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못갖춘마디 문예중앙시선 15
강연호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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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휴일이라고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찜질방을 가자는 남편의 말에 평상시처럼 가죽재킷을 팔에 꿰고 줄레줄레 따라나서니 대책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다.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의미를 깨달았는데,

다들 반팔 반바지 차림인 것이 계절은 어느새 봄을 건너 뛰어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딴 사람들이 보면 적어도 한 계절 정도는 잤는 줄 알겠다, 그치?"

하는 내 물음에서 여름에 대한 기대감을 눈치챘는지,

"모터싸이클족 보면 사시사철 가죽으로 쫙 빼고 다니던데...너도 이 참에 모터싸이클만 하나 장만하면 되는데 말야, ㅋ~."

하며 낄낄거린다.

암튼, 난 기온과 비례해서 액티브해지고 기분도 업 되는 모양이다.

이 시집을 얼마전에 선물 받긴 했는데, 누구인지 그 진가를 몰랐다.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이 뒷표지에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표현한게 눈에 띄었으니 망정이지,

저걸 못봤다면 천년만년 먼지더미 속에 덩치로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끙~--;

근데, 이영광의 저 표현은 틀렸다, 버릴 말을 찾기 어려운게 아니라 버릴 말이 없~다!

 

그의 약력을 찾아보니,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비단길』(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2012)가 있다. 2012년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라고 되어있다.

 

벌써 여러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데 왜 모르고 있다가 이제 와 이렇게 수선스러운 거냐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뭐~ㅠ.ㅠ

햇살이 너무 너무 좋아서라고 해두자.

시집도, 시인도 넘 넘 넘 맘에 든다.

시인의 표현을 빌어, 지난 겨울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갖고 계신 알라딘 서재 여러분들~!

"이 봄날 쓸쓸한듯 다정하고 다정한듯 쓸쓸한 시집 한 권 읽어 보세요, 꼭이요~."

하고 소문내고 싶을 따름이다.

 

이 시집은,

시란 반짝반짝 빛나는 감수성의 과잉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빼어나고 융슝함으로 이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며,

감성이 절제될 때야말로 제대로된 시가 나오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에게라면,

수선내지 않는 소박한 자연스러움으로,

각기 상반되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것이, 두루두루 손색이 없다.

 

제목 <기억의 못갖춘마디>만 해도 그렇다.

시집 머리의 '시인의 말' 자체로 하나의 詩이지만, 시가 아니라 '시인의 말'이란다.

음악으로 치면, 못갖춘마디쯤으로 시작하는 꼴이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투이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외등처럼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자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마다 불 꺼진 방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대여,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를 돌아나간 아코디언풍의 바람을 기억하는지

 

나는 나를 다독거린다

 

그의 이 시집을 읽다보면 일상의 소박한 삶과 언어들이 모여 詩를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오래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한걸로 미루어...생각없이 대충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고, 그런 나를 대견해 할 수 있다는 거...그런 나를 위로하고 다독거릴 수 있다는 거...참 멋진 일인 것 같다.

이 못갖춘마디(시인의 말)는 3부의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와 어울려 비로소 하나의 갖춘마디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몸살

 

 

 

뜨겁고 춥다, 이 모순의 육체는

그럭저럭 매력적이다

약 기운 때문인지 지면에서 얼마쯤

붕 떠 있는 느낌,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듯 아슬아슬한 공중부양 같다

들뜬 청춘 같다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

연초록은 원래 비릿하고

청춘은 불량을 무기로 내세운다.

이빨 사이로 찍찍 침을 내뱉거나

면도날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는

 

 

그 시절 지나면 몸살이란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팍 불이 나간

백열등 같은 것, 잠시 미련처럼 빛살이 어려

알전구를 귀에 대고 흔들어본다

이 어둠을 어찌 돌이킬래?

누군가 속삭인다

끊긴 필라멘트마냥 파르르 오한이 온다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량의 시절인 듯

연탄불처럼 다시 층층 포개지고 싶다

포개져 마침 화르륵 타오르는 체위이고 싶다

나중에는 부엌칼로 갈라야 하더라도

가르다가, 앗 뜨거라 불투성이로 깨지더라도

 

 

몸살이란, 그 기억에 살이 낀 것이다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직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 참 고마웠다.

뜨겁고 추운, 추워서 뜨거웠던, 어두워서 환했던...기억을 몸살, 백열등, 연탄불과 연결시켜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라고 한다.

아~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어쩔 것인가 말이다.

지면에서 약간 붕 뜬 느낌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들 뜬 청춘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아니면, 몸살기 있어 열 나는  빨갛게 달뜬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건강한 슬픔' 부분)

건강한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것은 어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울되 거기 침몰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위안과 힘을 얻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그것보다 더 '건강한 슬픔'은 없지 싶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건넬 수 없어 혼자 깊숙이 운 나에 비해,

나에게 스스럼 없이 울음을 건낸 그녀는 훨씬 '건강한 슬픔'을 가진 것이다.

 

누군가의 건강을 염원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울지마라, 울지마라' 백번의 말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어깨를 기대기 좋도록 비워둘 것이다.

 

단풍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 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이 시도 참 좋다.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지만,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제목이 단풍이라니...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감추는 것은 비겁한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쩜 혼자 견뎌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라는 걸 보면...말이다.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바닥' 부분)

어찌보면 이 시의 제목은 '바닥'이 아니라 '규정'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바닥일때는 더는 불안할 게 없다.

더 이상 아래로 추락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앉은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모르겠을 때의 판별법은,

그냥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그게 편안해지면 그곳이 바닥인 게다.

 

울음

 

벚꽃이 만개하면서

그는 이제 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우는지 잊는다

그는 언제나 그를 위해 울었을 뿐

누군가를 위해 울어준 적이 없었으므로

저 벚꽃의 만개를 울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아니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킨다는 것

저기 聖 벚꽃들 울음을 감춘다

그러나 어금니 깨물 때마다

몇 무더기씩 흩날리는 꽃잎들을

그가 처연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으리라

젊음을 탕진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은 지금

어디선가 장구 소리 희미하게 들려온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화무십일홍이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과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키는 것 사이에서 벚꽃은 피고 진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었다는 거고,

이 시에서 '잊음'을 '젊음의 탕진', 또는 '늙음'과 동격으로 놓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감정 따윈 배제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지만,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는 그 누군가를 배려하고, 그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이 聖스러운 것이리라...

사람의 그늘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엇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간ㅁ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었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잠깐 시인이 여자가 아닌가 착각을 했었다.

적어도 시인은 아니어도 작중화자는 여자여야 하겠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쓸어넘기듯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다'는 부분에서 '레터스 투 줄리엣'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했던 그늘의 길이, 또는 깊이라는 것은...사람의 마음 속 쯤 되려나?

어쩜,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등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일들을

나이가 들면...되짚고 더듬을 수 있게 되나보다.

나도 자꾸 되짚고 더듬고 싶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머리를 내맡긴다는 것은, 빗질을 내맡긴다는 것은 순종, 또는 순응...

아니다, 마음을 내맡겨 위로를 받는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방울토마토 기르기

 

화분에 방울토마토를 기른다

화분에 기르는 방울토마토는 식용이 아니다

그거야 마트에 가면 상자째 살 수 있다

차라리 방울이 딸랑 울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볕도 좋아야 하고 물도 자주 줘야 하지만

곁가지도 따주고 꽃도 솎아내란다

 

하지만 저 가엾은 연초록을 어떻게 잘라낼까

나는 시인이므로 시인답게 머뭇거린다

전문가는 혀를 착나 입을 삐쭉거리는 대신

지지대를 고쳐 세우며 가르쳐준다

시인의 마음으로 기르는 식물은 되는 게 없지요

한 잎도 한 가지도 솎아내지 못해 벌벌 떨면

결국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져요

 

그는 모질게 곁눈을 따낸다

나는 모질지 못해 다시 연민을 꿍얼거린다

자연은 그냥 둬도 즈이들끼리 잘만 어울리던데요

전문가는 또 심드렁하게 나를 때린다

사람의 손 바깥에서야 자연 아닌 게 있나요

품안에 거둔 만큼은 손길 가는 게

최소한의 예의지요

 

아직 여물지도 않은 방울토마토의 방울들이

요란하게 내 머리를 울린다, 진짜 모진 것은 무엇일까

'방울토마토 기르기'  이 시는 '딸랑'거리며 내 머릿속에 연신 경종을 울렸다.

'자연'과 '모질다'는 것과 '손길'과 '최소한의 예의'의 상관 관계에서 남모를 고민을 좀 하였다.

그러다가 잎도, 가지도,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지는 것이 바로 모질지 못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연민이나 동정과 다름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왜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어린왕자'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이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게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그냥 사랑하겠다는 무모하고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사람이 있다.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자기 자신도 상처 입을 수 있다.

진짜 모진 건 그런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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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17 00:1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중에늠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이 있는데
시인은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합니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덕분이라더군요 ㅠ.ㅠ
저 역시 시인의 친구이지만 시를 잘 읽지 않습니다.
시인을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의 일원인 셈이지요 ㅠ.ㅠ

그나마 대학 때 읽은 수십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 후로는 시집을 사지 않았습니다.
반성 많이 됩니다. ㅠ.ㅠ

2012-04-1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4-16 21:50   좋아요 0 | URL
좋은 시를 덕분에 많이 읽네요
방울 토마토 기르기가 가장 맘에 드네요.
제목이 참 독특하면서 와닿는 시집이군요

숲노래 2012-04-17 08:19   좋아요 0 | URL
사랑하려는 마음이라면
언제나 서로를 따사로이 덥히는
좋은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나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