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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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버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벌법이 여당과 야당에 의해 졸속처리되었다. 매일 7명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체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인이 사건보다 중대기업처벌법에 분노와 감정, 노력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정서적 공감은 이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 쉽지 않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으로 분노하기에 정치권은 대개 공감정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반응하게 되며 이는 역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서적 공감의 마지막 문제는 정서적 공감이 폭력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상대가 피해를 당한 경우, 그 가해자를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훨씬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9.11사태다. 당시 분노한 미국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 결과 양 국가의 정치체제가 무너져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정서적 공감은 폭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강력하게 작용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통한 적절한 판단 및 해결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 그리고 관련 3자도 새로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초점이 좁고, 특수 사례에만 잘 끌리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정서적 공감은 공감을 잘 하는 개인을 매우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이럴 경우 공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다. 실제로 정서적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연민이나 동정, 인지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과잉보호, 균형잡힌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 공감이 강한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지 심장질환이나 당뇨, 암의 위험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케케묶은 이성을 다시금 꺼내든다.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연민을 더한다. 공감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민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것이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함과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때문에 저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라는 오래된 용어처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정서적 공감에 매몰된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성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공감이 온전한 도덕의 바탕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성 역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성의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이성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동물적이기에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충분히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도구보다는 사용자가 문제라는 거랄까나.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한 의심의 눈을 갖게 된것은 근현대사의 아픔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수에 이성이 자리한 부분은 없다. 양차대전과 대학살, 인종차별, 냉전등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결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 의식의 시작은 인간 이성자체라기 보다는 충분히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엔 나 역시 공감의 신봉자에 가까웠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가까운 관계에서 매우 필요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만 된다면 매우 유용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불러오는 도덕적 판단 잘못은 충분히 경계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책은 뒷 부분에 좀 힘이 빠지는 편인데, 아무래도 과학적 근거가 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코 패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재미난데 통상 사이코 패스는 공감능력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코 패스의 경우 오히려 정상인보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사이코 패스는 사람을 크게 괴롭게 할 수 있고, 대개 매력적으로 범죄대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그가 괴로울지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역시 높은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이코 패스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으며 공감능력보다는 절제력, 억제력이 매우 낮고 잔혹하며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 인간의 공감능력과 공격성 사이엔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공감에 대해 신봉하는 분이나 의심하는 분 모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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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4-0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네요 ^^ 한가지만 얘기하면, 저자는 공감대신 이성을 추구하자고 주장하는데, 이성자체의 불완전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보면 공감 역시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공감을 사용하는 또는 그것을 발휘하는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닷슈 2021-04-07 14:31   좋아요 0 | URL
이성에 바탕한 차가운 도덕은 상당히 공리주의적 판단을 일으키기에 저자는 사실 인지적 공감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공감을 완전히 도덕에서 제거했다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의 배제를 주장한 듯 합니다. 즉, 공감전체보다는 일부분에 대한 비판이죠. 이성에 대한 부분은 책에서도 좀 아쉬웠습니다. 공감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많이 주목을 받았고, 본성의 일부분으로 진화론에서 많이 다루지만 이성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오히려 별로없죠. 이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연구도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약하죠.

북다이제스터 2021-04-0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과 비슷한 결론, 즉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는 책 <옳고 그름>을 읽으적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저자와 동일하게 이 책 저자도 분명 ‘공리주의자‘일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남는 무서운 집단인 것 같습니다.ㅠ)

말씀하신 책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혹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성과 감성(공감, 직관, 욕망, 무의식)이
동등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성이 감성의 시녀‘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감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옳고 그름>에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에는 있는지요?

닷슈 2021-04-07 14:33   좋아요 1 | URL
이성에 대한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 뒷부분이 약하다고 말한겁니다. 이건 저자 자신의 한계라기보다는 최근 과학이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많이 주목에 감성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에 대한 연구도 진화론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저자는 직접 언급은 안하지만 공리주의자로 보입니다. 연민과 인지적 공감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자라면 좀 이상할까요.

초딩 2021-05-08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5-0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새요.

닷슈 2021-05-09 11: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