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덕무의 관독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탓에 둘의 차이가 어떠한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저자의 관독일기는 그야말로 이덕무에 대한 오마주이며 고요한 자신의 독백지 싶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지은이가 정말로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이라는 것을 감지케 한다. 주로 고전이 독서의 대상일 것이다. 잠과 명으로 그 범주를 제한했지만 그의 독서력과 량은 가히 짐작키 어려운 수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부제가 말하듯 주된 독서는 잠과 명이지만, 책에서는 그 외에도 저자의 고독이 눈에 띈다. 특히 107쪽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는데,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오는 ‘절대 고독’이라는 말보다 그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마치 시퍼런 칼날처럼 말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다’는 말이 무엇이던가. 바로 중용의 백인가도(白刃可蹈)를 이름이 아니던가. 시퍼렇다 못해 하얀 칼날 위를 걷는 용기를 일컬음이다. 그 용기 저편에 서있는 사람은 끈임없는 절대 고독을 견뎌야 한다. 고독을 견뎌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비로소 한 인간은 백인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누가 그 고독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순수하며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시인, 茶兄 김현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茶兄의 詩 '절대고독'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둔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

 

 

 

 

 

시인 茶兄께서 '절대고독'이라 말씀은 하시지만 그에게 고독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 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여 茶兄에게 고독은 즐거움이며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관독일기의 저자의 고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의 독서 일기를 적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 나올 당시에 이미 그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기를 그렇게 적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저자가 그렇게 한 해의 중양절을 시작으로 일기를 적어오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 것은 그 동안의 독서가 그 얼마나 방대할까를 짐작해서이다. 나로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인지라 그저 존경스럽고 부러울 뿐이다.

 

일기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잠과 명을 읽으며 적어간 이 글은 또한 수필의 느낌을 주기도 하며, 내용은 상당히 자조적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저자의 주요 저술은 이 책이 아니라 저자가 일기를 쓰던 당시 주 타겟으로 하고 있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주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관독일기를 하루하루 써간 것이다. 독자로서 이점을 배워두어야 겠다 싶다. 바쁜 와중에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어 내는 저자의 모습은 과연 유배지에 있던 여유당께서 자녀들에게 보낸 서한을 읽은 사람답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도 책을 읽지 않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독서에 게으르고 시간이 나면 딴짓을 하곤한다. 관독 일기는 그런 나에게 좋은 채근을 준다.

 

더불어, 카메라를 새것으로 장만해가며 공들여 찍은 사진들은 아마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음 독서의 순서는 그 책으로 자연 정해져 버렸다.

 

여러 날의 일기들이 대부분 매우 인상적이지만 특히 저자가 남원에 들렀던 날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기고봉의 전설을 잠시 소개 하고 있다. 기고봉은 이퇴계와 수년간에 걸친 필담으로 사단칠정을 서로 교환한 장본인이다. 말이 교환이지 기고봉께서 먼저 도전장을 내밀어 시작된 논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고봉은 이퇴계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궁해진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개진, 발전시켜 반론을 폈던 것이다. 그러한 이황의 저술이 상당부문 임진왜란때 약탈당하여 일본의 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중국의 사상가로 하여금 李夫子라는 호칭을 들은 인물로 부상했던 것은 어쩌면 기고봉의 덕분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매우 인상적인 대목은 안순암의 경어를 언급한 부분이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의 직계 후학으로 “대장부 심중에 일촌 쇠는 녹지 않는다. 大丈夫心中一村鐵未銷”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 말은 마치 논어 중 ‘자한’이 출전인 “삼군가탈사야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師也 匹夫不可奪志也)”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三軍은 제후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많은 군대의 규모로 총 37,500명의 전차가 있는 부대를 말한다. 막강한 군대의 장수의 목을 취할 수는 있어도 필부의 의지는 절대로 꺽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장부와 필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자한 편에 나오는 이 말에서 匹夫라는 말을 더없이 애정하게 되었다. 과연 맹자가 말한 大丈夫와 공자가 말한 匹夫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싶다. 무릇 필부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

 

순암의 기록은 사적인 것이겠지만 지극히 인상적인데, 177쪽의 순암 6잠과 4경을 소개할 때는 그 절정에 달한다. 순암은 자신의 오른 쪽과 맞은 편에 각각4 글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는 주역의 곤괘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문구라고 한다.

 

 

한문을 그대로 옮기면 “敬으로써 안을 곧게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이고, 줄인 말대로 옮기면 “경으로 곧게, 의로서 바르게”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곧 공경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외부 행동을 단속한다는 의미이다. 177쪽

 

저자의 말이 매우 지당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이 敬과 義는 실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밖으로 바르게한다’는 말이 바로 실천력이다. 일생을 통해 경과 의, 두 글자로 삶을 충실하게 살다간 이가 있으니, 바로 조선의 조남명이 아니던가. 하여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는데 압장섰는데 정인홍, 곽재우는 그 대표적인 예라하겠다.

 

 

전반적으로 관독일기는 靜中動을 느낄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해주면서 깊은 사유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하는 능력을 가진 책이다. 조용히 관조하고 싶다거나 숙고의 기회를 가지고 싶은 분이라면 매우 좋은 책이 되어주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두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선, 저자가 잠명으로 고른 대상 인물들 대부분 대단히 훌륭하고 내적 사유를 참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문장은 고고하고 아름다우나 일생이 그렇지 못했던 인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백운거사 이규보에 대한 글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한 명’과 같은 글이다. 나는 이규보의 글이 등장 할 때마다 잠시 읽기를 멈추곤 했다. 이규보는 고려의 인물로 권력에 무던히도 집착한 나머지 온갖 비굴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씨 일가에 빌붙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던 인물이다. 백운거사라는 닉네임도 사실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비관, 은둔했던 당시에 얻은 이름이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가 사모하는 이덕무마저도 그의 인물평을 혹독하게 했겠는가. 이덕무는 이규보가 남긴 글의 가치를 전혀 알아주지 않았는데 ‘추졸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이 덕무의 이규보의 글에 대한 평가에서 ‘추졸’이라는 말보다는 ‘명실’이라는 말에 의중을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글로만 본다면 어찌 이규보의 글을 추졸하다고 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명실'이라는 말로는 능히 이규보의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는 전혀 바르지 못했던 행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던가. 이덕무는 이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라는 평으로 이규보의 글과 그 행동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음을 설파한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남겼다 한들, 그 말을 남긴 인물이 자신이 남긴 말 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았다면 그 언어의 가치와 비중은 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여 사적으로 매우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다른 집고 넘어갈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용』 장구章句에 나오는 계신공구는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에서 온 말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 183쪽

 

이 곳의 부도는 불도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한데, 다음의 불분과 서로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비록 한글로 읽는다 하더라도 대구를 염두에 두고 일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글의 음운법칙을 우선 적용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럴 경우 '부도'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잘못된 지적임을 인정함)   

 

 

또한

호은은 “숨은 곳 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일 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183쪽

 

저자는 위 글을 ‘막견’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莫見乎隱은 ‘막현호은’으로 읽는 것이 맞다. ‘見’을 ‘견’으로 읽으면 ‘본다’는 뜻이 되지만 ‘현’으로 읽으면 ‘나타난다, 드러난다, 명백하다’는 뜻이 된다. 즉 본 장구의 ‘見’은 뒤에 이어 나오는 顯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편, 莫見乎隱 莫顯乎微에 대해서 박완식 선생은 중용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보다 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 없다" -중용(박완식)75쪽 

 

물론 저자의 '숨은 곳'을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은미한 일'을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으로 각각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으나, 이는 중용을 읽어본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혹 아직 중용을 읽을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에게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적어둔다. 

  

참고로 박완식 선생의 이 중용은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자의 집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문제점은 공부하여 스스로 바로 잡으면 될 일이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다산의 중용강의보를 직집 읽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 대안으로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집주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중용 장구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역작이라 감히 평하고 싶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750여 쪽을 꽉 채우고 있는 박완식선생의 이 중용을 손에 드는 순간 몰아의 경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막견이라고 읽는다고 해서 저자의 책을 읽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 이 글을 노트를 해 둔다거나 암기하여 사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정보를 잘 못 전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 할 수가 있어 지적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어쨌든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저자의 고독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저자가 소개한 잠과 명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몇 분의 선생님 중, 한 선생님께서는 만나 뵐 때마다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벗’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선생님께서 매번 이러시니 참으로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군사부 일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선생님께 벗은 사전적인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사전에는 ‘벗-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어찌 보면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을 뜻하는 ‘친구’라는 말과 대동소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친구'라는 말 속에는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거나 아랫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벗'과 '친구'라는 말은 유의어 일 수는 있겠으나 결코 동의어는 될 수가 없는 것은 벗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제한적 交와 친구라는 말이 가지는 제한적 交 즉, 범주의 차이이지 싶다.

 

어쨋거나 ‘벗’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두 단어의 핵심은 ‘交’이다. 인간 관계 자체가 ‘교’인 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련 성어가 많은 편이다.

 

 

흔히들 일컫는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인상여와 염파의 전설에서 온 것으로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주 잘 기록해두고 있고, 문(刎)이라는 말이 ‘목을 베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목숨을 함께하는 교를 말함이다. 그 얼마나 의미심장한 交이던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장본인인 관중과 포숙은 공자보다 윗대의 인물들로 2500여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교의 전설을 남겼다.

 

 

또한 포의지교, 거립지교, 망년지교등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교의 전설들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지음’이라는 고사에 담겨있지 않나 싶다. '지음'은 매우 널리 알려진 고사이며 신분의 귀천을 뛰어 넘은 좋은 예이다. 지음의 주인공인 '백아'가 거문고의 달인이었다는 점은 그가 비싼 악기를 가질 수 있는 능력자였으며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었음을 암시한다. 시대가 춘추시대이니 만큼 士 혹은 大夫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추측이 된다. 반면 '종자기'는 초나라의 인물로 음률을 잘 구별했다고 하는데 직업은 실상 농사꾼이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이렇게 한탄 했다고 한다. 夜深窓月絃聲苦 只恨平生無子期(야심창월현성고 지한평생무자기-깊은 밤 창에 달이 걸렸는데 괴로이 타는 거문고 소리, 다만 평생에 종자기가 없어 한탄하고 있구나-

 

 

종자기가 죽자 절현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백아의 한탄을 들어보면 백아는 종자기가 죽은 후에도 거문고를 연주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종자기를 잃음으로서 영 흥이 나지 않자 절현을 했을 수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어쨋거나 신분을 초월한 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각설하고, 사실 이번에는 이러한 교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거의 2년 전 풍우란의 저술 중국철학사 상하권을 모두 읽었었다. 그러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노트를 정리하지 못했다. 아니 노트를 정리할 여건이 되었다 하더라도 리뷰는 감히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풍우란의 이 역작을 리뷰로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철학사는 분명 내가 감당하기에는 나의 힘이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저술이다. 그러나 페이퍼라면 부담은 훨씬 덜하지 싶다. 그렇다고 소감을 적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책에서도 교와 관련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풍우란은 장자와 당시의 인물 혜시의 ‘범애만물 천지일체(汎愛萬物 天地一体)-만물을 다 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한 몸이다’라는 공통된 설을 피력한다. (어느 글에서는 이 글의 주인공을 맹자와 혜시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 장자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금방 구별이 갈 것이다)

 

 

물론 확증은 없지만 장자와 혜시의 관계로 보아 충분히 근거가 있음을 시사하면서 그 증거로 그 두 사람에 관련한 장자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풍우란이 소개하고 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어떤 영인(郢人: 초의 서울인 郢의 미장이)이 백회를 자기 코에 파리의 날개 모양으로 발라 놓고 장석(匠石)으로 하여금 깍아내게 했다. 장석은 바람처럼 가뿐히 도끼를 휘날리어 태연하게 깍아, 백회만 떨어뜨리고 코는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영인 역시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낯빛을 변하지 않고 내맡겼던 것이다. 송나라 임금이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장석을 불러 말하기를 “한 번 과인을 상대로 그같이 해보라”하자, 장석은 대답하기를 “저로서는 아직 그렇게 깍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이제 혜시 선생이 죽었으니, 정녕 내게는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상) 315-316쪽

 

저자는 『장자』자체가 우언이 많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제물론이 보여주는 장자와 혜시의 사상적 부합 여부는 확실하다는 점을 방증으로 하고 있다.

 

 

여하튼, 이 대목에서 이참에 말하고자 하는 장석운근성풍(匠石運斤成風)이 나온다. 장석이 도끼를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휘둘러 영인의 코 잔등위에 발라진 파리 날개만한 석회를 깍아내는 것이다. 바람을 일으키며 깍아 내는 장석도 장석이지만, 영인입불실용(郢人立不失容) 역시 감동적인 대목이다. 다시 말해 영인은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얼굴위로 도끼가 날아오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만하면 그러니라 하겠지만, 더더욱 감동적인 交의 장면이 더 등장하는 것이다. 송나라의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급기야 장석을 소환한다. 하여 자신을 상대로 도끼를 휘둘러보라고 하자 영인의 대답은 교의 진정한 의미를 전해준다. 나는 이때부터 그 어느 표현보다 운근성풍을 가장 애정하게 되었다.

 

 

송원군문지(宋元君聞之), 소장석왈(召匠石曰): 신즉상능착지(臣則嘗能斲之) 수연(雖然) 신지질사구의(臣之質死久矣)

 

송나라의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장석을 불러내자 장석이 말하기를: 저로서는 아직 그렇게 깍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도끼를 휘두르는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상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신뢰를 갖지 못하는 왕은 분명 상할게 뻔하다. 장석의 도끼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장석과 그 도끼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늘 참담한 결과인 것이다. 절대신뢰의 여부가 가지는 차이점이다.

 

 

그 후일담으로 중국철학사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백아가 절현(絶絃)을 했듯이 장석도 은부(隱斧)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현이나 은부도 교의 의미심장함을 전달하는 중요한 대목이겠지만, 장석이 날카로운 도끼를 휘날리며 얼굴을 향할 때 영인의 얼굴 빛 조차 변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그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나에게는 참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경지교도 좋고 관포지교도 좋지만 나는 영인과 장석의 이야기에서 交의 핵심인 무한신뢰를 절감하게 되었다.

 

사람은 공수거한다고 한다. 자신의 손에 쥐는 것은 전무하며 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하여 인간은 늘 고독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와 어울려 살아야하며 자신의 집 안에서조차 가족과의 交로 출발을 하는 것이 삶이다. 잠 자는 시간을 빼고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감을 때까지 인간은 交 안에 있다.

 

다양한 형태의 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인 교의 목적은 내적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기보다는 흔히 이익에 우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여 사마천이 자신의 저술, 열전에서 장이와 진여의 바르지 못한 문경지교를 설득력 있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되돌아 갈 때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인 交를 자신의 가슴에 담아가는 것은 어떠할까. 사람은 자신의 종말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사선에서 서성이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일하게 모든 것을 버리는 일 뿐인 것이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서,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분명 자신의 交일 것이다. 자신의 가슴, 죽음 앞에서도 그 가슴 속에서 미처 도려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것이 交이다. 아픈 듯 시리며 지극히 아름다운 交가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하는 交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 아니던가...

 

천상병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시를 썼다.

 

 

 

 

 

 

 

 

 

 

 

 

 

 

 

 

歸天(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부유했던 시인도 아니요, 권력을 손에 쥔 시인도 아니었으며, 정상적인 신체를 가졌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토록 아름다우며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교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자가 혜시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이유도 交에 있었던 것이다. 장자야 말로 무엇이 부족하여 저토록 안타까움을 토로했겠는가. 혜시가 죽음으로서 자신의 소중한 교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장자 보다는 혜시가 더 행복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교는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아름답게 소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하는 것이며 어쩌면 삶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 있다. 그러한 교를 가진 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자신의 생을 죽는 그 순간까지 가장 의미있도록 해주니 말이다..내가 그러한 교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싶은 이유이다. 그러한 교를 가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그보다 더 후회스러운 일이 나에게 또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4-06-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게 되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실까요?

저는 사람을 참으로 믿지 못했답니다. 누구라도 제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은 한번쯤은 저를 서운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도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교, 참 좋은 단어입니다.

차트랑 2014-06-20 20:1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별스럽지 않은 글에 행복을 느끼셨다니 부끄럽습니다
저의 대략적인 그간 상황을 짐작하시겠지만
지난 경험이 약간은 표현된 글이기도 하답니다

물론 저는 아름다운 교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앞으로 아름다운 교를 가져보고 싶다는 바램이 담긴 글이고
제게도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 중이랍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저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교를 가지실 수 있기를...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여유당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유학자였다. 성리학을 통해 배운 학문이 곧 여유당의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을 지배 해온 성리학자적 면모들과는 또 다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관과 할 수 없는 분이 여유당이기도 하다. 이는 여유당의 생애가 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경세치용 학파를 유형원, 이익과 더불어 정약용을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자이면서도 그들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이 여유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국시로서 매우 성공적인 역사를 가진 학문이라 하겠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계층을 뚜렷하게 구분하고자 했고 그에 수반하는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서양에서도 노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국가의 노비가 대중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의 나라는 거의 없었다. 특히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노비인구가 자치하는 비율은 50%를 웃도는 지경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의 나라 조선, 그리고 노비

 

 국가의 재정을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다시피 한 조선은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가 회회인(아라비아인)들과 무역을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간단하게 조선의 노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비는 남종을 뜻하는 노와 여종을 뜻하는 비를 일컫는 말이다. 노비의 형태도 무착 다양했는데 '관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다. 관노비는 대궐이나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이고, 사노비는 양반집에서 일하는 노비을 일컫는다. 사노비는 ‘솔거노비'라 부르는 신역 노비와 의거노비, 납공노비가 있었다. 신역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거주하며 노동을 제공하는 노비로 청지기, 상노, 안잠자기, 상지기, 식모, 찬모등을 뜻한다. 의거노비는 상전과 따로 살면서 토지를 경작해주는 노비이고, 납공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살거나 일을 해주지는 않지만 매년 정해진 액수의 물품을 바치는 노비의 형태이다.

 

1398년 태조 때 노비의 가격은 무명 150필 정도였고, 말(馬)로 교환하자면 노비 셋을 주어야 말 한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노비의 가격이 폭락하여 노비 10명을 주어야 말 한 마리와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군사가 두 달의 월급을 저축하면 조선의 노비 1명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하던 노비의 가격이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던 조선 말기에는 노비 5명과 미모의 여성 노비 한사람을 주면 소 한 마리와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사람'이라하고 말은 짐승이기에 '마리, 혹은 필'라고 하는 것인데.... 시대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노비가 18세기에는 전 인구의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비율이 50%에 달했다고도 주장하기도 라는데, 조선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퇴계 이황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예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요즘의 기준으로 34만 평이었다. 노비와 전답의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한 부호였음을 알 수 있는 수치라 하겠다. 요즘으로 치면 트랙터가 여러대 필요할만한 규모의 부농가였던 셈이다. '안빈'이라는 말이 왜 허공의 메아리로 들리는 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사농공상이라는 뚜렷한 계층구조와 엄청난 인구비율의 노비는 주로 농산물에 의해 국가의 재정을 조달했던 조선의 경제시스템에서는 불가피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무역과 상공업을 장려할 수 없었던 성리학의 이념은 조선을 주로 토지에서 산출되는 잉여가치를 국가 재정에 편입시킬 수밖에 없는 철저한 농업 국가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성리학은 상공업을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이를 천시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엽전을 ‘좌전’이라고 했을까... ‘좌전’이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취급하는 돈' 이라는 뜻으로 왼손은 우리 조선에서 홀대를 받았던 손이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해 대신 노동을 해줄 인구(노비와 소작농)가 필요했고 국가의 재정을 조달 하는데 다수의 대중들을 지배하여 동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여 조선은 엄격한 신분구조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조선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사회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의 국가에서 대중에 대한 사랑(애민)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중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대중들의 삶이 더 편안하겠지만, 조선의 계급구조와 경제구조는 조선에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를 살아온 대중들의 애환과 고달픔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제도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유당은 이러한 조선 성리학의 이념 하에서 여타의 기득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수 있다. 그런 여유당은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만한 여유당에게 목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목민에 관하여...

 

우리는 여유당의 저서인 ‘목민심서’라는 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이 목민심서를 직접 읽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48권 16책. 필사본. 부임(赴任)·율기(律己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어 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이다.



목민(牧民)라는 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제나라의 학술과 사상의 보고라도 일컫는 管子(관자)라는 책에는 牧民篇(목민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牧民篇에는 “곳간이 가득 차 있어야 백성들이 예절을 안다(倉廩實則知禮節 창름실즉지예절).”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관자 역시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자는 공자보다 140년 먼저 세상에 태어난 인물로 제나라를 최초의 패국으로 이끈 명재상이었으며 그 이름이 드높다. 사실상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관자는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상이었다고 한다. 목민이라는 말은 그렇게 관자에서 출발하여 조선이 개국하면서 목민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조선은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을 목민관이라 했고 최초 임기를 30개월로 정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모자라 고려시대에도 목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찾아낼 수가 없었음) 이렇게  하여 목민(牧民)이라는 말은 여유당의 저술한 책의 이름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유당의 목민(牧民)은 관중의 그것과 같지 않다...


여유당과 관중이 민(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 民에 대한 복지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일치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민의 경제력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은 2500년 전의 관중이나 200여 년 전의 여유당이나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는 실학파인 여유당을 ‘경세치용학파’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중이 민을 중시하고 경제 복지정책을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여유당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관중 역시 시대적 상황을 피해 갈 수 없는 사상가였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불확실성의 정세는 대륙의 모든 민을 물론이고 지배세력들을 늘 불안에 떨게 했다. 전쟁은 일상이 되었고 약자는 강자에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도륙 당하던 시대였다. 오직 승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지적 힘을 중심으로 산재하던 군주들의 바람은 오직 하나, 바로 패자가 되겠다는 염원 뿐이 었다. 공자가 그토록 신봉하던 테제, ‘극기복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던 군주들에게 공자의 복례는 패국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공자는 14년이라는 세월을 떠돌았지만 아깝게 세월만 죽인 채 허무하게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제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관중은 여타의 군주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민(民)을 패국으로 가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즉, 경제력과 군사력의 사실상 근거가 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민을 패국의 원동력으로 바라본 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하여 관중은 민의 힘을 이용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관중은 민을 조직적으로 움직임으로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그 힘을 극대화하여 패국을 이루는데 활용하기 위해 민이 필요로하는 것(need)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삶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줌으로서 자발적인 복종과 충성을 얻어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관중의 목민(牧民)이었다.


이렇게 패국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을 활용하는 방법론적 정책으로서의 목민의 개념이 관중의 것이라면 여유당의 그것은 백성을 이용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유당은 근본적으로 애민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사유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여유당은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의 처절한 아픔을 목도했다. 그들의 애환을 몸소 체험했으며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민과 고락을 함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인물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갔다고 다 여유당과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유당은 애초에 가엾은 한 사람의 민을 연민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여유당의 경세치용은 백성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있었다. 여유당의 저술 ‘경세유표’는 당시 빈부 격차의 심화 정도가 심각하다는 점,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굶주리고 고단하다는 점, 관료들의 학정이 극에 달했다는 점, 제도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토지의 개혁은 물론 사회, 정치, 경제의 전반적인 문제들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저술로 남겼는데 관중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유를 하고 있었음을 방증해준다 하겠다.


물론 두 인물의 시대적 상황이 같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야말로 역사이다.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이면서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역사인 것이다. 더구나 이토록 순수한 의미의 민을 위한 사유는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조선 중기 대미수공법을 창안했던 율곡 이이와 목숨을 걸고 대동법을 강력하게 펼친 잠곡 김육, 그리고 골수 유학에서 벗어나 진정한 위민을 주장했던 백호 윤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여유당은 성호 이익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하겠다. 결국 조선의 진정한 위민 정신은 후기에 이르러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실질적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선포하며 개국한 후 400년 이상 흐른 뒤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단아, 공산당 여유당

 

이렇게 쓰고 보니 공산당과 여유당이 무슨 당처럼 들리지만 영어의 당(party)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당의 생각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공산주의자인 셈이다. 여유당은 특히 토지제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제와 정전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토지제도를 생각해냈다. 여전제는 한 마을에서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똑같이 배분하는 방식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판단하여 보완 장치로 정전제를 통하여 땅을 똑같이 정확하게 나누어 경작하고 공동 관리하는 부분을 두어 세금으로 내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당시의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의 주장이었다. 지배 체제를 뒤흔드는, 사회 전반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제는 특히 공동농장의 형태가 아니던가... 여전제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여유당께서 공산당에서나 가능한 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쩌면 세계 최초의 공산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이러한 여유당의 위험한 발상과 주장을 집권 세력들은 가만히 두고만 볼 것인가??


이상적인 사회로 노자는 소국과민을 주장했고, 그 이름도 아름다운 존 스튜어트 밀과 성스러운 토머스 모어도 여유당과 같은 이단아였다. 또한 플라톤은 현대에 고전으로 일컫는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공동생활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이는 단지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들에 제한된 생각이었으므로 보편적인 사회적 제도로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볼 때, 여유당은 독창적인 공산의 개념을 제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스승인 벤담의 공리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고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 놓았다. 밀은 단순한 행복에 집착했던 스승 벤담의 사유마저 움직였다. 말년에 벤담은 밀의 민주주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은 인간다운 품위를 가진 질적 행복을 사유했다. 밀을 ‘질적 공리주의자’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밀은 또한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남녀평등을 강력하게 부르짖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제안을 하여 영국을 경악케 했다. 또한 노동자 계층의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저서 ‘자유론’이 민주주의의 입문서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그의 주장은 영국의 지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발언이었다. '밀' 역시 여유당처럼 이단아였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

그야말로 새하얀 눈보다 더 순결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머스 모어'이다. 에라스무스는 그를 지상 최고의 인문주의자라 했다. 시대는 1500년, 당시 플랑드르의 모직공업이 잘 되어가자 양모의 가격이 폭등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 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대대로 그 땅에서 생계를 유지해오던 농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영주에게 노동과 생산물을 바치며 살아오던 공동체를 양모를 생산하기 위하여 추방했던 것이다. 흔히 ‘엔클로저 운동’이라는 바로 그것이다.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부랑자기 되었다. 헨리 8세의 통치하에 사형당한 부랑자는 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엘리자베스는 해마다 300여명의 절도범을 교수대위에 올렸다.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외쳤다, “절도범을 죽일 것이 아니라 절도범을 양산하는 원인 제공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어는 절도범이 영국의 경제 시스템의 결과물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하는 요인이 따로 있다. 바로 ‘양’이다. 예전에는 얌전하고 유순하며 조금씩 먹던 양들이 이제는 사람까지 먹어치우고 있다.” 모어는 농민들을 추방하는 것은 바로 영국의 귀족임을 지적했다. 교회도 왕도 모두 공범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 떠넘기지 않고 사회적 문제에서 찾으려 했다. 결국 모어는 이단아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아름답고 지극히 아름다운 토머스 모어여.... 여유당은 토지, 경제, 시회 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모어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

플라톤은 사회의 구성원을 타고난 능력에 따라 철저하게 분류했다. 플라톤은 각자 직분에 맞는 일에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夫夫子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인간이 수신을 통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반면 플라톤은 인간의 자질이 태어나면서 이미 결정되므로 그들의 삶도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차이는 있다. 한마디로 선천적 신분의 분류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이다. 또한 그는 국가를 철인이 통치해야 하는데 그 철인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되고 가족을 가져서도 안된다. 다만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많이 양산하기 위해서 심지어 부인들을 철인들이 서로 공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더욱 충격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허약한 사람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게조차 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이성의 이데아야 말로 자비란 없는 것이던가...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플라톤이 서구의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감지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여유당은 사실상 조선을 지배해온 유학자들에게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자 사상범이었다. 여유당에게는 대 선배인 백호 윤휴가 사사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은 모두 사문난적이었고 처단의 대상이었다. 윤휴 역시 기득권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반항아였던 것이다. 윤휴는 민을 보살피는 다양한 제도의 개혁을 죽는 그 순간까지, 사약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 부르짖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머스 모어처럼 말이다.

 이렇게 조선의 언론은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 마치 현대의 강력한 검열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걸려들면 목숨을 앗아버리던 조선에서 여유당은 자신의 저술 ‘논어고금주’를 통하여 주희의 집주와 달리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한 태클을 걸었다. ‘중용강의보’라는 저술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 저술이라고 하는데 번역이 아직 되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간다(하지 않는 것이다). 주희보다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으며 교주 주희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장구에 대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 측에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유당은 그렇게 사유의 방식에 있어서나 애민의 방식에 있어서 철저한 유학의 이단아 였던 셈이다.

 


 그런 만큼 그의 고초는 컸다.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의 목숨을 기어이 뻬앗았아야 했던 영국의 귀족들 처럼, 조선에서도 여유당의 강력한 스폰서나 다름없던 정조가 급서하자 그의 형제와 동료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었다. 여유당을 비롯한 그 일당들은 조선의 귀족들에게는 용서할 수 업는 일망 타진의 대상이자, 이단아였던 것이다.

 공자의 드높은 학문을 계승하고 유학을 국시로 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행합일의 양명학이 그리운 이유도 그것이다. 이덕일의 최근 저술인 '내인생의 논어 그사람 공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공자를 그토록 높이 떠받들며 신의 경지에까지 지극히 모시던 공자님의 말씀을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고 저자는 개탄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공자를 너무 아름답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해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여하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여유당은 그나마 운이 좋았던지 유배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여유당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서 여유당이 그 얼마나 순수한 정신으로 애민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유당도 노비제의 폐지를 적극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것을 여유당의 허물이라고 한다면 허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여유당보다 지극히 애민을 가슴속에 간직한 인물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12-05-1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숨에 읽어내려왔네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가들의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 딱 들어맞는, 꼭 필요한 말들인것 같습니다.

차트랑 2012-05-14 23:54   좋아요 0 | URL
사상가가 왜 사상가인지 말해주는 좋은 생각들이 많은 듯 합니다.
말씀해주신대로 꼭 필요한 말들이지만
필요한 만큼 바르게 쓰이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잉크냄새님!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5-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유학자이나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

심리 검사에서요, 세상의 긍정적이고 밝고 낙관적인 면만 보고 불쾌한 면은 부인하거나 억압하는 순진성이라는 특징이 있던데, 제가 거기에 딱 걸렸어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거죠. 그런데, 사회주의의 중심 이론이 바로 그런거잖아요, 일종의 이상주의적인. 그리고 플라톤이나 토마스 모어나 여유당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런거잖아요... 이왕이면 선함을 믿고 인간의 힘을 믿고, 그래야만 저렇게 공평한 세상을 희망하고 주장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혹시.. 제가 영 엉뚱한 부분에 핀트를 맞추고 있는거라면,
제 머리가 현재 너무 멍해서 그렇다고 미리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너무 좋은 페이퍼,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2012-05-18 0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5-1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고양이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플라톤, 토마스모어 글고 여유당의 주장들은
이상주의적 측면이 강하답니다.
그래서 위 페이퍼에서 제가 쓴대로
토마스모어를 새하얀 눈보다 더 순결한 분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답니다.

기존의 소프트웨어를 포맷하는 작입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실현이 어렵다는 것이죠 ㅠ.ㅠ

결국 마녀고양이님께서 스트라이크를 치셔서
모든 핀을 모두 다 쓰러트리셨답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님~
 

'다산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었으니 리뷰를 써도 되겠다 싶어서 쓰려고 하니 워낙 널리 알려진 분이라 고민고민하다가....차라리 페이퍼로 작성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렇다면 제목은 또 뭘로하나...갈수록 태산이다... 막상 페이퍼를 써놓고 보니 더 고민스럽다...그러다가 결국은 '호와 당호'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그러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런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ㅠ.ㅠ

 

 

 

'다산'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정약용선생님은 국민의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다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다산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더 붙이는 것을 보면... 더불어 독자로서 '다산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그만큼 '다산선생님'의 일생은 국민과 떨어질 수 없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나는, 선생님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 '다산'이라는 호칭 보다는 '여유당'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개인 경우가 많았다. 아호가 있고, 자가 있고, 호가 있고, 당호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로 '추사'선생님의 당호는 '완당'이다. 그래서 추사 혹은 완당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한다. 그런데 호가 여러개인 분들도 있었다. 완당선생님의 경우는 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호가 1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호가 워낙 많은 분이다보니 백호당 (百號堂) 이라고 불리기가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 완당 선생님의 호는 더합 101개인가?? 어떤 이는 완당의 호가 500개도 더 넘었다고 하니, 정말 호가 많았던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은 세한도를 읽으면서 나의 독서 노트에 기록해둔 추사선생님의 호칭에 대한 설명이다..


 

자와 호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모가 어른들이 지어주는 이름을 아명이라 한다. 성인이 되면 관례를 올릴 때 지어준다는 의미로 관명(冠名)이라고 하는데 보통 그사람의 이름이 된다. 김정희의 정희가 관명인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또한 자字라는 것이 있다. 이 또한 이름과 유사한 형태인데, 친구들은 보통 이 字로 서로를 부른다. 字나 號는 보통 스승님이나 덕망있는 어른들이 지어준다. 그 사람이 성인이 되어 지침이 될 수 있는 의미를 이름에 담는 것이다. 추사의 경우 자가 원춘(元春)인데, 元 도 봄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결국 원춘은 봄의 의미가 담겨있다.

 號는 또다른 의미를 담고있는 별명과 비슷한 것이지만 별명보다는 고급스러운 의미이다. 김정희의 號는 秋史인데 秋자는 字가되는 春자와 짝을 이룬다. 그의 자호에는 春秋 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春秋는 歷史를 의미한다. 추사의 자호로 이런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秋史와

추사는 별호이고 완당은 당호이기 때문에 약간 사용이 다를 수 있다. 阮堂書 라고 하면 완당이 썼다는 의미도 되고, 완당에서 썼다는 의미도 된다. 완당은 당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秋史書라는 말은 추사가 썼다는 의미만 담고 있다.

 또 완당의 경우 阮堂老人처럼 다른 글자를 붙여 쓰기도 하고 阮老라고 줄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사는 다른 늘 단독으로 사용된다. 추사의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주로 추사라 했고, 추사의 제자들이나 후학들은 완당이라는 당호를 사용했다. 직접 부르기 보다는 ‘완당에 거처하는 분’ 이란 의미와 함께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다. 추사는 제자들이나 후학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일로 여길 수가 있어 ‘완당에 거처 하는 분’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개인적으로는 호를 부르기보다는 당호인 '여유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약용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유당은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 역사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유당께서 워낙 국민들에게 유익한 책들을 저술한 것도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여유당에 대한 저술들도 상대적으로 적인 편은 아니며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온 인물이기때문이다.

 

'다산의 마음'은 여유당의 마음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 여유당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산문집이기 때문이다. 마치 알라디너들이 자신의 생각을 페이퍼 작성하여 업로드하듯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 혹은 주변의 사건들을 매개로 쓴 글인 것이다.

 

그리고 세한도와 완당평전, 이 두 권의 책은 우리가 완당을 우리의 선조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긍심을 심어줄 수있는 세계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을 뿐더러 사실은 우리들도 잘 알고있지 못하다는 커다란 아쉬움을 주는 책이다. 우리의 초중고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의 훌륭한 선조들이 수없이 많건만 제대로 알고 졸업시키는 교과내용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하다.

 

 물론 외국의 학문과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은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의 것 뿐 아니라 타자의 것들도 배워 알고있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남의 것을 배운들, 제대로 소화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결코 몰라서는 안될 우리 선조들, 그들의 훌륭한 정신과 문화가 참으로 유익한데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있고, 그 아쉬움을 달릴 길이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2-05-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당 이라는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면 그 뜻을 떠나서 말에서 들리는 대로 여유가 와닿는 것 같아 참 좋아요

차트랑 2012-05-06 00:16   좋아요 0 | URL
옳으신 말씀입니다.
항상 조심하는, 여유하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럴려면 여유도 좀 가지고 있어야 할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2-05-0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게,
우리 선조에 대한 지식이 미약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답니다.
변명같지만 내내 IT를 하다가, 이제는 심리학 공부를 하는데 모두 기원은 외국이네요.

어쩐지 저는 뿌리도 없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차트랑 2012-05-0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고, 무슨말씀을요 마녀고양이님...
저도 마찬가지 입장인지라
저 스스로 자성하는 의미를 가진 글이라고 생각해주십시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2012-05-0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5-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와 호와, 당호...이런 것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재미있지만,
알라딘 서재의 닉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차트랑공'님은요...전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다는~--;

2012-05-08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선생

 

 

이제 고인이 되신 이윤기선생께는 늘 특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생을 통한 저술과 번역의 범주가 매우 확실한 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카테고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련의 번역들과 저술들은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아우라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이윤기선생의 저서를 처음 접한 것은 뮈토스라는 책이었다. ‘시뷜레가 말하였다’로 시작하는 뮈토스는 그 시뷜레(아폴론의 연인이자 예언자)라는 어감이 주는 묘한 느낌 때문인지 아직도 인상이 깊이 남아 있다. 그 뮈토스에 이어 ‘변신이야기’는 당시 서점가를 강타했던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대출 순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저술활동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 던 중 이윤기 선생께서는 타계하셨다. 그의 역서들과 저서들을 살펴보면서 이윤기라는 인물이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그는 분명 출판계의 사상가이다.

 

 

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 2개의 카테고리와 그 카르텔


 이윤기 선생의 역서를 대표하는 책들 중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독서력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든다. 그것을 역자도 알 고 있었던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를 따로이 출간했다. 아마도 이 역서들은 이윤기 선생을 악명 높은(?) 저술가 혹은 번역가로 재탄생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가 갑자기 그런 악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 전작들인 뮈토스나 변신이야기는 그 신호탄이나 다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저서들은 역서와 저술이라는 범주의 일관성을 줄곧 지켜온 인물이다.

 

그러 던 중 좀 특이한 현상처럼 보이는 것은 이윤기 선생께서 ‘양들의 침묵’을 번역했다는 점이다. ‘플루타코스 영웅전’이나 199년 7월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인간과 상징’이라면 이윤기선생의 작품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양들의 침묵’은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해서 외도를 하지 말하는 법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기 선생의 작품세계에 뛰어든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윤기선생의 전체적 작품 활동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면 분명 이는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의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양들의 침묵’, ‘신화의 힘’, 그리고 ‘신화와 인생’을  읽어보게되면 이윤기선생은 '양들의 침묵'과 '신화의 힘'은 선택했으나 '신화와 인생'은 왜 번역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신화와 인생은 신화의 연구와 저서에 매우 널리 알려진 조셉 캠벨의 작품이기는 하나 내용에 포함된 신화성이 매우 미약하고 인생이라는 포인트에 더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서들이나 역서들은 분명히 특정 궤적을 만들어 왔다. 하여 ‘뮈토스’, ‘그리스로마 신화’, ‘플루타코스 영웅전’, ‘트로이아 전쟁과 목마’, ‘인간과 상징’,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샤마니즘’, ‘신화의 역사’, ‘헤라클레스’, ‘일리아스 오뒤쎄이아’ 등은 그의 주된 카테고리를 형성해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번역과 저술활동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출판계의 현상은 아니다.


 큰 맥락에서는 그러하지만 좀 더 가까이 살펴본다면 자전적인 에세이인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을 필두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헤밍웨이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 도나타트의 ‘비밀의 계절’등으로 볼 때는 또 다른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윤기선생의 작품들은 이렇게 뚜렷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이윤기선생 만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신화와 영웅의 사건들을 보다 현대적이며 인간적 입장에서 해석을 시도한 하나의 카테고리와 심리적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가미하면서 초현실주의과 리얼리즘을 서로 관통하는 작품들로의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선생이 출간한 서적들의 범주를 지금과 같이 파악하고 나면, 그 두 개의 카테고리는 이윤기를 ‘독서계의 사상가’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 즉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카르텔은 두 개의 카테고리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며 내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고대의 신화를 지극히 현대적인 해석과 인류의 정신, 심리적 내면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화를 벗어났지만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특정 개인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접근을 시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들의 침묵은 이러한 일련의 내재적 연속성의 일환으로 출간된 작품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빛나는 판도라의 해석)


최근 알라딘에서는 50% off 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이윤기선생의 그리스로마신화 전 5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아주 다양한 작가들을 통해서 세상에 아주 잘 알려진 테마이다. 그런데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여타의 저술이나 역서들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차이점은 신화에 대한 이윤기선생의 해석 방식이다. 이윤기선생의 해석을 읽다보면 이것은 이윤기선생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야말로 참신하다 못해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윤기는 어떻게 신화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한 독창성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독창성이 빛을 발하는 하나의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만날 수 있다.

 

 

이윤기의 견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 대목은 판도라를 해석하는 방식을 한 예로 꼽을 수가 있다. 이윤기는 판도라가 인간에게 화를 불러왔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한다. 이윤기의 견해에 따르면, 판도라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제우스인데, 사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이윤기의 이 해석에 매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놀라운 것은,  제우스의 수많은 자식 들 중에서 어느 누가 제우스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가는 오직 선각자인 프로메테우스 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중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헤르메스를 수 차례 보내어 그 비밀을 알려주면 죄를 사하겠노라고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지만 그는 그 절대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스토리이고, 다음은 이윤기만의 독특한 해석이다.)


 이에 똥줄이 타들어 가는 이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바로 제우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을 무지무지 사랑하는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는 방법으로 여자를 만들어 인간에게 선물함으로서 제우스도 인간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프로메테우스에게 살짝 아부를 떨며 그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판도라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본다면 판도라를 결국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아우가 차지하기는 했지만,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들게 된 동기로 보건데 결코 악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여타의 올림포스 신들에게 한 가지씩 선물을 상자 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게 되고,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넣게 되는 것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이 선물의 상자를 안겨주며 '절대로 당대에는 열어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게 되고, 갖가지 신들이 준 선물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얼른 뚜껑을 닫았을 때는 이미 갖가지 좋은 선물들 증발해 버린 뒤였고, 오직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는 해설이다. 만약에 판도라가 당대에 열지만 않았더라만 그의 후세들은 무병장수는 물론, 미의 여신이 준 아름다움과 곡물의 여신이 준 농경법 등 이롭기로는 아주 이로운 선물들을 두루 누렸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온갖 나쁜 질병과 근심, 질투등이 빠져나와 인간세상에 퍼지게 되어 인간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는 것이 이윤기의 설명이다. 그토록 나쁜 선물과 희망이라는 좋은 선물을 같이 버무려서 넣었다고는 이해하기보다는, 애초의 의도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점수를 따려는 의도였다는 점은 감안하면 이윤기의 이런 해석은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동안 미심쩍었던 부분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그 비밀을 제우스에게 털어 놓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모로 보나 판도라는 결코 좋은 선물을 날려버린 것이지, 나쁜 선물을 증발시켜 버린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번역계에 주는 교훈


이윤기선생의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의 카르텔에 있지 않나 싶다. 범주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윤기선생의 범주와 카르텔로보아 그 작품세계가 대단히 넓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이윤기선생의 고집과 일정 카르텔을 집중 연구하고 자신의 역작에 반영하기 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카테고리와 카르텔을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정 범주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제력은 그의 번역 실력으로 보건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윤기선생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일관성을 가진 사상가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애초에 뮈토스에서 느낀 바 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필체는 기타 동종의 책들과는 구별되도록 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뮈토스에서 느낀 신화다움의 필체는 여전히 관련 역서 전반에 녹아있다. 뮈토스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윤기만의 독특한 필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축하고 있는 수준있는 역자의 모습은 우리의 번역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얼마전 어느 인물의 전기문의 역서를 두고 일말의 지적사항들이 발생했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역서의 문제점은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윤기선생의 고집스런 연구와 그에 걸맞는 카르텔의 형성은 말이 아닌 일생의 노고와 사상으로 남아있고 그 가르침은 오래도록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 혹은 역서들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일생을 거쳐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만의 카테고리를 형성하였고, 특히 이윤기 역의 벌핀치 신화가 벌핀치의 견해와 달리 생각하고 있는 이윤기만의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들은 이러한 학구적 일관성의 소산임에 틀림이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윤기라는 인물이 일생을 두고 저술과 역장에 바친 그 자신만의 아우라는 부정할 수 없는 노고의 결정체이다. 이번에 알라딘에서 50% 할인가격으로 내놓은 그리스 로마신화는 이러한 이윤기의 생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역작이다. 저서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해당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도 다수 수록하고 있고, 더욱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이윤기의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고 그의 카르텔이다.


그는 평생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이는 이윤기의 신화를 읽어도 좋은 이유들이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주는 그의 통찰력은 그렇게 빛이 난다. 그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이윤기의 글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윤기의 산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여타의 신화와 이윤기의 신화의 차별하는 힘의 요인들이다. 나아가 이는 이윤기가 신화에 쏟아 부은 애정의 결실일 것이다. 같은 범주의 신화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인 작가도 없을 것이다. 애정이 없는 카르텔은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윤기의 신화론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도 내가 이윤기의 또 다른 신화의 해석을 읽는 이유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사이 2012-03-1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소설가 겸 번역가가 이윤기 선생인데요. 이 선생이 번역가로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빛을 보시게 되었지만, 초기 번역가로서 이윤기 선생의 번역은 그래도 문제가 좀 많습니다..ㅎㅎ 제가 읽었던 것들은 그렇더라구요. 그럼에도 이 선생을 흠모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멜빵 바지에 술자리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를 푸시던 선생이 조금 그립기도 하군요..

차트랑 2012-03-15 12:22   좋아요 0 | URL
좋아하시는 작가시라니 다행입니다^^
원래 글을 쓰시는 분들이 구라가 좀 있으십니다 ㅋ
돌아가시고 나니
저도 그립습니다 ㅠ.ㅠ
제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사이님

마녀고양이 2012-03-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라는게 따로 발간되었었군요...
정말이지 장미의이름과 푸코의추는 쉽게 접근한 독자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들죠. ^^

양들의침묵을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걸 몰랐는데,
지금 확인하니 토머스 해리스의 세작품 역자가 각각 다르네요... 음,
양들의침묵은 사실, 기타 스릴러나 추리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

좋은 글입니다,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차트랑공님, 즐거운 주말되셔요.

차트랑 2012-03-16 14:29   좋아요 0 | URL
그 당시 양들의 침묵을 보았다는 어느 학생이 와서
묻더군요.
'그런데 왜 양이 나오지 않는거죠??'
재밌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