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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미덕의 결정(結晶)은 인내다.
꾸역꾸역 순간마다 발현되는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래 참는 것.
인내란 참으로 고독한 투쟁.
겉으로는 잔잔한 수면과 같아서 바깥 사람들은 휘몰아치고 있는 내면의 현재를 모른다.
착한 이들이 때로 백치의 표정을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의 얼굴을 무표정의 투명한 거울로 만들어 내면으로 파고드는 타인의 시선을 반사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바보를 가장함은 내면의 움직임을 조금도 바깥으로 내어주지 않으려는 끈질긴 방어의 욕망이다. 이 모든 고독한 투쟁이 바로 미덕의 실천이다.
미덕은 그렇게 온전히 자기 안에서 자기를 위해 치뤄지는 제의.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놓는 제의인 것이다.
그런데 왜 참지?
무엇이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참게 만드는 거지?
신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그녀는 늘 바보같은 미소를 짓는다.
미덕은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면서 실현되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신으로 부터의 보상을 바라는 더 큰 자기애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미덕이란 더 큰 자기애적 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는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여기엔 그 어떤 이타애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미덕은 타인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을 고양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목적 없는 욕망이며 오로지 욕망만을 위한 욕망이다.
그래서 도착적이다.
수전노가 돈에 대해 가지는 욕망과 동일하게 도착적이다. 돈은 오로지 물질로 교환되어야 그 가치가 있지만 수전노는 물질을 줄여 돈을 모은다. 물질을 줄이니 삶은 궁핍해지고 사람들의 무시와 비난마저 덤으로 얻지만 돈만을 축적하려는 욕망에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돈에다 투사하는 욕망을 그 어느 때든 실현할 수 있지만 수전노는 기꺼이 그 충족을 지연시킨다. 그 지연 때문에 돈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부러움이 오히려 비난이 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이 있는 한 언제든 그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미래에 존재할 전복의 가능성 때문에 그는 기꺼이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전노는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가능성을 먹고 사는 존재다. 하지만 이미 도착이 되어버린 욕망은 한없이 그 가능성의 실현을 지연시킨다. 어쩌면 영원히 그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지 모른다. 수전노가 그 도착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건 오로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기도 하다.
미덕의 욕망도 이와 같다. 수전노가 미래의 실현가능한 가능성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무릎쓰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미래에 주어질 신의 보상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수전노가 그 가능성의 구현체인 돈만으로 만족하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신의 보상을 확고히 해 줄 그 미덕의 실천을 통해 얻는 자기만족감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이 수전노를 욕했듯, 그렇게 자신을 아무리 바보라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어도 상관없다. 미래를 사모하는 자에게 현재란 그저 사라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 있는 타인들 역시 찰라에 사라질 하루살이의 운명들이니까. 그렇게 타자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애로 뒤덮인 견고한 껍질은 그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이 지나치면 때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신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힘들기만 하냐고...
그녀는 사람에게 하소연하지 않는다. 간원의 대상은 오로지 신 뿐이다. 당연하다. 타인은 그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할 때만 의미있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타자들이 괴롭히면 괴롭힐 수록 겉으로는 아픈 척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자들의 행동은 자신이 미덕을 실쳔하고 있음의 외부로부터의 확인이며 훗날 신에게 보상을 받을 때 내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아주니까. 더 많은 고난은 신으로 부터 더 많은 인정을 받게 한다. 그렇게 '착한 자'들은 스스로 매저키스트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러한 매저키스트적 욕망은 '순교'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순교의 욕망은 역설적이다. 자기를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기애의 극한을 완성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신에게 하는 간원은 자신의 고난을 평가에 고려해달라는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고통의 호소 또한 보다 더 큰 자기애적 욕망 충족을 위한 발화인 것이다.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꾸며내는 신음 소리와도 같이...
그래서 사드는 이 미덕의 화신을 처벌한다. 새디즘을 만든 장본인 답게 아주 가학적으로...
하지만 미덕의 화신, 쥐스띤느는 사드가 가해오는 그 고통을 오히려 더 환호할 뿐이다. 당연하다. 그녀는 이미 뼈 속까지 매저키스트이니까. 고통이 크면 클 수록 신으로 부터의 상급으로 구체화될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강도는 더욱 더 커다래지니까...
그렇게 '미덕의 불운'은 새디스트 사드와 매저키스트 쥐스띤느의 교합과도 같다.
사드는 가학이 고조되는 선율을 작곡하고 쥐스띤느는 온 몸으로 그 볼레로를 표현한다.
제목처럼 미덕이 불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를 고통에 빠뜨려 감으로 밖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감으로 밖에는 충족될 수 밖에 없는 욕망...
보다 완전한 충족을 위해선 보다 완전히 스스로를 지워야만 하는, 그렇게 미덕의 실천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그 매커니즘 자체가 미덕의 불운인 것이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불행이 아니라 불운이란 말을 제목으로 썼다. 불운이란 단순히 운수가 좋지 않은 것. 그렇게 운명이 아니라 단순한 상황적인 것.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치 표층적인 차원에선 고통이었으나 심층적인 차원에선 쾌감으로 받아들였을 쥐스띤느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라도 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