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아일리시, 다른 때였다면 불법 구금으로 고등법원에 고소했을 겁니다, 래리를 꺼내왔을 거예요. 하지만 국가비상법 때문에 인신보호영장(불법 구금 방지 목적으로 행하는 구속적부심사 제도)이 중지됐어요, 국가가 특별 권력으로 사실상 사법부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164-165)

날씨에 기억이 있다. 하늘에 무르익은 봄이, 날렵한 제비가, 온통 새까만 칼새가 있다, 돌아온 새를 보면서 세월이 흐르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열매를 당연하게 여겼던 순수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군가 내미는 열매를 받아서 맛을 보지도 않고 깨물어 먹었고, 아무 생각 없이 씨방을 버렸다. 아일리시는 피닉스 공원에서 혼자 걸어 다니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눈앞에 자기 생각밖에 보이지 않는다. 잎이 넓은 나무들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위를 올려다보며 저 나무들 밑에서 흘러간 시간을, 나무들이 나이테로 기록하는 세월을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가고 그녀는 붙들 수 없다, 세월이 계속 흘러가지만 떠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끌고 간다.

 

(168)

그녀는 집 안을 통과하는 달()을 지켜본다. 멍든 새벽빛이 요람 안의 벤에게 닿고, 제멋대로인 그 빛이 어린아이처럼 아일리시에게 딱 달라붙어 자는 몰리에게 닿는다. 새벽이 왔지만 낮은 달아났다. 그녀는 이제야 깨닫는다. 어둠을 덧없게 만드는 빛을 거짓이고 진실하며 흔들림 없는 것은 밤이다. 아이들을 품 안으로 불러들이지만 자신의 위로는 거짓이고 이 집은 피난처가 아님을 안다.

 

(210)

인생이라는 세월에 먼지가 쌓이고, 그 세월이 서서히 먼지로 변한다,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겠지, 한쪽 눈만 감아도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 래리가 곁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지만 마주치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다, 아일리시는 양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캐럴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다고,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고,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여움은 희망이라는 옷을 입은 슬픔이다.

 

(225-226)

뉴스가 나오자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라디오를 꺼버리고 생각한다, 이건 뉴스가 아니다, 뉴스가 전혀 아니다, 모래주머니에 나른하게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군인을 집 안에서 내다보는 민간인이 뉴스다, 모래주머니에 기대어놓은 소총이 뉴스다, 군인의 깔깔 웃는 입, 아스팔트에 아무렇게나 버린 패스트푸드 포장지와 종이컵이 뉴스다, 저 위쪽 거리에 살다가 떠나기로 결심한 은퇴자 부부가, 그들이 진입로에서 하는 말다툼이, 차에 실을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손을 펄럭거리는 아내가, 굳은 표정에서 아내를 보는 남편이, 아내가 아이처럼 끌어안은 검정 가방이, 그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 뉴스다. 자동차에 실린 모든 짐이, 남편이 올라앉아서 겨우 닫는 자동차 트렁크가, 마지막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진입로 대문이, 밤이 와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뉴스다. 일주일 동안 빨간불이었다가 결국 꺼져버리는 신호등,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할 자동차, 점점 쪼그라드는 거리의 분위기, 셔터를 내린 가게들, 합판을 댄 창문들, 쉰 목소리로 밤새 짖는 개들, 통화가 너무 위험해서 이제 전화하지 않는 장남,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뉴스다.

 

(235)

아빠는 늘 너와 함께 있어, 아일리시가 말한다. 떠나 있어도 마찬가지야, 그게 그 꿈의 의미야, 아빠는 항상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집에 온 거야. 왜냐면 아빠는 늘 네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아빠는 지금 여기서 팔로 너를 감싸고 있어, 아빠는 항상 여기 있을 거야. 왜냐면 어렸을 때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아빠는 너를 너무 많이 사랑했어. 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을 빼앗거나 지울 수는 없어, 나한테 설명을 묻지는 말고 그냥 진실이라고 믿어, 그게 진실이니까, 그게 인간 마음의 법칙이야.

 

(307)

아릴리시는 주먹을 쫙 쥐고 발끝으로 땅을 민다. 살아서 아이들을 보고 싶다. 총격이 멈추면서 머리 위에서 깊은 정적이 열리고 반란군 병사가 소리친다, 아일리시는 손을 흔들어서 살아 있다고 알리기가 두렵다, 그녀는 세상과 절대적으로 맞닿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가 갑자기 죽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아스팔트에 박힌 자갈을 본다, 수십억 년 전에 열기가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지구의 돌,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가야 한다, 내면의 힘이 몸속에서 퍼지고 눈을 감자 지나간 세월과 아직 살지 않은 시간이 보인다, 갑자기 무언가가 아일리시를 일으켜 움직이게 만든다, 그녀는 달리는 몸이 된다.

 

(354-355)

예언자들의 노래는 그 어느 때나 항상 반복되던 똑 같은 노래임을 깨닫는다, 칼의 도래, 불에 삼켜지는 세상, 정오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태양, 어둠에 잠긴 세상, 곧 눈에 보이지 않도록 쫓겨날 사악함에 대해서 예언자가 길길이 날뛸 때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분노,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종말이다, 세상은 어느 곳에서는 늘 끝나고 또 끝나지만 다른 곳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종말은 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상의 종말이 당신 나라에 찾아가고 당신 동네를 방문하고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머나먼 경고, 짤막한 뉴스, 전설이 되어버린 사건들의 메아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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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의 교사인 파블로 뮤리엘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들에게 이런 좋은 대학교들은 모두 필드스톤 같은 이질적인 환경이라고 설명한다. 필드스톤을 졸업한 학생들은 이런 대학교에 가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익숙한 커리큘럼에서 마음껏 공부를 하게 되지만 유니버시티 하이츠 졸업생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라켈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브롱크스 아이들의 꿈인 중산층 진입에 가장 유리한 고지에 들어간 것이다. 라켈에게도 대학교 졸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고등학교 동창들이 줄줄이 대학을 중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역시 대학을 졸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너는 자격이 있어, 너는 자격이 있어를 되뇌었다고 한다.

 

(62)

외로운 사람들도 일종의 궁핍을 겪는다. 이들이 겪는 궁핍은 인간관계의 부족, 즉 친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인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이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 그렇게 보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어색해지는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대인관계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친구를 사귀고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막는다. 이는 그 개인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궁핍한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환경이다.

 

(77)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도날드 트럼프는 이 사건을 두고 “(뉴욕주에) 사형제도를 재도입해야 한다며 이들을 사용하자는 전면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트럼프는 이미 그때부터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사고에 기반한 분노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인기를 쌓아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인종주의자들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돌아선 것이 아니다. 트럼프는 나중에 이들의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당시 게재한 광고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104-105)

칼슨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들이 주머니를 독점하면서 주머니는 남성의 실용성과 호기심의 상징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우선 남자가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에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포켓 사이즈(pocket-size)’ 버전이 생겨났다. 일하는 남자들이 언제든 도구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준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었다. 철학과 과학, 건축과 농업,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였던 제퍼슨은 주머니에 작은 가위와 줄자, , , 온도계, 나침반 등 다양한 (포켓 사이즈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해서 걸어 다니는 계산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제퍼슨이 휴대한 물건 중에는 상아로 만든 노트도 있었다. 제퍼슨은 쓰고지울 수 있는 상아 노트에 생각을 적고 나중에 집에 가서 종이에 옮겼다고 한다. 그에게 주머니는 움직이는 실험실, 작업실이었던 셈이고 이는 계몽된 남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17)

지금은 어떨까? 몇 년 전 한 대학교 캠퍼스 옆에서 아이폰 수리점을 운영하는 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깨진 화면을 수리하러 오는 사람 중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 많으냐는 게 내 궁금증이었다. 내 주변에서 화면이 깨진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답은 깨진 화면 수리를 원하는 고객은 90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 이유를 두고 온라인에서도 많은 추측이 있지만 여자 옷에 스마트폰이 들어갈 주머니가 남자 옷만큼 많지 않아 손에 들고 다니는 시간이 길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196-197)

미국인의 문제는 문화적 폐쇄성이었다. 미국인들은 남미와 남유럽 문화를 영미 문화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의 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맵거나 향이 강한 음식을 흥분제라고 생각했고 이런 음식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향이 강한 음식은 카페인이나 알코올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취급했고 그런 음식을 좋아하다 보면 결국 코카인과 헤로인 같은 중독성 마약에 빠져들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인들은 올리브를 기피했고 마늘과 식초가 반드시 들어가는 피클 같은 음식도 피했다. 물론 지금 미국인들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갖고 있어서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지위 상징이 되었다. 이런 태도가 과거 미국에도 퍼져서 남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같은 남유럽 문화에서 먹는 것처럼 다양한 식재료와 향신료가 사용되었더라면 대기근과 대공황을 견디기 훨씬 쉬웠을 거라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이들에게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배려가 아니라 삶과 경험을 풍성하게 해주는 고마운 요소다.

 

(209)

이렇게 조니 뎁의 인기가 시들어가던 시기가 앰버 허드와 결혼 생활을 하던 때라고 해서 허드를 악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허드가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었느냐와 상관없이 뎁의 인기하락은 본인의 관리 능력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 할리우드에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남자 배우가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런 인물로 대표적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우니 주니어는 그런 일을 젊은 시절에 겪으며 바닥을 치고 올라온 반면 뎁은 50이 넘어 인기가 사그라지는 시점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예계 소식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롤링스톤> 2018년에 실은 기사 조니 뎁의 문제는 이 모든 잘못이 분명하게 뎁 본인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사는 조니 뎁은 술과 마약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으며,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라이트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현재 뎁은 재산을 날리고 고립되어 있으며 한 번만 더 실수하면 업계에서 추방당할 것이라는 잔인한 진단을 내렸다. 앰버 허드의 칼럼보다 4년 앞서 나온 기사였다.

 

(251)

슐츠의 아내 진 슐츠는 2000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회상하면서 그의 만화가 워낙 부드러운 톤을 갖고 있어서 스포츠는 여학생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는 당시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내용을 그려도 사람들은 반발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피너프>의 캐릭터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자아이들이 스포츠 활동을 하는 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 슐츠는 남편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여성들이 불평을 하고 법안 통과를 촉구했기 때문이지, 남성들이 준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11)

하지만 미국의 중산층 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흑인들의 상황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중요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상황에서 흑인들의 추가적인 요구는 지나치다고 여겼다. 사회의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니 성급하게 요구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백인들의 생각에 대해 킹 목사는 유명한 <버밍햄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분리의 날카로운 고통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기다리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나운 무리가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침없이 폭행해서 죽이고 당신의 형제와 자매를 물에 던져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증오가 가득한 경찰이 흑인을 욕하고 발로 차고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 기다리는 것이 왜 힘든지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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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말을 다 허자면 속에서 천불이 올르는디, 막말로 인자 대통령도 안 믿소. 아 금메 우리 농촌사람들 다 죽이기로 작정혔는지 농산물값이 해마동 똥값이 되는디다가, 돼지값도 똥값이 되는 판에 워쩔라고 나라가 사딜이는 미곡수매가꺼정 말뚝 박어 묶어뿌냐 그것이오. 근디다가 그 빌어묵을 놈으 주택개량인가 집 껍데기 뒤집어 바꾸긴가를 억지로 몰아대서 글 안 해도 찢어지게 가난헌 살림에 집집마동 빚더미에 올라앉게 혀부렀단 말이오. 판이 요리 각다분허니 되야분께 땅 파묵어 갖고는 앞날이 캄캄허다 생각헌 사람들이 보따리 싸짊어지고 줄줄이 도시로 나가기 시작혔고. 도시에 나가 막노동에 등짐을 져도 세 끼 밥 편케 묵고 새끼덜 공부 갤칠 수 있다고 험서. 인자 처녀 총각들만 도시로 내빼는 시상이 아니다 그것이오.”

 

(102)

그런데 그 조직이 어느 날 갑자기 통일혁명당이라고 지목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월남으로 몸을 피해가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너무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이었다. 토론회에서 가끔 민족 분단이 의제가 되긴 했지만 통일을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제가 등장한 일은 없었고, 박정희의 강압정치를 비판한 적은 있지만 간첩 노릇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만약 위에서 혁명적 통일을 위해 이북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낌새라도 보였더라면 단연코 그 조직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일 뿐이면서 황제적 권한을 휘둘러대는 박정희도 싫을 뿐만 아니라 1인 독재로 우상이 되어 있는 북의 김도 똑같이 싫었고, 민족 통일에 관한 한 끝도 한도 없이 반목만을 일삼고 있는 남과 북의 정치 집단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

그야 뭐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잇속으로 서로가 다 얽혀 있는 관계니까요. 아 참, 딱 한 사람이 반성을 했군요. 소설가 채만식이라고, 제 책 때문에 해방이 되자마자 그 사람은 민족 앞에 죄지은 붓을 더 놀려 글을 쓰지 않겠다고 절필 선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친일은 이광수에 비해 몇백 분의 1도 안 되는데, 친일의 글을 쓴 것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괴변을 늘어놓으며 끝끝내 반성을 하지 않았던 이광수하고는 좋은 대조가 되지요. 다른 문인들이 전혀 반성을 하지 않고 온갖 비양심적이고 해괴망측한 변명들을 해대며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데는 이광수가 반성하지 않은 것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지요. 왜냐하면 이광수는 친일의 거두일 뿐만 아니라 문단의 최고 원로였으니까요. 이광수가 민족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더라면 그 뒤에 선후배들이 어찌 감히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201)

, 사실이 그렇더라도 인간과 인간사를 너무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허무를 강조하고, 또 너무 결과론적으로 만사를 정의하며 허무를 입증하다 보니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의 바다에 뒤덮여 인간의 현실이 너무 도외시되거나 묵살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모든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위한 창조물인데 불교는 지나치게 무상의 사상에 치우치다 보니 현실과 멀어지고 있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208-209)

. 제가 대충 알기로는 석가모니의 생애야말로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단계가 출가를 해서 고행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전반기이고, 2단계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 무리 대중을 상대로 수많은 설법을 해서 인간의 정신을 정화시키고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려고 노력했던 실행의 후반기입니다. 석가모니는 그 두 단계의 균형을 통해서 구도자의 모범을 완성시켰고, 자신을 뒤따르는 승려들도 그렇게 하라고 시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의 승려들은 그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수행과 실행의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고 확대함으로써 서로 소모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는 부처님의 숭고한 뜻을 왜곡하면서 불교를 반쪽의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들 중에서 불교는 경전이 제일 많기로 유명합니다. 어느 종교나 경전은 무엇입니까? 종교 창시자들의 설법 모음 아닙니까? 불교가 경전이 많다는 것은 부처님이 그만큼 대중을 중시하여 설법을 많이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선에만 집착하여 승려들이 산중에 묻혀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칠 뿐 대중과의 교류인 언어 소통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성을 상실하고, 사회적 임무를 방기하고, 사회 봉사를 하지 않는 반쪽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주제넘고 시건방진 입놀림인가요?

 

(237)

너 그 따위 소리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애저녁에 정치 때려치워라. 박통은 뭐 군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혁명공약을 국민 앞에 내걸지 않아서 18년 동안이나 해먹다가 그렇게 비명횡사했냐? 정치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것 빼놓고는 뭐가 있냐? 그리고, 너 지금 이 나라 정치가 누구 손에서 놀아나고, 권력이 누구 손에 틀어잡혀 있는지 몰라서 그 따위 소리하는 게냐? 그리고 권력이라는 건 뭐냐? 애비가 아들도 죽이고, 아들이 애비도 죽이는 것 아니냐? 그런데 그걸 순순히 내봐?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소리하지도 말아라. 정치인들은 즈네들이 다시 권력 잡을 욕심으로 그 말을 믿고 싶고, 게엄이 빨리 해제되어 군인들의 꼴을 안 보기 바라겠지. 허나, 그건 십중팔구 잘못 짚은 몽상이야. 알아들어?”

 

(242-243)

좋아, 자본을 댄 기업주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해. 또 기업주들이 바치는 노력도 다 인정해. 그렇지만 기업주들은 자기네가 투자한 자본의 몇 배의 이익을 얻어야 만족하는 거지? 백 배? 천 배? 만 배? 그게 아니잖아. 무한정, 영원히 이익을 보려고 욕심부리고 있어. 그게 말이나 돼?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도 못 되는 임금을 받으며 혹사당하고 있는데 기업주들만 무한대의 치부를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야. 자본주의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야. 봉건적 착취주의지. 올바른 자본주의란 분배를 통해서 자본과 노동이 수평적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거야. 자본 없는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그 말 옳아. 그러나, 노동 없는 자본이 있을 수 있어? 자본과 노동이란 기업이라는 기차가 달리게 하는 두 줄의 레일이야. 그 비중이 균형을 이루지 기업은 결국 망해. 기업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기업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분배를 해야 하고, 기업의 주인이 자기 혼자라는 잘못된 생각도 뜯어고쳐야 돼. 자기가 투자한 자본보다 수천 배, 수만 배를 빼먹고도 기업 자산은 또 수천만 배로 커졌는데 어찌 그게 다 자기 거야. 그 절반은 노동으로 그 자산을 키워낸 노동자들의 것이지. 그 몫을 찾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이젠 일방적 착취의 시대는 지났어. , 노조가 존재해야만 자본과 노동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그 토대 위에서 천민자본주의가 아닌 올바른 자본주의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빨리 의식을 고쳐.”

 

(251-252)

3월의 꽃샘바람이 지나가고 4월과 더불어 화사한 봄이 꽃송이 속에서 벙글고 있었다. 3월이 오는 봄이고, 5월이 가는 봄이라면, 4월은 머무는 봄이었다. 그러나 봄은 꽃이나 나무들에게 왔을 뿐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았다. 계엄은 제주도와 변두리 지방 일부에서만 해제되고 큰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을 겨울에 묶여놓고 있었다. 처음보다 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문들은 여기저기 먹통으로 지워진 흉한 꼴로 배달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신문보다도 기세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새로 퍼지는 소문들에 더 귀기울이고, 친한 사람들끼리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귓속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신문 검열 거부를 결의한 사람들이 전원 구속되는가 하면, 어느 신문사 기자들은 유언비어 쇠고랑을 차는 판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신문이다 방송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은 바짝 얼어붙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수직종인 신문기자들이 그렇게 당하면 보통사람들이야 오죽하랴, 하는 반사작용이었다. 계엄사에서 굳이 그런 사건들을 보도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파급 효과를 노리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299-300)

이것 봐, 아까도 말한 거지만 말야. 자네 6.25 때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신문이고 방송을 믿어? 그때 방송에서 뭐라고 떠들어댔어? 국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 여러분들은 하등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어찌 됐어? 그 방송이 나올 때는 벌써 이승만이는 한강을 건너 대전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한강 다리는 폭파된 뒤였잖아. 그 빌어먹을 놈에 방송 때문에 피난도 못 가고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어. 그런데도 방송을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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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지붕 갈면 참새고 구렝이고 굼벵이고 노래기 웂어지는 것만 알았제 그놈으 스레튼지 신식 양철인지 허는 지붕이 삼동에는 사람 고드름 맹글게 외풍이 일어 춥고, 삼복에는 사람 숨맥히고 찜쪄죽이게 후꾼후꾼 더운 것 워째 몰르시오. 고것이 보기만 뺀드르르혔제 사람 잡는단 말이오. 사람이 삼동에는 뜨뜻허니, 삼복에는 시언허게 살아야 몸도 풀리고 일도 지대로 되고 허는 법인데, 공연시 그 존 초가지붕 걷어내고 쌩돈 딜여감시 그 못쓸 스레트로 바꾸라고 물이 못 나게 잡져대니 요것이 무신 얄랑궂인 일인다요? 글고, 저 생생헌 탱자나무 울타리가 우리 실림을 가난허게 맹그는 것도 아니겄고, 무신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닌디 워째 싹 쳐내뿔고 그 멋대가리 웂는 쎄멘트 담으로 바꾸라고 욱대기고 그래 싼다요. 저것도 다 살아 있는 목심인디. 워디 그뿐이당게라? 철 따라 잎 피고 꽃피고 탱자 익어가는 운치가 꽃밭이 따로 웂고, 잘 익은 탱자는 아그덜 입맛 돌게도 허고 한약방에 약재로 폴기도 안 허요. 근디 쎄멘트 담은 주는 것이 머시가 있소.

 

(84-85)

이규백은 필터가 타들도록 담배를 빨며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박정희정권은 벌써 16년이었다. 유신 반대 데모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고,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고, 풀려나고, 또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4.19 때처럼 군중의 물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일까……? 그만큼 무섭게 탄압하기 때문일까? 중정과 쌍벽을 이루며 군 수사기관까지 빈틈없이 감시를 해대기 때문일까? 중정과 쌍벽을 이루며 군 수사기관까지 빈틈없이 감시를 해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슨 정치 기술이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말대로 국민들이 잘사는 것에 정신팔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잘살 수 있기를 바라는 절대다수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정치의 부자유가 별다른 불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승만정권과 다른 점일 수 있었다. 군중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은 정치투쟁, 그것은 개인의 희생일 뿐이었다. 동생과 그의 동료들은 그 점을 놓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도 경솔일지 몰랐다.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나섰을 수도 있었다. 자기들이 먼저 싸움에 나서서 대중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려는 계책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외친 역사가 이 법정을 심판할 것이다라는 구호는 허망한 것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했다. 역사……, 그것은 얼마나 모호하고 막연한 것인가. 현실에서 볼 때 모양도 형체도 없는 것이 역사였다. 또 역사의 힘이 있다한들 그 힘이 발휘될 때는 오늘의 현실은 이미 과거가 된 다음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역사의 힘을 믿고 독재의 폭력 앞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그건 오늘 당하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결의가 없이는 못할 일이었다.

 

(217)

더 이상 개발독재에 순응해선 안 돼. 정치와 경제가 결탁해서 전체 민중들을 갈취하는 이런 구조는 하루빨리 부셔야 해. 신흥 재벌들이 생겨나는 걸 경제 기적이라고 떠들어대는데 그거야말로 고등사기 선전술이야. 그건 권력의 비호와 노동자 착취가 얼마나 극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야. 세계 어느 나라에도 단 몇 년 사이에 신흥 재벌들이 생겨나는 일이란 없어. 지금부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서 개발독재의 구조를 깨고, 노동자의 몫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야.”

 

(236-237)

한국사람들이 쇠로 만들어졌을 리 만무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뚜렷한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더위에 강할 수 있는 체질도 아니었다. 더위에 강하기로는 더운 나라 태국이나 필리핀사람들일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구덩이를 서너 개 팔 때 태국사람은 구덩이를 한 개밖에 파지 못하고, 한국사람들이 일하는 식으로 필리핀사람들에게 시키면 하루 일하고 사흘을 앓아눕는다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태국이나 필리핀사람들은 대개 대만 회사들에 고용되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오로지 가난을 면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우디사람들조차 피하는 살인적인 더위를 무릅써가며 사생결단 일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허약해져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비행기에 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석회 성분 많은 물 때문에 담석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305)

내가 정말 다혈질이고 돈키호테였던가? 우리가 언론자유를 위해 나섰지만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신문사에서 내쫓겼을 뿐 독재는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어이없고 비참하게도 자신들의 행동은 독재자들에게 독재를 강화하도록 자극하고 깨닫게 해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신들이 내쫓긴 자리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며칠이 못 가 이런저런 사람들이 메우고 만 일이었다. 그들도 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리분별을 할 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슬슬 피하고 몸을 사리는 눈치더니 차츰 해가 바뀌어가자 기를 세우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맞대면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술 한잔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어차피 누군가는 채워야 할 자린데 그나마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 선배님들 뜻 지키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하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한한 논리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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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인의 집이라 긴장하며 잘하지도 못하는 서투른 일본말로 첫인사를 했다. 나의 인사가 끝나자, 하타케야마 부부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사죄한다라고 인사를 했다. 처음 받는 인사 치고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의 가족 중에는 강제 연행을 당한 사람도 일본군 위안부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젊은 부부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이미지로 생생히 남아 있다.

 

(13-14)

2011년 발생한 3.11대지진도 아베 수상과 극우 보수세력의 등장을 초래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준비되지 못한 제1차 아베 내각의 실패로 자민당이 장기집권의 바닥을 드러냈고, 2009년 결국 야당 민주당에 정권교체를 허용해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취임했다. 민주당은 도로 및 댐 건설을 중심으로 한 자민당의 국책사업을 비판하면서 콘크리트에서 인간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또한 관료만능주의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의미 없는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시민 및 관료가 함께 토론해서 예산을 결정하는 참여형 정책결정 과정을 시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의 주재와 재정 확보 실패로 비현실적인 정책에 머무르며 언론의 비판이 계속되었다. 결국 준비되지 못했던 민주당 집권세력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여 일본 국민들의 머릿속에 낙인이 찍혔다. 일본사회에서는 3.11 대지진과 민주당의 무능이 동시에 떠오를 정도다.

 

(17)

일본 극우보수세력의 실체는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가 청산되지 못한 한국사회에도 그 잔영이 남아 있다. 이른바 친일 부일세력으로 불렸던 이들은 한국사회의 엘리트로 변모해 해방 후 우리 사회의 기본 골격을 만들고 유지시켜왔다. 한국사회는 한국전쟁 후 반공 및 한미일 안전보장의 틀 속에서 이른바 안보경제의 의존관계를 맺으며 일본사회와 공존해왔기 때문에 친일 부일세력들의 실체를 해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장기간에 걸쳐 군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꾸고 과거사 청산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국가폭력의 실체를 파악해가는 과정 속에서 청산되지 않은 일본 식민지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48)

2012년부터 등장한 일본회의를 중심으로 극우보수세력이 부상한 상황은 동아시아가 지금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냉전이 붕괴된 이후 약 30년간 중국이 강자로 대두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이 약화되었지요. 그러나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약화되었지만 군사적 역할은 훨씬 커졌고, 각국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실패하고 극우보수세력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등 아시아는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북한의 화해 움직임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본이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보수세력이 그간 북한 위협론과 한반도 위기론을 주장하면서 일본 내에 자신들의 정치 기반을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80-81)

우리가 일제 청산을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결국 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권세를 누리던 자들이 그대로 살아남았지요. 그리고 그들이 대한민국 군대를 운영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국이 군을 해체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육성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조선인 장교들을 그대로 쓴 겁니다. 그들이 위안대를 만들었고, 그 규모와 위치를 <6.25사변 후방전사>에 자랑스럽게 실적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 아니 박정희식 군국주의에 빠진 그 식구들을 반대하는 겁니다.

 

(100)

이토 히로부미는 쇼카손주쿠에서 공부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습니다. 한미한 가문의 하급 사무라이로, 처음에는 존왕양이적 입장에서 각종 테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죠. 그러다가 1863년 조슈번에서 선발한 영국 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외국 생활을 하며 영국의 선진문물에 압도되어 존왕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근본적인 사상 전환을 하게 됩니다. 존왕양이파는 원래 한국의 위정척사파와 크게 바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위정척사파들이 내 목은 잘라도 상투는 못 자른다고 버틸 때 이토 등 존왕양이파들은 서구 문물을 접하고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112)

박정희가 1945년 이전에 물리적으로 한 친일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박정희는 친일파가 되기 위해 긴 기간 준비운동만 한 셈입니다. 대구사범학교부터 일본 육사까지 문무를 겸비해 제국에서 출세하기 위한 발을 내디디마자 일본제국에 패망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박정희를 원조 친일파라고 하는 이유는 집권한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일본 극우파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일본이 만주국을 경영했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의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세지마 류조고, 그 배경에 황도파의 사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23-124)

갑신정변(1884)의 주역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입니다. 이 사람들 친일파일까요? , 친일파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친일은 지금 이야기하는 친일과 아주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봐야 합니다. 그때는 아직 일본의 침략적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전이었습니다. 구한말 우리가 보는 일본에는 분명 두 가지 성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모델로서의 일본입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를 침략해오는 일본이지요. 적어도 1894년 갑오농민전쟁 이후에는 침략성이 아주 확고하게 드러났지만, 그 전에는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많이 배우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박영효나 김옥균이 취한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을 이완용, 송병준과 같이 취급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199)

그런데 일본에서 외국인 학교를 각종학교로 취급하는 것은 조선학교 때문입니다. 외국인 학교를 정규학교로 규정하는 순간 조선학교에도 보조금을 지급하고 각종 제도로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조선학교만 각종학교로 취급하면 너무나 노골적인 차별 정책이 되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아예 모든 외국인 학교를 정규학교로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입니다.

 

(265)

물론 다른 길도 있습니다. 한일 시민사회가 진정한 교류를 해낸다면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을 뛰어넘어 진정한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일관계에서 시민사회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고 시간도 걸리겠지만 한국사회에는 충분한 저력이 있습니다. 지난 촛불혁명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272)

한국의 입장에서는 한일관계를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협력하지 못하면 동아시아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역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지요. 물론 한국에는 북한이라는 동족이 있지만 이미 70년이나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장래 북한과 공존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당장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지요. 또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는 큰 나라일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일본을 포기하면,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대립 사이에 끼어서 한반도는 영원히 분단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싫든 좋든 실리적으로 이웃인 일본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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