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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평점 :
첫 문장부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검은 얼굴의 여우'는 미쓰다 신조의 소설 중 최고 걸작이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이 지금에서야 소개된 게 너무 안타깝다. 좀 더 일찍 소개되었다면 분명 이 작품은 더 많이 소개되고 널리 읽혀졌을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미쓰다 신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도조 겐야 시리즈’는 아니다. 그렇지만 도조 겐야와 비슷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일본 패전 직후의 시기를 말이다. 그 시기를 염두에 두고 말하건대, 도조 겐야 시리즈에 좀 불만이 있었다. 그런 시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전쟁 국가 일본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한국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도조 겐야 시리즈를 정말 좋아하면서도 그걸 늘 시리즈의 한계로 여겨왔던 참인데, 이번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는 내가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다소 놀랍게도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 사실 2011년에 일어난 3.11 사태와 아베 정권에 힘입어 일본 우익이 날로 목소리를 크게 내던 마당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내기는 쉽지 않았을텐데, 미쓰다 신조는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 그걸 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어서, 개인적으론 도조 겐야 시리즈보다 더 재밌게 읽었다, 아무래도 최고 걸작이라는 말을 첫 문장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나온 미쓰다 신조의 신작이 이토록 커다란 만족감을 주어서 팬으로서 정말 기쁘다.
후반에 놀라운 반전이 여러 번 펼쳐지기에 이야기를 소개하기가 조심스럽다. 가급적 직접 읽었을 때의 재미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말해본다면 이러하다.
한 청년이 일본을 방황한다. 이름은 모토로이 하야타.
그는 현재 삶의 의미를 잃었다. 기차 역에 서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른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 국가 일본이 아닌 만주와 한국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일본 국가를 만들기 위해 건국대학이란 곳에서 열심히 공부도 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오직 폐허만이 존재하는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정처없이 흘러다닐 뿐이다. 그러다 그를 탄광으로 데려가 광부로 만들어 착취하려는 이를 만난다. 강권에 못 이겨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 찰라, 누군가 그를 구해준다. 눈에 띄는 미남인 그의 이름은 아이자토 미노루. 왜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구해주었느냐고 하야토가 묻자, 예전에 알았던 한국 청년인 정남선 때문이라고 미노루는 답한다. 하야토의 모습에서 그 청년을 떠올렸다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기에.
하야토는 미노루가 일하는 탄광에서 일하기로 한다. 오직 생산성만 강조하며 광부들을 위한 안전 설비는 나 몰라라 하는 회사의 태도 때문에 언제라도 갱도가 무너져 생매장당할 수 있는 막장 속 생활은 힘겹기만 하다. 그야말로 패전 후 일본 국민들이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빼다 박은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타는 이러한 일본의 가장 밑바닥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일본 재건의 씨앗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갱도로 내려가는 걸 잔뜩 두려워하면서도 하루하루 적응해 나간다.
그러나 마치 그 희망을 비웃길도 하듯, 예고 없이 일어난 낙반 사고로 하야토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미노루가 실종되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
낙반이 일어나면 유독 가스가 삽시간에 갱도에 가득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생존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 미노루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하아토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 않고 유독 가스로 인해 구조대 파견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 불구의 몸으로 탄광촌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기도'란 한국인이 검은 여우를 모시는 사당의 금줄로 자신을 목을 매어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다. 기도가 죽을 당시 낙반 사고 때문에 마을엔 아이들만 있고 어른들은 없었는데, 기도가 죽기 전에 검은 얼굴을 한 여우가 기도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한 아이가 보고는 아이들 모두가 집을 지켜 보는 상황이 된다. 한 마디로 기도가 죽은 집은 아이들 눈이 벽이 되어 준 밀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기도의 집으로 들어갔던 검은 얼굴의 여우가 집을 나오는 모습은 목격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집 안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기도의 죽음은 자살로 굳어지는 중인데, 이튿날 이웃에 살던 전직 특수 고등경찰인 기타다가 기도와 똑같이 밀실 상태에서 금줄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공교롭게도 그 때 마침 미노루의 형인 류이치가 미노루의 집을 찾아오다가 검은 얼굴의 여우가 기타다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한다.
검은 여우는 언제나 낙반으로 생매장 당할지 모르기에 미신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광부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불길한 신이었는데, 잇달아 발생한 죽음에 동일하게 검은 여우가 출몰하자 탄광촌은 광막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에 휩싸인다.
이 신은 곡식을 관장한다는 여우신 이나리와는 조금 달랐다. 하얀 여우님과 검은 여우님, 두 신을 모셨기 때문이다. ‘백여우님’ 혹은 ‘백신님’으로 모시는 여우신은 풍요의 신이다. (…) ‘흑여우님’ 혹은 ‘흑신님’으로 두려워하는 여우신은 흉작의 신이다. 여기서는 갱내의 모든 사고를 의미했다.(p. 91)
하지만 검은 여우의 저주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기타다와 붙어 다녔던 인물이자 죽은 기타다를 하야토와 함께 가장 먼저 발견한 니와 역시 밀실인 자기 집에서 금줄에 목이 졸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삽시간에 발생한 세 개의 죽음이 모두 동일한 형태라 이제 도저히 자살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경찰은 기타다와 니와와 늘 함께 붙어다니던 스가자키를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의심한다.
금줄 연쇄 살인사건.
이름을 붙인다면 이 정도로 어울리는 사건명도 없을 거이다. 요컨대 검은 얼굴의 여우는 금줄에 구애받고 있다.
어째서일까.(p. 392)
그들에게 도박빚이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한 편, 하야토를 마음에 들어하여 아마추어 탐정 흉내를 내는 하야토에게 잘 귀기울여주던 난게쓰는 뜻밖의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과거의 어떤 갱도 안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검은 얼굴의 여우의 이야기를.
홀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 광부에게 찾아와 처음엔 그를 도와주다가 나중엔 여인의 몸으로 그를 홀려 다시는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갱도의 어둠 속으로 데려가 버린다는 검은 얼굴의 여우는 난게쓰 혼자만 만난 게 아니었다. 일본 전역의 갱도에서 그런 존재를 만난 사람이 더러 있었고 사라져 버린 이들도 많았다. 실종된 미노루와 기타다 패거리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쩐지 미노루는 기타다와 미와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한 탄광에 모이는 걸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해서 탄광촌엔 죽은 미노루가 검은 얼굴의 여우가 되어 죽은 사람들을 데려간 게 아니냐 하는 소문이 돌게 된다. 그들이 소문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마을에서 죽은 이들이 모두 빠져나갈 길이 하나도 없는 밀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살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살해당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존재의 짓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야토는 이 모든 사건엔 드러나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단서를 모은다. 뒤이어 또 다시 2번이나 더 누군가가 죽지만 굴하지 않고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검은 얼굴의 여우’의 줄거린 대강 이러하다.
흔히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을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으로 설명하곤 한다. 이 소설 또한 그런 특징이 잘 살아나 있다. 난게쓰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검은 얼굴의 여우 괴담과 탄광에서 발생하는 연쇄 살인의 미스터리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호러로도, 미스터리로도 분위기와 재미가 한껏 잘 살아나 있는 명작이다. 하야토가 어쩌다 탄광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려주는 초반부가 좀 지루할 순 있는데, 거기만 잘 넘기면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마지막까지 거침없이 읽게 된다.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힘이 정말 강하다. 실제로 난 이걸 휴일의 한 카페에서 하루 종일 읽었다. 거기다 도저 겐야 시리즈 내내 흐르던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 또한 여전히 잃지 않고 있다. 아니, 이번엔 지금 일본 분위기에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전범국가 일본의 만행을 가감없이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왜 오늘의 일본이 그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지 또한 밝히고 있어서 더 강해졌다고 하겠다. 하야토가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시리즈이긴 하지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그런 의미에서 정말 ‘검은 얼굴의 여우’는 미쓰다 신조가 도조 겐야 시리즈를 통해 해 오던 것의 절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괴담을 끌어오고 호러적 분위기를 잘 연출하지만 그렇다고 밀실 트릭이 허황된 건 아니다. 트릭들은 엄연히 현실 세계의 질서를 잘 따르고 있고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단서 또한 내용에 다 심어져 있다. 다시 말해 작가가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엘러리 퀸의 소설이 그랬듯이 이 소설도 자신의 추리 소설을 작가와 겨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미쓰다 신조를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 시리즈로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계승자라고 일컬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미쓰다 신조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검은 얼굴의 여우'는 정말 멋진 선물이 될 것이라 감히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