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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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국어책(?)을 한 권 소개할게. 아빠가 학창시절 어렵다고 생각한 과목 중에 하나가 국어였단다. 주제 파악을 하거나 문맥의 의미하는 바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어. 그리고 읽는 이에 따라 주관적인 생각이 다르니, 같은 글을 봐도 그 글에서 느끼는 감상이 다를 수 있는데, 한 개의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핑계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요즘도 책을 읽고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이 아빠의 주관적인 느낌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읽은 느낌이나 작가가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제는 그것에 틀렸다고 채점을 받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구나.

가끔 너희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때, 국어책을 들고 오면 바짝 긴장하게 되더구나. 얼마 전 인터넷서점에 눈에 띄는 국어 책이 한 권 있었어. 평점이 만점을 육박하는 그런 책이었지. 황선엽이라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 쓴 <단어가 품은 세계>라는 책이야. 부제로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수업이라고 적혀 있었어. .. 어휘력을 높일 수 있다고? 이 책을 읽으면 너희들이 물어보는 국어 문제에 좀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은 아빠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단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참 재미있고 유익하고 하겠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첫 문장으로 대신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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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어의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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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던 말, 무심코 쓰던 말…. 그 말이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냥 쓰는 말그런 말들의 유래를 이야기해주는 그런 책이란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날마다 하는 양치질이라는 말의 유래 같은 거..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양치질이라는 말누군가 그 말이 어떻게 생겨났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좋을 양()에 이 치()라고 이야기할 것 같구나. 그런데 아니었어. 단어라는 것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쓰다가 정착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양치질도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더구나.. 옛날에 칫솔이 없던 시절 이에 낀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했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한자어로 양지(楊枝)라고 한대. 그래서 예전에는 양지질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 이와 관련이 있는 ()’로 바뀌었다는 거야. .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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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0)

,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였는데 그 도구를 재료의 명칭인 양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를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양지질이라고 말이 이를 닦거나 헹구는 행위 전반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고, 시간이 더 많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양지나 양지질이라는 말이 기원적으로 버드나무 가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이었으므로, 한자어 가운데 를 뜻하는 이 치()라는 한자가 있으니 세월이 흘러 양지라는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쓰이면서 를 혼동하여 쓰게 되었고, 양지나 양지질이 양치 내지 양치질이라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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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이렇듯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의 유래도 이야기해주고, 새로운 단어가 생성되는 과정도 이야기해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뜻이 달라지는 단어들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아주 유익해

 

1.

정지용 시인의 유명한 <향수>라는 시가 있단다. 이것은 노래로도 만들어져서 더욱 유명한 시란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얼룩백이 황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소가 당연히 젖소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룩백이면서 어떻게 누런 소(황소)가 될 수가 있지? 황소란 누런 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큰 수소를 의미한단다. 아빠도 아직 기억하는데 우리 말 중에 이 접두어로 붙어 크다라는 뜻을 가진 말들이 있어. 큰 소를 뜻하는 말로 한소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황소로 바뀌었대. 그리고 <향수>라는 시에서 나온 얼룩백이는 젖소가 아니라고 하는구나. 우리나라에 젖소가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이후이고, <향수>라는 시는 1927년에 쓴 시이니 젖소를 모르던 시절이라는구나. 그렇다면 얼룩백이는 어떤 소일까? 호랑이 무늬를 가진 칡소가 바로 얼룩백이라고 하는구나. 이 책에 얼룩백이 칡소의 사진도 실려 있는데 정말 호랑이 무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멋지게 생겼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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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요즘 사람들은 얼룩백이 소라고 하면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점박이 무늬의 홀스타인 젖소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홀스타인 품종의 소가 널리 보급된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합니다.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27년이니 당시에 홀스타인 젖소가 우리나라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홀스타인 젖소도 아니라면, 얼룩백이 소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여기서 얼룩백이란 칡소를 말합니다. 오늘날 한우의 대표는 누런 소가 되었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소는 누런 소 외에도 흰 소, 검은 소, 몸에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가진 칡소 등 다양한 종류의 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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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개의 새끼는 강아지, 소의 새끼는 송아지, 말의 새끼는 망아지라는 말이 있는데, 왜 고양이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 따로 없을까? 궁금했어. 고양이를 집에서 키운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했었어.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이유를 알려주었단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또 대표적인 가축 돼지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 없는데 그 이유도 함께 알려주었단다. 그 이유는 다소 충격적이었단다. 바로 고양이와 돼지가 각각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었다는 것어른 고양이와 어른 돼지를 나타내는 말이 도태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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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예전에는 돼지와 고양이의 새끼를 뜻하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돼지와 고양이입니다. 무슨 말장난이냐고 할지 모르나 돼지와 고양이는 원래 새끼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성체를 뜻하는 말로 변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돼지와 고양이가 새끼를 뜻하는 말이었다면 성체를 뜻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전 사람들은 돼지를 돝이라 하였고 고양이는 괴라고 하였습니다. 돝이라는 말은 현대에는 사라져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가 지금도 자주 사용하는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윷놀이에서 도, , , , 모 할 때 의 형태로, 또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이란 지명에, 또 물고기 이름 돗돔에 남아 있습니다. 돗돔은 원래 돝돔에서 유래한 것인데 돝이란 말이 사람들 사이에 쓰이지 않게 되면서 표기까지도 ㅅ으로 바뀌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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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갈매기살, 김치 등 여러 단어들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단다.

 

2.

또 같은 단어인데 다른 것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이야기해주었어. 김유정 님의 대표적인 소설 <동백꽃>도 그런 단어 중에 하나란다. 동백꽃라고 하면 남부 지방에서 겨울에도 피어나는 빨간 꽃을 떠오르게 된단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놀러 갔던 통영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잖니.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제목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았구나. 심지어 소설 속에서 동백꽃이 노랗다고 한 문장도 있었던 것 같은데의심을 해볼 만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김유정의 소설 속의 동백꽃은 우리가 지난 겨울, 통영에서 본 그 동백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단다. 그 꽃은 그 꽃이 아니야. 엄마한테 이야기했더니, 얼마 전에 Jiny의 교과서에서 봤다고 하더구나. 작년에 JIny의 국어 교과서에 <동백꽃>이 실려 있었잖니.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바로 생강나무 꽃이라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왜 생강나무 꽃을 동배꽃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두 나무의 용도가 비슷해서 그랬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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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강원도에서는 왜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불렀을까요? 이유는 두 식물의 용도가 공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백나무 씨앗에서 짜는 동백기름은 식용으로도 쓸 수 있지만 부녀자들의 머리에 바르는 기름으로도 많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동백기름 대신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사용하였어요. 동백기름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그 이름까지도 동백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초기에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동백나무를 뜻하는 <Camelia>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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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중에 해당화도 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는 해당화와 중국에서 이야기하는 해당화가 다른 꽃이래. 해당화(海棠花)의 한자어도 동일한데 말이야.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해당화의 뜻은 바다 근처 사는 꽃이라는 뜻이고, 중국의 해당화는 바다 건너 넘어온 꽃이라는 뜻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중국의 해당화는 우리나라에서 산사나무라도 하는 나무의 꽃이라고 하는구나.

….

엄마와 아빠라는 말에도 비밀이 있을 줄이야…. ‘엄마아빠라는 말에는 이미 호칭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래. 엄마는 ’+’!’, 아빠는 ’+ ‘!’ 이렇게 말이야. 이름으로 부를 때는 의 호격조사를 붙이는데, 엄마와 아빠를 부를 때는 그냥 엄마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이유가 호격조사가 포함되었던 말이라서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날 엄마와 아빠는 명사로 굳어져서, 엄마야, 아빠야 하는 말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엄마야도 많이 쓰이면서 또 명사화가 될 조짐이 보인다고… ‘엄마야가 해 줘~” 이런 말을 쓰잖니참 재미있는 단어의 진화로구나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책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어 참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책에 나온 것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기대는 안하련다. 그리고 이 책의 후속작이 꼭 나왔으면 좋겠구나.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얼마나 많니..

이 책은 너희들도 꼭 읽으면 좋겠지만 너무나 바쁘신 몸들이니…^^ 아빠가 이 책에서 나온 것들을 부지런히 이야기해주어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저는 단어의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책의 끝 문장: 이를 인지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선택으로 언어는 변화합니다. 없던 의미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기존의 부정적인 의미가 완화되거나 심지어는 미화되어 쓰이기도 하며, 의미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잘 쓰이지 않게 되면서 한때의 유행어로 남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어 안착하기도 하지요. 기존에 알던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쓰일 때, 그리고 그 단어를 자신도 쓰게 될 때 왜 이런 의미로 쓰이는 걸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단어를 무심코 써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P44

제가 생각하는 국어학자 역할은 이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아 가면서 확인하는 거죠. 다만 그 방향이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이건 생객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고 사람들의 방향이 맞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 P107

갈매기살의 갈매기는 ‘가로막’이라는 말이 변한 형태입니다. 갈비와 삼겹살 사이의 부위가 갈매기살이라고 하였는데요. 갈비는 가슴에 위치하고 삼겹살은 배에 있으니 갈비와 삼겹살 사이란 가슴과 배의 경계 부위가 됩니다. 포유류의 가슴과 배는 횡격막(橫膈膜)이라는 얇은 막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 횡격(橫膈)을 우리말 ‘가로’로 바꾸어 횡경막에 해당하는 말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가로막입니다. 세로가 이닌 가로로 되어 있는 막(膜)이라는 의미이지요. - P219

요즘은 어떤 사람을 두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라고 부르나요? 잘 알지 못하는 남자 어른을 두고 아저씨라고 하거나 마찬가지로 잘 알지 못하는 여자 어른을 두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예전에는 남자 친척을 모두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삼촌, 외삼촌, 숙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부, 이모부를 모두 구분해 부르지만, 예전에는 이들을 모두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주머니 역시 고모, 이모, 숙모, 백모 할 것 없이 집안의 여자 어른을 부르는 단어였습니다. - P228

그러다 보니 김치가 우리 고유의 음식이므로 김치라는 단어 또한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김치는 침채(沈菜)라는 한자어가 변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침채는 담글 침(沈)에 채소 채(菜)자로 ‘채소를 담근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현대 한자음으로는 침채이지만, 옛 한자음으로는 팀ㅊ.l이었고, 사람들이 말할 때는 딤ㅊ.l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딤채를 김치냉장고 브랜드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고 있지요.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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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1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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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일 년이 금방 지났구나. 작년에 아빠가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권을 다시 읽고 나서, 내년에는 <한강> 10권을 다시 읽겠다고 이야기했었잖아. 그 내년이 올해가 되었구나. 올해 독서 계획 중에 하나인 <한강>을 다시 읽기로 했단다. <한강> 1권을 찾아 앞면지를 펴 보니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02 2 26일이더구나. 23년이 지났지만, 책 앞면지에 적은 날짜는 어제 적은 듯 번짐이 없더구나. 23년 전의 메모가 그대로인 것이 세월의 너무 빠름을 증명하는 것 같았어. 세월 빠름을 다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면서도 23년이란 세월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에 무서움마저 드는구나.

2002 2 26아빠는 무엇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한강> 1권을 펼쳤을까? 당시에도 독후감을 쓰긴 해서 찾아보니, 뭐에 바빴는지 10권을 다 읽고 퉁쳐서 간단히 적었더구나.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독서편지 형식으로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이야기를 해줄게. 올해도 주중에는 다른 책들을 읽고 <한강>은 주말에 1권씩 읽으려고 한단다. 그럼 <한강> 1권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조정래 님의 <한강> 1950년대 후반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된 이후 다시 일어나기 위해 온 국민이 몸부림을 치던 그런 시기였지. 그리고 여전히 이승만 독재가 권력의 꼭대기에 있던 시기였단다. 공부를 한다고 돈벌이를 구한다고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기도 이 즈음이란다.

유일민도 대학교에 합격하여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향했단다. 그러면서 동생 고등학생 유일표도 서울에서 공부를 시킨다고 함께 왔단다. 그들은 성북동에 들어서는 움막촌에서 지내기로 했단다. 유일민의 아버지는 빨치산 출신으로 전쟁 때 월북을 하여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웠단다. 그렇게 아버지와 인연이 끝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유일민과 어머니는 수시로 경찰의 수사를 받곤 했단다.

서울에 처음 오게 된 유일민은 선배 김선오가 서울역에 마중 나와 주었어. 김선오는 일류대 법대생으로 국회의원 강기수가 후원하는 남천장학사에서 지내면서 공부했단다. 강기수는 유일민의 아버지와 악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 영악한 국회의원 강기수는 자기 지역 출신의 법대생들에게 숙소와 학비를 대주면서 장학생들을 후원한다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실상을 그 학생들을 빨리 사법고시에 합격시켜 자신의 정치적 배경으로 두려는 목적이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때면 지역에 함께 내려가서 선거 운동을 도와야 했어. 돈 없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강기수 의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단다.

강기수 의원의 딸 강숙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김선오와 선배 이규백이 강숙자의 과외도 해주어야 했어. 그런데도 강숙자는 결국 돈 내고 대학에 입학하였단다. 강숙자의 친구로 의대생 안경자, 역사학도 박영자 등이 있단다. 그들은 남천장학사 학생들과 어울렸는데, 유일민은 김선오의 후배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지만 깊은 이질감만 느끼고 말았단다. 유일민은 임호태라는 학생의 가정교사 일을 하게 되었는데, 시험 때마다 살얼음판이었단다. 성적이 떨어지면 바로 자리가 잘리기 때문에 학생보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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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말 마. 성적표 받아오는 날이 사형 언도 받는 날이니까. 성적이 떨어지는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리걸음만 해도 사형이지. 5등 이내의 경우는 예외지만, 그런 아이들이 가정교사 두는 게 어디 흔한가. 끝없이 성적이 오르기를 바라는 부모들 욕심 앞에서 우리들 목숨은 하루살이야. 아까운 돈 쓰고 있는 부모들 욕심 탓할 게 아니라 가난한 우리들 신세를 탓해야지.”

어떤 선배가 쓰디쓰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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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민과 유일표가 살고 있는 움막촌에는 소작농으로 일하던 농민들도 많이 올라왔단다. 기술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니 그들은 지게꾼일 등을 하며 하루벌이를 했단다. 그런 사람 중에 천수만이라는 사람도 무작정 상경하여 움막살이를 했어. 지게꾼으로 일했어. 고향 사람인 나삼득은 식구들과 좀더 일찍 상경하였어. 같음 움막집이지만, 어느 정도 터를 잡은 듯 했단다.

이렇게 다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엄청난 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단다. 요즘도 큰 태풍이 올 때마다 가끔씩 소환되는 태풍 사라가 그 주인공이란다. 태풍 사라로 많은 피해, 특히 전라도 쪽 피해가 컸다고 하는구나.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많이 죽었는데, 김선오의 아버지도 태풍 사라로 돌아가시고, 이규백의 형도 태풍 사라로 돌아가셨단다. 김선오는 자신의 꿈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에 상심이 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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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42)

상복을 입은 김선오는 아버지 영전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비가 아무리 심하게 퍼부었어도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비가 심하면 심할수록 아버지는 더 나가서 논을 돌보려고 했을 것이다. 열 마지기의 논, 그건 아버지의 육신이었고 생명이었다. 소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손수 그 열 마지기의 논을 장만한 것은 아버지의 크나큰 긍지였고 자랑이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철저한 착취구조 속에서 그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자신이 고등학생이 되고서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더욱 크고 강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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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해당 이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1950년대 후반에도 이어졌단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푸대접을 받곤 했단다. 광복군 출신으로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는 한인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어. 군 내부에서 계속 차별을 받다가 결국 대령으로 예편했단다. 그보다 먼저 중령으로 예편한 남재구는 일자리를 못얻어 수위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을 찾아가보니 그것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한인곤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한인곤은 신문 광고까지 내면서 친구 남재구를 찾았단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

유일민의 친구 서동철이란 사람이 있어. 서동철의 아버지도 빨치산 출신이야. 유일민의 아버지와 다른 점은 돌아가셨다는 거야. 그래서 경찰의 조사는 받지 않았지. 서동철은 유일민보다 먼저 서울에 올라와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반공청년단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말이 반공청년단이지, 정치깡패였단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자유당의 이승만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선거를 준비했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으로 투표용지까지 사서 대리 투표하는 방법도 있었어. 야당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이라는 후보가 나왔는데, 이승만을 압도할 인기를 누리고 있었어. 하지만 미국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단다. 결국 장면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어.

군인을 그만둔 한인곤은 민주당에서 경호대로 일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단다. 자유당은 정부기관을 이용하여 야당의 선거유세를 계획적으로 방해를 했어. 온갖 불법을 일삼은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불법선거시위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런데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11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단다. 이 일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어. 고등학생들이 먼저 앞장섰고, 대학생들도 동참했단다. 그 이후에는 전 연령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을 했단다. 이것이 그 유명한, 너희들도 알고 있는 4.19 혁명이란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으로 응수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하지만 시위는 더욱 커지고 조용하던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동참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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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53)

고등학생들까지 터져나오고 있구나. 저것들이 세상이나 정치를 뭘 안다고. 투표권도 없는 미성년자들이. 헌데 아니야…… 고대생들이 데모를 일으키기 전에 전국에서 일어난 그 많은 데모는 전부 고등학생들이 일으키지 않았나. 데모대 중에 제일 무서운 게 물불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왜 그렇게 대학생들보다 먼저 데모를 시작하게 된 거지? 가만있거라…… 그게…… 아아 그렇구나.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선거기간 동안 야당 유세장에 못 가게 아느라고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키고, 갑자기 시험을 치르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글짓기를 시키고…… 그런 처사에 대해 유일표가 얼마나 불평 불만을 했던가. 그 따위 치졸한 처사들이 고등학생들을 자극해 불평불만을 사고 결국 정치의식까지 길러준 것이로구나. 이거야말로 자업자득이 아니고 뭔가. 그나저나 물불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들까지 저렇게 터져나오면 이 판이 어떻게 될까? 정말 엎어지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글쎄…… 한 정권이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있나. 한바탕 불평 불만을 터뜨리고 가라앉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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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표도 이 시위에 적극 동참했지만, 유일민은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어. 동생이 시위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고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가 시위 행렬에 끼게 되었는데, 유일민은 계속 갈등하고 자신을 자책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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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나는 오늘 무엇이었는가. 방관자였는가, 구경꾼이었는가, 훼방꾼이었는가. 방관자는 비겁자다, 다같이 궐기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방관자보다도 더 나쁜 존재. 비겁자도 못 되는 나는 무엇인가. 비겁자보다도 더 나쁜 명칭……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파렴치한…… 그 어느 것도 합당하지가 않았다.

유일민은 자신이 인간벌레 같은 부끄러움과 혐오감에 묻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구급차에 실리는 부상자들을 보았을 때, 피 흘리는 여학생이 업혀가는 것을 보았을 때, 피범벅된 시체를 떠메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았을 때 가슴 푸들거리는 데모의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끝내 행동화하지 못한 자신은 참으로 하잘 것 없고 한심스런 인간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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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갈등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남천장학사 학생들이었단다. 시위에 참석하는 것은 자신들을 후원하는 강기수 의원에 배신하는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무엇이 정의인지 모두 알고 있었단다. 어떤 이들은 시위에 참석하고, 어떤 이들은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단다. 김선오는 계속 갈등하다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단다.

전국적인 시위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면서 4.19 혁명은 성공의 깃발을 꽂았단다.

여기까지가 <한강> 1권의 이야기란다. 독재를 끌어낸 국민들을 보면서, 오늘날 독재를 하려던 코끼리를 끌어낸 국민들이 떠오르더구나. 우매하고 야욕에 넘치는 지도자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을 끄집어내리는 힘을 가진 국민들 또한 있단다. 그런 지도자들을 가진 우리나라가 부끄럽다가도 그런 국민들은 가진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구나.

오늘 내란 수괴가 구속이 취소는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난다. 아직 내란은 진행 중이란 명심해야겠구나. 얼른 내란의 수괴는 대통령 탄핵되고, 내란을 범한 죄를 달게 받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를 따르는 내란의 힘은 공중분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세상을 떠난 큰누나 같기도 했던 그 여자의 수심 깊은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니야, 그건 보통의 경우고 난 비적떼라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일찍 냉수 마시고 속차려야 될 것 같애. 생각해 보면 51년 김홍일 장군 예편 때부터 우리 광복군이나 독립군 출신들의 앞날은 결정났던 거야. 도대체 김홍일 장군이 어떤 분인가. 김구 선생을 도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제조한 독립투사고, 중국 정규군 소장으로 왜놈들과 맞서 싸운 걸출한 인물인 거야 세상이 다 아는 것 아닌가. 그런 분은 겨우 별 둘 달고 예편당하고, 독립군들 등뒤에 총질해 댔던 만군 출신 정일권이가 그 새파란 나이에 마구 별 달아대며 참모총장을 해먹는 판이니 볼장 다 본 거지. 말이 좋아 중국 대사로 파견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김홍일 장군을 유배시킨 동시에 군부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중추를 제거해 버린 것이었어. 그 다음부터 독립운동 세력은 진급은 안 되는 것만이 아니라 추풍낙엽 신세들이 되지 않았나. 참, 우리도 만군 출신 못 된 게 천추의 한이로구만 그래." - P49

그런데 동네사람들의 춤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작지가 그냥 자기들 것이 되는 줄 알았는데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돈을 내고 사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헛김 빠지는 일인데 더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논 열 마지기를 소작하던 사람을 예로 놓고 보면 그 사람 앞으로 돌아온 것은 서너 마지기뿐이었다. 나머지는 농지개혁을 하네 마네 하며 질질 끌어오는 몇 년 동안 지주들이 소작인들은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실망한 소작인들이 더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딴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줄 알았던 그 논의 태반이 지주들과 짜고 명의만 살짝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그건 결국 농지개혁을 하나마나였지만 법에 걸리지 않으니 소작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P59

"아닙니다. 이건 대처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면서 미군정법령 88호를 끌어다가 적용시킨 것에 대해 위헌이라고 한 것부터가 발상이 잘못됐고, 방향이 어긋났다 그겁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미군정은 종식됐고, 따라서 군정법도 완전히 폐기처분됐습니다. 그런데 엄연히 독립국가고 법치국가에서 집권자의 편익을 위해 미군정법을 끌어다 적용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정통성을 전면 부인하는 반역행위이고, 법치국가의 존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반란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미군정법을 끌어다 대는 건 일제 총독부의 법을 끌어다 대는 것과 뭐가 다르냐 그겁니다. 이 점을 부각시켜 정부를 비판하고 공격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위헌이다 뭐다 하고 있으니 일이 해결될 게 뭡니까." - P116

"여기 대학의 양심은 증언한다. 우리는 보다 안타까이 조국을 사랑하기에 보다 조국의 운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피를 흘려온 것처럼 사이비 민주주의 독재를 배격한다.
조국에의 사랑과 염원이 맹목적 분격에 흐를까. 우리는 얼마나 참아왔는가.
보라! 갖가지 부정과 사회악이 민족적 정기의 심판을 받을 때는 왔다. 이제 우리는 대학의 양심으로 일어나노니 총칼로 저지 말라. 우리는 살아 있다. 동포의 무참한 살상 앞에 안일만을 탐할소냐! 한숨만 쉴소냐!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하여 총궐기하자."
- P245

그러나 오늘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혁명은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지. 혁명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지, 혁명을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왜 혁명에 몸을 던지는 것인지, 구름이 걷히듯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혁명이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응결된 분노와 증오의 집단적 폭발이었다. 그 인식은, 불투명하고 원망도 섞여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해이면서 발견이기도 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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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쥘리앙 보브로프 지음, 김희라 옮김, 이재일 감수 / 북스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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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쥘리앙 보브로프라는 사람이 쓴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란다. 오랜 만에 양자역학 책을 읽는 것 같구나. 양자역학이라고 하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어려운 것은 맞단다. 그런데, 이 책의 앞표지와 제목을 보면 그 어려운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되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단다. 양자역학은 아빠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이고 중복되는 내용이 있어도 양자역학에 관한 책들을 가끔씩 읽는 것이 좋단다. 복습한다는 생각도 있고, 새로운 지식을 만난다는 생각도 있고, 무엇보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아빠는 같은 내용이라도 주기적으로 읽어주어야 사라지는 기억력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된단다.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라는 책은 몇 달 전부터 봐두던 책이란다. 이 책의 지은이 쥘리앙 보브로프는 프랑스의 대학 교수이고, 과학의 대중화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 책도 양자역학을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주려고 기획한 책이란다. 수식도 없이 말이야.. 그러나 책 제목처럼 술술넘어갈 양자역학이 아니지

 

1.

아빠도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좀 읽었더니,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전 책에서 본 내용들이 많았고, 지은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겠더구나. 빛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많은 과학자들이 빛이라는 것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무척 놀랐을 거야. 파동과 입자라는 것은 그 성질로 보아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빛도 그리 놀랬는데, 전자라는 물질이 그렇다면실험을 해보면 전자라는 입자도 파동처럼 움직이는 확인했을 때,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을 거야.

파동이면서 입자..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아빠는 이해하고 있단다. 그렇다면 작은 입자 말고 큰 입자들은? 큰 입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아빠가 이해한 바를 다시 이야기해보면모든 입자의 위치는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야. 어떤 입자가 그 위치에 있는 것은 그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 그 입자를 관찰하려고 하면 파동의 성질은 사라지고, 확률 높은 곳에 입자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

큰 물질들은 무엇인가에 의해 관찰되기 쉬워지고, 그로 인해 가장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게 되는 거야. 파동의 성질을 실험적으로 확인한 가장 큰 입자는 어떤 것인가? 전자 알갱이에서 시작한 이후로 많은 과학자들이 더 큰 알갱이를 가지고 이중슬릿실험을 하여 파동의 성질을 찾아 보았다고 하는구나. ChatGPT에 물어보니 2000개 이상의 원자로 된 분자에서도 확인을 했다는구나. 정말 대단하지 않니? 우리 같은 사람도 어차피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가능한 거야. 그래서 그런 것을 확장하여 관련된 SF 소설도 있고 어벤져스 같은 영화도 있는 것이란다.

이 책에는 양자역학 하면 꼭 나오는 파동함수에 관한 이야기, 결 잃음에 관한 이야기, 그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에 관한 이야기, 다세계(다중우주) 해석에 관한 이야기, 양자 얽힘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단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빠가 이전에 다른 책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어서 오늘은 패스할게.

 

2.

양자역학을 읽다 보면 스핀이라는 용어가 나온단다. 스핀은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고유한 각운동량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여서 스핀(spin)이라고 불린단다. 스핀은 up, down 두 방향 상태를 가지고 있단다. 대부분의 물질을 이루는 up down은 거의 5050으로 비슷하단다. 예전에 읽은 <쿼런틴>이라는 SF 소설에서 스핀의 방향을 하나씩 일일이 세던 사람이 생각나는구나. 스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잘못된 지식 전달의 우려로 하지 말아야겠다. 단지 전자 알갱이 하는 1/2 스핀이라는 점, 스핀 한 개는 2개 입자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 스핀의 개수가 정수인 물질을 보손이라고 하는 점, 스핀의 개수가 정수가 아닌 물질은 페르미온이라는 점 정도만 이야기해야겠구나.

표준모형 입자 중에서 보손의 예로는 광자, 글루온, W보손, Z보손, 힉스 입자, 폰론 등이 스핀 1개로 보손이고, 페르미온의 예로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쿼크, 중성미가가 각각 1/2스핀 한 개로 이루어져 있어 페르미온이 된단다. 수소 알갱이 한 개는 양성자 1, 전자 1개로 이루어져 있으니 1/2스핀 더하기 1/2스핀 하면 1개 스핀이 되어 정수의 스핀이기 때문에 보손이 되는 것이란다. 만일 너희들을 이루고 있는 원자의 구성과 개수를 모두 안다면 너희들이 보손인지 페르미온인지도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

최근 양자 컴퓨터 관련 주식이 뜨거운 것 같구나. AI 다음은 양자 컴퓨터라면서 주식이 하늘 높이 치솟다가도 양자 컴퓨터는 아직 멀었다는 전문가의 이야기가 나오면 다시 아래로 치박기도 한단다. 컴퓨터의 기본 단위 bit는 한 개로 0, 1 이렇게 두 가지 정보를 알려주지만 양자컴퓨터의 기본 단위 큐비트는 양자의 중첩과 얽힘으로 더 많은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고 했어. 전에도 한번 읽은 적이 있지만, 잘 이해가 안 가서 패스. 나중에 유튜브에서 쉽게 설명한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책에 큐비트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너희들도 한번 읽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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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양자 컴퓨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겉보기에는 고전적 컴퓨터처럼 비트와 논리 게이트를 가진 회로 같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각각의 비트는 단순한 0이나 1이 아니고 둘의 중첩 상태로 나타난다. 각각의 양자비트, 큐비트(qubit)’ 8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시에 두 상태에 놓인다. 중요한 것은 스핀의 두 방향, 원자의 두 에너지, 광자의 두 분극이다. 핵심은 두 가지 상태의 중첩을 얻어내는 것이다.

고전적 컴퓨터와의 두 번째 큰 차이점은 큐비트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얽혀 있고 서로 복잡하게 섞여 있어 큐비트 하나에 영향을 주면 즉시 다른 모든 큐비트에 영향을 미친다. 요컨대 개별적인 0 1 대신 우리가 접하게 될 것은 0 1의 조합이 중첩되면서 동시에 얽혀 있는 상태다. 영원히 결속된 집단이 있는데 그 구성원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있어 나중에는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거기에 이 개인들 각자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는 점을 추가해보라! 이것은 바로 양자 컴퓨터가 시작된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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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컴퓨터의 사양 분야는 어디가 적합할까? 이 책의 지은이는 분자 시뮬레이션이라는 곳에 활용하면 좋겠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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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268)

양자 컴퓨터의 수많은 잠재적 사용 분야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분자 시뮬레이션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비료를 다른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 슈퍼컴퓨터는 더 저렴한 또 다른 화학반응을 개발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며, 그 결과 화학공업의 새로운 촉진제가 발견될 것이다. 또 이 컴퓨터를 이용하면 이산화탄소를 고정하거나 광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과정을 연구할 수 있으며, 신약을 위한 분자를 고안하거나 몇 가지 암 치료에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 접힘 같은 메커니즘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효율적인 배터리 개발을 위한 인공 소재 발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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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양자컴퓨터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아빠의 생각에 양자컴퓨터가 상용화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구나. 알고리즘이 너무 복잡하고, 아직은 오류율이 높아서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해. 오류율을 30퍼센트에서 1퍼센트까지 줄이긴 했는데 여전히 높은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하지만 양자컴퓨터만 상용화된다면, 적은 비트로 많은 정보를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전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어. 언젠가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어 전력을 확 줄여서 지구온난화를 더디 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왜 양자물리학을 이해해야 할까?’

책의 끝 문장: 또한 이 학문을 탐구하는 이들의 깊은 내면으로 빠져드는 일이고, 120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제 막 출발한 탐험이다.

 



이제 당신은 어떤 홀에 있고 오케스트라는 첫 번째 화음을 연주한다. 악기들로부터 음악이 솟아나 홀 전체로 퍼져나가지만 확률적으로만 그렇다. 게다가 넓은 홀 안의 침묵은 완벽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파동은 침묵 속에 퍼져나가고, 그때 갑자기 파동이 한 점으로 축소되어 청중 한 명의 귀에 닿는다. 나머지 청중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다음 음이 두 번째 청중이 각자 단편적으로 들었던 것을 서로 주고받아야지만 그날 밤 연주된 교향곡을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 P40

2018년 11월 16일 베르사유 컨벤션센터에서 전 세계 물리학자들은 역사적 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준비를 했다. 그것은 국제단위계의 변화였다. 참가자들은 열기가 넘쳤다. 각국 대표는 자기 차례에 일어나서 구두로 ‘예스(Yes)’를 외치며 자국 표지판을 들었다. 우루과이 대표가 마지막으로 ‘예스’를 외치자 모든 과학자가 일어나 진심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킬로그램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결의했다. - P76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하면 열역학은 심지어 절대 영도에서도 원자들이 계속해서 조금씩 움직일 거라고 예상한다. 원자들은 ‘영점 에너지(zero point energy)’를 가진다. 구체적이며 놀라운 결과로 절대 얼지 않는 액체 헬륨이 존재한다. 심지어 절대 영도에 대해 근접한 온도에서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생기를 얻은 조그만 움직임으로도 이 액체의 원자를 요동시키기에 충분하며, 결과적으로 원자들이 고체를 이루지 못하도록 막는다. 다른 액체는 모두 얼지만 헬륨 원자들은 상호작용이 극도로 적어 쉽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 P86

게다가 양자물리학 논문에서 여러 해석 중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경우는 극히 머물다. 연구자 대부분이 취하는 입장은 데이비드 머민의 이 말로 잘 요약된다. "입 다물고 계산하라!" 과학의 역할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있다며 이들에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목표는 무엇보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것이지 반드시 ‘왜’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 P134

애초에 원자를 이해하려고 연구된 양자물리학은 입자물리학을 탄생시켰다. 이 학문은 소재의 세계와 IT 세계를 탐험했다. 마침내 입자물리학은 화학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흔히 물리학자들은 거만한 눈으로 동료 화학자들을 대한다. 아마도 이것은 두 학문의 역사적 기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리학은 갈릴레이, 뉴턴과 함께 탄생했고 이들은 세계에 대해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을 제시했지만, 화학은 연금술사 덕분에 여러 의식으로 가득한 마법 세계에서 첫발을 떼었다. 양자물리학이 탄생한 이후 카드 패는 다시 섞였다. 화학과 물리학은 하나의 동일한 학문이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P189

그런데 저항이 완전히 0이라고 하거나 저항이 너무 약해서 측정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건전지를 제거해보자. 초전도체가 아닌 구리에서는 전류가 즉시 멈춘다. 전자들은 끊임없는 충격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초전도체 고리에서는 전류가 계속해서 완벽히 흐른다. 한 시간 후에도 전자는 지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날이 되어도 전류는 여전히 그대로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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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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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은 시를 읽곤 한단다. 즐겨 읽는 편은 아니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유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류시화 시인이라고 말할 것 같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류시화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참 좋단다. 시라는 것이 한 번 읽고 바로 와 닿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경우도 많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은 한번에 가슴에 딱 달라붙어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고 기쁘게 해주기도 한단다.

나이를 먹게 되면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단다.

아빠의 예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 말이 틀린 것 같단다. 시라는 것이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말들이 많은데, 류시화 시인이 어떤 사물을 두고 비유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단다. 평상시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였는데, 류시화 시인이 이야기하니까 둘 사이가 그런가 보네

삶을 노래하고, 죽음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노래하는 류시화 시인의 이번 시집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도 좋았단다.

 

1.

아빠가 책을 읽고 나면 좋은 구절들을 발췌하곤 하는데, 시집은 아빠가 마음에 들었던 시 전체를 발췌한단다. 시라는 것은 전체를 다 읽어야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시집에서 발췌한 몇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대신할게. 책의 첫 번째 실려 있는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시는 연탄 시로도 잘 알려진 안도현 님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오르는 듯 했어. 물고기와 새를 통해 온 생애를 걸어봤냐고 묻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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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이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은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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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책에 사랑이 빠질 수 없지. 이 책의 제목을 뽑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는 사랑에 관한 시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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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시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아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감수성과 창의성이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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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당신을 발견한 내 눈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내 귀를 사랑한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다가간 내 목숨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 곁에서 웃는 나의 아픔까지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를 숨 쉬는

나의 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지대가 꽃나무가 사랑하듯이

슬픔의 무게로 기쁨의 가벼움을 사랑하듯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

….

<물음표>라는 시는 계속 질문을 하는 하는 시란다. 시를 쓰려고 이것저것 스스로 물어본 글들을 쭉 놓아놓은 듯 한데, 그것으로 좋은 시 한 편이 된 것 같구나. AI 시대에서는 누가 얼마나 더 좋은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단다. 그런 시대에 발맞춰 쓰신 시는 아니겠지? 이 시에 나온 질문들은 ChatGPT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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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

물음표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명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내 눈썹을 그릴 때 신은 어디서 검은 색을 얻었을까?

바다의 결정체인 소금은 왜 파란색이 아닐까?

숯은 불을 어디에 감추고 있을까?

바람은 자신을 손짓하는 나뭇잎을 어떻게 찾아갈까?

돌이 흘리는 눈물은 왜 냉정하지 않고 고단해 보일까?

무는 세상의 무엇이 보고 싶어서 흰 목을 빼고 있을까?

지빠귀처럼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정하고 태어날까? 그 얼굴은 어디서 고를까?

아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동안 빗방울의 심장은 두려울까? 두근거릴까?

거리에서 혼잣말하는 여인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걸까?

속으로 우는 울음만큼 절창이 없다는 걸 갈대 피리는 언제 알았을까?

모든 전등은 왜 약간은 떨면서 켜져 있을까? 자신이 돌아갈 어둠에 맞서기 때문일까?

내가 그리워한 첫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금 간 사랑을 꿰매려면 얼마나 긴 인동초 꽃실 빌려야 할까?

왜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자신과 행복하지 않을까? 더 큰 형벌이 있을까?

억새는 왜 지나가는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까?

내일을 알려면 얼마나 많은 어제를 불러 모아야 할까?

수십 억 인구 중에 왜 둘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당신의 나이고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당신이기로 결정했을까?

누가 인간의 몸을 본떠 물음표를 만들었을까?

==================

아빠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시는 곧 공부라고 생각했단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늘 아빠를 괴롭혔으니 말이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책 읽을 시간도 적은데, 거기에 시집까지 읽어보라고 할 수는 없겠구나. 시집은 나중에 감수성 충분해지는 이십 대에 읽는 것으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물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책의 끝 문장: 아무리 연습해도 나는 작별의 말이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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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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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지은이 매들린 밀러의 책을 이야기할게.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 모두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란다. <아킬레우스의 노래> <일리아드>, <키르케> <오디세이아>를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소설 속 조연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그런 소설이었어.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이었단다.오늘 이야기할 책도 위 소설들과 비슷한 성격이 책이란다.

<갈라테이아> 아빡가 갈라테이아가 누군인지 몰라서 검색을 해 보았단다. 피그말리온이 사랑한 조각상, 그래서 사람으로 변해 피그말리온의 아내가 된 그 조각상의 이름이 바로 갈라테이아라고 하는구나.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데도 그가 만든 조각상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구나. 피그말리온이 그렇게 사랑했던 갈라테이아….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렇게 끝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처 갈라테이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만약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조각상이었던 갈라테이아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더니, 어떤 남자가 눈 앞에서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안 입고 있었다갈라테이아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 주는가.. 지은이의 이런 발상은 아빠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

 

1.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사람으로 변한 지 11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을 해. 남편 피그말리온과 결혼을 하여 딸 파포스나 낳았어. 파포스는 이제 열 살이 되었어. 남편은 시간은 갈수록 갈라테이아에 집착을 하고 질투를 하고.. 결국 갈라테이아를 때리기도 했단다그런 갈라테이아는 남편을 안고 바다에 빠져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삶을 마감하였단다.

….

무슨 소설이 이러냐고? 이 소설은 엄청 짧은 단편 소설이란다. 그런데 출판사는 책 한 권으로 출간하는 모험을 했구나. 양장본으로 만들고, 책의 뒤편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옮긴이의 말> 까지 실었지만 다 합해서 72페이지구나. 짧지만 강렬하다는 등의 호평이 있었지만, 갈라테이아가 하고 싶었던 말은 더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이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태어난 지 11년 뒤에 시작하여 아주 짧은 시간을 이야기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그 동안의 심경 변화 등을 쭉 이야기해주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 쉽게 읽은 책 한 권을 늘려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마저…^^ 매들린 밀러의 다음 책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거기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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