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의 단초가 되어주신 글쓴이 1께 심심한 고마움을 전해드린다.
어느 글을 읽다가는, "위대한 일은 놀이처럼 되어야한다" (p140), 라고 쓴 인용문을 마주했다. 순간, 나의 시선은 마치 어둠의 정적을 만난듯 움직이지 못하고 한동안 그 문장에 머물렀다. 나의 시야에 그 문장 이외의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 앞서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p77) 라는 인용문에 1차 충격을 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글쓴이 1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 당시 자신의 놀란 심경을 밝혔는데, 그 제목을 본 내 가슴인들 무사했겠는가. 1차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연타로 2차 충격을 받은 셈이었던 것이다.
[[[ <<<<----- 글쓴이 1께서 읽은 책]]]
순간의 충격을 그나마 진정시켜준 것은 글쓴이 1의 생각이었다. 그 아래에, 글쓴이 1은 "좋아하는 일이거나 잘 할 수 있는 일이거나 그 일을 사랑하고 몰입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위대한 일'이 아닐까" 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사실 이 정도의 견해도 내게는 충격이나 다름이 없지만 완곡한 어법이라 인식되어 비교 우위에서 오는 위로가 되었다는 뜻이다.
충격과 동시에 좋았던 점도 발견했다. 글쓴이 2의 글을 읽은 후의 일이니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이다. 글쓴이 2 께서는 '소년 동주'의 리뷰를 통해 윤동주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니체와 윤동주가 서로 같은 사유를 했구나 싶었던 것이다. 다만 윤동주는 '잘 사는 삶' 이라 표현을 했고, 니체는 '위대한 삶'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이 둘을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은 아주 좋은 발견이었다. 이렇게 좋은 발견을 주신 글쓴이 2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 <<<<------- 글쓴이 2 께서 읽은 책 ]]]
사실 평소 대로라면, 글쓴이 1 의 견해를 읽으며 나로서는 '음, 전적으로 동감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짧지만 강렬한 인용문과 글쓴이 1 의 사유가 만나 형성된 견해를 접하는 그 순간, 내 자신의 삶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갈 수 없는 자백의 시간을 만난 듯 말이다. 마치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의 죄를 실토를 해야하는 순간을 맞이한 상황 말이다.
글쓴이 2의 견해대로 아주 많은 사람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삶을 살았을 것이고 또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반대 급부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대척점도 분명 존재하게 되어있는데, 그 대척점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뜻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숙제'는 '해야하는 것'이다. '해야하는 일'은 흔히 즐거움을 수반하기 어렵다. 다행히 자신이 좋아하는 숙제를 만났을 때라면 그 숙제를 이행하며 즐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행함을 인내해야 하고 숙명처럼 혹은 운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대부분의 삶은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면서 숙제의 연속으로 점철된 삶이다. 나의 삶처럼 말이다.
마치 무언가에 쫒기듯 살아온 내 삶의 시간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흔히 이런걸 파노라마 라고 하던가. 그 인용문은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가 않은 나의 시간들에 더욱 선명한 생채기를 내는듯 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온 나의 인생을 잠시 반추하는 순간, 마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움직일 수 없는 정적 속에 모두 갖혀버린듯 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지난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멈추는 찰나 공간이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나의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존재는 그 존재의 존재 기반을 상실해 버릴테니 말이다. 그러나 살아있기에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삶을 할퀴듯 지나가는 모든 해야할 일들은 설사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라 하더라도 피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반발성 되뇌임을 떠올려본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삶이 해야할 일들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여지를 니체는 남겨주었다. 채찍과 당근을 또는 병과 약을 남기듯, 니체는 질식해 죽을 처지에 놓인 자를 위해 숨구멍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니체 본인이 말 하기를,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 자신의 공식은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라고 말했다. 천만 다행하게도 니체는 'Amor'에 특별한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니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니체의 'Amor'에 단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 라고 누가 내게 큰 소리로 외친다해도 소용은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혔으니까.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그렇다면 나에게도 니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Amor'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도 'Fati' 좀 하겠다 이거다.
'Amor Fati'는 니체 철학의 어느 파편에 불과한 일련의 한 고리가 결코 아니다. 'Amor Fati'는 니체 철학의 결정체이자 최종 결론이나 다름이 없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상체이니 말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니체의 철학이던가!! 그 속뜻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적인 그의 발언을 빌어온다면 우리 모두는, 아니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아모르 파티로 가면 될 것 아니겠는가.
위대한 일이 때로 놀이처럼 되지 않더라도 면책의 틈을 내어준 니체에게 감사하고 이 글을 쓰도록 단초를 주신 분께 또한 다시 한 번 더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린다. 글쓴이가 덧붙인 자신의 견해가 또한 나의 '해야하는 삶'에 완곡한 위로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나의 이런 나이브한 생각과는 달리!!! 정녕 니체가 해준 말(위대한 일은 놀이처럼 되어야한다)과 정확하게 맞닿아있는 한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