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逆鱗)」의 개봉과 동시에 관람을 했지만 관련 글을 쓰는 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늦어도 한참 늦은 북을 치는 중이랄까... 우리 역사의 가장 큰 획을 그은 왕들에 관련하는 도서나 영화 혹은 드리마가 적지 않다. 역린의 주인공 ‘정조’ 역시 그 중 하나여서 수많은 이야기꺼리를 가진 장본인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몇 있어 나름대로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이제야 하게 되었다.

 

현대의 대중들에게 워낙 잘 알려진 정조는 ‘정조(正祖)’ 라는 묘호(廟號)만이 아니라 ‘산(算 혹은祘)’이라는 휘(諱)까지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게다가 홍재(弘齋)라는 호(號)도 알려진 독특한 인물인데 이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서재에는 홍재(弘齋)라고 쓴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정조(正祖)라는 묘호만으로도 조선의 22대 임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조는 임금이었기 망정이지 학자로서도 당대 모든 신하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였고 그의 활은 신궁(神弓)이라 했다. 우리 역사를 통 털어 신궁이 셋이 있는데, 역시 잘 알다시피 1대 신궁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즉 주몽이고 2대 신궁은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 그리고 마지막이 정조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왕에 대놓고 살수를 보내는 역모를 꾸민 사건의 하루를 다룬 영화이니 어찌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임금을 살해하기위해 궁 안으로 살수를 보낸다... 중국에서도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보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역사상 유일한, 전무후무한 일이 아니던가..

 

 

이 사건은 조선이 정치적으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전형적인 형태를 가진 나라였다는 점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한마디로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알던 시절의 전설이 아니고서야 발생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와 같은 이 영화를 보며 정말로 인상적이며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장면은 바로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영화는 사도 세자가 사망하던 당시의 장면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영조 38년, 즉 1762년 음력 5월 13일자로 뒤주 안에 갇힌다. 그 해의 5월은 윤달이었다. 양력으로 치면 1762년 7월 4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28세를 일기로 그가 숨을 거둔 날은 양력 7월 12일로 뒤주 안에 갇힌 상태로 사망하기까지 여드레가 걸렸다. 그가 갇힌 뒤주의 크기는 가로세로 약 160cm 의 크기였다. (뒤주 안에 가두어두는 것은 장인은 홍봉한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사도세자의 키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골이 장대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서울대의 해부학 교수들이 조선인(15-19세기)의 키를 연구한 결과 당시 성인 남자의 평균키는 161cm 이고 여성은 150cm 였다. 이는 유골의 넓적다리 뼈를 기준한 것으로 사람의 신장을 추정해내는 해부학적 근거를 가지며 인간의 신장 측정법으로 학계에서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일본인들의 키는 우리 선조들의 키 보다 5∼6cm가 작았고 그리하여 왜놈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의 평균 키을 기준으로 보아 기골이 장대했다는 증거는 그가 즐겨 사용했다는 월도(月刀)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월도는 그 옛날 촉한의 운장(雲長)이 휘둘렀다는 월도(18kg)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3근 14냥으로 약 2kg 정도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명으로 백동수, 이덕무등이 완성한 조선의 군사 훈련용 병서로 이에 근거하여 월도의 무게를 알수 있다. 그러나 주인에 따라 월도의 무게나 길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는 영조 당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삼장군의 월도가 그 증거이다. 이삼장군이 난을 평정하는 전투 과정에서 생긴 격검흔이 뚜렷한 월도로 길이는 191.5m, 무게는 2.9kg이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본다면 조선의 월도의 길이는 2∼3m 이고 무게는 2∼3kg 의 무게였을 것이다. 길이가 길고 적잖이 무거운 월도에 능했던 사도세자의 '기골이 장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사도세자의 키는 평균치보다는 훨씬 웃돌았을 것이다. 비합리적일지는 모르겠으나 사도세자의 키를 170으로 설정해보자. 고려의 무인 척준경의 키가 당시 남달랐던 180cm 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170cm 라는 설정은 과장된 수치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뒤주의 크기는 160cm 이다. 키가 170cm인 사람이 가로세로 160cm인 뒤주 안에 갇힌다. 물론 대각선이 나오기는 한다. 수학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ㅠㅠ.

 

 

이렇게 비좁은 뒤주 안에 사람이 갇혀 있고, 날씨는 요즘의 날씨를 염두에 두면 된다. 요즘처럼 태양은 뜨겁고 날은 무지무지 덥다. 밖에만 나가면 숨이 턱 막힌다. 뒤주에 몇 개의 구멍을 뚫어 숨구멍은 터주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도 아니 이리도 무덥고 찌는 듯한 날에 비좁은 뒤주 안에 있는 그를 상상해 보시라. 물을 달라고 애원했지만 물 한 모금 가져다 준이는 없었다. 타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소변을 받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 기운을 잃어갔다 (누군가는 그가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두려움...그 공포....

 

 

바로 이 한 장면이다. 기골이 컸던 그가 비좁은 뒤주 안에 쪼그린채 누워있다. 세자와 뒤주의 크기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어 그 고통을 리얼하고도 참으로 참담하게 표현했다. 튼튼한 밧줄들이 동서북으로  둘러싸고 있고 한 쪽이 비어있다. 그 비어있는 방향은 남쪽이다. 감독은 세자가 죽어서라도 남면(南面) 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니면 사후 그 아들이 아비를 장조(莊祖)로 추존 했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어째거나 이 한 장면은 세자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자가 뒤주를 발로 차며 반발하자 누군가가 행여 뒤주가 부서질까 대못질을 했다한다. 또 누군가는 목이 타 들어가 애원하는 그 옆에 와서 술을 마시며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세자가 타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셨다고도 한다. 세자의 모든 손톱은 뒤주를 긁고 긁어 죄다 망가져있다. 엉덩이 부분의 바지가 더렵혀진 모습도 보인다. 용변을 그대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슴이 메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치의 희생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세자가 미쳐서 살인을 함부로 저질렀던 광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둘 다가 그 이유라 했다. 항간에는 사도세자의 모친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도 한다. 아마도 그의 죽음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결정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정신질환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은 없었으니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째거나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아비가 뒤주 안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그 자식이 목격하는 비극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조는 그렇게 자식을 죽이고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식의 비문을 받아쓰도록 했고 그 이름을 서럽고 슬프다는 뜻을 가진 사도(思悼)라 했다. 영빈 이씨 또한 자식의 죽은 2년 뒤 사망하고 만다. 죽을 죄를 지었든 아니었든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이 어찌 편했으랴...

 

 

영화의 한 장면이 끝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자식도 적(敵)일 수 있다는 왕권의 특수한 상황도 아니요,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아니며, 현실감 넘치도록 당시 상황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한 미술감독의 배치도 아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간 비정했던 한 아비와 뒤주 안에서 죽음을 강제 당한 한 인간의 겪었던 8일 간의 슬픔, 두려움 그리고 좌절, 그렇게 죽어가는 아비를 목격할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했던 그 아들의 심경이다. 때는 253년 전 7월의 무덥고 찌던 여름의 일이라 더더욱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悼).. 과연 인간은 왜 사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 말대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사는 것인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한 인간의 죽음을 깊이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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