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2
정혜경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3.1절과 8.15가 되면,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우리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각종 특집 방송을 방영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방송은 드물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통치에 관한 서적을 찾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심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를 자세히 기록한 책들이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시장의 논리'가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승리의 역사는 기억하려 해도 패배의 역사는 기억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고, 그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책을 펼쳐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영화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20178'군함도'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기대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흥행을 가져오지 못했다. 매스컴과 소설로 대중에게 많이 소개된 '군함도'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 정혜경은 '사실과 다르다.'라는 관객의 반응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일본당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조선민중'의 슬픈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일본 당국의 하수인인 조선인들이 동포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한다.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 소년 광부도 존재했으며, 조선인 하수인이 동포를 착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이라는 구도가 아닌,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구도가 불편했다. ? 관객들은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대립구조가 불편했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학교에서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의 대립구조로 일제강점기를 배웠다. 그러나 일본인이 조선을 원활히 식민통치하기 위해서는 협조자가 필요했다. 그 협조자를 우리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1910년대 일본 헌병 밑에는 2명의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있었다. 소수의 헌병으로 다수의 조선인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 헌병 보조원'의 협조 덕분이다. 1920년대부터는 소위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친일파를 육성해서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는 민족분열 통치를 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 민족말살통치로 인해서 일제에 굴복하는 친일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와 있듯이, 나치가 유대인을 홀로코스트에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 위원회'의 협조 덕분이다. 한나 아렌트가 금기시 되었던 '유대인 위원회'의 나치 협조 행위를 책으로 발표하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금서로 정한 것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일제에 협조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마 같은 일본인과 선량한 조선인의 대립구도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영화 '군함도'는 너무도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영화 '군함도'는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저자 정혜경은 우리가 '군함도'에 열중한 나머지 '조선 침략의 정신적 근거지 '쇼카손주쿠' 등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함도'가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 장소라면,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싹이 튼 곳이요.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의 요람이었다. '쇼카손주쿠'를 세운 요시다 쇼인이 묻힌 신사는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가 되었으며, '쇼카손주쿠'를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눈에 보이는 강제 동원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가 비극의 씨앗이라면, 눈에 보이는 '군함도'의 강제동원 역사는 비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씨앗과 비극의 열매 모두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 불편한 진실, 우리가 마주하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며 '진실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2. '진실의 무게'를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본 극우파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포승줄로 꽁꽁 묶여간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걸어갔는데 무슨 강제냐"라고 주장한다. 소년 지원병에 떨어져 울었던 소년도 있었다. 징병 혹은 지원병으로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을 위한 환송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소위 '일베'와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가슴이 탁 막혀온다. 그러나 막상 논리적인 반론을 해주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야 "강제"라는 단어를 쓸수 있다는 그들의 일차원적 주장에 저자 정혜경은 "강제성이란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 사기, 법적 강제에 의한 동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일 학계의 결론이며 2002년 일본 변호사협회의 주장이기도하다. 폭력에도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있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도 있는 만큼, "강제"'포승줄에 묶여' 끌려가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다음 일화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잘 말해준다.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내 밑의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배 민 밑의 홀에, 배가 제일 흔들리는 곳에 .... 조선 여자들이 많더라구요. ....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을 다녀서 일본말을 할 정도가 되니까 가족들을 인솔했습니다. 아버지 주소만 들고 찾아가는데 시모노세키 선착장에 내려서 길 가는 사람에게 주소 적힌 종이를 주면서 플랫폼을 물어보니까 길을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가도 가도 허허벌판만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는 지쳐 있고, 어린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동생 하나는 내가 손을 잡고 걷고, 그러다가 원래 왔던 곳으로 다시 와보니까 플랫폼이 바로 옆에 있는 겁니다. ... 그때 일본 사람에 대한 증오를 느꼈습니다. 아직 그 일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가다가 먹으려고 떡하고 엿을 만들었어요. 조선 사람들 인정이란 게 옆에 사람들 두고 그냥 못 먹잖아요. 할머니가 옆 사람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해서 일본 여자에게 갖다주니까 "더러운 조선인들!"이라면서 내 손을 탁 칩니다. 바닥에 음식이 널렸을 것 아닙니까. 나도 민망해서 주섬주섬 주웠어요.

참 그때 내 가슴에 아! 같은 민족인데, 같은 사람인데, 왜 저럴까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어린 내 인격, 우리 가족, 조선인의 인격을 모독한 것 아닙니까."-107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년 구연철의 증언을 통해서, 일제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입되는 교육은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을 하기 전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일제의 노예로 길러진 것이다. 그들이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한들, "강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식민지 노예교육""폭력"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로 강제동원 피해자는 7804,376명이다. 그러나 이 명단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 논문도 가뭄에 콩나듯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에 개인정보가 담겨있어 국가가 나서서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연구에 진척이 있을 수 없다. 저자 정혜경운 이 책 곳곳에 "피해국가인 한국의 관심이 이 정도인데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까"라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는다. 독일이 지금도 유대인에게 사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끈질긴 과거사에 대한 고발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서 유대인 처럼 끊질긴 투쟁을 했는가? 과거 친일 정권이 의도적으로 강제동원문제를 기피했다. 이제는 아픈 기억과 대면하길 싫어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도 정확히 내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징용"은 일본이나 사할린, 남양 등지로 떠나야 "징용"으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 정혜경은 동원지역에 따라 '한반도 내''한반도 외'로 구분하는 것은 현재적 관점이며,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보국대' 혹은 '봉사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한 것도 "징용"에 포함되어야한다. '얕은 지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징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선입견으로 '한반도 내' 징용 피해자들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진실의 무게'를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힘들고도 조심스럽다.

일제는 조선인이 '노동자' 아니라, '노무자', '근로자'이기를 바랬다. 노동자와 노무자 혹은 근로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따라서 고용주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노무자' 혹은 '근로자''수동적 개념의 용어'이다.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분위기를 요구' 받았다. 그들에게 노동자와 같은 '파업'의 권리는 없었다. 일제가 조선인을 '노동자'가 아닌, '노무자' 혹은 '근로자'가 되도록 강요했다. 우리는 일제의 강요에 충실히 순응하며 '노무자'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근 일반 징용 실시의 취지를 발표하자, 일부 지식계층과 유산계급 중에는 서둘러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 혹은 주거를 전전하여 당국의 주거 조사를 어렵게 하거나 혹은 급히 징용 제외 부문으로 취직을 기도하고, 일반 계층도 의사를 농락하여 병으로 입원하거나 일부러 화류병에 걸려 질환을 이유로 면하려고 기도하며, 그중에는 자기의 손발에 상처를 내고 불구자가 되어 기피하는 자, 심지어는 읍면 직원 내지 경찰관의 전자(專恣)에 기인한 덕으로 곡단하여 이를 원망하여 폭행, 협박하는 등 실로 일일이 헤아릴 수 없고, 최근 보고사범만으로도 20여건에 헤아리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번 충청남도에서 발생한 송출 독려차 부임한 경찰관을 살해한 사범은 그간의 동향을 말해준다. 특히 최근 주목되는 집단 기피 내지 폭행 행위로서 경상북도 경산경찰서에서 검거한 불온 기도 사건과 같은 것은, 징용 기피를 위해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대왕산죽창의거)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식도,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 정상에서 농성하여 끝까지 목적 관철을 기도하는 것에서 첨예화한 노동계층 동향의 일단을 알 수 있다."-148

 

일제의 징용에 대항하여 '결심대'를 조직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지역에서 발생한 태업과 파업의 기록도 '노무자''근로자'로 살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일제 강점의 어둠을 헤치고 밝은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토록 '근로자'라는 딱지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개발 독재 시대, 독재정권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근로자'이길 바랬다.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사업주가 시키는데로 열심히 일만하는 '근로자'이길 바랬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의 통념을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날'이 아직도 '근로자의 날'로 불리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처럼 보도하는 언론을 보며,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근로자'라는 말이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염원이 담긴 말이라는 '진실의 무게'를 마주한다면, 이제는 '노동자'라는 말을 이 땅의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3. 일본인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전쟁기간 동안 제국 일본 영역의 민중들은 '자신의 말'을 빼앗겼다." 저자 정혜경의 말이다. 일본은 폭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일본제국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전개할수록, 전선은 넓어졌고, 총력전 상황에서 일본인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인 310만명이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군 전사자 중 약 6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전투에서는 약 8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

 

"아사! 굶어 죽었다는 말이다. 보급 부대 없는 현지 보급원칙이 일본군의 굶주림을 악화시켰다.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황군(천황의 군대)이 아닌 황군(메뚜기 군대)이었다. 용맹한 군인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식량과 땔감을 찾아 민가를 뒤지고, 밥을 짓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것이 일본군의 현실이었다."-40

 

보통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과 목숨바쳐 돌격하는 용맹함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는 아시아 태평양전쟁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일본군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일본군 지도부는 '천황 폐하'라는 이름으로 목적을 위해서 일본인 병사의 목숨을 기꺼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하려면, 적에게 폭탄을 던지는 일보다, 아군에게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 보급로를 개척하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용감한 군대도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수륙 병진작전이 실패하고 결국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하자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웅거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벌이먼서도 '현지 보급'이라는 기상천외한 원칙을 세웠다. 그들에게 병사들의 생명은 일회용 휴지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일본인들이 했던 말도, "완전 재수없는 거죠"라는 말이다. 상관이 시켜서 일본군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서 일본군 병사들은 미군 포로를 죽였다. 명령에 복종했던 그들은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 미군 포로를 죽이라며 '천황의 뜻'이라고 말한 상관은 죽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없었다.

전범 히로이토는 소련과의 강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60만의 관동군을 소련에게 넘겨주려했다. "천황은 전쟁 당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민의 고통과 피해를 외면했다." 일본인 병사들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어갔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천황폐하"는 그들을 한낫 휴지조각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황 히로이토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책임을 외면하고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짝사랑이 일본인을 비극속에 머물게했다.

광기의 시기! 일본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노예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든다. 상관이 시키기에, "천황폐하의 뜻"이라는 말에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되는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누구든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이히만 처럼 악마가 될 수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냈던 아이히만은 총통 히틀러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했다. 일본에는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 무사가 천년을 지배했던 사회! 천황을 위해 개인의 목숨을 던지는 사회! 이제는 아베가 전권을 휘둘러도 침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본인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격을 얻지 못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일본이 패전 후,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주의였다. 그들은 '주어진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그리고 '주어진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면, 그들은 영원히 천황의 노예, 아베의 노리개가 되어야할 것이다.

 

저자 정혜경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무관심한 한국사회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에게 귀기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개인 연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연구를 위해서 정부가 제발 관심을 갖아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서적이 너무도 없다며 한탄한 나에게 정혜경은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새롭게 밝혀내야할 진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 정혜경은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만들것을 당부한다. '진실의 무게'를 알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이제는 찾아나서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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