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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내 생각에 분명 콜럼부스는 지옥에 갔을 것 같다. 

  그가 순전히 개인적 욕망으로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는 바람에 원래 거기 살던 인디언들이 대지를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가해진 엄청난 박해와 학살을 초래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물론 그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었겠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작 발견해 버린 것은 그였고 그래서 인생이란 가혹한 면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만일 내가 죽어서 어딘가에서 눈을 떴는데 거기서 콜럼부스와 그랜트 대통령을 보게 된다면 그 곳은 분명 지옥이리라.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부제 : 인디언제국 멸망사)'를 읽고 나서 98년에 나온 짐 퍼거슨의 데뷔작 '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비록 역사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일지도. 소설의 가상적 사건은 명백히 실제의 비극을 지우고 있으니까(마지막에 설령 그러한 비극이 나오고 있다고 해도 많은 부분 진행되는 그 시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실제의 비극을 지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을 있는 것 처럼 해서 쓰는 소설을 흔히들 '대체 소설'이라고 부른다. 짐 퍼거슨의 이 소설도 아마 그러한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제목의 '천명의 백인 신부'란 1874년 그랜트 대통령을 만나러 위싱턴까지 찾아갔던 북부 샤이엔족의 족장 '리틀 울프'가 백인과 인디언의 평화적 화합을 위하여 천 명의 백인 여자들을 북부 샤이엔족과 혼인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정부 주도로 샤이엔족과 결혼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던 신부들을 말한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이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1874년 그 때 북부샤이엔족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감히 언감생심 미국 대통령에게 요구할 수 있기는 커녕 살던 곳에서 마저 쫓겨나 그야말로 고통과 불행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백인들과의 약속을 믿었던 북부 샤이엔족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그냥 이주할 땅이나 한 번 보고 오라는 꼬드김에 넘어가 남부로 이동했다가 끔찍한 굶주림에 직면해야 했다. 거기엔 들소 같은 짐승은 물론 경작할 땅마저 존재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1874년의 북부샤이엔족의 '리틀울프(소설의 리틀울프는 실존인물이다.)'는 기아와 질병으로 속절없이 쓰러지는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위하여 내내 그 지역에 와 있는 미 주재관에게 여기에 온 것은 그저 둘러보기 위해서였으니 다시 북부로 가게 해달라고 평화적으로 요청했으나  모처럼 이토록 손쉽게 북북 샤이엔족을 남부로 쫓아낼 수 있었던 미국 정부는 그 요청을 들어줄리 만무했고 결국 더이상 극심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부족민들의 죽음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리틀 울프와 그의 형 무딘칼은 자기들의 힘으로 다시 북부로 돌아가기를 감행한 끝에 그만 대부분의 샤이엔족들이 백인들에게 학살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음은 디 브라운의 책에도  나오는 당시 상황에 대한 '리틀 울프'의 고백이다. 

  우리는 남쪽으로 가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병으로 죽어갔다. 그리운 마음은 저절로 탯줄을 묻은 고향 쪽으로 향했다. 남은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원한 것은 몸뚱이 하나 누일 조그만 땅 한 뙈기였다. 우리는 천막을 세워 두고 그냥 밤에 도망해 나왔다. 군대가 뒤쫓아왔다. 나는 말을 타고 나가 군인들에게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북쪽으로 가려는 것 뿐이었다. 우리를 내버려두었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무차별 사격이었다. 그 뒤에 우리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먼저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나의 형 무딘 칼은 반수가 되는 지파를 데리고 로빈슨 요새에 투향했다. ... 그들은 총을 다 내주었는데 백인들은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 북부 샤이엔족의 오쿰가치(리틀 울프) -

                                               디 브라운,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 (p. 527~ 528) 

 

  소설에도 나오지만 샤이엔족의 말은 우리말과 어순이 같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우랄 알타이어족 인 것이다. 그렇게 몽고 대륙에 거주하다 러시아만과 알래스카가 서로 이어져 있을 당시 그리로 건너가 아메리카에 정착하여 지금의 인디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심정적으로 인디어에게 더 동화가 된다. 그들의 학살 이야기를 읽으면 미국의 모든 백인들이야말로 더없이 사악한 인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미대륙 개척사는 그야말로 학살과 약탈의 역사에 다름아니었다. 당시의 모든 식민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프론티어 정신으로 추앙하고 본질은 그들의 탐욕이었음에도 문명으로 미화한다. 그저 자기가 난 땅을 어머니 처럼 받들고 욕심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이교도라고 정죄하고 미개하다고 경멸한다. 이건 폭력을 행하는 자들이 늘 그렇듯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 기만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속세의 욕망으로 부터 해방시켜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면서 거기 나는 금 때문에 그들의 땅을 뺏고 미개한 자들이라 폭력밖에는 쓸 줄 모르는 그들이니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자와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더 거센 폭력을 자행하는 모순을 어떻게 그들은 설명할 것인가. 한 마디로 미국의 백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선교와 문명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자가 도덕적 정당성마저 갖겠다며 달려드는 뻔뻔함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때 그들이 인디언을 추방하고 학살하며 부르짖었던 선교와 문명화의 이데올로기가 현재 미국이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있는 그저 무한 탐욕을 아름답게 부를 뿐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과연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미 알고 있는 비극의 역사를 '만일'이라는 가정으로 다시금 재현해 놓은 작품을 읽는 일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읽는 만큼이나 몰입이 안되는 일이다. 그럴 경우 나 같은 독자는 그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 보다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구성을 취하는 것일까를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 이면에 깔린 작가의 '계산'을 헤아리는 것이다. 사실 짐 퍼거슨의 이 소설은 그 보다 앞서서 영화로 만들어진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의 춤을'과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비슷하다. 모두 적대시 되었던 그 문화의 입장에서 지금 중심이 되고 있는 문화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그 경우 주인공은 물론 나뉘어진 문명의 경계를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타자에게 열린 자여야 한다. 주인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졌을 뿐이지 두 작품 모두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는 늑대에게 기꺼이 모닥불의 한 자리를 내어주고(인디언에게 '늑대'란 신성시 되는 동물이다. 아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히칸'은 인디언 말로 '늑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만큼 늑대란 바로 인디언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메이 도드'는 성에 있어서 자유롭다.(초창기 기독교의 규율이 엄격하게 지배하던 미국에서 그러한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분명 죄악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그녀는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데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녀가 자유분방해서가 아니고 그녀의 계급적 위치에서는 절대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그 자체가 사회가 인위적으로 설정해 놓은 경계들을 뛰어넘는 상징이 된다.) 결국 이렇게 타자의 문화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는 주인공들은 타자의 문화가 주는 매력을 알게 되고 원래 자신이 속했던 문화가 오히려 더 경멸당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도 동일하다. 그리고 최후엔 미국 백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어쩌면 미국 역사에 있어 구원이 되었을 수도 있을 문화가 속절없이 퇴조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쓸쓸함도 비슷하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케빈 코스트너를 통하여 '천명의 백인 신부'를 사전 체험한 바 있다. 그런데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가 나왔던 그 때도 한 편에선 '진실한 참회는 없는 가해자의 동정적이며 위선적인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었다. 그러면 짐 퍼거슨은?  케빈 코스트너는 그래도 원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다. 영화의 원작은 실제 그 같은 경험을 했었던 한 군인의 수기였다. 하지만 짐 퍼거슨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건을 가져온다. 왜? 오로지 그 타자의 문화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뭔가 또 다른 것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 소설이 후일담의 성격을 띤다는 게 흥미롭다. 

  소설엔 어떻게 해서 메이 도드의 이야기가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가 프롤로그처럼 붙어있다. 한 후손이 자신의 조상중에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서 인디언과 결혼까지 한  그 광기로 인해 내내 어린시절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던 '메이 도드'에 대해서 어느 날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각종 자료를 조사하고 그 관련 사실들을 추적하다가 결국 샤이엔족 보호구역에서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일기를 찾게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렇게 해서 발견된 그녀의 일기, 즉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역사가 발굴된 기록에 의해 부활한다. 주인공 메리 도드를 비롯하여 죽음으로써 영원히 망각 속으로 묻혀졌던 그 때 그녀와 함께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 위해 떠났던 모든 여성들 또한 도드의 일기 덕분에 생생한 생명을 되찾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낸다. 짐 퍼거슨은 그렇게 기록을 통하여 그녀들을 재현해낸다. 이러한 구성은 허구의 사건을 독자들에게 마치 실제 있었던 일로 여기게끔 하기 위한 단순한 문학적 장치일 뿐인 것일까? 그렇다면 짐 퍼거슨이 노렸던 것은 백인 여성이 기꺼이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는, 그것이 분명 유발할 독자들의 선정적 관심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짐 퍼거슨이 어떻게 그런 내용이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하리라 계산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의 춤을'을 경험한 바 있는데. 혹 주체가 '백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내다 본 것인가? 그것도 연애가 아니라 아예 '신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 외 다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그야말로 짐 퍼거슨은 사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가부장적 가치관에 여전히 함몰된 자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 그런 것으로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신부가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종속성'의 느낌 때문일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소설 속의 메리 도드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토록 자유 분방하고 흑인인 피위에게도 대등하게 대하는 등 사회의 상식을 벗어나고 한없이 그 외부로 열려진 존재이나 어찌된 일인지 정말 그러한 성향의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남성에게 스스로를 자꾸만 종속시키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성에의 강한 집착이 그것을 드러낸다. 사실 그녀가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면 정신병원을 나갈 수 있고 그렇게 인디언과 2년만 살면 자유롭게 이혼이 가능해 그 뒤에 그녀의 두 아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녀 자신을 정신병원에 감금하게 만든 열악한 계급의 남편은 이미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현명하게도 짐 퍼거슨은 애초부터 그를 생사불명의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짐 퍼거슨은 소설 전체에 걸쳐서 모성을 강조한다. 메리 도드만이 아니라 그 인디언 부족에 온 모든 여성들마저 그렇다. 거기다 아내로서의 정절도 강조한다. 거기에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근처의 부족에게 납치당해 윤간을 당할 처지가 되자 같이 왔던 백인 여성 세라가 거기에 맞서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 더구나 술에 의한 부작용도 강조된다. 위스키 하나로 인디언 부족 전체가 미치광이 집단으로 돌변한다. 솔직히 과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묘해 보이는 설정이다. 물론 이것을 술은 서양이 가져다 준 독소를 상징하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나쁜 것만 가져다주는 서양 문명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광기를 과장한 면이 없지 않다. 나는 이것이 왠지 예사롭게 보여지지 않는다. 거기다 그 광기로 인해 인디언들이 닥치는 대로 여성들을 윤간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백인 여성들에게 그들 스스로 미개하다고 여긴 것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심어주는데 그런데 이들이 이 공포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더욱 더 매달리는 것이 자신의 남편들이고 보면, 이것을 통해 퍼거슨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가 정말은 남편이 아닌 다른 인디언들에게 그녀들의 정조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이 모든 설정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이 어째  카톨릭적 죄악과 닯아 보인다. 이 소설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교조적이라며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런데 어이하여 이렇게 카톨릭적 가치관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짐 퍼거슨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전통적 여성관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여성들이나 거기에 과도하게 투영되어진 카톨리적 세계관. 이 모든 것이 짐 퍼거슨이 실상은 가부장적 시선으로 여성들을 보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 짐 퍼거슨이 제아무리 여성을 경계마저 뛰어넘는 포용력을 소유한 한 주체로 그리고 있더라도 사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누가 그녀들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그 종속성의 기표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되는 것이다. 

  타자의 문화에 서서 자신이 서 있던 문화를 본다는 것은 전적인 외부에서 바라봄으로써 사실은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지배력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짐 퍼거슨이 취하는 형상화는 거꾸로 자신의 문화의 핵심적 가치로 더더욱 인도할 뿐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짐 퍼거슨이 이 소설에서 취하는 구성 전략 마저 의심하게 된다. 형상화가 일종의 전술이라면 구성 방식은 일종의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이란 어디까지나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수단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전략 자체가 이미 그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란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짐 퍼거슨이 취하는 구성에 있어서의 방법 마저 사실은 소설의 표면에 보이는 것과 반대의 효과를 노린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앞서 그는 이 소설을 후일담처럼 만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불현듯 찾아낸 하나의 기록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왜 이런 일기라는 '기록'을 차용했던 것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사실임직'하게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거기엔 우리가 지금 의심하는 바와 같이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은폐되어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이란 책으로도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묘사를 통해서 어떤 내용이 기억에 수용된다. 그래서 그런 기록은 망각을 막아주는 좋은 보호막인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나의 새로운 생각으로는, 기록된 것만이 잊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것만이 다시 삭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땅히 기록될 장소나 시간이 없어서 기록되지 못한 것은 - 다시 말해, 그 내용이 지배의 공간이나 시간에서도, 자기 자신의 특정한 정신의 지형이나 역사속에서도 종합할 수 없기 때문에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은 - 달리 말해, 가능한 경험의 소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잊혀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경험을 형성하는 그 형식들이, 비록 이차적 억압을 가져오는 그것들이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그 형식들에는 쓸모없고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망각이 공격할만한 틈을 주지 않으므로 오로지 어떤 자극 상태로만 남아 있다. 

 

  단적으로 '기록된 것이 오히려 더 망각되기 쉽다.'라는 리오타르의 이 말은 특히나 이런 후일담 같은 소설들에게 더욱 더 경계의 시선을 던지게 한다. 후일담의 본질은 현재로 다시 불러 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과거로 보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후일담의 이러한 특성은 '트라우마'와 비교해보면 더더욱 확실해진다. '트라우마' 역시 후일담과 같이 과거로 부터의 전래되어 온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그 전래되어 오는 과정이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엄습'이다. 그렇게 후일담은 주체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지만 트라우마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체가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드는 두려움이요 징후 없이 벌어지는 상처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방할 수 없으며 그냥 뒤늦게 아파할 뿐이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이것이 '엄습'인 이유는 트라우마를 가진 주체가 그것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화 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엄습 - 그렇게 막연한 불안감으로만 존재한다. 리오타르의 말 처럼 경험을 형성하는 그 어떤 형식으로도 구체화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늘 엄습하는 막연한 불안감(이것이 바로 '어떤 자극 상태'다.)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그것은 현재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단단히 결부된 고통으로써... 

 

   하지만 후일담은 다르다. 그것은 기록되고 그렇게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주체는 그것의 모습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모든 환부는 온전히 드러나면 곧바로 치유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봉합과 제거의 과정을 거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도 된다. 즉 좌변기의 물 처럼 안심하고 망각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넋두리'와 '후일담'도 구별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넋두리가 일종의 트라우마의 고백이라면 후일담은 완전한 망각을 위한 마지막 봉인 같은 것이다. 그것은 스틱스의 강물을 마시게 하려는 카론의 노래와도 같다. 후일담은 과거 청산의 개체적 표현이다. 청산은 언제나 해체와 소멸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보존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오로지 재물을 향한 이기적 욕망으로 인디언을 마구 학살한 역사는 그렇게 절대 지워져서는 안되는 역사다. 따라서 짐 퍼거슨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그가 취한 후일담식의 소설 구성은 그 저주받을 역사로 인해 환기되는 미국인들의 상처난 양심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미국인들이 정말 그 부끄러운 학살과 약탈의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속죄하려고 한다면 후일담이 아니라 마땅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형상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과연 어떻게 언어를 주 표현 매개체로 하는 문학이 언어화가 불가능한 트라우마적을 재현할지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미국 문학이 그 고민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바로 그것이 정말 이런 소설이 하고자 했던 반성과 속죄에 더 걸맞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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