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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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숙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ㆍㆍㆍㆍㆍㆍ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며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ㆍㆍㆍㆍㆍㆍ

 

김선우를 읽기엔 햇살이 너무 좋지만, 그렇다고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눈물이 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집을 아무렇게나 뒤적이다 이 시에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입에 문 것처럼 멍해진다.

시집의 겉날개 안쪽을 뒤져 프로필을 찾아낸다.

1970년생, 나랑 동갑이다.

항상 이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처음 접하는 작가인듯 읽는다는 것이고,

읽다가는 책날개의 프로필을 뒤져 '어, 나와 동갑이네'한다는 것이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돌아다니다가, "아하? 그 김선우...!"하고는 흡족해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글의 첫인상은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신선하고 통통거리는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면, 속 깊고 늙수그레한 영감이 들어앉아 있는것도 같다.

아직까지, 이토록 신선하고 통통한 글을 쓰는 가슴 속에 속 깊은 영감을 한명 들어앉히고 사는 이는 김선우 외엔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렸을때부터 난 좀 이중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어딘가에 속하고 그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면서도, 그 소속감이 주는 편안함을 은근 즐겼던 것도 같다.

같은 이유로...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곁에 손닿는 곳에 두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러고 싶어했다.

혹은, 그러고 싶어 안달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그랬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곁에 없어도,

손 닿는 곳에 없어도...좋아하거나 사랑할 수는 있는 것이다.

햇살이, 바람이, 비가, 달이...그렇듯 어떻게 당신이 내 것일 수 있겠는가?

 

말로는 천만번도 할 수 있다는 그 말을 쉬이 못하는 사람을 내칠 것이 아니라, 귀히 여겨야겠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늘도 다 만 사 랑 하 여 야 겠 다.

 

ㆍㆍㆍㆍㆍㆍ

 네 그럼요 철학이지요, 감꽃 지던 그날도 똑똑히 기억납니다 감나무 아래 동그랗게 싸놓은 똥무더기 위로 튀밥 같은 감꽃이 떨어지고 따스한 바람이 지나고 파리가 지나고 꿀벌이 지나고 나비가 지나는 것을 한참토록 바라보던 날이 있었죠 이건 뭘까 나는 달랑 요 한 몸인데 이것은 어디서 온 걸까 고독하게 턱을 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황금빛 똥을 오래 바라보던ㆍㆍㆍㆍㆍㆍ밥이 변해 똥이 되는게 시간이라는 걸까 밥이 똥이 되는 것처럼 무언가 이 몸 안에서 변해 내가 되는 것을 흔쾌히 저지르는 게 삶이라는 걸까 딱 그런 문장은 아니어도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서운 거겠구나 정신 바싹 차려 살아야겠구나 저의 철학이 거기까지 나아갔는지는 모르겠으나ㆍㆍㆍㆍㆍㆍ

 아 그렇군요 철학으로부터 똥이 온 게 아니라 똥으로부터 철학이 왔다고 하는 쪽이ㆍㆍㆍㆍㆍㆍ아 네에ㆍㆍㆍㆍㆍㆍ

 

                                                                                                                                     '나의 철학' 중에서,

 

이 시는 모호하고 난해하다.

게다가 '걸까', '같습니다', '~겠구나'나 '겠으나' 따위의 '용언의 어미 변화'만을 가지고 모호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김선우의 시엔 유독 오줌, 똥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요번엔 철학과의 접목이다.

전혀 관계가 없지만...개똥철학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밥이 변해 똥이 되기도 하는데, 똥이 변해 밥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밥이 똥으로 변하는게 아니다.

밥이 변해 똥으로 되는 거고, 거기에 필요한게 '시간'이라는 거다.

똥이 되고 내가 되는 거다.

그게 삶이라는 거다.

 

'변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다른 성질로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면,

'되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자연스럽게 이르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밥과 똥에만 국한 시킬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삶으로 까지 확장을 시키게 되고,

그러다보면 요번 시집에서는 그간의 그녀와는 또 다르게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랑 노래를 하는 그녀를,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니 '참 깊더라~'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

차갑고 딱딱한 무쇠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고소한 떡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러포즈를 하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

깊고 진중한가 하면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명랑하기도 하다.

차가운 무쇠 기계도 얼마든지 달콤하고 로맨틱해 질 수 있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촌스럽지만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가래떡처럼 뜨끈하다.

 

이 시를 읽다보면,

나도 마냥 말랑말랑하고 경쾌하여져서...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한번 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달리는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만나지든 그렇지 않든 다 괜찮다...하고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시는 내게 또 하나를 가르쳐준다.

현재를, 순간을, 오늘을 사는 삶이다.

오늘을 최선을 다하여 살았을때,

뜻밖의 선물처럼,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리고 볼 일이다.

 

꽃, 이라는 유심론

 

  눈앞에 열명의 사람이 잘빠진 몸매로 웃고 있어도

  백명의 사람이 반짝이는 선물을 펼쳐 보여도

  내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예전에 꽃이 예쁘게 핀 돌담길을 지날 일이 있었다.

이내 비가 내리길래 예쁘게 핀 꽃이 지겠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그랬더니, 누군가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쁘게 꽃 피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꽃잎을 다 떨구더라도 열매 맺을 수도 있음을 알게해준 비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비를 탓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이 시는 좀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번개치고 천둥소리 들리기까지의 찰라를, 나와 당신 사이의 간극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내가 당신이 아닌 이상 간극은 어떤 의미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을테고,

간극이 찰라에 가까울수록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롤랑바르트가 어떤 의미로 말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아프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도 알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외로움일 수도 있지만, 호젓함이거나 그리움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찌되었건 나의 주관적 견해일뿐...

시의 해석은 각자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 눈물인듯 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더라도 너른 벌판에 우뚝 선 무엇하나 없어 번개를 맞을 일조차 없는 詩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사람의, 익명의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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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3-22 18:39   좋아요 0 | URL
언제나 늘 그렇지만 양철나무꾼님 언니 덕분에 시를 읽어요 요즘
시만 주구장창 읽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 였는지 가물가물한 요즘.
서늘서늘한 날씨에 그런데 참 와닿는 시였네요

프레이야 2012-03-22 19:49   좋아요 0 | URL
꽃이/지는/이유
헉.. 대단한데요, 김선우 시인.
양철나무꾼님이 준 별 다섯에 바로 장바구니 직행이에요^^

잘잘라 2012-03-22 21:03   좋아요 0 | URL
시로 읽기엔 참 좋아요^^
같이 살기엔 속 터지는 날이 많을것 같구요. 히히
글쓰는 사람하고 살자면 먼저 도를 닦아야 할까요?
비에 마음이 젖어드는 밤이예요.

2012-03-22 21:42   좋아요 0 | URL
1. 흠. 모든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사람도 마음도 사물도.. 이 세계 모두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블레이크 시였나, 하여간 외국 싯구인데요. (기쁨이란 가질 수 없는 것,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 기쁨을 가지려 하지 말고 다만)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자"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인용했던 책이 예전 집에 있고 여기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좋았는데..

여튼,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았어요. 쉬운 건 아니지만.. ^^

2. 마지막 시가 제일 좋아요. 전.
그리고 '번개 친후 천둥치기까지의 시간'을 '당신과 나의 간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양철님의 견해도 멋있어요~>.>

2012-03-23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5 12:35   좋아요 0 | URL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에서 가슴이 서너번 쿵쿵쿵.
멍하니 두세번 다시 읽고, 또 읽고, 끊어진 길 보인다 라는 문구를 되내이고 되내이고.

나는...... 이런게 슬퍼! 그래서 차라리 천둥 번개가 친 다음에, 아무도 없어서 편안해, 도망칠 수 있어서....
완전 실존적 한계다... 아흑.

같은하늘 2012-03-28 01:09   좋아요 0 | URL
이 밤에 눈에, 머리에, 가슴에 착착 안기는 시들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