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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평점 :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The meaning of politics is freedom)" 책의 표지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이책의 핵심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유를 뜻하며 정치가 없다면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 탐구는 그가 밝혀야할 수수께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그녀의 지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난 겨울,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1'을 읽으며 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진우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가의'가 나의 손에 잡혔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2'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갖았다. 그리고 그 디딤돌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좀비를 소재로한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인다. 총이나 칼로 혹은 주먹으로 그들을 물리치려하지만,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덤벼든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의 행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31쪽)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좀비들을 보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가스실로 순순히 걸어들아가는 유대인과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차를 몰고 소련 국경을 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좀비를 실제 목적한 것 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도 좀비들이 있었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 폭탄이 되어 출격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도 무서운 좀비들의 행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는가?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있다. 탐욕에 눈이멀어 대한민국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고가는 선장을 뽑은 좀비들이 있다. '나라 팔아 먹는 이완용이 출마한다고 해더라도 우리는 XXXX을 뽑겠다.'는 어리석은 아줌마의 인터뷰를 보며 우리 사회의 좀비를 보았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좀비가 있다. 정치에 관해서 대화를 하려하면 '모른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하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좀비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탄생성과 다원성이 전제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좀비들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은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9쪽)
선거에 관심 없고, 현실에 떨어져 사는 것을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는 좀비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악을 불러오면서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또는 고민기 싫어 무조건 XXXX를 뽑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줄 악마에게 한표를 행사한다.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알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71쪽)
세월호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으며 죽어갔던 단원고 학생들, 즐거운 저녁을 보내려 이태원에 갔다 압사된 청년들!! 그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폭력을 조장하며 자신의 똘마니를 시켜 약자를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좀비 똘마니가 손에 피를 뭍혔지만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며 처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진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단호한 이 말이 떠오른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너무나도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좀비들로 가득찬 대한민국호에서 좀비를 시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58쪽)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 처럼, 좀비를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있다. 탐욕과 부정 부패가 넘쳐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면 암담한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좀비를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깨우고, 암담한 현실을 밝게 비추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충돌이 두려워 절대적 진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곧 정치를 떠나는 일이다."(121쪽)
한나 아렌트는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고 조정할 줄 알아야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에 방송에 수 많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했다. 그러나,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노무현을 만만하게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이다. 강력한 리더가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며 독재로의 회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정치는 많은 사람이 지닌 차이와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공간을 전제한다.(111쪽)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공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권위적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늘어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일베'들이 늘어났다. 독재를 찬양하고 친일을 미화하며 독립운동가 가족을 비하하는 악마의 졸개들이 늘어났다.
"다원성이 버거울수록 여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만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의 유혹이다."(127족)
친일을 미화하는 악마의 졸개들도 다원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해야할까? 5.18을 모독하는 인간 말종들의 의견마져도 존중해야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나치를 미화하고 히틀러를 찬양하며 처벌받는다. 홍세화가 말했듯이, 똘레랑스가 허용되는 정치의 장, 자체를 뒤흔드는 무리까지 똘레랑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좀비들 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쫓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
"'뿌리 뽑힌 대중'은 전체주의 운동의 자원이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26쪽)
'뿌리 뽑힌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뿌리 내린 대중에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연대를 해야한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은 제2의 히틀러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길러야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일 깨달아야한다. 좀비 이웃과 대화하며 그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불의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
"어떤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의 감소는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이기" 때문이다."(175쪽)
검찰 폭력에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조국을 짖밟는 무리에게 우리는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유로운 공간과 다원성을 전제로하는 정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든다. 과연 우리의 판단은 정확한가? 소수 엘리트의 세뇌에 우리가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화두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책의 제3부 '판단'을 쓰려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 인용문을 쓰고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판단'의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롤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이진우 교수는 그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그녀의 이전 저서를 토대로 '판단'문제를 추론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찰자'를 강조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섯 전체를 조망해야한다. 대중에 매몰되지 않는 관찰자이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 다원성과 자유의 공간이 전제되는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정도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댓가 없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책장을 덮으려할 때 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222쪽)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어느 거리의 철학자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투표할 필요를 부정하는 괴변까지 '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짖어댄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한 노예가 될 뿐이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투표해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관찰자와 참여자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 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자 이면서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