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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 놈ㅡ 자신의 터전을 스스로 저버린 놈


2 번 놈ㅡ역사를 스스로 팔아버린 놈

두 놈 중 어떤 놈의 죄가 더 크다 할 수 있겠는가.


저버려서는 안되는 땅을 저버리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삶의 터전을 팔아버리는 것은 삶을 포기한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땅은 되찾을 수있다. 
물론 너무나도 큰 댓가를 치루게 되지만 말이다. 

유태인들은 땅을 팔아버린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저버렸다. 
이스라엘의 자국법상 수도와 국제법상 수도가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땅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수백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8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 
이는 땅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역사를 내다 팔지는 않았다.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진정어린 사과를 받아냈다. 
엘리자베스가 누구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던가?
아일랜드에게는 깊이 고개를 숙여 사죄 했다.
역사를 팔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일랜드의 아픔은 '안젤라의 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책을 읽는 이유를 독자에게 깨닫게 해주는 아주 좋은 책이다.

역사를 팔아버리면 되돌릴 수가 없다. 
이뻐보이지는 않는 민족이지만 유태인들은 땅은 잃었어도 역사를 팔아먹지는 않았기에 그 땅을 되찾고 1948년 나라를 재건했다.

그러므로
역사를 팔아버린 놈은 결코, 그리고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박경리선생은 '일본산고' 를 썼다. 
역사를 팔아버린 대역 죄인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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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어느 알라디너의 네줄짜리 페이퍼를 읽고 댓글을 달려하다가 말이 길어져 서재에 쓰게되었음을 먼저 알립니다)  


1번  ㅡ 1번은 정말 힘이 모자랐다. 
그 결과 온갖 수모를 겪었고 울분이 일었지만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죄다 빼앗겼다. 
도둑질 당한 귀한 유산들은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농사지은 곡식도, 산에 있던 나무도, 들에있던 가축도 빼앗겼다. 
밥 먹는 그릇과 숫가락마저 빼앗겼다. 
전 국토는 그렇게 유린당했다. 

심지어 자식들마저 빼앗겼다.
부모와 형제는 때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자식들은 끌려가 착취를 당하다가 죽곤 했다.
여자들은 겁탈을 당했다. 

이렇듯 자신의 따스한 봄을 온전히 빼앗겨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갔던 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적들에게 부인마저 빼앗기고 
자신은 독살당했던 너무나도 힘이 모자랐던 자 말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는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게되었다. 비폭력이라 했거늘 태극기를 든 7천여명이 학살당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팽재유가 부르는 '봄처녀'와 플라시도 도밍고와 홍혜경이 함께 부른  '그리운 금강산'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빼앗겼던 봄이 다시 돌아오고, 금강산을  되찾은 느낌이라서 말이다.)

이렇게 정말로 무능력했던 자,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온전히 떠 넘길 수도 없는 자,
바로 1번이다.



2번  ㅡ 저항할 힘이 있는데도 남의 가랑이 밑을 스스로 기어들어간 놈, 
비열하고도 파렴치한 자가 있다. 

더구나, 백성들은 우리가 싸울테니 저항하자고 했다.
상대의 특성은 흥미롭게도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며 비열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며 싸우자했다.

약하게 보이면 또다시 밟으려 들테니 우리가 강하게 나가야한다고, 
더구나 우리는 그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외치는 국민의 간절한 염원을 하루 아침에 저버린 자가 있다.
 
지난 언젠가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자, 정공법으로 나가시라고, 개싸움은 우리가 하겠다고 팔을 걷어 붙이던 국민들이 이번에도 또 싸우자 하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우리도 저항할 힘이 있으니 싸워 이겨보자는 애원을 저버리고 
이 자는 스스로 무릎을 먼저 꿇음으로써 프라이드가 강한 전국민에게 굴욕감과 깊은 상처를 안긴 자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에도 역행하는 자,
모두가 아니라는데도 스스로 먼저 무릎을 꿇은 자, 
그리하여 상대가 여전히 우리를 얕잡아보게한 자, 
털리지 않아도 되는데 주머니고 뭐고 죄다 털리는 자,
조문 다녀온다고 혈세들여 가더니 조문도 안하고 돌아온 자,
전혀 생각이라고는 없는 자,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자,
바로 2번이다.


자, 이 둘 중 어떤 놈의 죄가 더 크다고 할수 있겠는가.
죄가 더 큰 놈을 단죄해야한다면
그 어떤 놈을 단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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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9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번이 누군지 다 압니다
언젠가 역사의 심판 받지 말입니다!
 


박기서는 어느 날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박공 태보를 생각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던 김구를 읽었던 것이다.
기서는 김구에게 깊이 감명받았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암살한 자를 자신이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책은 이래서 위험한 물건이다.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물건 말이다.)

김구선생을 암살한 자는 세상에 잘 알려져있듯이 안두희다. 
안두희의 배경에 누가 있을 것이라들 했다. 
정치와 관련하여 백범을 견제하는 세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안두희는 살인을 사주한 자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민족의 스승이자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 현재의 헌법에서도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지대한 영향력을 조국에 남긴 위대한 1세대 정치인인 백범은 국민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독립 정신과 다름없는 분을 암살한 안두희는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3개월 후 15년으로 감형받았다. 
박기서의 경우만큼이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는 죄다 그만한 이유긴 있기마련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출소하여 군인으로 활약을 한다. 
더더욱 이상한 일은 완전 복권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결코 국민으로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안두희를 타살한 박기서도 복권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김구선생을 암살한 범인이 복권된 것이다.

 권 아무개씨가 안두희를 납치 고문한 끝에 살인을 사주한 사람은 다름아닌 이승만이다, 라는 자백을 받아냈으나 안두희는 후에 번복했다. 끝내 대한민국은 제대로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어째거나 안두희는 잘먹고 잘살았다.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들은 의기로 가득한 박기서를 자극했던 것이다. 
내 이를 좌시하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정의봉을 손수 제작하여 안두희를 찾아가 일단의 결의를 실행하게 된것이다. 

 
시대는 어느덧 바뀌어 임인년, 일본왕의 생일 축하연이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가하면,
 대한민국 3.1절에 일장기가 내걸리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매국노 이완용은 3.1 운동을 펼치는 국민동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시위를 한다고 바뀔것 같더냐? 
우리는 힘이 없으니 일본의 덕을 보는 것이 맞다.'

 이완용은 3.1운동에 나선 동포들에게,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침략과 그 지배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조선이다. 그러니 더이상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일제에 항복하라' 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누구는 체력이 약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체력이 강인하기도 하다. 
약한자는 강한자의 지배를 받아 약탈을 당하고 겁탈을 당하며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모두 빼앗겼을 때, 자신의 체력 혹은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해야만 하는 것인가? 
인간과 짐승은 정녕 다르지 않단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약자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어느 분께서 노래처럼 부르던 '자유와 정의 그리고 공정'은 이럴때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인가? 

 왠지 박기서가 떠오른다. 
역사의 진실은 변함이 없건만 시대는 어느덧, 아니 많이도 변해있구나...

가장 진실한 것은 역사이고, 되묻지 않으면 역사는 잊혀진다... 
시대는 왠지 반남 박의 별과도 같은 박공 태보와 기서가 떠오르는 시대이다.....
이를 혹자들은 시대정신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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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씨의 본관인 潘南은 나주의 潘南面이다. 
인물로는 박상충, 박은, 박세채, 박세당, 박태보, 박지원, 박규수, 박영효, 박경리등이 있다. 
모두 조선의 역사에 일장당관의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라 할수있다. 

 박 ㅇ 서(緖), 박찬(贊) ㅇ  , 박 ㅇ 雨(우)의 돌림자를 를 쓴다면 
반남이 본관일 확률이 높다. 
박항서, 박찬호, 박찬숙, 박찬욱 등 익숙한 현대의 인물들이 이에 해당하는 예라 하겠다.

 
어째든,
숙종이 몸소 반남 박씨를 충신의 가문이라 칭하고 박태보공을 정경대부로 추증했던만큼, 
반남 박씨는 충절의 피가 흐르는 집안인 셈이다. 
그런 반남 박씨의 후손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기서(琦緖)'이다.
박항서와 같은 항렬(반남 박 25세손)의 박기서는 1996년 당시 평범한 48세의 버스 운전기사였다. 
그러던 그가 그해 가을, 미리 준비해간 몽둥이로 어떤 사람을 타살시키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박기서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박기서는 살인죄로 1심에서 8년 구형에 5년형을 선고받았고, 
최종심에서 3년형으로 결정된다. 

 살인죄가 3년형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애초에 살인을 계획한 범죄 인데도 말이다.
박기서는 거사를 결심하고 40cm의 몽둥이를 손수 깍아 '정의봉(正義奉)'이라는 이름을 써 넣었다. 
사전 답사를 마친 후, 가택에 침입하여 그 부인을 묶어놓고는 누워있던 79세의 노인을 몽둥이로 살해했고 
그 사실을 자백했다.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범죄가 확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98년 3.1절 사면대상에 해당되어 1년 5개월만에 출소하는 이례없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재판 중 그의 변호사는 '박기서는 무죄다!!!' 라고 주장했고, 청중들도 무죄라고 소리를 크게 질렀다는 점이다.
박기서가 투옥되자 각계 단체들과 개인들이 격려금과 편지를 보내왔다. 구명위원회도 생겨났는데, 이에 서명한 인사들은 9천명에 달했다.

 
뜬 소문에는 사건담당 형사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이라 말하고 수갑을 채우지도 않고 연행했다고도 전해졌다. 
( 에이, 설마..... )

어째든, 
익명의 누군가는 투옥된 박기서에게 매달 100만원을 보내왔다. 
출소 후에도 박기서는 일자리와 집등을 주변인들로부터 제공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출소 후, 정의봉도 돌려받았다. 
아니, 살인의 증거물을 돌려받는 이런 일이 다있다니....

 그 후 박기서는 택시운전사가 되었고 아마도 현재도 택시운전을 계속하고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대체 박기서는 누구를? 왜? 죽였던 것일까.

(물론 검색해보면 다 나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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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태보공을 죽일 작정이었고
태보공은 여기서 죽을 작심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고문,
불에 달군 인두로 전신을 남김없이 지지는 낙형, 
무릎을 모두 으스러트린 압슬형, 
그리고 살이 터지고 찢어지는 혹독한 장형,
태보공의 육신은 이미 너덜거렸다.
(조선의 낙형과 압슬은 13번을 지지고, 무릎을 13번 짓 이기는 것을 한 차례라고한다.
숙종은 밤이새도록 태보의 몸을 26차례 지지고 26차례의 압슬을 가했다.
너무나도 가혹했는데 그것은 숙종의 성정이 그러했기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올바르고 굽힘이 없었으며 영혼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태보여......

 

그렇게 지난 밤부터 밤이 새도록, 
그리고 날밝은 시간까지 수도 없고문과
셀수도 없이 내리치는 장을 견디지 못하고 
태보공의 정강이 뼈가 결국 몸 밖으로 튀어나오니, 
태보공의 정신과는 달리 몸은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장이 급히 소리질렀다, 
응교나리의 다리를 싸매려하는데 누가 옷을 벗으려는가?
김몽신과 조대수가 다투어 옷소매를 칼로 베어주었다. 
이때 태보공이 말했다.

'내 도포를 베라'
하여 나장은 태보의 도포로 뼈가 튀어나온 다리를 감쌌다.

 
귄대운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숙종의 앞으로나가
부디 태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읍소했다.

이지경이 되자 비로소 숙종은 못이기는 척 태보의 귀양을 명했다. 
온전한 것은 오직 태보의 정신 뿐, 나머지는 모두 망가진 채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태보는 지금의 명동에 있는 집에들러 책을 꾸리고
귀양길에 올랐다.
 태보공이 한강을 건너 노량에 이르는 것은 황혼이 지난 뒤였다.
태보는 더이상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 세당이 아들 태보의 마지막을 보러왔다.
세당은, '조용히 죽어 너의 마지막을 빛내라', 고 했다.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나이다', 태보공이 답했다.

 서계선생께서 '한 글자만 써다오. 
너의 글을 보면 너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지않겠느냐.' 했다.

 세당이 다시 태보에게 물었다. 
'네 죽으면 어디로 가고 싶으냐.'

태보공은, '김포 산소로 정했습니다 지관 김명하가 알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서러워 마십시요' 라고 답했다.
(박공의 태보의 묘는 의정부 장암동에 있다고 한다. 실기와 다름없는 박태보전에는 '김포 산소'라고 써있다. 
여기서 말하는 김포가 장암동인지는 알수 없다)

 서계공이 문을 닫고 나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했다.

 
지친 태보공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숨 끊어지기가 어찌 이리도 더디단 말인가......'
그리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배를 떠나다 멈추어 선 곳,
노량진 사육신의 묘지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이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박태보전에는, 온 천하가 모두 울었다, 라고 써있다.

오두인은 의주로 유배를 가던 중 파주역에서 사망한다.
태보공이 죽은 이틀 후의 일이다.

 오래지 않아 숙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하교했다.
'오두인과 박태보의 관작을 회복하라!'
오두인은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박태보는 정경대부로 추증하라. 

그의 가문은 충신의 가문이다. 
그 가묘에 제사를 올리도록하라!'
그리고 임금 스스로 제문을 내려주었다.

'고 목사 박태보 신령에 제사하노라.
갈고 꺽어도 부러지지 않는도다
슬프다 경의 아름다운 기질은 밖은 온화하고
안은 씩씩하도다
착한 아비의 가르침을 받아 
아름다운 이름이 일찌기 들리도다

의리는 인륜을 밝히고
충성은 내 그른 마음을 두루잡더라
일편단심은 해와 같고
귀신곁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터라
슬프다 내가 살피지 못하여
경으로하여금 화를 입게했도다

열번 죽기에이르러도 
본 마음을 잃지않았고
목숨버리기를 달게하였다.




슬픔과 정성으로 향을 피우는도다
착한 신령이 아시겠거든
이 술 한잔을 흠향하라



 아름다운 이름은 백세에 비추이리다'


그 후 영조도 태보공에게 제문을 내려주었다.
'곧으시도다 문열공이여 굳은 절개 하늘을 깨웠고 
의리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도다. 
모든 신령은 아시겠거든 이 잔을 굽어 흠향하시라!'

 
 1896년, 황해도에서는 쓰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을 그야말로 두들겨 패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을 주도한 이는 당시 나이 겨우 스물 한 살의 젊은 청년, 
의기와 기백이 넘치는 김창수라는 인물이었다. 
김창수는 체포되었다. 
살인의 이유는 하나, 사망자가 을미사변의 가담자이고 민비를 시해한 者였다는 것이다. 

 김창수는 다름아닌  백범 김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구선생은 21세의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서 김구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박태보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백범일지), 라고.

 반남 박, 태보공은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태보공이여, 정녕 그 이름 백세에 비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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