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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ㅣ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55세의 나이에 뒤늦게 데뷔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는 정말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이 올 여름의 발견작이다
옮긴이의 말을 빼고 장장 528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그야말로 열흘 굶은 사람이 밥을 삼키듯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 소설은 정말 두 가지가 매력적이다. 첫째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마구 휘몰아쳐가는 팔색조처럼 변화무상한 플롯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지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해가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불현듯이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희생자인가 싶으면 가해자이고 가해지인가 싶으면 또 피해자이다. 때문에 연민을 느끼기가 무섭게 분노를 느끼고 또 분노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타까움에 마구 젖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배설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속에서 그저 따라잡기에 급급할 뿐이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는 객관화가 가능한 음미의 여유가 있지만 '알렉스'에게는 보여지는 이야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저 소화시키는 것만 하는데도 벅차다. 우리는 '이 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여유조차 없다. 그저 만날 뿐이다. 이해불가능한 대상 그대로 대면할 뿐이다. 마치 작품속에서 알렉스와 같이 있자마자 그저 욕정말고는 다른 건 느낄 수 없었던 펠릭스와도 같다. 알렉스란 타자는 날 '이해하겠어? 못 이해하겠어?'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여기서 끝까지 볼거야? 아님, 다른 데로 갈거야?'
W A R N I N 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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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부터 스포일러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이왕이면 소설을 읽고 아래를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소설이 초반부터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유출시킬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이 이야기에 동참할 것인가? 아님, 내버려두고 다른 곳을 갈 것인가?
'알렉스'의 건너편에서 작가 르메트르는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 이 말은 내게 이 작품은 그저 재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것은 내게 저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이 예수 이야기를 두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불트만은 예수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칸트를 빌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하냐고. 예수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전설이냐가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한다는 데 있다. 윤리적 결단말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나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그냥 하던 대로 살 것인가?' 이것이다. 예수가 진정 실존한다면 바로 우리의 결단 위에서이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기억과 인상이 뒤범벅이 된 말이니만큼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의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난 이 책에서 불트만의 목소리를 빌린 르메트르의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바로 이 공감의 여부가 소설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게 그 두 번째의 매력을 가진다. 즉, 프랑스의 대표적인 형사 '매그레에로 복귀'가 가져다 주는 매력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정말 매그레적이다. 당신이 매그레를 읽어보았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읽을 때 당신 역시 떠올릴 것이다. 도대체 정말 정의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냥 법대로 하는 게 정의로운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매그레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매그레가 다른 탐정이나 형사들과 구별되는 그 만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그는 법보다 사람을 더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 사람에 따라 적용해야 할 법도 적용하지 않고 적용하지 않아야 되는 법도 적용한다. 이 소설의 형사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카미유도 오로지 사람을 위해 적용할 수 없었던 법을 사실은 교묘한 수법을 쓰면서까지 과감히 적용해버린다. 문제는 그 사람이 연쇄 살인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살인마에게 충분히 동정이 갈 만한 사연이 있었고 살인 역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펼쳐진 엽기적인 살인 모습은 쉽게 그에게로 마음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카미유는 그러한 행위를 취하는 것이다. 공감한다면 이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어리둥절한 가운데 페이지를 넘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소설이 압도적인 재미와 그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언하지만 이 소설은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카미유 시리즈 첫 권부터 제대로 소개되었도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바로 그 가치란 것이 카미유와 알렉스가 서로 아무리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동병상련의 관계라는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계의 맥락을 헤아리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데 아무래도 그것을 위해서는 첫 권부터 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소설도 어느 정도 풀어놓고 있기는 하다. 카미유와 알렉스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카미유가 결국 알렉스의 삶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미유는 유명한 여류화가이기도 한 자신의 어머니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지 않으려 든다. 사람들은 그런 카미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145CM의 단구이기도 하다. 그 작은 키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편입되지 못하고 경계 위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그 작은 키가 늘 뇌리에 새겨져 있어 카미유 스스로 경계 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하지만 그런 생활은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건 무엇보다도 어머니 때문이다.
우선 그는 키가 14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의자에 앉기만 하면 두 다리가 지면에서 20센티미터 이상 떠올라 대롱거리게 되는 단구의 사내이다. 이러한 그의 신체 조건은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일생을 마친 모친이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댄 데서 비롯된 영양 장애성 발육부진의 결과이다. (P. 532.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렇게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일 보다 자신의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미유는 늘 그림만 그리는 어머니만 보았다. 한 번도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카미유는 자신의 이 고독, 이 홀로 있음이 어린 시절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기울여주지 않았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조차도 자기 일에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누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그녀의 그림을 남김없이 처분함으로써 표현하려 한다.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가정에서 조차 내버려져 있음. 카미유가 알렉스의 삶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 역시 자기처럼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 그래서 카미유는 소문난 민완형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 소설에서만큼은 무능하게 비쳐진다. 카미유가 싫어하는 예심판사는 대놓고 그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지 의심스럽다라고까지 말한다. 전작과는 다른 그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알렉스와 자기와의 비슷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카미유와 알렉스 사이의 유사성은 르메트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알렉스'의 삶을 읽으면서 떠올린 소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다.'
알렉스와 보바리(그리고 카미유)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녀들이 속한 가정 자체가 그녀들을 가두는 새장이요 억죄는 굴레라는 것이다. 보바리와 알렉스는 모두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가정이라는 감옥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 자유로움을 그녀들은 책 읽기를 통해 표현한다. 보바리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듯이 알렉스 역시 정말 많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결국 보바리는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로움을 구하기 위해 저질렀던 불륜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녀를 파멸시켜 버린다.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다. 보바리의 불륜과 알렉스의 살인은 모두 그 원죄가 되는 대상을 지워버리려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르메트르는 교묘하게도 알렉스의 살인이 먼저 대상을 유혹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러한 공통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게 보바리의 불륜과 마찬가지였던 알렉스의 살인 역시 결국 그녀 자신을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된다.
보바리는 말하자면 알렉스와 카미유의 원본과도 같은 존재다. 개인적으로 바로 여기에 르메트르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주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바리를 읽어보면 알게되겠지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히스테리의 여자다. 그는 조금도 현실에 안주할 줄을 모른다. 늘 책을 통해 발견해낸 세상을 자기가 몸소 직접 느껴보고자 한다. 더 넓고 더 높은 곳을 언제나 꿈꾸기에 그녀는 현실에서 늘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런데 이 히스테리는 알렉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녀는 살인을 하면서도 늘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에 젖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형적인 사이코 패스는 아니다. 그녀는 늘 외로워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한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발작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 이건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관계를 맺는데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탐문중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이 필요할 때는 동료 형사가 도맡는다. 그는 악담과 빈정거림 그리고 위협의 명수이다. 그건 일종의 히스테리적 반응이다.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 부리는 성질 또한 히스테리의 일종이지 않은가. 보바리와 알렉스 그리고 카미유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히스테리이다.
르메트르는 고의적으로 이 히스테리를 주요한 정서로 부각시킨다.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살인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히스테리의 징후와 또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르메트르는 히스테리를 가져오는 것인가?
그건 르메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이 히스테리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했었다. 히스테리는 무의식(이 무의식은(특히 라캉에게 있어) 그야말로 '타자' 자체를 의미한다.)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무의식은 도착증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을 구축하는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그것을 전복시키며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히스테리는 굳건한 체제를 아래에서 부터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규범화된 사회에 지속적인 생채기를 일으키며 정상성이라는 것에 계속 "정말?"이라며 의혹을 제기한다. 히스테리란 현실이라는 것이 교묘한 위장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하며 그렇게 틈집을 내고 헤집어서 속에 감추인 이면을 노출시킨다. 결정적으로 히스테리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르메트르는 소설 '알렉스'에게 '마담 보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히스테리를 전면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카미유와 알렉스에게 고통만을 안겼던 지배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의 표본과 같은 '가정'을 뒤흔들기 위해. 바로 그 '가정'이 카미유의 엄마가 그랬고, 알렉스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 처럼 도착증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밝혀 결국 타자를 돌아보지 않음이 이 모든 비극을 가져온 이유임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듯 카미유는 정상적인 사회의 견지에서 보자면 예외적인 방법으로 최종 해결을 가져온다. 그러고보면 알렉스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도 절대적 타자를 소설 속으로 가져오려는 르메트르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알렉스는 엔터테인먼트로도 더없이 훌륭하지만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마담 보바리'가 근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을 가져왔듯이 '알렉스'는 지금 현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들을 가져온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더없는 패권적 지위를 누리며 지금까지 군림해온 자본주의가 침몰하는 타이타닉 처럼 좌초되고 있는 요즘 자본주의가 가장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게 차례로 히스테리적 경련을 선사하여 굳건한 포장을 허물고 그 이면의 속내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알렉스'는 보다 징후적이다. 2011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유로 위기가 극심해지고 여기저기서 이민자들의 폭동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알렉스'의 살인은 어쩌면 그 과정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짜 동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도 그렇고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도 그렇고 '흔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네델란드와 프랑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출간된 소설들이 나란히 흔들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 소설들이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토록 많은 대중들의 호응이 그들의 무의식적 바람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어쩌면 이후로 터져나오게 될 거대한 흐름의 첫 표출인 것은 아닐까? 어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첫 태동과도 같은 작품은 아닐까? 내게는 이게 보다 더 흥미롭게 보인다. 결국 롤링 스톤즈의 노래 가사처럼 시간이 가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