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 흰 건반 검은 시 활자에 잠긴 시
박시하 지음, 김현정 그림 / 알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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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게시 글이 많이 늦어진 점에 출판사와 관계자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일을 지키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이점 양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지만 말이다. ㅠ.ㅠ. 다시 한 번 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쇼팽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한마디로 세례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서야 그는 신부님을 모셔달라는 부탁을 한다. 신의 은총이 없는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세례를 받은 후 그는 숨을 거두면서 한마디를 내 뱉는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돼지처럼 죽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라고 쇼팽은 말했다. 선생님의 피아노를 들려드릴까요? 주변인들이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며 혼미한 정신의 쇼팽에게 물었다. 아닐세, 쇼팽은 대답했다,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려주시게나... 그렇게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쇼팽을 추억하며 서평단에 신청한 이유는 단 하나, 필자는 쇼팽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였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인 필자가 느끼는 쇼팽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쇼팽은 고전 음악에 관심이 있고 없고를 이미 떠나버린 인물이지 싶다. 그토록 널리 알려진 쇼팽이지만 그의 음악을 통하지 않는 다면 쇼팽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부인할 방법이 없다. 

박시하의 이 책은 그리하여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먼저 들으면서 시작하게 한다. 음악을 들음으로서 같은 시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독서, 남다른 특징을  가진 독서라고나 할까... 읽을 분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결코 속도를 낼 수 없다. 이 책에 관한한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자의 한 줄 한 줄이 바로 시어들이기 때문이다.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박시하의 언어들을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속도는 안단테 안단테, 아니 렌토, 아다지오, 안단테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물론 때로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한동안 쳐다봐야 할 때도 있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거쳐야할 곳이 많다. 우선 박시하는 독자에게 쇼팽을 초대한다. 한마디로 독자는 바로 쇼팽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박시하라는 작가의 프리즘으로 쇼팽을 마주하는 것이다. 하여 작가와 그의 시, 쇼팽과 그의 곡을 동시에 만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쇼팽을 관통해버린 박시하의  감성 프리즘이 비추어주는 쇼팽의 삶을 독자가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 인 것이다. 이는 삼자의 대면 같지만 어떻게 보면 작곡가와 그의 음악, 시인과 그의 시어들, 그리고 독자의 감성과 그 해석법이 어우러지는, 6자 대면이면서 서로 하나로 관통한다. 결코 단순하지 않는 하나의 장을 만나는 행위이다. 서로가 자신의 매체로 소통을 시도하는 장 말이다. 이렇게 주절대는 것은 박시하가 안내하는 쇼팽의 음악을 함께 들으며 이 책을 읽었을 때 오는 감동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는 바를 글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 그렇게 공감하며 읽어가다가는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다, 전혀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낮선 모습의 나 자신일 것이다. 나의 존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듯 하지만 늘 함께하고 있으며 감각하고 인지하는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박시하의 가이드가 완벽하게 나를 지배했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박시하는 독자를 지배하려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함께 어우러져 감동하는 바로 그 모습을 바램하고 있는 것이다. 쇼팽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쇼팽을 들어보고 싶게하는 책이다.  서평단의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신간인지라 후기를 접할 기회가 없어 출판사가 사전에 제공하는 정보가 유일하는 점, 선택을 앞둔 독자에게는 단점이다. 신간이라도 과거 같으면 책방에 들러 살펴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대분의 책들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형편이니 편리함을 담보로 후회라는 대가를 치룰 각오는 필수이다. 서평단 이벤트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선 결정 후 대가라는 공식의 성립 가능성이 늘 뒤따른다. 이 경우 일독해야하는 부담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 손에 쥐고 있는 책을 내려 놓아야하니 말이다. 이 책은 나의 책장에 오래도록 한 자리를 차지할 할 것이다. 쇼팽이 있기에 백건우가 존재하듯, 쇼팽이 있고 시인 박시하의 언어들이 은빛 물고기들의 지느러미가 번득이듯 살아 있다.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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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0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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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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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들을 보니 이덕일 선생의 책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김현구 선생께서 제소하면서 위 책에 가처분 신청을 했더랬습니다. 최근 2심에서 승소했다고 하니 좀더 기다려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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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의 등뼈 푸른사상 시선 7
박승민 지음 / 푸른사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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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詩)를 읽는 것은 고전을 제대로 읽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인이다. 시에 대한 느낌을 적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감히 시집에 대한 리뷰를 남겨본 적이 없는 이유다. 그러나 「지붕의 등뼈」는 왠지 특이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시집에서 느끼는 시인의 스타일과 (산문형식의 시를 종종 쓰는 작가이다, 낮선 장면은 아니나 시어들의 아름다움 덕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읽었다) 시는 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도록 충동질 한다. 정말 묘한 시집이고 묘한 일이다. 해서 두서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나아가 가소로운 느낌을 가소로운 리뷰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하여 몇 편의 인상적인 시를 중심으로 적고자 하는 이 리뷰는 시인에게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인의 독.자.라는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외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너그러운 관용을 바랄 뿐이다. 

 

시집은 120쪽, 결코 두터운 것은 아니나 제목은 마치 무언가 체중계에 올려놓기도 전에 묵직하게 전해오듯,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다. 누구의 무게감일까, 그 삶이 고단하고 앙상하며 성기고 마른 어느 삶을 연상시킨다. 등뼈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읽지는 못하겠구나 싶다. 더불어 그 고단한 등뼈를 독자의 가슴으로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느끼고 공명하고자하는 마음이다.

 

첫 번 째의 시, 「십칠 나한상(羅漢像)」은 그러나 도리어 이런 나의 등을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려준다. 마치 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격려하고 있다. 경쾌하고 맑으며 사뿐하다. 그런데 이 냥반, 끝내 내 가슴을 한 대 퍽, 하고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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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옆에 종이 방석 하나 깔고

한 백년 쯤 앉아있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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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칠 나한상(羅漢像)」 중

 

 

종이 방석에, 한 백년 쯤 앉아 있고 싶댄다... 시인 옆에 나도 그렇게 한 백년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렇게 몇 방 얻어맞으면 결국 나도 피멍이 들겠구나..,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시인의 가슴과 비슷해 지겠지.

 

그리고 한 칸을 건너 뛴 시, 「메모」에서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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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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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이 비루하고

때로 지하에 떨어지는 철렁함이

매 끼니마다 찾아온다 해도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

.

.

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메모」의 일부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아, 이런 표현은 시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아니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해낼 수 없는 시인의 언어겠지... 감동이 밀려온다. 내가 결코 시인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시적 표현에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시어들을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이 단호한 시인의 어조 속에서 나는 그레고리오의 현실과 시인의 시퍼런 슬픔을 보았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기저에는 시인이 처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언어가 나의 심장을 같은 색으로 서서히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행,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다다르자 나는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 앉은 두 개의 공간을 마주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시집의 초장부터 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잠시 후, 시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독자인 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일단 시가 독자의 손으로 넘어 온 이상, 이 시는 나의 것이다. 나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초월적인 그 무엇 이라기보다는, 시인이 가장 절실하게 보듬고 싶어하는 세상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결코 시인에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음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박시인의 관조는 맑은 관조이다. 시인이 남다른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시인은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는다. 「명자 씨」,「빨래」, 「미선이」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시인이 무척 궁금해졌다. 시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관조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관조를 보여준다. 결코 호방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의 침잠은 알고 보면 스스로의 낮춤이다. 대상을 자신의 높이로 끌어올려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숙여 대상과 함께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기도하며 말이다. 

 

가장 좋은 느낌은 독자를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를 휘두르려는 시는 처음에는 달달하지만 지나친 단 맛에 그만 독자가 물려버리고 만다. 박시인은 음식의 당분을 적정량 첨가한 느낌이다. 아니, 다른 시에 비해 약간의 당분을 되려 뺀 느낌? 아, 이것도 아니다. 달지 않은 당분을 안에 깊숙하게 숨겨 놓은 그런 느낌이 맞다. 이 느낌이 맞다. 씹을수록 고유의 단 맛을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시인의 탄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시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왠지 또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처럼 돌아서면 왠지 또 읽고 싶어진다. 애써 리뷰를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보면 어느새 이미 깊이 깊이 내 가슴은 시인이 풀어준 물감에 배어 있음을...     

 

 

드디어, 「지붕의 등뼈」와 마주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바로 그 시이다.

 

 

  지붕의 등뼈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는

지붕의 등뼈는 난감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아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

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

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많은 모래와 모래가 만나

물이끼 같은 한 세월 이루었으나

밤새도록 내리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

어머니의 등뼈,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

 

                      지붕의 등뼈, 전문

 

 

시인이 바라본 어머니가 어떤 상태에 계신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인의 어머니께서는 아직 생존에 계신 모양이다. 그러나 그간 한 세월 고생하신 덕분에 척추가 휘고, 몸도 휘었다. 위태로운 시인의 어머니... 곧 무너져 내릴 것 만 같은 집, 낡은 집을 떠 받들고 있는 아슬아슬, 위태로운 지붕의 등뼈, 앙상하고 고단하며 성기다.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깊이 전해온다.

 

이 모습이 시인의 어머니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기에 더 깊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대부분 이런 모습을 하시고 계시다. 이토록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어머니를 잃는 그 순간, 우리의 집도 와르르 무너지는 참담함을 경험할 것이다. 마음이 정녕 헛헛하다.

 

「지붕의 등뼈」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물론 나의 지독한 편견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직유법은 모두 세 번이다. ‘비스킷처럼’ ‘물이끼 같은’  ‘빨랫줄처럼’ 이 그것이다. 시에서는 직유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 일인이다.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허용하지만 시에서는 직유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다. 크게 길지 않은 한편의 작품에서 세 번의 직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느낌을 적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박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딜레마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다시 시집의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

.

.

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위는 초반에 언급한 「메모」의 일부이다. 처음에는 뭔가가 상통하지 않는 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부분이다. 그러나 시인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딜레마는 딜레마가 아니었다. 이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박시인의 시적 태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의아했던 대목이 풀리는 순간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인은 「화기―능소화」에서 “저 환한/ 주홍빛 일주문 열고 들어가면/ 미련도 미련 없이 해탈할까?/” 라고 자문한다. 어쩌면 현실의 도피일 수고 있는 시인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다는 아니다. 「당신과 나 사이」,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늘 상대성을 인정한다. 세상과의 간극을 관조하고 인정하며 나아간다. 시인의 태도는 결코 침잠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늘 관계하고 있다.   

 

한편, 시인의 그레고리오에 대한 절절한 언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 가슴도 덩달아 멍들어가는 느낌이다.

 

「역류성 식도염」, “아무리 흘러가도/시간은 거꾸로 온다/ 내 목구멍을 화롯불 같은 입맞춤으로 지져놓고/” 「사라지는 시어들」, “갑자기 방안에 입 다물고 있던 안개들/ 일제히 일어나 키득거린다/” 「가홍동 마애불」, “밤새워 벼린 조선낫 같은 손으로/ 바위를 쪼개고 또 쪼갰을 것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오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 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그레고리오를 세상으로 환원시킨다. 시집 전체에서 보여주는 시적 태도는 그리하여 흐름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쯤에서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의 서재에 썼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시집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라는 표현 말이다.  

 

 

시인의 시는 결코 넘치지 않는다. 박시인의 태도는 독자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 독자의 가슴을 후리는 시인은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시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 시인은 흔히 머리로 시를 쓴다. 박시인은 결단코 그러한 짖은 하지 않는다. 박시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시를 잉태하고 출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약한 모든 것에 대하여 마음으로 다가가 조용히 자신의 가슴을 내밀고 손을 내민다. 소란스럽지 않다. 호방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시인은 슬픔을 꼭 이기려하지 않는다. 작은 슬픔일지라도 말이다. 시인에게 주어진 상황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품어 않고 가는 것이 시인의 세상을 향한 태도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적 태도와 전혀 닮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안타까이 여기는 심정을, 에미가 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시가 반드시 승화작용을 해야 한다거나, 초월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나의 깨달음을 박시인을 통해 얻었다. 때로는 초월이나 승화는 우리의 실제 가슴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에 말이다.

 

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지극히 사적으로 독자와 마주하여 만나는 느낌이다. 청빈한 초대의 장 말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노골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세련된 절제미를 느끼게 해준다. 가식 없는 시어가 나를 사로잡는다. 독자인 나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시어들을 속.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어들은 그야말로 자.유.를 얻는다.

 

우연히 발견한 시집이 신선하고 매력있다. 돌아서면 왠지 또 다시 돌아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박 시인의 시를 되돌아보고 또 돌아본 것 처럼 말이다.  앞으로 더더욱 대한민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러리라 믿는다. 박형(朴兄). 인테넷 검색으로 바라본 그레고리오 아비의 미소가 맑더니, 시에서도 그 맑은 영혼을 느끼게 한다. 오염되지 않은 미소 속에 어찌 이런 시어들을 감추어 두었소? 박형(朴兄)! 이 독자, 박형을 사랑하오.

 

PS: 맨 마지막에 고봉준이라는 분의 해설이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마치 정현종의 「시의 이해」를 읽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국문과 강의실에서나 있을 법한 해설. 출간된 시집의 해설은 독자와 소통을 위한 장(場)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소통을 위한 장이 아니라 마치 시를 통해 이어졌던 그 맥을 단절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러 번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찾아갈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겁나 어려운 해설이라는 거다.  

 

행여나 하고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슬픔을 말리다」를 살펴봤다. 다행이다. 정우영씨의 해설은 소통을 위한 장이 틀림이 없었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썼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의 아비에게 이 어줍잖은 리뷰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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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집을 구입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때 시집을 많이 읽던 적이 있다.

너무도 오래도록 시를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올해 가장 먼저 출간된 시집은 어느 시인의 것일까... 알라딘을 검색했다. 1월에 출간한 시집이 하나 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시집에「슬픔을 말리다」라는 특이한 제목을 붙였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찾아봤다. 「지붕의 등뼈」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시집 역시 제목이 범상치 않다. 박승민, 시인의 이름이다. 검색창에 ‘박승민 시인’을 넣고 엔터, 얼굴 사진이 바로 뜬다. 어이구, 젊은 냥반이고만~! (요즘은 마음만 먹는다면 이렇게 손쉽게 상대방을 알아낼 수가 있다).

 

인터넷이 알려준 정보는 “남성, 2007년 문예지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이라고 알려준다. 아, 나이도 나온다. 1964년생이라고 한다. 나이에 비하면 사진으로는 더 어려보이는 인물이다. 물론 시인이 나보다는 나이가 많다^^. 미소가 선량하다. 그 선량한 기운이 마음에 드는 시인이다. 시인은 불혹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에 와있었다. 두 권을 모두 장바구니에 넣고 여타의 책들과 함께 클릭했다.

 

 

 

시집의 서문인 ‘시인의 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폐경기 앞둔 여자가 첫 애를 낳는 심정이다.

내가 사산(死産)한 세월이 주마등같다.

흑심(黑心)을 품은 연필 한 자루로 이 세상에 헤딩한다는 것이

무모함을 넘어

덧없음을 아는 나이

....

 

로 시작한다.

역시 시인은 다른가보다. 인트로부터 시적이다. 비유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주마등 같다’에서 ‘같다’라는 말은 시적이지 않다고 잠시 생각했다. 시인은 ‘〜같다’라는 표현을 ‘〜같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해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나의 쩌는 편견에서 비롯한 생각이지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내 아들 그레고리오에게

이 구석기적 문자를 바친다.

 

 라는 말로 마무리를 한다.

 

어느새 나는 그의 아들 그레고리오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순간, 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레고리오...

그대가 아비의 가슴에 다시는 뽑아 낼 수 없는 비수를 깊이 깊이 꼽아두고 갔구려...

 

 

그러나 시인이여, 이제 그대의 나이도 지천명이 아니오...라고 나는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장씩 시인의 시를 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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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명강 - 하나의 원리로 실전까지 통하는 사주역학의 정석
김학목 지음 / 판미동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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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러하지만 저서의 서문을 매우 중시하는 일인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시간은 공간의 흐름이고 공간은 시간의 내용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유기성을 설명한 아인시타인의 사유와 다르지 않다. 명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공에 담긴 음양 오행론이라는 점을 인식하며 이 책을 읽어가야 하는 이유이다.

 

더불어 명리에 대한 통념을 넘어 ‘수양을 위한 공부’로 인식하는 저자의 입장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오행에 대한 바른 이해는 절대성을 가지는 타자에 의존하는 사유를 뛰어 넘는다는 저자의 사유가 특기할만하다 하겠다.

 

 

「명리명강」을 일독한 후의 사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선, 명리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기초 지식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은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음양 오행의 요체를 매우 이해하기 쉽도록 첨언해주고 있다. 더불어 동양 철학의 이해를 돕는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입문자들의 입에 맞는 오행의 작동 원리와 음양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표적인 예가 10천간과 12지지에 대한 저자의 견해 피력이다. 더우기 오화(午火) 와 사화(巳火)에 대한 음양론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당연한 설명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巳午의 음양론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갑을 박론의 대상인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명리서 들은 동양철학의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핵심 부분을 도려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명리 명강은 동양철학의 사유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이 책을 인정하고 싶은 이유이다. 일반적인 해당 서적들은 작정하고 배우겠다는, 작심을 한 사람들을 위한 출판물. 즉 기초지식을 이미 겸비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여 기본적인 전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시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사주정설 혹은 추명가이다. 사주정설은 그 내용이 탁월하여 전문가들도 초보들에게 흔히 권하는 책이다. 비록 핵심적인 내용을 가졌다고는 하나 설명을 도려낸 사주정설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이는 내용이 알차면서도 쉽게 권할만한 책이 딱히 없다시피 하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명리란 이런 것이다, 라고 선언은 하고 있지만 설명이 철저하게 배제된 기존의 해당 서적들은 마치 고등학생들에게 수학의 정석과도 같은 책이다. 독학으로 보다는 학원에 가야만 비로소 쓸 수 있는 그런 참고서 말이다.

 

 

「명리명강」은 접근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쉬 쉽게 설명하려 시도한 책이 있었는데 접근성이라는 장점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핵심 부분에서 치명적인 결함, 아니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오류를 필터링을 할 정도의 독자라면 이미 초보는 아니므로 애초의 의도 와는 달리 읽으나 마나한 책이 되어버렸다. 하여 입문용으로 추천하는데 꺼릴 수 밖에 없었다.

 

 

명리명강은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기존의 전문서들이 가지는 장애물을 완벽하게 허물에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완성도가 매우 높은 책이다. 물론 책 한권으로 특정 분야를 섭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위에서 언급한 장점도 장점이지만 독자로서 가장 큰 장점으로 꼽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다. 저자는 명리를 바라보는 바른 입장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 명리를 공부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 바로 그것이다. 사적으로는 명리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일인이다.

 

 

이는 마치 검술(劍術)을 익히려는 자가 가져야할 태도만큼이나 중요한 사항이다. 검술을 단지 검술만을 위해 익히게 될 때, 검을 잡은 그 손은 자비를 모르게 된다. 검의 날을 예리하게 세우고 휘두르기로는 기탄이 없게 된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 검기에 놀라고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는 술(術)만을 목적으로 검을 익혔기 때문이다. 검을 들기 이전에 먼저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검에 도가 있음을 모르고 익히게 되면 자신은 물론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하기 마련이다.

 

 

도를 잊은 검술사는 검을 빼어 화려하게 휘두를 줄은 알되, 언제 왜 어떻게 그 검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명분 없는 칼잡이가 될 뿐이다. 심지어는 돈을 주면 주저함을 모르고 사람도 해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이를 검술사라고도 하고 검객이라고도 하며 칼잡이라고도 한다. 검을 다스리는데 도가 따라야 하는 이유이다.

 

 

명리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칼잡이는 허리에 찬 칼을 보고 그가 위험한 인물인 줄 알고 멀리 하겠지만, 명리술사는 티가 나지 않아 조우하면 다치는 수가 있다. 무방비 상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존재가 명리술사이니 그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하여 때로는 무슨 살(殺)을 없애주겠다는 명분으로 고가의 부적 장사를 하는 술사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어찌 가지고 태어난 살을 부적으로 막아 낼 수가 있으랴... 이는 술사들이 자신들의 이를 쫒아 혹세무민하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명리의 도를 망각하면 흔히 일이 이렇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러함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도가 명리에 앞설 때 명리는 바르게 쓰일 것이고, 명리의 길을 바르게 걷는 자 상대방에게 상처가 아닌 치유를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고 아쉬움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격국용신론과 같은 이론을 기준으로 이 책을 비판하지 말고, 이렇게 사주를 볼 경우 이 이론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실제로 체험해본 다음에 비판해주기를 부탁 드린다.”(297쪽) 라고 썼다.

 

 

허나, 용신 없는 간명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저자에게 되묻고 싶다. 용신은 글자를 읽어가는 열쇠라는 점을 저자께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는다. 용신은 글자를 풀어가는 방향키이다. 내로라는 전문가들도 갑을 박론하는 것이 용신이 아니던가.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 바로 용신을 잘못 잡았을 때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이는 마치 용입수를 모르고 득파와 좌향을 잡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런 관점으로 볼때, 독학 입문자들에게 명리를 안내하는 제대로 된 책이면서도 간명의 필수적인 용신을 생략한 것은 입문자들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용신을 잡는 일은 간명의 핵심이기에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여 독자들께 용신을 언급하여 그 난해함을 인식시키지 않으려는 저자의 배려가 깃든 저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용신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저자의 고육계라 여기는 바 이고, 그렇다면 영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아플 뿐이다.

 

 

하여 격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용신에 대해서는 따로이 책을 내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저자께서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명리명강에서 흔히들 어렵다고 여기는 바를 이토록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저자가 아니던가. 기왕 시작한 마당에 용신을 이해시키고 자신과 가족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는 올려 놓아주시기를 당부 드리고 싶을 뿐이다.

 

 

혹시라도 명리를 알고 싶은 독자 분들이 계시되 선생님이 없는 경우라면 이 명리명강을 여유를 가지고 독파하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혹여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잠시 쉬었다가 재차 읽어보시면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PS : 깜박 할 뻔 했지 말입니다.

 

천을귀인에 대한 저자의 부연은 정말로 유익했다. 흔히 대가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분들도 신살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이다. 되려 명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냥반들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실정이니 말이다. 저자의 말씀대로 합형충을 파해보다 훨씬 더 무겁게 쓰는 것은 자명하나 신살은 흔히 그렇지가 못하다. 명리가 들이 주로 언급하는 신살로는 그 많은 것들 중에 겨우 괴강, 백호, 역마, 양인, 도화, 홍염, 귀문, 상문 정도이다. 그런데 오랜 임상 후 전문가로서 천을귀인을 이토록 실감나게 언급하신 저자는 처임이지 말입니다. 이건 신선한 충격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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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봉기 2018-06-1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명리명강 해송학당의 카페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추천 누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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