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과 독화살 - 역마살로드, 사라져가는 세계의 마지막 기록
장준호 지음 / 시월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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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알라딘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독특한 책 표지와 그에 맞는 독특한 책제목 <휴대폰과 독화살>이 눈에 띄었단다. 책 소개를 보니 범상치 않은 책이었단다. 일단 지은이 소개를 보니 아빠와는 대척점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의 PD를 24년 동안 한 장준호라는 분인데, 안정적인 직업을 박차고 나가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신 분이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다른 일은 아니고 지난 24년 동안 했던 일이 연장선인데 공영 방송이라서 제한된 영상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답답함을 풀어내기 위해서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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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래서 힘들었다. 일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결국 방송국을 나왔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더는 내 성격을 속이기 어려웠다. 나는 원래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직접 움직이며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 가깝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보고 싶은 장면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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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상을 받아도, 시청률이 잘 나와도 정작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내 이름을 걸고, 내 시선으로 세상을 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한편으로는 무능하고 둔한 시스템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 혼자 하는 편이 낫겠다는 오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근거 있는 확신이었고 동시에 무모한 객기였다. 하지만 때로는 그 정도 객기가 있어야 인생의 방향을 틀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안전한 울타리를 부수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남의 이름 아래 잘 만든 결과물을 납품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실패하고 내 이름으로 살아남는 기록자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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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정적인 방송국을 그만두고 ‘역마살 로드’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정말 대단한 용기가 아닌가 싶구나. 아빠는 월급의 중독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데 말이야. 아빠는 이 ‘역마살 로드’ 채널을 몰랐어. 이 책을 보고서야 찾아보았어. 24년 동안 PD 경험과 그의 파트너이자 전문 촬영감독 서감독이 함께 해서인지 영상 품질이 정말 너무 좋더구나. 유튜브에서만 보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영상미였어. 아빠는 책을 다보고 나서 ‘역마살 로드’를 정주행하고 있단다.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휴대폰과 역마살>은 ‘역마살 로드’ 채널을 운영하면서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하는구나. 책도 알차게 잘 구성되어 있지만, 아빠에게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역마살 로드’라는 채널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겠구나.

범상치 않은 지은이 장준호 님은 젊은 시절 기타리스트로 밴드 활동을 하는 ‘미대 오빠’였더구나. 상금을 받으면 악기와 앰프를 사려고 KBS 단편영화제에 공모했다가 수상을 하고 나서 방송국 PD로 일하게 되었고 그 이후 24년을 일했다고 하더구나. 앞서 이야기했듯 방송국을 그만두고 지금은 ‘역마살 로드’를 운영 중인데 촬영감독인 서감독, 10개국어를 하는 통역 담당 존. 이렇게 셋이 함께 영상을 만들어간단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세 분의 케미가 정말 좋더구나. 눈을 호강하게 하는 영상미뿐만 아니라 다들 유머 감각이 있어서 미소도 자주 짓게 해준다. 그야말로 힐링이 저절로 되더구나.

…

 

1.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첫 번째 장소는 아마존 오지란다. 2000년대 크게 인기를 끌었던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15년 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가기로 했대. 오랜 시간에 걸려 에콰도르 아마존에 도착해서 바메노 공동체 마을에 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단다. 그런데 그들을 처음 맞이한 부족장이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휴대폰을 하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정글과 함께 하는 삶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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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원시의 아이들을 상상하며 33시간의 비행과 이틀간의 이동을 버텨온 우리에게, 정글 한복판의 미니마우스는 청바지를 입은 원주민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간이 멈춘 박물관이 아니었다. 디즈니 캐릭터가 카누를 타고 들어오는 현대의 아마존이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뒤로 문명의 파도가 얼마나 깊고 빠르게 이 정글의 심장부까지 들이쳤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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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최대의 적은 석유회사라고 했어. 자기들 멋대로 아마존을 훼손시켜 활주로를 만들고 시추 작업을 했어. 예전에 그들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총으로 공격 당해 그 이후로는 피해 지낸다고 하더구나. 지은이가 원주민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일과를 보내는데 그들이 너무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아빠가 더 걱정되더구나. 이름도 모르는 벌레들에게 물리고 정체도 모르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아마존 부족들은 자본주의 악령에 의해 점점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생활터전도 정글의 깊숙한 곳으로 더 이전되고 있었어. 과연 그들의 공동체 생활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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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오지는 탄자니아 하드자 부족들의 이야기란다. 하드자 부족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수렵채집 부족이라고 하더구나. 원래 그들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했대. 하지만 탄자니아 정부는 그곳을 관광지로 만들면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들을 내쫓아서 지금은 척박한 곳에서 힘들게 사냥을 하면서 지낸다고 하는구나. 그날 먹을 것만 사냥하고, 만약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날은 뿌리 식물로 연명하고 있대. 그런데 탄자니아 정부는 그들의 사냥 활동을 오히려 동물학대와 환경파괴범이라고 비난을 한대. 점점 수렵채집을 살아가기 어렵겠구나. 그러다 보니 하드자 부족 사람들 중 일부는 도시로 나가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그것에도 차별 받고 도시 빈민으로 살거나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구나. 지은이는 하드자 부족과 함께 사냥을 따라 나섰는데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죽어야 하는 장면을 만나면서 진정한 자연의 삶의 방식을 보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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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9)

그 장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죽은 원숭이도 안타까웠고, 크게 다친 개도 안쓰러웠다. 20년이 넘도록 다큐멘터리 PD로 현장을 다니며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무뎌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 기준으로 재단할 수도 없다. 하드자에게 사냥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냥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인간도, 개도, 원숭이도 모두 각자의 생존을 걸고 있다. 직접 사냥하느냐, 돈을 내고 도축된 고기를 사 먹느냐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지. 우리 역시 다른 생명의 죽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보지 않을 뿐이고, 저들은 그 과정을 피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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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오지는 인도네시아 토라자 부족들의 이야기란다. 외지 사람들을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는 토라자 부족은 배처럼 휘어진 지붕의 전통 가옥에서 살고 있단다. 그들은 독특한 장례 문화를 가지고 있어. 장례식에 돈도 많이 들여 엄청 성대하게 연다고 하는구나. 시신도 방부 처리해서 한 동안 집에서 모시고 그 후에는 동굴에 시신을 두는데 마네네라고 하는 축제 때는 그 시신을 다 꺼내서 새옷을 입히고 머리 단장도 새로 해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 사진도 찍는다고 하더구나. 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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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에콰도르 침보라소의 마지막 빙하 장수의 이야기란다. 우쉬카라는 여든 살의 어르신인데, 그의 직업은 고산 지대에 있는 빙하를 채굴하여 파는 빙하 장수라고 하는구나. 예전에는 빙하 장수들이 많았는데, 1980년대부터 냉장고가 보급이 많아지면서 빙하 장수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 우쉬카 혼자 남았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빙하를 채굴하려면 예전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구나. 지은이는 우쉬카와 함께 해발 5000미터에 가서 빙하를 캐는 경험을 하는데 그 과정이 고되고 전문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알게 되었어.

이 여행을 마지고 국내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우쉬카가 밭에서 일하다가 소에 받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대. 마지막 빙하장수의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구나. 영상과 책에 실린 사진을 본 그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아빠도 안타깝구나. 마지막 빙하 장수 우쉬카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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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이 이야기란다. 지구 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은 늘 전쟁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도시이지만, 신앙심 깊은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으로 소개해주었어.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가 얼른 자리에서 쫓겨나야 희망을 걸어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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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캄보다아 쁘릭뚤이라는 마을 이야기란다. 이 책에 소개된 마을들이나 부족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이름들이 왠지 정감들이 가는 이름들이구나. 쁘릭뚤은 호수 위에 수상 가옥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란다. 겉에서 보기는 낭만 있어 보이지만,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는 곳이란다. 먹고, 씻고, 싸는 일을 모두 같은 물에서 이루어진다. 아빠는 그런 상황이라면 제대로 먹지 못할 것 같은데, 지은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먹고 씻고 싸더구나. 이 곳의 주요 수입원은 악어 장사로 하더구나. 그래서 악어를 많이 키웠는데, 최근에 악어 판매가 급감하면서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악어 한 마리를 사서 악어 요리를 주문했어. 악어를 통째로 삶는 장면은 너무 생경한 장면인데 그 악어 요리로 동네 사람들 모두 함께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고는 아빠도 그 악어 요리의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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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고민 끝에 우리가 악어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이곳에 묵는 동안 숙식비와 촬영비를 따로 지불했지만, 그사이 받은 호의와 도움을 생각하면 이런 방식으로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온전히 마음 편한 결정은 아니었다. 내가 온갖 오지를 다니면서 이것저것 잘 받아먹다 보니 그런 걸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선택으로 한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아무래도 껄끄럽다. 이 악어도 생긴 게 무서워서 그렇지 사는 동안 편했던 생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좁은 우리에 갇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먹이를 받아먹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결국 사람 손에 잡혀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처지가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랑들에게는 실제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이곳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되는 만큼, 내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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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는 일본 후쿠시마의 후타바 마을이란다. 원전 사고 이후 15년이 흐른 후쿠시마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서 다녀왔다고 했어. 15년이 흐른 그곳은 여전히 방사능 수치는 높게 나왔고, 폐허간 된 마음은 2011년 달력으로 멈춰 있었어.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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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에서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아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마살 로드’ 채널을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보면서 힐링을 하고 있단다. 그들이 가는 곳들이 위험한 곳도 많아서 걱정이더구나. 이 채널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장PD, 멋진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갈아 넣는 서감독, 체력 담당, 통역 감당에 감초 역할까지 톡톡히 하는 존. 모두들 계속 건강하셔서 모르고 있는 지구촌 방방곡곡 아름다운 곳을 소개해 주셨으면 하는구나. 아빠가 이 채널을 알게 된 후 너희들에게 추천을 하고, 아빠의 지인들에게도 추천을 했는데, 채널이 좀더 성장해서 그들이 여행하는데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024년, 나는 다니던 방송국을 나와 대출로 마련한 6천만 원을 들고 아마존으로 들어갔다.

책의 끝 문장: 무엇보다, 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이들의 고민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정할 수는 없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도 할 수 없고, 문명으로 나가는 것이 반드시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이들을 보면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아마존이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내가 겪은 고생은 덜 겪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너무 쉽게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정글 깊숙한 곳에서 만난 그들의 고민은 낯설면서도 이상할 만큼 익숙했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 P71

더욱이 최근 몇 년 사이 하드자를 둘러싼 풍경은 더욱 기괴하게 변했다. 내가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은 카메라를 위해 ‘준비된 연기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유튜버들이 하드자를 찾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연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똑 같은 구도로 불을 피우고, 똑 같은 자리에서 춤을 추고, 카메라가 보기 좋은 각도에서 사냥 장면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지내봤기 때문에 안다. 진짜 사냥은 그렇게 찍을 수가 없다. 그 거칠고 가시덤불을 뒤덮인 산을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 P126

마네네라 불리는 이 축제는 우리 식으로 비유하면 설이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토라자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직접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머리를 손질하고, 먼지를 털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어떤 집은 고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어떤 집은 선글라스를 씌워주고, 누구는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한다. - P134

토라자에서는 장례 전까지 고인을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부르지 않고 ‘아픈 사람’이라는 뜻의 토 마쿨라로 여기며, 가족이 음식과 물, 담배를 바치는 관습이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들은 죽음을 우리처럼 어느 한순간의 단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함께 있는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아침마다 인사하고 물을 떠다 드리는 일이 가능해진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건너뛰었다가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누구는 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우연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몸은 멈췄어도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눈에는 낯선 믿음이지만, 이해하고 나면 이들의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관은 방 안에 놓여 있지만, 그 방은 무덤이 아니라 여전히 가족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 P155

이 위험한 곳이 이곳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굶주린 악어가 도사리고 있는 악어장 위를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닌다. 심심하면 호수로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이 아이들에게 최고의 장난감도 새끼 악어였다. 입을 리본처럼 생긴 끈으로 단단히 묶은 새끼 악어를 붙잡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놀았다. 물뱀을 잡아 장난감처럼 만지기도 하고, 악어장 주변에서 이것저것 주워 와 제 나름의 놀잇감을 만들기도 했다. 떠내려온 페트병이나 캔 같은 것들은 따로 모아 두었다가 고물상에 팔았고, 바퀴 빠진 장난감이나 깨진 생활용품이 떠내려오면 그걸 주워서 소중하게 가지고 놀기도 한다. 위험과 가난이 뒤섞인 환경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놀고 있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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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6-10-31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유튜브 중에서 역마살 로드의 영상미는 최고죠. 한때 구독자 10만이 안 될때 부터 보면서 왜 이렇게 좋은 채널이 안 뜰까 하면서 봤어요. 남들은 잘 가지 않는 오지로만 탐험하는 이분들이 이제는 책까지 나오고 방송에도 나오시고 이렇게 bookholic 님 리뷰까지 올리셨으니 역마살 로드가 마침내 성공하신 것 같아 제가 다 기쁩니다. ㅎㅎ
 
고종 황제의 고양이 - 대한제국 모닝 캄 프로젝트
로버트 W. 리치 지음, 류지영 옮김 / 지식상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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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서울신문 기자 류지영이라는 분이 있어. 류지영 기자는 2018년 임시정부 100주넌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을 주제로 쓰려고 했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기여를 외국인들 중에 손꼽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란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해 규탄하는 기사를 많이 쓰고 서양에 알리기는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란다. 예전에 독립운동 관련 책들을 통해서 베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로 베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베델이 36세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많은 일들을 하셨을 텐데, 안타깝구나. 그가 일찍 세상을 뜬 것도 일본의 탄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드는구나.

그가 죽은 후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신문 성향도 확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처럼 변질되고 말았다고 하니,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구나. <매일신보>는 해방 후 서울신문으로 이름으로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구나. 서울신문 류지영 기자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을 창간한 베델을 특집기사의 주체로 선택한 것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깊이 새겨져야 할 사람으로 베델을 소개하려는 이유도 있을 거야.

아무튼 류지영 기사는 베델에 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로버트 웰스 리치라는 미국인 기자겸 작가가 베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대. 기자로써 이런 자료를 발굴하면 얼마나 뜻 깊을까. 로버트 웰스 리치는 베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두 편이나 썼는데 첫 번째는 1912년에 쓴 <고양이오 양>이고, 두 번째는 1914년에 쓴 <황제의 옥새>라는 소설이라고 하는구나. 이 소설들을 국내에 소개하려고 준비하던 중 류지영 기자는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거기에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버트 웰스 리치의 소설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은 뒤로 미루었다고 하더구나.

2024년 베이징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국내로 다시 복귀한 다음, 이 두 소설에 대한 번역을 시작했고, 일부 역사적인 사실의 오류가 있어서 편역을 하기로 했대. 그리고 드디어 202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간하게 된 것이란다. 100년 넘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뜻 깊은 소설이 우리나라에 소개가 된 것이란다. 아빠가 작년에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고 너희들에게도 소개를 해주는구나. 소설 두 편이라고 했는데 그 소설을 “대한민국 모닝 캄 프로젝트”로 묶고, <고종황제의 고양이>라는 한 권의 소설로 편역해서 출간했단다.

 

1.

베델은 영국 브리스틀 태생으로 불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대. 일본에서 사업을 하다가 1904년 조선에 와서 정착을 하게 되었지. 그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과 조선에서 행하는 만행들에 대한 비판 기사를 썼단다. 베델의 미국인 기자 빌리가 이 소설의 화자로 이야기를 끌어간단다.

1905년 10월 하순, 빌리와 베델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애스터하우스 호텔의 술집에서 당시 조선과 어울리지 않는 벽안의 금발머리 여자을 보았어. 그 여자는 웨이터를 통해 베델 씨를 찾는다고 했어. 빌리는 그 여자에 대한 정체를 밝히지 않고 ‘소녀‘라고만 이야기했단다. 그러니 아빠도 지금부터는 그 여자를 소녀라고 이야기할게. 소녀는 빌리와 베델을 만나서 자신이 조선에 입국한 이유를 설명했어. 상하이에서 ‘아주 중요한 분‘의 심부름으로 조선에 왔고, 그들은 ‘프로젝트 모닝 캄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했어.

그 프로젝트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몰래 빼돌려 러시아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했어. 그것만이 일본의 침략 행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의 임무는 고종 황제를 만나서 상하이로 모셔가는 일이라고 했어. 하지만 어떻게 고종을 만나지? 소녀는 자신이 초상화 그리는 화가의 신분으로 고종을 만나겠다고 했어. 소녀는 인맥을 동원하여 고종과 대면하게 이르고, 소녀는 고종을 설득하여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했단다. 고종의 곁에는 일본외교관 하기와라가 있었는데, 하기와라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소녀를 보았어.

고종은 난향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를 무척 아꼈단다. 늘 곁에 데리고 있었어. 소녀는 이 작전을 혼자 하기가 버겁다고 생각하여 빌리와 베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들은 고종의 측근인 민영환 대감까지 합류하게 되었단다. 베델, 빌리, 소녀는 민영환 대감을 찾아갔고, 민영환 대감도 소녀의 계획에 동의하여 도와주기로 했단다. 소녀는 상하이로 ‘초상화, 성공, 만세‘라는 전보를 보냈고, 며칠 뒤 상하이에서 사냥을 즐기는 소녀의 친구가 와서 빌리가 안내를 맡게 되었어. 그 사람은 고종 황제를 탈출시키는데 도와줄 사람이었어. 작전 준비는 비밀리에 잘 준비되어 갔고, 고종도 동의하여 떠날 준비를 했단다.

거사일이 다가왔어. 그런데 갑자기 고종이 마음을 바꿔 안 가겠다고 했어. 지금까지 준비한 노고가 얼마인데,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민영환이 무당도 오늘이 좋다고 했다면서 고종을 설득하여 다시 가겠다고 했단다. 측근들의 설득보다 무당의 말을 더 신뢰했던 모습인데, 실제로 고종이 무당을 믿었다고 하더구나. 그날 밤, 고종이 궁궐을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된 일본군은 한강에 표류한 증기선까지 수색을 했으나 고종은 그곳에 없었어. 일본군이 고종을 수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종과 베델 일행은 그 증기선을 타지 않았던 거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다시 길을 떠나는데, 고종의 고양이 난향이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단다. 그러자 고종은 고양이 난향이 전에도 사전에 위험을 알아차린 적이 있다면서 이번에도 사전에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서 떠나지 않겠다며 또 말을 바꾸었다.

소녀와 베델은 황당해했어. 한낱 고양이 때문에 가지 않다니... 베델은 고종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민영환이 만류했단다. 결국 이 작전은 고종의 우유부단함으로 실패하고, 소녀와 빌리는 상하이로 떠났단다. 고종은 다시 궁궐로 돌아와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일본정부는 영국정부에 강력한 요청하여 베델이 재판을 받게 되고 금고형을 받기도 했단다. 지은이 로버트 W. 리치도 고종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2.

2부 이야기해도 해줄게. 베델은 감옥에 다녀온 후 더 전투력을 더 장착하고, 일본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 기사를 썼단다. 화자인 빌리는 1906년 말 다시 조선에 들어왔단다.

두 번째 이야기는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열렸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는 이야기란다. 1907년 5월 하순 서울에서 어떤 서양 중년 여성을 만났어. 그 여자는 도도새라는 별명을 가진 영국인으로 이름은 데오도시아 툴링이었어. 빌리는 친구가 운영하는 애스터하우스라는 호텔을 데오도시아에게 소개해 주었단다. 그녀는 호탕한 여인으로 일본 정보관에게도 큰 소리치는 여자였어. 1부에서 활약한 소녀가 연상되는 여자였단다. 데오도시아는 자신을 신지학자라고 소개했어. 신지학자라는 말이 낯설어 찾아보니, 직관이나 명상을 통해 신적인 지혜와 영적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베델은 1년간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소해서 애스터하우스에서 빌리를 만났단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는 데오도시아를 만났는데, 데오디사아가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우니… 아니, 그 소녀였단다. 1부에서 활약했던 소녀가 다시 등장을 한 거야. 이번에도 특별 임무를 받고 서울에 잠입한 거야. 그들은 개화 지식인 용치선이라는 인물을 만나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해 논의했어. 1부의 민영환은 실제 인물이나 2부에 등장하는 용치선은 지은이가 만들어낸 허구 인물이란 점은 참고하시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필요한 문서에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야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 옥새를 찍는 것이 소녀의 임무였단다. 하지만 고종 황제의 옥새는 일본이 가지고 있었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단다. 그런데 일본이 모르는 또 다른 옥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고종이 비밀리에 만든 옥새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거야. 바델은 아직 일본의 감시 대상이기 때문에 동참을 하지 못하고, 용치선, 소녀, 빌리 이렇게 셋이 금강산 유점사에 갔단다.

그런데 옥새를 보관하고 있던 유점사 주지가 답답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선왕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서 기다리라고 했어. 나라가 망할 판에 선왕들의 허락이라는 말로 기다리라니… 산속에서만 지내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서 빌리와 소녀는 답답해 했고, 용치선은 좀 기다려보자고 했으나 더 기다려도 옥새를 주지 않자, 용치선은 자신이 옥새를 훔쳐오겠다고 했어. 그렇게 옥새를 훔쳐서 서울로 향하는 길에 베델을 만났어. 일본군이 쫓아온다는 것을 알려주려 온 길인데 이미 늦었어. 일본군들이 그들을 쫓아와 대치하게 되었단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옥새를 그만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어. 그리고 연못에서 옥새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단다. 나중에 위조 옥새로 직인을 찍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희망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단다. 우리나라 대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일본의 적극전인 방해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란다. 이 소설에서는 재미를 위해서 가짜 옥새로 설정했었나 보구나.

두 번째 작전도 실패한 소녀는 조선을 떠나 그 이후에는 소식이 끊기게 되었단다. 첫 번째 작전은 고종의 우유부단함과 미신을 떨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고, 두 번째 작전은 주지 스님의 고지식함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구나. 지은이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델에라는 멋진 인물을 소개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더불어 500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이라는 나라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구나.

그가 이 소설을 쓴 지 100년이 훌쩍 지나서 그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나라에서 책이 출간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 사실을 알면 얼마나 뿌듯할까... 그것도 희망이 없던 그 나라가 역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문화강국의 반전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야. 뜻 깊은 소설 한 편 잘 읽었다.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내가 동북아시아의 먼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황제 퇴위의 숨은 이야기를 침묵 속에 묻어 버리면 누가 과연 그날의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 조선에서 항일 신문사를 이끌며 자신의 모든 힘과 의지로 불의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베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몇 안 되는 외국인이자, 조선의 황제를 대신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투사였다. 그는 일본의 끝없는 위협을 비웃으며 그들의 술수를 모두 까발렸고, 조선인들에게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베델의 펜은 칼보다 강했고 그의 외침은 천둥보다 더 크게 울렸다. - P24

"그래서 러시아 정보 당국이 저를 이곳으로 보낸 겁니다. 조선의 황제를 안전하게 상하이로 모셔 오라고요. 그가 서울을 무사히 탈출하면, 일본이 그토록 탐내는 조선 외교권 접수 문서에 옥새를 찍을 주인공이 사라지잖아요. 그 뒤로 황제가 러시아로 거처를 옮겨 보호받으면 일본은 그를 암살할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돼요. 그러면 각국은 일본을 겨냥해 ‘도대체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고 따져 물을 것이고 도쿄는 전 세계 언론의 십자포화를 피할 수 없게 돼요. 이쯤 되면 교활한 이토의 조선 병합 계획도 상당한 타격을 입겠죠." - P34

"한번은 군주께서 ‘궁궐의 점쟁이들을 은밀히 만나 언제 망명을 떠나는 것이 가장 길한지 점을 쳐 보겠다’고 고집하셨소. 나는 ‘이 중요한 계획이 밖으로 새 나갈 수 있다’고 간곡히 말렸지만 황제께서는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 믿을 만한 이들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자신하셨소. 인간의 선악을 주관하는 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중대한 국가 대사를 판단할 수 없다면서 말이오. 그때 화가가 강하게 항의했소.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을 일개 무당들과 상의하려 하십니까? 제가 정성껏 초상화를 그리는 군주는 자신의 고유한 권한조차 독립적으로 행사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분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라고요. 그러자 황제께서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나는 정말 바보다’라고 자책하셨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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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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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너무나 유명한 고전 소설인 조지 오웰의 <1984> 이야기를 하려고 해. 이 책은 이미 20년 전에 읽은 적이 있어. 20년 전이면 아빠의 기억 속에서 모두 사라져야 정상이지만, 이 소설은 인상을 주었는지 아빠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구나. 그런데 Shawn의 학원 숙제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해서, 아빠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가 20년 전에 읽은 <1984>는 청목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이번에 읽은 것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책으로 읽었단다.

읽고 나서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1984>의 기억은 그야말로 빵 부스러기 수준이었던 것 같아. 이번에 읽으면서 <1984>를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었어. 물론 아빠의 기억력으로는 또 얼마 못 가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겠지만 말이야. Shawn도 이 책을 읽었으니, 아빠가 구구절절 쓴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줄거리를 모르고 읽어도 지루한 글이니 그냥 이야기할게. 조지 오웰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아빠가 조지 오웰 평전과 에세이 책을 소개할 때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1.

때는 1984년. 지금이야 1984년이 먼 과거이지만, 이 책이 출간된 1949년에 1984년은 가까운 미래였단다. 세상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이렇게 3개의 초강대국으로 재편되었단다. 그들은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면서 상대의 존재를 자국이 존재하는 이유에 이용하곤 한다. 그 중 오세아니아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가이고,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야. 오세아니아에 소속된 런던에 살고 있는 39살 윈스턴 스미스라는 사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야.

그는 기록국 소속 진리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부서 이름에 ‘진리‘라고 적혀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역사를 현재 상황에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이란다. 역사를 대놓고 왜곡하는 일을 하는 부서야. 오늘날 빅 브라더가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일의 기록을 바꾸기도 하고 없던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한단다. 그러면 시민들은 그 기록으로 과거의 기억을 대체하게 돼. 오세아니아의 구호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야. 이 모순된 말을 오세아니아 국민들은 세뇌되어 당연한 진리하고 믿는다.

이 세계는 이곳 저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단다. 시민이라면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는데, 특이한 것은 노동자 계급은 텔레스크린이 감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이 세계에서는 노동자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있었어. 노동자는 동물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감시하지 않는다고 했어. 오세아니아는 감시 사회이자, 통제 사회이자, 자유가 억압된 사회였단다. 윈스턴는 이런 사회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 윈스턴은 이 사회에 저항하고 싶은데 자신의 힘은 너무 약하다는 것을 알았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일기 쓰기인데, 텔레스크린의 감시가 닿지 않는 집 구석에서 일기를 썼어. 윈스턴은 유전자가 이상한 지 빅 브라더의 세뇌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인 것 같구나.

윈스턴만 이 세상에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야. 반정부 조직인 형제단이 있다는 것을 들었어. 윈스턴은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을 고민했지만 방법을 몰랐지. 그런데 당의 간부 오브라이언도 이 조직의 멤버인 것 같은 강한 의심이 들었어. 그래서 오브라이언을 통해서 형제단에 가입하려고 생각했어. 저항의 상징 엠마누엘 골드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를 만나 본 사람은 없지만, 그가 반역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어. 그는 전 대륙의 공공의 적이었어. 윈스턴은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일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어. 자신도 모르게 일기장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라는 글을 썼어. 누군가 윈스턴의 일기를 본다면 윈스턴은 사형감일 것이야.

오세아니아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있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단다. 결혼이란 국가에 아기 낳는 봉사 정신이 있는 두 남녀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어. 윈스턴도 결혼한 적이 있었어. 캐서린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지만 이혼했어. 윈스턴은 목석 같은 여자와 살 수 없었어. 이 세상은 모두 행복하다고 세뇌를 받았지만 간단한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워 때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단다.

이 지옥 같은 세계의 기본적인 정치 이념은 전체주의라고 볼 수 있겠구나. 지은이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 소설을 통해 하려는 것 같았어.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자본주의를 악이라고 생각하도록 세뇌 당했어. 텔레스크린은 지금이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홍보를 해서 시민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런 사회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면… 하루도 못 살 것 같구나.

 

2.

1984년의 오세아니아가 만들어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던 대규모 숙청이라고 했어. 앞서 이야기했던 엠마누엘 골드스타인도 이때 도망을 갔어. 그 이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사회의 악으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단다. 오늘날 1984년의 세상은 자유가 없는 세상이야. 혼자 있는 것 자체가 법에 위반되는 행동이란다.

어느 날, 윈스턴은 선술집에서 혁명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는 노인을 만났어. 노인에게 옛이야기를 듣고, 골동상에서 혁명 이전의 물건들도 구경하였단다. 윈스턴은 그 물건들 중에 하나를 사기도 했어. 그런데 그 선술집에서 회사 동료인 여자를 만났어. 창조국 소속의 여자로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윈스턴은 자신을 감시하는 사상 경찰의 정보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얼마 후 회사에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윈스턴에게 비밀쪽지를 전해주고 사라졌어.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해서 그 쪽지를 펴보았는데 뜻밖의 문장이 써 있었어. ˝당신을 사랑합니다.˝ 정보원인 줄 알았는데 이런 쪽지를 보내다니, 함정인가? 함정이든 함정이 아니든 그 쪽지는 무척 위험한 쪽지였단다.

윈스턴은 하루 종일 그 쪽지와 그 여자 생각만 했어.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어.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그러니 그녀와 단둘이 있는 시간도 만들어내지 못했어. 쪽지를 받은 지 일주일 후 식당에서 그녀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고 약 1분간 둘만의 시간이 생겼어. 여자는 퇴근 후 승리광장에서 19시에 만나자고 했어. 승리광장은 늘 많은 시민들에 의해 붐비는 곳이었단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것이 오히려 감시의 강도를 낮추는 방법이기도 했어. 똑똑한 여자다. 그들은 많은 군중 속에서 만났고 몰래 손도 잡았어. 그 이후 그들은 감시의 망을 피하는 방법을 계속 찾아냈단다. 사랑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구나.

여자의 이름은 줄리아. 줄리아는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장소들을 알고 있었어. 그렇게 그들은 위험한 데이트를 시작했단다. 사랑의 나무를 키워나가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람다운 대화를 할 수 있어서 함께 있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어. 윈스턴과 줄리아는 가끔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늘 부족했어. 어떨 때는 군중 속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것이 고작일 때도 있었지. 그들의 밀회는 채링턴 씨가 운영하는 상점의 2층에서 자주 이루어졌단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텔레스크린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들은 이 세계에서 도피하려고 했지만 방법도 몰랐고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어.

그 즈음 당의 간부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접근을 했단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저항 단체 ‘형제단‘의 멤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접근을 어느 정도 반겼단다. 윈스턴은 조심스럽게 오브라이언에게 자신도 당을 전복하려는 비밀단체에 가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 과연 그의 행동이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을까. 오브라이언이 말하길 엠마누엘 골드스타인과 형재단의 존재한다고 이야기했어. 그러면서 형제단의 행동지침을 이야기해주었어.

...

 

3.

세상의 초강대국 세 개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한다고 했는데, 오세아니아는 얼마 전까지 유라시아와 이스트아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었어. 이렇게 되자 기록국은 이스트아시아와 관련된 과거의 모든 기록을 바꾸는 작업을 했어.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으로부터 받은 골드스타인의 책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체>를 읽고 이 세상의 실체를 알게 된다.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나뉜 세계에 대한 설명이 있었어. 세 개의 초강대국은 서로 교류가 거의 없고 서로 대립한 상태로 있는 것이 각 국가의 권력자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어. 그뿐 아니라 오세아니아의 영국사회주의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 빅 브라더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어.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 아래 2%로 이루어진 내부당이라는 지도부가 있고 그 아래 외부당이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어. 그런데 사실 빅 브라더가 진짜 존재하는지 의심이 되더구나. 빅 브라더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지도부들이 만든 허상일 가능성이 높았어. 윈스턴은 이 책을 감시를 피해 읽기 위해 채링턴 씨의 상점 2층에서 읽고 있었는데 검은 제복 입은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단다.

윈스턴은 체포되었고, 줄리아도 체포되어 따로 수감되었어. 알고 보니 채링턴 씨는 사상 경찰이었어. 상점 2층이 이유도 없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했어야 했다. 윈스턴은 다른 사상범들과 함께 수감되었어. 어떤 사람은 잠꼬대로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고 했는데 11살 먹은 딸이 신고를 해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윈스턴은 구타와 고문을 받으며 심문을 받았단다. 처음에는 자신의 주장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구타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거짓 자백을 했어.

오브라이언이 와서 윈스턴을 심문했어. 알고 보니 오브라이언은 형제단 멤버가 아니고 사상경찰이었어. 그는 윈스턴을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라며 그 정신을 치료하기 위해서 체포한 것이라고 했어. 윈스턴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오브라이언의 질문에 모두 ˝예˝라고 했단다. 윈스턴은 줄리아에 대해 물어보니 줄리아도 전향했다고 했어. 오브라이언은 덧붙여 이야기를 하기를 권력이 강해지면 더 무자비하고 전체주의는 강화되어 더 튼튼한 세계가 된다는 했어. 윈스턴은 공포와 증오와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진리는 빅 브라더의 말뿐이야. 결국 윈스턴은 항복하고 재교육, 그러니까 치료를 받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듣기로는 이미 중죄를 지었기 때문에 총살형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 했어.

윈스턴의 치료는 쉽지 않았어. 윈스텀이 마음에 있는 진심을 말하는 실수를 했다가 공포의 101호살로 보내졌어. 101호실에는 녹색 천으로 덮인 두 개의 테이블이 있었어. 101호실은 죄수가 가장 끔직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고문한다고 했어. 윈스턴이 갔을 때는 윈스턴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쥐가 있었어. 쥐가 들어있는 마스크를 윈스턴에게 씌웠어. 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렇게 강제로 전향한 윈스턴은 석방되었단다.

어느 날, 우연히 줄리아를 만났어. 여전히 그녀를 원했으나, 줄리아의 눈동자에는 경멸과 혐오의 빛이 서려 있었어. 줄리아와 윈스턴 모두 자신이 배반했다고 고백을 하며 용서를 구했어. 이제 윈스턴은 삶이 무의미해졌어. 카페에서 하루 종일 술이나 먹으며 시간을 축냈지. 그런데 무장한 간수가 나타나 윈스턴의 머리에 총알을 박았단다. 윈스턴은 죽기 전 드디어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지은이 조지 오웰은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정리해 주었는데 그 세계 신어의 목적은 필요 없는 언어들을 줄이는데 있었어. 예를 들어 동사와 명사의 불규칙한 변화를 없애고 규칙적인 변화로 통일시켰단다. 그런데 아빠는 이렇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불규칙 변화가 우리를 엄청 고생시키잖니.

....

이 소설은 지은이 조지 오웰의 마지막 작품으로 1946년에 쓰기 시작해서 1948년에 완성하여 1949년에 출간했단다. 이 작품은 너무 유명해서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평가하고 지은이가 이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해석을 했기에 아마추어인 아빠가 평가를 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일인 것 같아 생략하란다. 그저 전체주의에 대해 이렇게 극도로 비관적인 예측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지은이 조지 오웰의 천재성에 경의를 보낸다.

…

이렇게 독서 편지를 쓰고 아빠가 20년 전에 쓴 <1984>의 리뷰를 다시 한번 읽어봤어. 글솜씨야 그때나 지금이나 졸필이지만, 당시 리뷰에는 이상하게 젊음이 묻어 있는 것 같더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초기의 위태로웠던 시절에는 당이 세습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대 세력을 무마시키는 작용을 했다. 소위 ‘특권 계급’이라는 것을 상대로 투쟁해 온 지난 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은 세습적이 아닌 것은 영구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들은 과두 체제가 영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굳이 드러내 놓고 사실 그대로를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세습적인 귀족 사회는 늘 단명했지만 가톨릭교회 같은 선임 체제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과두 체제의 본질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이어지는 부자 세습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세계관이나 생활양식 등을 산 사람이 고수하는 데 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한 지배계급이다. 당은 그들의 혈통이 아니라 당 자체를 영속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계층적 구조를 언제나 동일하게 유지하는 한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 P287

윈스턴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피로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열정에 들뜬 광적인 빛이 오브라이언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오브라이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은 자체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나약하고 비겁한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수호할 수도 없거니와 진리와 접할 줄도 모른다. 당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자기보다 강한 타인에 의해 통치되거나 체계적으로 기만당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와 행복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데, 대부분 행복을 더 선호한다. 당은 약자의 영원한 수호자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하며, 선을 구현하기 위해 악을 행하는 헌신적인 집단이다. - P362

"우리는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물질도 지배할 수 있네. 실재란 머릿속에 있지. 자네도 차츰 알게 될 걸세. 우리가 못하는 건 없네.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도, 공중을 날 수도 있지. 그 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네. 원한다면 비눗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지. 당이 원하지 않으니까 안 하는 것뿐이네. 자연의 법칙에 대한 19세기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만 하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창조하지."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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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2022 서울국제도서전 <다시, 이 책> 선정작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 / 산지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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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몇 년 전에 독립운동가 박열에 관한 책을 읽었어. 그 전에도 다른 독립운동 관련 책에서 단편적으로 읽고 나서, 박열에 대한 책을 읽었어. 위 책들을 통해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를 알게 되었지.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당당한 모습과 박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본인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했던 사람. 그래서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책도 읽어봐야겠다고 검색을 해 보았더니,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평전이 한 권 있었고,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직접 쓴 옥중수기가 한 권 있었어. 그 중에 가네코 후미코가 직접 쓴 책 <나는 나>라는 책을 읽었단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이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감옥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나중에 작가로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 기준으로 잘 쓴 글은 읽기 편하고 매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잘 읽혔단다.

가네코 후미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천황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어. 이때 판사로부터 재판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대기에 대해 쓰라는 명령을 받아 쓴 글이란다. 아빠가 이런 명령을 받아 글을 쓴다고 하면 원고지 10장이나 채울 수 있으려나. 가네코 후미코는 당시까지 자신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여 책 한 권의 분량을 써냈단다. 박열과 만난 이후에 대한 내용을 끝부분 아주 조금만 나오고, 대부분이 박열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란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아내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 또한 고난과 역정의 시간이었고, 자기 성장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삶이더구나. 그래서 더욱 그의 자살이 안타깝구나. 그런데 진짜 자살한 것이 맞는지는 의심스럽더구나. 그의 글을 보면 희망과 꿈이 있어서 감옥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야.


1.

가네코 후미코는 요코하마 고토부키초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고토부키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형사였단다. 후미코의 기억에 따르면 네 살 때까지는 무척 행복했대. 하지만 그 행복은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고, 집안은 늘 시끄러웠어. 한번은 이모가 병원 진료를 받으려고 후미코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새로운 불륜 상대가 다름 아닌 이모였던 거야. 그 일 때문인지 아버지는 경찰서까지 그만두게 되었어.

결국 후미코가 일곱 살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단다. 후미코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남동생은 아버지가 데려가 이모와 재혼했어. 게다가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까지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은 상태였어. 그렇다 보니 후미코 역시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았지. 호적이 없는 무적자였던 후미코는 학교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단다. 어머니가 무적자도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서 겨우 입학은 했지만, 학교에서 가해지는 차별은 무척 심했어. 학년을 마칠 때 주는 수료증조차 받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이후 어머니도 생계를 위해 다른 남자와 살아야 했어.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해 헤어졌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 그렇게 고바야시라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어. 결국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바야시의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게 되었단다.

고바야시의 부모님이 후미코를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분들 역시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어. 학교에 적은 두었으나 꾸준히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 후미코의 어머니가 고단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외가에서는 외삼촌을 보냈어. 외삼촌은 고바야시의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어머니와 후미코를 외가로 데려왔단다. 당시 어머니와 고바야시 사이에서 태어난 '후루코'라는 아기가 있었는데, 후미코는 동생 후루코를 무척 아꼈기에 헤어지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했어.

외가에 온 뒤에도 안정이 찾아오지는 않았단다.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고, 후미코는 외삼촌 댁에 홀로 남겨져 지내야 했거든. 어린 시절부터 후미코의 삶은 온통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 얼마 후 어머니가 재혼하여 자신과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된 것 또한 후미코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큰 슬픔이었을 거야.


2.

어느 날,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후미코의 친할머니가 찾아왔어. 친할머니는 조선 땅에서 고모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후미코를 조선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지. 결국 후미코는 일본을 떠나 조선 충청도 부강이라는 곳에 오게 되었단다. 부강에는 일본인들도 정착하여 40여 가구가 모여 살았고, 나머지는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어. 이때부터 조선에서 7년간 지냈어. 친할머니의 집은 형편이 나은 편이어서 후미코는 학교도 정식으로 다닐 수 있었단다. 그렇다고 할머니와 고모, 고모부가 후미코를 따뜻하게 대해준 것은 아니었어. 아빠가 후미코의 글을 통해 느낀 것은 거의 학대를 받는 수준이었단다. '그럴 거면 왜 데리고 간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지. 학용품이 필요하다고 해도 사주지 않았고, 후미코가 열두어 살이 되었을 때부터는 식모처럼 부려 먹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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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2)

이웃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근처 들판에서 놀곤 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마당 청소 등을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누구누구야, 하며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토라지거나 화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려왔다. 뜰 앞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보면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데 모여 오비가 땅에 끌리는 줄도 모르고 뛰어놀았다. 잡거나 잡히거나 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얼마나 즐거울까. 얼마나 자유로울까.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가난뱅이’가 부러웠다. “우리 집은 말이야. 가난뱅이들과는 격이 달라. 아이를 밖에 내팽개쳐둘 순 없어.”라고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고, 그 ‘고상’한 교육방침에 따라 집에 갇혀 있는 내 자신이 불쌍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이 단지 나를 노예처럼 부리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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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코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커서 성적도 무척 우수했어. 하지만 그곳에서도 다른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단다. 후미코가 태어난 이후로 행복했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스스로도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까?' 하고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구나. 조선에서의 7년 동안 구박만 받고 사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결국 할머니에게 쫓겨나듯 조선을 떠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단다. 갈 곳이 외할머니 댁밖에 없어서 그곳으로 향했어. 처음에는 반겨주는 듯했으나 외가댁 사정 역시 여전히 여의치 않았단다.

…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와 그동안 미안했다며 후미코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어. 이번에는 아버지와 이모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갔지.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손을 내민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더구나. 아버지는 후미코를 외삼촌과 결혼시켜 승려였던 외삼촌의 사찰 재산 일부를 차지하려고 거야. 이미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 모종의 약속까지 오간 듯했어. 이런 게 무슨 부모인가 싶어 참 씁쓸했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미코는 아버지를 더욱 경멸하게 되었어. 후미코는 아직 나이가 어려 독립할 처지가 못 되었기에, 아버지와 외삼촌 앞에서 일부러 반항적으로 행동했지. 이에 외삼촌은 아버지에게 후미코와의 파혼을 선언했고, 격분한 아버지는 후미코를 모질게 때렸단다.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집에서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후미코는 무작정 차비만 챙겨 집을 나와 도쿄로 향했어. 당시 후미코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단다. 아니 벌써 열일곱 살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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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나의 불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줄곧 학대당했다. 나는 ‘자신’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모든 과거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도, 외삼촌에게도, 이모에게도. 아니,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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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살고 계신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한 달 가량 신세를 지다가, 숙식을 제공하는 신문사에서 신문팔이 일을 시작했어. 그렇게 번 돈으로 공부도 병행했단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신문을 팔아야 했기에 학교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기는 어려웠어.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같은 학교 동급생인 이토의 권유로 신문팔이를 그만두고 비누 가루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벌이가 시원찮았단다. 아빠가 보기에는 적더라도 정기적인 수입이 보장된 신문팔이가 비누 가루 장사보다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조언을 해준 사람이나,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실행에 옮긴 후미코나 선뜻 이해되지 않았어. 아직 어려서 사리에 어두웠을 수도 있고, 아빠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결국 비누 가루 장사는 얼마 못 가 그만두고, 이번에는 식모살이를 시작했어. 하지만 이 역시 노력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었단다. 결국 다시 작은 외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집안일을 돕는 조건으로 돈을 받기로 하고, 덕분에 학교에도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단다. 후미코에게는 '학업'이라는 꿈이 있었기에 그 모진 시련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구나. 사랑에 눈뜰 나이가 되면서 외박을 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작은 외할아버지 댁의 눈치를 보게 되었어. 결국 그곳을 나와 홀로 독립하게 되었단다.

이때부터 자유연애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어.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조선인 친구들과도 인연이 닿았단다. 물론 그중에는 여자를 한낱 노리개로 여기는 못된 이들도 있었어. 그러던 중, 조선인 친구 ‘정’을 통해 어떤 시를 건네받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단다. 그 시는 아빠가 몇 년 전에 박열에 관한 책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야기했던 ‘개새끼’라는 시다. 제목부터 너무 강렬한데, 다시 한번 그 시를 적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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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

-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짓는

달을 보고 짓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

후미코는 ‘정’에게 그 시의 지은이가 누구인지 몰아보았고, 후미코는 박열을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그렇게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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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나는 당신 가슴속에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했어요. 당신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오. 나는 그저 죽을 수 없어 살고 있는 사람이오.”

그는 이렇게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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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지만 박열과 만난 이후의 이야기는 이 책에는 거의 실려 있지 않단다. 음… 박열과 일은 이미 재판부도 잘 알고 있거나 박열과 일은 재판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짧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단다. 그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사람이 정말 자살을 선택했을까? 아빠는 믿기지 않는구나. 당시 일본의 감옥에서는 여러 의문사가 많던 시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네코 후미코도 그런 희생자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구나.

….

이 책을 통해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더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아. 나중에 평전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다이쇼 12년(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책의 끝 문장: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나는 앞에서 우리를 버리고 간 아버지가 홀연히 찾아와 고무공을 사준 것을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때 얼마나 아버지가 그리웠는지. 하지만 나를 꼭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아버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한 상태였다. 단 한 사람, 어머니만을 믿고 의지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마저 나를 버리고 간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유곽의 기생으로 팔려 한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그저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팔아버리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 P82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 속에 나를 혼자 두고 갔다. 그동안 너는 몇백 번 몇천 번 나를 지나쳐 갔다. 늘 곁눈으로 흘끗 보며 말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너는 나를 데리러 왔구나! 너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아아. 어디든 데려가주렴! 얼른, 얼른! 그저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렴!’ - P185

사회주의는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뿐이었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 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조선의 할머니 집 아인 고 씨를 동정했던 것도, 불쌍한 개마저 동지처럼 느꼈던 것도, 그 외에 이수기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주위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불쌍한 조선인에 대해 한없이 동정했던 것도 이러한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 - P331

실제로 당시의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열정을 갖던 당시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고학을 하더라도 훌륭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하다고 대접받는 사람만큼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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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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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천명관 님의 소설을 읽었단다. 천명관 님이 소설을 쓰신 것도 오랜만 이라고 하더구나. 김언수 님의 <뜨거운 피>라는 소설을 천명관 님이 영화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첫 영화감독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천명관 님과 김언수 님을 좋아하고, 소설 <뜨거운 피>도 재미있게 봤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 <뜨거운 피>는 보질 못했구나. 아무튼 그렇게 영화감독을 하시느라 바쁘셔서 그런지 한 동안 새로운 소설 소식이 없었단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천명관 님의 신간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바로 클릭해 보았단다. 음, 작가님 사진도 나왔는데, 아빠가 알고 있던 모습에 비해 많이 중후해지고 세월을 비껴가지 못하신 모습이었구나. 그 전에 천명관 님의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었으니 이번 신간도 바로 주문을 하고 바로 읽었단다.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천명관 님 작가 특유의 서사성이 돋보여서 그 자리에 앉아서 다 읽었단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된 시점의 한 고아의 성장기라고 짧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영화감독으로 입봉하셔서 그런지 그대로 한 편의 영화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 그럼 소설 <아코디언> 이야기를 해줄게.

 

1.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아코디언은 요즘에 흔히 볼 수 없는 악기로, 양손으로 건반으로 누르고 주름상자를 밀고 당기면서 공기를 통과시켜서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로 손풍금이라고 해.

...

주인공 동이는 전쟁을 겪으면서 부모님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었단다. 동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감감무소식이었어. 동이의 어머니와 동이가 함께 피난을 오다가 동이 혼자 배에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어.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설에서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유명한 흥남 부두에서 있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동이가 홀로 타게 된 것 같더구나.

그렇게 남쪽으로 홀로 내려온 혼자가 된 동이는 양목사를 만나 앵벌이를 하게 되었어. 양목사는 해방촌 산자락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전쟁 고아들을 데려다가 앵벌이를 시켰어. 장님 소녀인 연이, 팔 잃은 아이인 깜상, 앉은뱅이 거북이 등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의 수입이 좋다고 양목사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데리고 있었어. 양목사를 아이들을 툭하면 때리고 핍박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어. 하지만 아이들은 갈 곳도 없고 도망가기도 쉽지 않았어. 아이들을 관리하는 무시무시한 삼촌 ‘아미‘가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지.

어느 날 동이는 백화점 앞에서 앵벌이를 하는데, ‘구직‘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는 다리 하나 없는 상이군인과 친해지기도 했어. 그 상이군인은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가 다리를 잃었는데,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직접 직업을 구하려고 길에 나선 거야.. 쉽지 않았지. 다들 어려운 시기였지만 상이군인들은 어떻게든 보상을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 후 그 상이군인은 달리는 전차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단다.

...

양목사는 아이들을 잡아두기 위해 구름탄이라는 약을 먹였는데, 그것은 마약이었어. 마약에 중독된 아이들은 구름탄 때문이라도 다른 곳에 가지 못했단다. 그들이 사는 판잣집에 연이 할아버지의 유품인 아코디언이 한 대 있었어. 동이는 교회에서 풍금을 치던 엄마가 생각나기도 했어. 동이는 음감이 좋았어. 절대음감이라고 해두자. 연이의 아코디언을 연주해 보았는데 곧잘 잘 했어. 그 이후 연이와 짝을 이루어 앵벌이를 했단다. 동이는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장님인 연이는 연주에 맞춰 노래를 하고... 처음에는 찬송가를 주로 불렀는데, 나중에는 ‘목포의 눈물‘ 등 대중가요를 불렀어.

동이와 연이의 수입이 짭짤했단다. 깜상이라는 아이가 누명을 쓰고 양목사에게 매타작을 당한 일이 있는데, 이 일이 있고 깜상은 도망쳤어. 그러나 마약 중독 때문에 다시 돌아와 약을 달라고 했어. 아미 삼촌이 그를 때리려고 하자 동이가 저항하며 막으려고 했고, 아미 삼촌은 동이를 삽으로 내려치려는 순간, 양목사가 와서 말렸단다. 이렇듯 그들의 판잣집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언제 무슨 일이 날지 몰랐어. 아무튼 양목사는 깜상을 다시 받아주었단다.

...

어느 날 빌리 아저씨라는 미국 사람이 와서 찬이를 입양한다고 했어. 찬이는 이제 미국에서 가서 살 거라고 했어. 그런데 며칠 뒤 순사가 와서 아미 삼촌을 찾았어. 아미 삼촌이 빌리 아저씨를 죽였다는 거야. 사실 빌리 아저씨는 자선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어. 찬이를 입양시켜서 미국에 간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그런 빌리를 아미 삼촌이 죽였다고? 음.. 살인이 나빠도 아미 삼촌의 속마음은 겉모습과 좀 다른 가 보구나. 그런데 순사가 양목사의 판잣집에 아미를 찾으러 왔다가 양목사가 불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양목사를 체포해 갔어. 아미 삼촌은 도망가고, 양목사는 체포 당하고 판잣집에 아이들만 남게 되었어. 그렇게 아이들만 남았는데 판자촌에 불이 났어. 그 불러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 세 명이 죽고, 동이는 앉은뱅이인 거북이를 구출해서 살려주었단다. 그런데 그 화재 후 연이가 사라졌어.

남은 아이들은 동이, 깜상, 거북이를 중심으로 굴바위 아래에서 지내다가 판잣집을 다시 만들어 함께 지냈단다. 동이가 아코디언을 연주해서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앵벌이로 돈을 벌어 쌀도 사서 밥도 직접 지어 먹었어. 양목사가 없으니 오히려 그들은 좀더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어.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아이들이 돈을 빼돌리는 경우가 있었어. 거북이는 양목사는 없지만 어느 정도 기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동이에게 이야기해서 규율을 만들자고 했어. 그렇게 본의 아니게 동이가 대장 노릇을 했어. 그들은 돈도 모아서 함께 관리하면서 지냈어.

..

어느 날 동이는 음악소리에 끌려 미군부대 안 클럽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진짜 밴드 연주를 보게 되었어. 그 밴드 연주를 듣고 감동을 받아 집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뿐이었어. 동이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 미키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미키가 동이의 아코디언 연주 솜씨를 보고 동이를 미군부대 밴드의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주었어. 실력은 좋지만 동이는 악보도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연주들과 합주가 어렵다면서 오디션에서 탈락했어.

....

 

2.

얼마 후 양목사가 다시 움막에 돌아왔어. 양목사는 다시 예전처럼 아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구름탄을 먹이려고 하자, 동이가 저항했어. 그러자 양목사는 장작으로 동이를 두들겨 팼어. 그러자 아이들이 일제히 양목사에게 달려들어 양목사를 공격했어. 이젠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었어. 양목사 없이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깨달았어. 양목사는 아이들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고 속옷만 입힌 채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어. 밤에 동이가 밖에 나오니 양목사가 풀어달라고 하자, 동이는 하느님이 계시면 양목사를 죽지 않게 둘 것이라며 돌아섰어. 다음 날 아침 양목사는 사라지고 없었어. 누가 풀어준 것일까? 양목사는 도망가다가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어 다시 움막으로 데리고 왔어.

…

동이는 하우스보이 미키가 미군부대의 식당에서 설거지 일자리를 알아봐 주어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전차에서 임신한 연이와 마약에 절어 절룩거리는 아미 삼촌이 앵벌이를 하는 것을 보았어. 판자촌에 화재가 났을 때 사라진 연이가 왜 이곳에? 그렇다면 아미 삼촌이 연이를 데리고 간 것일까? 동이는 면접을 뒤로 하고, 몰래 연이와 아미 삼촌의 뒤를 따라갔어. 아미 삼촌은 여전히 연이를 폭행하고, 자신은 마약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어. 동이가 연이에게 알은 채를 하고 함께 도망가자고 했더니, 연이는 아미 삼촌을 놔두고 못 간다고 했어. 그때 정신을 차린 아미 삼촌이 동이를 알아보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

동이는 아미 삼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 동이가 가지고 있던 연이의 아코디언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 아미 삼촌이 연이의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말이지… 그걸 아미 삼촌에게 물어보니 아미 삼촌이 이야기하기를, 그 사람은 연이의 친할아버지가 아니라고 했어. 연이를 앵벌이시키는 노인일 뿐이라고 했어. 그리고 도망 못 가고 앵벌이 하는데 유리하게 하려고 연이 눈도 그 노인이 멀게 했다는 거야. 연이와 아미 삼촌과 헤어지고 다시 판짓집으로 돌아왔어. 부상을 입고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양목사가 죽여달라고 애원했어. 동이가 양목사를 죽이려고 하자 거북이가 말렸어. 그 사이에 양목사는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고 말았단다. 동이와 아이들은 양목사를 뒷산에 묻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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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연이가 찾아왔어. 아미 삼촌이 죽었다고 했어. 연이는 얼마 후 아이를 낳았단다. 동이는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선언했어. 동이는 점점 대장 노릇이 아닌, 대장이 되어가는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날 육손이라는 사람과 샘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그들은 양목사가 자신들에게 빚이 있다면서 갚으러 왔다고 했어. 육손과 샘은 양목사와 아미 삼촌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들이었어. 결국 동이와 아이들은 양동에 있는 샘의 판잣집으로 이동해야 했고, 그 전보다 더 다양하고 고된 일을 해야 했어. 하루 종일 앵벌이를 하고 집에서는 담배 마는 일을 해야 했어. 동이는 깜상과 몰래 음모를 꾸몄어. 동이와 깜상은 그들의 돈통에 대한 정체를 샘에게 알려주고 그 돈통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면서 샘을 판잣촌에 있는 우물로 유인하여 그곳에 떨어뜨려 죽였단다. 그리고 그들은 동대문에 있는 육손의 거처에 갔어. 그곳에서 연이의 아들 돈이를 몰래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는 찬이를 만나게 되어 찬이도 구출했어. 그런데 또 뜻밖의 사람을 만났어. 미키가 발에 차꼬를 차고 묶여 있는 거야. 미키는 동이를 보자 미안하다고 했어. 자신이 동이의 거처를 육손에게 알려주었다고 했어. 미키는 발에 차꼬가 채워져 있어서 구하지 못했어.

동이는 구출한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역으로 향했단다. 동이와 깜상은 샘을 죽이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갈 계획을 사전에 세웠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모두 서울역에 와 있었어. 동이는 다른 아이들을 부산으로 모두 보내고, 자신은 할 일을 마치고 가겠다면서 부산에서 만나자고 했단다. 그것이 아이들이 본 동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어.

 

3.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동이의 아코디언을 물려받은 홍이라는 아이가 동이를 찾으려고 서울에 왔어. 홍이는 우여곡절 끝에 미키를 만났어. 미키는 5년 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어. 동이는 다시 미키를 찾아와서 미키를 구했으나, 육손한테 들켜서 함께 도망을 갔다는 거야. 그러다가 동이는 미키를 먼저 보냈다고 했어. 동이는 육손과 싸우다가 채석장 절벽 아래로 떨어졌어. 정신을 잃은 육손을 남겨두고 동이는 도망을 치고 때마침 시위대가 거리에 가득 차 있어서 그 시위대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지만 육손이 그곳까지 동이를 찾아왔고, 동이는 결국 육손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단다.

미키는 동이와 사전에 정했던 약속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동이는 오지 않았어. 그래서 동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대. 그것이 홍이가 미키로부터 들은 동이의 이야기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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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년이 지나고, 육손은 여전히 아이들을 앵벌이 시키는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전차에서 신문팔이 소년과 부딪혔는데 갑자기 육손은 면도날에 목이 베여 피를 철철 흘리다가 죽었단다. 그 신문팔이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단다. 그 소년은 누구였을까? 지금까지 다 이야기하고 맨 마직을 이야기하지 않냐는 너희들의 원성이 들리는 듯 하구나. 나중에 직접 확인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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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끝나기 전에 동이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동이의 엄마란다. 동이가 전쟁 중에 헤어진 엄마와도 다시 만나길 바랬으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구나. 결국 만나지 못하고 끝나 버렸으니… 전쟁이 아니었다면 동이와 친구들이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전쟁은 약한 자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 같구나. 오늘날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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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듯이 천명관 님의 이번 소설 <아코디언>은 한편의 시대극을 보는 듯했어. 앞으로는 자주 소설을 출간해주시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는 마치련다.

 

 

 

PS,

책의 첫 문장: 버스정류장엔 쯔그러진 깡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훗날, 동이는 우물가에서 들었던 울음소리가 실은 귀신의 소리가 아니라 아코디언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아코디언이 전해주는 소리에 늘 슬픔과 분노만 담겨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거기엔 수많은 사연과 감정이 뒤엉키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동이는 연주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았다. 아코디언을 치는 동안, 슬픔과 고통은 깊은 깨달음으로 정화되고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졌던 진실은 거울처럼 선명해졌다. 그렇게 동이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통해 벽 너머의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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