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

 

  '청춘의 증명'은 1976년에 나온 '인간의 증명'으로 시작된 이른바 '증명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다. 

 

 

 

 흔히들 마쓰모토 세이초와 이 작품의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양대 산맥으로 부르곤 하는데 그렇게 같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묶이지만 사실 이 둘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전제하고 하는 말이지만,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하여 되도록 거리를 두고 끝끝내 불편부당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그 대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자신의 견해마저 피력하는 등 작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참여자로서 행세하려 한다. 그렇게 관찰과 참여, 바로 이것이 세이초와 세이이치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세이초의 주인공들은 관찰하고 듣고 해석하는 행위가 주를 이루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주인공들은 생각 보다는 먼저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에 있어서는 명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비중이 크지만 모리무라 세이이치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도 범인을 찾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표면상 그런 역할을 맡는 형사 보다 그 범죄를 둘러싸고 얽혀있는 인간들의 애증 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리무라 세이이치에게 있어서 범죄란 수면 아래 잠자고 있었던 들끓는 인간들의 애증관계를 밖으로 노출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범죄란 거짓과 탐욕 그리고 비겁함을 숨기고 있었던 개인들의 내면과 그것들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던 사회의 숨겨진 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들은 일종의 '재판장'과도 같다. 나타난 범죄가 고발하는 피의자들이 서로 자신의 혐의 없음을 증명하고 변호하느라 들끓고 있는 재판장인 것이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제목에 '증명'이라고 쓴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범죄가 '당신이 과연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고발하면 피의자는 거기에 대해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한다. 이것이 '인간의 증명'이다. 이번엔 범죄가 '당신에게 과연 청춘은 있었는가?' 고발한다. 거기에 대해 피의자가  청춘에 대해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의 '청춘의 증명'인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증명3부작은 그렇게 범죄가 부정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증명에도 어디까지나 조건은 있다. 진정한 증명이 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전작 '인간의 증명'에서 제목의 이 말은 딱 한 부분에만 등장하는데 그 때가 바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행동으로 증명했던 부분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세이초의 소설들이 다소 건조하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뜨겁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자리 선점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다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더 나아가서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마저도 영향을 미치는데,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어디까지나 객관적 관찰자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마츠모토 세이초는 사회가 만들어버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작품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왠지 동시대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남의 일처럼 내버려둘 수 없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행동가적인 면모를 간직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먼저 사회 이곳저곳에 양산된 여러 개인들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그 아픔과 비극의 태피스트리를 통하여 거꾸로 사회의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사회를 비판하는 형식에 있어 마츠모토 세이초가 연역적이라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귀납적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마도 이런 차이,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 참여자로서 그 고통과 대안의 형성마저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의지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에 대한 마쓰모토 세이초와 구별되는 이러한 차별적 접근이 같은 사회파이지만 선배인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와는 또 다른 산맥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게 아닐까 싶다.

 

 

 

 

 

 2.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네 개의 청춘...

 

 

 이러한 모리우라 세이이치의 독특성이 가장 잘 드러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1977년에 나온 '청춘의 증명'이다. 파노라마식으로 인물을 배열하는 것도 더욱 확장되었고 2차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 같은 국민들마저 파멸로 이끌어 갔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 역시 더욱 통렬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그 어떤 작품보다 전면적으로 드러난 이 작품에서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하필이면 '청춘'이란 주제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청춘'이 상징하는 미래 역시 어떻게 물들여 버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볼 때 여기엔 모두 네 개의 청춘이 나온다.

 

 

 

 전범국가로써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란 측면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먼저 일본의 패망이 더욱 짙어지는 시기에 청춘을 보낸 '야부키 데이스케'. 다음으로,  군부가 이기적 욕망으로 일으킨 전쟁에 그저 가해질 위해가 두려워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편승해 버렸고 내내 자신 또한 그 가담자 라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사오카 미치타로' 그리고 전범 국가의 기억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사오카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면서 더욱 커다란 이기적 욕망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망각으로 더 많은 과오를 쌓아가는 청춘을 대변하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의 아들, '가사오카 도키야'. 마지막으로 패전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태의 악습과 부조리를 답습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 대해 냉소하지만 결국 행동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냉소를 표현할 뿐인 청춘을 대변하는 야부키 데이스케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 이렇게 넷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굳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청춘을 이렇게 병렬적으로 놓고 보여주는 것은 전쟁에 뛰어들었던 유일한 청춘인 '야부키 데이스케'가 묘사했던 일본과 그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그는 소설에서 유일한 '십대'이기도 하다.)가 살고 있는 일본이 과연 다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는 소설에서 오로지 이 부자(父子)간의 대화만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입증되는데 자꾸만 일탈로 엇나가는 야부키 에이지에게 아버지 야부키 데이스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전쟁에 끌려 갔었다. 전쟁에 끌려가면 살아 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고작 이십년 밖에 되지 않는 인생이었어. 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았어. 죽음만을 짊어진 청춘이었다."(p.231)

 

 그 전에 야부키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만큼 고민이 많겠지. 우리 세대는 그런 고민은 전혀 없었잖. 오래 살아봐야 스무 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스무 살이 되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했지. 그런 사고가 머리에 박혀 있었으니 고민할 틈도 방황할 여유도 없었지.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생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분명했어. 제 인생인데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지."(p.223)

 

 이제 막 피어나려는 청춘에게 죽음만을 짊어주었던 전범국가로서의 일본. 하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청춘들이 믿었던 대로 거창한 이념에 있지 않았다. 결국엔 오로지 군부 자신들만의 권력욕과 탐욕에 있었음이 야부키의 전우(戰友)였던 아키토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몸 바칠 수 있어. 하지만 요즘 특공대(이 특공대가 바로 가미가제 특공대다. 야부키도 바로 이 특공대 소속이었다.)는 군부의 위안거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우리는 인간으로 죽는 게 아니라 일개 병기로서 던져져 죽는거야(p.258)"라고 곧잘 말했던 아키토가 자살 공격에 나섰지만 내내 기체 결함을 이유로 돌아오자 이를 의심했던 군부는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그리했던 것임을 밝혀내고 아키토의 약혼자 스미에를 조사랍시고 불러내어 자신들이 보는데서 비인격적으로 발가벗겨서 결국 그 성적 수치심으로 자살하게 만든다. 그리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키토가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로 복수를 위해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해 오자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저격 명령을 내려 버린다. 이렇게 스미에에 대한 군부의 저열한 인면수심적 태도와 아키토의 저격 명령에서 나타난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고 보자는 치졸한 모습을 통해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성격을 단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어리석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목적을 위해 갓 스물의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본을 또한 규탄하는 것이다.

 

 

 3. 통렬한 속죄의 요구...

 

 하지만 모리우라 세이이치에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건 과거에 그토록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통렬한 자기 비판과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전쟁이 아로새긴 아픔을 그토록 절절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그저 한국 전쟁이라는 경제적 특수가 가져다 준 과실에만 취한 나머지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고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소설의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그러한 무비판적 편승이 어떤 미래가 가져왔는가? 그것을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특히 야부키 에이지의 눈으로 드러낸다.

 

 일류의 덧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동안 계속될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낙오된 것이다. 에이지는 부모님의 기부금으로 도내의 이류 사립 고등학교에 2차 모집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뒤쳐진 것을 만회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친구들은 낙제생으로 '어차피 우리는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어딜 가도 성적순으로 처음부터 선을 그어놓으니 열등감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교사들도 낙제생들을 격려해 새 출발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열정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학원이나 과외 아르바이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p.236 ~ 137)

 

  반성없는 과거가 가져온 것은 이런 것이었다.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던 그 때의 선은 여전히 남아 이제는 학력이란 이름으로 청춘들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 때의 청춘들이 신체적으로 죽었다면 지금의 청춘들은 낙제생이란 라벨이 붙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있었다. 그 때 비국민 스미에를 바라보았던 시선 그대로 낙제생으로 라벨 붙여진 오늘의 청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국민이 아닌 자들이 그대로 사물이었듯이 오늘의 청춘들 또한 한 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오늘의 일본에서 그대로 겹쳐지는 황당한 이상에 집착해 파멸로 향해가던 그 때의 일본을 본다. 그리고 그 오만한 독선과 잘못된 망상 아래 점점 주검이 되어가는 청춘들을 양산했던 그 때와 지금의 일본이 같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과거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속죄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바로 이러한 속죄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이 '청춘의 증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한 때의 잘못을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오카 미치타로에 대한 '비겁하다'는 그의 연인 아사코의 통렬한 비판은 사실 제대로 된 속죄없이 전범국가임을 오로지 망각하려고만 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아사코조차 나중에 보여주는 모습처럼 정작 비겁하다고 비판하면서도 말로만 그리할 뿐 아무런 실제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과거의 과오를 반복할 뿐이다. 참다운 속죄는 어디까지나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에게 바로 그런 속죄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사오카에게 평생 속죄의 죄책을 짊어지도록 만드는 원흉인 구리야마는 결국 일본이 그런 정도의 속죄를 하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구리야마는 야부키의 전우였던 아키토의 스미에를 자살로 몰고간 장본인기도 하다. 야부키에게 비극을 주었던 구리야마가 다시금 가사오카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이 구리야마는 전범이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같은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일깨우는 존재가 되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구걸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또 다른 한 청춘의 삶마저 일그러지게 만든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병원균과도 같다. 곳곳마다 출몰하여 타인의 인생에 짙은 어둠의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비극은 내내 반복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그렇게 구리야마는 왜 속죄가 일본 스스로에게도 구원이 되는지 거꾸로 잘 보여주는 존재다. 그런 존재는 구리야마뿐만이 아니다. 가사오카의 처 도키코나 아사야마 유미코의 남편 기다 준이치도 과거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와 망각에의 강요가 결국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될 지 잘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사실 소설 '청춘의 증명'에서 인물들이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오직 단 한 가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 그것이다. 

 

 

 이렇게 실천에 기반한 진실된 속죄를 그토록 요구하는 '청춘의 증명은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새로이 출범하는 아베 정권은 전범국가의 반성 속에서 규정되어진 자위대는 오로지 자국이 침범받았을 경우에만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전쟁 포기 조항인 일본 헌법 9조와 전범들의 위폐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부터 들고 나왔다. 이는 다시금 저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던 시대로 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단 한 번도 진정한 속죄가 없었던 일본이 그대로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음은 결국 행동이 수반된 속죄가 없이는 과거의 악업을 반복할 뿐이다라는 '청춘의 증명'이 보여준 그대로가 아닌가 말이다. 어두운 과거가 교훈을 배울만한 역사로 남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속죄가 이루어졌을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 일본이나 또 우리나라에서 보듯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이 현재에 다시금 생생히 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어둔 과거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 반복을 원하는 자들은 구리야마처럼 오로지 그 어둔 과거 속에서 이권을 얻을 수 있었던 자들 뿐이다. 그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청춘의 증명'을 통해 성찰적 무장(武裝)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덧붙여,

 

 '청춘의 증명'은 이번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때문에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여기 적어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중에 '비트'가 있다. 청춘만화의 대표작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인데 처음 읽었을 때 인상이 강하게 남아 아직도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남주인공이 여 주인공에게 경매 노예로 팔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아르바이트 비를 받아가며 해 주는 것인데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고 그 결과와 거기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억해 오는 것이었다. 남주인공이 그렇게 보고 온 것을 여주인공에게 들려주면 그녀는 마치 자기가 그걸 진짜 가서 본 것인양 자기의 입시 경쟁자들에게 말하여 별로 노력을 안한다는 인상을 주어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는데 별다른 표현 없이도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느끼게 해 주어 참 대단한 에피소드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춘의 증명'을 보니 그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소설 속 유일한 십대인 야뷰키 에이지가 같은 반의 수재를 위해 그와 똑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것이 77년이니 90년대에 나온 '비트'가 이를 표절한 것은 분명하다. 나름 아주 인상깊었던 장면이 이렇게 표절의 산물이라니 씁쓸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은 표절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더욱 그 뒷맛이 좋지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3-01-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무라의 증명 3부작의 인간과 야성은 사두었는데 읽지 못했어요. 어쩌면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안 읽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재밌을 것 같은데 한국 소설 읽기도 벅차요.
어, 그러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년엔 행복하고 힘찬 일만 가득하길. 헤르메스님 만나고 서로 글 읽고 댓글 달고 인사 나누고 교감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도 쭉... 들를게요~ 항상 반가이 맞이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ㅎㅎ

ICE-9 2013-01-05 23: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라면 정말 한국 소설 읽기만도 벅찰 것 같아요. 아참 나도 이번에 소이진님이 추천한 한강 읽고 있어요. 리뷰대회 도서이기도 해서 덥썩 들게 되더라구요^ ^
소이진님도 2013년 정말 뜻깊은 한 해가 되길 빌게요. 추구하는 문학에서도 원하는만큼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라겠습니다. 저의 VIP이신 소이진님. 저 역시도 올해 더 많은 교감을 위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