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노동자와 농민을 상대로 한 그의 꿈의 시도는 놀랄 만큼 빠른 효과를 나타냈다. 그건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활현실 속에서 요구하고 바라는 바와 자신들이 운동의 실천조항으로 내건 것들과 유감없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8시간노동제 실현, 차별대우 철폐, 임금인하 반대, 복지제도 완비, 이런 것들은 노동자들과 뜨거운 혈맥을 통하게 했다. 그리고, 소작료 5*5제로 인하, 소작권이동 반대, 무보수부역 철폐, 마름(농감)들의 횡포 근절, 이런 것들은 농민들의 마음과 맞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경찰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실패는 거듭되었고 결국 남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상처뿐이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면 쟁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요구조건을 관철시킨 것이었고, 사회주의 의식을 대중적으로 보다 넓게 확산시킨 점이었다. 일본경찰이란 가공할 살인집단이었다. 일본경찰력이란 무한대로 자행하는 폭력과 금력을 동원한 끄나풀들이었다. 모든 조직이 탐지되는 것은 그들과 농민의 탈을 쓰고 조직에 숨어들거나 조직원들 옆에 밀착해 정보를 빼내었다. 조선사람들을 잡아먹는 조선사람들, 그 인간들 때문에 일본경찰력은 날로 강대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군상들은 하나도 없었다면 일본경찰력이 그렇게 강해질 없는 일이었다.


(38-39)

도대체 민생단투쟁이란 게 뭔가?”

학습이 끝나고 노병갑은 홍완섭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래, 자네도 지휘간부로서 알아둬야 할 일이지. 그러니까 말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만주국이 세워지기 직전인 32 2월에 조선에서 용정으로 건너온 친일파 김성화가 왜놈들의 사주를 받아 <경성매일신보> 부사장 박선윤, 광명회의 정사빈 등과 연합해서 민생단이란 것을 조직했네. 그 단체는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주사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일치하는 거지. 그런데 속에 감춰진 목적은 북간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교란시키고 파괴하자는 것이었지. 다시 말하면 민생단은 대규모 밀정 스파이단체였던 거네. 민생단원들은 백색구역(일제 통치지역)의 친공산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적색구역(유격근거지)에까지 자원유격대원으로 가장해 잠입 침투해서 간도 자치며 생활 보장, 조선인 우대 등을 교사하며 내부분열 공작을 획책한 거네. 그러기를 5개월쯤 하다가 민생단은 해산됐지. 그런데 문제는 그놈들의 암약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유격근거지에서 조선사람이면 일단 민생단분자로 의심받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네.”


(76)

, 들어보게. 자네도 알다시피 왜놈들은 만주사변 이후로 조선땅에 군대를 강화하고 경찰들을 증원했네.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이 사회주의자들의 색출과 처벌이네.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이 사회주의자들의 색출과 처벌이네. 그건 왜 그렇겠나? 두 가지 목적 때문이지. 첫째는 조선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한 적을 완전히 말살시키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둘째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농민층과 노동자층이 끝없이 쟁의를 일으키면서 조선땅이 동요하는 것은 제놈들의 만주 장악에 치명적이기 때문이야. 조선의 안정이 만주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네. 그래서 왜놈들은 준전시체라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사회주의 세력의 말살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일세. 그놈들의 총력전은 효과를 거두고 있고, 사회주의자들은 그동안 만 6천여 명이나 검거되면서 악화일로를 걸어왔네. 참 시인하고 싶지 않지만, 냉정하게 판단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머지않아 거의 검거되거나 운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네. 나는 감옥에서 나와 감금상태에 있으면서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지. 또 잡혀서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하고 그전 식으로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방법밖에 없느냐 하면, 감금상태는 바로 운동의 중지상태니까. 그런데 운동을 계속하다가 잡히게 되면 재범이고, 재범은 중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지 않은가. 그것 또한 운동의 중지상태야. 이 대목에서 내 고민은 심해졌지. 왜놈들은 절대로 사회주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왜놈들은 절대로 사회주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왜놈들의 횡포는 계속되는데 과연 실현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주의 운동을 밀어붙이다가 부지하세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였지. 그 방법은 치열하긴 하지만 자폭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왜놈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네. 그런 측면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네. 왜놈들의 식민지 횡포가 계속되는 속에서 어떤 형태든 행동의 중지보다는 적극성이 떨어지더라도 행동의 지속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구상한 것이 개인적 사회주의화야. 다시 말해서 우리 집안의 농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집단농장의 경영이야. 단 사회주의라는 냄새는 일체 풍기지 않고 속으로 감추었으니까 경찰에서 볼 때는 평범한 지주에 불과하지. 허나 실제로는 소작제가 아니라 공동경영이고, 잉여재산으로는 딴 지주의, 특히 왜놈들 농장의 빚을 써서 논이 넘어가게 된 농부들의 빚을 갚아주고 흡수해 들이는 거네. 그럼 그 농부도 보호하고, 왜놈농장들이 토지를 장악해 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이중 효과를 발휘하게 되지.


(90-91)

차득보는 장타령을 흥얼거리며 열심히 피를 뽑고 있었다. 피들도 여름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극성스럽게 커올라왔다. 차득보는 농사를 지어갈수록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물보다는 식물이 더 강인한 것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강아지풀은 낫으로 싹 베버리면 삼사 일이 지나면서 잎들과 꽃술줄기가 어엿하게 솟았다. 하도 놀랍고 신기해서 다시 싹둑 베버렸더니 역시 거짓말처럼 또 제 모습을 갖추었다. 풀이 그렇데 빨리 자라난다는 것도 희한했고, 다시 제 모습을 갖추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다시 싹둑 베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서야 제 씨를 뿌리고 죽겠다는 강아지풀의 강인한 생명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몇번이나 그러는지 보고 싶었다. 다시 싹둑 낫질을 해버렸다. 그러기를 두 달 동안 했고, 강아지풀은 찬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풀들이 스러지는 그때까지 두 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 난쟁이로 끝끝내 꽃술줄기를 피워올리는 것이었다. 그 지독스러움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경이로운 일을 공허 스님한테 말했더니 , 니가 인자 득도를 허능구나. 그려서 부처님께서 살생허지 말라고 이르셨느니라. 그리혀서 생명이 지탱되는 동물은 이 시상에 없응게하며 대견해했던 것이다. 피라는 것도 강아지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리 열성으로 뽑아도 남아 있는 뿌리에서 또 새 잎과 죽기가 돋아오르는 것이었다.”


(126)

일본스파이 문제가 연해주의 조선사람들 사회에서 떠돌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다음부터였다. 조선사람들이 일본스파이가 되어 소련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조선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나보나 하며 별 관심 없이 들어넘겼다. 스파이라는 특이함도 특이함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도 더 관심 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혁명사회 건설이라고 하여 사회 전반의 제도와 바뀌고 있었고, 특히 농촌에서는 지주라는 것이 전부 없어지고 집단농장이 조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해주의 조선사람들도 만주의 조선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다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도 어김없이 논을 일구었지만 그 땅이 러시아지주들의 것인 점도 만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동안 소작인 생활을 겪어온 그들에게 지주 없는 집단농장이 만들어지는 것은 경이었고, 새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사람들은 그런 사회 건설을 그야말로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167-169)

왜 왔던고 왜 왔던고 만주벌판에 왜 왔던고

낯설고 물설은 만리타국 만주땅에 어인 일로 왔던고

삼천리라 금수강산 왜놈 발에 짓밟혀서 조선 해는 간곳없이 암흑천지 되었으니

뜻 굳은 남아로서 할 일이 그 무언고

빼앗긴 나라 되찾는 것 그것밖에 더 있는가

암흑천지에 불밝힐 일 그것밖에 더 있는가

옳소이다 옳소이다

그 생각이 옳소이다

그 길이 아니 가면 어찌 조선 남아리까, 어찌 조선 남아리까

그러허나 예로부터 옳은 길은 가시밭길

처자식도 생이별에

둘도 아닌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는 길

그 길을 택한 남아 몇몇이나 되었던가

하나뿐인 목숨을 초로같이 여기고서

의기 푸른 조선 남아들 만주땅에 진을 치니

장하도다 장하도다

하늘이 칭송한다

설한풍 몰아치는 허허벌판 만주땅에

풍찬노숙 몰아치는 허허벌판 만주땅에

풍찬노숙 뼈깎으며 왜놈들과 싸우기 그 몇몇 헤이던고

일년이 십년 되고 십년이 이십년 되어

고향땅이 그리워라 처자식이 목메어라

그래도 굽히지 않은 뜻 일편단심 구국이라

나라 찾아 깃발 날려 금의환향 하렸더니

에고오 어인 일로 갇힌 몸 되었는고

에고오 어찌타 옥사가 웬말인고

어화 원통해라

아이고 절통해라

이대로는 못가겠다 이대로는 못가겠다

원통하고 절통해서 이대로는 못가겠다


애간장 녹아내리게 하는 슬프고 처연한 가락은 절정으로 치달아오르며 달빛 푸르른 벌판으로 퍼져나가고, 난데없는 소리에 이끌려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혼백으로도 끝끝내 싸워 이길 터이니 나를 만주땅 뿌리거라

고결하신 그 뜻에 산천초목이 떨고

휘영청 밝은 저 달도 낙루하는데

어찌타 뒤따르는 자들이 그 뜻 모르오리까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하늘에 맹세하노니

다 못 이루신 뜻 정녕코 이루오리다

남기고 가신 한 기필코 풀겠소이다

굳게굳게 맹세하고 뒤따르오니

어화 님이시여, 님이시여

원통함을 푸시고

절통함도 푸시고

이 거친 만주벌판 떠돌지 마시고

춥고 어두운 구만리장천을 떠돌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시는 얼굴로

백화난만한 극락으로

상춘화창한 극락으로

왕생하오시라

극락왕생하오시라

비옵나니 비옵나니

극락왕생하오시라


(190-191)

그러나 양세봉 장군을 잃어버린 조선혁명당군들의 사기는 전만 같지 못했다. 그런데다 이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갔다. 반면에 일본군과 만주군들의 공격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승리하는 전투가 없어지면서 자꾸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총사령 김호석이 만주꾼에 체포되고 말았다. 조선혁명단군이 분산될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 위기 앞에서 손을 뻗친 것이 동북항일연군이었다.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연합군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자는 것이었다. 조선혁명당군들은 만주에 새롭게 등장한 항일세력인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혁명당군들은 동북항일연군 대원들로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힘이 약한 군대가 힘이 강한 군대에 흡수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건 조국해방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서로 연합하고 협동한 것이었다.


(277-278)

20만 조선사람들의 강제이주는 1937 8 21일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강제이주 결정사항 제1428-326cc호에 기록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사람들의 첩자행위 방지, 둘째는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이었다.

그리고 강제이주를 직접 명령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하바로프스크, 당지구위. 조선인들 이주 문제 – – 시기적으로 성숙했음.

이주 시기에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철저한 조치를 조속한 시일 내에 강구하기 바람.

                              당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1937 9 11 17 40


이것은 스탈린이 보낸 암호전보였다.

그 명령에 따라 연해주 일대의 조선사람 20여만 명은 9월 중순에서부터 11월 말까지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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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한번은 파리에서 <모나리자>를 보러 갔다. 이제 모나리자는 전세계에서 온 사람이 럭비 경기처럼 몸싸움을 벌이는 뒤편에 영원히 가려져 있는데, 모두가 앞쪽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가자마자 모나리자에게 등을 돌리고 셀카를 찍은 다음 다시 힘겹게 빠져나온다. 그날 나는 옆쪽에서 한 시간 넘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몇 초 이상 <모나리자>를 바라보지 않았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더 이상 수수께끼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나리자는 마치 16세기 이탈리아의 자기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왜 옛날처럼 나를 그저 바라보지 않는 거죠?’


(50)

수네는 이 결과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젠장, 진짜였잖아무언가가 변하고 있어. 늘 똑같은 게 아냐.” 이 연구는 집단으로서 우리의 집중력 지속 시간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세계 최초의 증거였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인터넷 탄생 이후부터가 아니라 나와 우리 부모님, 우리 조부모님의 삶 내내 벌어지지 있었다. 물론 인터넷은 이러한 추세를 급속화했다. 하지만 연구팀은 인터넷이 유일한 원인이 아님을 발견했다.


(60)

그는 이러한 끊임없는 전환이 세가지 방식을 통해 집중력을 저하한다고 설명했다. 그 첫 번째 방식은 전환 비용 효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방대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 자신이 소득 신도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와서 그 문자를 확인하고(5초간 힐끗 보는 것뿐이다) 다시 소득 신고로 되돌아간다고 상상해보자. 얼은 그 순간 뇌가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동하면서 재설정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야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증거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때 사람들의 수행 능력이 떨어지고 속도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전환의 결과입니다.”


(74)

나 또한 핸드폰이 사라지자 세상의 큰 부분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내 핸드폰을 되찾고 싶었다. 이메일을 되찾고 싶었다. 그 둘을 동시에 하고 싶었다. 해변에 있는 집에서 나올 때마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이 잘 있나 주머니를 만져보았고, 핸드폰이 없음을 깨달을 때면 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마치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잔뜩 쌓아놓은 책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10대와 20대 때는 며칠이고 침대에 누워 쭉 책만 읽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때와 달리 프로빈스타운에서는 지나치게 들뜬 상태로 허겁지검 책을 읽고 있었다. 블로그를 훑으며 핵심 정보를 찾듯이 찰스 디킨스를 훑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독서는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정보를 추출했다. 그래, 이해했어. 이 아이는 외톨이구나. 그래서 요점은?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요가는 내 몸의 속도를 늦추었지만 정신의 속도는 늦출 수가 없었다.


(88)

그러므로 몰입 상태가 되려면 단일한 목표를 택해야 하고, 그 목표가 반드시 자신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해서 몰입에 빠져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몰입은 특별한 정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몰입한 사람은 자신이 오로지 현재에 머무는 기분을 느낀다. 자의식이 사라지는 상태를 경험한다. 자아가 소멸해 목표와 내가 하나되는 느낌과 비슷하다. 내가 기어오르는 암벽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124-125)

오늘날 재미로 책을 읽는 미국인의 수는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인 2 6000명으로 구성된 표본을 연구하는 미국 시간 사용 조사는 2004년에서 2017년 사이에 재미로 독서를 하는 비율이 남성은 40퍼센트, 여성은 29퍼센트 줄었음을 발견했다. 여론조사 기업인 갤럽은 한 해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미국인 비율이 1978년과 2014년 사이에 세 배로 뛰었음을 확인했다. 현재 미국인의 약 57퍼센트가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커져 2017년에 미국인의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은 17, 하루 평균 핸드폰 사용 시간은 5.4시간이 되었다. 복잡한 소설은 특히 수난을 겪고 있다.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오로지 재미로 문학을 읽는 사람 수가 미국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국만큼 철저히 연구되지 않았지만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도 비슷한 추세로 보인다. 2008년과 2016년 사이에 영국 소설 시장 규모가 40퍼센트 줄었다. 단 한 해 동안(2011) 페이퍼 소설 판매량이 26퍼센트나 폭락했다.


(132)

궁금했다. 종이책이라는 매체에 담긴 메시지는 뭐지? 글자가 구체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전부터 책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먼저, 삶은 복잡하다.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깊이 숙고할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야 하며, 속도 또한 늦춰야 한다. 둘째, 다른 걱정을 제쳐두고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한 문장, 한 문장, 한 쪽 한 쪽을 따라가는 경험은 가치 있는 일이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은 깊이 사고해볼 만하다.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처럼 복잡한 내면의 삶이 있다.


(135-136)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죠? 그는 독서가 독특한 의식 형태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종이 위의 단어를 향해 관심을 바깥으로 돌립니다. 동시에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내면을 향해 엄청난 주의를 쏟습니다.” 눈을 감고 아무거나 상상하려고 애쓰는 행동과는 다르다. “그때 사람들의 관심은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 위에 단어를 향해 바깥으로 기울었다가, 그 단어의 의미를 향해 내면으로 기우는 것을 오가는 매우 독특한 상태에 있지요.” 독서는 바깥을 향한 관심과 내면을 향한 관심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 레이먼드는 그때 우리가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동기, 목표를 이해하려 애쓰고, 그런 다양한 요소를 따라가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연습입니다. 그때 아마 사람들은 현실에서 실제 인물을 이해하려 할 때와 똑 같은 인지 과정을 사용할 겁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다른 인물을 어찌나 잘 가장하는지, 현재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기기보다 소설이 훨씬 나을 정도다.


(149)

두 과학자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딴생각(내가 프로빈스타운에서 너무나도 많이, 즐겁게 했던 것)이 주의 집중의 정반대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이유로 딴 생각을 하면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실제로 딴생각은 다른 형태이자 반드시 필요한 형태의 집중이다. 네이선은 우리가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주의로 좁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 일정량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스포트라이트를 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저 다른 사고방식에 에너지를 더 많이 할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력이 꼭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다른 중요한 형태의 사고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177)

구글플렉스의 한복판에서 몇 년을 보낸 트리스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지막 의사 표시로서 슬라이드쇼를 준비해 동료들에게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고 호소했다. 첫 번째 슬라이드에는 이렇게만 쓰여 있었다. “저는 우리가 세상을 더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우려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산만함은 제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삶에서 전부니까요그런데 이곳에서는 수많은 시간이 불가사의하게 사라집니다.” 그는 지메일의 수신함 사진을 보여주었다. “피드도 막대한 양의 시간을 삼켜버립니다.” 그는 페이스북 피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국의 13세 이상 17세 이하 어린이들이 깨어 있는 동안 문자 메시지를 평균 6분에 한 개씩 보낸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구글(을 비롯한 다른 기업)이 의도치 않게 우리 아이들의 집중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핸드폰을 확인하는 트레드밀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189)

이 기술이 우리 아이들의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는 신만이 아실 겁니다.” 페이스북의 성장 담당 부사장이었던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는 한 연설에서 페이스북이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기 자녀에게는 그 쓰레기를 사용하지 못하게한다고 말했다. 아이폰을 공동 개발한 토니 파델은 이렇게 말했다. “종종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뭘 내보낸 거지?”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뇌를 날려버리고 재설정할 수 있는 핵폭탄생산에 일조한 것은 아닐지 우려했다.


(256-257)

이 과학자들은 페이스북이 대중에서 공개하지 않는 숨은 자료를 전부 연구한 뒤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우리의 알고리즘은 분열에 이끌리는 인간 두뇌의 특성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를 그대로 놔둔다면페이스북은 사용자의 관심을 끌고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자 점점 더 분열적인 콘텐츠를 쏟아내게 되리라고 말했다. 페이스북 내부의 또 다른 팀(이들의 작업도 <월스트리트 저널>에 유출되었다)도 독립적으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팀은 극단주의 집단에 합류하는 사람의 64퍼센트가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직접적으로 그 집단을 추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전 세계 사람들이 자기 페이스북 피드에서 회원님을 위한 추천 그룹이라는 말과 함께 인종차별 집단, 파시스트 집단, 심지어 나치 집단을 발견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들은 독일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모든 정치집단의 3분의 1이 극단주의라고 경고했다. 페이스북의 자체 팀은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의 추천 시스템이 문제를 키운다.”


(297-298)

다른 많은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다. 실험의 내용은 무척 다르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1920년대 영국에서는 W.G. 켈로그(시리얼 제조업체 창립자)가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작업 중 사고(집중력을 측정하는 좋은 기준) 41퍼센트 줄었다. 2019년 일본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주4일 근무를 도입했고 생산성이 40퍼센트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 같은 시기 스웨덴 고센버그에서는 한 요양원이 임금을 줄이지 않고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그 결과 직원들은 수면 시간이 늘고 스트레스가 줄었으며 병가를 더 적게 냈다. 같은 도시에서 토요타는 하루 근무 시간을 두 시간 줄였고, 그 결과 정비공의 생산성이 114퍼센트로 높아졌으며 이윤이 25퍼센트 늘었다.


(312-313)

우리가 끼니마다 그런 값싸고 형편없는 탄수화물 식품을 먹는다면 계속해서 그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데일은 그런 음식을 카페인과 함께 섭취한다면 혈당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진다고 덧붙였다. “크루아상을 먹으면 분명 혈당이 급상승합니다. 하지만 크루아상을 커피와 함께 먹으면 혈당이 더더욱 치솟고, 그만큼 급강하가 따라옵니다.” 이러한 혈당의 급상승과 급강하는 온종일 발생하고, 그 결과 우리는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서 오랜 시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데일은 (비유를 살짝 바꿔서) 이 모든 것인 “BMW 미니에 로켓 연료를 넣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미니는 순식간에 고장 나버릴 겁니다. 로켓 연료를 감당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미니에 알맞은 휘발유를 넣으면 부드럽게 달릴 거예요.”


(378)

첫 번째 요소는 가장 명백하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달릴 때(어떤 형태든 운동에 참여할 떼) 집중력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대한 증거를 발견해왔다. 예를 들어 이 현상을 조사한 한 연구는 운동이 어린이의 집중력에 이례적인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포틀랜드에서 인터뷰한 조엘 닉 교수는 이 증거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요약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경우 유산소 운동이 뇌 연결망과 전두엽, 자기 통제와 집행 기능을 돕는 뇌 화학물질의 생성을 돕니다. 운동은 뇌를 더 크고 효율적으로 만드는변화를 일으킨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너무 방대해서 조엘은 이 결과를 확실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증거는 이보다 더 명백할 수 없다. 뛰어다니려는 자연스러운 욕구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아이들을 막는다면, 아이들의 집중력과 전반적인 뇌 건강은 악화될 것이다.


(404)

핀란드의 아이들은 7세가 되기 전까지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그냥 논다. 7세에서 16세 사이의 아이들은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하고 오후 2시에 하교한다. 숙제는 거의 없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시험도 거의 없다. 핀란드 아이들 삶의 고동치는 심장에 자유로운 놀이가 있다. 법적으로 핀란드의 교사들은 45분 지도할 때마다 15분의 자유 놀이 시간을 줘야 한다. 그 결과는? 핀란드 어린이의 겨우 0.1퍼센트만이 집중력 문제를 진단받으며, 핀란드인은 세계에서 읽고 쓰는 능력과 산술 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 중 하나다.


(405)

오늘날 성인은 어린이와 10대들이 집중에 어려움을 겪는 듯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종종 지긋지긋함과 짜증이 깃든 우월감을 느끼며 말을 얹는다. 그 말들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이 열등해진 세대를 봐! 우리가 얘네보다 낫지? 쟤네는 왜 우리처럼 못할까?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이에게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른인 우리의 일이다. 이 문화에서 우리는 대체로 아이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자유롭게 놀지 못하게 하고, 전자기기 화면으로 소통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는 집 안에 아이들을 가두며, 우리의 학교 제도는 대개 아이들을 무감각하고 지루하게 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먹이는 음식은 에너지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약물처럼 아이들을 들뜨게 할 수 있는 첨가제가 들었으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양소는 없다. 우리는 뇌를 망가뜨리는 대기 속 화학물질에 아이들을 노출시킨다. 아이들이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이 세상의 잘못이다.


(429-430)

현재 우리는 녹초가 될 만큼 일해서 물건을 살 수 있으면(대부분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번영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이슨은 우리가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자연에 머물거나, 충분히 자거나, 꿈꾸거나,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번영의 의미를 재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는 빠른 삶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원한다. 죽기 직전에 자신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형 상태 경제에서는 우리의 집중력을 공격하지 않고 지구 자원을 공격하지 않는 목표를 선택할 수 있다.


(433)

기후위기는 해결 가능하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깨끗한 녹색 에너지원으로 사회에 동력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분별력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3분마다 작업을 전환하고 알고리즘이 붙어넣은 분노 때문에 늘 서로에게 고함을 치는 정신없는 인구 집단은 이 해결책을 실행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집중력 위기를 해결할 때에만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를 고심하다가 제임스 윌리엄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나는 중요한 정치적 투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어쩌면 인간 집중력의 해방이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도덕적, 정치적 투쟁일지 모른다. 이 투쟁의 성공이 선행되어야만 사실상 다른 모든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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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15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메모실력!!!

bookholic 2024-03-16 21: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오타남발이네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69)

차득보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피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 바람결이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그 문득 스치는 바람결을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쫙 비치면서 일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이었다. 그건 해가 내뿜는 힘이었다. 누구에게 들은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지어 갈수록 해가 얼마나 오묘하고 큰 힘을 지녔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가 해의 힘으로 지어졌다. 사람의 힘은 그저 잔일을 거들 뿐이었다. 해와 땅과 물, 그것들이 어우러져 벼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이삭을 맺게 했다. 그것을 한문으로 하면 火•土•水였다. 신세호 선생 앞에서 늦공부를 하며 뜻인지 잘 몰랐었다. 그런데 농사짓는 세월이 쌓이면서 그 뜻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76)

그런데 광주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 연대투쟁에 나선 것은 조선 여학생이 희롱당한 것에 대한 감상적인 민족감정의 발로거나 충동적인 젊은 혈기의 폭발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부터 전국의 수많은 학교들은 끊임없이 동맹휴학을 일으켜왔다. 어느 학교에서나 학생들이 내세운 맹휴의 이유는 거의 동일했다. 일인 교사나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어교육의 강화, 조선인 교사들의 학대 같은 것을 내세웠다. 그건 단순한 교내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입장에서 전개한 맹휴투쟁은 사회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차츰 빈번해지고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비밀조직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95-96)

송수익은 지금도 독립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방략은 모든 세력들이 화합적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주의 삼부는 29 3월에 제2차 통합회의를 개최하여 다행스럽게 자치기관으로 국민부를 조직했다. 그런데 7월에 신민부의 군정파를 이루고 있는 김좌진의 다시 한족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분리되어 나갔다. 또 통합체의 한쪽이 허물어진 상태가 된 것이었다. 국내에서 발족된 신간회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은 그 상태로 끝나고,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연합이란 막연한 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만주와 같은 시기에 한국유일독립당촉진회를 만들었던 상해임정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98)

우리는 그동안 2단계의 사업을 해왔습니다. 1단계는 무정부회의에 대한 이해•습득과 동지들의 규합이었습니다. 2단계가 국내의 신간회 발족을 계기로 우리의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28년에 상해에서 결성했고, 뒤이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동방 제국의 동지들과 결속을 강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제3단계 사업을 전개할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되어 그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해 본 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제가 향후 사업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투쟁노선은 무산계급을 중추로 한 폭력혁명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산계급을 중추로 한 폭력혁명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산계급이 많은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만주입니다. 만주는 우리의 적인 왜놈들과도 가깝습니다. 하므로 앞으로 만주에 우리의 총력을 집중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고견들을 많이 내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이회영의 말이었다.


(103)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의열단의 정신과 목표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최고 최대의 대의는 조선의 독립입니다. 그건 우리의 유일한 길이며 최후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쟁취하기 위하여 결속했고, 투쟁해 왔고, 앞으로도 투쟁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투쟁과정에서 상해임정과 협조했고, 중국공산당을 도와 광동코뮌에서 싸웠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최우선의 목표인 독립을 성취시키기 위해 모든 세력과 협조하고 연합하자는 우리 의열단의 투쟁방법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우린 독립을 위하여 어린아이들의 힘까지 빌려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모든 항일세력들과 연합하고 결속하고 통일체를 이루는 노력을 변함없이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공산당의 입당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강압적인 필요는 없고 자율적으로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의열단이며, 그 문제로 하여 우리 의열단은 추호의 변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인민대중과 결속하여 투쟁을 확대해 나가는 방법과 인민존중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이지 의열단의 근본 정신과 목표를 훼손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좋은 일례가 광동코뮌에서 싸우는 동시에 변절자가 된 박용만을 제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이 기회 의열단원의 임무와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바랍니다.”

김원봉이 총괄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단원들을 휘둘러보았다.


(104)

김원봉이 언급한 박용만은 바로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이었다. 그는 변절한 밀정으로 판명되어 2년 전에 의열단원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의 변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구구하게 말이 많았다. 그 말들을 간추리면 변절했다, 아니다, 하는 엇갈린 주장이었다. 그것은 박용만이 그만큼 지명인사이기 때문이었고, 변절자로 죽어간 그의 죽음이 또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죽고 없었다. 어쨌거나 의열단에서는 그만한 인물을 죽이기로 결정하기까지는 확실한 근거를 확보했을 것이고, 박용만의 죽음은 실망스러운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161)

하와이의 조선 사람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 누구든 자식들에게 다시는 농장생활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님들의 마음이었다. 농장생활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학교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열은 더없이 뜨거웠다. 둘째, 법에다 김치를 먹듯이 조선사람으로서의 생활과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여름뿐인 땅이었지만 해가 바뀌면 꼭 설을 쇴고, 비록 양주를 따라올리더라도 꼭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노란둥이라는 차별에다가 나라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겹쳐지고 있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무시와 멸시 그리고 손해를 언제나 당하며 살고 있었다.


(174)

그려, 나가 공산주의 변호인도 아닝게 그 말언 그만 허세. 근대 우리가 한 가지 명심헐 것이 있네. 자내가 나나 멀라고 만주짱서 요 고상덜얼 허고 있능가? 그야 천번 만번 물어도 대답언 똑겉이 독립, 독립얼 위해서 아니여?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정부주의자든 조선사람이먼 그 목적은 다 똑겉이 한나여. 단지 목적얼 달성허는 방법으로 서로 다른 주의럴 택런 것뿐이란 말이시. 근디 주의가 다르다고 혀서 서로 미와허고 등지고 싸와서야 되겄능가. 아니여, 서로 돕고 손얼 잡고 연합혀야 혀. 우리 의열단이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얼 도운 것언 다 그런 뜻 땀시여. 자네넌 공산주의자덜얼  원수 대허디끼 허는디, 나넌 시방 송 선생님 밑에서 무정부주의 투쟁얼 허세만 언제 또 공산주의자로 활동헐란지 몰르네. 독립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허먼 주의야 언제든지 바꾼다는 것이 내 주의잉게로. 글먼 그때 가서 자네 나 가심에다 총질헐랑가?”


(250)

송수익은 눈을 내리감았다. 이회영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의 상황은 돌변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처한 입장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로 후방이 전방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무정부주의 투쟁도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직의 총력을 만주에 집중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투쟁사업을 정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회영은 작년 11월에 만주를 향해 상해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대련에 내리자마자 수상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밀정에게 탐지되어 미리 연락이 취해져 있었다. 이회영은 고문을 못 이기고 다음 달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분과 함께 세운 계획은 남아 있었다.


(297)

다시 말하면 조선농민들은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투쟁의 방법과 기술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그겁니다. 그건 바로 무엇입니까? 혁명적 잠재력입니다. 총독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난 10년 동안에 노동쟁의보다 소작쟁의가 세 배 네 배로 많이 일어났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 혁명적 잠재력의 폭발인 동시에 우리의 운동을 그만큼 빨리 흡수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습니까? 그저 무조건적으로 쏘련의 이론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급급하면서 노동자 우선, 농민 경시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건 우리가 저지른 큰 불찰이고 오류입니다. 물론 운동지도층이 도시 중심의 지식인들이었으니까 농민들의 그런 특질을 잘 모르고 소홀히 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도 쏘련이론의 맹목적이 추종과 무조건적인 대입을 심각한 문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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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18)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19)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31)

예민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축복이다. 관계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예민함은 바로잡아야 할 심리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의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응력을 갖는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꽃이 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44)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103-104)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122-123)

해 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한 삶은데도.


(130-131)

반복해서 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특출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결과이다. 창조적이 되는 비밀은 창조적이 될수록 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미국 팝아트 선구자 앤드 워홀은 말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완성하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라.”


(186-187)

사람들은 상자 안에 살면서 그 상자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문제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수성이 날카롭고 낯가림이 심해 사회 적응자처럼 살아갈 수 없을 때, 아무리 해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상자 안데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간다고 죽지 않는다. 강물은 강폭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넘쳐 자신의 길을 만들 뿐이다.

세상의 기분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자신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191)

그렇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길을 가지 않은 길로 남겨 두는 것을 의히한다. 삶은 선택인 동시에 포기의 길이다. 나는 결국 시인의 무화과를 선택했고, 특파원이나 사진작가나 다른 멋진 미래들은 신문지처럼 접어 안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단지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쓰고 나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글을 써야 함을 의미했으며, 정오부터 저녁까지 다음 글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의미했고, 병원 신세를 지든 자신의 예민함에 질리든 단어들을 수정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218)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235)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트워스키 박사는 말한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기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240)

나는 곳 그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그 후 두 사람이 어떤 여행을 펼쳐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낯선 여행을 주저하던 여성도 잘못된 여행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배낭끈을 단단히 여미고 떠났을 것이다. 훗날 자신의 여행을 뒤돌아 볼 때,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 불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이유는 여행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길들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실패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247-248)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 물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물었다.

물 맛이 어떤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맑은 호수에 똑 같은 소금 한 줌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맛보게 했다. 물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원합니다.”

짜지 않느냐?”라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전혀 짜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담는가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호수라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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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하는 말이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취조와 재판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때 많은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33인 중에서 고문을 끝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재판정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은 한용운 선생 한 분뿐이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였다는 것에 놀랐고, 만약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나도 두려움에 떨며 꺾였을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 선생처럼 꿋꿋했을 것인가, 많이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용운 선생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꺾이고 말 것 같기도 했고, 영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보다는 꽤 강해진 것 같습니다만, 변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를 살펴보곤 하게 됩니다.”


(126)

임시대통령 <리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리승만> 범과의 사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었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반항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갖이고 임시 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간주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 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하였아.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미주에 앉어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어서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아지 못하게 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의 고립상태를 주출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서 파쟁을 계속 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132)

최고로 많이 배워 박사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이란 자기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 아닌가? 그 일이 어렵고 장해서 뼈빠지게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던가? 우리같이 무식한 것들도 다 아는 그 일을 이승만이란 사람은 몰랐는가? 그 유식하고 유식한 사람이 몰랐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독립자금을 제멋대로 범포해 버린 것일까? 그게 도대체 어찌 된 맘보일까?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것인가?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배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승만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 개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을 짐승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아닌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144)

보시오 지 동지, 어디 독립운동을 독립군만 하는 것이오? 이 만주땅에 조선농부들이 없고서야 독립군들이 어찌 있을 수 있소. 농부들이 피땀 흘려 뒷바라지하니까 독립군들이 앞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농부들도 독립운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다람 앞으로 나선 것하고 뒤에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을 뿐이오. 또 독립운동이 어디 한두 가지요? 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소학교 선생을 하겠소? 우리 대종교 활동은 또 뭐요? 친일모리배들을 빼놓고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고르면 될 것 아니겠소. 공부에 더 열중하게 해서 소학교 선생을 시켜도 좋고, 대종교 일을 보게 해도 좋지 않겠오?”


(149-150)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끝내 합일체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걸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이라거나 독립운동 세력의 파쟁이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들을 내걸고 나라를 되찾자는 것은 나라를 탈취한 자들만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의 잘못까지도 단죄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되찾은 새 나라의 국체는 마땅히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가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복벽주의자들은 또 나라 빼앗긴 죄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망동이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한 절대적 의미는 국체를 공화주의로 세운 것이었다.


(215)

무슨 생각 하느냐고? 아리랑을 생각하고 있었지. 아리랑, 아리랑, 그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관중들의 합창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리랑에서 팔을 묶여 끌려가던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아나? 그게 주인공 김영진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바로 송중원이야.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그리고 그 열렬한 관중들의 합장은 수많은 송중원에게 보내는 지지고 기대고 열망이야. 나는 이번에 놀랐어. 아리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리랑 노래가 선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어. 나는 도망다니면서 사람들이 독립을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 왜놈들의 종으로 살기로 독립을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회의했었어. 허나 그건 외로움과 두려움에 몰리고 있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아리랑을 보고 내 잘못을 깨달은 거지. 활동사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노래가 그렇게 퍼져나가는 건 뭘 말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조선사람들이 가슴 가슴마다 독립의 염원을 뜨겁게 품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평소에는 다만 표를 내지 않았을 뿐이야. 그 뜨거운 염원이 있는 한 송중원은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끝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 거야. 어때, 내 말이.”


(277)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왜 중국의 싸움에 나섰겠는가. 그건 전체 아시아사람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전 아시아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차별없이 잘살려면 중국에서는 군벌들을 타도해야 하고,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지금 2천만 조선사람들은 우리가 중국군벌을 타도하고 조선으로 오기를 기다리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아, 당신들은 어째야 하겠는가. 군벌들은 당신들의 재산과 곡식을 빼앗아갔고, 탄압하고 괴롭혔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원수인 군벌들을 없애려고 총을 들고 나섰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의 편이다.”


(288)

삼부회의는 만주의 동포사회를 지역적으로 삼등분해서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있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삼부는 1924년과 25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었다. 정의부는 남만주의 통화를 중심으로 길림 일대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참의부는 남만주의 집안현을 거점으로 압록강변 일대의 현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신민부는 일본세력 아래 장악된 용정이나 국자가 일대를 피해 북만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삼부는 지역이 서로 다르면서도 부()라는 명칭을 단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때 부라는 명칭을 가진 단체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발족된 한성과 연해주의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그 명칭과 기능을 통합하게 되자 만주의 단체도 부라는 명칭을 취소했던 것이다. 그로써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임시정부>라는 유일성의 법통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정은 기호파와 관서파의 내분으로 정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그 수습을 위해 국민대표회를 연 것이 1923 1 3일이었다. 그 회의에서는 임정의 조직을 개편 보완하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자는 창조파의 팽팽한 대립으로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 회의 결과 상해임정은 그전의 삼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에 만주지역의 단체대표나 독립군대표들이 단연 많이 참석했고, 그들이 창조파였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적과 멀리 떨어져서 내분이나 일삼고 있는 임정과 그 간부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292-293)

만주를 지배하는 봉건군벌 장작림은 조선총독부와 2년 전에 삼시협정을 체결하고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4월에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중앙권력을 장악하려고 대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치고 들어갔다. 뒤이어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장작림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의 세력권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없애라는 소탕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만주에서는 폭력과 체포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사람들은 그 거친 바람에 심하게 휘말렸다. 조선사람들 중에 공산주의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중국경찰들은 조선사람들을 걸핏하면 잡아가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조선독립을 놓고 한동안 우호적이었던 관계가 깨져나가고 있었다. 특히 부패한 중국관헌들은 공산당 일소를 빌미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돈을 받아먹고는 풀어주었다. 타락한 관헌들에게 공산주의자 소탕령은 더없이 좋은 치부의 기회였다. 그런데 중국관헌들의 그런 횡포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독립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에 머무는 처지에서 총질을 했다간 그나마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신속하게 뒷손을 써서 잡혀간 사람들을 빼내는 정도였다.


(307)

그러나 정작 무식한 것은 하시모토였다. 그 금줄은 터무니없는 미신이 아니었다. 숯은 병균이나 오물의 여과기능이 강했다. 더러운 물을 여과시킬 때 모래와 숯을 여러 층으로 쌓아 통과시키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조선사람들이 간장을 담글 때 간장독에 숯덩이들을 띄우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금줄에 숯을 끼우는 것은 아직 병에 약한 갓난아이와 산모에게 병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식구들이 들어올 때 미리 문간에서 소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솔가지도 미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은 가시가 매서운 탱자나무 대추나무와 함께 소나무 가지도 온갖 잡귀들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소나무의 그 사철 푸르른 바늘잎을 가시와 똑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미신적 요소였다. 그러나 실제로 소나무의 향과 송진은 여러가지 해충이나 독충을 죽이고 쫓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나무에 잡벌레가 슬지 못하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특히 송진은 인체 내의 기생충을 제거하는 약으로 쓰이고 있었고, 가벼운 외상의 지혈과 치료에 특효였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금줄을 드리워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는 것도 지극히 과학적이었다. 세상의 여러가지 유행병에 무방비상태인 갓난아이가 그 21일 동안에 엄마의 젖을 빨며 차츰 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었다. 산모의 몸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여러가지 면역성이 젖을 통해서 갓난아이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가 정상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기간이 바로 21일 동안이었다. 그리고 산고를 치른 산모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기간도 21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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