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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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흑인 여성 작가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SF 소설계의 전설이다. 하나도 따기 힘든 SF 소설 최고 권위의 상을 3부작 모두가 해마다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휴고상 역사상 최초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년 초에 우리나라에도 발간되면서 비교적 빨리 우리에게 소개된 편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오벨리스크의 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부서진 대지'는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벨리스크의 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엇보다 첫째 권인 '다섯 번째 계절'부터 읽으실 것을 당부드린다.





 배경은 지구. 하지만 아주 먼 미래다. 

 거기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이다. 변화무상한 사계절은 이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황폐와 삭막의 계절 뿐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구는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다. 생존한 인류는 현재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망하기 전 인류는 대지 보다 하늘을 더 숭배했으나, 이젠 아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대지 중심이다. 땅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연히 땅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의 에너지로 땅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오로진'이라 부른다. 아무나 오로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오로진의 통제되지 않는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로진을 괴물 취급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쑨의 남편이 그랬다. 그는 아들이 오로진인 걸 알자 딸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여버린다. 남편 지자는 딸 나쑨 역시 오로진인 걸 알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삽시간에 소중한 아들을 잃고 딸까지 빼앗긴 에쑨 또한 딸을 찾아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부서진 대지'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오벨리스크의 문'은 지자가 나쑨을 데리고 떠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나쑨이 에쑨과 함께 이번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소설은 에쑨과 나쑨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에쑨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과거 스승이자 연인인 알라배스터와 함께 있다.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오벨리스크들을 조종하여 지구에서 벗어나버린 '달'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다섯 번째 계절'의 마지막에 달이 왜 나왔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달이 사라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을 전설의 존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함께 알라배스터는 지구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그가 왜 다시 한 번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에쑨이 하루빨리 오벨리스크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말해준다. 그건 바로 '스톤 이터'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돌로 되어버린 육체 때문에 죽지 않고 있어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 그들의 일부가 지구에 자신과 다른 종족이 존재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나쑨은 여행 도중 우연히 늘 괴물로만 취급되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걸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주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작에서 오로진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가던 샤파다. 아주 모처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나쑨은 샤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가까이에 있는 오벨리스크에서 힘을 끌어내 그걸 증폭시켜 사용하는 걸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 그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걸 시작으로 나쑨에게도 점점 더 큰 비극이 닥쳐온다. 아버지 지자가 조산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나쑨을 그녀의 오빠처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쑨은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편입하기 위해 능력을 연마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다섯 번째 계절'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공존과 차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부각하면서 규모를 더 확장시켰다. 달의 부재는 현재의 지구가 하나만 존재하는 독재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존재할 것을 허락하는 스톤 이터들은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알라배스터가 달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를 다시금 공존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는 세상. 오크림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이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세상. 오로진으로 차별을 많이 받은 알라배스터였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에쑨도 다르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알라배스커의 말을 결국 따르게 되는 건 전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된 스톤 이터 호야의 존재 때문이다. 자신이 스톤 이터이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오로진 에쓘을 도와주려 애쓰는 호야를 보면서 그녀는 왜 같은 것 하나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알라배스터는 그렇게 달을 데려오는 힘을 '마법'이라 말한다. 마법 역시 과학에 밀려 사라진 힘. 그런 의미에서 마법은 달과 유사한 상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주류에 가리거나 억압되어 이면에 머물게 된 것들을 에쑨은 다시 불러오려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바로 그런 이면을 여는 문이다. 영원히.


 '오벨리스크의 문'은 공존과 조화라는 사회적 메세지로 충만하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태에서 보듯,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는 요즘엔 정말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른 차별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해하려는 몸짓보다 경멸과 거부의 몸짓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움직임 끝에 뭐가 있는지는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이 잘 보여주었다. 이란이 자신의 영공 가까이 날아온 민간 여객기를 미군의 보복 공격인 줄 알고 격추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였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목숨들이었다. 차별과 배척 또한 얼마나 많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아픔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던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에쑨과 나쑨의 여정을 통해 그걸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SF, '오벨리스크의 문'. 작품의 가치도 가치이지만,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더욱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얼른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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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1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썼는데 그게 다 상을 받았군요 이어졌다 해도 어떤 건 따로 봐도 괜찮지만, 이건 첫번째부터 차례대로 봐야겠습니다 앞에 이야기를 모르고 이걸 보면 뭐지, 하겠군요 아들과 딸이 오로진이라면 두 사람에서 한사람이 오로진이라는 건데... 에쑨이 그런 듯하네요 자기 자식까지 죽이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보는 거 처음이 아니기는 하네요 자기 자식한테 다른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부모 다른 데서 보기도 했군요

다르다고 무서워하기보다 함께 살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뿐 아니라 동, 식물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죠 이제는 한 지역 한 나라가 아닌 지구를 다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