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모,

그러니까  Jean philippe Rameau 라는 냥반은 프랑스 태생으로 베토벤의 선배님 되시는 냥반이다.

독학으로 화성의 기초를 연구, 확립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은 해낸 것인데,

정말 흥미로운 음악도 작곡을 했다.

 

수입] Philippe Herreweghe (Rameau : Les Indes Galantes)(Digipack)
Philippe Herreweghe / Harmonia Mundi / 2000년 6월

 

(다양한 버전으로 감상하는 것이 고전음악의 매력이지만

사적으로는 딱 이음반을 소장하고 있고 이것으로 끝이다)

 

대표적인 곡이 바로  Les Sauvages 라는 곡이다. 글자 그래도 옮기면 야만인 혹은 미개인이다.

곡의 이름을 이렇게 붙인 의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서구인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춤을 추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미개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나중에 라모는 이 미개인 혹은 야만인이라는 제목의 음악을 재활용하여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Les Indes galantes 라는 예술을 만들에 낸다.

당대 고전 음악에서야 솔직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밀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싶은데....

 

어째거나 라모는

음악의 제목인 '야만인' 혹은 '미개인'을 갑자기 '우아한'으로 탈바꿈하는 대 이변을 연출해낸다.

더더욱 놀리운 일은 '우아한'이라는 말 뒤에 붙은 '인도'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의 제목이 야만인에서 위대한 인도의 제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개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의미하던 음악이 인.도.로 말이다.. ㅠ.ㅠ.

많이 헷갈린다 정말

 

이쯤하면 라모가 처음 붙인 제목인  Les Sauvages을 자연인 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이지만 정녕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에 감동한 작곡가 라모 말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에 영감을 얻어 곡을 쓴 라모를 상상하게 된다. 

 

또 어째거나 프랑스 내 라모의 인지도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지만

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 싶다

불구하고 꾸준히 음반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음악사에서 홀대할 인물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다음의 영상에서 보듯이 원주민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재연했다.

 

 

1) 약간 느린 버전

 

 

 

 

2) 음반과 거의 비슷한 속도의 영상물

 

 

또 어째거나 무더운 여름을 잠시 잊게 해줄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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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8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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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역린(逆鱗)」의 개봉과 동시에 관람을 했지만 관련 글을 쓰는 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늦어도 한참 늦은 북을 치는 중이랄까... 우리 역사의 가장 큰 획을 그은 왕들에 관련하는 도서나 영화 혹은 드리마가 적지 않다. 역린의 주인공 ‘정조’ 역시 그 중 하나여서 수많은 이야기꺼리를 가진 장본인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몇 있어 나름대로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이제야 하게 되었다.

 

현대의 대중들에게 워낙 잘 알려진 정조는 ‘정조(正祖)’ 라는 묘호(廟號)만이 아니라 ‘산(算 혹은祘)’이라는 휘(諱)까지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게다가 홍재(弘齋)라는 호(號)도 알려진 독특한 인물인데 이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서재에는 홍재(弘齋)라고 쓴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정조(正祖)라는 묘호만으로도 조선의 22대 임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조는 임금이었기 망정이지 학자로서도 당대 모든 신하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였고 그의 활은 신궁(神弓)이라 했다. 우리 역사를 통 털어 신궁이 셋이 있는데, 역시 잘 알다시피 1대 신궁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즉 주몽이고 2대 신궁은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 그리고 마지막이 정조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왕에 대놓고 살수를 보내는 역모를 꾸민 사건의 하루를 다룬 영화이니 어찌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임금을 살해하기위해 궁 안으로 살수를 보낸다... 중국에서도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보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역사상 유일한, 전무후무한 일이 아니던가..

 

 

이 사건은 조선이 정치적으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전형적인 형태를 가진 나라였다는 점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한마디로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알던 시절의 전설이 아니고서야 발생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와 같은 이 영화를 보며 정말로 인상적이며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장면은 바로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영화는 사도 세자가 사망하던 당시의 장면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영조 38년, 즉 1762년 음력 5월 13일자로 뒤주 안에 갇힌다. 그 해의 5월은 윤달이었다. 양력으로 치면 1762년 7월 4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28세를 일기로 그가 숨을 거둔 날은 양력 7월 12일로 뒤주 안에 갇힌 상태로 사망하기까지 여드레가 걸렸다. 그가 갇힌 뒤주의 크기는 가로세로 약 160cm 의 크기였다. (뒤주 안에 가두어두는 것은 장인은 홍봉한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사도세자의 키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골이 장대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서울대의 해부학 교수들이 조선인(15-19세기)의 키를 연구한 결과 당시 성인 남자의 평균키는 161cm 이고 여성은 150cm 였다. 이는 유골의 넓적다리 뼈를 기준한 것으로 사람의 신장을 추정해내는 해부학적 근거를 가지며 인간의 신장 측정법으로 학계에서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일본인들의 키는 우리 선조들의 키 보다 5∼6cm가 작았고 그리하여 왜놈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의 평균 키을 기준으로 보아 기골이 장대했다는 증거는 그가 즐겨 사용했다는 월도(月刀)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월도는 그 옛날 촉한의 운장(雲長)이 휘둘렀다는 월도(18kg)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3근 14냥으로 약 2kg 정도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명으로 백동수, 이덕무등이 완성한 조선의 군사 훈련용 병서로 이에 근거하여 월도의 무게를 알수 있다. 그러나 주인에 따라 월도의 무게나 길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는 영조 당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삼장군의 월도가 그 증거이다. 이삼장군이 난을 평정하는 전투 과정에서 생긴 격검흔이 뚜렷한 월도로 길이는 191.5m, 무게는 2.9kg이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본다면 조선의 월도의 길이는 2∼3m 이고 무게는 2∼3kg 의 무게였을 것이다. 길이가 길고 적잖이 무거운 월도에 능했던 사도세자의 '기골이 장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사도세자의 키는 평균치보다는 훨씬 웃돌았을 것이다. 비합리적일지는 모르겠으나 사도세자의 키를 170으로 설정해보자. 고려의 무인 척준경의 키가 당시 남달랐던 180cm 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170cm 라는 설정은 과장된 수치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뒤주의 크기는 160cm 이다. 키가 170cm인 사람이 가로세로 160cm인 뒤주 안에 갇힌다. 물론 대각선이 나오기는 한다. 수학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ㅠㅠ.

 

 

이렇게 비좁은 뒤주 안에 사람이 갇혀 있고, 날씨는 요즘의 날씨를 염두에 두면 된다. 요즘처럼 태양은 뜨겁고 날은 무지무지 덥다. 밖에만 나가면 숨이 턱 막힌다. 뒤주에 몇 개의 구멍을 뚫어 숨구멍은 터주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도 아니 이리도 무덥고 찌는 듯한 날에 비좁은 뒤주 안에 있는 그를 상상해 보시라. 물을 달라고 애원했지만 물 한 모금 가져다 준이는 없었다. 타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소변을 받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 기운을 잃어갔다 (누군가는 그가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두려움...그 공포....

 

 

바로 이 한 장면이다. 기골이 컸던 그가 비좁은 뒤주 안에 쪼그린채 누워있다. 세자와 뒤주의 크기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어 그 고통을 리얼하고도 참으로 참담하게 표현했다. 튼튼한 밧줄들이 동서북으로  둘러싸고 있고 한 쪽이 비어있다. 그 비어있는 방향은 남쪽이다. 감독은 세자가 죽어서라도 남면(南面) 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니면 사후 그 아들이 아비를 장조(莊祖)로 추존 했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어째거나 이 한 장면은 세자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자가 뒤주를 발로 차며 반발하자 누군가가 행여 뒤주가 부서질까 대못질을 했다한다. 또 누군가는 목이 타 들어가 애원하는 그 옆에 와서 술을 마시며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세자가 타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셨다고도 한다. 세자의 모든 손톱은 뒤주를 긁고 긁어 죄다 망가져있다. 엉덩이 부분의 바지가 더렵혀진 모습도 보인다. 용변을 그대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슴이 메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치의 희생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세자가 미쳐서 살인을 함부로 저질렀던 광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둘 다가 그 이유라 했다. 항간에는 사도세자의 모친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도 한다. 아마도 그의 죽음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결정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정신질환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은 없었으니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째거나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아비가 뒤주 안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그 자식이 목격하는 비극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조는 그렇게 자식을 죽이고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식의 비문을 받아쓰도록 했고 그 이름을 서럽고 슬프다는 뜻을 가진 사도(思悼)라 했다. 영빈 이씨 또한 자식의 죽은 2년 뒤 사망하고 만다. 죽을 죄를 지었든 아니었든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이 어찌 편했으랴...

 

 

영화의 한 장면이 끝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자식도 적(敵)일 수 있다는 왕권의 특수한 상황도 아니요,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아니며, 현실감 넘치도록 당시 상황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한 미술감독의 배치도 아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간 비정했던 한 아비와 뒤주 안에서 죽음을 강제 당한 한 인간의 겪었던 8일 간의 슬픔, 두려움 그리고 좌절, 그렇게 죽어가는 아비를 목격할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했던 그 아들의 심경이다. 때는 253년 전 7월의 무덥고 찌던 여름의 일이라 더더욱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悼).. 과연 인간은 왜 사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 말대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사는 것인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한 인간의 죽음을 깊이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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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관독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탓에 둘의 차이가 어떠한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저자의 관독일기는 그야말로 이덕무에 대한 오마주이며 고요한 자신의 독백지 싶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지은이가 정말로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이라는 것을 감지케 한다. 주로 고전이 독서의 대상일 것이다. 잠과 명으로 그 범주를 제한했지만 그의 독서력과 량은 가히 짐작키 어려운 수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부제가 말하듯 주된 독서는 잠과 명이지만, 책에서는 그 외에도 저자의 고독이 눈에 띈다. 특히 107쪽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는데,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오는 ‘절대 고독’이라는 말보다 그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마치 시퍼런 칼날처럼 말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다’는 말이 무엇이던가. 바로 중용의 백인가도(白刃可蹈)를 이름이 아니던가. 시퍼렇다 못해 하얀 칼날 위를 걷는 용기를 일컬음이다. 그 용기 저편에 서있는 사람은 끈임없는 절대 고독을 견뎌야 한다. 고독을 견뎌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비로소 한 인간은 백인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누가 그 고독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순수하며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시인, 茶兄 김현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茶兄의 詩 '절대고독'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둔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

 

 

 

 

 

시인 茶兄께서 '절대고독'이라 말씀은 하시지만 그에게 고독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 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여 茶兄에게 고독은 즐거움이며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관독일기의 저자의 고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의 독서 일기를 적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 나올 당시에 이미 그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기를 그렇게 적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저자가 그렇게 한 해의 중양절을 시작으로 일기를 적어오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 것은 그 동안의 독서가 그 얼마나 방대할까를 짐작해서이다. 나로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인지라 그저 존경스럽고 부러울 뿐이다.

 

일기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잠과 명을 읽으며 적어간 이 글은 또한 수필의 느낌을 주기도 하며, 내용은 상당히 자조적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저자의 주요 저술은 이 책이 아니라 저자가 일기를 쓰던 당시 주 타겟으로 하고 있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주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관독일기를 하루하루 써간 것이다. 독자로서 이점을 배워두어야 겠다 싶다. 바쁜 와중에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어 내는 저자의 모습은 과연 유배지에 있던 여유당께서 자녀들에게 보낸 서한을 읽은 사람답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도 책을 읽지 않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독서에 게으르고 시간이 나면 딴짓을 하곤한다. 관독 일기는 그런 나에게 좋은 채근을 준다.

 

더불어, 카메라를 새것으로 장만해가며 공들여 찍은 사진들은 아마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음 독서의 순서는 그 책으로 자연 정해져 버렸다.

 

여러 날의 일기들이 대부분 매우 인상적이지만 특히 저자가 남원에 들렀던 날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기고봉의 전설을 잠시 소개 하고 있다. 기고봉은 이퇴계와 수년간에 걸친 필담으로 사단칠정을 서로 교환한 장본인이다. 말이 교환이지 기고봉께서 먼저 도전장을 내밀어 시작된 논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고봉은 이퇴계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궁해진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개진, 발전시켜 반론을 폈던 것이다. 그러한 이황의 저술이 상당부문 임진왜란때 약탈당하여 일본의 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중국의 사상가로 하여금 李夫子라는 호칭을 들은 인물로 부상했던 것은 어쩌면 기고봉의 덕분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매우 인상적인 대목은 안순암의 경어를 언급한 부분이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의 직계 후학으로 “대장부 심중에 일촌 쇠는 녹지 않는다. 大丈夫心中一村鐵未銷”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 말은 마치 논어 중 ‘자한’이 출전인 “삼군가탈사야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師也 匹夫不可奪志也)”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三軍은 제후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많은 군대의 규모로 총 37,500명의 전차가 있는 부대를 말한다. 막강한 군대의 장수의 목을 취할 수는 있어도 필부의 의지는 절대로 꺽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장부와 필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자한 편에 나오는 이 말에서 匹夫라는 말을 더없이 애정하게 되었다. 과연 맹자가 말한 大丈夫와 공자가 말한 匹夫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싶다. 무릇 필부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

 

순암의 기록은 사적인 것이겠지만 지극히 인상적인데, 177쪽의 순암 6잠과 4경을 소개할 때는 그 절정에 달한다. 순암은 자신의 오른 쪽과 맞은 편에 각각4 글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는 주역의 곤괘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문구라고 한다.

 

 

한문을 그대로 옮기면 “敬으로써 안을 곧게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이고, 줄인 말대로 옮기면 “경으로 곧게, 의로서 바르게”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곧 공경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외부 행동을 단속한다는 의미이다. 177쪽

 

저자의 말이 매우 지당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이 敬과 義는 실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밖으로 바르게한다’는 말이 바로 실천력이다. 일생을 통해 경과 의, 두 글자로 삶을 충실하게 살다간 이가 있으니, 바로 조선의 조남명이 아니던가. 하여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는데 압장섰는데 정인홍, 곽재우는 그 대표적인 예라하겠다.

 

 

전반적으로 관독일기는 靜中動을 느낄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해주면서 깊은 사유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하는 능력을 가진 책이다. 조용히 관조하고 싶다거나 숙고의 기회를 가지고 싶은 분이라면 매우 좋은 책이 되어주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두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선, 저자가 잠명으로 고른 대상 인물들 대부분 대단히 훌륭하고 내적 사유를 참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문장은 고고하고 아름다우나 일생이 그렇지 못했던 인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백운거사 이규보에 대한 글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한 명’과 같은 글이다. 나는 이규보의 글이 등장 할 때마다 잠시 읽기를 멈추곤 했다. 이규보는 고려의 인물로 권력에 무던히도 집착한 나머지 온갖 비굴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씨 일가에 빌붙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던 인물이다. 백운거사라는 닉네임도 사실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비관, 은둔했던 당시에 얻은 이름이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가 사모하는 이덕무마저도 그의 인물평을 혹독하게 했겠는가. 이덕무는 이규보가 남긴 글의 가치를 전혀 알아주지 않았는데 ‘추졸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이 덕무의 이규보의 글에 대한 평가에서 ‘추졸’이라는 말보다는 ‘명실’이라는 말에 의중을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글로만 본다면 어찌 이규보의 글을 추졸하다고 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명실'이라는 말로는 능히 이규보의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는 전혀 바르지 못했던 행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던가. 이덕무는 이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라는 평으로 이규보의 글과 그 행동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음을 설파한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남겼다 한들, 그 말을 남긴 인물이 자신이 남긴 말 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았다면 그 언어의 가치와 비중은 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여 사적으로 매우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다른 집고 넘어갈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용』 장구章句에 나오는 계신공구는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에서 온 말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 183쪽

 

이 곳의 부도는 불도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한데, 다음의 불분과 서로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비록 한글로 읽는다 하더라도 대구를 염두에 두고 일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글의 음운법칙을 우선 적용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럴 경우 '부도'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잘못된 지적임을 인정함)   

 

 

또한

호은은 “숨은 곳 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일 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183쪽

 

저자는 위 글을 ‘막견’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莫見乎隱은 ‘막현호은’으로 읽는 것이 맞다. ‘見’을 ‘견’으로 읽으면 ‘본다’는 뜻이 되지만 ‘현’으로 읽으면 ‘나타난다, 드러난다, 명백하다’는 뜻이 된다. 즉 본 장구의 ‘見’은 뒤에 이어 나오는 顯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편, 莫見乎隱 莫顯乎微에 대해서 박완식 선생은 중용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보다 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 없다" -중용(박완식)75쪽 

 

물론 저자의 '숨은 곳'을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은미한 일'을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으로 각각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으나, 이는 중용을 읽어본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혹 아직 중용을 읽을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에게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적어둔다. 

  

참고로 박완식 선생의 이 중용은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자의 집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문제점은 공부하여 스스로 바로 잡으면 될 일이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다산의 중용강의보를 직집 읽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 대안으로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집주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중용 장구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역작이라 감히 평하고 싶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750여 쪽을 꽉 채우고 있는 박완식선생의 이 중용을 손에 드는 순간 몰아의 경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막견이라고 읽는다고 해서 저자의 책을 읽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 이 글을 노트를 해 둔다거나 암기하여 사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정보를 잘 못 전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 할 수가 있어 지적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어쨌든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저자의 고독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저자가 소개한 잠과 명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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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의 선생님 중, 한 선생님께서는 만나 뵐 때마다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벗’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선생님께서 매번 이러시니 참으로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군사부 일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선생님께 벗은 사전적인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사전에는 ‘벗-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어찌 보면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을 뜻하는 ‘친구’라는 말과 대동소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친구'라는 말 속에는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거나 아랫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벗'과 '친구'라는 말은 유의어 일 수는 있겠으나 결코 동의어는 될 수가 없는 것은 벗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제한적 交와 친구라는 말이 가지는 제한적 交 즉, 범주의 차이이지 싶다.

 

어쨋거나 ‘벗’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두 단어의 핵심은 ‘交’이다. 인간 관계 자체가 ‘교’인 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련 성어가 많은 편이다.

 

 

흔히들 일컫는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인상여와 염파의 전설에서 온 것으로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주 잘 기록해두고 있고, 문(刎)이라는 말이 ‘목을 베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목숨을 함께하는 교를 말함이다. 그 얼마나 의미심장한 交이던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장본인인 관중과 포숙은 공자보다 윗대의 인물들로 2500여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교의 전설을 남겼다.

 

 

또한 포의지교, 거립지교, 망년지교등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교의 전설들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지음’이라는 고사에 담겨있지 않나 싶다. '지음'은 매우 널리 알려진 고사이며 신분의 귀천을 뛰어 넘은 좋은 예이다. 지음의 주인공인 '백아'가 거문고의 달인이었다는 점은 그가 비싼 악기를 가질 수 있는 능력자였으며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었음을 암시한다. 시대가 춘추시대이니 만큼 士 혹은 大夫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추측이 된다. 반면 '종자기'는 초나라의 인물로 음률을 잘 구별했다고 하는데 직업은 실상 농사꾼이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이렇게 한탄 했다고 한다. 夜深窓月絃聲苦 只恨平生無子期(야심창월현성고 지한평생무자기-깊은 밤 창에 달이 걸렸는데 괴로이 타는 거문고 소리, 다만 평생에 종자기가 없어 한탄하고 있구나-

 

 

종자기가 죽자 절현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백아의 한탄을 들어보면 백아는 종자기가 죽은 후에도 거문고를 연주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종자기를 잃음으로서 영 흥이 나지 않자 절현을 했을 수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어쨋거나 신분을 초월한 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각설하고, 사실 이번에는 이러한 교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거의 2년 전 풍우란의 저술 중국철학사 상하권을 모두 읽었었다. 그러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노트를 정리하지 못했다. 아니 노트를 정리할 여건이 되었다 하더라도 리뷰는 감히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풍우란의 이 역작을 리뷰로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철학사는 분명 내가 감당하기에는 나의 힘이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저술이다. 그러나 페이퍼라면 부담은 훨씬 덜하지 싶다. 그렇다고 소감을 적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책에서도 교와 관련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풍우란은 장자와 당시의 인물 혜시의 ‘범애만물 천지일체(汎愛萬物 天地一体)-만물을 다 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한 몸이다’라는 공통된 설을 피력한다. (어느 글에서는 이 글의 주인공을 맹자와 혜시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 장자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금방 구별이 갈 것이다)

 

 

물론 확증은 없지만 장자와 혜시의 관계로 보아 충분히 근거가 있음을 시사하면서 그 증거로 그 두 사람에 관련한 장자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풍우란이 소개하고 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어떤 영인(郢人: 초의 서울인 郢의 미장이)이 백회를 자기 코에 파리의 날개 모양으로 발라 놓고 장석(匠石)으로 하여금 깍아내게 했다. 장석은 바람처럼 가뿐히 도끼를 휘날리어 태연하게 깍아, 백회만 떨어뜨리고 코는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영인 역시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낯빛을 변하지 않고 내맡겼던 것이다. 송나라 임금이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장석을 불러 말하기를 “한 번 과인을 상대로 그같이 해보라”하자, 장석은 대답하기를 “저로서는 아직 그렇게 깍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이제 혜시 선생이 죽었으니, 정녕 내게는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상) 315-316쪽

 

저자는 『장자』자체가 우언이 많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제물론이 보여주는 장자와 혜시의 사상적 부합 여부는 확실하다는 점을 방증으로 하고 있다.

 

 

여하튼, 이 대목에서 이참에 말하고자 하는 장석운근성풍(匠石運斤成風)이 나온다. 장석이 도끼를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휘둘러 영인의 코 잔등위에 발라진 파리 날개만한 석회를 깍아내는 것이다. 바람을 일으키며 깍아 내는 장석도 장석이지만, 영인입불실용(郢人立不失容) 역시 감동적인 대목이다. 다시 말해 영인은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얼굴위로 도끼가 날아오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만하면 그러니라 하겠지만, 더더욱 감동적인 交의 장면이 더 등장하는 것이다. 송나라의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급기야 장석을 소환한다. 하여 자신을 상대로 도끼를 휘둘러보라고 하자 영인의 대답은 교의 진정한 의미를 전해준다. 나는 이때부터 그 어느 표현보다 운근성풍을 가장 애정하게 되었다.

 

 

송원군문지(宋元君聞之), 소장석왈(召匠石曰): 신즉상능착지(臣則嘗能斲之) 수연(雖然) 신지질사구의(臣之質死久矣)

 

송나라의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장석을 불러내자 장석이 말하기를: 저로서는 아직 그렇게 깍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도끼를 휘두르는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상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신뢰를 갖지 못하는 왕은 분명 상할게 뻔하다. 장석의 도끼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장석과 그 도끼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늘 참담한 결과인 것이다. 절대신뢰의 여부가 가지는 차이점이다.

 

 

그 후일담으로 중국철학사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백아가 절현(絶絃)을 했듯이 장석도 은부(隱斧)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현이나 은부도 교의 의미심장함을 전달하는 중요한 대목이겠지만, 장석이 날카로운 도끼를 휘날리며 얼굴을 향할 때 영인의 얼굴 빛 조차 변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그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나에게는 참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경지교도 좋고 관포지교도 좋지만 나는 영인과 장석의 이야기에서 交의 핵심인 무한신뢰를 절감하게 되었다.

 

사람은 공수거한다고 한다. 자신의 손에 쥐는 것은 전무하며 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하여 인간은 늘 고독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와 어울려 살아야하며 자신의 집 안에서조차 가족과의 交로 출발을 하는 것이 삶이다. 잠 자는 시간을 빼고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감을 때까지 인간은 交 안에 있다.

 

다양한 형태의 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인 교의 목적은 내적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기보다는 흔히 이익에 우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여 사마천이 자신의 저술, 열전에서 장이와 진여의 바르지 못한 문경지교를 설득력 있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되돌아 갈 때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인 交를 자신의 가슴에 담아가는 것은 어떠할까. 사람은 자신의 종말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사선에서 서성이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일하게 모든 것을 버리는 일 뿐인 것이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서,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분명 자신의 交일 것이다. 자신의 가슴, 죽음 앞에서도 그 가슴 속에서 미처 도려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것이 交이다. 아픈 듯 시리며 지극히 아름다운 交가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하는 交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 아니던가...

 

천상병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시를 썼다.

 

 

 

 

 

 

 

 

 

 

 

 

 

 

 

 

歸天(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부유했던 시인도 아니요, 권력을 손에 쥔 시인도 아니었으며, 정상적인 신체를 가졌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토록 아름다우며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교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자가 혜시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이유도 交에 있었던 것이다. 장자야 말로 무엇이 부족하여 저토록 안타까움을 토로했겠는가. 혜시가 죽음으로서 자신의 소중한 교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장자 보다는 혜시가 더 행복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교는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아름답게 소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하는 것이며 어쩌면 삶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 있다. 그러한 교를 가진 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자신의 생을 죽는 그 순간까지 가장 의미있도록 해주니 말이다..내가 그러한 교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싶은 이유이다. 그러한 교를 가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그보다 더 후회스러운 일이 나에게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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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게 되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실까요?

저는 사람을 참으로 믿지 못했답니다. 누구라도 제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은 한번쯤은 저를 서운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도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교, 참 좋은 단어입니다.

차트랑 2014-06-20 20:1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별스럽지 않은 글에 행복을 느끼셨다니 부끄럽습니다
저의 대략적인 그간 상황을 짐작하시겠지만
지난 경험이 약간은 표현된 글이기도 하답니다

물론 저는 아름다운 교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앞으로 아름다운 교를 가져보고 싶다는 바램이 담긴 글이고
제게도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 중이랍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저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교를 가지실 수 있기를...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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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적조하시네요.
바쁘신건가요, 아님 아프신건가여?

수능이 얼마 안남아서 그런가요~.
음악도 완전 수험생 버젼으로 달려주시구...
부르크너, 오랫만이네여~.
반가워라~^^

2012-09-20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10-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죠?
안부 남깁니다.^^

2012-11-24 0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8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2-2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갑자기 너무 모습을 안 보이셔서, 걱정이 됩니다.
한동안 제 자신이 너무 바빠서 정신을 차리지 못 했습니다.
연말에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고운 일 담뿍 누리시는 새해되시기 바랍니다.

추신. 저는 마녀고양이입니다. 올 한해 감사드립니다.

2013-01-22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5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6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