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관독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탓에 둘의 차이가 어떠한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저자의 관독일기는 그야말로 이덕무에 대한 오마주이며 고요한 자신의 독백지 싶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지은이가 정말로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이라는 것을 감지케 한다. 주로 고전이 독서의 대상일 것이다. 잠과 명으로 그 범주를 제한했지만 그의 독서력과 량은 가히 짐작키 어려운 수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부제가 말하듯 주된 독서는 잠과 명이지만, 책에서는 그 외에도 저자의 고독이 눈에 띈다. 특히 107쪽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는데,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오는 ‘절대 고독’이라는 말보다 그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마치 시퍼런 칼날처럼 말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다’는 말이 무엇이던가. 바로 중용의 백인가도(白刃可蹈)를 이름이 아니던가. 시퍼렇다 못해 하얀 칼날 위를 걷는 용기를 일컬음이다. 그 용기 저편에 서있는 사람은 끈임없는 절대 고독을 견뎌야 한다. 고독을 견뎌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비로소 한 인간은 백인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누가 그 고독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순수하며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시인, 茶兄 김현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茶兄의 詩 '절대고독'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둔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

 

 

 

 

 

시인 茶兄께서 '절대고독'이라 말씀은 하시지만 그에게 고독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 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여 茶兄에게 고독은 즐거움이며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관독일기의 저자의 고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의 독서 일기를 적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 나올 당시에 이미 그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기를 그렇게 적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저자가 그렇게 한 해의 중양절을 시작으로 일기를 적어오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 것은 그 동안의 독서가 그 얼마나 방대할까를 짐작해서이다. 나로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인지라 그저 존경스럽고 부러울 뿐이다.

 

일기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잠과 명을 읽으며 적어간 이 글은 또한 수필의 느낌을 주기도 하며, 내용은 상당히 자조적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저자의 주요 저술은 이 책이 아니라 저자가 일기를 쓰던 당시 주 타겟으로 하고 있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주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관독일기를 하루하루 써간 것이다. 독자로서 이점을 배워두어야 겠다 싶다. 바쁜 와중에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어 내는 저자의 모습은 과연 유배지에 있던 여유당께서 자녀들에게 보낸 서한을 읽은 사람답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도 책을 읽지 않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독서에 게으르고 시간이 나면 딴짓을 하곤한다. 관독 일기는 그런 나에게 좋은 채근을 준다.

 

더불어, 카메라를 새것으로 장만해가며 공들여 찍은 사진들은 아마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음 독서의 순서는 그 책으로 자연 정해져 버렸다.

 

여러 날의 일기들이 대부분 매우 인상적이지만 특히 저자가 남원에 들렀던 날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기고봉의 전설을 잠시 소개 하고 있다. 기고봉은 이퇴계와 수년간에 걸친 필담으로 사단칠정을 서로 교환한 장본인이다. 말이 교환이지 기고봉께서 먼저 도전장을 내밀어 시작된 논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고봉은 이퇴계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궁해진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개진, 발전시켜 반론을 폈던 것이다. 그러한 이황의 저술이 상당부문 임진왜란때 약탈당하여 일본의 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중국의 사상가로 하여금 李夫子라는 호칭을 들은 인물로 부상했던 것은 어쩌면 기고봉의 덕분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매우 인상적인 대목은 안순암의 경어를 언급한 부분이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의 직계 후학으로 “대장부 심중에 일촌 쇠는 녹지 않는다. 大丈夫心中一村鐵未銷”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 말은 마치 논어 중 ‘자한’이 출전인 “삼군가탈사야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師也 匹夫不可奪志也)”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三軍은 제후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많은 군대의 규모로 총 37,500명의 전차가 있는 부대를 말한다. 막강한 군대의 장수의 목을 취할 수는 있어도 필부의 의지는 절대로 꺽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장부와 필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자한 편에 나오는 이 말에서 匹夫라는 말을 더없이 애정하게 되었다. 과연 맹자가 말한 大丈夫와 공자가 말한 匹夫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싶다. 무릇 필부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

 

순암의 기록은 사적인 것이겠지만 지극히 인상적인데, 177쪽의 순암 6잠과 4경을 소개할 때는 그 절정에 달한다. 순암은 자신의 오른 쪽과 맞은 편에 각각4 글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는 주역의 곤괘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문구라고 한다.

 

 

한문을 그대로 옮기면 “敬으로써 안을 곧게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이고, 줄인 말대로 옮기면 “경으로 곧게, 의로서 바르게”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곧 공경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외부 행동을 단속한다는 의미이다. 177쪽

 

저자의 말이 매우 지당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이 敬과 義는 실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밖으로 바르게한다’는 말이 바로 실천력이다. 일생을 통해 경과 의, 두 글자로 삶을 충실하게 살다간 이가 있으니, 바로 조선의 조남명이 아니던가. 하여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는데 압장섰는데 정인홍, 곽재우는 그 대표적인 예라하겠다.

 

 

전반적으로 관독일기는 靜中動을 느낄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해주면서 깊은 사유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하는 능력을 가진 책이다. 조용히 관조하고 싶다거나 숙고의 기회를 가지고 싶은 분이라면 매우 좋은 책이 되어주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두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선, 저자가 잠명으로 고른 대상 인물들 대부분 대단히 훌륭하고 내적 사유를 참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문장은 고고하고 아름다우나 일생이 그렇지 못했던 인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백운거사 이규보에 대한 글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한 명’과 같은 글이다. 나는 이규보의 글이 등장 할 때마다 잠시 읽기를 멈추곤 했다. 이규보는 고려의 인물로 권력에 무던히도 집착한 나머지 온갖 비굴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씨 일가에 빌붙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던 인물이다. 백운거사라는 닉네임도 사실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비관, 은둔했던 당시에 얻은 이름이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가 사모하는 이덕무마저도 그의 인물평을 혹독하게 했겠는가. 이덕무는 이규보가 남긴 글의 가치를 전혀 알아주지 않았는데 ‘추졸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이 덕무의 이규보의 글에 대한 평가에서 ‘추졸’이라는 말보다는 ‘명실’이라는 말에 의중을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글로만 본다면 어찌 이규보의 글을 추졸하다고 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명실'이라는 말로는 능히 이규보의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는 전혀 바르지 못했던 행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던가. 이덕무는 이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라는 평으로 이규보의 글과 그 행동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음을 설파한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남겼다 한들, 그 말을 남긴 인물이 자신이 남긴 말 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았다면 그 언어의 가치와 비중은 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여 사적으로 매우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다른 집고 넘어갈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용』 장구章句에 나오는 계신공구는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에서 온 말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 183쪽

 

이 곳의 부도는 불도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한데, 다음의 불분과 서로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비록 한글로 읽는다 하더라도 대구를 염두에 두고 일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글의 음운법칙을 우선 적용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럴 경우 '부도'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잘못된 지적임을 인정함)   

 

 

또한

호은은 “숨은 곳 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일 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183쪽

 

저자는 위 글을 ‘막견’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莫見乎隱은 ‘막현호은’으로 읽는 것이 맞다. ‘見’을 ‘견’으로 읽으면 ‘본다’는 뜻이 되지만 ‘현’으로 읽으면 ‘나타난다, 드러난다, 명백하다’는 뜻이 된다. 즉 본 장구의 ‘見’은 뒤에 이어 나오는 顯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편, 莫見乎隱 莫顯乎微에 대해서 박완식 선생은 중용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보다 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 없다" -중용(박완식)75쪽 

 

물론 저자의 '숨은 곳'을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은미한 일'을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으로 각각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으나, 이는 중용을 읽어본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혹 아직 중용을 읽을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에게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적어둔다. 

  

참고로 박완식 선생의 이 중용은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자의 집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문제점은 공부하여 스스로 바로 잡으면 될 일이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다산의 중용강의보를 직집 읽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 대안으로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집주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중용 장구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역작이라 감히 평하고 싶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750여 쪽을 꽉 채우고 있는 박완식선생의 이 중용을 손에 드는 순간 몰아의 경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막견이라고 읽는다고 해서 저자의 책을 읽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 이 글을 노트를 해 둔다거나 암기하여 사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정보를 잘 못 전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 할 수가 있어 지적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어쨌든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저자의 고독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저자가 소개한 잠과 명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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