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사 1 -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푸른역사 조선 풍속사 1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자 우리 선조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전해준 화가이기도하다.  한국화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역사를 더해가면서 한국적인 그림을 완성해간다. 이제는 한국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특유의 미술세계를 확립한다. 

우리의 옛 그림을 아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아는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원은  제자인 혜원과 더불어 다른 화가들이 해내지 않은 풍속화를 남겼다. 풍속화는 조선 백성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한폭의 그림에 담아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유산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풍속을 담은 그림은 주로 민화를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화원으로 활약했던 단원과 혜원의 풍속을 화폭이 담아내는 일은 결코 사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그림의 중심이 사군자와 산수를 중심으로 내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조선 후기라고는 하지만 가히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편견과 선입관을 벗어버리기 전에 일국의 화원이 시도하기에는 시대적 사상으로보아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풍속을 화폭에 담아낸 단원은 우리의 소중한 서민 문화를 전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화가라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림을 이해하는 감식안이다. 저자의 해설과 더불어 단원의 그림에 의도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은 매우 흥미진잔하다. 그림을 읽어내는 눈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그 즐거움을 느낄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러가지 면에서 저자는 단원의 그림을 통해 그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서구의 영향을 여과없이 흡수하게된 한반도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고유의 문화에 대한 재신식이 필요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창과 같기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가 역사의 이해이며 우리 문화의 이해이다. 단원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신의 결정과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뿌리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할 일 중 하나라는 점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는 막상 책의 두께가 독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짖누른다. 많은 독자들에게 곰브리치의 힘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는 책이다. 그러나 서양 미술에 정녕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라면 필독서요 그 가치를 논하기 힘들만큼 훌륭한 책이라 정평이 나있는 양질의 도서이기도 하다. 

교양 철학 시간의 어느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수강생들의 대답은 각기 다를 뿐 아니라 흥미로운 답변들이 쏟아졌다. 교수님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넥타이를 맨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결정적으로 인간은 철학을 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라 생각하신다고 했다. 

이는 분명히 일리가 있는 구별법이다. 인간은 철학을 하므로 동물과 구별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추가할 수 있는 항목이 있다면 인간은 예술을 한다는 점을 보태고 싶다. 

인간은 예술을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맞는 말이다. 이 명제를 다르게 표현해본다면 '예술을 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라고 앞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명제를 역으로 할 때 반드시 정답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는 동양인인 나에게는 true가 아니다. 꼭 철학을 해야만, 예술을 해야만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학문적인 차원의 견해 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철학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타당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사에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고 그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 혹은 가치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학문적인 사유와 철학을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 철학이 자신의 판단에 준거가 되어준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 그렇다면 예술은 어떠한가.  

예술은 일생을 두고 알지 못해도 좋다. 예슬과 접하지 않는다고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적인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 또한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풍요로운 인생은 재산이 많다고 일궈 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요 배만 부른 인생을 풍요롭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크라테스는 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기를 소망했던가. 

 비록 배는 고플지언정 정신적 풍요로움의 가치를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예술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설사 부유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예술과 거리를 가까이 두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한 대학생은 학교에서 서양 미술사를 수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서양 미술사는 그 학생에게는 매우 비호감 과목에 해당한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학생은 서양 미술사 강의를 통하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도서관에서 만날 수도 있다. 싫어하는 과목의 학점을 위해서 곰브리치를 만나 그의 저술을 따라 읽어간다면 아마도 그 학생의 인생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우연은 때로 생각지도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학생 시절은 분야를 구별하지 않고 접해도 좋은 시기이다. 입맞에 맞는 편식을 할 시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양하고 많은 분야를 접하고 그 가치를 알며 조금 더 깊이 나아간다면 인생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동양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미술을 알고 지내다보면 그 이름도 유명한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가는 것이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짖인지 깨닫게된다. 작품 하나만으로도 몇 권의 책으로 저술 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예술품들을 단지 몇 분만에 휙~ 돌아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사전에 철저한 연구와 공부가 전제된 관람의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이 그토록 감동하며 읽고 그 의미를 부여한 그림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상한다면 말로는 다 못할 감동을 선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이 다녀갔다는 전시회에서 과연 이러한 감상이 그 얼마나 있었을 것인가. 대부분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저 그 유명하다는 작가의 작품을 한 번 구경했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 문화인 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느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작품을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는 것도 의미가 없냐고 물으신다. 큐레이터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은 물론 유익한 일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한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큐레이터의 요약 설명이 가지는 문제는 마치 장편 소설의 요약본을 앍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직접 읽지 않은 소설의 요약은 물론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주는 감동과 가치를 깨닫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작품의 요약본으로 작품을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 대한 줄거리와 감상을 이미 읽은 누군가에게 전해들었다고 하자. 파리대왕은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의 배가 좌초되어 무인도에 상륙하면서 발생하는 인간의 본성과 추악함을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책이라는 설명을 들어서 알게되겠지만 그 소설이 가지는 구성과 작품성을 감지하기는 이미 어려움이 있다. 작가의 문체가 주는 질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각 주인공들의 갈등과 해법에서 오는 그들만의 인간성과 가치관을 발경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을 놓치기 쉽다.  

극한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추악함과 야수적인 본성을 가진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구원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전달하는 소설이라는 점을 알게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저자의 심오한 목소리에 한 발 더 깊이 나아 갈 수가 있다. 윌리엄 골딩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어린 청소년들의 탈선과 비행 그리고 그들의 위험한  상황을 어른들이 구원해줄 수 있지만 과연 실제로 이러한 본능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의 기성새대를 과연 누가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궁극의 의문을 던지고 있고 그에 대한 인류의 자성을 촉구하는 강력한 미시지를 담고 있은 소설이 바로 파리대왕이라는 것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작품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감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확연한 차이점이다.     

예술은 그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감동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작품에 관한 가능한 많은 것을 알면 더 좋다. 작품 관련 역사를 아는 것도 당연히 이에 해당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로는 자신의 정신적 풍요로움을 기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비록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는 서양의 미술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책이다. 물론 이에 버금가는 또 다른 저자의 책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양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며 그치를 인정받고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 글의 취지일 뿐이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는 독자들의 인생을 더더욱 풍요롭게하는데 크게 공헌해 줄 필독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강소연 지음 / 부엔리브로 / 2007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우리의 역사가 해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되찾아야 할 사명감을 주는 역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강소연 지음 / 부엔리브로 / 2007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출판사가 제공한 정보에의하면 해외 유출된 우리의 문화재가 7만5000점이라고 밝혔다. 말이 유출이지 대부분 불법 강탈에 의한 반출이다. 식민지 시대에 유럽으로 도출된 문화재를 비록하여 일제 강점기에 도둑질당한 문화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또한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버린 한국인에의한 해외 밀반출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래저래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들은 고향을 잃고 떠돌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수난을 겪는 것은 우리의 국력이 약한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와 일본에서 우리의 일부 중요 문화재들 돌려받는다고 한다. 이집트와 아프리카등 자국의 훌륭한 문화재들을 강탈당했던 나라들이 스스로의 유산을 돌려받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한 번 잃어버린 문화 유산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된다.  

해외에 떠돌고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과 같은 일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지극히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의 것을 되찾야아겠다는 의식이 생겨날 리가 만무하다. 우리 문화를 되찾는 일은 국민의 응집된 일념을 필요로한다. 정부도 물론 우리 문화를 되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겠지만 어떠한 노력을 어떻게 기울이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정부가 어떤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알려 국민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선조가 강탈한 것을 후손들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의 의미하며 미래의 화합과 협력을 위한 근간을 이루고 있음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 떠들어봐야 다 부질 없는 짖이다. 특히 일본을 일컫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자의 엄청난 노력이 보인다  

저자 강소연은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 20여 점을 조사하고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저자는 해외에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재를 알리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저자가 이 책에 기울인 열과 성의는 저자의 혼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될 것이다. 저자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저자를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간단 명료하다. 저자는 우리의 문화재를 면밀히,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하여 관찰한다. 다음은 분석이다. 저자가 그토록 열심히 관찰한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해낸다. 그 분석 과정에서 엄청난 자료를 참고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책의 참고자료를 저자는 밝히고 있지않다...이점은 상당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만...저자가 참고한 엄청난 자료들은 주로 불교관련 서적들이며, 특별히 어느 저자의 저서들을 참고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정도의 책을 써 내기위해서 그 얼마나 많은 불교 서적들을 읽었어야 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점이 바로 이 책을 써준 저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일련의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저술

관찰과 분석을 마친 후에는 저자의 추론이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이 책을 과학적으라 일컬을 수 있는 증거들이다. 연구를 과학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 연구가 어떤 대상을 다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어떤 방법으로 다루고 있느냐이다. 즉, 대상을 다루는 방법이 과학적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일련의 과학적 과정의 의거하고 있다.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 문화를 이렇게 우리들에게 알릴 수 있는 저자와 같은 인재들이 더 많이 나와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의 것이 세계적인 것임을 제대로 자각하고 우리의 것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점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제본의 상태이다. '잃어버린 문화 유산을 찾아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료로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서적이다. 그런데 제본에 문제가 있다. 책을 80%정도 읽어가는 도중에 책의 '차례'가 써있는 쪽이 그만 떨어져 버렸다. 이 책을 다른 그 어느 책보다 소중하게 다루면서 읽었건만 그렇게 책장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책의 제본에 문제가 있다. 좀더 튼튼하게 제본했어야 한다고 본다. 더더군다나 오래도록 보고 또 볼 그럴 책인데 한 번을 다 읽기도 전에 탈락하는 쪽이 생기다니...못내 아쉽기만하다... 

두번째는 차례의 목차로 보아서 2장에 해당하는 '수월 관음도 '편이다. 수월관음도는 1323년 고려시대에 그려진 불화로 일본의 교토 모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의 욕심이 이 불화를 불법으로 강탈해간 것이다. 수월 관음도는 관음보살의 온화하고 너그러운 '자비심'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관음의 몸에서 발산하는 부드러운 빛은 '자비의 빛' 이라고 한다. 이 수월관음도는 해외의 미술사학자들도 세계적인 최고의 걸작이라고 감탄하는 우리의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나아가 서구의 학자들은 우리의 이 수월관음도를 '모나리자에 뒤지지 않는다' 고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사실상 '모나리자를 능가한다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능가한다고 말하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점은 외국 학자들이 수월관음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조사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인터넷으로 이정도의 정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하면 외국의 미술사학자들이 우리의 수월관음도에 이토록 매료된 이유는 무엇일까..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좀더 해주었다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이 아쉬움이 독자로서 너무나 안타깝다. 단적인 한가지 예가 바로 칠선묘를 바탕으로 그려낸 투명사라이다. 투명사라를 불화에 그렸던 것은 우리나라에 그런 양식으로 들어왔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투명사라는 당시 고려가 비단으로 짜내던 투명한 직물의 일종이었다. 수월관음도에 투명사라를 입혀드리는 그 미술사적 가치도 세계적이지만 그런 투명사라를 실제로 고려에서는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우리의 불화에서 그림으로 재현해낸 것이 놀라운 일인 것이다.  

나아가 수월 관음도는 165.5 * 101.5cm 짜리 불화이다. 그러나 일제가 이 그림에 손을 대면서 폭이 상당히 좁아진 상태이다. 실제로는 현재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이었는데 일제의 무개념 인사들이 폭의 일부를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 손도 댔던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한 한가지가 있다. 바로 그림을 그린 비단이 그것이다. 비단의 폭은 101.5이고 원래는 그보다 더 넓었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 당시 중국의 기술로는 이런 폭의 비단을 생산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가 자체로 중국의 비단 생산 기술보다 훨씬 진보한 직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에 달한다. 그렇다. 실제로 고려의 비단 직조기술은 중국을 훨씬 능가하였고 종이를 만드는 기술 또한 그러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황실에서는 고려의 비단을 의복으로 지어업었던 것이고, 고려의 종이로 황실과 국가 문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고려가 중국에서 서책을 수입했지만 엄청난 량의 최고급 종이를 중국은 고려에서 수입해갔던 것이다.  

위의 두가지 내용은 수월관음도에서 고려를 알아낼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내용일 뿐이다. 미술적인 기법에 관해서는 이를 훨씬 더 능가하는 예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를 서구의 미술사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화의 규모(165.5 * 101.5cm)에서 보듯이 엄청난 대작이다. 모나리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규모가 큰 그림이다. 모나리자는 53*77cm 의 작품이다. 크기만으로 본다면 두배의 차이가 나지만 그 면적으로본다면 두배가 아닌 그림이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그림들이다.  

여러가지 미술사적 가치로보건대 서구의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대로 수월관음도는 결코 모나리자에 뒤지는 문화재가 아니다. 오히려 모나리자를 능가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우리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얼른 되찾아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사명감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저자께 깊이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풍속사 3 -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개정증보판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혜원를 조선의 진보주 화가라고 부르고 싶다... 저자께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