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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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나에게 커다란 지적 충격을 주었다. 그후,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극한의 경험', '대담한 작전', '초예측'이라는 책을 숨가쁘게 읽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를 저술한 이후의 책들은 '사피엔스' 만큼은 아니지만, 지적 충격과 깊이 있는 사유를 하도록 안내했다. 반면, '사피엔스' 이전의 책들은 단순한 역사서 수준의 책들이었다. 특히, '극한의 경험'과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은 전쟁사와 관련된 사유의 변화에 촛점을 맞춘 책들이다. 이 두 책은 내가 하라리에게서 기대했던 종류의 책이 아니라 실망을 했다. 그럼에도, '사피엔스'라는 대작을 쓰기 까지 유발 하라리의 지적 성장의 궤적을 추적해보고 싶은 욕망에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1. 기존의 고정 관념에 도전하다.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에서 근대의 태동을 보려했던 브르크하르트의 견해는 타당할까? 유발 하리라가 던진 질문이다. 하라리는 일관되게 브르크하르트의 견해에 반론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서 유발 하라리는 20세기 전쟁회고록과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을 비교하고, 중세시대 기사이야기와도 비교한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전쟁회고록 만을 연구해서 전쟁회고록이 프랑스의 독특성임을 강조하는 프랑스 역사학자의 견해를 뛰어넘어 프랑스 이외의 유럽지역은 물론이고 이슬람지역의 전쟁회고록까지 살핀다. 역사라는 개미의 앞다리만 연구하는 한국이나 일본의 연구자에 비해서, 하라리는 한세대 전의 개미와 이후 세대의 개미를 현재의 개미와 비교하여 현재 개미의 독특성을 발견한다. 폭넓은 책을 읽고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속에서 오늘을 바라보려는 유발 할라리의 역사인식이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속에 엿보인다.

  폭넓은 독서와 사유는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의 특이점을 핏셋으로 집어내는 듯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충격적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원정이 있을 때마다 여러나라에서 끌어온 다양한 용병부대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군대가 있었을 뿐이라, 군대의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서로 다른 지휘관에게 충성했다."-115쪽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 역사를 이해한다. 군대를 갔다온 나도 한국군대의 모습을 토대로 서양의 군대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류를 만들어냈다. 국가를 위해서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지휘체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톱니바퀴와 같은 조직을 상상했다면 그것은 분명 르네상스 전쟁사를 오독한 것이다. '국민군대'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프랑스 혁명이후, 나폴레옹 군대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국민 군대'라는 개념이 만들어지지 않은 르네상스 시기의 군대는 전쟁을 직업으로하는 용병들의 연합체였다. 그들에게는 왕조-민족에 대한 충성심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이때의 명예는 왕조-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였다. 그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존재는 귀족들이었다. 평민은 명예를 얻을 수 없는 존재였기에 때로는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혼자서 여러명의 상인을 죽인 군인이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의 눈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군인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폭력배와 다를바 없어보인다.

 

2. 역사서술의 변화

  "중세 군주정의 정치적 분열과 일화 중심적인 중세 연대기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갔듯이, 군주정이 통일된 국가로 거듭나는 변화와 잡동사니 일화들을 늘어놓은 연대기가 긴밀한 인과관계를 따르는 역사로 통합된 과정 역시 서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진행되었다."-316쪽

 

  "정신세계의 변화는 현실세계의 변화로 이어지고, 현실세계의 변화는 정신세계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말을 대학시절 교수님에게 들었다. 사상사와 정치사가 긴밀히 관계를 맺으며 변화해 왔듯이, 일화 중심적인 중세 연대기가 긴밀한 인과관계를 따르는 역사로 통합된 것도 역사서술이 현실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브르크하르트를 비롯한 기존의 역사가는 중세의 신중심의 세계에서 근대 개인중심의 세계로 나아가는 커다란 시대변화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과도기인 르네상스 시기의 회고록은 중세의 집단적 세계에서 개인을 찾아가는 관념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역사를 연구했다. 반면, 유발 하라리는 중세 군주정의 정치적 분열에서 군주정이 통일된 국가로 거듭나는 변화속에서 역사서술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선입견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진실을 바라볼 수 없음을 유발 하라리는 말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에 대한 지적 사랑이 그의 책을 읽도록 나를 이끈다. 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싶은 나의 욕망은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유발하라리의 명작을 모두 읽는다고 해서 쉽게 그의 통찰력을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다른 책을 찾아서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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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 -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9
박찬승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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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친일파의 후손이 정계, 재계, 학계에 있으면서 친일의 성채를 견고히 쌓고 있다. 낡은 옷을 입고, 누추한 집에서 사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생각하며, '한국독립운동사'를 펼쳐들었다.

 

1. 처음 알게된 5.30 만주 봉기

  1930년 두도구 방면에서 한인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조선인 민회 사무실과 일본 영사관 분관이 습격당했으며, 용정에서는 전화선을 차단하고 발전소를 습격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출장소에 폭탄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간도영사관 경찰에 39명이 체포되었다. 5.30봉기 실패 이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에서 12월 까지 봉기가 계속되었다. 일본경찰이 2천여 명을 체포하여 4백명을 예심에 넘겼고,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중 12명이 옥사하고 22명이 사형을 언도 받았다. 참으로 격렬한 민중봉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봉기를 이책을 통해서 처음알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강렬한 항일운동이라서 교과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5.30 만주 봉기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했다면 좌우익을 가릴 필요가 없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아직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아직도 한국사회의 갈길은 멀다는 생각에 쓸쓸함을 느낀다.

 

2.  누락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박찬승이라는 저명한 역사학자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정리한다기에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박찬승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장 강렬한 항일 운동이 무장투쟁을 누락시켰다. 그중에서도 1930년대 남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를 호령했던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을 누락시켰다. 대전자령 전투는 제2의 청산리대첩이라 불리는 유명한 전투이다. 이를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박찬승 교수는 누락시켰다.

  박찬승 교수가 일부러 누락시켰다기 보다는 그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도 항일 무장투쟁사에 대한 평가가 낮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추후라도 이부분은 반드시 보충해주길 기대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정리하고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한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박찬승교수 조차도 한국 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모른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추지 한다. '암살'이라는 영화의 한배우는 "우리 잊으면 안돼"라고 외쳤다. 만주벌판에서 쓸쓸히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라고... 우리는 기억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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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늑대 - 바이킹의 역사
라스 브라운워스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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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공원에 가서 필수 코스가 '바이킹'을 타는 것이다. 바이킹 타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중세시대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바이킹을 생각해본다. '바다의 늑대'라고 부리었던 그들의 후손들은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한국의 진보인사들이 부러워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의 선조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인자한이들이 아니었다. '바다의 늑대'라는 책을 읽으며, 그들이 늑대에서 모범 시민으로 탈바꿈한 이유를 알고 싶어 이책을 펼쳐들었다.

 

  바이킹들은 지금의 프랑스 파리를 비롯해서, 아일랜드, 잉글랜드, 멀리는 러시아 지역과 시칠리아 섬까지 약탈을 행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금은 보화가 없을 때에는 러시아지역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팔기까지 했다. 때로는 크리스트교에 귀의하겠다고 속여서 수도원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동양의 왜구가 생각난다. 바이킹과 왜구는 남의 것을 빼앗고 살육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내장을 꺼내고 그안에 쌀을 넣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기도했다는 점은 바이킹과 정확히 일치했다. 바이킹이 러시아와 노르망디, 아일랜드, 잉글랜드에서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는 점은 동양의 왜구와 달랐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점이 비슷하다. 척박한 땅을 가진 자들이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한다는 점이 가장 유사하다. 문명화되지 못하고 야만화된 그들이 영웅시되고 미화될 껀덕지는 없다.

  바이킹이 탁월한 전투력으로 잉글랜드를 공략한 점이 그들의 성공요인이기도 했지만, 토박이 잉글랜드 지배층의 무능함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바이킹의 군사작전은 쉽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잉글랜드 정착 바이킹들이 사나운 북방에서 이주해오는 바이킹왕보다 남방의 온유한 왕에 끌렸다는 점이다. '말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위에서 천하를 다스릴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무력이 강한자가 승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문화의 힘이 강한자가 승리한다. 바이킹이 일시적 승리에서 벗어나 장기적 승리를 일궈내기 위해서는 그들은 문명화되어야만했다.

  문명화!! 서양에서 문명화의 척도는 '크리스트교의 수용'이다. 덴마크의 하랄 블로탄, 노르웨이의 호콘, 키예프의 블라디미르가 크리스트교의 힘을 깨달았다. 크리스트교는 바이킹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신적 중심이었고 문명국으로가는 입구였다.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했던 역할을 크리스트교가 바이킹에게 했다.

 

  바이킹의 문명화는 바이킹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목이 쓰러지면, 고목을 영양분삼아 새로운 줄기가 자라나듯이 바이킹 문화의 종말은 새로운 스칸디나비아 문명의 시작이었다.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길원하며, 구속받기 싫어하는 바이킹의 문화는 북유럽에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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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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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학자이다. '총 균 쇠', '문명의 붕괴'를 읽으며, 그의 탁월한 식견과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를 활용해서 전개하는 논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 감동을 다시한번 느끼고 싶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를 펼쳐들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나에게 어떠한 통찰을 선사할까?

 

1. 서구 우월주의자들에게 하이킥을 날리다.

  서구학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서구 우월주의에 빠져 제3세계를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제3세계 국가들은 왜? 가난한가?라는 주제이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는 부패정도, 재산권 보호, 법치, 정부의 효율성 등이 잘 갖추어진 나라는 발전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 선진국은 '사회적 자본'이 높다고 주장한다. 사회 내부에 신뢰관계가 쌓이고 계약관계를 충실히 지키는 사회적 자본이 가난한 국가일수록 낮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낮을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부패나 정부의 효율성, 법치가 경제적 수준이 낮을 때는 무척 낮았다. 지금도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시민들의 인식도 향상되어 부패를 비롯한 정부의 효율성 등이 많이 높아졌다. 서구학자들의 결과론적 연구는 지금의 결과가 서구의 성공을 이미 이전부터 결정해 놓았고, 제3세계는 이전부터 가난할 것을 신이 결정해 놓았다는 오만함을 풍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달랐다. 좋은 제도만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해석을 흔히 종속변수라 일컬어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가르는 독립변수를 찾아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가르는 독립변수는 무엇일까?

 

  "중앙정부의 역사가 긴 국가의 경제 성장이 요즘에도 더 빠르다는 뜻입니다.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기 때문인지 풍부한 천연자원을 지닌 국가들 중에도 경제 성장이 더딘 국가가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랜 중앙정부의 역사를 지닌 국가는 가난한게 현대 세계에 진입했더라도,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은 국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는 특징을 보여주었습니다."-67쪽

 

  잘갖추어진 정부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아니다. 농업을 발전시키고, 오랜 역사적 축적이 이뤄져야 효율적인 국가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 국가의 역사가 1백년도 되지 않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단숨이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리라는 것은 갓난아기에게 뛰어다니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하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일제 식민지배덕분에 한국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을 한다. 만약 다이아몬드 교수라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할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과 같은 나라들은 몇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수천년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기에 효율적인 국가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러했기에 가난한 상태로 현대 세계에 진입했지만,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서구 우월주자들과 일제를 추종하는 뉴라이트계열의 학자들에게 강력한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2. '다행히도' 자원이 부족한 나라 대한민국(?)

  중학교 사회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열대지역은 먹을 것이 풍부하다며, "배고프면 원숭이에게 돌을 던지면, 원숭이가 나무위로 올라가서 바나나를 집어던진다. 그러면 바나나를 집어 먹으면돼"라고 말했다. 먹을 것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게을러졌고, 그래서 지금도 가난하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그때는 진실로 믿었었다. 그들의 게으름 때문에 그들은 가난하다고....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열대기후 지역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상당히 척박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 빙하의 영향이 없으며, 비가 자주와서 토양이 씻겨나가고, 병원균이 많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열대기후 지역 사람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평균 연령이 41세이니 경제발전을 이뤄기에는 너무도 힘든 상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천연자원의 저주'(curse of natural resources)라는 덧에 걸려있다. "황금과 석유, 혹은 값비싼 열대 활엽수처럼 유용한 천연자원의 은덕을 입은 나라"가 많지만, 이러한 자원을 둘러싸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며, 심지어는 내전을 일으키기한다. 여기에 강대국이 개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부족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이익을 취해나간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에는 다이아몬드가 나오지 않는다는 농담을 다이아몬드 교수는 던진다.

  부모가 물려준 것이 무엇이냐며 부모를 잘만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삼성가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아니면 건물주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 놀수 있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종종있다. 그러나, 이 또한 '천연자원의 저주'가 아닐까? 소위 대기업의 자녀와 유명 정치인의 자녀들이 음주운전과 마약으로 메스컴을 달구고있다. 그들은 풍족한 생활에 취해서 '천연자원의 저주'라는 덧에 걸려버린 셈이다. 반면, 척박한 땅을 물려받은 우리들은 열심히 오늘을 살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덕분에 보다 나은 '나'와 매일 마주할 수 있다. 그래, '옥토'를 물려받지 못했다고 한탄하기 보다는, '황무지'를 무려받았기에 행운이라는 진리를 기억하자.

 

3. 중국과 아프리카의 미래는?

  중국이 G2 국가로 발돋움하며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앞으로 중국이 강대국으로 우뚝설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심각한 환경오염과 요동치는 중국 정치, 즉 독재정치를 보며 중국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고 나서, 달에 중국인을 보내고, 빠르게 IT산업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을 많은 중국학자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중국은 역사적으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유일하게 고대문명이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발전하고 있는 나라이다. 지난 역사에서 중국이 세계 최고를 달리지 않았을 때는 지난 백여년이라는 기간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중국이라는 용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강대국으로 우뚝설 수 있지 않을까?

  미래사회의 경제 중심지는 아프리카가 될 것이라 예측하는 학자들이 있다. 인구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어린이와 젊은이의 숫자가 앞도적으로 많기에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교수의 관점은 다르다. 척박한 땅, 많은 병원균, 바다에 접하지 않은 수많은 내륙국가 등등의 요인으로 인해서 미래가 밝지는 않다고 진단한다.

  그럼,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까? 보건과 사회 간접자본에 힘을 쓴다면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다이아몬드 교수는 말한다. 또한 선진국의 책임도 강조한다. 1000만명의 르완다 보다 인구 3억명의 미국, 8억 명의 유럽이 자원 소비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이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식민지를 약탈하면서 발전했다. 지금도 지구의 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다. 강대국의 '노빌레스 오빌리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빈곤에 관심을 갖고 지구 온난화 예방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짧고 쉬운 책이다. 부담없이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도올 김용옥선생이 "책으로 볼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직접 강의를 들으니 너무 이해가 쉬웠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석학을 만나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책으로 읽는다면 난해한 용어와 개념으로 인해서 너무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는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기에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혜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석학과의 만남이 MBA 과정보다 낫다라고 워런 버핏이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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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2
정혜경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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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8.15가 되면,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우리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각종 특집 방송을 방영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방송은 드물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통치에 관한 서적을 찾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심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를 자세히 기록한 책들이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시장의 논리'가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승리의 역사는 기억하려 해도 패배의 역사는 기억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고, 그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책을 펼쳐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영화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20178'군함도'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기대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흥행을 가져오지 못했다. 매스컴과 소설로 대중에게 많이 소개된 '군함도'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 정혜경은 '사실과 다르다.'라는 관객의 반응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일본당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조선민중'의 슬픈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일본 당국의 하수인인 조선인들이 동포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한다.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 소년 광부도 존재했으며, 조선인 하수인이 동포를 착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이라는 구도가 아닌,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구도가 불편했다. ? 관객들은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대립구조가 불편했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학교에서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의 대립구조로 일제강점기를 배웠다. 그러나 일본인이 조선을 원활히 식민통치하기 위해서는 협조자가 필요했다. 그 협조자를 우리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1910년대 일본 헌병 밑에는 2명의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있었다. 소수의 헌병으로 다수의 조선인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 헌병 보조원'의 협조 덕분이다. 1920년대부터는 소위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친일파를 육성해서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는 민족분열 통치를 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 민족말살통치로 인해서 일제에 굴복하는 친일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와 있듯이, 나치가 유대인을 홀로코스트에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 위원회'의 협조 덕분이다. 한나 아렌트가 금기시 되었던 '유대인 위원회'의 나치 협조 행위를 책으로 발표하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금서로 정한 것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일제에 협조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마 같은 일본인과 선량한 조선인의 대립구도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영화 '군함도'는 너무도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영화 '군함도'는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저자 정혜경은 우리가 '군함도'에 열중한 나머지 '조선 침략의 정신적 근거지 '쇼카손주쿠' 등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함도'가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 장소라면,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싹이 튼 곳이요.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의 요람이었다. '쇼카손주쿠'를 세운 요시다 쇼인이 묻힌 신사는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가 되었으며, '쇼카손주쿠'를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눈에 보이는 강제 동원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가 비극의 씨앗이라면, 눈에 보이는 '군함도'의 강제동원 역사는 비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씨앗과 비극의 열매 모두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 불편한 진실, 우리가 마주하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며 '진실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2. '진실의 무게'를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본 극우파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포승줄로 꽁꽁 묶여간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걸어갔는데 무슨 강제냐"라고 주장한다. 소년 지원병에 떨어져 울었던 소년도 있었다. 징병 혹은 지원병으로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을 위한 환송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소위 '일베'와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가슴이 탁 막혀온다. 그러나 막상 논리적인 반론을 해주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야 "강제"라는 단어를 쓸수 있다는 그들의 일차원적 주장에 저자 정혜경은 "강제성이란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 사기, 법적 강제에 의한 동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일 학계의 결론이며 2002년 일본 변호사협회의 주장이기도하다. 폭력에도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있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도 있는 만큼, "강제"'포승줄에 묶여' 끌려가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다음 일화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잘 말해준다.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내 밑의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배 민 밑의 홀에, 배가 제일 흔들리는 곳에 .... 조선 여자들이 많더라구요. ....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을 다녀서 일본말을 할 정도가 되니까 가족들을 인솔했습니다. 아버지 주소만 들고 찾아가는데 시모노세키 선착장에 내려서 길 가는 사람에게 주소 적힌 종이를 주면서 플랫폼을 물어보니까 길을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가도 가도 허허벌판만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는 지쳐 있고, 어린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동생 하나는 내가 손을 잡고 걷고, 그러다가 원래 왔던 곳으로 다시 와보니까 플랫폼이 바로 옆에 있는 겁니다. ... 그때 일본 사람에 대한 증오를 느꼈습니다. 아직 그 일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가다가 먹으려고 떡하고 엿을 만들었어요. 조선 사람들 인정이란 게 옆에 사람들 두고 그냥 못 먹잖아요. 할머니가 옆 사람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해서 일본 여자에게 갖다주니까 "더러운 조선인들!"이라면서 내 손을 탁 칩니다. 바닥에 음식이 널렸을 것 아닙니까. 나도 민망해서 주섬주섬 주웠어요.

참 그때 내 가슴에 아! 같은 민족인데, 같은 사람인데, 왜 저럴까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어린 내 인격, 우리 가족, 조선인의 인격을 모독한 것 아닙니까."-107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년 구연철의 증언을 통해서, 일제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입되는 교육은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을 하기 전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일제의 노예로 길러진 것이다. 그들이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한들, "강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식민지 노예교육""폭력"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로 강제동원 피해자는 7804,376명이다. 그러나 이 명단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 논문도 가뭄에 콩나듯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에 개인정보가 담겨있어 국가가 나서서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연구에 진척이 있을 수 없다. 저자 정혜경운 이 책 곳곳에 "피해국가인 한국의 관심이 이 정도인데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까"라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는다. 독일이 지금도 유대인에게 사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끈질긴 과거사에 대한 고발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서 유대인 처럼 끊질긴 투쟁을 했는가? 과거 친일 정권이 의도적으로 강제동원문제를 기피했다. 이제는 아픈 기억과 대면하길 싫어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도 정확히 내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징용"은 일본이나 사할린, 남양 등지로 떠나야 "징용"으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 정혜경은 동원지역에 따라 '한반도 내''한반도 외'로 구분하는 것은 현재적 관점이며,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보국대' 혹은 '봉사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한 것도 "징용"에 포함되어야한다. '얕은 지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징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선입견으로 '한반도 내' 징용 피해자들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진실의 무게'를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힘들고도 조심스럽다.

일제는 조선인이 '노동자' 아니라, '노무자', '근로자'이기를 바랬다. 노동자와 노무자 혹은 근로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따라서 고용주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노무자' 혹은 '근로자''수동적 개념의 용어'이다.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분위기를 요구' 받았다. 그들에게 노동자와 같은 '파업'의 권리는 없었다. 일제가 조선인을 '노동자'가 아닌, '노무자' 혹은 '근로자'가 되도록 강요했다. 우리는 일제의 강요에 충실히 순응하며 '노무자'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근 일반 징용 실시의 취지를 발표하자, 일부 지식계층과 유산계급 중에는 서둘러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 혹은 주거를 전전하여 당국의 주거 조사를 어렵게 하거나 혹은 급히 징용 제외 부문으로 취직을 기도하고, 일반 계층도 의사를 농락하여 병으로 입원하거나 일부러 화류병에 걸려 질환을 이유로 면하려고 기도하며, 그중에는 자기의 손발에 상처를 내고 불구자가 되어 기피하는 자, 심지어는 읍면 직원 내지 경찰관의 전자(專恣)에 기인한 덕으로 곡단하여 이를 원망하여 폭행, 협박하는 등 실로 일일이 헤아릴 수 없고, 최근 보고사범만으로도 20여건에 헤아리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번 충청남도에서 발생한 송출 독려차 부임한 경찰관을 살해한 사범은 그간의 동향을 말해준다. 특히 최근 주목되는 집단 기피 내지 폭행 행위로서 경상북도 경산경찰서에서 검거한 불온 기도 사건과 같은 것은, 징용 기피를 위해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대왕산죽창의거)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식도,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 정상에서 농성하여 끝까지 목적 관철을 기도하는 것에서 첨예화한 노동계층 동향의 일단을 알 수 있다."-148

 

일제의 징용에 대항하여 '결심대'를 조직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지역에서 발생한 태업과 파업의 기록도 '노무자''근로자'로 살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일제 강점의 어둠을 헤치고 밝은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토록 '근로자'라는 딱지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개발 독재 시대, 독재정권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근로자'이길 바랬다.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사업주가 시키는데로 열심히 일만하는 '근로자'이길 바랬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의 통념을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날'이 아직도 '근로자의 날'로 불리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처럼 보도하는 언론을 보며,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근로자'라는 말이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염원이 담긴 말이라는 '진실의 무게'를 마주한다면, 이제는 '노동자'라는 말을 이 땅의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3. 일본인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전쟁기간 동안 제국 일본 영역의 민중들은 '자신의 말'을 빼앗겼다." 저자 정혜경의 말이다. 일본은 폭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일본제국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전개할수록, 전선은 넓어졌고, 총력전 상황에서 일본인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인 310만명이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군 전사자 중 약 6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전투에서는 약 8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

 

"아사! 굶어 죽었다는 말이다. 보급 부대 없는 현지 보급원칙이 일본군의 굶주림을 악화시켰다.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황군(천황의 군대)이 아닌 황군(메뚜기 군대)이었다. 용맹한 군인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식량과 땔감을 찾아 민가를 뒤지고, 밥을 짓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것이 일본군의 현실이었다."-40

 

보통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과 목숨바쳐 돌격하는 용맹함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는 아시아 태평양전쟁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일본군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일본군 지도부는 '천황 폐하'라는 이름으로 목적을 위해서 일본인 병사의 목숨을 기꺼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하려면, 적에게 폭탄을 던지는 일보다, 아군에게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 보급로를 개척하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용감한 군대도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수륙 병진작전이 실패하고 결국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하자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웅거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벌이먼서도 '현지 보급'이라는 기상천외한 원칙을 세웠다. 그들에게 병사들의 생명은 일회용 휴지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일본인들이 했던 말도, "완전 재수없는 거죠"라는 말이다. 상관이 시켜서 일본군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서 일본군 병사들은 미군 포로를 죽였다. 명령에 복종했던 그들은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 미군 포로를 죽이라며 '천황의 뜻'이라고 말한 상관은 죽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없었다.

전범 히로이토는 소련과의 강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60만의 관동군을 소련에게 넘겨주려했다. "천황은 전쟁 당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민의 고통과 피해를 외면했다." 일본인 병사들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어갔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천황폐하"는 그들을 한낫 휴지조각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황 히로이토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책임을 외면하고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짝사랑이 일본인을 비극속에 머물게했다.

광기의 시기! 일본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노예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든다. 상관이 시키기에, "천황폐하의 뜻"이라는 말에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되는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누구든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이히만 처럼 악마가 될 수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냈던 아이히만은 총통 히틀러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했다. 일본에는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 무사가 천년을 지배했던 사회! 천황을 위해 개인의 목숨을 던지는 사회! 이제는 아베가 전권을 휘둘러도 침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본인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격을 얻지 못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일본이 패전 후,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주의였다. 그들은 '주어진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그리고 '주어진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면, 그들은 영원히 천황의 노예, 아베의 노리개가 되어야할 것이다.

 

저자 정혜경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무관심한 한국사회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에게 귀기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개인 연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연구를 위해서 정부가 제발 관심을 갖아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서적이 너무도 없다며 한탄한 나에게 정혜경은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새롭게 밝혀내야할 진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 정혜경은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만들것을 당부한다. '진실의 무게'를 알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이제는 찾아나서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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