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불신, 기성체제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극단적 구호를 외치는 선동가 정치인들을 키우고 있다. 올여름 유럽에서 치러진 선거들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지만, 극우 정치세력들이 전 세계에서 확실하게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 현상은 더 이상 특성 지역에서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신흥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대체로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인 경제적 사회적 곤경을 엉뚱하게도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킨다. 이들은 정치적 자원을 독식하면서 민심을 잃은 엘리트 지배층과 거리를 두는 척하면서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들과 과두 금권정치의 배후세력 ‘1%’의 권력을 키우고 호주머니를 부풀리는 데 몰두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한다.

 

(4-5)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면, 즉 민중이 정치적 의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면 기후변화 문제 같은 것은 이미 오래전에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의존하는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재생될 수 있는 에너지에 기반한 미래를 선택할지 보통의 시민들이 결정할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매우 다른 궤도 위에 있을 것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선출된 정치가들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 3세계, 농촌을 사지에 몰아넣을 결정을 할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면, 우리는 지구의 안녕과 문명의 존속을 위해서 지금 각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폴리스의 안명이 자신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민중들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 소외된 채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뒤죽박죽이 된 현 상황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런 비정치적(무비판적) 태도가 현상 체제를 강화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4)

오염수 안전처리 기준치가 나라마다 다르고 일본의 삼중수소 배출 기준은 해양생태계에 안전한 기준치가 될 수 없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실제 삼중수소 농도는 74Bq/L인데 일본의 원전 기준 삼중수소 농도가 6Bq/L이기에 이를 희석해 1,500Bq/L로 줄여 음용수 기준에 맞게 방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용수 기준은 미국이 740Bq/L, 유럽이 100Bq/L, 미 캘리포니아주는 15Bq/L이며 우리나라 환경부의 고시 기준은 놀랍게도 6Bq/L이다. 방사선 기준치는 행정 편의의 산물이다. 정상 운영 중인 원전인 월성원전의 실제 삼중수소 배출치가 13.2Bq/L라는데 그렇게 해도 핵종의 배출 총량은 변함없이 바다에 축적된다.

 

(15-16)

미국의 핵융합 전문가인 아르준 마키자니 박사는 삼중수소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삼중수소는 높은 방사성물질이기에 인체와 다른 생명체에 위험을 끼친다. 자궁에 형성되는 시간과 성숙되는 시간 동안 난자에 영향을 줌으로써 삼중수소는 임신 중에 미래세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자와 정자세포에 포함해 있기 때문이다. 삼중수소는 임신 초기 유산이나 기형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 중 일부는 저선량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특히 중추신경계 형성에 대한 일부 유형의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43)

카터(미국 전 대통령)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의 무서운 성장은 현명한 투자에 의해 촉진되고 평화에 의해 활성화했다. 1979년 이후 중국은 단 한 번도 전쟁하지 않았다. 미국은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242년 역사에서 오직 16년 동안만 평화를 즐기며 세계 역사상 가장 호전적 국가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에 미국의 원칙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경향 때문이다.”

 

(54)

따라서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 라이벌, 즉 미국이 세계경제 전체를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으면서 지배하는 일에-푸틴의 러시아처럼, 아니 오히려 더 위력적으로-도전장을 내미는 한 나라를 겁주려는 의도로 군비를 늘리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945년 이래 미국의 한결 같은 외교정책은 당근과 채찍,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상대를 굴복시킬 방법을 찾아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감언이설과 경제적 군사적 원조도 동원했지만 쿠데타, 침공, 제재, 준군사작전, 군국주의적 겁박도 실행했다. 반항하는 정권은 용인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순응하는(약화된) 러시아와 말 잘 듣는 혹은 기세가 꺾인 중국을 바란다.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수단이 군비증강이라는 계산이다. 그로 인해서 어떤 위기가 초래되든, 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예상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 더욱이 군사력 확대는 강대국들이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으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다는 미덕도 갖고 있다.

 

(63-64)

하비는 폴라니를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자유라는 아이디어가 고작 자유기업을 옹호하는 것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것은 소득, 여가, 사회보장이 개선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자유를가져다주지만, ‘자신들이 가진 민주적 권리들을 활용해서 자산가들의 권력으로부터 대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헛된 노력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자유를제공한다.” “그렇지만, ‘권력과 강요가 없는 사회가 없고, 권력이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 세상도 있을 수 없다, 자유주의 유토피아라는 비전도 물리력, 폭력, 권위주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지탱될 수 없다. ㅍ폴라니는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주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나 혹은 아예 노골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좋은 자유들은 실종되고 나쁜 자유들이 군림하게 된다.”

 

(109)

유럽은 농부의 나라로 불린다. 농업의 경제적 가치와 상관없이 농업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유럽연합(EU)에 속한 27개국은 공동농업정책(CAP)이라 불리는 농업정책을 공유하는데, 이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다양한 규제와 농업정책을 공유하는데, 이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다양한 규제와 지원을 받는다. CAP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부터 시행됐다. 그래서 과거에는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해 시장가격을 지지하고 농민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직불금 제도 등에 집중했다. 현재는 농촌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직불금 제도 등에 집중했다. 현재는 농촌의 환경적 기능과 기후위기 대응에서 농촌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예산을 늘리고 있다. 2022년 기준, EU 전체 GDP(국내총생산)에서 농업의 경제적 가치는 1.4%에 불과하지만 직불금 등 농업예산은 EU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달한다. 2024년 전체 예산 가운데 2.8%가 농업예산인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153-154)

늙어감은 두려운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늙어가는 신체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름을 줄이고, 체취와 하얗게 세는 머리는 가능한 한 감춰야 한다. 늙어감을 역행하며 시간을 멈추는 억지 행위를 자기권리, 자기계발이라고 믿는다. 시간의 흐름이 잠시나마 멈춰 선 외모를 만드는 건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다. 반면에 사회적인 삶이 정리된 때쯤 외모 관리를 멈춘다. 이렇게 외모의 관리란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하는지 알리는 신호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정상성에 갇힌 노인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경제성정을 이루고 경제위기를 극복했던 노인들의 삶의 태도지만, 동시에 늙어감을 경계하는 처지가 묻어난다. 노인들의 엄격한 이분법은 늙어감을 받아들이는 일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기보단 자기자신을 스스로 사회의 잉여 처지에 놓았다.

 

(206)

이러한 통찰들이 근본 변화를 원하는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이렇다. (1) 조직혁신이나 기술혁신 등 각종 자본주의 혁신 경쟁은 결국 인간 노동력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어떤 개별 자본이 뽑아 가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각종 혁신으로 더 세련되거나 더 깔끔해진 외양에 우리가 현혹되면 안된다. (2) 물가를 따라잡기 위해 노조로 단결해 임금 인상을 쟁취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삶의 개선이 안된다. 설사 일부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맛보더라도 그 부담은 더 약한 노동자나 자연에게 책임 전가된다. (3) 자본의 가치 증식은 직접적으로 고용된 인간 노동력을 매개로 이뤄지지만 그 물밑에서는 간접적으로 연루된 엄청난 부의 원천들이 자본으로 향하는 빨대를 통해 흘러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적 생산과정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정과 소비과정 전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 총체적 자본관계를 혁파하기 위해선 성별, 기업별, 국가별, 민족별, 지역별, 종별 등 온갖 차별과 위계를 강화하는 가부장주의, 생산력주의, 애사 애국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 인간중심주의 등을 마음에서 지워야 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친밀성(관계) 회복이 열쇠다.

 

(207)

사람들은 입만 열면 배고파 죽겠다, 돈 없어 죽겠다, 그리워 죽겠다 하고 아우성이지만 과연 죽을 만큼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돈이나 밥, 사랑 등은 없으면 괴롭기야 하지만 그로 인해 바로 죽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소중한 이유는 내게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에게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있는가?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런데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괴롭고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심정이 아마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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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땅이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전개되는 인공 건축물 사이로 땅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 지평선도 볼 수 없었다. 거의 똑 같은 회색으로 펼쳐진 금속 구조물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하나의 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육지 전체가 이런 모습일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두세 척 유람선만이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행성을 뒤덮고 있는 금속 구조물 안에서는 수십억 인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41-42)

인류의 지식을 보존하여 남겨 두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의 총량을 한 개인이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아니, 1000명도 부족합니다. 사회조직이 붕괴하면서 과학은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개개인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극히 작은 지식만 알게 될 것입니다. 개개인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극히 작은 지식만 알게 될 것입니다. 개개인으로 고립된 인간은 무력하고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앞뒤 연결이 안 되는 지식의 단편은 수 세대를 경과하면서 잊히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다면 인류의 지식은 결코 상실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후손은 그 지식을 이용할 것이며 다시 애써서 재발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3만 년 걸릴 일이 1000년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96)

당신들뿐만 아니라 터미너스 인구 중 절반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여기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백과사전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최대 목적이 과거의 자료를 분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만 일보 전진하여 무엇인가를 이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네들이 퇴화하고 심지어 이룩한 업적까지도 잊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외곽성역에서는 원자력이 이미 자취를 감췄습니다. 감마 안드로메다에서는 수리를 잘못해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제국의 총리 대신 각하는 원자력 기술자를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무엇일까요? 새로운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원자력 사용을 제한하려 하고 있습니다.”

 

(130-131)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네. 왜냐하면 미래는 막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셀던이 미래를 확실하게 계산해서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했으니 말이네. 우리 역사 속에서 계속 발생하는 위기 하나하나는 구체적으로 예측된 것이고 각각의 위기는 앞에서 일어난 위기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는가에 달려 있다네. 현재의 위기는 그중 두 번째에 불과하고,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그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314)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모든 시설이 거대하다는 사실조차 몰라. 기계는 세대에서 자동적으로 넘어가고 감독자는 세습 계급이지. 그들은 거대한 건물 어딘가에서 튜브 하나만 타 버려도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어. 이 전쟁은 이러한 두 제도 사이의 싸움이야. 제국과 파운데이션, 거대한 것과 미소한 것 사이의 싸움 말일세. 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우주선으로 매수하려 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경제적인 의의가 없어. 그렇지만 우린 작은 것으로 매수했지. 전쟁에는 쓸모가 없지만 번영과 이윤에는 결정적인 것으로…… 왕이든 콤도든, 어쨌든 그들 무리는 우주선을 입수해서 전쟁까지 준비해 왔겠지. 역사를 통해 보면 독재자는 국민의 행복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명예나 영광이나 정복과 바꾸려 해 왔어. 그러나 힘이 되는 건 역시 생활과 관련한 사소한 부분이야. 그리고 아스퍼 아르고는 이삼 년 안에 코렐 전체를 덮칠 경제 불황의 태풍에 맞설 능력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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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150년에는 과연 인류가 살고 있을까요? 물론 저는 그때도 인류가 살아남았기를 기대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은 지금도 있으니까요.하지만 우리가 바뀌지 않고 지금처럼 산다면, 그래서 지구가 꾸준히 더워진다면 2150년 지구에는 인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32)

직립은 커다란 뇌, 넓은 시야와 더불어 인류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었다. 바로 자유로워진 손이다. 걷는 데는 두 발이면 충분했고, 더 이상 나무에 매달라는 데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손이 자유로워졌다. 예민한 감각이 모여 있는 손은 물건을 쥐고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손은 노동을 탄생시켰다.

인간으로서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뇌의 변화라기보다는 노동이며, 노동은 직립보행의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똑바로 선 인간은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은 다시 인간의 진화를 촉진해 마침내 슬기 인간(Home sapiens)’으로 발전시켰다.

(70)

포경으로 고래가 사라지자 철분을 이동시키는 펌프로 망가진 셈이 된 것이다. 고래 똥이 사라지면 바다의 생산력이 감소한다. 수염고래는 매년 똥을 통해 약 1200톤의 철분을 바다에 공급했다. 이건 펭귄이 공급하는 521톤의 두 배가 넘는 양이다. 수염고래와 펭귄의 똥이 사라지면 결국 식물성 플랑크톤도 급격히 줄어든다. 해양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끊어질 뿐만 아니라 지구 대기의 이산화탄소량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75)

인간들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말할 때마다 빙하가 녹아서 굶주리게 된 동물들을 걱정한다. 참 재밌다. 펭귄 걱정해 주고, 바다표범과 우리 범고래 걱정을 해준다. 고맙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들이 더 걱정이다. 빙하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인간은 조금은 별난 존재다. 최고 포식자이면서도 생물량이 가장 많은 생명. 자연사에서 유일한 존재다. 아마 당신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버틸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도 영원할 수는 없다. 끝이 바로 앞이다. 나를 주연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준 인류에 대한 내 마지막 경고이자 애정 표현이다. 우리가 사라지면, 펭귄과 바다표범과 범고래가 사라지면 그 다음은 당신들 차례다.

(175)

, 인간들이 왜 우리의 하인 노릇을 그렇게 열심히 할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아이러니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기후변화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기후변화는 누군가에게는 위기이고 누군가에게는 기회입니다. , 현대인들이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들이 잘 버텨야 우리도 편히 오래 살 텐데 걱정이네요. 요즘 하는 걸 보면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어쩌면 우리 펠리스 카투스도 선배님의 길을 따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에잇, 잘 좀 하지!

(249-250)

지구에서 일어난 멸종 사건 가운데 세 번째 대멸종처럼 처참한 사건은 전무후무하다. 이때 생명의 95퍼센트가 멸종했다. 95퍼센트가 멸종했다는 뜻은 100마리 가운데 95마리가 사라졌다는 게 아니다. 100종의 생명이 살고 있었다면 이 가운데 95종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싹 다 죽어 사라졌으며, 나머지 5종만 살아남았는데 잘 살아남은 게 아니라 겨우 몇 개체씩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학교에 100개 학습이 있다면 95개 학급은 모두 전학하고 5개 학급만 남았는데 온전히 남은 게 아니라 한 반에 두어 명만 남은 상태다.

(264)

해안선이 줄고 해수면이 낮아지면 해양생물에게는 재앙이 닥쳐 온다. 바다가 넓은 것 같아 보여도 대부분의 해양생물은 깊이 200미터의 대륙붕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산소의 3분의 2는 바다에서 만들어진다. 숲이 아무리 많아봤자 그 넓은 바다에서 활동하는 시아노박테리아와 식물성 플랑크톤의 맹활약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래저래 산소 농도는 줄 수밖에 없다.

(264-265)

그렇다. 이게 문제였다. 우리에게 높은 산소 농도를 제공한 숲은 이산화탄소 농도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숲이 울창해진 덕분에 내가 커질 수 있었지만 울창해진 숲은 더 이상 나를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숲이 나를 추위로 내몰았다. 이산화탄소가 나온다. 이 이산화탄소가 식물로 들어가면 산소가 되어 나오고 온실 작용으로 기후를 유지하는 엄청난 역할도 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 숲은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기만 할 뿐 그걸 다시 세상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그 대신 땅 깊은 곳에 석탄으로 저장해 버렸다.

(267)

석탄기가 남긴 유산은 역시 석탄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인간이 제일 잘 안다. 오죽하면 우리 시대의 이름을 석탄기라고 지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이 애써 모른 척하려는 게 있다. 석탄이랑 우리가 누려야 할 열이 땅속에 갇힌 결과다. 이 열을 3억 년 후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등장했을 때는 대기에 없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흘러들어간다. 우리는 더운 세상이 좋았지만 인간들에게도 그럴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보통 자신이 출현한 그 환경이 유지되는 게 생존에 가장 좋다. 그 환경에 적합해서 선택되었을 테니 말이다.

(308)

미래를 생각하면 앞으로 또 어떤 놀라운 진화가 일어날지 궁금하다. 눈의 진화는 생명의 긴 여정에서 한 단계에 불과할 것이다. 생물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동안 또 어떤 혁신이 등장할까? 미래의 생명체는 계속해서 감각을 개선해 주변 환경에 더욱 잘 적응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눈이 발달해 더 선명한 시야를 제공하거나 다양한 빛이 닿지 않는 심해를 탐험하며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도록 진화하는 생물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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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모리스는 전쟁에 찬성했고, 그것이 불가피하며 심지어 두 나라의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양과 학식이 있는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진화론적 사상에 몰두한 이래, 그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삶이란 매 순간 전쟁이 아닐까? 자연의 조건 그 자체가 지속적인 전투, 가장 강한 자의 승리, 행동으로 유지되고 쇄신되는 힘, 죽음에서 늘 새롭고 신선하게 부활하는 생명이 아닐까? 그는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입대해 전선에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그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뜨거운 조국애가 떠올랐다. 아마도 국민투표를 했더라면 프랑스는 황제에게 충성해도 전쟁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리라. 그 자신도 일주일 전에는 이 전쟁이 유해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독일왕자에게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현안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혼란이 증폭되자 누구 할 것 없이 오류에 빠진 듯 보였다. 도대체 어느 쪽에서 도발을 시작했는지조차 불분명했고, 분명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 한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한 민족을 공격하게 하는 불가피하고 숙명적인 법칙뿐이었다. 한순간 거대한 전율이 파리를 관통하였다. 모리스는 불타오르는 밤의 광경이, 모든 대로에서 횃불을 흔들며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하고 외치던 군중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26)

낡은 제정(帝政)은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긴 했지만 뿌리까지 썩어 있었다. 자유를 말살함으로써 애국주의적 이념을 약화시킨 제정은 다시 자유주의적 기치를 내걸었지만 이미 늦었다. 자기 스스로 풀어놓은 끝없는 환락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제정은 금세 무너질 게 틀림없었다. 크림전쟁, 이탈리아전쟁의 무훈으로 빛나는 군대는 확실히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전통을 가졌으나 돈으로 사람을 사는 대리복무제로 망가졌고, 군사훈련도 타성에 젖어 있었으며, 승리를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현대 과학의 새로운 기술 도입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군들은 쓸데없는 경쟁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몇몇은 전쟁에 대해 가공할 정도로 무지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황제는 괴로움과 망설임 속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전쟁을 맞아 잘못된 보고를 받기도 했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모두가 까막눈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떼처럼 두려움 속에서 지리멸렬하게 전쟁터로 나아갔다.

 

(82)

문득 높다란 황색 담장에 쓰인 나폴레옹 만세!”라는 글귀가 꿈을 꾸는 듯 멍한 모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좌절감과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전설적인 승리를 구가하며 전 유럽을 제패했던 프랑스가 안중에도 없었던 약소국의 일격에 쓰러졌다는 게 사실일까? 반세기 만에 세상천지가 변했다. 뼈저린 패배감이 영원한 승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모리스는 매형 바이스가 일전에 뮐루즈 앞에서 고통스럽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다, 오직 그만이 사태를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를 서서히 약화시킨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고, 젊음과 활력이 담긴 새로운 바람이 독일에서 불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패권 시대가 끝나고 또다른 패권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뜻할까? 하기야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나라에서 불행이 닥치고, 미래를 향해 가는 나라, 가장 합리적이고 건강하고 강고한 나라가 승리하는 게 당연하잖아!

 

(152-153)

모두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병사들을 재미삼아 이리저리 돌리는 놈들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나! 헐벗은 들판에 펼쳐진 주름진 대지를 통해 병사들은 길 양쪽 가장자리로 열을 지어 걸었고, 장교들이 두 대열 사이로 지나갔다. 랭스에서 야영한 다음날 샹파뉴에서 병사들이 했던 즐거운 행군, 농담과 노래로 떠들썩했던 행군,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 격퇴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배낭을 가볍게 들어올렸던 행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 분노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소총과 배낭을 저주했고, 지휘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채 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가축떼처럼 천근만근 발을 그저 앞으로 옮길 뿐이었다. 이 가련한 군대는 자기들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227)

그러나 많이 배운 모리스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삶 자체요,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정의와 평화의 개념을 도립한 자는 불쌍하고 유약한 존재가 아닐까? 어차피 냉혹한 자연이란 끝없는 살육의 장일 뿐이니까.

 

(367-368)

그러나 불굴의 투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세번째 돌격이 이루어졌을 때, 프로스페르는 경기병과 프랑스 기병대 틈에 있었다. 여러 연대라 끊임없이 부서졌다. 다시 생성되는 거대한 파도일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의식이 없었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제피르, 귀를 다쳐 더 빨리 달리는 제피르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제 그는 중앙에 있었다. 주변의 말들이 뒷발로 섰고, 거꾸러졌다. 병사들은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말 위에서 죽은 몇몇 병사가 안장에 앉은 자세 그대로 동공이 풀린 채 계속 돌격했다. 새로이 진격한 200미터 후방으로 시체들과 빈사자들로 뒤덮인 그루터기 밭이 보였다. 그중에는 머리가 땅에 처박힌 병사들도 있었다. 밭에 쓰러져 누운 또다른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툭 튀어나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교의 말로 보이는 거대한 검정말은 배가 터진 채 다시 일어나려 발버둥쳤고, 그 때문에 두 앞발이 쏟아져나온 창자에 뒤엉켰다. 적의 포화가 더욱 거세지며 양쪽 날개가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기병들은 뒤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456)

스당에서는, 황제의 거추장스러운 짐이 주민들의 저주와 비난이 이는 가운데 군청 정원의 라일락 뒤에 놓여 있었다. 비참한 고초를 겪는 불쌍한 주민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것을 어디로 치우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짐에 어린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운, 그 짐이 자극하는 뼈아픈 패배의 기억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둠이 깊은 어느 밤이었다. 수많은 은냄비, 꼬치 회전기, 고급 포도주 바구니와 함께 말들, 마차들, 화물 마차들이 극비리에 스당에서 빠져나갔고, 도둑질할 때처럼 살금살금 불안한 걸음으로 캄캄한 도로를 통해 벨기에로 넘어갔다.

 

(568-569)

전투가 끝난 지 열흘이 넘었지만, 여기저기서 잊히고 버려졌던 부상병들이 계속해서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중 네 명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발랑의 빈집에 누워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의아했는데, 아마도 이웃 주민들이 도와준 것 같았다. 그들의 상처에 구더기가 우글거렸다. 결국 그들은 상처가 오염되어 죽고 말았다. 병상에 스며들어 환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치료 방법이 없는 바로 그 화농균이었다. 입구에서 괴저 내새가 코를 싸쥐게 했다. 배농관에서 역한 고름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수술 부위를 다시 열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뼛조각을 집어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면 뒤이어 농양이 생겼고, 점점 부풀다가 터졌다. 얼굴이 흙빛이 된 지치고 야윈 불쌍한 환자들이 온갖 고통에 시달렸다. 어떤 환자들은 벌써 반쯤 해체된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 숨소리도 없이 며칠을 보냈다. 또 어떤 환자들은 병세가 광증을 유발한 듯 땀에 흠뻑 젖은 채 불면으로 잠도 못 이루며 연신 헛소리를 했다. 어쨌든 조용한 환자든 시끄러운 환자든 간에, 염증에 생기면 만사가 끝이었다. 세균이 이 환자에서 저 환자로 옮겨다니며 그들 모두를 똑 같은 부패의 물결 속으로 휩쓸어갔다.

 

(658-659)

모리스가 이 광적인 꿈에 젖은 것은 코뮌 자체에 대한 은근한 불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위협이 가중될수록 코뮌이 너무나 모순된 요소들로 서로 충돌하고, 쉽게 흥분하고, 일관성을 상실한 채 어리석은 짓만 거듭하는 것 같았다. 코뮌이 약속한 온갖 개혁 가운데 실현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고, 훗날까지 지속될 과업도 전혀 없으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특히 코뮌의 가장 큰 잘못은 서로를 찢어발기는 경쟁심과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벌써 온건한 의원들, 불안을 느끼는 의원들이 더 이상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의원들은 그날그날 터지는 사건의 추이에 따라 움직였고, 독재가 들어서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급진적인 혁명 분파들이 조국을 구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클뤼즈레, 돔브로프스키에 이어 로셀이 의심의 대상이 될 참이었다. 전시(戰時) 시민 대표로 임명된 들레클뤼즈조차 대단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비쳤던 위대한 사회적 시도는 무능하고 절망에 빠진 이 의원들 주변에 시시각각 확대되는 고립감 속에서 점차 자취를 감췄다.

 

(705-706)

그때 장은 놀라운 느낌이 들었다. 땅거미가 지는 이 시각. 불타는 도시 위로 서광이 비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가차없는 운명과 감당하기 힘든 재앙 속에서 분명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했다. 프랑스는 그처럼 엄청난 불행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잇따른 패전, 지방 영토의 상실, 수십억 프랑의 배상금, 피로 물든 참혹한 내전, 사방에 널린 시체와 파괴의 잔해물, 돈도 명예도 없는 궁핍, 한마디로 다시 건설해야 할 하나의 세계! 그 자신도 찢기는 가슴을 거기에 묻었다. 그가 사랑한 모리스도 알이에트도, 그가 꿈꾸었던 행복한 내일의 삶도 폭풍우에 휩쓸려갔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글거리는 맹화 너머로, 싱그러운 희망이 더없이 맑고 고요한 하늘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자연, 영원한 인류의 신선한 소생이었다.그것은 희망을 품고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새로운 청춘이었다. 그것은 수액이 오염되어 잎을 노랗게 물들이는 썩은 가지를 잘랐을 때 푸르른 줄기를 힘차게 내뻗는 생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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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번영하고 발전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바로 그러한 계급 사이의 불균형이 날카롭게 의식되었다. 혁명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으키지 않는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이 무시되고 멸시당한다고 느낄 때 모순된 제도를 타도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킨다. 바르나브(Antoine Barnave)가 열렬한 혁명가가 된 동기는,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을 때 클레르몽 통네르라는 귀족에게 자기들의 좌석을 내주어야 했던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부르주아들이 품고 있었던 불평불만과 자존심의 훼손이 그들로 하여금 앙시랭레짐을 미워하게 하고 그것을 없애버리는 혁명으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52-53)

루이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사람이었다. ‘사람 좋은사람이라는 개념에는 유능하다든가 흑백이 분명하다든가 의지가 꿋꿋하다든가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혹은 믿음직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뜻은 들어 있지 않다. 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디로 보나 호인형 남자였다.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고 특히 열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취미를 취미 삼아 즐기는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무에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루이는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 그는 국왕 참의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논의되면 곧 피곤해져서 회의석상에서도 졸곤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무슨 유익한 일을 과단성 있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책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75)

파리의 공기는 날로 험악해졌다. 국민회의 결의해도 불구하고 왕이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빵값은 매일같이 폭등하고 있었다. 파리의 빈민은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빵집을 습격할 기세였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파리 시민 65만 중 10만이 갖가지 형태의 빈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거지이거나 거지에 가까운 가난뱅이들이었다. 이 최하층 빈민이 아니라도 파리 시민은 대부분 극소수의 부자 말고는 곡가의 앙등을 견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파리 시민은 곡가 앙등의 원인이 불황이나 흉작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일부 부유층의 사재기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반사회적인 인간들이야말로 왕을 지지하고 국민의회를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108)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지 2 2개월 사이에 프랑스 국민은 새 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새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6월 이후 3개월 사이에 갑자기 분노와 불만이 쌓였다. 지금까지 왕당파를 노려보던 프랑스 민중의 눈은 혁명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신한 푀양파로 돌려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와 불만은 막 제정된 결함투성이의 헌법을 그대로 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 헌법을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새로 만들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앞으로 1년이면 족하였다.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은 계속 민중의 힘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


(128)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파리는 본래 행정구역이 60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0 5월에 48개의 섹시옹(section)으로 개편되었다. 섹이옹마다 1800명 정도의 능동 시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자들이 시 코뮌을 구성하는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8 10일 사건을 계기로 각 섹시옹이, 특히 노동자들의 섹시옹이 그들의 코뮌 대표자들을 수동 시민으로 교체하여 코뮌의 능동 시민을 압도하게 되었다. 수동 시민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압력에 의하여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차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새 국회인 국민공회 소집을 가결하였으므로 코뮌의 불법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합법성의 기분은 이미 개정하기로 선포한 낡은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새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헌법의 원리에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회의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회의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4)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공회는 연설문을 인쇄하여 전국 코뮌에 배포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그 실수란, 그가 비난한 의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인 만큼 그의 비난에 대하여 뭔가 양심이 찔리는 데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비난에 대하여 뭔가 양심이 찔리는 데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비난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위협을 느꼈다. 만일 로베스피에르가 비난의 대상자들 이름을 밝혔더라면 위협을 느낀 자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반대파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위기의식을 더욱 격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무서웠다. 그가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협을 느낀 자들은 온건한 평원파 의원들을 회유하여 다음 날 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칠 계획을 세웠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회의 과반수 획득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선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실수였다.


(179)

따라서 자코뱅의 세 번째 전통은 참 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평등주의적 민주의의이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자코뱅이 제정한 1793년 헌법의 제5조는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인민 전체에게도, 인민 각자에게도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 수호의 최후 수단으로서의 민중 봉기를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코뱅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29)

나폴레옹이 왕이 아니라 황제간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229-230)

그는 교황 피우스 7세에게 제관의 대관(戴冠)을 교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피우스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교회 앞에 무릎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주재하기 위하여 파리로 향하였다. 1804 12 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대관식은 교황이 제관을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씌어주려는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나폴레옹은 관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일반 관중 쪽으로 돌아서서 제 손으로 관을 제 머리에 위에 얹었다. 그의 제관은 다른 어느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라는 것을 온 세상에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자기 손으로 황비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나폴레옹의 제위는 이중으로 성별되었다. 하나는 국민투표의 인민의 소리에 의하여 또 하나는 종교의식의 신의 소리에 의하여. 피우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하나밖에 실현된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1806 1 1일부터 옛 역서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의 종결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58)

나폴레옹 제국은 족벌 제국이었다. 황제의 형제들과 친척 및 부장들을 위성국가의 통치자로 봉하였다. 그러한 그가 1810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합병하였다. 루이가 네덜란드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의 성패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모든 정책은 대륙봉쇄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안 지역들을 프랑스에 합병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고, 심지어 교황령이나 일리리아 지방까지도 무리하게 합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영국해에 접해 있는 가장 중요한 네덜란드에서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봉쇄의 운명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305)

샤를도 형 루이처럼 67세의 홀아비였으나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활동적이고 정렬적이고 명쾌한 성격만이 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사상도 매우 달랐다. 샤를은 왕당파의 두목으로서 헌장을 우습게 여기고,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장난으로 믿고,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이제 왕권신수설을 부정한 헌장을 준수해야 하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헌장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정치의 군주로서의 임무에 성실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329-330)

그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선진 산업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을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나타난 빈부의 격차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줄이긴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는데, 이를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운동을 사회주의운동이라 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은 갖가지 이론과 형태로 19세기 선진 산업국가들의 역사를 색칠한다. 특히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그렇다.


(341)

이제 국민은 공화정을 확정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431-432)

파리 코뮌 기간 중 벌어진 공전의 참변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 문화와 현대 문명의 중심지 파리에서 어떻게 하여 그런 끔찍하고 야만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코뮌 직후부터 거기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학의 생명은 해석에 있다고 하지만 파리 코뮌에 대한 해석만큼 오늘날까지 극심한 대립을 보이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파리 코뮌의 해석이 처음부터 유달리 현저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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