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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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언젠가, 저녁 모임에서 꾸물거리다가 야.자.가 끝날 무렵 아들의 교문 앞으로 갔다.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은 세가지 코스가 있었다.

뭐, 낭만적인 데이트코스를 생각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자 간에 집 밖에서 만나는 건 실로 오랫만의 일이었던지라 두런두런 얘기라도 하며 귀가를 하게 될 줄 알았다.

웬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A길이 있었지만 산길이어서 밤에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었고,

B길은 산을 삥 둘러서 있는 대로여서 대중교통편까지 있었지만, 차를 타고 한참을 움직여줘야 하는 길이었다.

C길은 A길과 B길의 중간 정도 거리였지만, 산길만 아니었다 뿐이지 한적하고 외진 정도가 A길에 못지 않았다.

B길을 생각하던 나는 C길을 향하여 앞장 서는 아들을 바쁘게 따라 걸으며 한마디했다.

"한밤중에 꼭 이렇게 위험한 길로 다녀야겠어?"

"엄마, 아님 나?"

"엄마 혼자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니? 행여 너 혼자 다닐때 말야."

"엄마, 이 한적한 길에서 누구랑 만나게 되면 내가 위험하다기보다 그에게 위협적이지 않을까?"

 

위험하다기보다, 위협적이지 않을까...에서 요즘 읽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 책이 생각났다.

요번 제목보다 먼젓번 제목 '物과 나눈 이야기(이레,2001)'가 이 책의 취지를 짐작하기 쉬웠는데 말이다.

그걸 '다시 책을 펴내며' 부분에서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사물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사물과의 대화'까지는 아니어도,

사물을 의인화하고, 사물에 감정 이입하길 좋아하는 나도...이현주 목사님-이분께는 명함을 못 내밀겠다.

 

"앞이 캄캄했고, 내가 길 위에 놓여 있었고, 자네 발이 나를 밟았고, 게다가 내 모양이 퉁겨나기 좋게 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네가 꽈당 하고 넘어졌지만, 그뿐일세. 사람이 밤길에 돌을 밟고 넘어진 것뿐이야.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사실은 자네가 넘어진 것도 아니네. 넘어진 것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 몸이거든. 자네 몸이 곧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ㆍㆍㆍㆍㆍㆍ

"고맙구먼. 먼저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니

ㆍㆍㆍㆍㆍㆍ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람 발에 밟혀도 보고ㆍㆍㆍㆍㆍㆍ그러는 게 사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것도 그게 다 자네가 살아있어서 겪는 일일세. 그러니, 그래도 굳이 '너 때문에'라는 말을 쓰고 싶거든 이렇게 한번 해보시게. '너 때문에 사는 맛 한번 봤다. 고마워.' 눈 한번 뜨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善을 이루는 세상이 바로 거기 있다네."(14~15쪽)

 

암튼, 참 독특하시다.

밤길 작은 에 걸려 넘어지고도, 그 속에서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내가 아는 이 중에도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있다.

처음엔 '때문에'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덕분에' 투성이인 그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때문에'가 내 기본적인 정서인걸 어쩌란 거야~'하고 툴툴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긍정적인 마인드'라는 건 바퀴벌레보다 생명력과 전염성이 강한 것인지...

어느새 나도 옮았는지 '때문에' 대신에 '덕분에'라는 말을 되뇌고 있는 거다.

아직 범사에 감사할 정도로 초 긍정 마인드로 거듭나지는 못했지만, 

매사에 감사하고, 좋고, 행복한 마음이 퐁퐁 샘 솟기는 한다.

 

사실은 긍정적인마인드는 그에게 옮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영화 '이보다 좋을순 없다'의 대사를 슬쩍 차용하자면,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woman.'이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고 그런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나무젓가락과 관련하여서 내가 생각해본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였다.

ㆍㆍㆍㆍㆍㆍ

"나는 나무젓가락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냐?"

"나는 나무요. 당신이 '나무'를 부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런 불가능하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는 나무도 아니오."

"ㆍㆍㆍㆍㆍㆍ?"

"구태여 말한다면 나는 땅이오."

"네가 땅이라고?"

"숲의 모든 나무와 풀이 땅에서 나온 땅의 분신인 줄 모른단 말이오?"

"ㆍㆍㆍㆍㆍㆍ"

"그러니 나는 하늘이기도 하지요."

"ㆍㆍㆍㆍㆍㆍ"

"따라서 당신과 나는 본질상 하나인 것이오."

"동의한다. 이왕 입을 열었으니 도움이 될 말 한 마디 들려다오."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서 도움이 될 무엇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나요?"

"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왜 처음부터 나에게 반말입니까?"

"ㆍㆍㆍㆍㆍㆍ"

"내가 당신을 만나서 잠시 젓가락 구실 즐겼듯이, 당신도 좋은 주인 만나서 잠시 사람 구실 즐기시오."

"고맙네. 잘 가시게."

"가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늘 여기 있다네."(34~35쪽)

아래 쓸쓸함과 외로움에 관한 얘기는 참 여러곳에서 여러 변형으로 접했었다.

여기서는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해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어딘가에선 '내게온 손님이니 대접하라'고 한다.

 

아무래도 '손님이니 대접하라'보다는 '살아있음의 증거'가 잘 와닿는다.

 

외로움과 관련하여서도,

실재가 아닌 관념이고,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라고 얘기한다.

이쯤되어야 세상 모든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것'이 되고,

긍정적 마인드를 옮기고 배우는 것이 설득력 있어 진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한 삶은 아니었는지 돌이키는데...뜨끔하다.

"쓸쓸한 자네 감정에 대하여 나는 책임도 없고 할 말도 없네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싶군."

"쓸쓸한 감정을 축하한다고?"

"아니,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을 축하한다는 말일세."

"ㆍㆍㆍㆍㆍㆍ?"

"자네가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쓸쓸한 느낌은 그냥 거기 그렇게 두고,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나의 비어 있음이요 나 아닌 것들의 차 있음(盈)이다. 이 쓸쓸한 감정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면서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나그네로 가득한 주인이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73~74쪽) 

 

 

"외로움이란 실재實在가 아니라 관념이다.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다. 자네들이 말하는 '외로운 사람'이란 자기가 외롭다는 착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외롭다는 것은 혼자 떨어져 있다는 말인데 神은 만물을 지을 때 아무리 작은 것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어 짓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신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라. '이웃'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가? 나무는 흙에 뿌리 내리고 새는 허공에 날개를 띄운다. 특히 인간에게는 여섯 개나 되는 문이 있고 거기에 맞추어 여섯 경계(六界)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눈-色, 귀-聲,코-香, 혀-味, 살갗-觸, 생각-法), 스스로 문을 닫아놓고서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고 말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연한 엄살이요, 무지에 뿌리 내린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3~194쪽)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날카롭지 않은 부분들은 내 몸의 지극히 작은 부분인 '날카로운 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이 날카로운 끝 한 점에 수렴收斂될진대,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겠지."

"아무렴. 끝이 뭉툭한 송곳은 더 이상 송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뾰족한 끝'은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그것 아니면 자네가 자네일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그것 아닌 자네의 모든 부분이 오직 그것으로 수렴되는 그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ㆍㆍㆍㆍㆍㆍ?"

"참고삼아 말해주지. 바울로라는 사람은 일찍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네."

송곳의 날카로운 끝에 가슴이 찔려 나는 지금 아무 말 못하겠다. 다만, 바라건대 나 또한 바울로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그리하여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내가 곧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78~79쪽)

 

 

"법광 모습의 내가, 부채 모습의 나를, 관옥觀玉 모습의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런즉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한 것이란 말인가?"

"정확한 표현!"

"불가에서 말하는 삼체개공三體皆空(주는 자도 공이요, 받는 자도 공이요, 주고받는 물건 또한 공이다)이 그것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하는 까닭이 무언가?"

"선물을 주고받음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ㆍㆍㆍㆍㆍㆍ

"논리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신비가 여기 있다. 그림자가 그림자로 존재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한다.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명심해 두어라.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ㆍㆍㆍㆍㆍㆍ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 일찍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지 않았느냐?"(83~85쪽)

위 부분을 읽으면서, 잠시 이현주 목사님의 종교를 의심했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나 철학을 막론하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하여 넘나드는 경계없는 어떤 상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현주 목사님이 바로 그 경지인 것 같다.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라는 부분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겉으로 의연한 척하고 쿨한 척 하지만, 속으론 늘상 조바심내고 안달하고 그러면서 사는 일상이었다.

모든 걸 우아한 백조의 물속 발길질로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였다.

진인사( 盡人事)한 후엔 대천명(待天命)해야 하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조바심과 안달 속에 속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버려도 그가 한짓이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네. 그의 '버림'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버림받지 않는다네."(92쪽)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거란걸,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한 마디만 더 하지. 충고로 들어도 좋아. 누구한테 쓰임을 받으려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게. 창 밖에 내리는 비한테 물어보라고. 너는 지금 누구한테 무슨 쓸모가 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냐고. 부디 자네한테 지금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사시게. 지금 자네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어. 그렇게 날마다 그날 하루만 살게나. 무엇보다도 자네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일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자연법, 그러니까 하느님의 命에 순종하는 삶 아니겠는가?"(101~102쪽)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구절이다.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살라...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란 말의, '긍정적인 마인드'의 다른 표현이지 싶다.

 

내가 자주 느끼고 어쩌지 못했던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실재가 아니라 관념이었단다.

실체가 없기론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실체가 없어 닦을 수 없으니까~--;)

제대로 쓸 궁리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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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4-06-03 08: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주 무모했다는 ㅠ.ㅠ
하여 저를 아주 곱아쥐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불길한 예감...
빈틈이 보이면 전 융단폭격을 당할 운명에 처해있습니다요 ㅠ.ㅠ

그러나 양철나무꾼님 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는 한 달 전 스텔라님께 욕을 바가지로 먹고(안보이는 댓글로 ㅠ.ㅠ)
스텔라님과는 영영 결별한 상태랍니다.
스텔라님...제게는 안이쁜 분이에요^^
행여 관계의 회복?? 이건 불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모한 짖을 왜했냐면요...
"한사람을 뺀 모든 인류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한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은,
그 한사람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라는...어디에서 읽은 글 때문입니다 ㅠ.ㅠ

무모한 짖을 한 저를..
이쁘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에게 이쁨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쿠더덩~^^

고맙습니다 양철 나무꾼님~


2012-05-30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6-04 11:27   좋아요 0 | URL
님의 글들을 다시 종종 볼 수 있게 되어 '정. 말.' 기뻐요.

계속 이곳의 사람들로 인하여 맘 상하고 상처 받고 하는데,
가만 돌이켜보면,
또 제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리하여 제게 살아갈 힘을 주고 하는 것도 이곳이더군요~^^

네, 우리 서로의 자리에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면...
'왕의 남자'의 그 버젼,
너 거기있고 나 여기있고~^^
그것만으로도 때론 위안이라는 거,
님이 제게 그런 존재라는 거,
알고 계실까요?^^

글샘 2012-06-01 10:24   좋아요 0 | URL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참 좋은 말이네요~ ^^
그래서 '인연'이 중요하다잖아요.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 환경인 '연'이 잘 맞으면... 크게 쓰이는 거고 초긍정 마인드도 생기는 거고...
그게 자꾸 꼬이는 인연을 만나면... 속이 상하고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런 거...

양철나무꾼 2012-06-04 11:33   좋아요 0 | URL
샘은 '인연'따위보다는 노력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주의일 줄 알았는데, ㅋ~.

저기 자꾸 꼬이는 인연이란 '악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늘바람 2012-06-03 10:56   좋아요 0 | URL
오붓한 데이트를 꿈꾸기엔 아드님이 넘 커버렸나봐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빨리 어른이 속박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일테니까요

양철나무꾼 2012-06-04 11:3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의 댓글은 길지 않아도...
은근 멋스러운 거 알까요?^______^
오늘 이 댓글 참 맘에 들어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이걸 기억하면...이해 못 할것도 없을텐데,
맨날 툴툴거리는 야박한 엄마예요~--;

jeweleye7 2013-03-03 02:2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떻게 이해 하셨는지 궁금해요.
p18 "여기 입원한 환자... , 저 사람들도 세상의 온갖 정신적 쓰레기를 자기 몸에 담아서 그만큼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생각은 정신병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외부에 의해 복잡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 것을 풀어 줘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 부분의 의미를 모르겠네요. 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있는지... 무슨 뜻 일까요?
 
기억의 못갖춘마디 문예중앙시선 15
강연호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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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휴일이라고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찜질방을 가자는 남편의 말에 평상시처럼 가죽재킷을 팔에 꿰고 줄레줄레 따라나서니 대책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다.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의미를 깨달았는데,

다들 반팔 반바지 차림인 것이 계절은 어느새 봄을 건너 뛰어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딴 사람들이 보면 적어도 한 계절 정도는 잤는 줄 알겠다, 그치?"

하는 내 물음에서 여름에 대한 기대감을 눈치챘는지,

"모터싸이클족 보면 사시사철 가죽으로 쫙 빼고 다니던데...너도 이 참에 모터싸이클만 하나 장만하면 되는데 말야, ㅋ~."

하며 낄낄거린다.

암튼, 난 기온과 비례해서 액티브해지고 기분도 업 되는 모양이다.

이 시집을 얼마전에 선물 받긴 했는데, 누구인지 그 진가를 몰랐다.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이 뒷표지에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표현한게 눈에 띄었으니 망정이지,

저걸 못봤다면 천년만년 먼지더미 속에 덩치로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끙~--;

근데, 이영광의 저 표현은 틀렸다, 버릴 말을 찾기 어려운게 아니라 버릴 말이 없~다!

 

그의 약력을 찾아보니,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비단길』(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2012)가 있다. 2012년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라고 되어있다.

 

벌써 여러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데 왜 모르고 있다가 이제 와 이렇게 수선스러운 거냐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뭐~ㅠ.ㅠ

햇살이 너무 너무 좋아서라고 해두자.

시집도, 시인도 넘 넘 넘 맘에 든다.

시인의 표현을 빌어, 지난 겨울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갖고 계신 알라딘 서재 여러분들~!

"이 봄날 쓸쓸한듯 다정하고 다정한듯 쓸쓸한 시집 한 권 읽어 보세요, 꼭이요~."

하고 소문내고 싶을 따름이다.

 

이 시집은,

시란 반짝반짝 빛나는 감수성의 과잉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빼어나고 융슝함으로 이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며,

감성이 절제될 때야말로 제대로된 시가 나오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에게라면,

수선내지 않는 소박한 자연스러움으로,

각기 상반되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것이, 두루두루 손색이 없다.

 

제목 <기억의 못갖춘마디>만 해도 그렇다.

시집 머리의 '시인의 말' 자체로 하나의 詩이지만, 시가 아니라 '시인의 말'이란다.

음악으로 치면, 못갖춘마디쯤으로 시작하는 꼴이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투이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외등처럼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자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마다 불 꺼진 방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대여,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를 돌아나간 아코디언풍의 바람을 기억하는지

 

나는 나를 다독거린다

 

그의 이 시집을 읽다보면 일상의 소박한 삶과 언어들이 모여 詩를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오래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한걸로 미루어...생각없이 대충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고, 그런 나를 대견해 할 수 있다는 거...그런 나를 위로하고 다독거릴 수 있다는 거...참 멋진 일인 것 같다.

이 못갖춘마디(시인의 말)는 3부의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와 어울려 비로소 하나의 갖춘마디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몸살

 

 

 

뜨겁고 춥다, 이 모순의 육체는

그럭저럭 매력적이다

약 기운 때문인지 지면에서 얼마쯤

붕 떠 있는 느낌,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듯 아슬아슬한 공중부양 같다

들뜬 청춘 같다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

연초록은 원래 비릿하고

청춘은 불량을 무기로 내세운다.

이빨 사이로 찍찍 침을 내뱉거나

면도날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는

 

 

그 시절 지나면 몸살이란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팍 불이 나간

백열등 같은 것, 잠시 미련처럼 빛살이 어려

알전구를 귀에 대고 흔들어본다

이 어둠을 어찌 돌이킬래?

누군가 속삭인다

끊긴 필라멘트마냥 파르르 오한이 온다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량의 시절인 듯

연탄불처럼 다시 층층 포개지고 싶다

포개져 마침 화르륵 타오르는 체위이고 싶다

나중에는 부엌칼로 갈라야 하더라도

가르다가, 앗 뜨거라 불투성이로 깨지더라도

 

 

몸살이란, 그 기억에 살이 낀 것이다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직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 참 고마웠다.

뜨겁고 추운, 추워서 뜨거웠던, 어두워서 환했던...기억을 몸살, 백열등, 연탄불과 연결시켜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라고 한다.

아~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어쩔 것인가 말이다.

지면에서 약간 붕 뜬 느낌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들 뜬 청춘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아니면, 몸살기 있어 열 나는  빨갛게 달뜬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건강한 슬픔' 부분)

건강한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것은 어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울되 거기 침몰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위안과 힘을 얻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그것보다 더 '건강한 슬픔'은 없지 싶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건넬 수 없어 혼자 깊숙이 운 나에 비해,

나에게 스스럼 없이 울음을 건낸 그녀는 훨씬 '건강한 슬픔'을 가진 것이다.

 

누군가의 건강을 염원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울지마라, 울지마라' 백번의 말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어깨를 기대기 좋도록 비워둘 것이다.

 

단풍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 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이 시도 참 좋다.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지만,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제목이 단풍이라니...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감추는 것은 비겁한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쩜 혼자 견뎌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라는 걸 보면...말이다.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바닥' 부분)

어찌보면 이 시의 제목은 '바닥'이 아니라 '규정'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바닥일때는 더는 불안할 게 없다.

더 이상 아래로 추락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앉은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모르겠을 때의 판별법은,

그냥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그게 편안해지면 그곳이 바닥인 게다.

 

울음

 

벚꽃이 만개하면서

그는 이제 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우는지 잊는다

그는 언제나 그를 위해 울었을 뿐

누군가를 위해 울어준 적이 없었으므로

저 벚꽃의 만개를 울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아니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킨다는 것

저기 聖 벚꽃들 울음을 감춘다

그러나 어금니 깨물 때마다

몇 무더기씩 흩날리는 꽃잎들을

그가 처연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으리라

젊음을 탕진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은 지금

어디선가 장구 소리 희미하게 들려온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화무십일홍이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과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키는 것 사이에서 벚꽃은 피고 진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었다는 거고,

이 시에서 '잊음'을 '젊음의 탕진', 또는 '늙음'과 동격으로 놓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감정 따윈 배제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지만,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는 그 누군가를 배려하고, 그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이 聖스러운 것이리라...

사람의 그늘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엇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간ㅁ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었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잠깐 시인이 여자가 아닌가 착각을 했었다.

적어도 시인은 아니어도 작중화자는 여자여야 하겠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쓸어넘기듯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다'는 부분에서 '레터스 투 줄리엣'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했던 그늘의 길이, 또는 깊이라는 것은...사람의 마음 속 쯤 되려나?

어쩜,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등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일들을

나이가 들면...되짚고 더듬을 수 있게 되나보다.

나도 자꾸 되짚고 더듬고 싶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머리를 내맡긴다는 것은, 빗질을 내맡긴다는 것은 순종, 또는 순응...

아니다, 마음을 내맡겨 위로를 받는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방울토마토 기르기

 

화분에 방울토마토를 기른다

화분에 기르는 방울토마토는 식용이 아니다

그거야 마트에 가면 상자째 살 수 있다

차라리 방울이 딸랑 울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볕도 좋아야 하고 물도 자주 줘야 하지만

곁가지도 따주고 꽃도 솎아내란다

 

하지만 저 가엾은 연초록을 어떻게 잘라낼까

나는 시인이므로 시인답게 머뭇거린다

전문가는 혀를 착나 입을 삐쭉거리는 대신

지지대를 고쳐 세우며 가르쳐준다

시인의 마음으로 기르는 식물은 되는 게 없지요

한 잎도 한 가지도 솎아내지 못해 벌벌 떨면

결국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져요

 

그는 모질게 곁눈을 따낸다

나는 모질지 못해 다시 연민을 꿍얼거린다

자연은 그냥 둬도 즈이들끼리 잘만 어울리던데요

전문가는 또 심드렁하게 나를 때린다

사람의 손 바깥에서야 자연 아닌 게 있나요

품안에 거둔 만큼은 손길 가는 게

최소한의 예의지요

 

아직 여물지도 않은 방울토마토의 방울들이

요란하게 내 머리를 울린다, 진짜 모진 것은 무엇일까

'방울토마토 기르기'  이 시는 '딸랑'거리며 내 머릿속에 연신 경종을 울렸다.

'자연'과 '모질다'는 것과 '손길'과 '최소한의 예의'의 상관 관계에서 남모를 고민을 좀 하였다.

그러다가 잎도, 가지도,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지는 것이 바로 모질지 못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연민이나 동정과 다름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왜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어린왕자'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이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게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그냥 사랑하겠다는 무모하고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사람이 있다.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자기 자신도 상처 입을 수 있다.

진짜 모진 건 그런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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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17 00:1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중에늠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이 있는데
시인은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합니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덕분이라더군요 ㅠ.ㅠ
저 역시 시인의 친구이지만 시를 잘 읽지 않습니다.
시인을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의 일원인 셈이지요 ㅠ.ㅠ

그나마 대학 때 읽은 수십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 후로는 시집을 사지 않았습니다.
반성 많이 됩니다. ㅠ.ㅠ

2012-04-1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4-16 21:50   좋아요 0 | URL
좋은 시를 덕분에 많이 읽네요
방울 토마토 기르기가 가장 맘에 드네요.
제목이 참 독특하면서 와닿는 시집이군요

숲노래 2012-04-17 08:19   좋아요 0 | URL
사랑하려는 마음이라면
언제나 서로를 따사로이 덥히는
좋은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나리라 믿어요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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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숙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ㆍㆍㆍㆍㆍㆍ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며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ㆍㆍㆍㆍㆍㆍ

 

김선우를 읽기엔 햇살이 너무 좋지만, 그렇다고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눈물이 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집을 아무렇게나 뒤적이다 이 시에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입에 문 것처럼 멍해진다.

시집의 겉날개 안쪽을 뒤져 프로필을 찾아낸다.

1970년생, 나랑 동갑이다.

항상 이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처음 접하는 작가인듯 읽는다는 것이고,

읽다가는 책날개의 프로필을 뒤져 '어, 나와 동갑이네'한다는 것이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돌아다니다가, "아하? 그 김선우...!"하고는 흡족해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글의 첫인상은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신선하고 통통거리는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면, 속 깊고 늙수그레한 영감이 들어앉아 있는것도 같다.

아직까지, 이토록 신선하고 통통한 글을 쓰는 가슴 속에 속 깊은 영감을 한명 들어앉히고 사는 이는 김선우 외엔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렸을때부터 난 좀 이중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어딘가에 속하고 그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면서도, 그 소속감이 주는 편안함을 은근 즐겼던 것도 같다.

같은 이유로...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곁에 손닿는 곳에 두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러고 싶어했다.

혹은, 그러고 싶어 안달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그랬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곁에 없어도,

손 닿는 곳에 없어도...좋아하거나 사랑할 수는 있는 것이다.

햇살이, 바람이, 비가, 달이...그렇듯 어떻게 당신이 내 것일 수 있겠는가?

 

말로는 천만번도 할 수 있다는 그 말을 쉬이 못하는 사람을 내칠 것이 아니라, 귀히 여겨야겠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늘도 다 만 사 랑 하 여 야 겠 다.

 

ㆍㆍㆍㆍㆍㆍ

 네 그럼요 철학이지요, 감꽃 지던 그날도 똑똑히 기억납니다 감나무 아래 동그랗게 싸놓은 똥무더기 위로 튀밥 같은 감꽃이 떨어지고 따스한 바람이 지나고 파리가 지나고 꿀벌이 지나고 나비가 지나는 것을 한참토록 바라보던 날이 있었죠 이건 뭘까 나는 달랑 요 한 몸인데 이것은 어디서 온 걸까 고독하게 턱을 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황금빛 똥을 오래 바라보던ㆍㆍㆍㆍㆍㆍ밥이 변해 똥이 되는게 시간이라는 걸까 밥이 똥이 되는 것처럼 무언가 이 몸 안에서 변해 내가 되는 것을 흔쾌히 저지르는 게 삶이라는 걸까 딱 그런 문장은 아니어도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서운 거겠구나 정신 바싹 차려 살아야겠구나 저의 철학이 거기까지 나아갔는지는 모르겠으나ㆍㆍㆍㆍㆍㆍ

 아 그렇군요 철학으로부터 똥이 온 게 아니라 똥으로부터 철학이 왔다고 하는 쪽이ㆍㆍㆍㆍㆍㆍ아 네에ㆍㆍㆍㆍㆍㆍ

 

                                                                                                                                     '나의 철학' 중에서,

 

이 시는 모호하고 난해하다.

게다가 '걸까', '같습니다', '~겠구나'나 '겠으나' 따위의 '용언의 어미 변화'만을 가지고 모호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김선우의 시엔 유독 오줌, 똥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요번엔 철학과의 접목이다.

전혀 관계가 없지만...개똥철학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밥이 변해 똥이 되기도 하는데, 똥이 변해 밥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밥이 똥으로 변하는게 아니다.

밥이 변해 똥으로 되는 거고, 거기에 필요한게 '시간'이라는 거다.

똥이 되고 내가 되는 거다.

그게 삶이라는 거다.

 

'변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다른 성질로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면,

'되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자연스럽게 이르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밥과 똥에만 국한 시킬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삶으로 까지 확장을 시키게 되고,

그러다보면 요번 시집에서는 그간의 그녀와는 또 다르게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랑 노래를 하는 그녀를,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니 '참 깊더라~'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

차갑고 딱딱한 무쇠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고소한 떡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러포즈를 하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

깊고 진중한가 하면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명랑하기도 하다.

차가운 무쇠 기계도 얼마든지 달콤하고 로맨틱해 질 수 있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촌스럽지만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가래떡처럼 뜨끈하다.

 

이 시를 읽다보면,

나도 마냥 말랑말랑하고 경쾌하여져서...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한번 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달리는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만나지든 그렇지 않든 다 괜찮다...하고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시는 내게 또 하나를 가르쳐준다.

현재를, 순간을, 오늘을 사는 삶이다.

오늘을 최선을 다하여 살았을때,

뜻밖의 선물처럼,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리고 볼 일이다.

 

꽃, 이라는 유심론

 

  눈앞에 열명의 사람이 잘빠진 몸매로 웃고 있어도

  백명의 사람이 반짝이는 선물을 펼쳐 보여도

  내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예전에 꽃이 예쁘게 핀 돌담길을 지날 일이 있었다.

이내 비가 내리길래 예쁘게 핀 꽃이 지겠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그랬더니, 누군가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쁘게 꽃 피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꽃잎을 다 떨구더라도 열매 맺을 수도 있음을 알게해준 비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비를 탓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이 시는 좀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번개치고 천둥소리 들리기까지의 찰라를, 나와 당신 사이의 간극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내가 당신이 아닌 이상 간극은 어떤 의미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을테고,

간극이 찰라에 가까울수록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롤랑바르트가 어떤 의미로 말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아프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도 알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외로움일 수도 있지만, 호젓함이거나 그리움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찌되었건 나의 주관적 견해일뿐...

시의 해석은 각자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 눈물인듯 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더라도 너른 벌판에 우뚝 선 무엇하나 없어 번개를 맞을 일조차 없는 詩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사람의, 익명의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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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3-22 18:39   좋아요 0 | URL
언제나 늘 그렇지만 양철나무꾼님 언니 덕분에 시를 읽어요 요즘
시만 주구장창 읽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 였는지 가물가물한 요즘.
서늘서늘한 날씨에 그런데 참 와닿는 시였네요

프레이야 2012-03-22 19:49   좋아요 0 | URL
꽃이/지는/이유
헉.. 대단한데요, 김선우 시인.
양철나무꾼님이 준 별 다섯에 바로 장바구니 직행이에요^^

잘잘라 2012-03-22 21:03   좋아요 0 | URL
시로 읽기엔 참 좋아요^^
같이 살기엔 속 터지는 날이 많을것 같구요. 히히
글쓰는 사람하고 살자면 먼저 도를 닦아야 할까요?
비에 마음이 젖어드는 밤이예요.

2012-03-22 21:42   좋아요 0 | URL
1. 흠. 모든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사람도 마음도 사물도.. 이 세계 모두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블레이크 시였나, 하여간 외국 싯구인데요. (기쁨이란 가질 수 없는 것,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 기쁨을 가지려 하지 말고 다만)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자"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인용했던 책이 예전 집에 있고 여기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좋았는데..

여튼,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았어요. 쉬운 건 아니지만.. ^^

2. 마지막 시가 제일 좋아요. 전.
그리고 '번개 친후 천둥치기까지의 시간'을 '당신과 나의 간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양철님의 견해도 멋있어요~>.>

2012-03-23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5 12:35   좋아요 0 | URL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에서 가슴이 서너번 쿵쿵쿵.
멍하니 두세번 다시 읽고, 또 읽고, 끊어진 길 보인다 라는 문구를 되내이고 되내이고.

나는...... 이런게 슬퍼! 그래서 차라리 천둥 번개가 친 다음에, 아무도 없어서 편안해, 도망칠 수 있어서....
완전 실존적 한계다... 아흑.

같은하늘 2012-03-28 01:09   좋아요 0 | URL
이 밤에 눈에, 머리에, 가슴에 착착 안기는 시들이예요.
 
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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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래도 대책없는 바보이거나,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이렇게 어떤 이의 시 한구절을 내맘대로 바꾸어서 읊조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옛 여인들은 보고싶은걸 어떻게 견뎠을까

지금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도 못했을텐데

지금처럼 잊기 위하여 취하도록 마실 술도 없었을텐데

 

시의 원문을 옮겨 보면 이렇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를 견뎠을까
지금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도 못했을텐데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 '정철훈'의 이도백하((二道白河) 중 일부 -

 

암튼 이쯤되면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명약관화해진다.

보고 싶으나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보고 싶은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잊기 위하여 마시는 술에 대충이란 있을 수 없다, '취하도록'이다.

그런데, 말이다.

잊자고 술을 마셨는데, 이젠 초록 술병만 보면 자동으로 떠오른다.

 

이 책에서 저자 '김현진'은, 남자는 가도 가게는 남는다.

자고로 먹던 음식이 좋고 마시던 술이 좋고 얼굴 익힌 주인이 편하므로 남자 하나 바뀌었다고 그거 처음부터 다시 공사할 생각하면,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생각만 해도 귀찮다'고 염소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저 문구를, 남자는 가도 독서 취향은 남는다.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남자 바꾸기가 신발 바꿔 신기만큼이나 간편하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것인지,

독서 취향 바꾸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것인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나,

독서 취향이 달랐던 이들이 만나 서로의 독서취향에 흡수되어 버린 연후에는,

상대가 떠난 후에도 서로에게서 흡수되고 동화된 독서취향이 남아 쓸쓸하고 때론 씁쓸하더라...

뭐, 그런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아는 사람(=知人)이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 나와 독서 취향이 똑 같아서,

'김소희'가 '한겨레 21'에 쓴 '오마이 섹스'를 몰래보고 있을라치면 같이 보자고 고개를 들이밀었고,

성석제가 재밌다고 키득거리면, '나도 성석제 완전 좋아하잖아.'하면서...

'성적제는 이기호랑 세트로 읽어줘야 재미가 배가 된다.'며 몇 권 가져다 주기도 했다.

지금은 날려버린 옛 블로그를 용케 발견하고는, 김소희 다음으로 글을 잘쓰는 여자라고 칭찬을 해주기도 했는데,

그런 그가 나와 김소희보다 글을 더 잘쓴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이가 바로 '김현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김소희나 김현진보다 글을 더 잘 쓴다거나, 잘 쓸 수 있다거나, 잘 써보고 싶은 마음 따윈 없지만...

그의 눈에 콩깎지가 씌어서 '김현진보다 눈곱만큼이라도 더~'라는 아부성 멘트를 한번쯤 날려주기를 기대했던 적은 있었다.

 

질투에 눈이 멀었던 난, 그녀의 글을 볼때마다 이 책 추천사를 쓰며 고종석이 언급한 친구의 그것처럼,

 '글에 멋부림이 지나치고 자아가 너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고 투덜거렸고, 그럼 그는 고종석의 그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화하는 가난 속에서도 따뜻하고 고결한 마음씨를 어기차게 간직한 어떤 이웃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고 변호하고 나섰었다. 

아는 사람은 이제 '예전에 알던 사람'이 되었지만, 김현진을 읽는 나의 독서 취향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때 그가 말한, 그녀는 가지고 있고 내게는 없었던 건...인생의 바닥을 쳐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치열함이었다.

 

김현진에 비하면 난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인 것은 맞다.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해서 나름 견뎌내야할 병충해가 없었겠냐마는...각설하고,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 가출이란 걸 하여 광화문의 햄버거점에서 알바를 했었다.

채 하루를 채우지 못한 그 가출은 알바 후 원인불명의 고열 때문에 친구의 밀고로 아빠에게 알려졌었고,

내 인생에 있어서 알바는 그날 하루, 4시간이 전부였다.

그날 나를 교육시켰던 알바 오빠의 이름이나 얼굴 따위는 잊었지만, 알바생에게 힘들때 쉴 수 있는 곳을 제일 먼저 알려주었던 그 오빠의 따뜻한 마음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를 조용히 화장실로 데려가 좌변기의 뚜껑을 덮더니 시범을 보이며,

"힘들면 이렇게 뚜껑을 내리고 앉아 있는거야. 시간이 좀 지날때마다...물을 한번씩 내려주는 건 센스~"

라고 했었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내가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했어야 될때도 있었고, 반대로 누군가를 내 밑으로 두어야 할때도 있었다.

나이를 먹다보니, 어딜 가나 나만의 숨어있기 좋은 곳 하나쯤 가지는 건 기본이 되었다.

내 밑의 누군가 들에게도 제일 먼저 '힘들 때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라고 귀뜸해 주는 건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한동안은 인생의 바닥을 쳐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치열함이 어떤 것일까 싶어서 몸을 혹사시켰던 적이 있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수해복구현장에 비닐을 걷어내는 봉사를 따라나섰다가 겨우 하루하고 일주일을 앓아 눕기도 했었고,

시댁의 땅콩 밭에 쭉정이를 주우러 갔다가 탈진으로 쓰러져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었다.

 

지금은 물질적인 빈부를 가지고 무조건 인생의 상류층이나 밑바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풍요롭거나 가난하고의 여부가 인생의 상류층이나 밑바닥을 결정 짓는다고 생각한다. 

고독해서 사랑을 한 게 아니라 혼자 있기 싫어서 사랑을 했는데, 그러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그냥 막 살고 있었다. 나야 연애에 목숨을 거는 것뿐이었지만 남들 보기엔 그냥 막 나가고 막 사는 걸로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울고 또 울어도 또 멍청한 짓을 되풀이하는 한심한 여자아이였는데, 그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다지 나을 것 없다. 나는 그냥 죽도록 사랑받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했고,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아예 마음이고 감각이고 다 마비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짓을 되풀이했다.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는 삶을 도대체 누가 좋아해주겠느냐는 말도 맞지만, 누군가에게 죽도록 사랑받아보면 조금 안심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런 일이 한번 일어나면 자신을 좀 좋아하게 될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애해볼 만큼 해봤고 나름의 생계와 고뇌를 짊어지고 있는 성인 남자들은 귀찮은 강아지처럼 구는 나를 부담스러워했고,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구석에 시무룩하게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87~88쪽)

 

사실 아저씨도 나도 우리는 다 똑같은 종자였다. 외로워서 술 마시고 사람 냄새 그리워서 민폐를 끼치고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다고 말 못하고 나 주인아저씨고 내가 대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한심한 종자들. 외로워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더 외로워지는 바보 같은 종자들. 아저씨에게는 마구 기어들어가 내가 대장이라며 난리를 칠 세입자들이 있고, 나는 누구의 대장도 아니며 어떤 세입자도 없었지만, 죄 없는 남자친구나 몇 안 되는 친구들이나 마구 조진다는 면에서는 똑같이 한심하고 덜떨어졌다.(129쪽)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 밤에 안방에서 창문을 열면 한강과 동호대교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던 우리 집, 미칠 것 같은 밤에도 방이 세 개나 있어서 고독을 내려놓을 공간만은 충분했던 우리 집. 그때 나는 젊었고, 피는 지글지글 뜨겁고 종종 토할 만큼 외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은 다 무너진 그 집은 삼성 래미안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생각을 하면 또 덜컥 외로워진다. 다행인 것은, 그 뜨겁던 피가 약간 식어서 이제 토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정도다. 어쨌거나.(147쪽)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가난은,  외로움이나 고독 따위와도 등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그것을 인생의 밑바닥의 그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따갑지요. 근데 그럼 어떡하겠어요, 비닐장갑 끼면 손이 둔하니까 느낌이 안 와서 골고루 양념이 안 들어가 맛이 없어지고, 좋은 결과를 내려니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참아야 되는 것도 있지요.(106쪽)

 

 할아버지들은 영차 영차 하며 이번에는 냉장고를 날랐다. 아, 다들, 이렇게 미친 듯이 열렬하게 살고 있었다.(163쪽)

 

이 책을 읽다보면, 도처에 술을 마시고 싶게 만드는 문장들이 포진해 있다.

김현진의 글이야 그냥도 수려한 것은 분명하지만,

술꾼들에게는 더없이 유혹적이고, 대단한 위용을 과시한다.

그러니 혹, 부도 위기의 주류회사나, 술집이 있다면...과감하게 김현진의 이 책을 술을 자제하거나 끊은 잠재 술꾼들의 가시는 걸음걸음에 고이 놓아드리면 될 일이다.

 

ㆍㆍㆍㆍㆍㆍ술에 취해 길에 누워 자고 있는 웬 아가씨를 발견한 그 산책길에서 그 신랑과 신부는 아마 손잡고 가로등 아래를 다정하게 거닐다가 내 친구를 발견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정답게 서로 도우며 친구를 낑낑 데리고 내려오고, 막걸리 냄새 풀풀 풍기는 우리가 그 친구를 떠메고 사라진 다음에는 참 다행이라고 웃다가, 황당한 일도 있다고 다시 한 번 웃다가, 서로 이불 잘 펴고 그 침대에 누워 꼭 껴안고 다정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남자 잘 만나 어떤 호화로운 대접 받고 사는 여자보다 자그마한 살림이라도 반질반질한 침대와 말간 얼굴 가진 남자와 정답게 사는 그녀가 부러워서, 그래서 더 외로워져 목 메일 때도 있었고,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막걸리로 씻어 내렸다. 그런 정결함은 아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앞으로도 기약없다. 그저, 부디 그들이 그 침대가 떵떵거리며 제 자리 찾아 위용을 자랑할 수 있는 몇 십 평짜리 넓은 집에서 잘 살기를. 레미안이니 브라운스톤이니 이런 데 가서 여봐란 듯이 살라고 세속적으로까지 빌어주고 싶을 만큼 참 정다운 무릎을 가진 부부였다.(17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잘 먹지도 못하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고...

정다운 무릎이 어떤건지 시험해보고 싶어, 작은방에 반질반질한 침대를 놓고 자그마한 살림을 살고 싶어졌다.

 

'글에 멋부림이 지나치고 자아가 너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더라도, 그걸 감수할 수 있을만큼 수려함의 정수를 이루는 구절은 이 구절이다. 수사의 화려함과 수려함이 정수와 극치를 이룬다. 도넛을 먹을건지, 고로케를 먹을건지,의 쉽지않은 결정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미루어 두는 수밖에 없겠다.

우리가 모두 따뜻한 빵이라면 나는 한 개의 도넛,  동글동글 귀여운 찹쌀 도넛이 아니라 뻥, 하고 뚫린 큰 구멍 있는 그런 도넛의 숙명이다. 그놈의 구멍에는 별별 게 다 들어간다. 유난스러운 외로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관심병과 애정결핍, 지난밤 부끄러운 기억, 꼴에 쓸데없는 동정심, 독한 술, 추억이라 부르기도 비참한 순간들, 이런 것들이 이커다란 구멍을 통해 밀물처럼 썰물처럼 오고 또 갔다. 사람은 원래 혼자라는 걸 알면서도 잠깐 그 구멍을 메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아무나 사랑하고 아무에게나 상처받는다. 만약 당신이 고로케라면 이런 고통 모를 것이다. 얼마든지 몰라도 좋을 고통이다. 금방 튀겨져 따뜻하고 감자나 당근 같은 포근한 속이 들어 있는 당신, 야무지고 빈틈없이 속이 꼭꼭 찬 당신은 구멍 같은 걸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도 나름의 고통이 있겠지. 더 채우고 싶어서 괴로울 테니까. 그래서 당신은 더 맛있고 특별한 속재료를 찾는다. 존경스러운 당신의 추진력, 당신이 정말로 고로케인 건 아니니까 당신이 채우려고 하는 것들은 감자 양파 햄 당근이 아니라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스펙 같은 근사한 속재료. 당신이 아자 아자 파이팅! 할 수 있어! 하고 외치며 도톰하게 속을 채우려고 참 열심히 사는 동안 뭘 넣어도 텅텅 비어버리는 도넛들은 당신이 부럽고 신기하고 가끔은 무서워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지, 루저!(238~239쪽)

 

제자리라고 마음대로 정해놓은 구석 자리에 앉아 대낮부터 술국과 막거리를 청해 마신다. 그러면 조그만 마루에 앉아 계신 할머니 옆으로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괜히 이것저것 묻는다. 사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순대국을 끓여온 할머니의 대답은 늘 명쾌했다.

 

- 할머니, 회사 대리가 괴롭혀요.

- 아가야, 속 좁은 놈들은 별것도 아닝 게 무시해버려라잉.

- 할머니, 저 회사 그만뒀어요, 인제 어떡해요?

- 아가, 앞으로 돈 벌 날 하고 많응게 쪼매 안 벌어도 돼야. 안 굶어 죽는다.

- 할머니, 저 이렇게 술 많이 마셔서 어떡해요?

- 아가, 걱정하지 말아라. 들어갈 때 실컷 마셔라. 안 들어갈 날이 곧 온다.(244쪽)

이 책을 통틀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이 부분이다.

이렇게 우문현답을 구사하시는 할머니만 있다면, 대낮부터가 아니라 하루 24시간 내내라도 술국과 막걸리를 먹어댈 수 있겠다.

술을 너무 먹어 알콜성 치매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된다 해도, 이 할머니만 사부로 모실 수 있다면 내가 앞으로 사십 년 동안을 순대국을 끓이는 보조로 일해도 행복하겠다.

 

"아가, 걱정하지 말아라. 들어갈 때 실컷 마셔라. 안 들어갈 날이 곧 온다."

누군가 나에게도 이렇게 얘기해 준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알콜성 치매보다 술 안들어갈 그날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천형 같을테니,

블랙아웃이나 머릿 속의 지우개보다 더 무서운게 술이 안들어가는 그날일테니,

들어갈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실컷'은 아니고 야금야금 아껴 마실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냥 지금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가는 만큼만 욕심부리지 말고 마시고,

마셔서 취하면, 취하는 만큼만 술김을 빌려 하고 싶은 말 하게 하고,

마셔서 취하면, 취하는 만큼만 술김을 빌려 잊고 싶은 건 잊고 살 수 있다면,

그럭저럭 감사하고 살기로 했다.

 

김현진의 책제목 <뜨겁게, 안녕>은 'Goodbye To Love-Carpenters'를 본문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Goodbye의 의미로 사용했겠지만, 난 Carpenters의 또 다른 곡 Close to you를 떠올리며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이런 문구를 간과할 수 없어서 라고 하면 너무 감성충만, 필 충만이 되려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접힌 부분 펼치기 ▼

 'Goodbye To Love-Carpenters'

 

 

I′ll say goodbye to love, no one ever cared if I should live or die

Time and time again the chance for love has passed me by

(And all I know of love is how to live without it

I just can′t seem to find it)

So I′ve made my mind up I must live my life alone

And though it′s not the easy way

I guess I′ve always know

I′d say goodbye to love

There are no tomorrows for this heart of mine

Surely time will lose these bitter memories

And I′ll find that there is someone to believe in

And to live for something I could live for

All the years of useless search

Have finally reached an end

Loneliness and empty days will be my only friend

From this day love is forgotten

I′ll go on as best I can

What lies in the future is a mystery to us all

No one can predict the wheel of fortune as it falls

There may come a time when I will see that I′ve been wrong

But for now this is my song

(And it′s goodbye to love

I′ll say goodbye to love)

 

 

책의 가사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옮겨 적지 않았다.

304쪽의 '문'은 '분'의 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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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3-02 13:49   좋아요 0 | URL
杯山(배산)- 전겸익

山如一酒杯(산여일주배)-산이 하나의 술잔 같아서
湖水嘗灌住(호수상관주)-호수는 벌써 물을 댄다
我愛杯中物(아애배중물)-나는 술잔 속의 풍물이 좋아서
還乘此杯渡(환승차배도)-다시 이 술잔을 타고 건너간다


2012-03-02 15:46   좋아요 0 | URL
요즘 양철님 글이 왜 이리 잼있지요? 김현진보다 눈곱만큼 더 잘 쓰시는 것 아닐까요? 후후
저도 김현진 글 좋아했는데, 재치에 두 점 주고, 자기애와 자기연민에 한 점 깎고, 혼자 막 그랬었지요.
이 글 읽으니, 김현진 양의 저 에세이 당장 사서 읽고 싶습니다...
남자는 가도 가게는 남는다니, ㅋㅋ.
어느 인연과 섞였다가 헤어진 후, 남은 자취엔 추억만 있는 게 아니군요. 섞였다가 흔적으로 혹은 자산으로 남은 독서취향이라. 재밌어요.

양철나무꾼 2012-03-02 16:02   좋아요 0 | URL
ㅋ,ㅋ...칭찬에 약한 양철댁~
제가 읽은 책 보내드릴게요.
사지마세요. 후하게 줘서 별 넷이지만, 소장가치까지는 장담 못해요~^^

2012-03-02 21:13   좋아요 0 | URL
양철님은 진짜 책 인심이 후하시군요.. 하지만 저도 염치가 있지 우예 또 받겠습니까~ㅎㅎ
저도 살 생각은 아니었어요. 지금 무급휴직에 막 접어들어서, 긴축이거든요.
서점에 놀러가서 읽거나, 시립도서관에 구입신청하거나 할 거였답니다.
여튼 양철님 고마워용~! ^^*

cyrus 2012-03-02 22:26   좋아요 0 | URL
리뷰 속에서 술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도 술이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개강인데 제 주위 친구들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고기만 배불리게 먹고 나왔거든요 ^^;;
신입생 때는 정말 친한 사람들끼리 같이 밤새도록 술 마셨던 기억이 그리워지네요.



하늘바람 2012-03-03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어떤 책보다 양철님 글이 더 멋지고 좋아요 마음도 편해지고 하지만 이렇게 글을 잘 쓰시면 질투에 눈이 멀지도 몰라요
 
좌백 무협 단편집 - 마음을 베는 칼
좌백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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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장르소설 매니아라는게 소문이 나서 주변에서 정보도 제공해 주고 책이 생기면 가져다 주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부터 장르소설을 들입다 파지는 않았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여느 내 또래가 로맨스 소설을 읽던 고 2 여름방학  무렵 우연히 읽게된 무협지가 시작이었다.

누가 번역한건지 기억 안나는 삼국지를 누런 서류봉투 종이로 표지를 입혀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화장실, 버스를 기다릴때, 길을 오가면서도...) 야금야금 읽었었다.

 

그날도 책에 코를 박고 길을 걷다가 열린 창 너머로 누가 끼얹은 물벼락을 맞았다.

물을 버린 곳은 독서실인듯 했다.

사과를 받아낼 요량에서 였는지, 다른 흑심이 있어서 였는지...쳐들어갔으나,

독서실까지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입구 사무실에서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총무 아저씨에게 제지를 당하였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사무실 책상 위에 잠시 놔 두었다가 다시 들고 나오는 수고를 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볼 일을 보고 책을 마저 읽기 위하여 펼치니,

글쎄, 삼국지가 아니라 지금은 제목도 기억 나지 않는 무협지였는데...

슬쩍 들춰보니 너무 재밌는지라 까만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읽었었다.

 

살짝 옆으로 새서...내가 노트 필기에 일가견이 있다.

선생님의 말씀을 밑줄 쫘악~, 별표 꽁약, 돼지 꼬리 땡땡, 

중요한 내용을 뽑아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이고,

그 사이 유기적 연관성을 엮어 기억하기 쉽게 정리한다.

특히 연표나 족보 만들기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노트를 잃어버리고 당황했었을때,

시험은 코 앞이고 노트를 빌릴 곳은 없고, 누군가 CD아저씨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는 동영상 강의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라,

강의 녹음과 노트를 불법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대여해주는 그런 사람을 CD아저씨라 불렀었다.

(이것도 족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 아마...)

때로는 제대로 된 족보일때도 있었고, 때로는 pseudo족보일때도 있었는데, 불러놓고 보니 내 노트의 복사본이었다.

 

암튼, 그 무협지를 인물관계도 - 족보를 일목요연하게 그려가며 열심히 읽었고,

내 무협지 인물관계도 - 족보에 재미를 붙인 아저씨는 그 후로도 몇 권을 더 빌려주었었는데...

등장인물만 조금 바뀔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에 흥미를 잃어, 그렇게 그렇게 끝이 났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무협지와 여러가지 공통점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는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범상치 않은 숨은 고수나 지존에 대해 떠벌리더라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 없었고,

그래서였는지, 무협 소설이나 무협 영화의 제목도 심심찮게 회자되곤 했었다.

물론 개중에는 무협소설이나 영화 따위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공부만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처럼 김용을 제 2의 참고서 취급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어쭙잖게도 이제 무협소설을 제외한 장르소설을 들입다 판다.

그런 의미에서 좌백이 더 이상 읽을 게 없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적으로 무장하고 실존적 질문들을 던져대는 그의 몇몇 작품은 참 재밌게 읽었다.

그의 단점을 꼽으라면, 장편(아니 대하)소설을 몇가지나 벌여놓고 너무 오래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그의 지병으로 인한 것이 되었든 나름의 사정이었든 간에, 그 기간이라는 것이 독자가 설레이며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넘어섰다.

 

이번 단편 무협 소설집은,

그간 좌백의 무협소설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좌백이라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단편소설집이라는데서 그의 다양한 시도들을 입맛에 맞춰 골라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간 읽은 무협소설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비슷비슷한 줄거리와 내용을 살짝 비트는 것만을 가지고도 그만의 독특한 무엇인가로 만들어내는 묘한 재주가 있다.

 

ㆍㆍㆍㆍㆍㆍ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것도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살인이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는 여태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못 죽이는 게 무슨 고수냐!"

 

옛적에 고수는 칼을 빼면 반드시 베었고, 손을 쓰지 않으면 모르되 한번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거두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손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되는 것이었으니, 무술을 배우며 마음을 같이 닦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혹 모양으로 배우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14~16쪽)

 

화상이 그에게 맡긴 일은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지방의 토호로 온갖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 하나쯤 죽여도 하늘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에서 해방되는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사람이란 의외로 약한 존재라 적당한 곳을 적당히 찔러 주면 죽게 마련이라고 했다. 삶은 고해요, 산다는 것은 악업을 쌓는 일이다. 사람은 다 서로 뜯어먹으며 살고 있으니,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도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고 했다.(31쪽)

좌백이 추구하는건 무조건적인 권선징악이 아니라...다분히 인간중심, 나 중심적인 시각이다.

무술에 고수인 자가 사람 찌르지 못하는가 하면,

빌어먹고 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살기위해서라면...남을 죽여도 괜찮은가 '제법 진지하게' 묻고 있다.

 

"누가 그래? 어떤 놈인지 몰라도 뻥도 세지. 대개의 무림인은 당신이랑 똑같아. 뛰면 숨차고 땀나지. 담장은 원래 못 뛰어넘으라고 만든 거야. 그걸 왜 뛰어넘어? 문으로 안 들어가고 담장을 뛰어넘는 놈이 정신 나간 놈이지."(73쪽)

개념들을 살짝 비트는 언어유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이게 오히려 재미있다.

담은 못 뛰어넘으라고 만든게 맞지만,

문이 아니라 담장을 뛰어넘는 쪽이 조금 더 무림다운 feel인데 말이다.

 

그는 어쩜 이런 언어 유희를 구사하여 생기는 대립, 강조의 개념을 이용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야수는 이렇게 살생을 하지 않지, 당연히. 놈들에게는 그날 먹을 고기만 있으면 되니까. 사람은 달라. 사람이니까 이렇게 살생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람이니까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죽일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거다."(118쪽)

라고 하는가 하면,

"죽을 놈은 죽어야지요. 요즘 열 걸음 걸으면 죽을 놈 한 놈만 봅니까. 걸음걸음 죽을 놈투성이지요. 마음 같아선 그냥 확!"

"죽 놈과 죽 놈은 다르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면 협객이 아니라 살인마야."(134쪽)

 

죽은 칼이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죽이는 칼이라고 읽을 수도 있지...(172쪽)

 

인자무적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했지. 인자는 무적이다. 참 좋은 말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인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인한 사람이란 즉, 좋은 사람이고, 인격자니까 그에게 적대할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지.(173쪽)

그게 아니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네. 그게 내 생각의 훌륭한 점이지.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 즉, 나는 인자무적이라는 말을 '인자는 무적이다.'라는 걸로 해석했네. '인자는 너무나 강해서 이길 자가 없다.'는 뜻으로. 검객이라면, 인자 검객은 무적 검객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174쪽)

'을'과 '일' '은'과 '일' 한 글자의 차이를 가지고 두드러지게,

또는 '인자무적'이라는 한단어를 가지고 해석의 관점에 따라 큰 차이를 만들어내...글 전체를 관통하는 글쓴이의 입장이 되게 한다.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을 베는 칼'이라고 했을 때 '세치 혀'를 떠올렸었다.

사람의 혀는 때론 뾰족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하고,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가 얘기하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읽어낸 마음을 베는 칼이란 다른 어느것도 아닌 '자기 비하 내지는 자기 기만'이었다.

'자존감'과 '자존심' 경계도 잠시 넘나들었다.

 

펜이 되었든 칼이 되었든 간에,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아야 한다는 전제도 물론이지만,

그와 더불어 도구를 ' 벼릴 준비가 되었나?'를 가늠할 수도 있어야 하겠다.

'잘'이란 '과하지도 하지도 않게' 이다.

흔히 애정이 넘쳐 술을 잔에 넘치게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단편 '마음을 베는 칼'의 경우, 겉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닌 자기 내면과의 싸움이다 보니,

스케일이 큰 무협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갈등의 굴곡이 작게 느껴져...좀 맹숭맹숭할 수도 있겠다.

난 비슷한 내용으로 고민해봐서 그런가...제대로 감정이입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르신 자신이 바로 그 칼입니다. 말로, 행동으로 제 마음을 베어 버리셨죠.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궁극적인 검의 경지인 심검에 당했다는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서야 깨달았습니다."(173쪽)

 

ㆍㆍㆍㆍㆍㆍ하지만, 칼이란 뭔가 특별한 게 아닐까. 그릇이나 식칼보다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르다는 의미에서. 크게 보면 무기도 도구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릇과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전문적으로 목숨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 것이다. 무기라는 것은.(260쪽)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침은 어떠한가?

얼마전 에이즈도 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던 구당 김남수의 침사자격증이 허위라는 법원 판결이 있었다.

그렇다면 30여 년동안을 자격증도 없는 사람에게 침을 맞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침은 사람의 몸에 있는 혈(穴)을 찔러서 병을 다스리는 데에 쓰는 의료 기구이지만, 잘못 찌르면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절삭력이나 이런 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기라고 할까, 아니면 공명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ㆍㆍㆍㆍㆍㆍ.칼의 울림이 손을 통해서 척추까지 전해져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 있긴 있더군요. 전통 일본도에는."

울림이 손을 통해서 척추까지 전해져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이런 느낌은, 공명만 된다면 칼 뿐이 아니고 침이나 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요번 좌백의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는 '살기(殺氣)-남을 해치거나 죽이려는 무시무시한 기운'가 아닐까 싶다.

무사라면 누구나 살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그 살기를 적절하게 갈무리하고 살면 고수가 되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하수가 되는거다.

'마음을 베는칼'의 그 어르신은 살기를 잘 갈무리하여 심검을 구사하는 걸로 묘사되고,

또 사도(死刀)와 활검(活劍)에서 친구 간에 '베고 베이고'는 또 어떻고 말이다.

이러니, 언어 유희를 구사하여 생기는 대립, 강조의 개념을 이용하여 주제를 드러내는...역설의 미학을 제대로 사용한다고 혀를 내두를 수 밖에~

 

易擊胡蝶 難擊落葉

"나비를 베기는 쉬우나 낙엽을 베기는 어렵다ㆍㆍㆍㆍㆍㆍ. 무슨 뜻의 글귀입니까?"

ㆍㆍㆍㆍㆍㆍ

"아, 뭐 진짜 벌것 아닌데. 제 개인적인 무언武言이라고나 할까."

무언이라면 무인이 무술에 대해 깨달은 바를 표현하는 말이다.

 

"왜, 나비는 살기를 감추고 가까이 검을 움직여서 꼬드긴 다음 벨 수 있잖아. 하지만 낙엽은 떨어질 때까지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그러다 보면 다른 생각도 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도 해서 아차 하고 떨어지는 순간을 놓쳐 버린다는 거지. 별거 아니야."(272쪽)

 

내가 일상에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듯한 구절이 있어서 옮겨 보자면 이렇다.

 "대체 도사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장선생

 "능력자가 있긴 하지만 그런 분은 잘 안 보이죠. 하지만 허풍쟁이는 셀 수 없이 많고 사기꾼도 그만큼 많다ㆍㆍㆍㆍㆍㆍ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요."

 윤기자

 "그냥 전통 무술이라고 하면 장사가 안 되니까 거기에 자꾸 신비한 색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군 할아버지 때 보필했던 풍백, 우사, 운사가 쓰던 무술이라고 하는 것도 본 일이 있으니까요."

 "재밌네요."

 곽사범.

 "재밌기만 하면 다행인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으니 문제지.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다 보면 뇌에 산소 부족 상태가 일어날 수 있거든. 이게 단전호흡을 하다가 부닥칠 수 있는 부작용의 원인인 건데, 처음에는 환각 상태에 빠지고 심각하면 죽기도 해. 숨 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도 한 번 체험한 일이 있어. 작정하고 산에 올라가서 백일 수련을 하던 때의 일이지.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앉아 단전호흡을 하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수련도 하던 때ㆍㆍㆍㆍㆍㆍ.근데 하루는 수련을 마치고 밤중에 산을 내려오는데 눈앞에 내가 밟아야 할 곳이 밝게 보이는 거라. 흰 페인트로 그려 놓은 것처럼 점점이. 여길 밟고 뛰어서 저기로 갔다가 그 아래로 뛰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했더니 정말 되는게 아니겠어. 평소 두 시간은 걸리던 하산길이 단 30분 만에 끝났지. 단전호흡이 어떤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어. 위험할 때가 더 많아서 탈이지. 그러니 단전호흡을 시도할 때는 책 보고 혼자 하지 말고 요즘 많이 있는 큰 단체들 있잖아, 거기서 여러 사범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아.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전하니까."

ㆍㆍㆍㆍㆍㆍ

"저, 그 하산법은 그다음에 또 시도해 보셨나요?"

ㆍㆍㆍㆍㆍㆍ

"다리 부러졌지."

웃고 말았다.(274~275쪽)

 

암튼,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얘기하라면 '고마움'쯤 되겠다.

기존의 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고마웠다면 고마웠달까?

단편이라서, 그의 다양한 시도들을 입맛에 맞춰 골라 읽을 수 있었던 건 덤 쯤으로 여겨도 좋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 호흡이 긴 대하소설 류를 좋아하지만, 완결이 안됐다고 툴툴거릴 일도 없고 말이다.)

 

그대로라는건 발전하고 나아지지 못했다는 의미니까...도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좌백은 아주 복잡하고 자세한 설명은 독자가 머리 아파 대충 건너 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황당무개함을 자랑으로 하는 무협소설이라지만 여전히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김용의 작품들을 예로 들어 보면...비슷한 설정, 비슷한 내용 뿐 아니라 무술도 같은 무술이 두번 등장하지 않는다.

 

'자객열전'을 생각나게 하는 '신자객열전'이나,

'이백'의 '협객행'에서 출발하는 '협객행'이나,

'레베르테'의 '검의 대가' 모티브에서 출발하는 ' 쿵푸 마스터'따위의,

비슷한 설정, 비슷한 내용에서 출발하여 이런 글을 써낸다는 것은 보통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고,

자신감이 있으니까 이런 모험을 불사하는 것임을 이제 난 알겠지만 말이다.

 

매년 하얗게 골짜기며 나무를 뒤덮는 눈이 내린다고 해서,

작년에 내린 눈과 올해 내린 눈이 같지 않고,

어제 내린 눈과 오늘 내린 눈이 같지 않듯이...

어떤 눈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릴것이고,

어떤 눈은 나뭇가지를 덮어 새순을 돋게할 봄눈일 수도 있다.

 

그가 마음껏 벼리고 펼쳐놓으면, 나는 그의 재주를 신비한 눈으로 감상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그가 잠수한 동안 툴툴거릴게 아니라 같이 아가미를 키워야 하고(이건 아닌가 보다~ --;)

내가 손 놓고 쉴 일이 아니라, 감상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하려나?

아니, 어쩜 그건 눈이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감상은 어쩜 '시간'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잠든 듯했던 여인이 일어나 문밖에 붉은 등을 내걸고 술청 안 곳곳에 있는 초들에도 불을 붙였다.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햇살 대신 바닥을 쓸었다.

 

"바람이라. 그래 바람일 수도 있지.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곡식의 생장이나 사람들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존재가 우리니 바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냥 우리가 한번 쓸고 가면 남은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며 사는 거지. 그게 그들과 우리의 차이였던 것이지."

 

그가 구사하는 이런 미문도 당근 매력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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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08 14:15   좋아요 0 | URL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기 위해 수영 강습 등록하고 왔어요. 몸이란게 신기하죠. 30년 만에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갔는데, 30년 전에 배운 그 영법(자유영)이 단번에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 여름엔 정말 30년 만에 수영복 입고 바닷물에 한 번 들어가 보려는지 어쩌는지.. 흐흐

양철나무꾼 2012-02-14 15:03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전 한때 스킨 스쿠버가 엄청 배우고 싶어서...잠실 롯데월드 수영장을 들락거렸었어요.
거기 한쪽 구석에 스킨 스쿠버 전용 풀이 있잖아요.
열쉬미 노력했는데...폐활량이 넘 작아 중도포기했다는~ㅠ.ㅠ

저, 물이랑은 안 친한데...
잠수한다는 사람 찼으러 다니려고...아가미 키우는거, 이거 하난 잘할 자신 있습니다여~^^

올 여름엔 님 계신 곳으로 수영복 한장만 달랑 들고감 되는 거예요?^^

2012-02-0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2-14 15:13   좋아요 0 | URL

숲노래 2012-02-08 17:45   좋아요 0 | URL
좋은 바람
좋은 마음
좋은 하루
즐거이 읽은 책으로
따사로이 보듬으소서~

양철나무꾼 2012-02-14 15:20   좋아요 0 | URL
된장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저도 뭔가 '좋은'이랑 '~소서'따위를 넣어서 '덧글'을 달아야 할 듯~!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복 많이많이 받으소서~^^

2012-02-08 20:44   좋아요 0 | URL
흠. 눈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 인용문이 마음에 특히 남습니다.
저도 이런 아름다운 게 좋아요..^^

감상은 '시간' 문제. 그렇게 오래도록 기꺼이 기다릴 작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 작가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꾸준히 책을 내 준다는 게 전제된, 그런 기다리는 상호 관계.. 좋아요.^^) - 전 가지지 못했지만요.

아가미를 키워 같이 잠수할까 하는 말에 ㅋㅋ-.

*참, 저 좌백님 알고 있었어요. 책은 안 읽어봤고.. 진산마님의 삼돌이이시죠...ㅎㅎ (인터넷에 대유행한 진산님의 <마님 되는 법> 알고 계시죠?!)

양철나무꾼 2012-02-14 15:40   좋아요 0 | URL
흰 눈에 관한 얘기는 인용문이 아니고 제 글이고요~^^
마지막 인용문, 바람 얘기 좋죠?

전 요즘 바람이나 햇살 따위 경계나 영역 없이...맘껏 오갈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저도 당근 진산 마님, 알고말고요~^^

재는재로 2012-02-08 19:25   좋아요 0 | URL
좌백은 이책말고 대도오 후속작 흑풍도하4권이후 책이 안나와서 4권마지막에서 대도오가 등장하는데 이케 책이 않나오서 책에 유성탄과 일행의 후일담이 나오죠 드라큘과 싸우는 역시 무인은 무로 자신을 나타내고 작가는 글로 자신을 나타내는 요즘의 양판과는 틀린 사람냄새 물씬한 무협의 향기가 그립어요

양철나무꾼 2012-02-14 15:56   좋아요 0 | URL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무협의 향기라...저는 '극악서생'이요~^^
1부는 열쉬미 읽었는데...2부는 못 읽었네요~ㅠ.ㅠ

마녀고양이 2012-02-08 19:44   좋아요 0 | URL
세상에.. 이제는 무협소설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자기한테 두손 두발 다 든다. ^^

하기사 나도 김용 읽느라 얼마나 밤을 지새웠는지, 김용 소설 출간된 것은 몽땅 다 읽었는데.
지금두 영웅문 1부 2부는 샀는데, 금전적 사유로, 3부와 녹정기, 천룡팔부를 못 사고 손가락 빤다눈.
아.. 갑자기 김용 생각난다, 사고 싶다.

양철나무꾼 2012-02-14 15:59   좋아요 0 | URL
내가 전공이 무협이었다고 얘기했을텐데...
부전공이 족보 그리기~^^

김용, 다 갖고 있지롱~
줄 수는 없고, 빌려 줄수는 있어.
비디오도 있는데...안 튼지 한참 돼서 화질은 장담 못한다는~ㅠ.ㅠ

oren 2012-02-08 20:42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인용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부분이 이 글의 제목과 딱 맞아 떨어지는군요..ㅎㅎ
* * *
"나도 젊었을 때는 대문에서 초인종이 울리면 "야, 무슨 일이 있으려나 보다"하고 기대했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의 참모습을 알게 된 뒤로는 똑같은 초인종 소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아, 무슨 골칫거리라도 생겼나?"하고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 쇼펜하우어

양철나무꾼 2012-02-14 16:08   좋아요 0 | URL
oren님을 보면 항상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이,
어떻게 적재적소에 적절한 구절들을 찾아다 넣을 수 있는 것인지, 원~ㅠ.ㅠ

책 한권을 그냥 읽기도 힘든데, 이렇게 읽기는 더더욱 힘들 것 같습니다여~^^

비로그인 2012-02-08 21:39   좋아요 0 | URL
무협지와 학교 때 노트 이야기, 재밌어요. ^^

좌백은 글을 잘 쓰는군요. 아니면 나무꾼 님의 해설을 따라 읽어서 그런가요? 저도 마침 얼마 전에 '말로도 사람을 벨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한 번 베이고 나면, 피해야겠지요? ^^;;

양철나무꾼 2012-02-14 16:31   좋아요 0 | URL
전 좌백 같이 온기가 느껴지는 글이 좋아요.
님과 제가 같이 좋아하는 애니 프루나, 재스퍼 포드 같은 경우...다 따뜻하잖아요.
manci님의 글도 예전엔 그랬는데~~~
요즘 통 볼 수 없으니...이사 잘 하시고 빨리 컴백하세요.

한번 베일때 아프지, 두번째부턴 내성이 생기겠죠?
곪고 덧나지 않는다면 흉터나 옹이는 때론 영광스런 훈장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요.
넘 교과서 같은가요, ㅋ~.

알케 2012-02-09 10:53   좋아요 0 | URL
좌백의 문장 좋죠. 저도 좌백의 다음 작품 기다리다 늙어죽을 기세 -.-;; 제 기준 좌백의 명작은 <대도오> <비적유성탄>.. 흠...제가 생각하는 무협 중단편의 백미는 이재일의 <칠석야>입니다. 언제 기회되시면 이재일의 작품들 장편 <쟁선계> 같은, 보시길 권해요. 트루기..캐릭터..서사구조가 완성도 높죠.

양철나무꾼 2012-02-14 16:38   좋아요 0 | URL
아, 이재일 기억해 둡죠.
전에 '제프리 구루물 유누핑구'때도 엄청 바람만 잡으시고 트랙백 안거시는 바람에 땡스투 없이 CD구입했습니다.
이재일 찾아보니, 칠석야 절판입니다.
트루기, 캐릭터,서사구조 완성도...요번에도 엄청 바람만 잡으시고, 쫌 밉습니다여~ㅠ.ㅠ

쉽싸리 2012-02-09 11:32   좋아요 0 | URL
소싯적에? 무협지 참 많이 읽었는데요. 그때는 만화방에 무협지도 함께 취급했지요. 손바닥 정도 크기에 세로쓰기였던 것 같아요. 와룡강(생?)이라는 필명의 작품을 많이 보았죠.
좌백의 것은 만화로 나왔던 작품 몇 개를 본것 같아요.

양철나무꾼 2012-02-14 16:48   좋아요 0 | URL
전 만화방에는 못가봤지만 손바닥 크기 세로 쓰기 무협지는 알아요.
이쯤이면 쉽싸리 님과 제 소싯적이 같은 때인가요?^^
좌백이 만화로도 나왔군요?
전 글로만 읽어놔서리, ㅋ~.

루쉰P 2012-02-09 12:50   좋아요 0 | URL
루쉰P야, 루쉰P야! 뭐하니? - 죽었니, 살았니? 왠지 제목이 저를 부르는 듯 해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ㅋㅋ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 입니다. 여전히 양철댁님이 보내주신 책을 노려보며 손을 델 까 말 까 하고 고민 중이며, 어둠이 찾아오는 관리사무소 안에서 스스로의 그림자는 어디에 있을까? 앉아서 사색을 하며 살아 있음에도 죽음을 느끼고, 죽음 속에서 삶의 기척을 찾아내고 말리라 결의를 하는 하루 하루의 일상입니다. 음...너무 멋있게 썼네요.

저도 무협지는 정말 많이 읽었죠. 하찮은 자신에 비해 무협 소설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하찮았으나 점점 강해지는 그런 모습을 읽으며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저도 읽지 않고 있지만, 양철댁님의 글을 읽으며 자신을 벗어나려 했던 제 모습을 발견하네요. ^^ 전 걱정 안 하셔도 될 정도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게 교주의 능력이지 않겠습니까! 교주라고 하면 이 정도의 상처는 쪽팔려서라도 버티고 일어나는 법. 무림의 고수는 아니어도 이 정도의 능력은 있는 교주이니 걱정마삼. ㅋㅋㅋ

인생은 무협지처럼 저에게 절세 무공을 전해 주는 사람은 없으나 무협지처럼 스펙터클 하니 이 몸 하나 건사하지 못 하겠습니까? ㅋ 오늘도 하루를 보내며 절찬리 무공 연마 중입니다. ㅋㅋㅋ

양철나무꾼 2012-02-14 16:58   좋아요 0 | URL
ㅎ,ㅎ...역쉬 교주님이셔요.

루쉰P야, 루쉰P야! 뭐하니? - 죽었니, 살았니?
이 다음 버젼도 알고 계시죠?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 쿵짝~!

제겐 절대무공도, 무림의 고수도, 능력 있는 교주도...다 필요없는거 알까요?
치열하게 몸무림치시는 중이어도 괜찮고, 몸무림치시다가 넘어지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그렇게 그 자리를 지켜주고 계신것만으로 족할 따름이니까요~^^

2012-02-09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3-17 14:37   좋아요 0 | URL
좌백은 무엇인가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허무함 가운데 통쾌함이랄까 아니면 통쾌함 속의 허무함이랄까? 좌백의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좌백스러운 작품을 꼽자면 전 천마군림을 꼽습니다. 다만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데 미완으로 머물러 있죠. 구룡쟁패의 시나리오 작가도 했었습니다. 좌백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 회사에서 잘리기를 원했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좌백이 너무 게으른지라, 그의 부인도 그다시 생활비로 구박을 하지 않는 편인지라 경제적인 위기와 배고픔을 겪어야 글을 쓴다는 것이었죠. 아마도 꽤 오랫동안 천마군림은 꽤 오랫동안 7권이 안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