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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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버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벌법이 여당과 야당에 의해 졸속처리되었다. 매일 7명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체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인이 사건보다 중대기업처벌법에 분노와 감정, 노력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정서적 공감은 이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 쉽지 않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으로 분노하기에 정치권은 대개 공감정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반응하게 되며 이는 역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서적 공감의 마지막 문제는 정서적 공감이 폭력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상대가 피해를 당한 경우, 그 가해자를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훨씬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9.11사태다. 당시 분노한 미국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 결과 양 국가의 정치체제가 무너져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정서적 공감은 폭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강력하게 작용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통한 적절한 판단 및 해결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 그리고 관련 3자도 새로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초점이 좁고, 특수 사례에만 잘 끌리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정서적 공감은 공감을 잘 하는 개인을 매우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이럴 경우 공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다. 실제로 정서적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연민이나 동정, 인지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과잉보호, 균형잡힌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 공감이 강한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지 심장질환이나 당뇨, 암의 위험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케케묶은 이성을 다시금 꺼내든다.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연민을 더한다. 공감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민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것이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함과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때문에 저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라는 오래된 용어처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정서적 공감에 매몰된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성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공감이 온전한 도덕의 바탕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성 역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성의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이성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동물적이기에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충분히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도구보다는 사용자가 문제라는 거랄까나.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한 의심의 눈을 갖게 된것은 근현대사의 아픔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수에 이성이 자리한 부분은 없다. 양차대전과 대학살, 인종차별, 냉전등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결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 의식의 시작은 인간 이성자체라기 보다는 충분히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엔 나 역시 공감의 신봉자에 가까웠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가까운 관계에서 매우 필요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만 된다면 매우 유용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불러오는 도덕적 판단 잘못은 충분히 경계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책은 뒷 부분에 좀 힘이 빠지는 편인데, 아무래도 과학적 근거가 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코 패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재미난데 통상 사이코 패스는 공감능력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코 패스의 경우 오히려 정상인보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사이코 패스는 사람을 크게 괴롭게 할 수 있고, 대개 매력적으로 범죄대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그가 괴로울지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역시 높은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이코 패스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으며 공감능력보다는 절제력, 억제력이 매우 낮고 잔혹하며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 인간의 공감능력과 공격성 사이엔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공감에 대해 신봉하는 분이나 의심하는 분 모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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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4-0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네요 ^^ 한가지만 얘기하면, 저자는 공감대신 이성을 추구하자고 주장하는데, 이성자체의 불완전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보면 공감 역시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공감을 사용하는 또는 그것을 발휘하는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닷슈 2021-04-07 14:31   좋아요 0 | URL
이성에 바탕한 차가운 도덕은 상당히 공리주의적 판단을 일으키기에 저자는 사실 인지적 공감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공감을 완전히 도덕에서 제거했다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의 배제를 주장한 듯 합니다. 즉, 공감전체보다는 일부분에 대한 비판이죠. 이성에 대한 부분은 책에서도 좀 아쉬웠습니다. 공감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많이 주목을 받았고, 본성의 일부분으로 진화론에서 많이 다루지만 이성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오히려 별로없죠. 이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연구도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약하죠.

북다이제스터 2021-04-0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과 비슷한 결론, 즉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는 책 <옳고 그름>을 읽으적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저자와 동일하게 이 책 저자도 분명 ‘공리주의자‘일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남는 무서운 집단인 것 같습니다.ㅠ)

말씀하신 책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혹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성과 감성(공감, 직관, 욕망, 무의식)이
동등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성이 감성의 시녀‘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감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옳고 그름>에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에는 있는지요?

닷슈 2021-04-07 14:33   좋아요 1 | URL
이성에 대한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 뒷부분이 약하다고 말한겁니다. 이건 저자 자신의 한계라기보다는 최근 과학이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많이 주목에 감성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에 대한 연구도 진화론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저자는 직접 언급은 안하지만 공리주의자로 보입니다. 연민과 인지적 공감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자라면 좀 이상할까요.

초딩 2021-05-08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5-0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새요.

닷슈 2021-05-09 11: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갈등 도시 -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서울 선언 2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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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전체 5200만 인구 중 1000만 가량이 서울에 산다. 그리고 인접한 경기도에 1200만 정도가 살며 이들 중 대부분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도시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도 서울과 관련한 사람의 수는 한국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여기엔 지극히 그 수가 적을 조부모세대부터 서울에 거주한 토박이도 있을테고,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서울로 올라온 2-3세대들, 그리고 지방에 살고있지만 과거엔 서울에 살았거나 아니면 지금 서울을 직장이나 학교등으로 생활권으로 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듯 서울은 상당히 많은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지만  사람들에게 서울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분명 고향이겠지만 웬지 고향같지 않을 것 같고, 살아가는 우리 동네임이 분명한데 웬지 우리 동네 같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정체성없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변화엔 사람도 주변 건물도 자연도 포함된다. 실제 서울은 메갈로폴리스이자 첨단도시로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서울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들 중 서울내 수십년전 그들이 자라고 태어난 지역의 경관이며 이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얼마나될까? 아마 산천을 제외하고 몇개의 건물이라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이러니 고향같지도 동네같지도 터전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문헌학자인 김시덕이 쓴 '갈등 도시'는 서울에서 직접 살아가는 도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모습을 변모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김시덕이 보기에 서울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행정의 연속성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과 일제시대의 경성, 그리고 광복 이후의 현대 한국의 서울의 연속성상에서 생성된 곳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크게 확대되었고, 지배주체도 바뀌었지만 놀랍게도 행정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우여 곡절끝에 완성된 경인 아라뱃길은 원래 일제가 기획했던 것이었고, 서울, 경기지역의 본래 군부대의 위치는 일본군-미군-한국군이 바통을 이어 주둔했을 뿐 그 위치가 같다.  

 또 다른 특성은 도시 곳곳에 갈등이 산재한다는 것이다. 김시덕은 시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지질학의 지층과 비슷한 개념으로 땅에 오래된 지층이 순서대로 켜켜이 쌓이는 것처럼 도시도 과거의 모습을 여러형태로 간직하며 이것이 현대의 모습과 공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강북의 사대문안 원심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은 과거 경기도의 농촌지역이었다.(이는 강남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울에는 본래 그 지역을 터전으로 삼던 농민과 문중세력,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세력과 그 후손들, 그리고 개발이익을 위해 들어온 새로운 세력들이 재개발, 재건축을 두고 팽팽히 대립한다.

 세 번째특성은 보존의 편혐함이다. 서울은 아직 상당히 많은 과거의 흔적인 도시화석을 곳곳에 갖고 있지만 이는 개발 논리와 거주를 위해 빠르게 철거되고 있다. 상당한 거주 수요때문에 이런 개발은 피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일부 유의미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하여 과거의 모습과 현대의 모습을 공존시켜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보존하는 유산도 매우 적지만 그 보존의 대상을 조선시대 왕가와 양반들만의 흔적만으로 삼는 것이 또 문제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이나 근현대 노동자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전혀 보존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시대적으로도 오로지 조선에만 국한된다. 

 마지막 특성은 서울의 특권의식과 경계지역들이다. 서울은 현대 한국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지정되고 상당히 많은 이권을 누려왔다. 주요 특권중 하나는 서울을 거주 및 상업지역으로만 개발해가면서 주요 필요시설들을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요양원이나 석유비축기지, 물재생센터, 고아원, 군사시설, 화장장 등이 해당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에 저항이라도 하는듯 경기도의 도시들은 이런 시설들이 자신들의 지역내에 위치함에도 하나같이 시설 이름 앞에 '서울'이라는 두글자를 붙였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임에도 서울이름이 붙은 이런 류의 시설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 구체적 지역으로 들어가본다.


1. 봉천-신림동

이 지역은 내가 나고 자라 성장한 지역이라 좀 더 재밌게 본 부분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이사하면서 지역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전히 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동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신림동은 무려 10개가 넘는 동이 있었고 봉천동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모조리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있는데 법정동은 각종 법규로 규정한 동이고 행정동은 법정동을 쪼개거나 붙이는등 조정을 해서 실제 현실에 맞게 바꾼 것이다. 즉,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은 법정동의 이름을 유지하되 행정동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 

 봉천동과 신림동은 서울의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초기 철거민이나 도시 이주민등 빈민들로 형성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남부순환도로라는 간선도로가 개통되고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하천이 복개되고 서울대학이 들어서 고시촌이 생기며 그 이미지가 서서히 변화했다. 그리고 이름의 변경은 이런 지역의 계급적 변경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신림동이란 이름은 고시촌이 주는 좋은 이미지로 인해 남은 반면 봉천동의 이름은 빈곤 이미지로 인해 완전 사라졌다고 한다. 


2. 파주와 고양시의 미군위안부들

 파주와 고양시는 넓어서인지 도시의 중심이 하나가 아닌 여러 곳에 산재한 느낌이다. 하지만 과거 전체적인 무게중심이 동쪽에 있었다면 지금은 모두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파주와 고양은 원래 한반도의 중앙지역이었지만 분단으로 인해 남한의 최북단 변경지역이 되고 많다. 때문에 넓은 평야지대로 인해 개발이 용이했음에도 오랫동안 군사적 이유로 방치되어 왔다. 실제 일제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서남라인의 개발을 중시했었다. 하지만 한국전 이후 한국정부는 군사적 방어의 이유로 개발이 쉬운 서쪽대신 고양-은평-강북-강남-성남을 잇는 서북동남라인을 개발했다. 지금은 이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편리해보이지만 경부고속로만 타고 이지역을 이동해봐도 얼마나 많은 터널과 산들이 존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분단 이후 1966년까지 파주에는 미국부대가 주둔했고 기지촌만 38곳에 달했다. 당시 미군위안부 여성만 4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미군위안부란 용어를 쓰는데 일본군 위안부처럼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적이고 비인권처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시골에서 많은 여성들이 취업알선이나 다른 일자리인줄 알고, 혹은 인신매매등으로 미군위안부가 되었다. 이후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정부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해 어쩌다 탈출해 경찰서로 갔음에도 경찰자체가 한패라 다시 끌려가는게 다반사였다 한다. 특히, 기지촌 여성들은 매번 성병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았는데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받았다. 부작용이 매우 강해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거나 이로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미군위안부란 용어가 충분히 사용된만한 것이다. 

 하여튼 1971년 미 7사단과 1군단이 철군하면서 기지촌은 그 기능이 사라져 크게 쇠퇴한다. 그 유명한 용주골도 이 때 쇠퇴하는데 영업대상을 한국인으로 바꾸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간다. 이후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고 서울지역에 성매매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집창촌이 서울외곽으로 튕겨나가 용주골은 어처구니없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3. 을지로

어릴적 지하철을 타며 을지로가 뭘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책에 의하면 을지로는 글자 그대로 길의 이름이다. 이 길은 무척 유서가 깊어 저자는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그 유서가 이어질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을지로는 지금의 서울시청에서 시작해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 근처 한양 공고에서 끝나는 길의 남북쪽 블록이며 서울의 구도심인 사대문 안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길 가운데 북쪽으로는 종로, 남쪽으로는 마른 내로와 퇴계로 사이에 놓인 곳이다.

 이중 을지로3-4가는 매우 유서가 깊은데 이들이 현대적 면모를 같게 된 것은 일제시대다. 일본인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은 침탈해오며 청계천 남쪽에 거주하며 그 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한국인들이 울타리를 치듯 개량한옥을 대거 지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2차대전중 미군에 의한 경성폭격 가능성이 제기되자 대규모 화재를 피하기 위해 울지로3-4가를 중심으로 종로부터 충무로 사이의 좁고 긴 구간의 목조주택을 철거했다. 화재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공간에 광복후 세운상가, 청계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들을 들어서게 된다. 


4.강남

 강남은 강남, 송파, 서초 3구를 말하지만 성남분당과 판교, 용인수지, 수원광교, 화성동탄까지를 확장 강남으로 보기도 한다. 강남지역은 본래 주거지로 개발되어서 서울에서 가구수가 가장 많고 인구서도 많으며 지역도 생각보다 넓다. 최근의 이미지로 고급 고층 아파트가 빽빽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비율이 절반 이하이며 자연부락과 단독주택, 빌라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강남엔 세 가지 시층이 있는데 농촌시절의 강남 모습을 드러내는 구마을과 서울의 경계지로 강남에 형성된 과거 빈민촌, 그리고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이라 불리며 영동개발시기 지어진 단독주택과 주공, 시영아파트, 시영주택들이 두 번째 모습, 마지막은 지금의 모습으로 주류가 된 고급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고층건물들이다. 

 강남은 본래 농촌지역인데 뽕나무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배나무가 훨씬 많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재배되었고, 현대에들어서는 배나무가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송파구 풍납동에는 의의로 삼표 레미콘 공장이 있는데 이 업체는 레미콘 1-2위를 다투는 업체다. 이는 서울근접성에서 얻는 경쟁력으로 가능한데 강남지역 주민의 반대로 업체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강남은 애초 사대문 안 원도심과 일제시대 개발한 영등포와 더불어 서울의 3대 도심으로 기획되었다. 때문에 공업, 광업기능보다는 거주 상업기능을 우선시하였는데 이런 강남에 레미콘 공장이 있다는게 무척 의외였다.

 강남은 박정희 정권때 개발되었느데 그 이유는 안보였다. 북의 공격시 강북에 집중된 서울인구의 방어가 어려웠기에 방어가 손쉬운 한강 이남 지역에 강북의 인구를 이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강남엔 과거에 만들어진 안보시설이 상당히 있는 편인데 비싸기로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내부 곳곳에 군사용 벙커시설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일례다. 

 성남은 과거 이름처럼 넓었던 광주의 일부로 광주대단지로 인해 형성된 도시다. 원래 도시빈민들은 대개 일용직으로 일하고, 그들의 일은 대개 도심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들은 쪽방같은 곳을 감수하면서도 도시에 거주한다.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철거민이나 수재민, 빈민들을 외곽으로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대단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위와 같으 이유로 빈민들은 다시 도심으로 돌아갔고, 이들이 떠나면서 남긴 토지에 대해 복잡한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며 정부가 이를 규제한다. 그과정에서 시민 봉기가 1971년 일어났고 이를 정리하고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탄생한 것이 성남이다. 

 용인은 더 재밌다. 놀랍게도 용인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의 수도 후보였다. 물론 다른 두 곳이 일본본토이고 한 곳이 용인이라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용인이 국토 중앙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지역의 문화수준이 높고, 기성도시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새로운 후보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정리한 지역 외에도 서울의 다른 전 지역과 서울권으로 분류되는 경기도의 주요 도시들을 다뤘다. 서울이 확장하면서 철거민이나 빈민, 수재민등 기존 주민과 혐오시설을 경기도로 밀어내며 확장한 것, 그로 인해 애매한 경계지역에 혐오시설이 서울의 이름을 붙이고 어색하게 남아있는 것들, 개발의 논리만으로 서민의 모습이 남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어야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 그리고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이 지역을 자신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폭등에만 정치권이 집중하며 이런 문제는 모두 뒷전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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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정말 많은 것을 알아냈다. 미치오 카쿠는 최근 작 '인류의 미래'에서 행성 자체의 에너지를 모두 뽑아내는 단계가 1단계 문명, 행성이 속한 항성의 에너지를 모두 뽑아낼수 있는게 2단계, 더 나아가 소속 은하의 에너지를 모두 뽑아 쓸수 있는 문명을 3단계로 정의했다. 지구는 대충 0.5-6단계정도로 보았던 것 같다. 아마 정확친 않지만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해도도 이정도 수준일 것이다. 이해해야 활용할수도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하여튼 이해도와 활용도, 양자는 비례할 듯 하다.

 문명단계가 아직 낮아서인지 우린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낸 연구성과를 재미있는 문체와 센스로 집대성한 책이 빌브라

이슨이 낸 책 '바디'다.















 빌 브라이슨의 책은 10년 전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처음 접했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역사에 대한 집대성인줄 알았는데 과학의 역사에 대한 집대성이라 다소 황당했었다. 하지만 그 책 덕에 과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에 나의 독서 취향은 문과출신이라서인지 인문, 사회, 철학에 치우쳐 있었다.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는 그 이후에 나온 책이다. 변기부터 창문등 인간의 별 사소한 물건의 변천에 대한 역사였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비하면 많이 가벼운 책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나온 책이 바디다.  

 우리 몸 안내서란 부재만큼 인간의 몸 거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최신의 연구성과와 발전상을 집대성했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천문학적 수치를 갖고 있는 편인데, 하루에 무려 1만4천번 눈을 감거나(23분간 눈을 감는 셈이다.), 1초에 적혈구를 무려 백만개를 만들어내고, 그 적혈구 하나가 몸을 15만번이나 돌며, 인간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원자의 수가 70억*10억*10억개나 필요하고, 모든 세포의 DNA 길이를 연결하면 160억km로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길이란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세포수는 무려 37조개에 이르는데 대단한 것은 이 모든 세포를 총괄하는 관리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각 세포들은 다른 세포가 보내는 성분에서 오는 신호에 반응하여 유기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 세포안엔 DNA가 들어있다. DNA는 매우 가늘어 200억 가닥이나 모여야 간신히 머리카락 하나의 굵기가 된다. 거기엔 염색체가 있고, 각 염색체 안에는 유전자가 있으며 유전자의 총합은 유전체다. DNA는 10억개당 1개꼴로 오류가 날 정도로 안정적이지만 이 오류가 있어야만 진화가 이루어진다. 세포분열 한번당 돌연변이 유전자가 3개정도 생겨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과거의 병목현상으로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여 99.9%유전자가 일치한다. 개인당 3-4백만개의 유전자 차이가 나며 각 개인은 100개의 고유한 돌연변이를 갖고 있다. 


1. 피부. 

 피부는 나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안의 나쁜 것을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외부 충격 완화 기능도 있다. 촉감으로 쾌감과 온기, 아픔등 느낌을 일으키며 멜라닌을 생성해 햇빛을 가리고 스스로를 복구한다. 피부는 다 모으면 5-7kg에 달한다. 피부는 결코 고장나지 않는데 진피라는 안쪽과 표피라는 바깥층으로 이루어진다. 표피의 바깥쪽은 각질로 죽은 세포인데 이는 매달 교체된다. 1분에 2만5천개의 각질이 떨어져나가며 1시간이면 무려 100만개의 세포조각이 떨어져나간다. 우리가 하는 때목욕과, 창문을 닫아도 생겨나는 먼지들은 상당부분 이 각질로 보면 된며 이 각질은 연간 500g이나 된다. 진피 밑엔 피하층이 있는데 이 부분은 피부에 해당하진 않지만 피부와 몸을 부착하는 역할을 한다. 

 피부엔 구멍이 많다. 털집이 무려 200-500만개에 달하며 땀샘은 그 두배다. 피지는 땀과 섞여 피부에 기름층을 형성하여 보호한다. 하지만 간혹 죽은 피부와 피지가 말라붙어 구멍을 막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블랙헤드다. 털집에 감염이 일어나 염증까지 생기면 뾰루지가 된다. 그리고 이게 만성화하면 여드름이 되는데 사춘기 시절 피지샘활동이 활발하지기에 이 시기에 여드름이 많다.

 우리 몸은 사실 온통 털로 덮여있는데 털이 없는 피부는 오로지 입술과 유두, 생식기, 손바닥, 발바닥 뿐이다. 인간의 털이 지금처럼 솜털처럼 얇아진 것은 120-170만년 전 정도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인간이 검은 피부를 얻었고, 피부색의 변화는 털이 없어야만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검은색의 피부와 털의 얇아짐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인간의 털이 여전히 굵게 남은 곳은 머리 부분인데 통념과 달리 머리털의 보온, 보냉 효과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 아무래도 성적인 매력을 위해 남은 것이 아닐가 추정된다. 
 피부에선 땀이 많이 아는데 땀은 99.5%가 물이고 나머지 중 절반이 소금이다. 더운 날씨면 하루에 12g이나 소금이 손실되므로 물과 함께 미네랄도 먹어줘야 한다. 몸의 다른 부위와 달리 손바닥은 신체운동이나 열과 상관없이 스트레스에도 반응한다. 거짓말 탐지기는 이를 이용해 손바닥의 땀을 검출하여 거짓을 탐지한다. 땀샘은 에크린 샘과 아포크린 샘으로 나눈다. 에크린 샘은 수가 많고 물기가 많은 땀이며 아포크린은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존재하고 진하고 끈적끈적한 땀을 생성한다. 

2. 우리 몸의 미생물
 인간의 몸에는 1.5kg의 미생물이 있으며 그 수는 30-50조개에 달한다. 무게는 가벼운데, 수는 오히려 많은 셈이다. 우리는 미생물 하면 오랜 감염의 역사로 공포와 혐오를 생각하지만 지구상에 발견된 약 100만종의 미생물 중에서 오직 1415종만이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킨다. 
 바이러스는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한 존재다. 세포 바깥에 있으면 먹지도 호흡도 이동도 없는 불활성'물질'이다. 하지만 세포안에 들어가면 돌변해 살아서 격렬히 증식한다. 바이러스는 매우 작은데 바이러스가 테니스공 정도라면 세균은 비치볼 크기다. 바이러스 역시 이름부터 무섭지만 미생물처럼 수십만종의 바이러스중 겨우 586종만 동물을 감염시키고 이중 263종만이 인간은 감염시킨다. 
 미생물중엔 균류도 있다. 균류 역시 수백종 가운데 300종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균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비해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균류로 전세계에서 매년 100만명이 사망하는 것을 감안하면 다시 봐야할 듯 하다. 
 이런 미생물의 공격에 대해 인간을 구한 것은 항생제다. 하지만 항생제는 표적 공격을 하지 않기에 우리 몸의 다른 이로운 미생물을 죽이는 역할을 하며 몸에 가장 내성이 강한 미생물만을 남긴다. 그 결과 항생제의 등장이후 세대를 거듭하면서 인간 미생물의 풀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비피도박테륨 인판티스란 미생물은 모유에 있는 중요한 미생물이다. 하지만 항생제 사용이 아마도 적을 개발도상국에선 아이의 90%에서 이 미생물이 발견되는 반면 선진국에서는 그 비율이 고작 30%에 불과하다. 더 큰문제는 항생제의 약발이 다 되어간다는 점이다.
 1950-199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연간 대략 3종류의 새로운 항생제가 나옸다. 하지만 지금은 2년에 한 종류로 줄었다. 그만큼 항생제와 개발이 어려워졌으며 항생제에 내성을 같는 미생물이 증가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항생제의 남용과 관련한다. 미국에선 한 해 항생제 처방 3/4가 항생제로 치효할수 없는 증상에 쓰였으며 항생제를 무려 80%의 가축에게도 먹이고 있다. 이는 가축을 살찌우기 위한 용도로 유럽연합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금지된 조치다. 항생제 내성으로 앞으로 30년간 100조달러의 손실이 예상되며 연간 100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된다. 

3. 감각
 시각은 엄청나다.. 눈은 초당 무려 1000억개의 신호를 뇌로 보낸다. 그리고 이 엄청난 시각 정보중 시신경에 오는 건 10%에 불과하다. 하여튼 이렇게 정보다 크다보니 시각엔 무려 대뇌 겉질의 1/3이 시각에 관여한다. 우리는 보는걸 그대로 뇌가 해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보는 것은 시각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시각 입력이 시신경을 통해서 이를 처리하고 해석할 뇌로 전달하는데는 1/5초가 필요한데, 이 시간차를 해결하기 위해 뇌는 사실 보이는 세계를 예측해서 대응한다. 즉, 우리는 바로 이순간 세계를 보는게 아니라 잠시 뒤를 보고 예측하여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척 놀라운 사실이다. 
 이 시각을 담당하는 눈은 사실 앞뒤가 뒤집힌 엉성한 구조다. 빛을 검출하는 세포들은 오히려 뒤에 있으며 세포에 산소를 공급하는 모세혈관이 앞쪽에 있다. 그래서 눈은 그걸 뚫어서 보아야 한다. 인간은 3종류의 색깔 수용기가 있는데 사실 조류나 어류, 파충류는 4종류의 색 수용기가 있다. 이는 아마도 과거 포유류의 조상이 야행성으로 진호하며 색깔 수용기가 퇴화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시야에는 중앙에서 15도 정도 쯤에 맹점이 있다. 신경섬유가 뒤쪽에 있는 하나의 통로로 눈을 빠져나가기 때문인에 이 안보이는 부분도 뇌가 상상으로 처리하므로 우리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청각엔 귓속뼈가 역할을 한다. 귓속뼈는 원래 턱뼈인 것이 오랜 세월동안 귀로 이동한 것이다. 귓속뼈는 소리를 증폭하여 달팽이처럼 생긴 달팽이관에 거쳐서 속귀로 전달한다. 달팽이 관안에는 부동섬모가 2700개 있는데 음파가 지나갈때마다 흔들거리며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이를 뇌가 해석한다. 이 부동섬모를 회복되지 않는데 앞쪽이 높은 주파수를 듣고 뒤쪽이 낮은 주파수를 듣는다. 앞쪽부터 닳게 되므로 나이가 들수록 높은 소리를 못듣게 된다. 인터넷엔 나이대로 가청가능한 소리가 있는데 이런건 이때문이다. 
 후각 상피는 약 35-400개의 냄새 수용기를 지닌 신경세포 집단이다. 알맞은 분자가 알맞은 수용기를 활성화하면 뇌로 신호가 전달되고 이를 냄새로 해석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수용기는 분자의 모양이 아니라 진동하는 방식에 따라 자극을 받는다. 후각은 5감중 유일하게 시상하부를 거치지 않는다. 냄새는 후각 겉질로 향하는데 이는 기억 생성에 관련하는 해마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후각은 기억과 밀접하다. 인간은 350-400개의 냄새 수용기가 있는데 이중 공통적인 것은 약 절반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간은 서로 같은 냄새를 맡고 있지 않게 된다. 냄새에 대한 개인차가 심한 것은 이때문일지 모른다. 

4. 뼈
인간의 뼈는 206개라지만 사실 사람마다 다르다. 8명중 1명은 갈비뼈가 1쌍이 더 있는 13쌍이다. 즉, 뼈의 개수는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 뼈의 절반 이상이 작은 손과 발에 몰려있다. 손과 발의 엑스레이를 보라 조그만 뼈들이 잔뜩있다. 뼈는 몸을 지지하고 내부를 보호하며, 혈구를 생산하고, 화학물질을 저장한다. 소리를 전달하고 호르몬인 오스테도칼신을 생성하는데 이 호르몬은 혈당을 조절하고, 남성 생식력을 증진하며, 기분을 조절하고, 기억유지에 관여한다. 
 운동은 뼈를 튼튼히 하고, 튼튼한 뼈는 오스테도칼신을 많이 생성한다. 운동이 알츠하이머에 좋은 것은 운동 자체가 뇌를 활성화시키고 이 오스테도칼신의 생성에 관여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뼈는 무기질이 70%, 유기물이 30%다. 뼈의 성분은 콜라겐인데 콜라겐은 인간 단백질의 무려 40%에 달한다. 이 콜라겐이 수산화인회석과 결합해 단단해져 뼈가되는 것이다. 뼈는 쓸수록 강해지며 크기도 커진다. 뼈는 강화콘크리트만큼 강하지만 무게는 무척 가볍다. 인간 뼈는 겨우 9kg이지만 무려 1t의 압력을 견딘다.  
 힘줄과 인대는 연결조직이다. 힘줄은 근육과 뼈를 연결하고 인대는 뼈와 뼈를 연결한다. 힘줄은 잘 늘어나지만 인대는 좀 덜 늘어난다. 힘줄은 본질적으로 근육이 연장된 것이다. 힘줄은 튼튼해서 잘 찢어지지 않는데 피가 거의 공급되지 않으므로 다치면 잘 낫질 않는다. 연골은 피가 전혀 공급되지 않아 치유능력이 거의 없다. 연골은 닳기만 하니 그래서 잘 써야 한다. 몸에는 총 600개의 근육이 있는데 일어나기만해도 100개의 근육이 사용된다. 
 인간의 발은 원래 움켜쥐는 일을 했다. 원숭이 발을 보라 잘 움켜쥔다. 그러다 보니 발에는 여전히 조각조각 뼈가 많다. 즉, 발은 애초에 무게를 지탱하도록 설계된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서거나 걸으면 아프다. 
 몸의 기본 구조 중에서 가장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곳은 엉덩이다. 엉덩이가 이동과 체중의 지탱이라는 모순된 역할을 해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퇴골의 머리와 그 끝이 끼워지는 고관절 절구양쪽에 있는 연골은 마찰압력이 심하게 가해진다. 그 결과 매끄럽게 맞물리며 회전하던 이 둘은 점차 고통스럽게 갈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뼈는 해마다 1%씩 무게가 줄어든다. 그래서 고령인 75세 이상은 고관절이 부러지면 40%는 홀로 생활이 불가능해지며 10%가 30일이내에 사망하고, 30%는 1년 이내에 사망한다.

5. 통증
 우리는 통증을 느끼지만 통증은 사실 미지수의 영역이다. 뇌에는 통증중추가 없으며 통증신호가 모이는 장소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통증을 분명히 느낀다. 통증은 과거 안좋은 것으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몸의 위험과 회복을 위한 긍정적 역할로 해석하는게 지배적이다. 
 통증은 피부밑 통각 수용기에서 시작한다. 통각수용기는 열자극, 화학적자극, 기계적 자극의 세 종류에만 반응하는데 놀랍게도 기계적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기가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다. 통각수용기는 열자극만 있으므로 우린 젖은 것에 대해 정확히 반응하지 못한다. 차갑게만 느꼈는데 의외로 젖은 경우가 많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통각 수용기에서 오는 신호는 두 유형의 신경 섬유로 뇌와 척수에 전달된다. A 델타는 미엘린으로 쌓여 절연되어 신호가 매우 빠르다. 망치에 손이 짓눌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날카로운 통증이 이 체계다. 반면 C 섬유는 느리다. 망치에 짓눌린 후 살이 으깨져서 얼얼하고 지끈거리는 통증이 이 체계다. 통각수용기는 불쾌한 감각에만 반응하기에 걷거나 손에 무언가가 닿는 일상적인 신호엔 반응하지 않는다. 신경신호는 1초에 120m로 느린 편이다. 그래서 중간에 뇌로 가는 신호를 가로채는 반사가 존재한다.
 신경계는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로 구분된다. 그리고 체성신경계는 생각에 따라 제어하고, 자율신경계는 자동으로 작동한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뉘는데 교감신경은 몸이 갑작스럽게 반응하는 것이고 부교감신경은 소화나 심장, 호흡, 성적 반응같은 것이다. 말초신경계는 손상시 치유되나 중추신경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통증은 4가지 종류다. 통각 통증은 자극을 받아 생기는 통증으로 부상후 쉬라는 의미의 신호이므로 좋은 통증이다. 염증통증은 조직이 붓거나 충혈될 때 생기는 것이며 기능장애 통증은 신경손상이나 염증을 일으키는 외부자극 없이 일어난다. 신경병 통증은 신경이 손상되거나 예민해져 생기며 외상의 후유증이나 아무 이유 없이 생기기도 한다. 
 통념과 달리 대부분 장기는 통증을 못 느낀다. 장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은 통증은 사실 대부분 연관통증이다. 즉, 몸의 다른 부위와 연관되어 생기는 통증인 것인데 심장동맥질환의 연관통증은 목, 팔, 턱에서 느겨지며 두통역시 머리 피부, 얼굴, 머리 부위의 신경말단에서 생겨난다. 
 통증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로 미국 성인의 약 40%가 만성 통증에 시달린다. 처방약물은 환자 4-7명중 겨우 1명꼴로 만 효과를 드러내며 최고의 진통제를 써도 환자 가운데 70-80%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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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8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몸을 이렇게 분석하면 정말 너무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못하겠네요.

닷슈 2021-03-28 16:28   좋아요 0 | URL
책 보시면 훨씬 자세합니다. 제가 쓴건 정말 일부입니다.
 
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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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집엔 대충 1000권 책이 있다. 결혼하고 집이 생기고 서가도 하나 둘 들여놓으면서 마구 채워넣었다. 그 땐 빈 서가를 채울 욕심에 책 구매에 돈도 많이 썼지만, 막상 책을 고르는 눈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저 신간이라면 마구 샀던 것 같다. 그러다 서가가 다 들어차고, 마누라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심지어 이삿짐 센터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짐도 별로 없는 집인데 책 땜에 이사 단가가 높아지곤 했다. 사실 내가 들어보아도 책은 제법 무겁다. 특히, 한국책은. 그래서 전자책으로 눈을 돌렸다. 크레마란 것도 사고 가상의 서가에 책을 채워넣었다. 이것도 첨엔 꽤 재밌었다. 근데 불만족스러웠다. 보고 싶은 책이 다 전자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격이란것도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초기엔 반값도 많이했고 쿠폰도 많았는데 다 사라졌다. 거기에 무엇보다 인간동물의 소유욕을 제대로 채워줄 물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욕심인게 냉정하게 마음 먹고 헤아려보니 천 권의 책 중 막상 내가 읽은 책이 겨우 60-70%에 불과했다는 것이다.(물론 중고로 처분한 것도 제법 되지 그것까지 넣으면 비굴하게 수치를 3-4%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지라 다행히 장르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전자책도 비슷했다. 전자책은 한번 보면 집중적으로 보지만 안보기 시작하면 계속 종이책만 보다보니 이런일이 생겼다. 있던걸 소비해야한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래도 신상이 계속 나오니 유혹을 떨쳐내기 쉽지 않다. 마누라가 서가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집이 저택마냥 컸다면 이 소유욕을 계속되었을 것 같다.

 하여튼 이 책 작가수업도 오래묶은 책을 꺼낸 것이다. 이유는 재고를 처리해야하는데 일단 쉬워보여서랄까. 책은 무려 2010년 출간이다. 그것도 오래되었다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사실 이 책은 아득히 오래전체 출간된 것이었다. 타자기가 나오는데 타자기 욕을 한다. 글을 원고지에 조용히 써나가야하는데 타자기의 기계소리와 당기는 소리 그 기계음이 글쓰기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컨디션과 기분전환,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자기가 두 대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기계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1980년대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물론 글쓰기엔 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테니 제법 쓸만한 소리도 있었다. 진정한 독창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에서만 나온다는 것. 봉준호 감독이 가장 세계적인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래서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일 수 밖에 없는데 거기서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형상화하고 재결합해 꽤 긴 분량의 훌륭한 책을 이야기로 객관화해내는게 좋은 작가가 된다.

 작가에겐 네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글쓰기 자체의 어려움과 한 책 작가,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 기복이 심한 작가다. 이건 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듯 하다. 작가들은 한 번의 등단이 너무 어려우니 첫 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기화해버리는 듯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한 책 작가나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가 그러할 것이다. 장강민 작가도 당선합격계급에서 첫 작이 매우 훌륭하더라도 다음 작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진정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무의식과 의식을 잘 활용하는 이중적 삶이 필요하다고 한다. 무의식은 작가의 감수성과 창작의 원천, 천진함의 근원이고 이를 시대와 사회에 맞추어 어른스럽고, 분별력 있으며 절제와 공정함으로 밀어넣는 것이 의식의 역할이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 감정, 사건, 장면, 성격과 관계의 의미를 모두 불러내서 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식은 그런 무의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료를 관리하고 통합 추려내는 역할을 해야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이 작가에게 전형적인 인물, 전형적인 장면, 전형적인 감정반응등 모든 종류의 전형을 제시하면 의식이 그 가운데 예술 소재로 삼기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너무 보편적인 것을 쳐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의식을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곁가지를 쳐내고, 다듬고, 내용을 보강하고, 눈길을 끄는 요소를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의식이 이야기를 최종통합한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많은 글을 보고 읽고 쓰고 들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책은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 말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말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자기만의 호흡은 무엇이고 자신에게 진정한 흡입력을 갖는 주제가 무엇인지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면 솔직하고 독창적이며 독특한 이야기를 구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힘들게 이야기를 구성했어도 자신은 아직 글을 객관적으로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글을 완성한 후 당분간은 글을 한 쪽으로 밀쳐두고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야하며, 기력이 회복되고 긴장이 풀린 후에 마음이 초연해지만 다시 자신의 글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전엔 보지 못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가의 재능이 다소 노력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무의식에만 의존한다면 작가는 타고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책은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기엔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차이는 이러한 재능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른 다는 것이다. 즉, 재능은 느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활용법이 늘어나는 것이며, 보통의 사람이 가진 재능의 양이 평생을 다 쓰더라도 쓰지 못할 만큼 양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되거나 글을 써보려고 제대로 마음먹어 본적이 없기에 이런 류의 책은 사실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오진 않는다. 하지만 막상 그런 마음을 언젠가 먹게 될지도 모른다면 참 어려운 일일듯하다. 강원국은 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막힘없이 열 시간은 떠들 준비가 되어야 책을 쓸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한텐 그런 주제가 없다.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작가가 된다는건 참 힘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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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0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 에게해에서 만난 인류의 스승 클래식 클라우드 9
조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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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아테네 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 중심이던 그리스 철학을 인간중심으로 되돌려 놓았으며 플라톤은 그런 스승을 죽인 아테네의 현실정치가 싫어 그 해결을 위해 이데아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스승을 역시 존경하면서도 정반대로 물질세계로 되돌아갔다.

 이런 기초적 사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테네 사람이고 그 지역의 중심인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변경인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에서 아주 변방인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워낙 변방인지라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큰 전화도 피해간 지역이었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때는 상대편이 그냥 비껴진군했고,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선 적당히 중립을 지킨 것이 덕이긴 했지만 역시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기에 이런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집안은 마케도니아 왕가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가 유서 깊은 의사 집안인데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아뮌타스 3세의 궁정의사이자 친구였다. 아뮌타스3세는 필립포스2세의 아버지로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 국가의 황혼기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끝났지만 전후에도 확실한 지배세력이 없어 서로 간의 갈등이 심했다. 이런 틈바구니를 마케도니아가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처음 마케도니아를 미개지역으로 무시했지만 그들의 군사적 행보에 공포를 느끼며 아테네는 반마케도니아 정서를 갖게 된다. 물론 친마케도니아 파도 있긴 했다.

 이런 분위기이니 그리스 아테네 사람도 아니고, 중심이 되는 폴리스 출신은 더욱 아니며, 친마케도니아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변경인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학교인 리케이온도 그래서인지 아테네 바깥쪽에 위치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중적 태도로 대했다. 마케도니아에 박살난 테베처럼 자신들이 망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면서도 반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유언이나 여러 기록에서 아테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히 존재하는 천체와는 달리 식물과 동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식물과 동물이 천체에 비해 고결함이 떨어지는 존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저 양자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적 실체의 복합성과 가변성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그의 4원인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변화하는 동물이나 식물, 사람이 만들어낸 물체등에 해당한다. 질료와 형상, 작용인과 목적이 4원인이다. 질료는 물체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형상은 그 물체를 형상하는 원리이며, 작용인은 그 물체를 만든 것, 목적은 물체가 생겨난 이유나 원인이다. 집을 예로 든다면 집의 질료는 집의 건축 자재다. 목재, 콘크리트, 유리, 벽지등일 것이다. 형상은 집의 구조와 기능이다. 작용인은 집을 지은 건축가가 되며 목적은 집의 존재 원인인 편안한이나 거주, 안전등이 된다. 

 이 4원인설은 과거에 만든 그럴듯한 비과학적 설명으로만 여겨졌지만 책의 저자는 현대과학과 상당히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생명을 예로 든다면 생명의 질료는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된다. 형상은 물체를 발생시키고 분화시키는 설계도인 DNA가 되며 작용인은 부모가 된다. 그리고 목적인 생존과 번식이 된다. 어느 정도 현대생물학과 진화론을 설명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경우 여성의 생리혈이 질료가 되며 남성의 정액에 드러있는 프네우마란게 로고스에 따라 인체를 발생시키는 작용인이 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물체가 생겨나는 원인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살아가는 목적인 행복이 다음차례였다. 그리고 그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윤리학, 국가의 차원에서는 정치학의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성에 의한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을 찾는 것이 아닌 덕에 기초한 덕 윤리학이다. 인간으로써 적절히 살기 위한 여러 덕목이 있고 이런 덕목을 적절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용이다. 이 윤리학은 저절로 정치학과 연결되는데 개인의 중용이라는 것이 개인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누가 무엇을 지배하는지에 따라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혼합정과 민주정으로 분류하였고 어느 것을 특별히 옹호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단지성을 강조하였고 그러면서도 집단의 선택이 때론 파멸적 광기로 치달을 수 있음도 지적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혼합정치의 운영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가 참고한 솔론처럼 모든 시민에게 민회와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제한하는 견해를 옹호했다. 

 책을 보면서 어설프게 알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삶에 대해 아주 조금 더 알게 된 느낌이다.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리스를 직접 방문해 주요 사진을 수록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부분도 좋았고, 설명과 삶이 적당이 실려 있어 가벼워 좋았다. 물론 저자가 진화생물학과 진화론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자꾸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의 그리스는 무척 힘든 시기라고 한다. 2001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주력산업이 완전히 무너졌다. 관광산업과 일차산업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국제무역질서에서 그렇듯 일차산업에 의존하는 국가는 싼 가격을 강요받고 이차산업이 강한 나라의 공산품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 그리스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그래서 유럽연합 탈퇴를 원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상위 소수의 기득권층이 연합유지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어 그 해결이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고 한다. 과거 철학자들이 돌아와도 쉽게 해결되지 못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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