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난 어떤 영화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감정을 합리화하기에는 영화는 너무나 만들기 어려운 법이거든요. 제아무리 형편없는 실패작이라고 해도요. 영화가 별로면 나는 그냥 좌석에 앉아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머지않아 끝날 테니까요. 영화를 보다 나가는 건 죄악입니다.”


(261)

잡담은 건너뛰자는 겁니까?” 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렌 레인은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그는 아름다운 여자들은 지천으로 널렸으며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배운 뒤였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지고한 위치에 올려 배경과 무관하게 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한편, 빌은 아름다운 여자가 말할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상대로 절대 헛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빌이 몸을 뒤로 기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다른 어떤 노동도 무언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하는 내 탐구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예요. 참으로 순순하고 드러난 적 없어서 관객들이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런 진실 말이지요. 이번에 묶인 영화들은, 그러니까 나이트셰이드와 파이어폴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이 연옥 속에 갇힌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지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질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이 실현될 날은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닦이지 않은 길이고요. 우리가 감히 소년과 소녀의 차이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의 섬약한 인간성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난다면 대체 그건 언제쯤일까요?”


(318)

맞아.” 얼이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마차 행렬에 함께 오른 개척자들이지. 하지만 , 다른 일자리 구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모든 건 그냥 하나의 잔상이 될 거야.” 얼은 두 팔로 사무실을 아우르며 영화 만드는 경험 전체를 가리켰다. “내가 자기를 유혹해서 파운틴 애비뉴의 흐름 속에 끌어들인 이래 지금까지 자기가 겪었던 속도와 압박감을 생각해 봐, 이네스. 그걸 세 배로 곱해. 그리고 다시 제곱. 그런 다음 야간 촬영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의 출산 기념파티에 못 갔는데 자기가 휴가를 내지 못한 이유를 그 친구가 이해해 주지 않는 나날을 더해 봐.”


(404)

그 영화는 워너에서 만들었는데 워너 영화들이 다들 그렇듯 촬영 일정이 몇 주밖에 안 됐어요. 영화를 공장처럼 찍어 냈던 시절이니까.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헝가리인이라 억양이 강했지요. 촬영장은 펄펄 끓습니다. 당시에는 조명으로 아크 등을 사용했고 필름 감도 때문에 빛이 많이 필요했던데다 릭의 카페에서 도박하고 술 마시고 나치에게서 달아나려고 하는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었거든. 알다시피 원작은 희곡입니다. <모두가 릭의 카페에 찾아온다>. 각본가는 네 사람, 그중에는 쌍둥이 엡스타인 형제와 하워드 코크도 있었지요. 쪽 대본이 날아다니고, 버려지고, 새 대사를 시험해 보기 일쑤예요. 스튜디오 전속 배우들은 자기 장면에서 실력을 보여 주려고 난리고, 잉그리드 버그먼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모두를 매료시키고, 클로드 레인스는 그중 단연 돋보이고 완벽하지요. 그리고 경력의 정점에 선 보가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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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메두사, 메두사, 메두사. 반복해서 나의 이름이 불리고 판결이 내려지면서, 나의 삶, 나의 진실, 평온하던 나날, 영글었던 생각이 전부 무너졌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냐고? 이 삐죽삐죽한 바위섬과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된 거만한 여자, 그리고 뱀들의 이야기가 남았다. 잔혹하게도, 변화는 내게 예외 없이 괴물 같았다. 또 한 가지 진실은 내가 외롭고 화가 났다는 것. 그리고 분노와 의로움은 결국 똑 같은 뒷맛을 남긴다.


(62)

내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고 축복받는 존재임을 아는 삶,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격려되는 삶,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커다란 거울 속에서 내가 완벽하다고 느끼는 삶…… 그런 삶이 나의 삶일 수도 있을까? 어쩌면 페르세우스가 그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는 신들에게, 유독 한 신에게 간청했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큰 벌을 줬어요. 아테나, 제발 내게 이 한 줄기 달빛만은 허락해주세요.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아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78)

달콤한 위험을 맛본 적이 있는지? 그것이야말로 최상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별미다. 그 무엇도, 정말이지 그 무엇도 그만큼 자극적이고 특별하며 유혹적인 맛이 없기에 최상이고, 한번 맛보고 나면 그 후로 먹는 모든 것이 밋밋하게 느껴지기에 최악이다.


(201)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핏속에 운명의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고 믿는다. 그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들에 의해? 아니면 인간의 탄생과 별빛의 신비로운 조합에 의해? 그들은 인간의 삶이 완벽하게 계획되었으며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이미 마련된 길을 걸음 뿐이고 그 길에서 벗어나면 무너지고 죽는다고. 반면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인간이 샘물처럼 깨끗한 상태로 태어나고 자신의 태풍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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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편지를 마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곧 나오고 기차는 역사 안으로 들어설 테지요.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는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 것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198-199)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할머니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치매나 언젠가 차게 될지 모르는 오줌 주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악몽에까지 찾아오는 공포는 언젠가 남편이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에서 보았던 뇌졸중 환자처럼 전신이 마비되고도 또렷한 의식을 지닌 채 울부짖으며 여생을 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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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

이 문제와 관련해 과거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대기권은 정확하게 구분되는 경계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대기의 밀도가 옅어질 뿐이니까요. 그래서 이 밀도의 변화에 따라 고도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고도 100km 경계선인 카르만 라인(Karman Line)’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100km로 정했을까요? 그 이유가 일반인에게는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요, 그냥 100이 딱 떨어지는 편한 숫자라는 것이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85)

달은 1년마다 대략 3.8cm씩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재미있게도 지구에 있는 바다 때문입니다. 달은 거대한 중력으로 바닷물을 끌어당깁니다. 달이 가까워서 바닷물을 많이 끌어당기면 썰물이 되고 해변이 넓게 드러나죠. 반대로 달이 지구에서 멀어지면 중력이 약해져 바다가 평평해지면서 밀물이 되고 해변 끝까지 바닷물이 차오릅니다. 그 속도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어서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는 뻘에 있던 사람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107)

외계 행성을 지구화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 걸 테러포밍(Terraforming)’이라고 부르는데요. 일론 머스크처럼 핵폭탄을 이용하겠다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있긴 합니다. 화성의 우주 궤도에 어마어마한 반사경을 올려 인간이 거주할 지역에만 햇빛을 집중적으로 쏜다거나 화성에 탄소가스를 내뿜는 공장을 대량으로 지어 온실 효과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지금 현재 과학 기술로는 많은 한계가 있는 주장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아이디어들을 실제 추진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생각하면, 현재 지구가 직면한 심각한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각자가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더 사랑한다면 굳이 화성에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140)

인류의 진화 과정을 추론해봐도 왜 부정적 사건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시 인류가 새로운 거주지에서 식용 가능한 식물을 찾는 과정을 떠올려봅시다. 낯선 열매들을 살펴보다가 먹어도 될 것 같은 외관을 가진 열매 하나를 따서 살짝 맛을 봅니다. 운 좋게도 달콤한 맛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도 따 먹을 수 있게 기억해둡니다. 그러다가 다른 열매의 맛을 봤는데 이번에는 쓴맛이 나며 혀가 얼얼해지고 복통에 시달립니다. 이번에도 다음번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기억에 남겨둡니다. 생존을 위해 어떤 기억을 더 오래 남겨둬야 할까요?


(208)

물리학자 중에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리사 랜들이라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이 물리학자가 <주기적 운석 충돌의 방아쇠로서 암흑물질>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리사 랜들은 원반 형태의 우리 은하 근처에 거대한 암흑물질이 이중 원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 은하의 태양계를 포함한 모든 별은 수평으로만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회전목마처럼 위아래로 진동하면서 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 번의 진동이 완성되는 데 총 주기가 6,000만 년입니다. 그러니까 딱 3,000만 년마다 위로 한 번 지나가고 아래로 한 번 지나가고 하는 거예요.


(259)

핵융합은 다릅니다. 만약 인류가 핵융합 반응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말 그대로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최초로 불을 건네준 이후, 최대의 사건이 되겠죠. 핵융합의 원료인 중수소와 삼중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로서 고갈될 염려가 없고 핵분열과 달리 부산되는 방사성물질이 적어 훨씬 안전합니다.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영구적인 에너지원이 되겠죠. 이렇게 인류의 모든 에너지 문제가 해결된다고 상상해보세요. 도대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저는 짐작이 잘 가지 않을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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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32)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 체제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도화된 악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이들의 지시를 받아 대량 학살을 저질렀던 수많은 부하들이 전당포 노파 자매를 죽인 것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선한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핟. (전체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나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출신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추천한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51)

너는 지식인이야.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71)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는 것을 나는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방법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자 국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 통제식 계획경제와 일당독재는 사회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를 만드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94)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구론>과 멜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113)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동토(凍土) 러시아에서 자유를 노래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웠다. 당대의 현실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 오기에, <대위의 딸>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이 아려 온다. 푸시킨은 황제의 권력으로 모독할 수 없었던 고귀한 영혼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솟아오른 꽃이었다. 두꺼운 먹구름도 빛을 가리지 못한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별은 오늘도 문명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푸시킨!


(122)

맹자는 제후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세웠던 주 무왕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은나라 주왕이 폭정으로 인의를 해쳤고 간언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을 빠뜨렸으니 군주로서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왕은 반역자가 아니며, 주나라의 정통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상을 반길 왕이 있을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덕으로 선정을 펴라는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을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전국시대 왕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이후 여러 통일 왕조들에서도 맹자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134)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175)

권력을 스스로 일구어낸 사람은 이런 걱정을 피할 수 없다. 선거로 대통령이나 총리를 뽑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차지한다. 선거에 이기는 데 큰 공을 세운 참모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국공신들은 높은 직위를 얻어 정권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선거전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국정 운영이나 국가행정을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 공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면 국정이 꼬이고 국민의 지지를 잃기 쉽다. 그러나 자리를 주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리고 권력자를 원망한다. “술을 마시면 자신의 공을 다투고, 술에 취해서는 함부로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뽑아 들고 기둥을 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면 국정은 망가지고 최고 권력자는 민심을 잃게 된다.


(183)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仁義)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사기>를 덮으며, 한신과 한고조가 겪었던 인간적 고통과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이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200)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처음 읽은 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솔제니친과 소련 국민을 가두고 죽였던 강제노동수용수와, 그런 야만적 장치를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 보유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사라졌다.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때로는 부당하게 비난받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이 찬양받았던 작가 솔제니친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에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218)

곳곳에서 우생학회가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결성한 미국 우생학회였다. 이 학회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우수한 유전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남부와 동부는 열등한 민족이 살기 때문에 이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병, 발달 장애, 간질 환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수많은 주들이 불임법을 도입했다. 독일 나치 정권은 미국의 불임법을 복제한 법률을 만들었으며, 우생학에 의거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을 보존하는 사업을 벌였고, 유대인과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학살을 정당화했다. 진화론은 확실히 오남용의 위험이 큰 이론이다.


(258)

조지의 사상은 사실 그리 과격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자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지의 사상을 가리켜 토지공개념또는 지공주의(地公主義)라고도 한다. 조지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토지를 국융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자고 했을 따름이다.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보았던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울타리를 넘어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조지의 지대 이론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며 누구나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설명의 논리 구조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과 똑같다.


(264-265)

조지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프루동과 샤를 푸리에,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유럽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만큼은 예외였다. 조지는 그 누구에게도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식들에게 상속할 권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만인이 땅을 이용할 공동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 그에게는 창조주의 뜻인 동시에 자연법의 당위적 요구였다.


(273-274)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방송이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만나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정보의 진실성 여부 또는 진실 함유도를 정확하게 따지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279-280)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경험했던, 그리고 현재에도 목격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와 정말로 똑같았다.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 중에 누군가가 <차이퉁> 기자와 정보 밑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결코 원치 않았던 S의 아파트 방문, 얼마짜리인지도 몰랐던 반지, S의 별장 열쇠 등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 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절망감을 느낀다.


(313)

인생의 고비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이번이 여섯 번째인 것 같다. 다시 카를 읽으며 사회와 역사의 진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한다. 카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고대사 연구 프로젝트인 소위 동북공정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영토 확장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의 죄악을 부인하도록 역사 교과서 수정을 강제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을 벌일 의사가 있음을 증명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유린 범죄를 정당화하려한 형태는 그들의 마음속에 극우 파시즘 사상이 똬리 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327-328)

여기서 핵심은 표현의 자유.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만의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남이 알지 못한다. 사회가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하지만 글이나 말로, 행동으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그것을 표현하면,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면 사회가 알게 된다. 이것을 억압하면 절대적 양심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 삶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자유를 해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우리나라 헌법도 마찬가지다. 밀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조심하자. 밀 혼자만 또한 밀이 최초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철학을 계승해 더 높은 수준에 올렸을 따름이다.


(346-347)

말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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