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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미치오 슈스케 소설 속 심연엔 딜레마가 있다.
그건 개미지옥과 같다.
삐져나오려 버둥거릴수록 오히려 더 깊이 끌려들어가기만 할 뿐인...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딜레마란 삶이란 것 자체에서 오는 딜레마다.
사람은 자기를 구속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원하는 한 편으로 막상 자유함으로 한 껏 열려진 세상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 지 몰라 두려워서 다시금 껍질 속에 웅크려 있기를 원한다. 그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정작 떠나려고 하면 그 익숙해진 현실이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온다. 삶이 가진 영원한 딜레마다. 슈스케의 인물들은 바로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달과 게'에 나왔던 '소라게'는 그야말로 슈스케 속 인물들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다.
늘 벗어나고 싶어하는 껍질을 삶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언제든 거기로 도피할 수 있도록 자기 몸의 한 부분으로 삼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존재들이 바로 슈스케 속 인물들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처가, 아픔이 현존하고 있어 내내 통증을 호소하여 온다면...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구체의 뱀' 이후 슈스케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란 걸, 나는 이번에 나온 '물의 관' 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았던 '소라게'를 라이터 불로 지지면서, 그렇게 유대교에서 자신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켜 불태움으로써 용서받았던 대속의 제의와도 같은 유희를 통해 현실의 상처를 때때로 지워버렸던 '달과 게'에서의 아이들의 놀이는 '구체의 뱀'에 이르러서는 '스노돔' 안에 간직해 두고서는 그대로 결빙시켜 버리더니 이번 '물의 관'에 이르러서는 이제 '수몰'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단 그렇게 슈스케가 지울 수 없고 현실 속에서 내내 반복되는 고통에 대한 첫 반응은 '의도적 망각'을 가져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 한 부분에 스노돔을 만들어라. 상처를 그 안에 두고 그대로 결빙시켜 버려라.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상처가 깃들어 있다면 그걸 그대로 수몰시켜 버려라. 저 깊은 심연 속에서 시간이라는 해초들이 무성히 자라나 지워버릴 수 있게... 이런 주문을 독자들의 귓가에 읊고 있는 것이나 같다. 삶은 반복된다. 주인공 할머니의 삶은 그대로 주인공이 아는 여자 아이의 삶으로 다시 재생된다. 그 힘겨웠던 삶 속에서 소라게처럼 살아왔던 자신을 나타내는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도롱이'는 할머니에게서 여자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이건 주인공에게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현상이 된다. 고통은 그치지 않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서 반복된다. 그 고통 속에서 삶이라는 것을 지속하려면 할머니가 그러했듯 '의도적 망각'이 필요하다. 프로이드도 말하지 않았던가! 무의식이 바라는 욕망은 현실 사회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의식인 '이드'는 그것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위장 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꿈의 형상이라고. '의도적 망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가 그랬듯 자기 기만의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어디 진실만 가지고 살아지는 법이던가? 때로 그것이 기만이든 아니든 거짓이 필요하다. 계속 살기 위해 스스로 속여야만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슈스케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찾아왔다. 그래서 의도적 망각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여자 아이 아버지가 들려준 어둔 바닷속 이야기처럼 혹은 주인공이 문화제 때 만든 유령의 집처럼 까맣게 어둡기만 한 삶을 오로지 작은 랜턴 불빛 하나만 의지한 채 걸어나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슈스케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무엇보다 삶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한 깃듦'에 다름아니다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구체의 뱀'에서 주인공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한다. '물의 관'에서 주인공은 '여관 집' 아들이다. 그 자각이 이러한 설정을 가져왔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모든 삶이란 바람이 쉬어가는 곳처럼 우연적 거처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유를 원하는 한 편 두려움에 젓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린 사람과도 같이. 저려오는 팔의 아픔 때문에 당장이라도 놓아버리고 자유롭고 싶은 반면 눈에 보이는 저 까마득한 높이를 질주할 추락이 두려워 더욱 매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거기서 아픔은 늘 현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삶은 단순히 그 아픔을 지우기 위한 수동적인 것이 되고 만다. 콧두레에 코를 꾄 소처럼 상처와 아픔에 삶이 내내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슈스케는 망각을 요청한다. 무엇을 망각해야 하나? 저려오는 이 팔의 아픔인가? 아니면 내가 추락할 저 높이인가? 결론은 모두 다이다.
아픔의 현존은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진정한 선택은 늘 제대로 사유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아픔을 유보한다. 거리를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슈스케는 그렇게 망각을 삶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껴 안는다. 그리하여 '달과 게'에서는 보이지 않게 망각 속으로 흩어졌던 상처들이 이제는 '구체의 뱀'에선 스노돔으로, '물의 관'에서는 수몰된 것으로 그렇게 언제고 내킬 때마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건 변화이다. 깃든 상처란 지울 수 없다는 체념이자 기왕지사 삶이 우연적이며 때문에 상처로 부터 영원히 달아날 길이 없다면 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망각을 안고 보듬어갈 수 밖에 없다는 고통스런 승인이다. 하지만 그게 삶이다. 삶은 우연적이고 문자그대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망만큼이나 희망 역시 열려있기 때문에 도박과도 같지만 견뎌나가야 한다. 어차피 삶이란 내기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결과란 죽음이 도래했을 때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계속해서 견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지가 될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붙잡아야 한다. '달과 게'에서의 대속적인 제의든 '구체의 뱀'이나 '물의 관'에서의 망각이든 무엇이든...
이것은 슈스케의 선동인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연민이다. 그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아파하지만 그걸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약한 존재인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자라는 어떤 흐느낌이 느껴진다. 그 절박한 호소가 와 닿는다. 그리고 그 호소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슈스케가 성장하고 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