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 세계사 - 세상을 설득한 명연설 50편으로 현대사를 읽다
앤드루 버넷 지음, 정미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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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현명한 리더는 명연설로 그들을 행동으로 이끈다. 베나지르 부토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인용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키는자들에게 예약된 자리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의 불의를 보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복지부동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이 말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세상이 변하려면 대다수의 대중을 움직여야한다. 그들이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정의에 대한 정의라는 불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스피치 세계사'에서는 나약한 대중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일깨우는 명연설 50편이 실려 있다. 때로는 수준이 낮고 지루한 연설도 있지만, 때로는 나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만기도 했다. 그 연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가슴과 심장을 깨우는 연설.

 

"나의 재능을 모르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학생들이 진로 관련된 상담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안정된 직업, 혹은 사회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사회나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사회가 열망하는 의사라는 꿈을 이루고도,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다. 체 게바라!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평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생명이 세계 최고 갑부의 모든 재산을 합한 것보다 백만배는 더 귀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닭았습니다."-177

 

사회적 명성과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의사가 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에 종사하기 위해서 의사가 되었고, 보다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세계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그는 살아 있다.

우리사회에는 체 게바라와 같이 생명을 존중하는 숭고한 의사가 얼마나 될까? 뉴스에 나오는 함량 미달의 의사들과,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의대생들을 보며 절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가 벌어지고, 대구가 위기에 빠지자, 병원문을 닫고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을 보며 세상은 살만하다는 생각을 갖았다. 묵묵히 자신의 삶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인술을 펼치는 그들의 숭고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마도, 사회적 명성을 따라서, 사회적 부를 따라서 의대에 진학한 학생이라 하더라도, 학생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숭고함이 위기의 상황속에 빛을 발했으리라.

가슴을 고통치게 만드는 일에 자신의 운명을 바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스티브 잡스이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상세히 말한다. 자신이 입양아였으며, 양부모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노동자였다. 결국, 평생 모은 돈을 자신의 대학 학자금으로 써야하는 양부모를 생각해서 6개월만에 대학을 중퇴한다. 그후,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듣는다. 이는 매킨토시 설계에 유용하게 쓰여진다. 돈이 되는 일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에 비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일에 열정을 불살랐다.

 

"사소한 일들이 이어져 길을 내준다고 믿으면 가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자신감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351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355

 

사회적 욕망과,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연설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은 스스로 많은 시간과 열정, 노력을 쏟아 붓게 된다. 비록 많은 돈을 벌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스탠포드 대학생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내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고, 들려주고 있는 말을 그의 삶에 녹여서 말하고 있었다.

 

2. 대중을 악의 길로 이끄는 연설의 힘

 

우리의 열정을 일깨우는 명연설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명연설로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의 무고한 시민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사람이 있다. 바로 히틀러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앞장서서 독일인을 전쟁터로 떠민 사람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하인리히 힘러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친위대 장교를 모아 놓고, 유대민족을 말살하겠다고 당당히 연설을 한다.

 

"이런 과업을 끝까지 완수해 나가면서도 인간의 나약함은 벗어던진 가운데 인간성을 지키기란 우리로서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광의 한 페이지를 역사에 남기는 일이다."-96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린 나치가 인간성을 말하니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이 연설을 들으며, 용기 있게 "아니요"를 외친 사람은 없다. 독일의 상당수 시민들은 나치편이 되어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 대중 선동에 놀아난 사람도 있고, 나치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만든 사람도 있다.

니체가 '악마와 싸우는 사람은 악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악마를 들여다보면, 악마도 우리의 심연을 들어다 본다.'라는 말을 했다. 히틀러와 싸우는 스탈린도 히틀러와 닮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히틀러와 스탈린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는 이 애국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자유와 명예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분발해야합니다."-85

 

이오지프 스탈린은 독일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노동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스탈린은 재능 있는 군 지휘관을 숙청하고 독일 침공 가능성을 말하는 자를 죽였다. 스탈린 자신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독일의 공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세계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죽음으로서 악의 세력은 사라졌을까? 니체의 말처럼, 나치에 혹독히 당한 유대인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죄악을 학습했다.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장벽을 쌓고 심지어는 폭격을 당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언덕에 올라 바라보며 환호한다. 나치라는 악마와 싸우면서 나치가 유대인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 책에 다비드 벤구리온의 연설이 실려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용맹의 길을 개통합니다."라는 연설을 설명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침히 짓밟히 있는 현실을 '현장 속으로'에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연설만을 모아 놓는다면, 잡탕을 면치 못한다.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고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점을 저자가 유념하길 바란다.

제국주의자의 추악한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국가로서 우리의 존립은 석유에 달렸"다고 강조하며,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파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평화주의자로 살며 평화를 위해 힘쓰고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평화를 위해 협상"해왔다고 강변한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유산인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침략전쟁을 하면서도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영국 신사의 위선적인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 중국에 아편을 팔았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자유무역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격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이다. 보수당 당수 해럴드 맥밀런의 연설은 오만한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 영토 곳곳에서는 현재 자치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자부심을 가져 마땅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 길로 들어서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156

 

수많은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든 대영제국이 과거의 반성과 배상을 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침략 덕분에 피식민지 국가가 잠에서 깨어나 앞으로 아가고 있다고 괴변을 펼치고 있다. '백인의 짐'이라고 영국 제국주의를 미화시켰던 제국주의 유산을 그들은 청소하지 않고 있다. 반성이 없는 오늘은 과거의 잘못을 내일에 펼쳐 놓을 것이다.

 

3.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리더의 말

희망은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과 같다. 현실은 어둠속에 있지만, 리더는 그곳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을 해야한다. 리더가 어떠한 비젼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대중은 절망할 수도,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1939년 네빌 체임벌린은 라디오 방송으로 독일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영국국민에게 설명했다. 국민들로서는 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대공항 시기 프랭클린 루스밸트의 연설일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47

 

노변담화로 알려진 루스밸트의 연설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미국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다. 연설을 하는 루스밸트 자신이 소아마비를 앓았기에 미국인들은 그의 말에 더욱 신뢰감을 갖았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계는 제2의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 어둠의 터널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루스밸트가 말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효율적인 방역을 통해서 안전한 대한민국, 방역 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지도자들도 우리가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우리가 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 가슴에 심어주어야할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캄캄하더라도 한줄기 희망이 주어진다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말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경우도 있다.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처칠로 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밸트는 처음에 비시 정부를 인정하기도 했다. 비시 정부를 중심으로 프랑스를 바라보면, 프랑스는 나치의 피해국가가 아니라, 나치 협력국가라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에 먼저 입성하면서 샤를 드골은 프랑스 역사에 남을 만한 명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파리를 장악했던 적이 우리에게 항복을 선언했으므로 프랑스는 다시 파리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102

 

연합군의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서 파리를 해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가 머뭇거리는 사이 파리를 점령한 샤를 드골은, 이 명연설을 통해서 그들만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 신화로 인해서, 프랑스는 나치 협력국에서, 나치 피해국으로 자리 이동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독수리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샤를 드골이 했던 명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한반도의 운명을 내맞길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러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가 도래한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소련과 북한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소련이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며 독립국가 연합으로 재탄생했다면, 북한은 지금도 김일성 개인숭배를 거쳐서, 백두혈통이라는 신화를 통해서 북한인민을 다스리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스탈린은 설득하고 설명하고 끈기 있게 협력하는 식이 아니라 자기 개념을 강요하고 자기 의견에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습니다."-128

"차르들 조차 본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133

"동지 여러분, 개인숭배를 단호하고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합니다."-134

 

스탈린 치하의 혹독한 폭압정치 속에 살아던 민중들로서는 스탈린이 죽었다 하더라도 스탈린을 비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때, 용기 있는 리더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내야 홀로 설 수 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시킴으로서, 소련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롭게 독립국가 연합 혹은 러시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3대 세습을 하면서 김일성의 그림자에 그대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다. 소련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러시아로 다시 태어났듯이, 북한도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한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 넘어 홀로설 수 없다. 리더의 용기 있는 한마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물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인가?

 

4. 희망을 주는 약자들의 외침

강자의 명연설에는 힘이 있지만, 약자의 명연설에는 감동이 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있다. 그들의 외침이 사회를 바꿔 놓기도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길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약자의 메아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꼽자면, 여성을 빼 놓을 수 있다. 물론, 남성보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쥔 여성도 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사회적 약자인 것은 사실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힌 여성이 있다. 바로 애멀린 팽크허스트이다.

 

"국가의 통치에 여성의 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합니다."-16

"남성 유권자와 남성 입법자 들은 남성의 욕구를 우선시하며 여성의 욕구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것입니다."-20

 

투표권은 권력이다. 투표권이 없는 존재는 정치인으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얻지 못한다. 시골 경로당에 밥을 해먹으라고 돈과 쌀이 정부로부터 나온다. 경로당에 대한 복지가 이렇게 잘되어 있는 것은 노인들이 투표권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투표권이 없었을 때, 여성의 일에 관심을 갖을 정치인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이 연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떤 미혼모가 가정부 일을 다니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식을 유기한 죄로 3개월 형에 처해졌다. 남자들로 구성된 치안판사단은 미혼모의 급여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혼모의 남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미혼모가 자녀를 양육해야한다는 사실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미혼모의 사례는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대변할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준다. 고양이가 쥐를 위한 법을 만들리 없다. 한나 아렌트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비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울수록 사회적 약자는 정치에 관심을 갖아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현실은 더욱 괴로워질 것이다.

국제사회의 약자로 눈을 돌려보자. 국제사회의 약자는 팔레스타인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폭력 앞에 무참히 당하고만 있어야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는 해도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는 않는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국가 수반은 비정부기구 대표로서는 최초로 유엔 총회에 연설자로 초청받았다.

 

"오늘 저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 전사의 총을 들고 왔습니다. 이 가지가 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243

 

누가 자신의 몸에 폭탄을 짊어지고 스위치를 누르고 싶겠는가? 우리는 테러라는 현상만을 보고 폭력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 폭력 너머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은 보지 못한다. 돌과 불타는 타이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에게 소총사격을 하는 이스라엘 병사를 보라. 팔레스타인 사람이 자고 있는 집을 갑자기 포크레인으로 밀어 버리는 이스라엘인들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그들을 보면서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제발 우리가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도록 도움을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여성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 여성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정의는 정치적 자유이자, 경제적 독립이자, 사회적 평등입니다."-322

 

그렇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자유가 없고, 여성은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평등이 제공되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라는 부토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되찾고 나서, 민주주의만을 외쳤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이상향으로 가기위한 다리에 불과했다. '스피치 세계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명연설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연설이다.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닌 세상이 도래하길 바래본다.

 

'스피치 세계사'는 세계적 명연설을 모아 놓았다. 같은 명연설이라 할지라도,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명문장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경우,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신 풍기는 상한 음식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한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아일랜드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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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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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도올 김용옥은 그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도마복음'을 만나면서 그 무게를 벗어 던졌다.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는 한국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참다운 예수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도마복음'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치열한 사상탐구의 모습에서 나의 고통을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가난한 집안의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야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나는 그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좋은 아이였다. 때로는 구타를 당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2학년 담임 선생은 이러한 나를 부던히 싫어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 검사에서 우수한 지능지수가 나오자, 그는 나를 2시간 동안 두둘겨 패면서 컨닝을 했다고 자백하라며 다그쳤다. 두시간 동안 맞으면서도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당시 내 주변에 있었던 학생들은 나보다 IQ가 낮게 나온 학생들 뿐이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한 나를 무참히도 짖밟았던 이들이 '크리스찬들'이었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라는 성경의 말은 그들 세계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위선적인 기독교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그때, 도올 김용옥을 만났다. 그는 당당히 한국 기독교의 위선적인 모습에 강한 일갈을 가하며 나의 가슴에 감동의 물줄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도마복음'을 만났다. 적을 때려 눞히려면, 적의 논리를 알아야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왜곡하는 예수를 바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린시절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치유받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도마복음2'를 읽어 내려갔다.

  하루에 한문장, 때로는 한주에 한문장, 때로는 한달에 한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연습장에 영어 원문을 적으며,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읽었다. 때로는 새로운 환희에 무릎을 쳤고, 때로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제 참다운 예수를 만나보자.

 

 

1. 믿으면 진실을 볼 것이다! 라는 크리스찬들의 거짓말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초등학교 시절, 산골짜기 까지 선교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집에 허락받지도 않고 들어와 포교를 했다. 나의 이성적 질문에 그들은 "믿으면 진실을 볼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이 있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말만을 할뿐이다. 이 질문은 '크리스찬인 당신들이 실은 나를 왕따시키고, 나를 구타하고 있소. 만약 신이 있다면, 불쌍한 나를 왜? 구원하지 않소?'라는 질문이었다.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이비신자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현실의 문제에 뿌리두지 못하고, 공허한 말들만을 늘어 놓는 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나, '도마복음'은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하라'(interpretation) 도마는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자신이 직접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예수의 쌍둥이 '도마'다운 말이다. 그렇다. 한국 기독교는 깨달아야한다. 끊임 없이 재해석 되고, 끊임 없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해야하거늘 그들은 거대한 예수의 그늘을 무기삼아 질문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게 강요한다. 참다운 예수와 만나는 첫 관문은 끊임 없이 해석하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도마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 해석하라!! 그러면 진리를 만나게 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2.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다! 크리스찬들의 두번째 거짓말!!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에온 포교자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포교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한다. '천국'을 풀어보면, '하늘 나라'이다. 하늘에는 구름과 공기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천국에 가는 조건은 교회에 다니는 것뿐이라는 괴변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시기, 수학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포교를 했다. 한 친구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조상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지옥에 갔겠네요."

당돌한 친구의 질문에 수학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는님이 보기에는 한줌도 안되는 존재들이에요."

수학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과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무리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논리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되니, 스스로를 크리스찬이라는 말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그들의 말은 스스로의 종교를 부정하는 일이다. 지하철에서 종종 듣게 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도마복음 속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가 본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예수님은 말하신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천국에 갈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다면, 물고기가 천국에 먼저 이를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고, 우리 밖에 천국이 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우리가 하찬케 여기는 주변의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자! 예수님은 진정으로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 꾸짖고 있다. 귀가 있는 자여, 들어라!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말씀을.....

 

3. 종말론을 짖거리는 자여, 거짓된 말을 그만둘 지어다. 크리스찬들의 세번째 거짓말

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este death."(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마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안히라리라.")

  거리에서 포교하는 자들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해대는 말들을 들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도 죽음을 무기삼아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광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때로는 성조기나, 이스라엘깃발을 들고 나타난다.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도 집회를 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떠들어 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과연 진정한 예수님은 그들을 어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도마복음 속에서 만난 참된 예수의 모습은 한국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종말론을 말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라고 반문한다. 시작도 보지 못한 것들이 끝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강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이 질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피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종말론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늘, 나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자. 오늘을 꽃피운다면, 아니, 최소한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면, 내일 종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은 남을리 없다.

 

4. 예수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는말,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어느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선교단을 파견하여 교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사건이 있었다. 여행을 자제하라는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던 그들은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후로,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반성을 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에 선교를 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을까?

  선교하고, 기도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순수한 금식, 순수한 기도, 순수한 희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도마복음 속 예수는 말한다. 그런데, 지난 몇달 동안 언론에 비친 기독교는 어떠했는가?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 종교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질본의 호소를 뒤로하고 주일예배를 강행했다. 결국, 교회 집단 간염이라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모교회가 종교집회를 통해서 코로나19를 집단 간염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 '너희는 정죄되리라'

 

5.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홀로 서라!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and they will stand alone."(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마복음을 읽다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중에 한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보다는 충돌을 선사하러 왔다. 가정에서 아비와 아들이 충돌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충돌을 통해서 이들은 홀로설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발달단계상의 과정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각기 홀로서게 될리라.'라는 말을 통해서, 타인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가 신자들을 교회에 혹은 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는 엄청난 말씀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들은 통하는 것이 있나보다. 그래, 정복한 왕국을 버리고 가는 왕처럼, 그대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도올 김용옥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서술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다음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특수한 문헌이며 인간의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어야한다."-381쪽

 

성경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는 도올의 모습은 대학시절 내가 품었던 의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교 3학년 시절, 한국 사상사시간이었다. 교수님은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중간 중간 성경을 말하며 은연중에 포교를 했다. 한국 사상사를 보다 밀도 있게 듣고 싶었던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질문했다.

"종교가 시대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시대가 종교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나의 질문을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자, 나는 달리 질문했다.

"시대가 변하면 교리도 변해야합니까, 아니면, 시대가 변해도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이 답하셨다.

"종교에는 부활과 같은 영적인 것이 있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죠"

나는 반박했다.

"부활은 포교를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순간 말을 얼버무리더니, 나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나의 학점은 날라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학점을 A+를 주었다. 교수님은 성경도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로 사료비판을 해야한다는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도올 김용옥도 '도마복음'을 풀이하면서 성서는 재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울부짖고 있다. 그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지난날 부던히도 내가 외쳤던 말들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도올은 '도마복음 2'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382쪽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급우들로부터, 거리의 포교자들로부터 나의 자유를 압살당해왔다. 그들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를 대접했다. 나는 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신자로 만들려 폭력을 가하기 까지 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논어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己所不欲勿施于人)'이라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남을 대접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모습을 띈다. 진정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려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논어의 황금율을 가슴에 새겨야한다. 그럴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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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중일 삼국지 - 갈팡질팡 한국, 허겁지겁 중국, 아등바등 일본
우수근 지음 / 두리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가깝지만 먼나라! 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라가 있다. 중국과 일본이다. 일본은 너무도 가깝지만,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그들의 오만함에 치를 떤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로, 개인의 인권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나라이다. 대국으로 굴기하려는 중국은 힘의 외교를 구사하는 저돌적인 모습을 보이기도한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중국과 일본과 교류하며 살아야한다. 신숙주가 죽으며 왕에게 남긴 유언이있다.   "일본과 관계를 끊으면 아니되옵니다." 일본과 외교 관계를 끊는다면, 이는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신숙주의 예견은 놀랍게도 적중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조선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조선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과 관계를 끊으면 안된다는 신숙주의 유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니다. 신숙주의 마지막말은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예의 주시해야합니다."로 고쳐야한다. 중국의 사드 보복이 한국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하며,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를 수출 못하게하여 우리의 반도체 산업을 붕괴시키려했던 만행도 기억해야한다. 적의 한손을 잡고 있어야, 다른 한손으로 무엇을 할지를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을 적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미래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반면, 중국과 일본을 친구로 만든다면, 동아시아의 번영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해야한다. 그래서, 우수근의 '21세기 한중일 삼국지'를 펼쳐들었다.

 

1. 내뱉는 문화를 가진 중국과 삼키는 문화를 가진 일본, 그 중간의 한국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회와 문화를 살펴보면, 중국과 일본이 양극단에 있고 한국은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듯한 모습들을 많이 본다. 집안에서 여성의 권위가 강한 중국과 순종적인 이미지의 일본 여성, 두 나라의 중간 지대에 있는 한국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우수근의 '21세기 한중일 삼국지'에서는 중국의 문화를 '내뱉는 문화'라고 지칭하고, 일본의 문화를 '삼키는 문화'라고 이름 붙인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소리부터 높이는 중국인들에 비해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동아시아 3국의 사회 문화가 비슷한듯하면서도 이리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전공한 나로서는 동아시아 3국이 걸어온 역사의 차이에서 찾고 싶다.

  중국의 경우, 거대한 중국이라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인 들은 "꽌시"를 중시하게 되었다. 어떠한 "꽌시"를 맺느냐에 따라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성공의 길이 순탄할 수도 있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와 꽌시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반역을 저지르면 3족을 멸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9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다. 명나라 연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락제로 등극할때의 일이다. 영락제는 유명한 학자인 방효유에게 즉위조서를 쓰도록 했다. 방효유는 이를 거절하며 붓을 집어던졌다. 반역을 하면 보통은 9족을 멸하는데, 영락제는 10족을 멸했다. 친족뿐만아니라, 870명에 달하는 방효유의 친구와 문생까지도 도륙했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척, 잘못하면 자신과 꽌시를 맺고 있는 친구들까지도 죽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유튜브'우수근의 한중일 TV'에서 우수근은 중국인은 체면을 중요시여기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잘못을 인정시키려 몰아붙이지 말것을 당부한다.

  일본은 왜?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죄송합니다."라고 말할까? 이것도 역시 일본의 역사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일본은 천년 이상 칼이 지배했던 사회이다. 도망갈 곳이 없는 섬나라 일본에서는 패배자는 할복을 하거나 승자에게 무릎꿇고 목숨을 구걸해야했다. 사무라이만이 칼을 휴대할 수 있는 에도막부 시기에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사람을 죽일수도 있었다. 어느 사무라이의 아들이 자신의 떡을 훔쳐 먹었다며 떡값을 요구하자, 사무라이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의 창자를 꺼내 떡이 없음을 보여주고, 그 상인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도 할복을 한다. 일본인들은 이 이야기 들으며, 사무라이 정신이 녹아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붓이 지배해온 우리의 감성으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이러한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평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이 없으면서도 무조건 사무라이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야했다. 일본인의 과잉 친절도 그들만의 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를 보면 우리의 상식은 무너진다. 우리에게 했었던 수 많은 역사적 죄를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한국이 발전했다고 말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속에서 일본인이라는 개인은 목소리를 낮춘다. 강대국인 미국앞에서는 너무도 작아지는 일본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만은 근거없는 자신감과 오만으로 다가온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일본인이 많이 읽는 고전은 "손자병법"이라고 말했다.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은 미국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절대강자이며, 한국은 손만까딱하면 제압할 수있는 약자로 보이나보다.

 

2. 한국과는 다르지만, 일본과 중국은 너무도 닮은 것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모든 분야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습성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한국인은 놀랍도록 타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중국 TV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공원에서 아이를 납치하는데,공원에 있었던 그 어떤 사람도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충격적인 모습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우수근의 '21세기 한중일 삼국지'에는 저자가 겪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추운 길거리에 사람이 쓰러져있는데 아무도 도우려하지 않는다. 저자가 그 사람을 건물안으로 옮기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같이있었던 일본인 친구들은 자리를 피했다. 일본에서 고 이수연씨가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린 이야기에 일본인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 괜히 잘못 남의 일에 엮이게 된다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다칠 수 있기에 중국인들은 타인의 일에 나서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경우에도 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싫어하고, 신세를 받는 것도 싫어하는 극단적인 문화가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도 못본척하는 삭막한 일본인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우리는 어떠한가? 기저질환이 있어 마스크가 필요한데, 마스크를 구할 수 없다며, 보리쌀과 마스크를 물물교환하자는 인터넷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읽은 한 시민이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마스크를 선물하고 왔다는 훈훈한 일이 벌어졌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4월이 올때까지 마스크를 사지 않겠다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코로나19를 이겨내는데, 한국인의 문화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습성은 시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일본은 잘살게 되어 나서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과 관계 없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우수근은 말한다. 물론, 나의 생각은 사무라이가 지배했던 일본의 역사에서 원인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중국은 강력한 중앙정부가 무서워서 시위를 하지 못한다. 단, 자신의 생존권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상방'이라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은 어떠할까? 박근혜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세계인들이 놀라는 촛불 혁명을 이뤄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촛불 문화재를 열며 박근혜 최순실을 권좌에서 끌어냈다. 조선왕조를 당파싸움만하다가 멸망한 나라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붓이 지배하는 나라이기에, 자신의 주장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꿋꿋하게 했다. 사약을 받아 마시면서도 자신의 말을 하는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선비정신은 21세기 한국에서 촛불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이를 '역사적 무의식'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는 '역사적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우리의 선택이 필요한 시기에 '역사적 무의식'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지금의 코로나 19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역사적 무의식'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시위를 이야기 했으니, 한중일의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투표 제도 자체가 후진적이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사람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적접적어야한다. 한지역구에서 대를 이어서 국회의원을 하는 집안이 있을 정도이다. 마치 에도막부시기 지방의 다이묘들을 보는듯하다.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 공산당 독재를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코로나 19를 강력한 통제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중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코로나 19에 대해서 친구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리원량이라는 의사는 중국 당국에 잡혀가 다시는 이와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다. 그리고 리원량은 환자를 치료하다가 코로나 19에 걸려 저세상으로 떠났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점이 많지만, 정치적으로는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와 자민당 일당 독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를 미워하지만, 너무도 둘은 정치적으로 닮아 있다.

  반면, 한국은 이명박근혜 시기의 어둠을 뚫고, 촛불혁명의 민주주의를 완성해가고 있다. 중국식 통제 방식으로 코로나 19를 극복하는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의 자율성을 살려가며 코로나 19와 싸워가고 있다. 한국의 극복사례와 중국의 극복사례는 단순히 두가지의 코로나 19 극복사례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자율성과 공산주의의 통제정책의 대결이다. 우리 한국은 그 막중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3. 한중일의 공통점

한중일이 서로 다른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수근은 한중일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성문화까지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수근이 소개하는 한중일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성문화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일본은 잦은 동거와 쉬운 이혼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성문화 역시 예전부터 개방적이었다. 한 마을에 사는 주부가 13세 혹은 15세 정도의 '동정' 청소년에게 성 관계를 위해 접근할 때 사용하던 의식을 소개한 부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본을 '성진국'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이밖에도 신주쿠의 성문화 소개는 우리의 상상 그이상의 것들이었다.

  중국 또한 자본주의 물결이 넘실되면서, 이혼이 쉽게 되었다. 부부사이의 문제가 없는데도 새로운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성문화도 개방화의 길을 걷고 있다. 중국 호텔 주변에서 쉽게 하룻밤을 자자는 여성이 있다는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놀라운 것은 중국인들은 축첩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를 부러워한다고 우수근은 말한다. 공산주의 중국도 성문화 만큼은 빠른 속도로 개방화의 길을 걷고 있다.

  쉬운 이혼과 결혼, 빠르게 퍼져나가는 동거문화, 성에 대한 개방화는 한중일 3국이 각자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출발점은 다르지만, 개방화라는 목표를 향해서 질주하는 듯하다. 다시 전통시대 유교문화가 지배이데올로기인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러한 개방화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개인 자유의 확대와 행복추구라는 점에서 긍정해야할까? 아니면 성의 문란과 안정적인 가정의 해체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아야할까?

 한중일의 공통점 중에서는 씁쓸한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교육 분야의 문제점과 영어를 숭배하는 문화이다. 고등학교에서 일본어 선생님이 일본에서 어설푼 일본어를 하기 보다는 영어를 하는 것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란고 우수근은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으며, 외국인이 영어로 길을 물어보면, 영어를 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해질때가 많다. 대국이라 자처하는 중국마쳐도 영어에 주눅들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언제쯤, 한중일 삼국이 영어 숭배에서 벗어날지 한숨이 나온다. 아마도, 중국이 G1으로 우뚝 솟는다면 가능할까?

  교육 분야도 한중일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학교붕괴, 엄벌주의의 문제를 보면서, 미국식 경쟁교육을 따라하며, 많은 교육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한중일 삼국이 머리를 맞대고 참다운 교육을 위해서 고민한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수근의 '21세기 한중일 삼국지'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다. 빠르게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빠른 속도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이용한 국가주의 교육에 저항하는 젊은 교사들의 용기있는 행동도 이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1인자를 추종하는 '대세주의적 영합관'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모습과 침묵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잘못을 직시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일본이 가야할 길이 멀지만, 좌절만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이웃한 나라와 사이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가까이 있기에 서로 살을 부대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편견을 갖기도 했다. 이제 21세기에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서로를 알아가야한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발자국 더 다가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수근의 '21세기 한중일 삼국지'는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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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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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이 책을 펼쳤다. 한일관계사의 쟁쟁한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전공분야를 한꼭지씩 집필했다. 총 18꼭지의 글들은 상당히 깊이가 있었다. 깊이가 있는 만큼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18번꼭지의 '일본의 외교 안정보장 전략의 변천과 한국'이라는 글을 이해가 힘들어서 저자를 살펴보았더니, 국제정치 전공자였다. 암튼, 18번꼭지의 산을 넘어 책을 다읽었으니, 다행이다. 이 책을 읽으며, 세가지 생각할 꺼리가 던져졌다.

첫째, 허동현이라는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허동현 교수는 과거 새누리당 국회의원 대상 강의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관련 강의를 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과 친하다는데 허동현은 뉴라이트 학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글 '12. 오늘의 시점에서 본 한일관계'를 읽으며 그의 명확한 관점을 알고 싶었다. 글의 내용은 열린 민족주의에 대해서 논한 큰 무리 없는 글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싶었던 뉴라이트에 대한 그의 명확한 견해는 없이, 혼란만 계속되는 글이었다.

 

  "최근 우리 지식사회는 정치지향과 세계인식을 기준으로 불때 크게 세 그룹의 지식인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략) 민중적 민족주의 담론을 지향하는 지식인 집단이다. (중략) 다른 하나는 (중략) 뉴라이트 계열의 경제사학자 또는 정치사학자들이다. 마지막 하나는 (중략) 세계 시민 또는 민중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보는 서양사학자와 역사사회학자들이다. (중략) 호랑이에 쫓겨 나무 위에 오른 누이와 같은 오늘의 우리 눈앞에 드리워진 동아줄 세 가닥 중 어떤 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살릴 생명줄일지 못내 궁금하다."-202쪽

 

허동현도 궁금하니, 나는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허동현!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둘째, 일본 지식인은 살아있는가? 일본의 지식인들은 천황제 앞에서는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천황을 비판했다가 총격을 받은 나가사키 시장의 예처럼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기도하다.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참으로 신기하다.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주자을 하기도 한다. "가토는 천황의 이름으로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희생된 2천만 '아시아의 희생자'에 대한 가해책임은 '일본 국민'에게 있으며 천황의 전쟁 책임은 천황의 이름 아래 죽은 300만의 '자국의 전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다. 이 무슨 괴변인가? 천황이 아시아인에게 저지른 만행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 천황앞에서는 작아지는 일본 지식인의 나약함에 경의를 표한다. 더 나아가서, 미국과한 태평양전쟁 즉, 1941년 '선전조칙의 서명자'로서 책임만 천황의 책임으로 인정한 것도 그들의 빈약한 의식을 드러낸다.

셋째,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한 메이리인가? 도쿄 전범재판소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최고 책임자인 천황이 처단되지 않았고, 강대국 민국의 입맞에 맞는 재판이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A급 전범에 대한 사형집행되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그들 상당수가 일본 정계와 사회분야에서 다시 등장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이 강조되는 이유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도쿄 전범재판은 이를 반증한다.

 

이 책을 통해서, 한일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서문에서 말했듯이, 학계의 전문적인 글들을 대중을 위해서 쉽게 풀었느다고 했는데, 이를 쉽게 읽을 대중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전문적 글쓰기 훈련이 되어있는 저자들이 쉬운 글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고, 여러 저자의 글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저자들의 쉬운 글쓰기 역량이 균질하지도 않았다. 쉬운 글쓰기를 하는 전문 저자를 섭외해서 이 책을 쉽게 풀어쓰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동북아역사재단에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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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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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은 아시아인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될까?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동아시아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서아시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과연 타당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시아라는 개념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광대한 지역이다. 그리고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도 타지역의 아시아인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1. 그것은 거짓말일까?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라는 얇은 책을 읽는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기존 나의 지식을 무참히 짓밟는 주장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는 '간디는 성자인가?'라는 질문이다. '간디 자서전'을 읽은 나로서는 간디는 당연히 성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지옥에 내려간 사람이 "발가벗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릴린 먼로가 정을 통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와, 마하트마는 행운이야. 좋은 일 한 걸 되돌려받는 모양인데, 바로 저거야. 내가 원하는 벌도...."  그러자 천사가 귀띔했다. "저건 간디가 벌받는 게 아니라 마릴린 먼로가 벌받는 거야."-16쪽

 

 '유명한 인도 우스개'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농담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위대한 성자 간디를 간디인들이 이러한 농담소재로 삼을 수 있는가?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은 무슨 근거로 간디를 비판할까?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간디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혁할 조언을 구하러온 노동자에게 간디는 협력과 조정을 권한다. 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적극적 투쟁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간디의 조언을 따른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고, 간디를 따르지 않은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다. 노동문제 뿐만 아니다. 간디는 매혹적인 젊은 아가씨를 옆에 재우면서 어떻게 자제했는지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일로 '금욕주의'를 설파했다. 그런데, 그 실험 대상이 된 여성의 인권은 짓밟은 꼴이 되었다. 간디는 종교의 벽도 넘지 못했다.자신의 아들이 이슬람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간디의 투쟁 방식이 비폭력적이었다. 이것은 영국 자본가의 눈에 과격한 노동투쟁을 하는 자들에 비해서 간디가 성자로 보일 수도 있다.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다보니, 그 인물의 어두운 이면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간디가 비록 흠결이 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살펴볼때 그는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진보진영에서 과도하게 도덕성을 강조하여 탁월한 진보의 리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간디는 완벽한 성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못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도 인간이니까?

 두번째 '인권 투사 코라손'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이다. 1986년과 2001년 피플파워의 주인공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을 우리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까? 그녀가 집권하고 나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성과가 미미했다. 군부세력의 쿠데타 위협속에서 군부세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결과일 뿐이지, 이를 두고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87년 '멘디올라 학살' 사건은 그녀를 더 이상 변호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을 외치던 농부가 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보기만 했던 대통령'을 변호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이라 자평하는 포괄적 토지개혁법이 무력화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일가친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지주들이 빠져나갈 구멍들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피플 파워"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못한 무능한 아키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지금의 문재인 정권도 '촛불 혁명'을 통해서 집권했다. '촛불 혁명'의 힘을 이용해서 적폐세력을 몰아내는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문재인 정권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촛불 혁명'을 주도했던 국민들은 힘이 되어주기도 해야겠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매서운 비판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실패를 우리의 반면 교사로 삼아야한다.
 세번째. ''킬링 필드'의 전설을 끊는다.'이다.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에 의해서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라 기억한다. "'킬링필드'의 전설"이라는 제목 자체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킬링필드'는 거짓이라는 말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킬링필드는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는 1969년 부터 1973년까지로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하면서 40만~8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다. 2차 킬링필드는 1975년 부터 1979년까지로, 크메르루즈를 이끄는 폴 포트에 의해서 처형 10만~30만명에다가 기아와 질병, 중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을 합쳐 최대 약 80만~100만명이 사망했다. 1차와 2차를 합쳐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에 의해서 이뤄진 학살만을 떠올린다. 강대국 미국에 의해서 이뤄진 죽음은 애써 외면한다. 국제사회가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만 호출하여 재판하려한다. 강자의 학살에는 눈감고, 약자의 학살에는 단호한 것이 정의란 말인가? 강자든 약자든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면 모두 재판대에 올라야하지 않는가?

 이책을 읽으며 가장 읽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부분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야했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시아'에 대해서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2. 혁명의 시련과 고통의 아시아.

  우리에게 5월은 민주화의 시기이자, 고통의 시기이다. 5.18 민주화 운동부터 시작하여, 5.16 군사쿠데타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5월에 일어났다. 5월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태국에도 5월 혁명이 있었으며, 필리핀에도 5월 항쟁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5월도 뜨거웠다. 그러나 이들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 구질서를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다. 마치 5.18민주화 운동 이후에 신군부세력의 폭압정치가 이어졌듯이 그들도 계속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눌 스님이 '돈오점수'를 말하지 않았던가! 돈오! 깨달았다면, 점수! 수행해야한다. 한번의 혁명으로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 '시민의 힘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혁명은 납치 당한다.'라는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시민은 조직되어 계속 혁명을 이어가야한다.

  이들 나라들이 혁명의 첫발을 이뤘다면, 동티모르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는 혁명의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 구스마오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을 해야만했다. 많은 동지와 동포들이 죽어갔고, 그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감옥에 갖혀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만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독립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인도네시아에 매수당한 반독립파들이 동족을 죽이는 현실을 보며 울분을 토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그들이 되돌아와서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게릴라 동지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빌 것임을 분명히 약속했다."-251쪽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없다. 진실은 승리한다." 촛불 집회 때 불렸던 노래 가사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실이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직시하면 많은 슬픔이 밀려온다. 인도네시아에 빌붙어 동족을 죽였던 반독립파를 끌어 안아야만 하는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할까? 진실이 힘을 갖지 못한다면,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구스마오가 독립과 혁명의 기쁨을 누렸다면, 그 기쁨을 위해서 달려가는 두 사나이가 있다. 한명은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간 의사 나잉옹이다. 다른 한사람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자 야신이다. 버마에서 안락한 의사생활을 할 수도 있었던 나잉옹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되었다. 승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을 이어가며 전우의 죽음에 슬퍼하는 인간 나잉옹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국경지대의 소수민족과 유대를 지켜가며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는 모습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투사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잉옹은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타국의 민주화를 지원해줄 정도의 성숙된 모습을 가지는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아흐메드 야신! 그는 나잉옹 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야했다. 게다가 달리기를 하다 쓰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나약한 몸의 소유자가 강력한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1948년 "대학살"을 겪고,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 고민한다. 술과 마약, 섹스로 펠레스타인 젊은 이들을 유혹하여 정보를 빼내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책을 쓰고, 무장단체 하마스를 조직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 잡혀 자신의 눈 앞에서 아들이 고문당하고, 자신의 육체가 부서져도 그는 이스라엘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도 망가졌다. 그러면서 한국의 독자에게 말한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시절을 돌아보자. 한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불러왔던가?"-264쪽

 

  아흐메드 야신의 이말에 나는 숨이 멈졌다. 자신의 삶의 터젼을 잃어버린 이들의 절규가 느껴졌다. 야신은 "과연 누가 테러리스트고 누가 희생자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답해야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강자의 폭력인 전쟁, 약자의 폭력인 테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악한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한다면 그 세력이 나쁜 것이 아닐까? 나치의 박해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분쟁의 역사는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너무 큰 희망사항일까?

  아시아는 아파하고 있다. 한번의 혁명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계속 혁명을 위해서, 혹은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부단히 몸부림치고 있다. 아파서 울고 있는 아시아에 너무도 무지했던 우리는 이제 관심을 갖아야하지 않을까?

 

3. 아시아의 여성과 성

미투운동이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억눌렸던 여성들이 이제 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당히 밖으로 나온 것일까?

  여성의 지위를 말할때 그 사회의 대통령 혹은 수상이 여성출신이 있는가?를 물어본다. 이 질문에 아시아는 당당히 있다고 말한다. 여성을 억압한다고 평가 받아온 이슬람 사회에서도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선출되었으며, 스리랑카와 필리핀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활약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성의 인권은 높지 않다. 왜? 일까? 문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가보다 여성이 어떠한 정치를 하는가에 있다. 치마를 입은 남성이 정치를 한다면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성다운 정치를 하지는 못했다.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는 남편이 암살된 후, 가정주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대통령이 된 그녀는 타밀 호랑이와 전쟁을 확대한다. 경제는 피폐해지고 결국, 그녀도 몰락한다.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했으며, 남성의 마초적인 정책을 흉내내려했다. 이는 스리랑카에서만 보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의 여성정치인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가지 않고, 가문이나 혈통의 후광에 기대어 최고 위치에 올라가다 보니, 남성 정치를 흉내낼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아시아의 여성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하이힐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이스라엘군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여성이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이다. 독립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에 안주가히 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용감히 현실에 뛰어드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2천개의 율법"으로 여성을 옥죄고 있는 레바논의 경우를 보면서, 여성의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레바논 여성들은 최소한 교육에서는 외형상 성평등을 이뤘으니 말이다.

  "오럴 섹스"를 하면 종신형에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그것도 강소국 싱가포르에서 말이다. 아시아에서 '성'은 억압의 대상이다. 태국의 경우, 성산업을 황색 저널리즘으로 이용할 뿐, 성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성애 교범인 카마수트라를 남긴 인도 역시 성을 금기시한다. 서구에 비해서 아시아는 성에 대해서 억압적이고 수줍어한다. 물론, 성진국 일본은 예외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를 장려할 필요도 없지만, 지나치게 억압할 필요도 없다. 건전한 성문화는 사회를 밝게 만들테니 말이다.

 

 

4. 민족주의는 악마인가?

 민족주의를 악마화 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주의를 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1민족 1국가의 역사가 깊지 않은 서구와 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민족은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을 순수 혈통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바라보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는 악마일까?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거짓말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라 말한다. '종교'와 '민족'이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민족을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민족주의에 쏟아지는 비난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아직 민족을 만들지 못한 국가의 민족 만들기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치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민족을 호출했듯이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독립투쟁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핵심 신화로 이용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집권하면서 1965년 9월 공산주의자 박멸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신화로 이용했다. G35S가 인도네시아의 주요장군을 살해한 사건을 수하르토가 격퇴하면서 그는 민족의 영웅이 되어 독재정치를 한다. 기존의 인도네시아 교과서에서도 수하르토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주요 장군들이 신체 중요부위가 잘라진체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주요 장군들은 공산주의자에게 신체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없으며, 신체 중요부위가 절단되지도 않았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인도네시아 현대사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설 때만이 인도네시아는 보다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민족만들기가 이뤄져야할 것이다.

  민족을 만드는데, 민족의 문화유산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재를 돌볼 경제적 여유가 없고,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문화재를 강탈당하고 있는 것이 아시아의 현실이다. 캄보디아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은 도굴과 약탈, 파괴를 겪어야했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맛는 유물만 살아남고 있다고 이책에서는 말한다. 약자의 힘은 단결에 있다고 한다. 약소국들이 많은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하여 문화재 도굴, 약탈, 파괴 문제를 다룰 때만이 해결의 실마를 얻을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시아의 민족만들기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잘못된 신화와 싸워야하며, 강대국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야한다. 아시아의 연대는 요원한 걸까?

 

 

 6.25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내전? 강대국의 대리전? 등등 수많은 평가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6.25가 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본에게는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인도는 비동맹의 리더로서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필리핀은 파병을 강요당했으며, 타이의 경우 군부가 부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6.25는 아시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말이다..... 나는 질문한다. 혹시, 당신에게서 아시아도 6.25와 같은 잊혀진 존재는 아닌가? 힘있는 강대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 갖으면서, 우리의 이웃인 아시아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심이 없다. 아시아는 제2의 6.25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시아는 바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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