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사상과 문화
최완수 외 / 돌베개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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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진경문화를 다룬 서책이라 반가운 마음에 구입하여 읽었다. 그러나 당파의 냄새를 너무 역하게 풍기는 바람에 읽는 내내 기분이 나지 않는다. 예술은 역사와 이분할 수 없다는 점은 잘 안다. 그러나 진경문화를 지나치게 숭배하다보니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기며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를 극심히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코를 찌른다. 어쩌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사관으로 일관 할 수 있을까..이러다가 한국의 미술를 공부하신 분들을 정말 개념없는 사관을 가진 쪼무래기들로 치부하게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평소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인지라 진경시대라는 제목의 책은 매우 매력적인 책이아닐 수 없다. 이미 안내에서 밝혀두고 있듯이 1675년-1720년 숙종대에서 1777년-1800년 정조대에 이르는 125년간의 시기를 진경시대라 구분한다.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을 진경문화의 초창기, 영조 재위 51년을 절정기 그리고 정조 24년을 쇠퇴기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꽃을 피운 전경시대의 문화는 그 안에 선비의 정신과 사상을 근간으로 발전했던 우리 예술문화의 절정이라는 점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금방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눈치를 채셨으리라 믿는다. 당쟁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시대라는 것을 감지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당파가 혼란했던 시대에 진경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진경시대 예술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국시 '성리학'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사관의 흐름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당시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인과 노론중심 사관을 밑에 깔고 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마치 서인들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불가피하게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그 반정의 성공이 있었기에 진경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역사적인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반정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성공해서는 안되었을 쿠데타였다.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과 인조는 권력욕을 이기지 못하고 반정을 일으켰던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건이 아니던가. 더구나 반정 후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얼마든지 피해갔을 수도 있었던 정묘호란을 스스로불러 조선에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반정세력은 정묘호란으로도 정신을 못차리고 바로 병자호란을 또다시 불러와 조선의 전역을 초토화시켜버리고 만다.  

임진왜란으로 7년간 조선의 인구 3분의 1이상이 죽어가는 비참한 비극을 경험한지 몇년이나 흘렀다고 또 다시 전국을 그토록 비극적인 전쟁으로 몰아갔어야  한단 말인가..어떤이는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조선인 20만 명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는 이도 있고 60만명이 끌려갔다는 학자도 있다. 과연 진경의 문화와 이들 죄없는 백성들의 삶과 목숨값을 바꾸려한단 말인가... 

저자 최완수의 사관은 오로지 진경산수화만이 보이는 사람인가보다. 예술은 사회와 역사를 반영하기 마련이고 시대적인 사상을 바탕으로하기 마련이다. 다만 손기술로는 문화요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라 볼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너무 편협하고도 불안한 사관을 가지고 진경문화를 연결지으려다보니 참으로 실소를 금할 길이 없는 글을 써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진경시대는 가장 치열하고도 처절했던 당파의 싸움으로 전국이 얼룩졌던 피의 시대였다. 율곡선생님의 후계자들인 우암 송시열, 송준길등의 절대적인 주자신봉자들이 과연 진경문화에 공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주자성리학은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던 율곡선생님의 깊은 사상을 제대로 전수받아 배운 후학이 누가있었던가...김장생이던가, 송시열이던가, 송준길, 송익필이던가...   

서인 중 과연 누가 정녕 율곡선생님의 적통이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율곡선생님의 애민, 휼민, 보민정신을 과연 그 어느 누가 재대로 이었단 말인가... 오로지 서인의 집권과 당파를 위해 목숨을 던진이들 뿐 아니던가.. 그들의 예술세계가 제 아무리 홀륭하다하나 빈강정이 아닐 수 없는 이유이다. 백성을 위해 일생을 살다간 대 스승님 율곡의 대미수공법을 이들은 모두 반대했던 핵심세력이었다는 점인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러고도 율곡의 학통을 이은 율곡학파라고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을 위한 이들은 대동법에 목숨을 걸었던 김육과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있었을 뿐이다... 

백성이 제외된 역사는 역사라  할 수 없다. 비록 진경문화가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앞으로 나오는 진경문화를 다루는 서책들은 당파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대적 국시인 성리학을 배제할 수 없는 점은 인정하지만 부디 당파를 끌어들여 사관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진경문화를 다루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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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t 2016-09-14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진경시대 예술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국시 `성리학`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사관의 흐름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당시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인과 노론중심 사관을 밑에 깔고 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는 게 무슨 말인가요? 말 앞뒤가 안 맞네요.진경문화의 산실인 노론의 사상을 이야기 안 하고 진경문화를 논하라는 건가요? 개소리도 이렇게 정성껏 쓰네.

차트랑 2016-09-28 18:29   좋아요 1 | URL
찾는 이가 없어 적적하던 차에 이렇게 왕림해주시니 반갑습니다 님,

비교적 쉬운 용어인 <사관> 과 <사상>을 잠시 착오하신 듯 하니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어 아쉽군요.
물론 실수는 저도 늘 하는 일이니 개의치는 마시기 바랍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