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즉흥곡 (Impromptu) D. 899 Op. 90 III. Andante 


 '즉흥곡 Impromptu(s)'이라는 명칭은 슈베르트 자신이 부여한 이름이 아니라 출판 업자가 붙인 것이라고 한다. 곡의 이름은 비록 '즉흥곡 Impromptu(s)'이지만 즉흥적으로 썼다는 뜻은 아니다. 즉흥곡은 당시의 음악 양식 중 하나 였던 것이다. '소나타'(Sonata)라는 전통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곡을 전개해 나가는 일종의 장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쇼팽과 동갑내기인 1810년생 로버트 슈만은 슈베르트의 D.935 즉흥곡을 두고, "즉흥곡으로 위장한 네 악장의 피아노 소나타" 라고 평가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이 완결성과 통일성을 가진 작품이었기 때문인데, 슈만의 이러한 평가는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다. 슈만은 큰 형님뻘인 슈베르트가 치밀하고도 잘 계산된 작곡을 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슈베르트 형님의 피아노 곡들은 낭만파의 피아노를 주도한 쇼팽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후배 낭만파들에게 뚜렷한 결을 남긴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즉흥곡들이 모두 좋지만 그 중 D.899 3번과 D. 935 3번은 왠지 슈베르트의 성정을 가장 닮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곡들이다. 사실은 그의 즉흥곡이 모두 그런 느낌을 준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뿐, 객관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즉흥곡 D. 899 3번 Andante는 4분의 8을 쓰고 있다. 어떤 악보는 2분의 4라고 적어놓기도 한다. 어째거나 이는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한 마디 안에 4분음표를 8개 주었기에 마디가 길어진다. 하여 강세는 곡의 특성이나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독특한 효과를 내며 경계가 모호하다는 특수효과(?)를 줄 수 있다. 슈베르트 즉흥곡 D.899 3번을 들으면, 4분의 8박이 이런 느낌이로구나 하는 감을 얻을 수 있겠다 싶다.




슈베르트는 즉흥곡 D. 899 3번 Andante의 조표에 내림표(Flat)를 6개 주어 '내림사장조 (Gb Major)'임을 표시하였는데, 이는 아주 부드럽고 따듯하며 온화한 느낌을 전달하라는 명시이다. 이 곡을 들을 때 위로를 받는 느낌은 이런 이유에서 온다.



[[[ 이 곡은 난이도가 아주 높은 것은 아니지만, 악보 보기도 쉽지 않고 연주하기도 쉽지 않다. 음표들을 끊어지지 않게, 그리고 부드럽게 힘조절을 아주 잘 해야 한다. 물 위를 스치듯 연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학생들에게 아주 까다로운 곡임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특히 D. 899  3 번 4번은 대한민국 예고의 입시곡에 포함되기도 한다. (예고의 피아노 입시 지정곡들은 보통 5~6월에 공시하는데, 기본기, 고전 소나타, 연습곡 또는 즉흥곡등을 포함한다) ]]]


 
또한 오선지 아래에 pp(피아니시모, Pianissimo)를 표기했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안단테'에 6개의 플랫을 적용시켜 '매우 여리게'  혹은 '아주 작게'  그리고 끊어지지 않게 길게 늘려서 (동그라미와 화살표 친 부분의 지시 의미), 부드럽고 따듯하며 포근하게 연주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슈베르트의 이러한 요구 사항들은 청자들이 듣기에는 아주 편안하고 좋은 느낌을 주지만 연주자에게는 무척 까다로운 주문이다. 내림표 6개가 악보 보기와 연주를 어렵게한다. 슈베르트의 주문에 따르면 오른 손은 힘조절에 아주 신경을 써야한다. 또한 아르페지오와 레가토를 쉴 타이밍이 거의 없이 건반 위른 미끄러져야 한다. 그리하여 즉흥곡 D. 899 3번은 부드럽고 영롱한 달빛이 세상에 드리운 밤, 커다란 호수의 물 위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수면을 스치며 내닫는다. 이순간  '녹턴'은 '녹툰"이라고 발음해야 할것만 같다. 


왼손은 화성을 서포트한다. (그런데 왼손 연주만으로도 정말 멋진 곡이다.)  튀지 않으면서 또렷한 서포트 컬러를 만들어내며 안단테를 잘 수행해야 한다. 서로 호응하는 오른 손과 왼 손은 그 어느 쪽도 결코 튀어서는 안된다. 마치 수줍고 튀지 않는 삶을 살았던 슈베르트를 닮았다. 그리하여 곡을 은근히 판타스틱하게 하며 극적 대비 효과를 준다. 연주는 어렵지만 듣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곡이자 편안한 곡이다. 



[[[ 백건우 선생의 아주 좋은 연주이다. 비가 내리는 오늘, 슈베르트가 더더욱 마음에 와 닿을지도 모른다 ]]] 


또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즉흥곡들은 마치 가곡을 듣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전문가가 아닌 단순한 애호가에 불과한지라 그 이유를 콕 집어낼 수는 없지만, 슈베르트 즉흥곡의 호흡에서는 가곡을 부를 때 가지는 호흡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특징은 오로지 슈베르트만의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마주 앉아 수줍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슈베르트! 이 느낌은 바로 그의 즉흥곡이 가진 호흡에서 오는 것 이리라.


슈베르트의 삶은 특히나 가혹했다. 처절하게 가난했고 성격은 소심했다. 가난 덕분에 피아노를 일찍 들이지 못했다. 피아노가 왜 중요하냐 하면 작곡을 하는데 필수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려 전해오는 진동을 참고하여 곡을 썼을 정도로 중요한 작곡의 매개물이다.




그런 작곡 필수템을 그는 가질 수 없었다. 누군가는 슈베르트 평생 피아노를 가질 수 없었다고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피아노를 들였다고 한다. 가난은 음악의 천재에게 피아노 한 대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곡의 대부분은 피아노를 가진 친구 혹은 지인들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들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그가 피아노를 들인 다음 해, 서른 하나에 그는 세상을 등졌다. 정녕 가슴이 미어지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신이시여, 슈베르트를 세상에 내 놓고 그를 어찌 그리도 박정하게 대하셨습니까!


처참한 가난과 가혹한 삶 속에서도 그의 음악은 낭만과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아니, 진흙 속에서 화사하고 고귀한 수련을 피워 올리듯 그의 즉흥곡 3번은 세상 모든 것을 어루만진다. 자신은 위로 받지 못했으나 그는 타자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흥곡 D.899 3은 특히나 슈베르트 가곡의 향기를 아주 잘 느끼게 해준다. 이 역시 지극히 사적인 견해이므로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노랫 말은 없지만 건반 소리가 그의 금빛 언어를 대신 전하는듯 하다. 특정인에 대한 헌정이나 특정인의 유료 주문에의한 동기로 쓴 곡이 아닌지라 그야말로 자신의 순간을 온전하고 진솔하게 표현한 곡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순도가 아주 높은 슈베르트의 즉흥곡이다. 어찌 진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울을 마주하듯 슈베르트 자신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곡이라 하겠다.



즉흥곡 D. 899 Op. 90 3번, 자신은 거친 삶을 겪고 있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한다. 어쩌면 자신에게 말하는 독백 일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청자는 물론 슈베르트와 마주 앉아 그의 달관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을 수 있다.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슬픔을 자신의 품 안으로 깊이 접어 넣고는, 자신의 언어를 전하는 곡이 바로 슈베르트의 즉흥곡이다. 깊은 상처로 얼룩진 슈베르트는 즉흥곡 3번으로 상대방에게 정녕 커다란 위로를 준다.


슈베르트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한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즉흥곡 D. 899 Op. 90 3번 Andante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베르트 평전
엘리자베스 노먼 맥케이 지음, 이석호 옮김 / 풍월당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애하는 나의 슈베르트!
인생은 짧고 가늘게, 작품은 길고 굵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부분의 고전 음악에는 작품 번호가 뒤따른다. 예를 들어 모자르트의 작품은 쾨헬 ( K.) 혹은 쾨헬 목록( KV. ) 으로 표기한다. 이는 모자르트가 세상을 등진 후 오스트리아 학자인 쾨헬(Köchel) 선생께서 1862년 모자르트의 작품들을 작곡 순서대로 정리한데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쾨헬 번호 K. 혹은 쾨헬 목록 KV. (= Köchel-Verzeichnis)를 사용하고 있다. 모자르트의 마지막 작품은 K.626 Requiem in D Minor 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626개 임을 알 수 있다. 



슈베르트의 작품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슈베르트의 작품 번호는 오푸스 번호(Opus = Op.) 와 도이치 번호 (D.)을 함께 쓴다. 게다가 때로는 Posth. 를 병기하기도 한다.




[[[ Impromptus D. 935 Op. Posth. 142 는 정말 아름다운 피아노 곡이다. 사적인 견해이지만 슈베르트를 정말, 아주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그리고 또한 소나타를 연상시키는 곡이다. 실제로 D. 899 번에서도 약간은 다르면서도 같은 선율을 들을 수 있다. 작품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뜻이다. D.935가 11분이 넘어가기는 하지만 끝까지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곡이다. 애호가들에게 11분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아주 긴 시간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고, 어쩌면 이 곡을 통해 슈베르트를 아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라두 루푸의 피아니즘은 더없이 좋은 덤일 것이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등지기 한 해 전에 완성한 곡이니 그의 건강은 매우 나빳을 것으로 생각된다. 건강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편안하고 영롱하며 밝은 곡을 썼다. 그의 당시 환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다. 라두 루푸의 연주는 내가 편애하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보다 더 좋다. 슈베르트 즉흥곡에 관한한 내게는 라두 루푸이다. 슈베르트가 이 연주를 듣는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물론 백건우 형님의 연주도 아주 좋아한다. 물론 이는 개취이므로 다른 연주를 애호하는 분들께서는 너른 양해를 주시리라 믿는다. ]]]




오푸스 Opus(Op.) 번호는 슈베르트가 살아있을 당시에 출판한 곡들에 해당한다. 슈베르트는 1,000 여곡을 썼지만  생전에 약 100곡 정도를 출판했다. 하여 Op.번호로 그의 작품을 모두 표기할 수가 없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음악 학자인 오토 에리히 도이치(Otto Erich Deutsch)는 슈베르트의 998곡을 연대 순으로 정리한 카달로그를 발표ㆍ출판했다. 그의 작품에 도이치 번호(D.)가 탄생한 것이다. 1883년 빈에서 태어난 그는 슈베르트 연구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 경애하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이다. 아, 전에 누군가가 이 연주에서는 어찌하여 라두 루푸의 손을 들어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라두 루푸는 자신을 통해 슈베르트를 연주하고, 지메르만은 슈베르트를 통해 자신을 연주하는 느낌이다," 라고. 사실은 지메르만을 매우 좋아하지만 라두 루푸도 지메르만 못지 않게 좋아하고 있다. ]]]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당시 출판하지 못한 작품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슈베르트 생전 자신의 작품을 대부분 출판하지 못했다. 작품들은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겨우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는데, 출판보다는 곡을 쓰기에 바빳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처 출판하지 못한 작품들이 절대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들을 포함하여 도이치는 1951년 슈베르트의 모든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한 카달로그를 출판했던 것이다.



즉흥곡을 예로 작품 번호를 살펴보면, 슈베르트는 생전에 모두 8개의 즉흥곡을 썼다. D.899 번 네 곡은 슈베르트가 살아있던 1827년에 출판이 되었고, 나머지 네 곡 D.935는 1838년, 슈베르트가 불록(不祿)한지 10년 후에 출판이 되었다. (슈베르트는 1828년에 세상을 등졌다)


1827년에 출판한 즉흥곡 D. 899번은 'Impromptus D.899 Op. 90' 이라고 표기한다. 그의 생전에 90번째 출판했고 카달로그 정리는 도이치 선생이 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반면 즉흥곡 D.935는 'Impromptus D.935' 라고 표기하기도 하지만 'Impromptus D. 935  Op. Posth. 142' 와 같은 방법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Posth 는 Posthumous 의 약어로 슈베르트 사후에 출판했고 순서는 142번 째 곡 이라는 표기이므로 이를 덧붙인 것이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에 번호를 붙이는 방식을 알면 그가 생전에 출판했던 작품인지 여부를 알 수 있고 몇 번 째 출판물인지 알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고, 대단한 정보도 아니지만 슈베르트와 좀 더 가까워짐을 느낄 수는 있을 듯하다. 누군가의 고향을 아는 것 만으로도 좀더 친근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듯이 말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6-07-06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슈베르트 즉흥곡 8개를 도장깨기 하듯이 다 연습해볼까 하다가 960과 958악보 보고 나서 포기했습니다. 말씀하신 935는 정말 한번만 들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곡이지요. 연주자에 따라 템포와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에도 뜻밖이었어요.
좋아하는 곡이 제목으로 있는 글이라 얼른 읽었습니다.

차트랑 2026-07-06 17:24   좋아요 0 | URL
와우~!!! 안녕하세요 hnine님,

즉흥곡을 시도하셨다니!
저로서는 정말 놀랍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제게는 아찔한 일을 하셨군요!!

D.899 3~4번을 무난하게 지나가신듯 합니다.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hinine님.
이 곡도 치기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다음 포스팅은 D.899 3번이오니 읽어주십시요~)

예고에 진학하셨더라면 아마도 D.899 4 번을 입시곡으로 받으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르페지오로 도배를 한 곡이니 말입니다.

말이 나와서인지
899 4번도 포스팅을 해보고 싶어지는 군요.

편안한 오후 되십시요 hnine님~!!

 
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리뷰는 출판사 서스테인의 도서 제공 여부를 문의 받은 후, 평소 관심이 있는 예술 관련 도서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읽고 쓰게 된 글 임을 밝혀드립니다. 어느 문장 하나도 버릴 것 없다 여기며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분께라면 예술의 본질과 비예술의 특성을 사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도서는 독서의 감동과 함께 예술에 대한 통찰을 선물해주리라 믿으며 리뷰를 이어가겠습니다 ]]]




이 책은 예술의 진위 여부에 대한 단층적 담론을 넘어 철학적 사유가 층층이 겹을 이루며 예술의 본질에 닿아 있다. ㅡ차트랑


(이 책의 표제를 '진짜 예술 가짜 예술'이라고 칭했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는 '가짜 예술'을 '반예술'이라 칭하고 싶다. 그리고 '반예술'은 부정적 효과를 낳는, 그리고 매우 위험한, 의도가 불순한, 예술로 위장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비예술, 즉 반예술이라 칭하고 싶은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레플리카(짝퉁)이다.

최근 [ 피카소 인 대구 : 시대를 넘는 마스터피스 ] 라는 전시회가 화제이다. 주최측은 진품 감정서까지 보여주며 전시 작품들을 모두 진품이라고 홍보했지만 사실 확인 결과 진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짝퉁을 진품이라고 속이고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관람객이 진품으로 인식하도록 하여 이익을 추구한 행위는 반예술 행위이고 사기 행각이며 범죄이다. 짝퉁은 시간이 지나면 그 정체를 드러내는 특성을 가졌다.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진실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그 위험성이 덜한 이유이다.


둘째는 이 책이 주로 다루고 있는 반예술, 정교하게 예술로 위장했지만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는 인공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개인과 집단의 사유를 훔쳐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예술을 다룰 때는 진정한 예술의 본질도 함께 언급해주어야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예상대로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 시작한다.


진정한 예술은 근본적으로 정적이다. 반면 인공물은 바로 그 욕망과 혐오를 부추겨서 우리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인공물은 근본적으로 동적이라는 뜻이다 ㅡ p. 20~21


이는 인공물을 경계할 것과 더불어 예술이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예술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현상들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위태로워진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과거 누군가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학부 교양 철학 수업 시간에 교수가 던진 질문이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고, 인간을 인간이게하는 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학생들은 다양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했다.


다양한 대답들 중 매우 설득력 있는 대답이 있었는데, '인간은 철학적 사유를 한다' 였다. 철학 수업 교수가 원하는 답과 일치했을 것이다. 이런 답이 나와줘야 철학 수업을 진행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구별 이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예술 행위를 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은 내면의 상처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고 어루만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p.38 (Daniel Pichbeck, Notes from the Edge Times 인용문)


이 인용문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의 작가 한강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통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고, 그녀의 예술 세계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 받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술은 분명 인간 고유의 강력한 소통 창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스러운 영혼이 깃든 긍정적 예술 세계는 부정적 인공불의 도전과 마주한다. 예술의 근본을 오염시키는 인공물의 출현은 현실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특히 디지털 방식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로 예술과 반예술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예술이 쉽게 오염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경제적 구조와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인공물들이 때로 예술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단다. 이들은 대중들의 방향성을 강요하려는 숨은 뜻을 가졌다. 예술의 본질을 소환해야 하는 이유이다.


미셸 푸코가 언급한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힘, '규율' 그리고 들뢰즈가 예언한 '통제 사회'는 예술의 형식을 빌어 인간의 사고와 행동, 즉 인간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다. 자율성의 상실은 개인이 특정 집단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과 일치한다.
물론 주의해야 할 사항들도 있다.  지나친 '현재주의 (p.46)'는 '현재'의 현상 만을 강조하므로 과거를 반추할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 과거를 외면하는 사회는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예술을 바라볼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그러나 과거에 매몰되어서도 안된다. AI는 오로지 과거의 틀에 갖혀있는 것들 만을 결과물로 내놓는다. 인간과는 달리 AI는 결코 미래로 나아가는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또한 인지해야 할 것이다.


AI는 인간을 앞서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내진 못한다 (p. 49)

예술은 삶과 꿈, 그리고 경험이 세상 속에 존재한 후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발현된다. 이는 단지 정교함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과 관련한 공감이며 소통이고 감동이 바로 정녕 예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인 것이다. 예술과의 대척점에서 반예술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공물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 (p.92) 이다. 나아가 "예술과 무관한 목적을 위해 예술의 탈을 쓰고" (p.92) 있다. 이것이 저자가 밝힌 가짜 예술, 즉 반예술이 가지는 특징이자 정체이다. 반예술은 개인에 따른 다각도의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를 조종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숨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적 움직임을 살피면 반예술을 통찰 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는 저자의 사유는 나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향점과 추구하는 바가 예술의 그것 과는 전혀 다른 반예술은 일종의 함정을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를 그들이 만든 덧에 걸리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현대의 대중문화 속에 깊이 침투한 키치(Kitsch)는 단지 '나쁜 예술'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가져야 할 진실을 감추어 숨기기 때문이다. 이는 반예술이 가지는 또 다른 부정적 모습이다. 


예술의 탈을 쓴 특정 이념이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다면 예술은 심각하게 오염되기 시작한다. 예술이 대중을 기만하는 일종의 전술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반예술이 위험한 이유이다.


"예술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다. 예술은 기호를 상징으로 변성하지만 정치는 반대로 상징을 기호로 전락시킨다" (p.212)


저자의 이 말은 예술이 정치 권력자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도구로 이용되는 예술은 반예술이다. 이 순간 인간의 독창성은 죽음을 맞이한다. 더이상 예술일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자유로움과 관계한다. 무한한 상상력, 끝없는 창의력, 그리고 인간 고유의 다각적 감정들은 모두 인간의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표현들이다.


"예술은 당신이 필요하다" (p.273)

인간은 본디 예술성을 가진 존재이다. 여타의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현대는 예술의 본질을 상실하도록 권하는 반예술의 시대이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무너진 혼탁한 예술의 시대이다.


이 책은 그 무너진 경계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유를 준다. 예술의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것은 반예술을 인지할 수 있게한다. 예술과 반예술은 각각 이 책을 통해 명료해진다. 인간 정신은 예술과 관계하고 그 예술이 오염될때 인간 정신이 함께 병들 수 있다. 예술의 회복은 그러므로 인간성 회복과 대등하다. 우리가 예술을 회복해내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은 유일한 분단 국가이다. 남과 북이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6.25 전쟁 당시 헤어졌던 가족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지만 서로 그리워만 할 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76년이 되었다. 전쟁 당시 서로 헤어졌던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세상과 결별했다. 내가 알고 있던 분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부모님의 고향이 북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할 뿐이다. 참으로 아픈 상처였지만 정치는 그들의 아픔을 결국 치유하지 못했다. 이런 걸 비극이라고 한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산가족 상봉 방송은 대한 민국이 처음이었을 것이고, 앞으로 이런 방송은 또다시 없을 가능성이 높다. 1983년, KBS는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 라는 라이브 방송을 기획했다. 처음 기획은 약 1시간 30분 정도 방송을 진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급하게 긴급 연장 편성에 들어갔다.





[[[ 곽순옥의 창법은 대중가요의 창법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가곡을 부르듯 레가토(Legato)를 쓴다. 곽순옥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성악을 전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사적인 생각을 해본다. 시대를 너무 앞질러 태어나 성악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아닐까...아니면 성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늘 아쉬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32년 생이다. 23년 92세의 나이로 불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의 노래를 하루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부디 영면하소서.... ]]]    



방송 하루 만에 여의도 KBS 본관 앞에 1만여 명의 이산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문의 전화로 방송국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KBS는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예상 밖의 상황에 긴급 대응하여 프로그램을 연장시켰고 마이크 좀 잡는다는 아나운서들을 총동원했다. 본격적인 릴레이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시청률은 80%에 달했고, 수많은 이산 가족들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함께 울었다. 밤새워 상봉 장면을 보며 울다가 다음 날 지각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뜨겁고도 감동적인 장면을 송출한 KBS는 기타의 모든 방송들을 일시 중단하고 상봉 방송에 집중했다. 헤어져 생사를 모르던 가족들은 서로를 만나 통곡하며 울부짖는 장면들을 전국에 내보냈다.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에서 살고있던 이산 가족들의 연락이 왔다. 뜨거운 화상 상봉이 이루어졌다. 미국 방송사에서도 대한 민국의 당시 상황을 상세히 송출했다. 여러 나라의 기자들도 여의도에 모여들어 현장 소식을 자국으로 전송했다.



그렇게 방송은 138일, 45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사람을 잃은 경우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간의 비극은 늘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도 인간 뿐이다. 그리하여 도스도옙스키는 인간을 끝없이 연민했다. 문제의 발단도 인간이지만 그 문제의 해결도 인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시공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속에 그저 함께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6-25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산가족찾기하면 생가나는 노래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제일 유명한것 같아요.

차트랑 2026-06-25 15: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말씀해주신 덕분에 설운도님의 ‘잃어버린 30년‘을 찾아봤고요.
테레비에서 자주 듣던 노래였습니다.
설운도님이 노래를 참 잘하는군요 잘 들었습니다~!

잉크냄새 2026-06-25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산가족 문제만큼은 좌우 이념을 떠나 해결해 주었어야 할 문제인데...
남과 북도, 어느 정권도 보편 인권이 아닌 당리당략으로만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늦어버리고 말았네요.
얼마나 남아계실까요...

차트랑 2026-06-26 06:55   좋아요 1 | URL
옳으신 말씀입니다 잉크냄새님,
잃어버린 가족사에 좌우가 어디있겠습니까!

아마도 이제는 서로 만나야 할 사람들은 거의 없는듯 합니다..
만사는 타이밍인데 말입니다...

또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잉크냄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