나 불안이 있고 나이 먹어 갈수록 안정에 대한 희구는 더욱 강력해진다. 머리로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일까 불안해서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 해 시리즈마다 거듭되는 사건들의 정황은 그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투영한 거울인 셈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일종의 사유 실험을 한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정황들이 설령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과거형'이었으므로 그것은 관념적 실험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글로 전해진 간접 증거일 뿐, 눈으로 직접 들여다 본 직접 증거가 아니었다. 그래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늘 의혹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데 이 작품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드디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직접 증거를 가지게 된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 오랜 세월동안 긴다이치가 그것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긴다이치 코스케가 지켜보았던 존재는 '이식된 존재의 완전체'와도 같았다. 그런 존재를 그는 더 이상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가장 커다란 독특성이며 바로 이와 같은 직접 증거로 인해 요코미조 세이시는 거리낌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를 일본에서 유랑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를 아예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더욱 광할한 대륙에서 유랑자로 살려고 내모는 것과도 같이. 과연 그대로 긴다이치 코스케의 절친 작가 Y는 미국에다 백방으로 코스케를 수소문 했으나 찾지 못한다. 그는 이제 포착할 수 없는 존재, 그렇게 내내 기존의 질서로 부터 탈주하는 존재, 즉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민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존재성. 긴다이치 코스케의 육체 자체에 각인되어버린 유목민적 존재성.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변화가 야기한 정체성의 혼돈에 천착한 요코미조 세이시가 그 여정을 집대성하면서 내린 최종 결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처음부터 이러한 이식된 존재성을 가지고 변화를 사유해왔던 것일까? 그건 그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세상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미스터리 소설을 쓰게 한 주요한 동기마저 되었다. 그 모습을 하나의 직접 증거로서 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계획적인 살인이 있었던 시대, 말하자면 선생님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던 시대는 좋은 시대일까요? 아님 나쁜 시대일까요?"

 "그야 좋은 시대지. 계획적인 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증거야. 뭔가 살인이란 것만해도 얼마든지 죽여도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애를 써가며 치밀하게 계획 따위를 세우겠냔 말일세. 사회가 진보됨에 따라 인명을 존중하게 여기는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지. 그리고 인명이 존중되면 될수록 살인에 대한 제재는 더욱 엄격해지고 말일세. 때문에 그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 범인들은 복잡하고도 교묘한 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교묘한 계획적 범죄가 발생할수록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겠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앞으로의 일본은 대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뜻대로 진보적인 시대가 올까요?"

 "그야 오겠지. 이렇게 언제까지나 인명이 값싸게 여겨지는 시대가 계속되었다가는 견딜 수 없을테니 말이야. 앞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시대가 올거야"

 

 바로 이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미스터리 소설을 쓰겠다고 달려간 이유이다. 그가 애초부터 바랐던 세상은 이것이었다. 전쟁을 야기한 거대한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존중받으며 마음껏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게 요코미조 세이시가 바랐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또한 그것은 정확히 모든 영토화로 부터 탈주하여 그 개인의 고유한 주체가 될 것임을 촉구했던 들뢰즈가 '유목민'에 새긴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자신이 염원하는 세상이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와 같은 유목민적 정체성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바로 거기서 자신이 내린 최종 결론이 정말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대한 내밀한 속내가 처음 나왔던 '나비부인 살인사건'을 새롭게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렇게 끝났지만 그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가 지향했던 세상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지금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쉽게 버려지거나 위기에 처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한다. 그의 염원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염원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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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지금까지 읽은 세이시 중에서 뭐가 젤 좋았어요? 아니다, 베스트 3를 말해주세요. 이 책 두 권이라 망설이고 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너무 재밌잖아요. 그걸 아니까 갑자기 헤르메스님은 많이 읽으셨을 것 같고 순위를 매겨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오드득 2013-03-24 23:32   좋아요 0 | URL
앗! 이렇게도 반가운 아이리시스님 댓글에 이제서야 답글을 달게되다니...
더구나 요코미조 세이시에 관한 것인데 빨리 보고 답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제가 요즘 바쁘고 또한 남는 시간은 프라하의 묘지 읽느라 완전 정신없네요 ㅠ ㅠ

아무튼 전 지금까지 나온 긴다이치 시리즈는 다 읽어보았는데요. 그 중에서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렇게 꼽겠습니다^ ^

그 첫번째는 '옥문도'
긴다이치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요코미조 세이시 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사회와 가치관의 변화를 그 특유의 괴기스러움과 잘 버무려 미스터리적으로 잘 형상화내었다고 생각해요.

두번째는 '이누가미 일족'
전형적인 '후더닛'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기도 하죠. 아이리시스님은 영화를 좋아하시니 이치가와 곤이 영화로 만든 작품도 덤으로 추천드리고 싶네요.

세번째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
범인의 의외성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트릭이기도 하구요. (어쩌면 저만 그럴 수 있겠지만^ ^;) 세이시 특유의 괴기스러움이 미스터리와 잘 융합되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요? 아이리시스님의 베스트 3는 과연 어떤 작품일 지 궁금하네요^ ^

아이리시스 2013-03-25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몇 개밖에 안 읽어서 잘 몰라요. 읽는동안 재미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다 읽었을 거라는 짐작은 맞았어요, 신기하게도 그럴 거란 감이 왔거든요. 꼽아주신 베스트3는 읽어보고 싶었던 것들인데 기회가 안닿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적어주신대로 우선순위에 놓고 읽어볼게요. 세 작품 중 1,2번은 제목도 여러 번 들어보고 유명하다는 것도 아는데 제가 읽어본 작품들이 하나도 없다니..헛읽었어..헛읽었어ㅠ.ㅠ

자주자주오세요. 제 댓글에 답글달러..

오드득 2013-03-27 00:11   좋아요 0 | URL
와! 초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리시스님 서재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거든요. 이렇게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제 마구 가서 흔적을 남기겠습니다^ ^

아이리시스님 이나가키 고로가 긴다이치 코스케로 분한 일본 드라마 시리즈가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제가 본 긴다이치 시리즈 드라마 중(뭐,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본 게 별로 없습니다만^ ^;) 가장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혹 보시지 못하셨다면 추천드리고 싶어서요. 거기 이누가미 일족부터 시작해서 악마의 공놀이 노래,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여왕벌 그리고 팔묘촌이 있는데 이것도 보시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옥문도가 없는 건 유감이지만 연출이 좋더군요.^ ^

아이리시스 2013-03-27 20:11   좋아요 0 | URL
긴다이치 시리즈는 종종 보긴 하는데 못본 게 훨씬 많을 거예요. 분기별로 몇 개씩 정해서 감상을 하긴한데 추천해주신 건 못봤어요. 꼭 챙겨볼게요. 책구입보다는 빠를 듯ㅎㅎ 헤르메스님 고마워요.

앗, 근데 저는 제가 댓글 많이 달테니 헤르메스님 잊지 말고 답글을 달아달라!! 시위한건데요..제가 어떻게..부끄럽게..제 서재 와서 댓글 달아요!!! 라고 말하겠어요. 지금 하고 있음..( '') 히히

헤르메스님 서재, 시간도둑이에요!

2013-03-27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