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의 저서들을 읽다보면 우선 그의 깊은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개시키는 정말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되기 때문이다. 다수의 독자들은 도킨스의 이러한 노력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또한 일부의 독자들은 도킨스가 심오한 연구와 과학적 논거들을 내놓는 만큼, 상대적으로 그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를 진화 생물학자라고 칭한다. 물론 저술활동을 왕성하게하는 그를 작가라고도 한다. 그 중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 저술된 책이다. 우리나라의 학생들과 성인들에게 그토록 회자되던 바로 그 책이다.

 

 

 

 

 

 

 

이상의 책들을 보면 과연 도킨스가 우리 한국의 서점가를 그 얼마나 장악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면 정말 독서를 싫어하는 학생들 뿐이었을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그야말로 서점가를 강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전자에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겠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도킨스라는 사람의 철저한 연구정신에 있을 것이다.   

도킨스의 저서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게되는 점이 바로 그의 성실성이다. 자신의 주장에 완벽함을 기하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 아마도 이러한 도킨스의 장점이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한가지 주제에대한 도킨스의 완벽주의, 아니 지신의 주장을 위해서 그 누구도 쉽게하기 힘든 연구와 자료의 수집을 총제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독자는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인간및 생명체의 다윈주의에 흠뻑 빠져들었을 것이다. 

다음의 대표작은 '만들어진 신' 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의 노력이 그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된다. 만들어진 신의 서론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창조론에 반박하는 주장들을 일일이 기록하며 설명하다보니 길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단지 도입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입부만으로도 왼만한 독자들을 반쯤은 설득하고도 남음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있는 힘껏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쏟아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정렬과 의지의 에너지가 독자인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아...도킨스라는 저자의 용솟음치며 뜨거운 혈기가 전해온다. 물론 절대적인 다수가 읽어줄 책은 아니다. 다만...도킨스의 연구와 집념이 그 얼마나 가상하며 노력의 결실인지를 느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접근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한 도킨스는 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한다. 왜냐면, 그는 신성한 창조론을 철처히 파헤쳐버린 독종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도킨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정말 끈질진 사람이다.  눈먼 시계공이라는 저서는 또한 번 도킨스의 독자들을 놀라게한다. 도킨스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시종일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 내용을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전개시킬 수가 있는 것일까...이점은 정녕 도킨스를 읽어본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의문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저서만으로 부족했다고 느낀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저서 중 위에서 언급한 어느 한권만이라도 읽어본다면 도킨스의 주장에 설득되기에 충분하다. 그만큰 그의 저서들은 자체로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질적으로 우수한 저술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이라는 저술을 새롭게 내놓는다. 그렇다고 우려먹기식이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논제의 핵심은 같을지라도 방법론적 접근이 전혀다른 저술들이다. 눈먼시계공은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철저란 과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연구의 깊이는 우리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어 깊이 깊이 파고들어간다. 적지 않은 분량의 저술을 이토록 깊숙히 파고든 다위니즘을 새로운 형식으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도킨스는 여기에서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끈임없이 새로운 저술들을 내놓는다. 이런 사람 참 지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를 절대로 꺽을 줄을 모른다. 일생동안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분명한 것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도킨스와 같은 학자, 혹은 저자를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신념은 일생을 두고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생물학적 진화의 이론 뿐만이 아니다. 설계되지 않는 누적된 진화와 우주론 뿐만이 아닌 것이다.  

오죽했으면 왼쪽과 같는 책들이 등장하게된다. 책에 의하면 도킨스는 도전자이다. 신에 대해 도전장을 들이 민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것이다. 감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전장을 내밀다니...도킨스는 있을 수 없는 불경죄를 저지르고 진리를 외면한 망상자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 무신론자이거나 범신론자일 것이다. 아니면 도킨스의 죄가 적잖은 관계로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읽어주는 신학자 혹은 신자이거나...이다. 

신의 존재를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 이해하기에는 시대 정신으로보아 부족함이 있다고 여기는 바는 다음과 같은 논거를 갖는다. 과거부터 신 중심의 기독교적 사상이 서구를 지배해왔다. 신 중심의 성스러운 종교가 겪어온 역사는 대부분 피로 얼룩져있는 것을 또 누가 부인 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도 종교적 갈등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엄중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때가 이미 지나버렸다. 기독교 중심의 서구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지배하게된다. 대 항해 시대라 불리는 식민지 약탈의 시대가 그것이었다. 과연 지구상의 그 어떤 대륙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가. 아프리카의 빈곤은 수탈과 잔인함으로 얼룩져 그 흔적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어떠했던가. 신의 이름으로 서구인들이 빼앗은 목숨이 식민시 시대 원주민들의 90%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약탈의 선봉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었고 신의 이름이 함께하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신이 원하는 바였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있는 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이며 절대로 인간과 함께해서는 안될 존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신의 존재가 오히려 지옥처럼 느껴졌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누구에게 천당이고 누구에게 지옥이겠는가..

그리고 그 후예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하던가....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가 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들이다. 역사는 현대를 낳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현대는 그렇게 미래를 생산할 것이다. 제대로 반성되지 않은 과거, 은폐된 과거는 불행한 미래를 낳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재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도킨스가 일생을 두고 하나의 주제에 그토록 연연해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또한 그를 진정한 인류애를 가진 진화 생물학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충분한 것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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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명에 관한 서책들을 읽으며 독자로서 받은 감동의 물결은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를 각각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과 생각을 견주어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으며 사상을 이해하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남명의 일생을 다루다시피한 남명학 총서들을 차례로 읽어가는 즐거움은 비단 즐거움 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에대한 지표로서의 역할을 올곳이 해주고 있다. 

아래의 책들은 남명학 연구의 서책들이므로 주로 남명을 중심으로 조명하고있지만 퇴계 이황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질수 있게하며 두 인물의 시대적 배경이 같았던 만큼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계기를 마련해주기도한다. 남명과 퇴계 이황, 어느 한쪽만 알게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에 사로잡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남명과 퇴계를 모두 공부하고 싶은 열망을 줄것이다. 

이 책은 남명의 일대기를 학문과 사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다룬 책이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남명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남명을 이 한권으로 마음에 채우기에는 남명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만큼 남명은 거대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남명과 관련한 책들을 찾게마련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남명의 사상이 잘 녹아있다. 남명이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던 2글자인 '경의'에 대한 설명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정말 감동스러워 여러번 읽게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님의 사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기절을 발휘하였고 위기의 나리를 구하는데 앞장서게된다.  학문과 사상이 제자에게 끼치는 영향이 그 얼마나 지대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왼 쪽의 이 책은 남명의 생애와 학문, 남명학파에 관하여 여러 연구자료들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에 이미 실학적 사상이 담겨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남명의 독자적인 주체성과 당시 사림의 정신에 대한 좋은 글들을 만날 수 있다. 남명은 유자이지만 불교에 대해서도 탄력적인 인물이었다. 퇴계는 남명에게 노장의 병통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퇴계가 지적했던 남명의 사상적 병통은 무엇을 말함인지 그 진실을 알 수가 있다. 남명은 유, 불, 도를 넘나드는 사상가였음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남명은 왜 그런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신 사상을 굽히지 않았을까. 그의 학문과 사상적 배경에는 오로지 백성을 위함이 있었다는 것을 그 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연 퇴계는 어떠했을까...궁금해진다.    

 

이 두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 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명에 관련한 기록들을 소개하고있다. 이는 철저히 남명의 측근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써내린 기록들이므로 보다 객관적인 프리즘을 통해 남명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된다. 남명의 상소문을 좀더 세부적으로 알 수있고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는 권력의 핵심및 백성들의 실태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상소를 통하여 그 누구보다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겼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과연 군신의 예와 의리란 무엇인가, 강직하고도 결단력있는 남명의 상소문은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가르치고 있다. 남명은 수차례에 걸친 관직을 제부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왜 남명은 출사하기를 거부했을까. 단지 사람으로서 출사를 거부하는 자만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차후에 활용하기 위함이던가? 그런 얄팍한 이기심에 의하여 출사를 거부했던 인물들도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남명은 결코 그러한 조무라기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물이었다. 출사했다면 정승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남명에게는 철학이 있었다. 바로 출처관이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남명의 출처관을 알고나면 비로소 수긍이 갈 것이다.   

     

같은 성리학자로 사서를 읽고 주자를 공부했지만 두사람의 사상은 완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선비로서 추구하는 바에서는 공통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학문의 목적이 서로다르며 그러므로 안과 밖으로 드러나는 사상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퇴계 이황은 퇴계학파을 아루었고 남명은 남명학파를 이루었다. 경상 좌우도의 두 거대한 학맥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백년신교, 천리신교라하여 경외하고 존중했다. 두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났으므로 한 시대를 고스런히 공유하게된다. 퇴계는 출사하지 않는 남명을 실득하기위해 대사성으로써 편지를 보내기도한다. 두사람은 사상이 달랐지만 상대방에대한 신뢰를 죽는 그날까지 저버리지 못했다. 현대의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하여 상대방을 비방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두사람은 상대방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형성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위의 서적들은 남명에 관련한 이야기들과 그의 인간관계를 잘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남명이 당대의 최고 선비로서 알려지게된 것은 비단 조정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백성들과 무관의 유생들도 그의 이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나명과 관련지어 전해오고있다. 남명과 이야기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감지해낼 수 있는 만민들의 남명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있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들이 많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한다. 나아가 남명의 인간관계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는 서적이 바로 남명의 인간관계, 남명과 그의 벗들, 수우당 최영경이다.  

남명은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벗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역시 그의 학문에 바탕을 둔 것이라하겠다. 남명은 사회관 및 세상에대한 대응을 철저히 학문에서 바탕을 두고있다. 이처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일치하여 일생을 살다 간사람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남명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과 의를 인생의 방향으로 설정한 남명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러기에 백성들의 삶에 그 누구보다 더 애착을 가지고 소를 올렸던 것이다. 수우당 최영경은 남명의 학문과 기절을 듣고 한양에서 진주로 찾아가 공부하기를 청한 인물이다. 과연 수우당 최영경은 남명의 학문을 배운 후에 어떻 인생을 살아갔을까... 

   남명의 적통을 이어받은 제자 중 정인홍이라는 인물이 있다. 곽재우과 마찬가지로 임진란을 맞이하여 거병하였고 국난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이바지 한 인물이다. 그 공로가 너무나 큰 나머지 광해군은 내암 정인홍에게 중책을 맞긴다. 정인홍의 학문은 그 어느 누구 못지않게 깊었으며 기절은 스승을 닮아 드높은 절의를 가진 인물이었다. 너무나도 강직하고 타협을 할줄 모르는 그의 성품은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키게되고 간신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게된다. 결국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대역죄로 몰려 최후를 맞이한다. 정녕 정인홍과 같은 인물이 조정에 두어명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은 지금의 조선과는 사뭇 달라져있었을 것이다.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강직함,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켜 조선을 일으켜보겠다는 일념으로 출사했던 정인홍, 그는 오직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열사요 기개의 정절이 꽃피운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 조선의 선비였다. 사욕을 채우려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그는 정녕 백성의 스승이자 군신의 의리를 아는 선비였다. 스승 남명 조식과 더불어 진정한 선비의 사전적인 의미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 바로 정인홍이었던 것이다.    

 

 

  

 

 

 

 위의 책들은 남명의 제자들을 좀더 상세하게 알수 있는 서책들이다.  

 

 

 

 

 

 

 

 위의 책들은 남명 조식의 선비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책들이다.  

 

 

 

 

 

 

 선생님의 문집과....

 

남명의 학문과 문학을 통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서 백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위해 거병했다. 이는 스승님의 실천학문에 입각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퇴계학파와 더불어 조선의 학맥을 이어간 남명의 학문은 최근 많은 연구가 진행중인 듯하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독자들은 남명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격이 없는 인물도 있어보인다. 오히려 남명 선생님이야말로 그 어느 선비 못지않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당파적인 잇속때문에 결국 배향되지 못했다. 치열한 당파전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는 그날까지 지속되었고, 어쩌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론의 영향력이 진행중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있어보인다. 이는 절대로 국민의 탓이 아니다. 국민들로하여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하는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훨씬 더 크다고 본다. 국민을 올바른 사관으로 이끌어야하고, 그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배울 수 있어야한다. 현재는 과거의 퇴적물이며, 그를 바탕으로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밝은 미래지향적 가치관과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자신이 서있는 근간을 모르고서는 정체성의 상실은 물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마저 불명료하게한다. 온 국민이 우리의 역사를 재인식하고 제대로 파악하여 올바른 사관을 가지는 그 날이 오기를 학수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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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을 생각하면 보통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서부부터 강력한 타건으로 비평가들을 놀라게했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등이 떠오른다. 아, 물론 대학생들이라면 단연 라흐마니노프를 호명할 것이다. 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더해서 20여분의 1악장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연주도 있다. 이는 간단한 단상으로 살펴보고 싶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중의 1악장이 그러하다. 또한 나머지 2, 3악장 역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기 어렵도록 청자를 서로잡는 연주의 연속이다.  

이른바, '황제'라는 닉네임을 후세에 갖게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아마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고전음악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 주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으리라 짐작한다. 

 [폴리니_칼 뵘_빈필_DG 2002 : 과연 누가 이 음반에 흠집을 낼수 있으랴. 다만 나는 폴리니의 또랑거리는 연주가 마음에 든다고 밖에는... 흠집을 잡으려거든 길을 걸을 땐 늘 주의를 요망한다. 어디서 돌팔매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그러나 내게는 최고는 아니다...휙~ 돌~]   

  

애초에 베토벤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5번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워낙 곡의 품위와 연주가 들려주는 장엄함 혹은 세련됨 등등 여타의 모든 요인들이 만들어 낸 느낌이 마치 '황제'의 그것과 같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닉네임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피아노 협주곡 5번을 1770년 생인 베토벤이 1809에 작곡했다고 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작곡생활을 하게되는데,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무력 앞에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후 스스로 황제가되어 절대 권력을 잡고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시기였던 것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음악활동을 하고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완성한 시기는 베토벤보다 24세가 많았던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18년째가 되는 해이고, 1797년 생인 귀염둥이 슈베르트가 12살의 나이로 빈의 궁정 예배당에서 어린이로서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보다 27세 아래였다. 그러나 슈베르트를 어린아이로 보면 절대 안되신다. 슈베르트는 13세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고 16세에 교향곡을 썼으며 18세에는 이르러서는 엄청난 수의 가곡을 쓴 고전파의 마지막 주자였다.)   

닉네임으로 보건데 1악장은 아마도 정녕 '황제'다운 기품이 배어있는 듯 하다. 어쩌면 베토벤은 일필에 악장을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힘있고 탄력적이며 우아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매끄러운 악장을 전달하고 있기에 그런 생각이 들기도한다. 또 아니면 어떠랴... 대략 20분 정도의 1악장을 듣는 이가 전혀 20분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운 곡이다. 현악과 관악의 상호 교감은 뚜렷하고 피아노는 또 피아노대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각 악기들의 호응은 완연한 일체감을 주도록 되어있어 처음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대표곡이다. 아마도 단박에 매료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박하우스_빈필  : 사실 별도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은 음반이다. 박하우스가 황제의 연주에서 가지는 위치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하우스의 연주를 단연 으뜸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애호가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니다. 우선은 2악장의 연주 속도가 내게는 너무 빠르게 전해오고, 전체적 연주의 느낌이 통일성이 있고 유려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지만 악기들 상호간의 디테일한 섬세함을 기대하는 나에게는 만족스런 연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이 핵심인 박하우스의 연주는 황제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폴리니-칼뵘반과 더불어 필수 소장반] 

 2 악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곡이 또 어디에 있을까...과연 베토벤이 작곡한 음악이 맞단 말인가...의심이 들지모르겠지만 분명 베토벤의 곡이 맞다. 고집불통에 성질더러운 인간으로 알려져있는 베토벤의 음악을 숭고하고 세상에서 아름답고 애수를 품은 곡이라 말하려는가...곡을 들어본다면 이 곡을 써준 베토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악장은 듣는 모든 이의 시름을 어루만진다. 때로는 청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아름답다. 마치 손으로 건드리면 다칠 것만 같은 가려리고 푸르른 음악이 온 몸을 감싸게된다. 이런 아늑하고도 솜털같은 포근함은 애수라는 상대적인 감성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스스로 딜레마에 빠트린다. 가녀림에 대한 연민과, 애수의 슬픔과 따사로움의 아늑함과 맑은 세상의 공기를 보여준다. 마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 같은 2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불현듯 베토벤이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딜레마란 말인가. 온갖 해물이 섞인 짬뽕도 아니고...여하튼 2악장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버거운 일이다 내게는... 

그렇게 꿈처럼 2악장이 끝나갈 무렵.... 뜻밖에 전혀 공백이 없는 상태로 3악장으로 넘어간다. 베토벤은 그렇게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쉼없이 넘어가도록 곡을 붙여버린다. 그러나 쉼이 없다고 해서 악장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렷한 연주로 분리되어있다. 이런 형태은 베토벤 이후로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그 전에도.... 

미켈란젤리_첼리비다케: [ 오늘 쪽의 두 연주자를 기억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지휘의 구도자인 첼리비타케와 피아노의 구도자인 미켈란젤리가 만나 음악의 구도자라 칭하고 싶은 베토벤을 협연하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연주는 음악으로서의 가치 뿐만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구도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을 재현해 놓은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한다. 어쩌면 그들은 연주하는 그 순간 구도자였을 지도 모른다. 

음질은 좀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토스카니니의 연주로 듣는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쉼없이 바로 넘어가는 3악장은 Rondo의 주제를 연주해가면서 협주곡의 절정을 이룬다. 피아니스트는 장 3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찝어주어야 곡이 빛을 발하며 살아날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Rondo는 시원스럽고도 악기들이 가진 기운을 쭉쭉~내 뿜어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악기들의 명징성이 뚜렷 할 수록 곡은 청자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피아노는 역동적이면서도 구김이 없어야하고 오케스트라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일사 분란한 연주로 피아노를 살려주어야 할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악보의 치밀함을 구현해내어야 할 것이다. 협연은 피아노의 감정을 살려주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렇게 피아노와 협연은 완벽한 마무리를 해내야 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 연주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정도에서 애호가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바로 짐머만과 번스타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Krystian Zimerman_Leonard Bernstein 의 영상물과 음반

 [짐머만의 피아노와 번스타인의 협연은 완벽함 그 자체이다. 그들이 베토벤을 의도한 그대로 가장 훌륭한 연주를 해냈다. 자켓의 뒷편으로 보이는 연주자들의 표정을 보시라...번스타인의 만족한 표정과 짐머만의 의연한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곡을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연주해냈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둣 하다. 베토벤이 살아있다면 그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의 곡을 연주 해주었노라...라고... 베토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 연주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그랬을 것만 같다... 이 둘은 이 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를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조화롭고, 이토록 모든 악기들이 피아노와 협연의 개성들을 모두 살려낸 연주를 또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으랴...왼쪽의 DVD는 완벽한 황제의 연주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준다.] 

  이 외에도 빼어난 연주들이 매우 많다. 그만큼 연주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곡이라는 뜻일 것이다. 꼭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 해내야만 좋은 연주는 아니다. 연주자 자신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피아노와 협연자들의 상호 노력은 이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완성도를 가진 연주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애호가들의 취향과 선호도가 서로 달라 입맞이 제각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음악에 하나의 고정된 틀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해석과 연주의 차이는 제각각 좋은 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매우 좋은 연주들이 수없이 많으나 다음의 몇가지만 열거해본다.  

   

 

 

  

 

 

1.앙세르메이                              2.제르킨                              3. 아쉬케나지  

1. 앙세르메이의 지휘는 베토벤의 교향곡 연주로도 그 이름이 드높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9번이 커플링되어있어 앙세르메이의 9번에 대한 해석도 감상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2. 제르킨과 번스타인의 협연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들의 빼어난 수연을 아직도 제르킨의 거침없이 뿜어대는 연주를 번스타인은 무리없이 서포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뜨거운 연주를 원하고 폭풍같은 느낌을 받고 싶은 사람은 제르킨과 번스타인으로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쉬케나지를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매우 많다. 

신호도에 따라 다음의 음반들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것이다. 

 

  

 

 

 

위 모두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음반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연주로 첮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빈시타인을 애써 거론 할 필요는 없다. 20세기 여성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남아있는 유디나는 창조적인 예술가요 따듯한 가슴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애호가는 없을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와 연주를 모두 그 이름이 높다.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 노프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분명 그의 팬이되고야 말것이다.  

 에밀 길레스_권터 반트: 이 둘의 연주를 빼놓으려니 아무래도 서운한 감이 몰려온다. 길레스의 러시아적 타건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연주일 것이다. 길레스의 강인한 타건에 흠뻑 매료된 팬들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 어디 강인함 뿐이련가. 2악장의 영롱한 터치는 듣는 사람을 충분히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길레스라는 감동과 함께...여러가지 측면에서 호연으로 생략할 수 없는 음 반 중 하나일 것이다. 권터 반트가 슈베르트 교향곡 미완성에서 보여주는 연주를 들어보신 분들은 또 이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지휘자임에 틀림이 없다.    

  미켈란젤리-줄리니이 두사람이 호흡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리니 역시 지휘에 관한한 그 어느 지휘자 못지 않은 철학을 지닌 사람이다. 미켈란젤리를 구도자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줄리니 역시 그에 걸맞는 구도자일 것이다. 카라얀보다 적은 연주를 남겼지만 결코 카라얀보다 덜 해서가 아니었다. 보다 철저하고 보다 심오한 심연을 꿰뚫어내는 줄리니의 연주는 그 어느 음반 하나도 소홀함이 없는 대 지휘자이다. 정명훈의 스승으로 이탈리아의 지휘 계보를 이어받은 줄리니는 그 어마어마한 선배들의 이름을 더욱 빛내주는 정통 계보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지휘자보다 진중하며 배려깊은 분으로 정녕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한가지 덧 붙이자면 애청반은 곧 명반이다 라는 공식은 아니라고 본다. 각 음반에는 곡 자체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연주 자체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연주가의 이야기가 가미된다면 그 어느 음반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요인들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꼭 명반이 아니어도 애호가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음반들은 서로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굳이 연주에 점수를 매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두 각자의 기호와 사연이 다르니 애청반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이 음반은 이런 점에서 애호하고 저음 반은 저런 점에서 애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외에도 좋은 음반들이 수없이 많으나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제르킨과 발터의 음반도 소개하고 싶었으나 알라딘에서 그 이미지를 찾지 못해 서운하기 이를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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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진의 동양화 읽는법  

 그림은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즉,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독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점을 무시할 때 그림과는 영원히 친교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조용진의 동양화 읽는 법은 동양화가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모든 동양화가 상징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은 동양화 이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나처럼 잘 모르지만 앞으로 동양화에 관심을 가져볼 계획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을 알차게 소개하고 있다. 

우측의 그림은 우리의 민화도로 임금의 물고기라고 하는 쏘가리이다. 쏘가리의 한자음은 '궐어'이다. '궐'은 임금이 살고있는 '궁궐'과 통하는 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민화에서처럼 두마리 이상의 궐어를 그린다면 어떻게 될까...반역죄이다. 아마도 이 민화를 그린 사람이 조선시대의 민초라면 궐어는 한마리만 그려야 하며 두마리부터는 역모죄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조용진이 설명하는 그림에 대한 한가지 예를 차용하여 작성한 내용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흥미 진진한 그림읽기가 펼쳐진다. 물론 그림의 메시지 안에는 화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화가의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려한다면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 가득하다.. 

 

파리스의 심판 

 이 그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루벤스가 그린 것으로 '파리스의 심판'이다. 흔히 '파리스의 사과'로도 잘 알려져있다.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는 매우 많아서 같은 주제를 가진 다른 그림들을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스신화를 읽어본 초등학생들도 잘 알고있을 '파리스의 사과'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펠리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 잔치에 여신 '에리스'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녀가 초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녀는 불화의 여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에서 불화의 여신이라니...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이에 단단히 화가났다. 나를 초대하지 않다나...앙심을 품은 에리스는 이에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써있는 황금 사과를 연회장에 던져놓고 사라진다. 과연 어느 누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되어 황금 사과를 차지하느냐하는 것은 내노라하는 여신들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이기도했다. 많은 여신들이 경쟁을 한 끝에 마침내 지혜의 여신 아테나, 미의 여신 비너스,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결선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신의 왕좌에 있는 제우스의 심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영리했다. 여자들을 자극해봐야 이로울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제우스는 당시 트로이의 왕자였던 '파리스'에게 이 짐을 떠 넘겼다.  

 이제 결선의 순간이 욌다. 헤라는 파리스에게 부와 권력을 약속했고, 아테나는 지혜와 모든 전쟁의 승리를,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여자를 선택했다. 비너스의 약속을 믿노라 말하며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비너스는 보답으로 스파르타의 메넬라우스왕의 여자인 '헬레네'를 점지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파리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이야.... 영화 트로이를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파리스의 선택이 그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는지를... 이럴 땐 제우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 트로이는 스파르타의 연합군과 전쟁을 치루게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벌여 결국 트로이를 멸망에 이르게하면서 자신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대신 질투의 화신 헤라와 전쟁의 신 아테나에게 굴욕감을 준 댓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바로 파리스가 심판을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주는 교훈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서양화 읽는 법

그러나 이 그림의 화가와 그림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화의 내용을 아는 것 외에도 관객의 입장에서 알고있어야 중요한 한가지가 더 있다.  바로 '독화'이다.  

 위 그림의 맨 왼쪽 여성은 그 뒤에 방패와 갑옷을 벗어놓았고, 가운데 여성은 귀금속 장식과 더불어 어린아이가 딸려있다. 오른 쪽의 여인은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으며 공작새의 깃털도 보인다. 이쯤하면 저 여성들 각각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시점이다. 방패와 갑옷은 당연히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의 것일 것이고, 가운데 여성은 미의 여신 비너스 일것이다. 비너스는 그 아들 큐피드와 늘 함께다닌다. 그녀가 치장한 보석들은 그녀가 역시 미의 여신임을 방증하고 있다. 다른 그림에서는 사과를 들고있는 여신이 비너스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오른 쪽의 여신은 이제 '헤라'일수 밖에 없다. 공작새의 깃털은 헤라를 상징하고 있다. 모피 코트 역시 제우스의 아내로서 그녀의 지위를 상징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사과를 들고있는 사람은 보나마나 파리스일 것이다. 심판자이기도 하거니와 루벤스는 파리스를 양치기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앞의 개는 양을 치는데 도움을 주는 개(dog)인 것이다. 모자를 쓴 인물은 제우스신의 젼령인 헤르메스일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이미 승자가 누구인지 결정하기 바로 직전의 그림이라는 점을 알수가 있다. 물론 이는 서양화 읽는법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의 한 예이다. 지물이 상징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독화가 그림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데 그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깨우쳐 주는 좋은 도서이다.   

'그림 보는 만큼 안다'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수고 있는 도서이다. 특히 그림과의 만남과도 같은 책이다. 여러 가지 옛 그림; 심사정의 '선유도'.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 김두량의 '월야산수도', 신윤복의 '풍속화첩' '아이 업은 여인', 사시상춘' , 채용신의 '운낭자상', 윤두서의 '자화상', 작자미상의 '송시열의 초상' 등등...아주아주 흥미로운 그림들을 만나게 한다. 그 과정에서 그 흥미로움의 매력은 정녕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림에 관심을 가진 독자를 흠뻑 취해 그림 속에서 노닐도록 장을 주선하는 편안하고도 즐거운 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면 바로 이 책을 적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고 하겠다. 읽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독자는 더 깊은 그림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된다. 필독서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세계 명화 비밀 시리즈..

 

 

 

 

 

 

                                                         

신화상징                     성서상징

그림이 가지고 있는 독화의 기본적인 상징성을 일고나면 다음 단계로 적합한 책들이 있다. 바로 위의 세가지 일 것이다. 서양의 그림들이 주는 특성을 매우 잘 전달해주고 있는 이 책들은 그 그림에 대한 독자의 안목을 훨썬 더 높여줄 것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치는 돈으로 살 수없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준다. 상징물 이외의 그림 속에 스며든 사상과 철학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그림에는 자구적인 사상이 깔려있다. 이 사상의 이해와 상징물의 결합은 한층 더 깊은 그름의 이해로 가는 길이라고 본다.

 왜 피카소를 그림을 이렇게 그렸고, 뭉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리게되었는지...피카소와 뭉크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그 어떤 생각과 심정이 담겨있었는지를 읽어내는 코드를 공부하게 해주는 책이 바로 "세계 명화의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책은 그림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림은 그 안에 살아있는 역사를 담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음악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와 함께하지 않는 그림은 거의 없으며 그렇지 않은 그림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그림을 단순한 그림으로만 이해하려 했던 나 자신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그러하다. 

성서 상징은 비록 기독교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가치를 몇 배로 보상 받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서양의 문화는 기독교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며 역사 또한 기독교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도 역시 기독교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그 성서의 상징성을 이하하게 된다면 독자의 안목이 훨씬 더 높아져 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동양화 속으로...

 한국의 그림이 그 얼마나 심오하고 흥미로우며 자랑스러운지는 오주석과 관련한 도서들을 읽는 것으로 깨우침이 많다. 독자에게 정녕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오주석이다. 일생을 김홍도로 살아가고 싶었던 오주석...그의 저서들은 한국의 미술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한국의 정체성을 더욱 빛나게 해줄 수 있는 그의 생각과 한국 미술계에 끼친 공로만으로도 못다이룬 일들이 많겠지만 그러기에 더욱 빛나는 인물일 것이다.  
 

 오주석은 동양사학으로 출발하여 조선의 미술사학에 있어 혁신적인 발견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그는 시대의 정신이 어떻게 조선의 회화에 투영되어 있는지와 당시의 회화에 학문과 정신이 표현된 비밀들을 풀어냈다. 회화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가 의구심이 들만도 하겠지만 오주석이 회화속에 담긴 코드풀이를 들어보면 정녕 비밀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인문학의 절정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의 '선상 관매도', 정선의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임금의 뒤에 치는 '일월오봉병',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등에는 비밀과도 같은 코드들이 숨어있다. 아마 오주석의 저술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 감동적인 결과물로 인해 오주석이 왜 한국 미술사학의 보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경시대는 일생을 한국 미술을 연구하며 보내다가 안타까운 나이에 타계한 오주석선생의 역작이다. 오주석의 생각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물론 기성세대들에게도 커다란 깨우침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주석의 정체성은 청소년들에게도 큰 감동을 줄 수 있을것이다. 청소년기는 자아의 성장기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도의 시기이므로 올바른 정체성을 갖추도록 하는 일은 기성 세대의 몫일 것이다. 자녀의 교육은 부모의 정체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오주석은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한국의 예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정말 유익한 도서들이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주의사항: 진경시대의 공저자이자 박물관장인 최완수의 글은 역사를 너무 왜곡시키는 외골수인지라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가치를 가장 많이 떨어트리는 사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사적인 판단이다. 전체적으로 유익한 책이지만 사관을 조심하여 읽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막다른 골목에 서서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은 관찰자인가 예술가들인가...

이렇게 나름대로 그림의 상징성을 이해하고 그 배경이 되는 사상을 이해하려면 좀더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가서는 갑자기 미로속을 헤매는 듯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지금껏 공부한 것이 만사 헛된 것이었는가...하는 자괴감에 빠져 버리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럴 때 꼭 과정을 거쳐야 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진중권님의 미학 오딧세이이다.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는 그렇게 미로속을 헤매다가 만난 결정적인 탈출구를 나에게 제공해주었다. 마치 낙소스 섬의 미로속에 갖혀있다가 아리아드네의 재치있는 실로인하여 그 탈출구를 발견한 느낌이 비로 이런 느낌일 것이다. 

어느 순간 난해해지는 그림의 상징세계를 만나게된다. 짐작하시겠지만 현대미술에서 만나는 난해함이 그것이다. 과거의 미술사에서 현대의 미술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유파들이 오고갔다. 이제는 거의 모든 미술적인 가치들이 세상에 드러난 시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은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오던 나와 같은 관찰자가 아니라 현대 예술가들 스스로의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미술적 사고의 고갈이라는 딜레마에 빠져버린 예술가 자신들이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 이름도 유명한 달리, 마그리트, 작금으로는 앤디워홀이 그 장본인들이다. 한마디로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마그리트...본격적인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남과 다르고 싶은 갈망돠 욕구가 더해져 이들의 예술은 이해불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꼭꼭 숨기려는 듯하다. 아니 징신 세계의 고갈을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대중들이 쉽게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라는 대신 혼자만의 세계속으로 파고들어가 이곳까지 관객들이 찾아와주기를 갈망하는 듯한 조금은 이율배반적인 딜레마를 뒤집어 쓴 예술가들의 모습... 이것이 관찰자인 우리들을 한없는 미로속을 헤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처럼 보이던 현대 예술은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만나면서 실마리를 찾게된다. 아리아드네...진중권을 통하여 우리는 바로 아리아드네를 만난 것이다. 예술을 이해하는 필독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를 독파하고 나면 서서히 겁을 상실하게된다. 마치 미로속을 벗어난 테세우스가 그얼마나 간덩어리가 부었을지..짐작이 간다...간이 부은 관찰자는 다음과 같은 도서들에 도전하게 되어있다. 도전 할수록 유익하고 흥미로운 미술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간이 부은 사람들이 더욱 흥미롭게 탐독하는 관련 서책들... 

 

 

 

 

 

 

 

 

 

 

 

 

 

 

  

 

 

  

 

 

  

 

 

 

 

 

  

 

그 어느 책을 선택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들이다... 세한도는 정녕 감동적인 책이리라... 

 

더욱 깊이 들어갈 차례... 

동양의 미술을 이정도 공부했으면 이제는 서양의 미술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차례이다. 

 

  

 

 

 

 

 

 

곰브리치                             진중권                          W.H 잰슨 

곰브리치와 잰슨의 서양미술사는 그 어느 책들보다도 호평을 받고있는 서양미술사들이다. 두사람의 저술을 빼놓고는 우리나라에서도 서양미술사를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지도가 높은 만큼 널리 읽히고 있으며  흔히들 필독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책들이니만큼 눈여겨 봐둘 필요가 있다. 진중권의 미술사는 저자가 진중권이 아니던가..진중권의 책은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진중권이 쓴 책은 따로 생각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뢰를 준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진중권은... 

이상으로 동서양의 미술을 공부하는 대략적인 노선을 따라봤다. 물론 이 방법이 최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방법에는 각자의 방식이 있고 그 즐거움이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는 그동안 미술에 관심을 가진 한 사람의 관찰자로서 그림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으로 서적들을 탐독한 결과이고 이러한 질서를 잡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되었고, 행여나 미술에 관심이 있지만 시작하기를 망설이는 분들에게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페이퍼를 이용하여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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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커다란 흐름을 이해하는데 장하준의 저서들은 매우 유익한 도서들이다. 특히, 신진국들과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가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이해를 돕고있다.  

장하준의 글을 한 번 읽게되면 그가 쓴 다른 저서들을 읽게 마련이다. 그의 글은 명쾌하고 분명한 근거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 언제나 성공하고 있다. 게다가 전체적인 세계 경제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도록 해준다. 한국 경제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 그 허와 실을 파악하려는 분들에게 촘스키나 장 지글러의 저서들을 뛰어 넘는 분석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 인들'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국방부의 금서목록에 블랙리스트로 올라있는 책이다. 최근 G20 정상회의가 코엑스에서 열렸다. G20 정상회의의 목적은 하나다. 세계의 부국들이(한국은 부국측에 끼는 것은 아니다) 돈이라는 힘을 바탕으로 부유하지 않는 나라들과의 금융과 무역을 통제해보겠다는 의도를 가진 일종의 모의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G20의 생각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으며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있는 자유무역이 뜻하는 바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을것이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82달러, 당시 가나의 1인당 소득은 179달러였다. 다시말해서 지난 60년대 당시 가나는 한국보다 두배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였었는데, 지금은 그토록 빈곤과 기아 그리고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을 밑빠진 독이라 부르던 악조건에서, 한국은 스스로의 힘을 꾸준히 길러온 데 반해, 가나는 정체를 지속해왔다. 어쩌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답이 이 안에 있다.  

한국은 전쟁을 거치며 제조시설의 절반, 철도의 75%이상 파괴된 상태였다. 그런 한국과 가나의 현대 경제적 상황은 거꾸로된 상태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대목은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정답은 얻는 일은 힘들일 필요가 없다. 이 책은 그렇게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어떻게 하여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의 세계 경제 시스템이라면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들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더욱 주린배를 욺켜쥐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갈 것이다. 부국들은 이미 정상에 올라서있고 그들이 타고 올랐던 사다리를 걷어차버렸기 때문이다. 뒤따라 올라올 수도 있었던 힘없는 국가들을 사다리에서 떨어트려 죽게 만든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피력하고 있는 장하준의 글들을 훨씬 더 뒷바침하고 있는 이 책은 사다리를 절 반 이상 올라와 있는 상태에서 아둥바둥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사다리에서 떨어져버린 국가들의 자화상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한국 경제를 말한다

  이 두권의 책은 장하준 교수가 한국의 경제에 대하여 저술한 내용으로 한국 경제는 과연 어떻게하여 60년대의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느쪽 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은 발전시기에 절대로 신지유주의의 경제 체제를 도입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은 물론 가나를 비롯하여 아프리키의 대부분 나라들, 그리고 현재의 남미의 다수 국가들은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식민 지배하에 있던 나라치고 잘된 나라가 없다. 빈국이 아닌 나라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밀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국민소득 2만불로 강국들의 그것에는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이지만 말이다.  (OECD 국가들의 절반에 미치는 국민소득이라니...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하튼 한국의 경제가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것은 맞지만 과거 가난에 찌든 나라로서 국제기구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에 나서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연 한국은 어떻게하여 그토록 혹독한 시련속에서도 현재의 경제력을 일궈왔는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더불어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방식의 글들이다. 이 책을 일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경제의 현주소에 대한 밝은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덫

 OECD와 G20들이 외치는 금융과 자유무역의 실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중국이 왜 그토록 미국과 잦은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지 이 책을 읽는다면 꿰뚫을 수 있다. 개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바로 경제의 종속을 의미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들이 현재의 빈국들이다. 그들이 과연 선진국과 어떤 약속(개혁)들을 했는지 보시라...그리고 그들의 달콤한 유혹 혹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개혁을 단행했던 국가들을 보시라...그 개혁이 가져다주는 참담함과 결과들은 차마 글로 다 말할 수 없음이다...한 번 걸려들면 다시는 일어설 수가 없는 구조를 가진 경제 메커니즘은 빈국들에게서 앞으로도 희망을 등불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이다..언젠가는 나아지겠지...생각 하겠디만...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구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너무나도 참담하여 조금이나마 빈국들의 아이들에게 보내 후원하려는 마음도 맥이빠져 버릴 지경이다...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대는 꼴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그토록 빈국들의 상태가 나쁜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답은 '그렇다'이다. 아니 앞으로 더욱 나빠질 일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빈국들이 국제기구로부터 원조금 명목으로 지원받고 있는 금액은 300억 달러이다. 엄청남 금액을 매년 지원해주고 있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열배인 3000억달러의 부채를 떠안고 있으며 매년 부국들에게 갚아야할 이자는 지원받고 있는 금액보더 훨씬 더 큰 금액이다. 지원금으로 들어오는 돈은 한푼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토해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과연 그들이 지원해주는 이유는 그들을 돕고싶어서인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돕지 않으면 빼낼 돈줄이 말라버리기 때문인가...또 정답은 안타깝게도 후자이다. 약소국들에게 철회시킨 관세는 그들의 돈줄이며 국가를 일으킬 수 있는 자금줄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철폐당한 빈국들이 과연 어디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seed money를 확보할 것인가...생산성이 낮고 갚아야 할 돈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벌어서 고스란히 부국들의 입에 털어주고나면.... 그들의 손에는 남아있어야 할  잉여가치가 없다. 이제 세계는 다시 발전을 해야한다. 어떻게 발전을 해야 하는 것일까...신 자유주의의 기치를 넘어선, 진정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그들을 맞이해줄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되 찾아을 수 있는, 그들에게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아와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경제 발전을 저자는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4가지 그리고 국가의 역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가장 최근에 출판된 장하준의 저서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비단 23가지가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그 중 그들이 말하지 않은 가장  핵심적은 23가지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다. 그들은 과거에 이렇게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빈국들에게 저렇게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들은 성장기에 절대로 입어본적이 없는 신자유주의의 황금 옷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거나 과거 선진국들의 경제정책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실체를 찾아내야만 살길을 택할 수가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파놓은 덫은 빠져나갈 수 없는 큰 함정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  

 

                                          국가의 역할  

이러한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1980년대 이후로 급진적 신 자유주의는 국제 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 무역기구와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등을 통하여 한국은 물론 특히 개발도상을 상대로 자신들의 개혁을 강요해왔으며 지금도 그 강요는 집요하도록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이들의 압력에 저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이미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상태이다.   

 한국 또한 구제금융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그들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97년 구제금융 당시 IMF는 국가 예산을 100조원을 넘길 수 없다는 조항마저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97년 구제 금융을 기점으로 한국도 신 자유주의 노선에 합류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 후로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고, 내수 시장과의 불균형이 더욱 벌어졌다. 적대적 인수합병은 기업의 투자를 축소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불안이라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이 경험했던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중이다.  투자의 축소와 저성장 그리고 고용의 불안이 커지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계약직 노동시장의 원리이다.  이에 국가가 해야할 역할들이 있다. 이 책은 한국 뿐만이나라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모든 세계의 국가들에게 해당되는 국가 운영지침서와 마찬가지이다. 
  

장하준의 글들을 시리즈로 읽어가는 동안 한국의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의 흐름을 확연하게 이해하게된다. 현재의 세계경제 패러다임은 분명히 변화해야 한다.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아는, 인류의 덕목을 아는 존재로서 말이다. 인간에게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인문학에는 아름다운 윤리학이 있고 그 덕목이 있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일 수는 없다. 그 과학이 모든 인류의 평화에 기여해야 하며 모든 인류는 먹을 것과 기본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인간이 동물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할 때이다. 

장하준의 위 책만으로도 앞으로 인류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장하준만의 주장이 전부는 아니다. 장하준의 주장이 그 얼마나 타당하고 적절한 것인가를 다시금 증명해주는 도서들이 즐비하다. 그 중 몇가지로 촘스키와 장지글러의 도서들을 소개한다...  

장지글러의 저서들...

 

 

 

 

 

 

 

아마 읽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장하준의 소리가 정녕 입바른 소리임을 증명해주는 장지글러의 소리들이다...장지글러는 장하준과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의 구조적 패러다임을 우리들에게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 전문가들은 비 전문가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고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가 직면해있는 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지글러의 저서들을 읽노라면 눈물없이 읽을 이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슬프고 비극적인 연애 소설도 아닌 이 책들이 독자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도록 할 것이다... 슬픈 현실이여...누가 이들을 보살필 것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장하준, 장지글러와 노엄 촘스키와 같이 슬픈 현실을 보고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노엄 촘스의 저서들...

 

 

 

 

 

 

 

 

 

 

 

 

 

 

촘스키는 권력의 힘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그 권력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명료한 증거자료와 더불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힘의 논리는 무자비하다. 자신이 가진  힘을 나보다 못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한다는 교육은 교육 현장 그 이외의 그 어느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교실에서의 가르침과 교실 밖의 현실은 그렇게 서로 충돌한다. 왜 이런 충돌을 깨달으며 교욕받은 자들은 당황해 해야 하는가..그 이유를 깨닫도록 해준다. 과연 누가 그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을 어떤 방식으로 쓰고있는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 스스로도 모른채 당하지 않기위해서...그리고 그 힘을 정의를 위해서 쓰기위해서 이다.  

이런 점에서 위의 저서들은 독자의 서가에 꼿혀있어야 한다... 세계의 힘이 움직이는 공식을 백일하에 보여주고 있는 책들이다. 분명 이는 권력을 가진 국가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사실 들이기도 할 것이다. 힘이란 과연 어떠한것인가...'큰 힘을 가진자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영화에서나 나불거리는 수식어구란 말인가...너무나도 이기적이며 가식적이고 기만적인 힘의 원리를 이들은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다... 이 책들을 서가에 두고 읽어야 하는 마지막 이유가 있다. 이 태풍의 한 가운데에 장하준과 장지글러와 촘스키가 고독하고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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