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맹자가 제선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부를 보기를 자기의 생명 같이 여길 것입니다(복심 腹心 : 뱃속과 심장이라는 뜻인데 옛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의 중추를 뇌로 보지 않고 복심, 즉 오장육부로 보았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가 기르는 개나 말 정도로 여긴다면, 신호 또한 군주를 보기를 성내를 걸어다니는 보통사람의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토개(土芥, 짓밟는 흙과 쓰레기. 아주 천한 것)처럼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주를 보기를 죽여야 할 원수나 적수로 여길 것입니다.


(457)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인()하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인()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의()로우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468)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사람을 감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진실로 사람을 감복시켜 존 적이 없다. 그러한 동기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저절로 그들이 교화되도록 한 연후에나 비로소 천하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다. 천하사람들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와 감복되지 않고서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된다는 것은 여태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570~571)

만장이 여쭈어 말하였다: “감히 친구를 사귀는 원칙에 관하여 한 말씀 듣고자 하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다. 친구 사귀는 데도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ㅏ, 친구 사귐의 사이에는 장유의 나이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귀천의 신분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연줄이나 패거리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된다(沃案 : 천하의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세 번째 불협형제(不挾兄弟)”를 주희는 해설치 않았고, 조기는 사귀는 사람의 형제 중에 부귀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사귀어서는 아니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으나, 그 주제는 이미 앞에서 말한 ()”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제등이(等夷)”로 보아 같은 한 동아리라는 의식, 타 인간 패거리와는 다르다는 의식, 혹은 대형교회 나가서 형제자매 찾는 연줄의식으로 보았다. 여기 맹자의 언급은 오륜에 얽매여 예의절차에만 충실한 듯이 보이는 동방문화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가 상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래디컬한 언급이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덕과 실력 이외의 어느 것도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602~603)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선생의 말씀은 매우 명료하오. 물은 진실로 선생의 말씀대로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할 것이요. 그러나 과연 상하의 분별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오리이까? 물은 본시 그 자체로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소. 인성(人性)이 본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소. 인성은 선하지 아니 함이 없고, 수성(水性)은 아래로 흐르지 아니 함이 없소이다. 지금 대저 물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튕겨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훌쩍 넘어갈 수도 있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역류시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도 할 수 있소. 그러나 어찌 이런 현상을 물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될 뿐이오이다. 사람 또한 불선(不善)을 행하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본래적 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 본성에 어긋나게 격발되듯 잘못 격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외다.”


(637~638)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려두고 그곳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다시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개가 없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쏘아다니며 그것을 되찾아오려고 열심이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되찾아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학문(學問, 우리가 쓰는 학문이라는 말의 한 유래)의 길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되찾아오는 걸일 뿐이다.”


(63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의 무명지(無名指, 넷째 손가락으로서, 가장 용도가 적을 수 있기 때문에 무명(無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약지(藥指)라고도 하고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안중근도 단지동맹할 때 이 손가락을 끊었다)가 구부러져서 펴지질 않는다(“()”()”과 같다). 무명지가 구부러진 것이 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생활에 큰 불편도 없지마는, 누군가 그 손가락을 잘 펴주는 용한 의원이 있다고 하면 진()나라나 초()나라로 가는 먼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간다. 그 이유는 단지 내 손가락이 남의 손가락 같이 안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내 손가락이 남의 손가락 같이 안 생겼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남의 마음 같이 생기지 못한 것은 혐오스럽게 생각할 줄 모른다. 이것을 나는 사람이 경중을 가릴 줄 모른다, 즉 부지류(不知類)라고 일컫는다.”


(691)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한 나라의 땅을 빼앗아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역량이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실로 인자(仁者)라고 한다면 그러한 짓은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죽여서 토지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입니까? 군자가 군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군주로 하여금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군주가 인()을 향하여 전력투구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딴 길이 없습니다.


(69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늘날 군주를 잘 섬긴다 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군주를 위하여 토지를 개산하여 조세를 잘 거두어들여 국고를 충실하게 할 수 있도다’. (여기 가장 포인트가 되는 말은 위군(爲君)”이라는 말이다. “위민(爲民)”이 아닌 군() 개인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뜻이다). ~ 진실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양신(良臣)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옛 성왕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모두 백성을 등쳐먹는 민적(民賊)들이다. 군주가 바른 정도의 도덕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의 실현에 근본적으로 뜻을 두지 않고 있는데 그런 불선한 군주를 부강하게 만들기를 꾀한다는 것은 곧 폭군 잡놈 걸()을 부강하게 만드는 꼴일 뿐이다.


(699)

맹자는 민중의 평동사상을 존중하지만, 왕도의 실현을 위하여 문명의 번영을 동시에 주장한다. 무조건의 하향분배는 국가문명의 수준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묵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맹자의 인문주의사상이다. 문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하며, 그 긍정의 대전제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보편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따라서 세율이 과중하면 측정이 되지만 세율이 과하게 불급해도 야만의 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이 문명의 번영을 이룩하여 그것이 다시 서민의 교육과 문화생활로 환원되는 피드백 시스템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705)

집안의 가사고 그렇고 회사의 결정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결단을 내린다고 하는 것은, 그 결정 프로세스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지(衆知)를 모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정치적 행위의 정도이다. 이 정도를 상실한 상태를 우리가 독선, 독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반추해보아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래도 사회적 하자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주변의 시세에 밝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살고, 그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삶의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독선과 독재를 증오하는 개방된 삶의 자세야말로 유교의 인문정신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40~74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내 주변의 인물들을 자라보는 네 가지 틀이 있다. 그 첫째가 군주를 섬긴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부류가 있다. 이 자들은 군주를 섬기면서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신경을 쓰는 아첨꾼들이다. 그 두 번째가 국가사직을 평온하게 만든다는 일념만을 가지고 있는 신하들이다. 이 자들은 물론 국가사직이 편안하기만 하면 만족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 그 세 번째가 천하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뻑시는 좀 큰 스케일의 천민(天民)이 있다. 이들은 천하를 움직이고자 하는 포부가 실현될 수 있는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할 때에만 출사하여 행동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들이며 공리에 밝은 인물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물은 네 번째의 부류이니 곧 대인(大人)이다. 대인은 오직 세태에 관계없이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주변의 모든 사물이 바르게 되는, 그러한 인물이다.”


(742)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에게 삼락(三樂)이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되어 왕도를 구현하는 일조차도 이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엄마 아버지가 다같이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과 동생이 모두 별 사고 없이 지내고 있으면 그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아 부끄러움이 없고 인세를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러한 공명정대한 삶의 모습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 이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외어 왕도를 구현하는 일조차도 이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아니 하노라.”


(751)

민중의 삶의 도덕성의 기초를 통치자가 민생으로써 체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맹자의 주장은 만고의 명언이며 고금에 통용되는 철칙이다. 20세기에 아무리 서구 정치학과 경제학이 발달했다 한들 이러한 맹자의 주장을 구현하는 데 별 도움이 없다. 우리나라 경제학의 태두이신 조순 선생께서 서구의 경제학은 결코 한국의 경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경제는 수리가 아닌 상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봐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절약이라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유교의 절약은 묵가의 절용과는 달리 예()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소비는 더 올라가서는 아니되는 한도가 있는가 하면 더 내려갈 수 없는 한도가 있다. 그 한도의 표준을 ()”라고 하는 것이다.


(760~76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 우물을 판다는 것은 반드시 끝까지 지하수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 파기를 구인(, 조기는 1() 8()이라고 했다. 혹자는 7척이라고 한다. 9인이면 상당한 깊이를 나타낸다)이나 했어도 지하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중단해버리는 것은 우물 파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우물을 안 판 것이나 마찬가지다.”


(795)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소목장, 대목수, 수레바퀴공, 수레거푸집 장인과 같은 최고의 기술자들도 후학들에게 콤파스와 곡척의 원칙을 가르쳐줄 수는 있으나, 후학들로 하여금 명인의 솜씨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득하는 것이다.”


(818)

맹자께서 방황하는 그의 제자 고자(高子)를 타일러 말씀하시었다: “산봉우리의 작은 길도 당분가 사람들이 열심히 그 길로 다니면 탄탄한 좋은 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길로 당분간 사람들이 다니지만 않아도 금새 억새 같은 잡초로 길이 막혀 버리고 만다. 학문이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너의 마음은 억새로 덮여 길이 보이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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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러한 리얼리스트들의 균형감각에 비하면 맹자의 아이디얼리즘은 참으로 무모한 것이다. 맹자는 이들의 패도에 대하여 왕도를 주장한다. 왕도라는 것은 인의(仁義)의 실현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의 쇠미기에, 서바이벌을 위해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점쳐야 할 긴박한 시기에, 어느 철인이 나타나 인정(仁政)을 외친다고 생각해봐라! 과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맹자는 중국의 동키호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키호테는 픽션이나 신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만, 맹자가 돌진하는 세계는 완벽한 논픽션이다. 맹자에게는 모든 아이디얼리즘이 리얼한 현실이다. 그가 신봉하는 이상적 가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76)

자하가 공자에게 여쭌다.: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오이까?” 공자는 타이른다. :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라. 작은 이익에 구애되지 말라.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면 전체적으로 통달할 수 없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90)

법은 도덕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기초하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더 중시한다. 상앙에게 있어서 법이란 상과 벌, 그 두 개의 칼자루일 뿐이다. 법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심리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 정감은 벌을 싫어하고 상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법은 반드시 쉬워야 하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이 법의 저촉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형벌을 통해서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국가는 강성해질 수 있다. 형벌을 통하여 겁약한 백성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형벌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부유한 백성들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부유한 백성들은 마냥 부유해지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통하여 그 부를 흡수하여(작위를 주어 부를 빼앗는 등의 여러 방법 동원)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앙의 원칙은 세마디의 말로 집약된다:”빈자부(貧者富), 부자빈(富者貧), 국강(國强)” 가난한 자가 부유해지고 부유한 자가 가난해지면 국가는 강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104)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 공생애의 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당대 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 그의 민중의 삶에 대한 묘사는 <맹자>라는 텍스트에 즉하여 보면 너무도 처참하다. 민중은 일상적 삶 속에서도 뙤약볕, 가뭄, 홍수, 한해, 기근에 시달린다. 이들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경작, 제초, 관계 등의 노동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롭게 달성하는 작은 평화도 군주의 학정에 항상 무너지고 만다.


(116)

민생질서와 도덕질서, 이것이 그의 왕도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논어>에도 <자로>9에 보면, 공자가 위나라에 당도하였을 때 염유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염유가 참 인구가 많기도 하다고 감탄하니까, 공자는 이들을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에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하고 물으니까, 공자는 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138)

그리고는 결론 짓는다:”술이란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게 마련이요, 즐거움이란 극도에 이르면 슬퍼지게 마련이요. 만사가 모두 이와 같소. 사물이란 극도에 이르면 아니 되는 것이며, 극도에 이르면 곧 쇠한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요.” 위왕은 이 말을 들은 후로 밤새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곤을 제후의 주객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항상 곤이 위왕을 곁에서 모셨다. 그러니까 순우곤은 위왕을 도덕적 교훈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골계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153)

타인이 나에 대하여 좋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타인이 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면서 그것이 스스로 평가될 때까지 기다려라! 마음을 텅 빈 채로 남겨두어라. 그것을 두 쪽으로 갈라 판단하려 하지 말라! 맑은 채로 스스로 깨끗해지도록 내버려두어라! 타인의 무책임한 언론에 귀를 기울여 실제로 사태가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사태를 살펴 중험할 뿐, 타인의 변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만물이 나의 신념과 일치하는 그런 때가 오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스스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169)

국가의 기본은 인간이며, 인간의 기본은 가족윤리에 있다. 가족윤리는 한 가족의 이해만을 중시하는 편협한 패밀리즘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함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minimal moral unit)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기본이 무시되는 사회는 아무리 외관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입장이다. 가족의 윤리를 통하여 국가의 질서와 윤리를 정립하고자 하는 맹자의 도적주의는 매우 아둔하게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국가의 기본으로서 생각하는 민중”(프롤레타리아라고 불러도 좋다)의 간절한 소망도 민생이며, 민생의 기본은 한 가정의 안락한 삶이다.


(19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또 왕의 군대를 통솔하는 참모장격인 장수가 사졸(士卒)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선왕은 말하였다: “나는 그 장수를 해임시키겠습니다.”

말씀하시었더: “그렇다면 또 국내 사경(四境) 전체의 민생고가 가중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문이 꽉 막힌 왕은 좌우를 둘러보며 딴청을 하였다.


(194)

맹자의 담론에 깔린 전체 논리구조는 이와 같은 것이다. 즉 첫째로 인륜에 의하여 처자식은 남편에게 위탁된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처자식의 안위에 관하여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책임이 있다. 둘째도 마찬가지로 군대의 장군에게는 왕권에 의하여 사졸이 위탁된 것이다. 장군은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사졸의 안위에 관하여 책임이 있다. 셋째도 마찬가지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천명에 의하여 왕에게 위탁된 것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와 복지를 지키지 못하면 최고의 지도자는 혁명되어야 한다.


(239)

말한다: “감히 묻겠나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호연지기란 과연 무엇입니까?”

말씀하신다: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기()됨이 지대하고 지강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天地之間)에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기()됨이란 항상 의()와 배합되며 도()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쩡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 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에 돌이켜 볼 때 꺼림직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항상 말하기를 고자(告子)라는 분이 의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의를 심외(心外)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의는 외재적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 노력의 결과를 예기(豫期)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의를 배양한다고 하는 큰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만, 빨리 효과를 얻기 위해 조장(助長)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54)

이로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 단서, 실마리.)이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이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이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이다.


(257)

다음에 측은지심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심적현상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곧 인()이라는 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덕의 (), tip”일 뿐이다. 따라서 ()”은 인이라는 덕이 표현된 심적인 현상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하는 측은도 감정이다. 따라서 사단(四端)”은 기()가 아니라 ()”라고 말하는 후대의 논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단도 칠정의 선한 형태일 뿐이라고 하는 고봉의 논의는 정당한 것이나 고봉은 애석하게도 퇴계의 논박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맹자의 논의를 후대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는 분별적 카테고리 속에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자학적 태제를 가지고 맹자의 웅혼한 융통(融通)의 심()을 성()과 정()으로 갈라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오류이다. 맹자에게 있어서는 심() 그것이 곧 성선(性善)의 근거일 뿐이다.


(320)

맹자의 정전의 구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약자보호의 사상이며, 평등주의적 분배의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상은 하부고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육이라는 상부구조의 도덕질서에까지 평등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항산과 항심은 동시적 교육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항산도 교육되어야 하며, 항심도 교육되어야 한다.


(348)

맹자는 이러한 당대의 비극적 정황을 고려하면서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는 자래야만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장부! 죽음으로써 천하의 광거, 천하의 정위, 천하의 대도를 지킬지언정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나이! 그 사나이의 진정한 용기는 실존 내면의 도덕성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도 말했다: “신장은 항상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니 어찌 그를 강하다 하리오?” 사사로운 욕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공자는 또 말한다: “삼군의 거대병력에 맞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다. 그러나 초라한 필부에게서도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390)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남이 그토록 사랑했는데, 사랑해준 그가 나를 친하게 생각치 아니 하면 나의 인()을 반성하라! 내가 사람을 다스렸는데 다스려지지 아니 한다면 나의 지()를 반성하라! 내가 남에게 예()를 다했는데, 그가 나에게 응당한 보답을 하지 않으면 나의 경()을 반성하라! 행하여 내가 기대한 것이 얻어지지 않을 때는 항상 그 원인을 나에게 구하라. 나의 몸이 바르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로 돌아온다. <>(대아 <문왕(文王)>)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아니 하뇨!: ‘길이 길이 네 속의 천명에 배합될지니, 그것만이 결국 너의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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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6-05 17: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5-6)

석탄발전소, 자동차 등록대수, 주유소, 산업단지, 소 사육두수. 상징적인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이다. 지난해 정부는 ‘2050 탄소 중립을 발표했는데, 순배출량 ‘0’를 탄소중립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렵다. ‘2050 탄소중립은 간단히 말하면 2050년까지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30년 안에 석탄발전소, 내연기관 차량, 주유소 같은 화석연료 기반 시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산업단지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전환해야 하며, 소 사육두수는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2018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1.5도 특별보고서를 계기를 본격 등장한 탄소중립은 지금껏 지구에서 인간이 구축해온 화석에너지 기반의 경제 사회 체제를 완전히 뒤흔드는 일이다.

(11)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80%를 화석에너지를 태워서 쓰고 있다. 2017년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 석탄 소비 세계 4, 석탄 해외투자 3, OECD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나라가 30년 이내에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30년간 하는 체만 해왔던 기후위기 대응을 끝까지 버티다가 이제는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는 기후위기를 방관해왔다. 특히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산업계는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규제를 강화하면 해외로 산업체를 이전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했고, 정부는 그런 산업계에 끌려다녔다.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이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해, 한국사회 전체가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탄소중립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셈이다.


(15)

어쩌다, 지금, 지구에서, 사는 우리는 한정된 지구에서 인간의 무한한 소비와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세대이다.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서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산회는 정부와 기업, 시민이 각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합의해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무엇이 지금의 위기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뼛속 깊이 인식하지 않고서는 변화도 합의도 만들어내기 어렵다. 탄소중립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탄소중립사회를 위해 누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지 등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한 그림을 공유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39)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있는 시장경제에 대해서, 호주 출신의 작가인 테드 트레이너는 물자가 부족해지면 부자만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기발한 장치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석연료가 점차 부족해지면서 이 말은 진실로 밝혀질 것이다. 부유층은 어떤 식으로든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사용하면서 부와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과거의 문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회가 붕괴할 때 부유층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좀더 오래 연명할 뿐이다. 이번에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선진국에서도 빈곤층은 조용히 사멸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화된 통신수단이 그럴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잘 방비를 한 엘리트일지라도 장단기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사회적 정의(正義)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43)

피크오일로 인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좀더 지속가능하고 재생가능에너지로 동력을 얻는 경제로 옮겨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간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 사이에 디딤돌은 없다. 저편의 세상은 이쪽과 매우 다를 것이다. 또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전면적인 개조 말고는 대안이 없다. 소심하게 조금씩 바꾸어나가려는 정책, 실패하고 있는 체제를 조금 개량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52-53)

오늘날 우리는 인류세를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로 인류가 자연자체를 바꾸는 환경적 힘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행위의 결과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다행히 이를 막기 위해 탈탄소화를 비롯해서 생태적 전환이 긴급하게 필요하며, 이는 정의로운 전환이어야 하고 또 정의로운 전환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의미와 존엄을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정의가 없다면 우리의 생태적 전환은 불가능하거나 인간의 파멸을 유예시키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류세까지 오게 된 것은 인간 존재를 자연과 분리하여 특권화시키고 분리된 자연을 격하시켰기 때문인데 이를 회복하지 않고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07-108)

많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한다. ‘으로 결정되고, 행복은 성장으로 보장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율성을 상실했고 체념과 순응에 익숙해졌다. 타율성에 길든 우리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은 성장 이데올로기의 식민지가 되었고 성장은 자연의 질서로 행세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성장의 주술에 걸린 현실에서, 탈성장은 우선 상상력의 문제다. 탈성장은 경제성장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에서 나왔지만, 경제학적 관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탈성장은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삶의 근원적 전환을 뜻한다.(<에콜로지카>). 탈성장은 일차적으로 경제성장이 삶의 터전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삶과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는 외침이다. 성장주의가 의식을 마비시키고 소비주의가 삶을 잠식한 현실에서 새로운 전망을 열려고 하는 탈성장은 상상력의 탈식민지화로 시작해야 한다.(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탈성장의 가능성이 아니다. 가능성부터 따지면, 시작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우리는 먼저 새로운 삶의 양식과 사회의 전망을 상상할 수 있는지, 상상할 자유가 있는지 묻고 고민해야 한다(월터 브루그만, <예언적 상상력>).


(121-122)

온 나라, 온 세계가 코로나 역병의 비상사태로 코와 입을 막은 채

형제간의 만남조차 제지되는 자리에서

수백만 수천만의 가축들이 역병 방지라는 이름으로 무차별 살처분되고

미세먼지 하늘과 플라스틱 바다와

기후위기와 종의 대멸종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절박한 이 엄중한 시기에

한때의 정권을 위해

한갓 선거의 매표행위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만들고 통과시킨 자들


그들에게 다시 묻는다

그 파괴와 죽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 신공항

누구를 위한 신공항인가.

무엇을 위한 신공항인가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죽어가야

얼마나 더 숱한 생령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그 삽질

그 탐욕

그 피 묻은 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모두 죽어가고 있다

인제 그만두어라

그 죽임의 굿판 제발 걷어치워라

그렇게 모두가 죽어간 뒤에 남겨질 것이 무엇인가

- 이병철 <그 죽임의 삽질을 내려놓아라> 중에서

(144)

바다가 바다인 것은 바닥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강물을 품어주기 때문이네

산이 산인 것은 지리산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네

변치 않는다는 것이지

돌 속에서 돌을 꺼내 돌의 자리에 세우고

나무속에 나무를 꺼내

나무로 자라게 했기 때문이네

제자리에 있어야 하네

사람은 사람의 자리에

반달가슴곰은 반달가슴곰의 자리에 있어야 하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산자락마다 깨알처럼 모여 사는 마름과 마을을

능선과 능선 너머

푸르고 푸른 첩첩의 산능선을

그리하여 사람의 처음처럼 거기 서 있는 지리산을

그 곁을 따라 그대와 나의 마른 꿈을 적시며

골짜기마다 풀어놓은

논과 밭을 키우고 흐르는 섬진강을

정녕 그대를 보지 못하는가

    - 박남준 <지리산은 지리산의 자리에서 노래하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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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심지어 미국의 어떤 은행은 대출받는 이유를 글로 쓰게 하고 그 글에 등장하는 단어를 분석해 대출 신청자가 돈을 잘 갚을 사람인지, 못 갚을 사람인지를 추정한다. 해당 은행이 발견한 인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대출금을 잘 갚는 사람들은 금리’, ‘금리 차이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했고, 잘 갚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어도’, ‘반드시’, ‘하나님께 맹세와 같은 단어나 구문을 많이 사용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라도 대출을 받으려고 과장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43-44)

여기서 인사이트는 사전상 통찰력이라고 번역된다. 그냥 영어로 보면 인사이트란 말은 ‘in’‘sight’의 결합으로 안을 본다는 뜻이다. 은 보는 이의 관심에 따라 달라진다. 소비자가 고객에게 관심이 있는 판매자라면 고객의 마음속을 본다는 뜻이다. 고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즉 해당 제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이 제품을 구매하는지 또는 구매하지 않는지를 아는 것이 인사이트다. 기계 장비에 관심이 있는 엔지니어게는 기계 장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보인다는 의미다. 품질이 나쁜 제품이 나올 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특정 부품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인다는 뜻이다.


(53)

첫 번째가 묘사분석, 두 번째가 진단 분석, 세 번째가 예측분석, 네 번째가 처방분석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가 또는 일어나고 있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로 이어지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나아간다. 과거의 상황 이애, 원인 이해, 미래 예측, 그리고 우리의 액션 플랜을 파악하는 순으로 나아간다.


(76)

최근 몇 년 간 가장 성장세가 높은 사업 분야는 플랫폼 사업이다. 플랫폼이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일종의 시장이다. 플랫폼 자체는 생산도 하지 않고 구매도 하지 않으며, 단지 중간자 역할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소비자가 몰려와야만 시장이 형성된다. 이 때 소비자를 끌어당기는 당근이 바로 빅데이터다. 플랫폼이 성공하려면 소비자 입장에서 많은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꼭 가고 싶은 곳이어야 한다. 대표적인 곳이 아마존, 호텔스닷컴, 유튜브, 우버 등이다.


(115-116)

예를 들어 고객이 3일 내내 밤마다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서 시계 하나를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아마존은 그 고객이 그 시계를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고객은 시계 가격이 5000달러로 고가라서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이 고객의 과거 구매 이력을 보니 그 가격의 제품을 못 살 고객이 아니다. 이렇게 판단되면 아마존은 그 시계를 드론에 태워서 고객에서 보낸다. 드론 안에는 시계와 함께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원치 않으면 반품하세요!’

이 드론을 받는 순가 고객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결제가 된다. 고객의 카드 정보는 아미존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지금 아마존이 추진하고자 하는 예측 배송이다.


(149-149)

어떤 연구팀은 목소리도 분석했다. 애널리스트가 내년에는 실적이 안 좋겠죠?”라고 물어볼 때 CEO가 편안한 목소리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지, 아니면 갑자기 흥분해서 말이 빨라지는지 그 음성을 분석한다. CEO의 말이 빨라지거나 톤이 올라간 경우,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CEO가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설명하는 경우에도 주가가 떨어지기는 예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 좋은 상황을 인정하기 싫어서 어려운 말과 복잡한 표현으로 적당히 피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159-160)

태스크(task)란 인사이트를 도출하기 위해 데이터에 대해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을 뜻한다. 과거와 현재를 묘사하는 인사이트 관련 태스크에는 시각화, 연관분석(association mining), 클러스터링(clustering)이 있고, 미래 예측인 포사이트 관련 태스크에는 예측 및 분류와 이상탐지(anomaly detection)가 있다. 총 다섯 가지의 분석 태스크가 있는 것이다.


(256)

미국은 1970년대에 개인정보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치열하게 거친 후에 기본적으로 활용을 허용하되 대신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에만 처벌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는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만 있어도 처벌하는 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후 미국은 개인정보를 적극적으로 산업에 활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데이터를 구매하고 가공하고 판매하는 것이 모두 허용된다. 데이터 가공업과 데이터 산업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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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천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문명 세계는 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비잔티움 제국이었습니다. 100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50만 명에 육박했던 반면 유럽 내에는 인구가 만 명이 넘는 도시조차 없었거든요. 도시 규모가 문명 발달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그 규모를 통해 사회 조직의 체계나 운영 능력을 엿볼 수는 있죠. 아무튼 도시 규모를 기준으로 하면 이 시기 유럽과 비잔티움 제국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5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아직 도시 이름이 좀 낯설죠? 그렇지만 뜻을 알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이라는 뜻인데요, 성인을 뜻하는 세인트(Saint)’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표현 야고(Yago)’가 합쳐진 말이에요. 콤포스텔라는 별의 들판이라는 뜻입니다. 합치면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의미가 되지요.


(106)

대성당은 규모가 큰 성당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교가 자리한 지역에 있는 주교좌 성당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주교는 기독교 사제 중 고위 성직자에 해당합니다. 주교가 맡은 지역이 크거나 중요할 경우 대주교로 격상시켜 부르고요.


(247-248)

그래서 중세인들은 교회를 천상의 공간처럼 건축하기에 이릅니다. 지상에서 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천국과 좀 더 가까운 공간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죠. 그곳이 바로 고딕 성당입니다. 고딕은 건축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인들은 그 힘을 이용하여 천상의 세계로 한 걸음 다가가려고 했죠. 직접 고딕 성당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이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280)

사실 고딕이라는 표현은 후대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원래 중세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죠. 쉬제르 자신은 라틴어로 오푸스 모데르눔이라고 일컬었는데, 스스로도 이 건축법이 새롭다고 생각했는지 현대적 양식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리고 프랑스 밖에서는 이 양식을 오푸스 프란키제눔’, 프렌치 스타일이라고 불렀어요. 프랑스풍이라는 이야기인데 지금이야 메이드 인 프랑스하면 패션이나 음식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이때는 고딕 성당을 떠올린 셈입니다.


(281)

사실 고딕이라는 용어는 고트족의 양식을 뜻합니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죠. 고트족은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고딕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볼 수 있거든요. 중세 건축을 지칭하는 말로 고딕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자리라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비평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시기 이탈리아 사람의 눈에는 알프스 산맥 너무 유럽에서 유행했던 중세 성당이 야만적으로 느껴졌던 거죠.


(308)

어쨌든 영국이 다채로운 고딕 천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초기에 상당한 건축적 역량을 축적해두었던 덕분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면서 영국에서 수많은 교회가 지어지고 엄청난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곳곳에 크고 웅장한 노르만 양식의 로마네스크 교회들이 들어섰던 모습을 기억할 겁니다. 당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최첨단 건축을 이끌던 노르만왕조가 11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하면서 유럽 건축사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잘 훈련받은 영국의 건축 장인들이 점차 대범한 시도를 했죠.


(335)

역사적으로 11세기 후반부터 유럽 곳곳에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중 최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었죠. 볼로냐 대학의 설립은 10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58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지요. 볼로냐 대학은 이렇게 해서 명실공히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교가 됩니다. 볼로냐 대학은 역사가 긴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에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죠. 그 무렵 프랑스 파리에도 대학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영국 옥스퍼드에도 대학이 세워집니다. 자기네 나라 학생들이 다른 나라 대학을 기웃거리는 게 자존심 상했나 봐요.


(398)

초고층 건물을 지으면 경제가 안 좋아진다는 징크스를 말합니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지어지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인데 최근에는 아랍 에미리트 공화국이 부르즈 칼리파라는 엄청난 초고층 건물을 짓다가 국가 부도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고층 건물의 저주가 계속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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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06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63빌딩이죠 아마?^^

bookholic 2021-05-07 00:08   좋아요 2 | URL
이젠 등수 안에도 못들지만, 마음 속에 일등은 63빌딩이죠...ㅎㅎ

미미 2021-05-06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산티아고가 이런 뜻이었네요.^^ 콤포스텔라도 어감부터 좋은데 뜻도 예뻐요ㅋ.ㅋ 이 책 어딘가 책장에 있는데 아무래도 소장용인듯 합니다ㅋ

bookholic 2021-05-07 00:12   좋아요 2 | URL
미미님 책상 위의 chaos 속 cosmos 같은 책들 속에서 안 보였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을 소장용에서 탈출시켜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