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왜 파시스트는 폭력을 원할까요?” 에설은 수사적 질문을 했다. “바깥 힐스 로드에 있는 저들은 그저 소동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저들을 조종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전략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공공질서가 무너졌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법률에 의한 지배를 회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할 겁니다. 그들이 말하는 비상조치에는 노동당 같은 민주적인 정당을 금하고, 노조활동을 금지하고, 재판 없이 사람을 구금하는 내용이 포함합니다. 바로 우리처럼 죄라고는 정부와 뜻을 달리하는 것 말고는 없는 평화적인 남녀를 말입니다. 제 말이 터무니없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것으로 들리십니까? , 독일에서 저들이 사용한 전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했어요.”


(285)

어머니는 같은 경로를 통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애썼잖아요.” 로이드가 말했다. “그리고 실패했죠.” 바로 지난 4월 노동당 여성 의원들은 남성 동료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 여성 공무원들에게 동등한 임금을 보장하는 의회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했다. 법안은 남성 의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투표에서 질 때마다 민주주의를 포기해선 한 돼.” 에설은 단호하게 말했다.


(289)

그들은 영국 국기를 들고 있었다. 로이드는 궁금했다. 조국의 좋은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왜 가장 먼저 국기부터 흔들어 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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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안내판 뒤쪽으로 내 뼈를 옮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폭풍>을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하고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16년 몸져누웠다. 그의 생애와 함께 흘러왔던 모든 것, 그가 이룩했던 모든 것이 절대적 단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먼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한번 쓰고 고치는 법이 없었던 창작과 달리, 고칠 때마다 새로 작성한 유서가 무려 134통이나 되었다.


(107)

로마인들이 배스를 건설한 것은 기원후 60년이었으니, 그들의 열정은 거의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나를 불가항력적인 감탄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대략 기원전 50년부터 5세기 동안 브리튼을 지배했다. 그들이 로마의 군대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산과 들과 강을 피로 물들였다. 브리튼인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제국은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샘의 족장들은 제각기 왕국을 건설하여, 브리튼에 일곱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이른바 앵글로 색슨 7왕국이다.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들은 로마제국에 대해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169)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특성, 즉 외적 감각에 호소하기보다는 내적 감각에 호소하는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우리의 내적 감각을 향해 말한다. 이것을 통해, 상상의 그림 세계가 활성화되며, 완벽한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덧붙일 수 없다. 정확하게 여기에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환상의 바탕이 놓인다.”


(200)

로미오는 자신을 순례자로, 줄리엣을 성자로 비유하며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렇지만 그가 사용하는 종교적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베일일 뿐이고, 이들의 행동과 말에는 자연적 세계관이 더 깊이 침투해 있다. 이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그들의 욕망은 자연의 의지 또는 본성일 뿐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던 이 세계관은 심리적 층위와 제도 및 관습적 층위 사이의 충돌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말투에 역설과 모순을 주입한다.


(238)

전쟁 속의 사랑을 이만큼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이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두 남녀의 사랑을 참담한 역사적 현실 속에 던져두고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극이라는 미학적 전형까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투철한 현실주의와 빛나는 실험 정신이 런던의 극장가에서 환영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사랑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327)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대담한 말장난, 비유와 생략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이다. 사회적 안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발화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협받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에게는 글쓰기의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불화하는 인식론(또는 지식이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몹시 당혹스러운 딜레마이며,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다수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들을 이해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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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민주화하는 흉내라도 내야 유신 잔당도 희망이 있지. 18년 동안 지반을 뚫을 만큼 깊은 뿌리를 내렸겠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야. 오늘 공화당이 계엄령 철폐안 통과에 동의하기로 한 것만 봐도 역사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어. 계엄령이 철폐되고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이제 군인들의 천하도 끝이라. 온 나라를 핫둘핫둘 구령에 맞춰 움직이려던 군인들은 이제 산중 막사로 돌아가고, 이제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민간인이 민간인을 지도자로 뽑는 진정한 민주의 시대가 열리는 거지. 그동안 거적때기로 엉성하게 가려놓은 죄상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아마 이 땅에 발붙이고 살기는 어려울걸. 그걸 김종필이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저렇게 신민당이 제안한 법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니 얼마나 통쾌한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라. 해일을 수도꼭지로 막을 수 있겠나? 아무리 간교하고 뿌리가 깊어도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울 거라. 비록 거리로 뛰쳐나가지는 않지만 최루탄 냄새도 꽃 내음 같고 시위의 함성이 사랑 노래로 들리는 것이 내 심경이다.”


(255)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는 없을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그동안 권력은 군부의 손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어. 권력자에게나 국민에게나 독재는 지겹도록 신은 낡은 구두 같은 거란 말이야. 반면 민주는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새 구두지. 언제까지나 낡은 구두를 신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장은 새 구두보다 편안해. 군부는, 우리에게 다시 헌 구두를 내밀면서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신으라고 말할 거야. 지금 민주의 희망을 꺾고 다시 군부독재의 시절로 돌아가도록 강압한다면 사람들은 새 구두를 빼앗긴 것에 분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새 구두를 신고 발뒤꿈치가 쓸리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할 테지.


(259)

선배의 눈빛을 보자마자 못마땅해하는 거 알 수 있었어요. 사실 나, 선배의 그런 눈빛 때문에 선생님이 되려는 꿈도 접고, 평생 구겨진 바지만 입고 살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있었어요. 기억나요? 영등포의 인쇄소에 선전 문건 초안을 받아 들고 갔던 날, 내가 면바지를 다려 입고 왔다고 선배는 화를 냈잖아요. ‘도대체 정신이 있는 얘야? 아까 다섯 시 전에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지금 도대체 몇 시야? 다들 양치질도 못하고 며칠씩 날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는데 너는 집에 가서 바지나 다려 입고 왔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었지요.”


(262)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해요. 사람들의 피가 담벼락을 적시고 하수구로 흐르는 그날이 온다면, 나는 과연 거리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주변에 동지들도 없으니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더욱 내밀한 나 자신의 응답에 귀 기울일 수 있지요. 나는 교사다. 교사가 교단에 서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거리의 핏물을 외면한들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 놓고 대답해보아라, 하지만 나의 내면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대답을 하지 않네요. 눈을 꾹 감고 붉은 땀만 흘리는 돌부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네요. 하루라도 나의 갈 길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흔들림 없이, 광화문 앞의 해치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온몸에 휘감고 담대하게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갈 수 있다면 말이에요.


(337)

문득, 지금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들도 아버지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절대적인 권위가 오늘날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애써 생각해낸 위로의 말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할머니가 저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책임지지 못하고, 아버지가 한 번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끔찍한 무력함일 것 같았다.


(349-350)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살아간단다. 네 힘으로 당장 고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네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잘하는 거야. 언젠가 박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지금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만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커서 할 일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벌써 중요한 시간이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네 식구가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손수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선생님이 영상이 맺히기를 기도하며 멀리 있는 선생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생님과 나의 영혼이 어디론가 서로 통하고 있으리라고 믿는 것, 먼 곳에서라도 나의 외침을 들은 선생님이 답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믿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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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초등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냈다고 제 몫을 다 해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한 가지 대답만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보내야 한다. ‘앞으로 살면서 무얼 해 먹고 살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는 데 그 아까운 학창시절을 다 보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인생의 초반에는 부모님의 선택으로 내 모든 인생이 돌아간다. 공립유치원으로 보낼까, 영어유치원으로 보낼까? 학교는 발레를 보낼까? 아니면 중국어나 영어학원다 우리에게 좋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선택들이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하나도 모른 채.

 

(21-22)

나는 계속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이유로,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역사상 교육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역사상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역사상 가장 많은 카페인을 섭취할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불안정하고 우울하고 콤플렉스가 많은 세대라는 이유로, 살짝 정신이 나간 채로 새벽 3 27분이 되면 이력서를 여기저기 보내기 시작했다.

 

(95)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강화시키듯 증오도 우리를 강인하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미워하면 더 나쁜 사람이 된다. 모든 감각이 살아나면서 사소한 부분들을 감지하는 재능도 예리해지고, 감정도 솟구친다. 일종의 활홀경인 셈이다. 증오 덕분에 나는 악에 대한 무한한 재능을 발견했다. 나의 관찰력은 날이 갈수록 더 날카로워졌으며, 나의 말은 대량 살상 무기로 둔갑했다. 원하지 않아도 증오심은 사람을 변하게 했다. 예전에는 내 감정 제어기가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갔지만 이제는 먹통이 되어버렸다. 비난이나 트집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옥상에 숨어서 홀로 바나나를 먹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꾸 참고 넘기다보면 안에서 뒤틀린 것들이 살갗 밑에서 욱신거리게 된다. 하지만 계속 대응하지 않기로 한다. 그 사람과 똑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사실 될 수도 있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223)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스물여섯 살이 되어 있으면 자신이 젊음을 잃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스물여섯 살부터는 카나리아제도 주민 전용 승차권을 살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카나리아 주민이 될 수 없다는 뜻인가? 젊음과 주민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인가? 나는 아직 28유로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스물여섯 살이 되는 순간 35유로를 내야 한다. 하여간 왜 청년할인은 있는데 성인 할인은 없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내 또래들 대부분이 갈 곳이 없어 부모님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 빌어먹을 경제적 상황에 사회적인 젊음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끝난다니, 말이 되는가? 하긴 휘발유 가격이 올라도 자기는 항상 20유로어치만 넓으니 상관없다는 멍청이도 있으니까.

 

(229-230)

우리는 정말 거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 나는 청중 두 명을 향해 말을 쏟아냈다. “누가 깔리든 말든 바퀴는 절대 멈추지 않아.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어. 내가 바퀴에 깔리면 누군가 나를 대체하겠지. 우리가 미쳐버릴 때까지, 심지어 자본주의가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우리를 세뇌할 때까지 자본주의는 우리를 피폐하고 만들고 우리의 생명까지 빨아먹는 아주 병든 시스템이라고.”

 

(246)

할머니집의 벽은 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초반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몇몇 기억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흑역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에피소드, 사춘기 때의 경멸과 오만함을 떨쳐버리는 잊는 방법을 익혔다. 손님이 올 때마다 축 처지던 내 어깨도 지워버렸다. 문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할머니가 머리를 어떻게 빗었는지, 할머니 몸에서 어떤 향이 났는지, 옷차림은 어땠는지까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할머니하면 얼굴 생김새,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많이 우시던 모습, , 커피를 무척 좋아하시던 모습만 생각난다.

 

(309-310)

어느 날 스스로를 하나의 회사라고 간주해버린다. 당신의 인생 드라마에선 당신이 최고경영책임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이자 최고재무책임자다. 그러니 당신은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항상 느끼며 인생에서 단 1분이라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돈을 아끼고, 당신의 재능을 더 잘 이용하고, 업무를 다양화하고, 모든 면에서 결과를 최적화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의미하는지, 당신이 인생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당신을 내쫓겠다고 위협할 직원도 없으니까. 그저 당신은 샤워를 마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그 나이에 마땅히 이루었어야 할 모든 것들, 친구들과 달리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때문에 스스로를 조금씩 갉아먹게 될 뿐이다. 그러다 귀에서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는 게 느껴지겠지.

 

(361)

어김없이 돌아온 쓰레기 같은 월요일, 이메일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거지 같은 아침 미팅. 회사생활은 이 두 가지의 반복이었다. 그 와중에 복숭아색 정장을 입은 마카레나는 내 머리를 드럼세탁기처럼 핑핑 돌게 했고, 내가 거짓말할 걸 알면서도 멍청한 질문만 던졌다. 모두가 진실을 요구하면서, 막상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면 그 진실을 넘기지 못해 캑캑대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이건 너무 쓰고, 너무 짜잖아. 설탕을 한번 넣어봐하며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원했다. 여기서 계속 일하려면 내가 얼마나 더 당신에게 비굴하게 굴어야 하느냐고 마카레나에게 묻고 싶었다.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까.

 

(392-393)

예전에 셀리아 비얄로보스가 텔레비전에서 젊은이들은 지금 당장 노후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세대가 공적연금을 제대로 받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적어도 한 달에 2유로, 즉 커피 한 잔이나 담배 한 갑 살 돈을 아껴 저축하라는 얘기였다. 그 충고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진정한 재테크의 천재이자 캔디크러시 게임의 달인이시여, 왜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요? 제가 지금부터 매달 2유로씩 저축하면, 65세나 68세가 되었을 때 엄청난 갑부가 되어 연금이 아예 필요 없겠죠?”라고. 언제 은퇴할지 누가 알겠는가. 몇 달 후엔 은퇴 연령이 70세로 늘어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은퇴한다고 해도 완전히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슈퍼마켓 계산원이나 주방 보조, 배달앱 기사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셀리아와 함께 토크쇼에 참석한 이들 중 단 한 명도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왜 집을 사고 가정을 이루지 않으냐고 비아냥거리는 꼰대들이다. 베이비 붐세대 놈들, 너네랑 사정이 다르다고.

 

(402-403)

단골 바에 갔다가 술 취한 놈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화장실에서 나가고 싶으니 비켜달라고 말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런 일 때문에 그 가게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뿐인데, 왜 내가 여자들은 꼭 단체로 화장실에 가더라하는 같잖은 농담을 들어야 할까?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자기 욕망을 채우고는 나를 우물이나 도랑 혹은 그가 나를 발견했던 곳에 버릴까봐 불안해하지 않고, 이른아침에 음악을 들으며 조깅할 권리는 나한테는 없는 걸까? “엄마, 걱정 마. 지금 집이야하며 엄마를 안심시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412-413)

좋은 남자들은 여자 말에 토를 달거나 여자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가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빗자루로 쓸 때 발을 들어준다. 식기세척기 안에 있는 접시를 정리하기도 한다. 가끔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도 있다. 그들은 여자를 자기들 밑에 있는 존재를 여기지 않는다. 결코 여자를 해치지 않을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회사 임원 열 한 명 중 아홉 명이 남자인 이유를 숙고하진 않는다. 그들은 인생에서 얻은 모든 기회가 자기가 필사적으로 일한 결과고, 여자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건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진 않는다. 그냥 그런 남자들을 보면 지긋지긋하다. 선의가 반드시 미덕과 장점이 되지는 않으니까.

 

(447)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가족,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이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더라도, 내가 심한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몸이 아프더라도, 계속 일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의 삶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노동만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흘러간다. 사람보다, 다른 것들보다 일이 더 중요한 셈이다. 가장 두려운 점은 내가 다른 것들을 우선시하며 노동을 그만둘 경우, 나를 대체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는 것이며, 나 또한 그걸 알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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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싱싱합니다, 싱싱해요! 재앙은 오지 않았어. 여름의 풍요로움이 만발하네!(환희의 외침) 봄은 막 지나갔어. 어느새 하늘을 향해 빠른 속도로 튀어 오른 여름의 황금빛 오렌지는, 계절의 정점에서 터지며 스페인의 머리 위에 꿀과 같은 과즙을 쏟아내지. 그때 녹진한 과즙을 품은 포도가, 버터 빛깔의 멜론이, 핏빛의 새빨간 무화과가, 불꽃의 색과 같은 살구가, 온 세상 여름이 품어낸 온갖 과실들이 한꺼번에 우리 시장의 진열대로 몰려들어. (환희의 외침) , 과실들이여! 버드나무 가지로 광주리에서 너희들의 조급했던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구나. 여정의 출발점이었던 시골에서 과실들은 여름의 청량함으로 물든 초원의 물과 당분을 먹고 실하게 자랐네. 햇빛으로 물든 무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깨끗한 물들은 뿌리와 줄기를 통해 하나로 모아지고, 과실의 중심부로 전해지고, 그 속에서 마르지 않는 꿀의 샘과 같이 유유히 흐르며 과실을 단단하게 만들고 더욱 무겁게 만들었지.


(38)

디에고 : 도대체 무엇으로 얼굴을 씻기에 아몬드처럼 새하얄까?

빅토리아 : 깨끗한 물로만 씻는걸, 사랑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지!

디에고 : 머리카락은 선선한 밤처럼 상쾌해!

빅토리아 : 그건 매일 밤마다 창가에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야.

디에고 : 깨끗한 물과 밤 때문에 네 몸에서 레몬과 같은 향이 나는 걸까?

빅토리아 : 아니야, 당신의 사랑이 보내는 바람이 나를 단 하루 만에 꽃으로 뒤덮어 주어서 그런 거야!

디에고 : 꽃들은 시들면 지는데!

빅토리아 : 그다음은 열매가 기다리지!

디에고 : 겨울이 올 텐데!

빅토리아 : 그래도 당신과 함께인 걸. 당신이 처음 내게 불러준 노래 기억해? 그 노랫말처럼 항상 변함없는 거지?

디에고 : 나 죽고 백 년 뒤에

대지가 내게 묻겠지

내 너를 결국 잊었냐고

그럼 나는 아직이라 답하리


(75)

그러니 명심해라, 내가 도착하는 순간 감동적인 것은 더 이상 없다. 그 따위 감동은 금지된다. 그 밖의 몇 가지 쓸데없는 것들, 예컨대 행복을 원하는 우습기만 한 초조함,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얼굴, 풍광에 취하는 이기적인 작태, 불경한 풍자 행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의 빈자리에 나는 조직을 이식한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끝에 가서는 탁월한 조직이 너절한 감동 따위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듯 탁월한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는 조치를 시행할 것이다. 나의 명령은 법률이 규정하는 것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105)

판사 : 내가 법을 지키는 것은 법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네. 그것이 법이니까 지키는 거지.

디에고 : 그 법이 범죄를 가리킨다면요?

판사 : 범죄가 법이 된다면 그건 더 이상 범죄가 아닌 것이지.

디에고 : 그렇다면 미덕을 단죄해야 할 판이군요!

판사 : 분명, 그렇게 해야겠지, 만일 미덕이 건방지게 법을 검토하려 든다면.

빅토리아 : 아버지,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두려움인 거예요.


(109)

아니, 빅토리아, 엄마는 닥치지 못하겠다. 내 평생 입 닫고 살아왔다. 내 명예를 위해서 그랬고, 신의 자비를 위해 그랬다. 그런데 명예란 게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어.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 하늘에 계신 신보다도 귀중하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입 닫고 살지 않으련다. 이 사람에게 적어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당신 같은 사람 편에는 권리가 함께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잘 알겠지만, 권리란 고통받고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편에 있으니까요. 권리는, 약삭빠른 자나 돈에 눈이 먼 자와는, 함께하지 않아요.


(157)

디에고 : 싫어. 그런 방식은 나도 알아. 살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도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 따위 논리가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이지! 지난 수백 년간 너와 같은 권력자들은 이 세상에 난 상처를 치료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약화시키기 일쑤였어. 그리고 그런 방식을 대단한 것인 양 치켜세웠지, 왜냐면 아무도 그들의 면전에 대고 코웃음 친 적이 없었으니까!

페스트 : 나는 실천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웃지 않는 거야. 나는 효율적인 사람이거든.

디에고 : 효율적이라, 그럼 그렇지! 그리고 실용적이지. 마치 도끼처럼!

페스트 : 인간들을 살펴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 그러면 어떤 정의라도 그들에게 쉽게 먹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디에고 : 이 도시의 성문들이 모두 봉쇄된 이후로, 나는 그동안 모두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었어.

페스트 : 그렇다면 그들이 언제나 너를 고립시킬 것도 잘 알겠군. 혼자 남은 사람은 무너져 내리는 법이지.

디에고 : 아니, 틀렸어! 만일 혼자였다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렸겠지.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나와 함께 한다고.


(159)

내가 경멸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려 드는 자들뿐이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저 사람들은 너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만일 저들이 어쩌다 딱 한 번 사람을 죽였다 해도, 그것은 잠시 광기에 사로잡혀 그랬던 걸 거야. 그런데 너는, 그 잘난 법이니 논리니 들먹이며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저들을 비웃지 마. 그건 이미 수백 전부터 공포를 불러오는 혜성들이 저들의 무리를 수도 없이 지나갔기 때문이니까. 저들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 비웃지 마. 수백 년 전부터 저들은 죽어갔고 저들의 사랑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왔어. 설령 저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원인이 존재하는 거야. 그러나 저들을 상대로 너희들이 저질러온 죄악에는, 네가 고안해 낸 그 따위 역겨운 질서에 맞춰 이 세상을 체계화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저질러 온 죄악에는, 나는 그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어. (페스트가 데이고 쪽으로 걸어온다) 네가 다가온다고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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