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말로는 날이 추워지니 절친의 몸이 더욱 쇠약해지고 급기야 덜컥 병이 들어 혼절을 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약을 처방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그간의 과정을 이야기 하는 사이 한참 만에 이 수류탄이 눈을 떴다. 절친의 말로는 몸이 점점 아파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순간, 기절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의사가 와서는 내게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이 친구는 현재 폐가 찌그러진 상태인데, 이를 ‘기흉’이라 한다고 했다. 이 기흉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허파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워낙 체력이 약하고 폐 또한 약한 사람이라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거였다. 게다가 또 뭐라더라...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여하튼 담배도 안 피우는 넘이 그 말로만 듣던 허파에서 바람이 샌다니...허헛, 참 내원, 젊은 넘이 가지가지 한다... 어쨌거나 결론은 이 친구를 웃기면 절대로 안된다는 거였다. 환자가 웃으면 폐의 손상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는 대수롭잖게, 네~! 했다.
의사가 나가자 나는 이 친구를 돌아보며,
너는 복도 많다~, 남들은 아파서 죽는다던데, 너는 웃으면서 죽게 생겼네?
별 뜻없이 한 말인데 이 말을 들은 이 친구가 갑자기 웃음보를 터트렸다.
순간, 의사의 주의가 생각나,
어라라? 너 웃으면 안되는데?
했더니, 이번에는 통증이 오는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라라... 이게 아닌데...
웃음은 터지고 가슴은 아파오고, 이 친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웃다가는 그만 가슴을 부여잡으며, 악! 하고 쓰러져 버렸다.
아불싸~! 하고, 나는 간호실로 뛰어갔다.
간호사는 이 친구를 긴급 이송했다.
누나가 잘 봐달라며 당부하고 돌아갔는데 그러기는 커녕, 내가 말 한마디로 이 친구를 죽이는구나... 싶은 것이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한 참 만에 친구가 돌아왔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죽었나 살았나 다가가 손을 가만히 만져봤다. 다행이 손이 따듯했다. 한 참 만에 이친구가 눈을 떴다. 이친구가 눈을 뜨는 것을 보자 나는 그만 긴장이 풀렸던지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지루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누나는 심심하면 테레비라도 보라 100원짜리 동전을 한줌 쥐어주고 갔다. 그 병원에는 병실에 테레비가 있었는데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으면 얼마간의 시청이 가능했다. 드리마라도 한 편 보려면 수백원을 투입해야 했다. 지금이야 병실마다 테레비를 매달아 놓아 돈을 내는 일이 없지만 당시에는 환자와 가족에게 테레비로 또 다른 영업을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친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친구가 잠시 깨어있는 사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에게 한하운의 시를 읽어주곤 했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다른 책을 찾는다.
친구는 나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병이 나으면 나의 고향을 가보고 싶다고, 나는 데려가마 했다. 나의 고향에 가 보고 싶어하는 친구, 나도 너의 고향에 가보고 싶구나.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동료들이 문병을 온다는 것이었다. 어라라 하고, 나는 문병은 절대 사절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절대 안정과 일맥상통하는 나의 적절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죄다 무지렁한 넘들은 내 말을 당췌 알아먹지를 못했다. 아니, 너네들 다녀가는 순간, 이 친구 죽을지도 모른다, 는 내 말을 통 믿지를 않은 거였다. 그런게 잇딧냐며 내일 보자고 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거다. 이런 무지렁하기는, 어딧기는? 여깃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나 저나, 낭패다 ㅠ.ㅠ. 요즘처럼 스맛폰이 있다면 암 때고 전화를 하거나 가독, 문자 또는 이메일로 상황을 알려줄 수 있겠다. 아니 일명 가스에 인증 샷을 올려 환자의 상태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허나, 당시는 현재와는 많이 달라서 금지곡과 금서가 있던 시절이 아니던가. 또한 편리하게 전화기를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헌.책.방. 하면 청.계.천! 하던 그 시절 말이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당황하여 나는, 여기는 절대 안정, 엉? 특히, 절대로 환자를 웃기지 말것!! 하자, 그 중 상 무지렁한 넘 하나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는, 환자는 많이 웃어야 빨리 낫는데이~!! 했다. 별것도 아닌데 사람의 수가 많다보나 여기 저기서 웃음이 삐질거린다. 웃음은 전염성이 확실히 높다. 메르스는 저리가라다. 여기저기서 삐질거리던 웃음이 어느 순간 터져버렸다. 결국 이 수류탄의 웃음보까지 터트려버린 것이다. 큰일이다! 싶은 순간, 아니나 달라, 이친구가 다시 가슴을 부여잡고는 또 악! 하고 쓰러지는 거다. 아~! (안)되는 넘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이 친구는 다시 어디론가 실려 갔다.
보통 약골들은 체육대회때 물 주전자를 나르거나 뒤에서 응원하기마련인데, 이 친구는 그렇지가 않았다. 꼭 앞에 나선다. 그러니 몸이 파김치가 되가지고는 피곤해서 죽을라 그런다. 다음 날 일어나지도 못할거면서 기를 쓰고 덤벼든다. 성질도 어찌나 화끈한지 못마땅한 꼴을 못 본다. 뻑-하면 쌈박질이다. 안동의 깊은 산골, 냥반댁 출신인 이 친구는 불의를 참지 못했다. 뿔끈해가지고는 죄다 참견이다. 한마디로 오지랖이 하해와도 같았다. 그러나 호방하고 그 기개가 높은 것은 부인할 길이 없다. 나는 그의 호방함과 기개를 높이 샀다. 사내란 저래야 하는 법!
또 오랜 시간 만에 만에 친구가 병실로 돌아왔다. 진짜, 더 이상 웃.으.면. 안.된.다. 더 웃으면 이 친구는 죽음이다. 문병객들은 사고를 쳐 놓고는 벌써 돌아가고, 친구와 마주했다. 마음이 착잡하다. 이러다 친구를 잃는 것은 아닌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답답할 줄이야...
그리고 나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책을 하나 골랐다. 왜냐면 친구가 내 책꼿이에 있는 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책은 정현종외 공저의 「시의 이해」였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에게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고,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마냥 읽던 그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니 국문과도 아니면서 시를 왜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와 나는 시를 제법 읽었다. 「김춘수 전집」은 기본 장착하고 있었고, 멋도 모르고「시의 이해」를 읽으려 덤버들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처럼 시를 읽는다면 배고픈 시인이 세상에 어딧겠나?”
당시에 시집을 꽤나 가지고 있었다. 영미 시와 국내 시집를 모두 더하면 100여권이 넘어갔다. 영미의 시인들은 강의 시간에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듣는 이름이고, 솔.까.말. 친구와 나는 영미 시에서는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용은 어떨지 몰라도 문화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시의 맛깔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감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한글이 주는 표현의 자유로움과 한글이라는 언어가 주는 뉘앙스의 풍부함, 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매우 제약이 따르는 것이 영미시라고 느꼈다. 물론 이는 영미시를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만 말이다. 외우려고 시도했던 시는 겨우 몇 편에 불과했고, 그 중 하나는 미국의 롱아일랜드 출신인 ‘휘트먼’의「Song of the Open Road」였다 (나는 이 시를 「대로의 노래」라고 불렀다). 그나마 절반만 외우고는 포기했다. 영미 문학보다는 되려 서양 철학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미시는 소네트의 형식을 제외하면 감동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휘트먼의 1852년 작인「Song of the Open Road」의 일부이다. 물론 번역도 내맘대로다.
Comerado! I give you my hand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나의 손을 내민다
I give you my love more precious than money
나는 그대에게 돈보다 더 소중한 나의 사랑을 준다
I give you myself before preaching and law
예배나 법 이전에 나는 그대에게 나를 보낸다
Will you give me yourself?
그대는 내게 그대를 주련가
Will you come travel with me?
함께 여행하지 않으련가
Will you give me yourself? Hey!
친구여! 나에게 그대를 주련가
Will you come travel with me?
함께 여행하지 않으련가
Will we stick be each other?
우리 서로 함께하지 않으련가
as long as we live?
우리 살아있는 한
As long as we LIVE?
우리 살아있는 한
그리고 시절에 맞게 회자되는 국내 시인들이 주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생존에 있었던 언어의 연금술사 「김춘수 전집」은 기본이었고, 이미 작고한 「김수영 전집」은 소장 필수 항목이었다. (김수영을 모르면 간첩이겠지... 아니, 당시 간첩도 김수영이라는 인물은 배우고 넘어왔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타계한 시인 정지용은 은밀한 대화의 대상이었다. 생존해 있었지만 백석의 시는 같은 이유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작고하신 절대 고독의 김현승, 생존에 있는 김지하,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당시에 생존하시던 조아무개 시인, 그리고 양성우, 신경림, 조해일, 정호승 등 시인들의 작품을 읽었다. 천상의 시인 천상병의 시도 잊지 않고 읽었다. 더 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당장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의 보들레르는 영원한 화제 거리였다. 당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렀다, 로 시작하는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 ‘아폴리네르’를 모른다면 학생도 아니었다. 친구는 이「미라보 다리」를 특히 좋아해 달달 외우고 다녔다.
(알라딘 검색을 하니 결과물은 나오는데 상품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절판일 것 같은데 품절이라고 나온다. 대신 중고는 검색 가능하다. 이이미를 다운로드하여 첨부함.)
나보다 훨씬 더 시를 좋아했던 이 친구는 정현종의 책을 원했다. 친구는 정현종의 이 책을 서점에서 잠시 들쳐 본 후로 마치 연인을 사모하듯 했다. 정현종은 시인이었지만 그의 시보다는 그가 쓴「시의 이해」를 더 선호했다. 나는 흔쾌히 가지고 와 친구에게 읽어주었다. 이 책 역시 알라딘에서 검색할 수가 없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지가 남아있다. 정말 귀한 이 책을 그만 친구에게 줘버렸다. 손이 벌벌 떨렸지만 눈 딱 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