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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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예전에 안도현 시인이 <백석 평전>을 썼단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오래 전에 알라딘 인터넷 서점 이벤트로 이 <백석 평전>을 전자책을 무료로 받은 기억이 있단다. 그래서 가끔 스마트폰으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책 보는 것이 익숙지 않더구나. 그래서 앞에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 두었단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읽은 박균호 님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백석 시인을 소개한 준 것을 보고,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고 싶었단다. 예전에 받은 <백석 평전>의 전자책을 아직도 읽을 수 있더구나. 그런데 전자책은 잘 안 읽어질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괜찮은 품질의 중고로 나와 있는 게 있어서 그걸 사서 읽었단다.

이왕 백석 시인에 관한 것을 읽는 김에, 관련된 책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연달아 읽었단다. 안도현 님의 <백석 평전> 백석의 시를 모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김연수 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 오늘은 먼저 안도현 님의 <백석 평전>을 이야기해 줄게.


1.

1912 7 1일 평안북도 정주라는 곳에서 태어났단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백기행이었어. 명문인 오산고보를 졸업했는데, 학창 시절 김소월 시인을 존경하여 시인에 대한 꿈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학교 선생님이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단다. 영어에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는구나. 나중에는 러시아도 잘 하셨다고 하니, 언어에 감각이 있으신가 보구나. 부럽네.

오산고보를 졸업했지만,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 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이 넉넉하지는 못했고 말이야. 이때 사업가 방응모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갈 수 있었단다. 친일 신문인 조선일보의 사장 방응모 맞단다. 골수 친일이 되기 전에는 학생들의 학비를 대주던 리즈 시절도 있었던 것 같구나. 방응모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4년 동안을 공부를 했어.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백석. 방응모의 부탁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된단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셋. 젊음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멋 내기 좋아하는 젊은이였단다. 모던 보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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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일보> 사옥은 태평로 1가에 있던 2층짜리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백석은 광화문을 지나 세종로를 걸어 신문사로 출근했다.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 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한 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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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번역으로 외국의 문학작품을 소개해 주기고 했어. 이때 허준, 신현중과 어울리면서 광화문 3인방이라는 별명도 생겼어. 허준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되었단다. 통영에서 온 박경련이라는 이에게 첫눈에 반했단다. 박경련은 이화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어. 박경련은 광화문 3인방인 신현중의 고향 후배였어. 그래서 백석은 신현중에게 부탁해서 같이 통영으로 박경련을 만나러 가기도 했단다. 하지만,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어.

백석은 이렇게 사랑만 한 것은 아니야. 틈틈이 쓴 시들을 모아 시집 <사슴>을 출간했단다. 100부 한정판이고, 가격도 다른 시집의 두 배 가격이 될 정도로 고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정말 멋쟁이로구나. 이 시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집이 되었단다. 그의 시가 유명하고 사랑 받는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기 때문이란다. 모던 보이였던 그에게서 그런 시가 나오다니, 내면의 순수한 시인의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나 보구나.


2.

2년 기자 생활을 마치고 백석은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함흥의 영생고보에 갔단다. 이곳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게 되었단다. 이 때 칠판 앞에서 찍은 백석의 사진이 그의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한 컷이 되었는데, 밝게 웃는 모습에 많은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때 제자들 중에 동화 작가로 유명한 강소천도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서울에서 더 위로 올라왔으니 사랑하는 박경련이 있는 통영과는 더 멀어졌구나.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갔어.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인지, 백석은 청혼하기 위해 다시 통영으로 갔단다. 하지만, 박경련의 부모님들이 반대했단다. 그 반대에 한 몫을 한 것이 백석 엄마가 기생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는데, 그 소문을 낸 이가 바로 백석의 친구였던 신현중이었단다. 신형중도 뒤늦게 박경련을 사랑해서, 연적인 백석의 험담을 했던 거란다. 깊은 좌절을 안고 함흥으로 돌아온 백석. 얼마 뒤 접한 신현중과 박경련의 결혼 소식은 얼마나 슬펐겠니. 그것도 친구의 배신백석은 이후 신현중과 연락을 끊었다고 하는구나.

….

백석은 함흥에서 또 한 명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지덕체를 고루 갖춘 진향이라고 하는 기생이었딴다. 진향과 사랑에 빠진 백성은 진향에게 자야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백석와 자야의 사랑은 이후에도 계속 된단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인데, 나중에 서울로 와서 고급 요정을 운영하게 되는데, 말년이 그 술집을 그대로 법정 스님께 시주를 해서 길상사라는 절을 창건하게 된단다. 법정 스님의 길상사가 요정을 시주 받아 지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는데, 그 분이 백석의 애인이었다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멋진 분들이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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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연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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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영생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와 산문을 쓰던 이 시절이 그 인생의 전성기가 아닌가 싶구나. 백석은 영생고보의 축구부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시합이 있어서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 출장을 왔는데, 학생들 관리는 하지 않고 자야의 집에 찾아가서 지냈다고 하는구나. 그것이 들통이 나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 일로 학교는 그만 두었다고 했어.

그리고 조선일보에 재취업을 해서 <여성>이라는 잡지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이 잡지가 크게 히트를 쳤어. 이 시절이 1930년대였는데, 우리나라 1930년대는 일제 침략이 길어지면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하나 둘 꿈을 접을 때였어. 여러 분야의 유력 인사들이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였단다. 문학을 하던 이들도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조선일보도 이 때부터 일본 찬양을 하기 시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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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1933년 일제의 기관총 구입비용 1,600만원을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전후해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7 1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일왕 부부 사진을 크게 실어 충성을 표시하는가 하면, 전쟁 발발 직후 8 2일자 사설에서는 출정 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라고 썼다. 그 후에는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내고 전쟁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도 군사헌금 1,000만원을 헌납하는 등 중일전쟁을 전후에 친일신문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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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유학까지 갔다 왔지만, 그는 한번도 일본말로 시를 지은 적이 없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이나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서정주나 이광수 등과 같이 친일로 돌아서지는 않았어. 국내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자, 이 시기에 만주 산징으로 이주하게 된단다. 그곳에서 화가 문학수의 동생인 문경옥과 결혼을 했지만, 1년 후에 이혼을 했단다. 이 문경옥이라는 분은 나중에 북한에서 최고의 여성 음악가가 된다고 하는구나. 그는 만주에 머물면서 일체 문학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단다.


3.

해방이 되고 나서 백석은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에 돌아왔단다. 그리고 예전 학창 시절 인연이 있던 조만식의 부탁으로 통역 비서 역할을 위해 평양에 왔단다. 그리고 리윤희와 결혼도 하였단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도 하고, 시도 다시 쓰기 시작했단다. 해방된 조국에서 의미 있는 일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삶을 그렸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라는 백성들의 행복한 삶을 그대로 두지 않았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해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단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창작 활동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있어서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위한 작품도 썼단다. 특히 동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동화시집들을 써냈어. 우리 집에도 백석의 동화 시집이 한 권 있잖아. 너희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아무튼 전쟁 후 북한에서 그의 창작 활동은 순탄치 않았단다. 일부 작품들에 대해 비판을 받게 되었고, 자아 비판을 받는 자리도 여럿 있었어. 그런 자아 비판의 결말은 함경도 삼수군에 가서 현지 지도를 하라는 것이었어. 말이 현지 지도이지, 거의 유배나 다름 없었단다. 고향도 아닌 오지 삼수에 가라고 했으니 말이야.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있단다. 함경도의 삼수군과 갑산군을 함께 부르는 말인데, 그 말의 숨겨진 뜻에는 엄청나게 힘든 오지를 뜻하고, 몹시 어려운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뜻에 있단다. 그러니 삼수군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 곳이겠니. 그래도 숙청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어야 했나. 남한 출신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많이 숙청당했던 시절이니까. 아무런 연고 없는 삼수군에서 그는 국가에 순응하면 잘 지냈단다. 중앙 정부를 찬양하는 시와 글도 쓰고 그랬단다. 하지만 끝내 삼수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1962 <조국의 바다여>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을 접었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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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조국의 바다여>는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아니, 그가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시였다.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 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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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창작활동을 그만두어서 1963년 즈음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래서 한 동안 백석이 그 때 죽었다고 알려졌었대. 하지만, 그는 삼수군에서 조용히 농부로 살아갔던 거야. 1996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 백석의 노년에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단다. 젊은 시절 모던 보이 백석의 모습은 간데 없고, 한 노인의 지나온 인생이 보였단다. 그의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행복해 보이더구나.

글쟁이가 글을 쓸 수 없던 많은 시간들누가 백석을 그런 삶을 살게 만들었는가. 아픈 우리나라 역사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비록 백석이 출간을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시골에서 써 놓은 글과 시가 있지 않을까. 자녀분들이 그 시와 글들을 잘 보관하고는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그의 미출시 작품들이 무더기로 공개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기대를 기대해 보며, 오늘 독서 편지는 마치련다.


PS:

책의 첫 문장 : 1945 8 25, 소련군 사령부는 경성에서 신의주를 운행하는 경의선 철도를 차단하였다.

책의 끝 문장 : 고형진의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문학동네, 2013)에 따르면 백석과 관련된 단행본, 학위논문, 평론, 에세이 등의 연구물이 8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 P16

백석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수업을 하거나 사적인 편지를 쓸 때에도 일본어를 섞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의사전달도 문학적인 표현도 조선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향 평안도의 방언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백석만의 특허상표였다. 그의 몸은 함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석은 시시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고향의 방언 때문에 외로움을 누를 수 있었다. - P161

일제는 황국 신민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굴레를 씌워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통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백석이 보기에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빠르게 미쳐가는 조선에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엄연히 민족과 언어가 다른데도 그 둘을 하나로 여기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성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선일체’의 수렁으로 빠져들 게 뻔했다. - P218

백석은 ‘1956년도 <아동문학>에 발표된 시인 및 서클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총평 형식의 글에서 시와 동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피력했다. 시의 요건은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 사색의 중요성, 언어를 부리를 법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한문학의 주류가 항일혁명문학에 이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주체문학으로 변화하면서 북한문학에서 자율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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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5-24 00: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진짜 ‘아! 백석!‘이네요. 저도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 나온 백석 스토리 넘 재미나게 읽었어요. 백석 평전도 담아놓은 책인데 이렇게 다시 떠오르니 읽어야겠어욤!ㅎㅎ

bookholic 2021-05-24 22:14   좋아요 3 | URL
농부가 된 시인...
하지만 그 영혼만은 영원히 시인이었을 거라 믿습니다.
노년의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시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mini74 2021-05-24 12: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백석 정말 좋아해요 *^^*

bookholic 2021-05-24 22:15   좋아요 4 | URL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지신 분 같아요~~^^

조그만 메모수첩 2021-05-24 18:5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실연과 배신의 상처가,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란 시구에 남았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필자가 시인의 여성들과 그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백석이 저버렸던 여성들의 아픔 역시 언급해줬던 것이 인상에 남았어요. 리뷰 읽으면서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던 사실 몇 개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bookholic 2021-05-24 22:18   좋아요 5 | URL
리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의 한계로 리뷰에 몇몇 오류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scott 2021-06-04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시인 백석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카~*추카~**

bookholic 2021-06-06 22:09   좋아요 1 | URL
ㅎㅎ 감사합니다... 변변치 않은 글에 이웃 북플러님들께서 ˝좋아요˝를 눌러 주신 덕분~~

그레이스 2021-06-04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당선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1-06-06 22: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늘 즐거운 시간 되시길...

새파랑 2021-06-04 2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 드립니다. 북홀릭님~! 딸과 아들에게 꼭 말하시길^^

bookholic 2021-06-06 22:11   좋아요 2 | URL
ㅎㅎ 당선작으로 받은 적립금은 우리 식구들 아무도 모르는 제 비자금입니다~~^^

서니데이 2021-06-04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1-06-06 22:11   좋아요 1 | URL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늘 즐거운 날들 되시길~~

강나루 2021-06-04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1-06-06 22:1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이하라 2021-06-05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1-06-06 22:1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주말도 휘리릭 가버렸는데, 새로운 한 주, 새로운 한 주 되시길...^^

초딩 2021-06-05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한에서의 생활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ㅜㅜ

아무튼,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bookholic 2021-06-06 22:13   좋아요 1 | URL
백석의 고향이 남쪽이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너무 안타까운 삶입니다...
축하 해주신 것도 고맙고요~~^^
즐거운 한 주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