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두 번째는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은 광주시민들을 중심에 두고 써보자는 관점이었다. 평전이 발간됐거나 신문과 방송 혹은 잡지에 집중인터뷰를 했던 분들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동어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입장에서 참여한 신부님과 스님은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분들이므로 뺄 이유는 없었다. 한편, 나중에 정치를 한 분은 순수성 측면에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역할은 가능한 한 줄였다. 따라서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65-66)

김성섭이 여러 유인물 중에서 내민 것은 58일자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 위원회 이름으로 뿌려진 1시국 선언문이었다. 선언문 종류는 그것뿐이었으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족적 양심과 민주적 지성의 부름으로 우리가 그간 역사앞에 외쳐왔던 목소리는, 타율과 강압에 의해 수그려들기도 여러차례 있어왔으나, 끝내 불붙은 민주에의 열정은 오늘의 역사적 전환기를 앞당겨 그 피의 도정을 계속 밟아왔고, 모골이 송연한 유산공포정치 아래서도 끝까지 투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대학인이 걸어야 할 길은, 무엇보다 구조적 수탈의 배후에 숨어있는 탐욕의 세력을 정확히 파헤치고, 이들이 어떻게 외세 매판자본과 결탁 반민족 작태를 멈추지 않고 있는가를 직시하여 조국의 민족정기를 진작시키는데 앞장서는 그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국의 현실은, 독재자 한 사람의 영면이 마치 구약과 적폐의 일소인 양 오도시키려는 무리들 때문에, 민주민족 세력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세대의 미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심한 우려를 낳고 있다....... “

 

(89)

14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처음 가두로 진출할 때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격렬하게 맞선 양상이었는데, 오후 3시쯤에 시작한 민주성회와 이후 가두 행진 때는 뜻밖에 평화로웠다.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나왔던 것이다.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오후 6시까지 집회를 마치고 귀교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서였다. 경찰은 전남대생들이 귀교할 때는 시위 행렬을 따라가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98)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고 안병하 경찰국장은 생각했다.

(중략)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 잘 지키기를 바란다. 시위 학생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 도망가는 학생은 쫓지 말라. 시민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 알겠는가?“

(중략)

부대 지휘관은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라. 사과탄은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 알겠는가?“

(중략)

시위 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라.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하라.“

 

(199-200)

문장우는 체격이 날렵하고 단단했지만 그의 친구는 둔하고 허약해 보였다. 허약한 친구가 문장우를 잡았지만 오히려 그가 끌려갔다. 창 너머는 바로 충장파출소였다. 학생 예닐곱 명이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 지리에 밝은 학생들은 잽싸게 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들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청바지에 긴팔 티를 입은 여학생을 잡아당기더니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여학생의 티가 벗겨져 가슴이 보일 만큼 난폭하게 질질 끌고 갔다. 그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오십으로 보이는 남자를 붙잡은 뒤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다. 시민들 보란 듯이 자전거는 길바닥에 사정없이 던져 망가뜨렸다. 지켜보는 시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항변을 못했다. 문장우 역시도 처음에는 말을 못하다가 꾸역꾸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 개새끼들아. 니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읎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

 

(215)

선생님,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도 답답하고 암울하기는 여러분 같아요.“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나도 알아요.“

금남로에서 우리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역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울먹였다. 박행삼도 학생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므로 교사 신분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던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행삼이 비통하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어째서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지 참담할 뿐입니다.“

 

(222)

국민들이 낸 방위세로 무장한 군인이 아닌가! 외적을 막으라고 지급한 총을 시민들에게 돌리고 있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 없다. 주인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시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304-305)

전옥주의 가두방송 멘트는 전날보다 더 거칠었다.

형제 동생들이 죽어가는데 다리를 쭉 뻗고 잠이 옵니까. 공수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고 하는데 도대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갑니까. 일제 때 학생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광주입니다. 광주정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광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팔십만 광주시민 모두가 나서 대한민국 군인이기를 포기한 공수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341)

그때였다. 바퀴 달린 시위 장갑차 한 대가 도청 분수대 쪽으로 달렸다. 장갑차 뚜껑을 열고 한 청년이 용감하게 상체를 드러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은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도청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 청년을 향해 가차 없이 집중사격을 했다. 목에 총을 맞은 듯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공수부대원의 집중사격으로 충장로 입구 빌딩에 있는 노인과 동구청 앞의 학생과 처녀, 시민 등 여덟 명이 쓰러졌다.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던 시위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노동청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시민들이 쓰러진 사람들 중에 경상자는 동구청 뒤 홍안과로, 중상자는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으로 시위 차량에 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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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간강이요, 부자연스러운 것은 질병이다. 허파가 공기를, 눈이 빛을 맞아들이듯, 신체는 건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건강은 생활 감정 전반에 걸쳐 말없이 살고 함께 성장한다. 그러나 질병은 이질적인 것으로서 갑자기 들이닥치고, 예상치 못하게 영혼을 덮쳐 충격에 빠뜨린 뒤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흔들어 깨운다. 다른 어떤 곳에서 온 이 사악한 적은 도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그는 머무를까, 아니면 사라질까? 그를 붙들고 간청한 것인가, 아니면 다스릴 것인가? 질병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리를 할퀴어 극도로 상반된 감정들을 마음에 새겨넣는다. 경외, 신앙, 희망, 낙담, 저주, 겸허, 절망 질병은 환자에게 묻고 생각하고 기도하라고, 겁에 질린 눈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붙안을 떠맡아주는 어떤 존재를 꾸며내라고 가르친다. 고통이 인류에게 종교적 감정, 신에 대한 생각을 창조해주는 순간이다.

 

(60)

옛 방법이 은폐하려 애쓰던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했다. 모르는 체하지 말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돌아가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눈 돌리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외투를 입히지 말고 벌거벗기라는 것이다. 충동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틀어쥘 수 있다. 악마의 심연에서 충동을 끌어내 거리낌 없이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은 미학이나 문헌학 못지않게 도덕이나 수치심과는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세기가 얼버무리고 싶어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업과 무의식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 고백의 문제를 시대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인들뿐 아니라 도덕병에 걸린 그 시대 전체를 치료하는 일에 착수했다.

 

(63-64)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류가 자신에 관해 더 명백하게 알게 해주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위대한 업적이다. 나는 더 명백하게라고 말하지. 더 행복하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한 세대 전체의 세계상을 심화했다. 나는 심화했다고 말하지, 미화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과격한 것은 행복을 주지 않고 결단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인류의 영원한 동심을 언제까지나 꿈결 속에서 달래어 재우는 일은 학문의 과제가 아니다. 학문의 과제는 이 무정한 대지 위에서 올곧게 걸어갈 것을 인류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불가결한 작업을 함으로써 자기 몫을 모범적으로 행했다. 일하면서 그의 냉혹함은 강인함이 되었고, 그의 엄격함은 불굴의 법칙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안식처로 가는 탈출로를 가르쳐준 적이 없다. 지상의 낙원이나 천상의 천국을 향해 도주하는 길을 가르쳐준 적이 없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길, 자기만의 심연에 이르는 위험한 길을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그의 통찰에 너그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는 매서운 북풍처럼 예리하게 음습한 대기 속으로 침입하여 황금빛 안개와 장밋빛 구름으로 가득 찬 감정을 붙어내버렸다.

 

(67)

그의 삶의 리듬은 쉼 없이 균일하고 끈기 있게 흘러가는 일의 리듬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75년 동안 한 주 한 주가 제한된 활동의 똑같은 순환 주기를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하루하루가 다른 날과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지나갔다. 대학에 몸담은 시기에는 매주 한 번의 강의와 매주 수요일 저녁 제자들과 했던 소크라테스 대화법에 따른 학술 심포지엄, 매주 토요일 오후의 카드놀이를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정이 될 때까지 일분일초까지도 분석, 치료, 연구, 독서, 이론적 구성에 바쳤다.

 

(74)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면, 프로이트는 평생 메스를 들고 철학을 했다.

 

(77)

그의 사유가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눈은 벌써 창조를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의견의 오류를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창조적 시선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직관은 외부의 영향이 마치 인간의 눈빛이 한 번도 비춘 적이 없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 수천 번 표현된 것을 마치 인간의 입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말끔하게 새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직관적 탐구자가 지닌 이 시선의 마법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르칠 수 없고, 천재적 본성의 소유자가 최초이자 단 한 번의 직관을 고수하는 것은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이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96)

감정이 억압된다면 도대체 누가 그것을 억누르는가? 그리고 어디를 향해 억압되는가? 어떤 법칙에 따라 정신에서 나온 힘이 신체적 힘으로 전환되며, 그 끊임없는 변화들은 어떤 공간에서 작동하는가? 깨어 있는 인간은 이런 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그것들에 관해 알기를 강요받으면 곧바로 알게 된다. 지금까지 학문이 감히 탐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이 그의 눈앞에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 새로운 세계릐 윤곽을 알아차렸다. 바로 무의식이었다. 개인적 심리 생활 속 무의식적 부분의 탐구가 이제부터 그가 평생을 몰두하게 될 문제이다. 심연으로의 하강이 시작된 것이다.

 

(109-110)

그가 보기에는 모든 심리적 사건에는 특정한 의미가 있고 모든 행위에는 행위자가 있다. 또한 그렇게 실수할 때 한 사람의 의식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억압받는데, 이 억압하는 힘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성과 없이 찾아녔던 그 무의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보기에 실수는 생각 없음이 아니라 억압된 채 밀려들어 가 있던 생각의 자기 관철이었다. ‘잘못말하기, ‘잘못쓰기, ‘잘못잡기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우리의 깨어 있는 의지는 그것이 말로 나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또한 그 무언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우리도 배워야만 하는 무의식의 언어를 구사한다.

 

(124-125)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처음으로 입증한다. 꿈은 우리 감정 능력의 밸브이다. 우리의 작은 세속적 육신 속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막강한 욕만, 헤아릴 수 없는 괘락욕과 생존 본능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소원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옹졸하게 꽉 짜인 일상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쾌락의지를 천분의 일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룰 수도 없는 한없는 욕망이 더없이 궁색한 소액 연금 생활자, 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못된 욕망들이 음란하게 들끓는다. 지배권이 부재하는 권력의지, 억눌리고 비겁하게 일그러진 무정부주의적 욕구, 감춰진 허영심, 열정, 질투 등.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여자들이 지나다니며 저마다 순간적인 정욕을 도발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그 모든 소망과 소유욕은 똬리를 튼 채 독사처럼 틀어박혀 혀를 날름거르며 새벽종이 우릴 때부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 밤마다 꿈이 이 모든 응어리진 소원들에 배출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영혼은 그런 대기압 아래에서 폭발하거나, 갑자기 흉악한 난동이라도 부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157-158)

프로이트는 깨달았다. 성 의식은 사춘기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갑자기 몸 안에 주입되는-대체 그것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다는 말인가?-것이 아니라, 오히려-모든 강단 심리학보다 천 배는 더 심리학적인 언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해주었듯이-영글다 만 인간 속에서 성 충동이 그저 깨어날뿐이라는 사실, 따라서 성 충동은 잠든 채로(말하자면 잠복 상태로) 오래전부터 어린이의 신체 속에서 현존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아가 걷기 전에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두 다리에 지니고 있듯이, 말할 수 있기 전에 언어 욕구를 지니고 있듯이, 성욕도-목전에 맞는 행동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하면서-유아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유아는-결정적 표현!-자신의 성욕에 관해 안다.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189)

인간의 지성이 인간의 충동 활동에 비해 무기력하다는 것은 얼마든지 강조되어도 좋고, 그런 주장이 옳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약점에는 특징이 있다. 지성의 목소리는 낮게 속삭이지만, 자신의 말이 경청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수없이 여러 번 거듭 퇴짜를 맞지만 결국에는 성공한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점들 가운데 하나이며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지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날은 확실히 멀리 있지만, 그렇다고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지는 않을 것이다.

 

(199)

현재 우리는 프로이트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모든 인간 영혼의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가치를 새롭고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서 예술, 연구, 생명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성하든 반대하든 프로이트의 사상 체계로부터, 그의 견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창조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외부인은 모든 영역에서 삶의 중심부-인간적인 것-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의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철학이든 교과서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규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문가들이 망설이는 동안, 개별성과 궁극적 가치에 관해 추밀 고문관과 학자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참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괴테가 잊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새겨놓은 창조적 의미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결실이 있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211-212)

당신이 빠짐없이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거의 모든 특성들은 그 자신의 특성에 기인하며, 우리에게는 특이한 것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심리 구조입니다. 사실 성적 기질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을 더 상세히 설명해야 하겠지요. 우선 그것은 학대하고 맟설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분석 없이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 각 인물들과 각 문장들을 통해 정신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카라마조프 씨네 사람들>이 도스토엡스키의 가장 개인적인 문제인 아버지 살해를 다루며 범행과 무의식적 악의에 관한 정신분석적 원리를 그 근거를 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표현한 기이한 성애는 충동적 발정이거나 승화된 연민입니다. 자신의 영웅들이 사랑할 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등에 관한 회의[=양가감정]는 그의 심리학이 어떤 독특한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줍니다.

 

(360)

삶은 언제나 값지고 안락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직업적 위로꾼들에게 우리는 이미 신물이 나 있고, 이와 같은 대담한 진산을 느끼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변명들을 보상해준다. 심리학의 측연이 시대적으로 풀리지 않는 중요한 문제의 심연을 향해 내려져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순조롭게 풀릴 만한 문제들을 진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낙관적 해석이든 비관적 해석이든 중요치 않다. 한 학술원이 [학문과 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더 선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유치한 논문을 현상 고모하고, 장 자크 루소가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대답하여 세인의 열광을 얻었던 시대는 지났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명제들을 제시하는 방식, 엄격하고 객관적이고 어떠한 미신이나 편향성으로도 사탕발림하지 않는 이 방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질문을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밀하고도 결정적인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다.

 

(368)

마지막에 그는 공허와 망각의 시대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확고부동한 사람, 절대적인 것, 지속적으로 타당한 것 말고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겼던 순수한 진리 탐구자. 마지막에 그는 우리의 눈앞에, 경외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 앞에 있었습니다.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가장 고귀하고 완전한 유형의 연구자. 어떤 깨달음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일면 주의 깊고 세심하게 검토하고, 일곱 번 숙고하고도 자기 자신을 의심했지만, 확신이 들고 나면 즉각 온 세상의 저항에 맞서 그것을 지켜냈던 연구자. 그를 만나고 우리가 얻은 것, 다시 한 번 시대의 이상으로 배운 것은, 지성인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용기보다 더 멋진 용기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용기를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닏.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찾으려 하지 않거나 표현하지도 고백하지도 않았기에 발견하지 못한 깨달음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감행하고 또 감행했습니다. 갈수록 더욱 감행했고, 혼자서 모든 사람과 맞섰습니다. 생의 마지막 날들까지도 그동안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모험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인간의 긑없는 투쟁 속에서 이런 불굴의 정신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본보기를 제시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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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 감정들에 이미 정해진 간단한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진작 배웠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나만의 이름 짓기를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몰라서,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어하는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말을 이리저리 조합해, 원래 있던 것과 새로 나타난 모든 것에 이름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51)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80-81)

온 가족 구성원이 화가 많고 예민한 우리집에선 언제나 고성방가가 끊이질 않았다. 동시에 예술적 기질도 많아서 엄마 아빠는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동생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고, 언니는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리고는 또 박 터지게 싸우다 한 번씩, 한 명씩 부엌에서 칼을 쥐고 나와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스펙터클, 어떻게 보면 지옥 같은 광경이 자주 펼쳐졌다. 장례식상에서마저 댄스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욕하고 소리지르며 싸운 것까지도 전부 괴롭고 웃긴 우리 가족의 풍경이었다. 귀신이 된 언니가 그 모습을 봤다면 다들 미쳤다며 껄껄 웃을 것 같았다.

 

(110)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 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112)

세상에는 완전한 이해도 완전한 사랑도 없다. 모두들 살아 있기 위해서 견디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저마다 느끼는 감정은 너무 다양하고 그중엔 고통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더 많다. 분노로 질투로 좌절감으로 절망감으로 삶에서 멀어지고픈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내 등뒤에 나에게 의지하는 생명이 있다. 모든 소중함에도 한계가 있다. 등뒤에 준이치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내가 여러 가지 죽음의 방법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도 준이치를 두고 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못 할 것 같다. 살아서, 다음주에 준이치를 병원에 데려가야한다.

 

(149)

깊은 사랑과 냉철한 이성과 오래된 우울감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언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모른다고 서로 말하던 우리 두 자매였는데, 언니가 떠난 뒤에 나는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생겼음을. 그래서 무척 아프고 괴롭지만 굉장한 것을 배우고 있음을 언니에게 꼭 말하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어쩐지 언니에게 전해질 거라고 느낀다.

 

(157-158)

30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젊은 여성 역할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20대 여성만을 주로 소비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30대 여성으로서 느끼는 자유도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하기 싫은 것부터 하나씩 줄여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여성 역할 수행을 너무 오래 했던 탓일까. 이제 와서 내가 원하는 모양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을 사용한 창작과 그 창작을 포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몸을 사용했다. 몸을 위한, 몸이 원하는 삶의 방식은 지금껏 생각해보질 못했다.

 

(189)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땅에 발을 붙이고, 정신과 몸을 붙여내고야 만다. 반면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머리만으로 산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놓고 살았다. 감정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방법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겪는 공황은 머리의 파업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끼니 몸 전체를 셧다운시켜서 몸도 머리도 멈추게 해버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4-205)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정신과 몸은 사실 하나였다. 영혼, 정신,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것들 모두가 결국 자체였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되는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온몸으로 영혼의 실재를 기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부재와 나의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들의 몸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을 가지고 그들의 기억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살아 있고, 기억하는 동안 내 세계에 그들은 함께 있다. (다만 영혼이나 유령으로서가 아니가 기억으로서.)

 

(205-206)

나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을 좋아한다. 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는 인간이 좋다. 살아나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좋다. 살아갈 방법을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인간이 좋다. 자신의 방법을 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좋다. 더 탁월한 방법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좋다. 겪기 않은 이야기로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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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 문제들을 야기한 사고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고 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해답이 될 새로운 사고방식은 미래의 과학자들이 처방했듯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생각을 이끄는 힘입니다.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언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번성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언어는 번성하고 이익이 되지 않거나 관심에서 벗어난 언어는 쉽게 사라집니다. 생태언어는 관심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동떨어져 있어 쉽게 잊히고 사라집니다. 언어가 없다면 언어가 가리키는 존재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미래에서 온 과학자들이 생태계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말들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을 처방한 이유입니다.


(23-24)

그래서 마음이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기는 쉽지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면 마음의 기본 값이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림이 기본 값이라니. 그럼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일까요? 마음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오락가락하는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 믿음과 배신, 정의와 불의, 손해와 이익, 욕망과 권태, 저항과 순종, 채찍과 당근, 판단과 보류, 갈까와 말까, 안과 밖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오듯 몸 안과 몸 밖을 오가며 살아갑니다. 생존을 위해서 밖으로 나가 각종 정보들을 접한 다음 안에 들어와 그것을 소화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균형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내부 세계에서만 파묻혀 살면 고립되고, 외부로만 향하여 있다면 내부가 고갈되어 산만해지니까요. 마음이 중심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간단한 것이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39)

생태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지구 환경 문제를 거시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자연과 자신의 삶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주변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생태계에도 깊이 공감하며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특정 새나 식물의 부재와 같은 현지 생태계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환경 윤리를 따르는 제품을 구입하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피하고,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색합니다.


(66-67)

고통의 기억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통은 괴로움을 안겨주지만 손상된 부위를 보호하게 하고, 앞으로 닥쳐올 상황을 미리 예측하여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불행하게도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고통과 아픔을 느껴야만 살아남는 데 유리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기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는 고통이 원인이 제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내 잊어버립니다. 그래야 또 사니까요. 하지만 고통의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고통이 남기는 교훈마저 놓쳐버리게 되니까요.


(74)

땅과 교감하며 발맘발맘 걷다 보면 생태감수성도 생깁니다. 땅과 접촉하지 않는 사람은 신(God)과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인간은 자연과 멀어졌습니다. 걷기를 통해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이 다른 생명의 아픔처럼 전해오면서 환경을 보호하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스킨십을 원합니다. 부드러운 발바닥으로 땅을 어루만지면 땅의 기운이 온몸을 정화해줍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스르트르는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혼자서 걸으며 길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나 조그만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무심히 떠가는 구름을 쪼개보거나 이웃 구름과 만나게 해서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보기도 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걷기는 나무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일단 걸어보세요. 걷기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테니까요.


(107)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이름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복이 허리춤에 다는 복주머니처럼 생긴 복주머니꽃은 한때 개불알꽃이라고 불렸습니다. 꽃봉오리를 숙이고 있다고 하여 할미꽃, 제비꽃의 방언인 앉은뱅이꽃, 갈고리 같은 가시의 쓰임새를 상상한 며느리밑씻개, 비하의 의미를 지닌 개똥쑥, 개옻나무, 거지딸기 같은 이름도 있습니다. 동물에도 꼽추재주나방, 무당벌레, 벙어리뻐꾸기, 송장벌레, 문둥이박쥐 등 부정적인 이름이 많습니다. 개가 들으면 기절할 이름인 개나리, 개비자, 개여뀌, 개살구처럼 가 접두어로 들어가면 부정의 의미를 지녀 어떤 것의 아류쯤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바꿔 생각하면 개들의 사회에서 못된 개를 일컬어 사람 같은 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21)

눈이 자란 궤적을 가지라고 합니다. 작은 가지와 눈, 그리고 잎은 외부 세계를 감지하는 레이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곳이지요. 낮과 밤의 길이를 재고, 중력과 바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주변 가지들의 방향을 탐지합니다. 만약 잘못된 정보를 수집했거나 분석이 잘못되면 그 가지는 여지없이 삭정이가 됩니다. 그래서 가지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필자가 관찰해본 결과 나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벋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26)

겨울에는 없지만 봄이 되면 방들은 빼곡히 들어차 각자의 일을 하겠지요. 여러분들도 겨울 숲에서 나무를 올려다 본다면 수많은 가지들이 질문을 던지며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왜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가지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연결된 몸이거든요. 서로 배려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사람도 그렇지 않나요?”


(133-134)

<산경표>는 땅에 대한 두 개의 인식 체계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입니다.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북에서 남으로 중심 줄기를 나눈 것입니다. 선조들은 산과 강을 따로 보지 않았습니다. 산과 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땅에 산 없이 시작하는 강은 없고 강을 품지 않은 산은 없으니까요. 둘째, 산은 나누고 물은 합친다는 산분수합입니다. 산은 물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습관, 언어, 문화를 나누지만 물은 모든 것을 합칩니다. 같은 수계(水系)에 살면 음식 문화도 같고 생활 습관도 같습니다. 그러니 <산경표>는 지리서이기도 하지만 문화까지 다루고 있는 인문서이기도 합니다.


(170-171)

나무에게 바람이란 어렸을 때는 무서운 훈육 주임이고, 사춘기에는 친구이고, 청년기에는 연인이며, 장년기에는 질서와 규율이고, 노년기에는 스킨십을 잊기 못하게 하는 추억과 같습니다. 멀리 벋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나무가 좀 더 커서는 바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친구처럼 대하고, 어엿한 나무가 되면 바람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연연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장성하여 숲의 주인이 되어갈 즈음이면 바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더 크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하는 훈육 주임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훈육 주임이 두 번 등장입니다. 무서운 것도 잠시, 수백 년이 흘러 노목이 되면 무성했던 가지와 잎들도 사라지고 엉성한 가지들 사이로 바람도 피해가고 가지들의 울렁거림도 사라집니다.


(177)

나뭇가지와 잎에는 동물의 눈과는 다른 개념의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의 이름은 피토크로뮴이라는 식물의 단백질 색소로서 밝음과 어두움을 감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무는 동물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감지할 수 있지만 사물의 자세한 움직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빛의 신호를 그림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신경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 모두 빛을 감지하지만 나무는 주변의 사물들을 대상의 그림자로 인식합니다.


(187)

인류는 개처럼 후각이 뛰어나지 못하고, 고양이처럼 날렵하지도 못하며, 새처럼 눈이 좋지도 않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종입니다. 사람의 크기는 어떤가요? 사람의 크기가  커지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되어 불리해질 텐데, 지구의 모든 사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사람 크기가 적당했나 봅니다. 지구의 역사에서 공룡같이 덩치가 큰 동물들이, 자신의 그늘에  숨어있던 작은 생물들이 살아남은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며 사라져갔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마냥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공룡이 멸종할 당시 인류의 조상이었던 포유류는 몸집이 작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크기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190-191)

흙이 더럽다는 인식을 두고는 흙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사람들은 흙 속에 동물의 똥이나 사체들이 들어 있어 흙을 더럽다고 여기고, 흙의 입장에서는 오염 물질이 유입되거나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밟혀서 다져진 땅이 되었을 때입니다. 정상적인 흙은 광물질 45퍼센트, 수분 25퍼센트, 공기 25퍼센트, 유기물 5퍼센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수치에서 흙 속의 절반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빈 공간이 줄어들면 물과 공기가 저장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내뿜은 탄산가스마저 빠져나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썩어들어가면서 에너지를 순환하지 못하고 흙이 더러운 것이 됩니다.


(202)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생명체 각각은 자신만의 역할과 기능을 지닌 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 연결 고리의 한 부분이며, 많은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요. 특히 세포학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몸속에 수많은 미생물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자연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이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기 위한 생태계의 필수 덕목입니다. 세포질을 연구한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분을 제외한 우리 몸의 10퍼센트 이상은 살아 있는 박테리아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일부는 비록 우리 몸의 직접적인 구성원은 아닐 지라도 그들 없이는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


(218)

나무는 속을 비웁니다. 오래된 나무는 대부분 속이 비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중심을 비우므로 하늘과 땅의 소통을 이룹니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공간입니다. 노자는 마차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어서 유용하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속을 비워내므로 많은 생명체들이 그 안에 깃들어 삽니다. 아늑하고 따뜻하며 숨기 좋은 그곳은 하룻밤 동물들이 쉬어가고 새들의 집이나 곤충들의 사냥터가 되기도 합니다. 살아서 몸을 보시하는 보살의 화신인 것이지요. 한편 나무가 속을 비운다는 것은 과거를 잊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지나간 시간을 잊고 오로지 현재에만 존재합니다.


(220)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지구를 연구한 외계인은 나무 전문가의 말과 스스로 연구한 기록을 토대로 삼아 다음과 같은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지구를 떠났다고 합니다. “답은 나무다. 나무는 공기를 정화하고 물을 가두며 흙을 움켜쥐고 모든 생명을 보듬는다. 따라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나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나무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무를 불평하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라며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빨개진 이유는 사람들이 전쟁과 약탈을 일삼으며 나무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 볼 빨간 사춘기를 맞이한 것 같다. 지구인들은 이웃 나라와 부딪히며, 망가진 지구를 재건할 생각은 안 하고 우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를 구할 골든타임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제 지구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나무에게 지혜를 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이상.”


(282-283)

생태계의 꼴은 지구의 살림입니다. ‘살림은 곧 생명을 가리키고, ‘목숨을 살리다는 문장의 명사형이기도 하며, 한 집안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지구 살림은 너무 큰 탓에 사람들이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들판에서 땅벌에 자주 쏘인다면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요? 한참을 궁리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 대신에 단순한 인과 관계만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서, 복잡한 상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태계는 넓은 시각으로 보아야 잘 보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어떤 생명체 중에도 독립된 실체는 없으며 다른 것과 상호 연관을 맺어야만 생명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연기의 고리를 끊지 말고 낱 생명을 넘어 온 생명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생태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래의 노래가 생태계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수산.”


(322)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인간이란 모름지기 자연의 이자로만 삶을 꾸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368-369)

보전(保全)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연의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보전을 지지하는 보전주의자는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닙니다. 환경 보호의 이유를 자연이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라고 꼽는다면 보전론자에 가깝습니다. 보존(保存)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기에 원래의 모습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릅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도 소중하니까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도 전부터 존재하던 아름다운 자연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보존주의자입니다.


(385-386)

인류는 현재 기후 변화라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소비를 줄이고, 나무처럼 자연의 회복 능력을 믿으며, 서로 협력하면서 작은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뛰어난 지능을 지난 과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과학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과학의 시선이 지금 이루어야 할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한 것에 머물 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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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하디자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 내일, 아니면 아마 모레 도착할 거야. 빈손으로, 난 항상 이 테라스로 돌아와, 발작 후 숨을 고르기 위해, 테라스에선 내 튜브가 훨씬 깊은 숨을 들이쉬어, 수영 선수처럼 난 숨을 크게 들이켜, 이 높이에서 나는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어. , 내 눈을 통해, 건물들 귀에 있는 바다를. 네 영원의 정원에서 바다가 안 보일 테지. 바다는 우아함 그 자체야, 그치? 그 깊은 목소리는 과거에서 와. 또 다른 삶을 살고 싶게 하거나, 바다처럼 다 옷을 벗고 싶게 만들지. 안 그러니? 제발 나 대신 그 냄새를 맡아 줘. 오 신이여! 지금 당장 바다로 달려가 그 세 알의 약 이야기를 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을 텐데! 언젠가 여기 숨어서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옆집의 이맘이 말하더라. ‘운영의 깃펜은 미치광이와 어린이, 그리고 잠자는 이의 행위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아마 내가 1999 12 31일 밤 저지른 일도 기록하지 않았겠지? 내가 자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난 어린아이였으니까, 그치? 내 행위를 따지고 들거나 날 심판할 사람은 아무도 djqtdji . 그런데 왜 이 짐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걸까? 왜냐하면 신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니까, 그의 깃펜으로도, 그의 희생 제물들도.


(149)

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난 이렇게 대답했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아마도 역사가 우리에게 주지 않은 천국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굶주린 신에게 먹을 걸 바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우리 어머니들의 자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식민 통치자들이 떠난 이후 땅과 농장과 살림살이를 나누기 위해서였을까. 이십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어. “이 전쟁은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시험지가 물었어. 십 년, 아니면 거의 그만큼.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불행은 날짜를 지워버리고, 절대로 못 박지 못하게 하지.


(158)

, 작은 붉은 별아. 기억이란 게 좀 그래. 들여다보고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해지기 시작하지. 너의 것이 아닌 다른 것에서 이야기를 훔쳐 오기도 하고, 마치 세물리나를 먹은 듯 점점 더 부풀어 오르기도 해. 혹은 꺼져 가는데, 그 소멸을 막기 위해 무엇을 지어 내야 할지 넌 모르지. 흙길을 달리다 보면, 발자국들이 다 뒤섞여, 살해자, 구해 준 자, 네 부모, 네 친척들, 그리고 너의 첫 번째 어머니, 그리고 두 번째 어머니의 발자국들 모두, 야자수 가지로 뭘 해야 할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 사람들은 내가 뭔가 하길 바래. 흐릿하게 지우고, 비켜 가고, 그 거대한 나뭇가지를 던지고 웃음을 지으면서, 한 손은 내 목구멍에 대고 피를 멈추게 하고 또 한 손은 언니 목에 대라고? 웃으면서 나뭇가지를 보여 주고, 전쟁 여걸이 된 걸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라고? 한데, 어떤 전쟁? 우리 반에서 그 늙은 영웅은 한두 번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좀 화가 난 것 같았어. 그자 코 바로 밑에다 내 괴물 같은 얼굴을 들이대니 말이야. 이어 그는 막 태어난 사람처럼 하얀 이를 과하게 드러내고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어.


(185)

겨울철 두 마을 사이 어딘가에 파묻힌 물처럼 난 얼어 붙었어. 만일 내가 눈을 뜨면 도살자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그의 칼날이 아직 나를 완전히 관통하지 않은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멀리서 벌어진 축제들을 떠올려. 그리고 멀리서, 엄만 또 노래를 해. 멈췄다가, 밤 속에 오래된 탄식을 다시 이어가고 있어. 호랑이 담요에선 오줌 냄새가 탄식을 다시 이어가고 있어. 호랑이 담요에선 오줌 냄새가 날 거고, 이 모든 것은 다 끝날 거야. 아랫마을에서는 한마디도 없어. 그 마을 주민들이 내 다리 위를 개미들처럼 기어 올라와. 목이 그어지면, 기다려야지. 슬슬 잠이 올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모든 감각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이젠 손이 없다는 느낌이 들고 내 발은 있지도 않은 계단 위에서 움직여, 마을에서만 봤던 계단 위에 난 누워 있어, 비틀거리며. “삼십삼, 삼십사, 삼십오……” 만일 내가 눈을 뜬다면, 그는 날 향해 다시 올 거야. 만일 내가 눈을 감은 채 있다면? 언니가 그에게 자꾸 뭐라고 되풀이해 말해. 설명할 수 없는 물 속에 잠긴 목소리. 엄마가 노래하는 걸 멈춰.


(186-187)

1999 12 31일 밤, 이슬람 무장 단체의 카티바들은 우릴 처벌하기로 결정했어. ‘낯의 국가의 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지. 한 달 전, 우리 마을의 전기가 끊겼어.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만들고 부품을 용접하는데 쓸 전기를 그들에게 제공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어. 우린 어둠과 차가운 태양 사이에 내버려졌어. 한겨울은 고통스러웠고, 우리는 돌처럼 굳어 각자의 침묵 속에 몸을 감싸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자매들, 아버지들, 어머니들, 불빛에 비쳐 붉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이건 우리에게 겨누어진 무기가 뭐냐에 따라 이쪽저쪽을 오가는 놀이였어. 우린 긴 전쟁의 끝에 도달해 있었고, 나라 안에서는 시간도 감각도 뒤엉켜 널브러져 그들끼리 서로 죽였어. 어떤 이들은 신에, 신의 약속에 절망해서, 또 어떤 이들은 전우에 대한 배신과 의심으로 피폐해져서.


(231-232)

1990년의 전쟁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 여기선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날짜 하나하나, 이름 하나하나, 나는 떠올려, , 전부는 아니지, 수만 명 전부는,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불쌍한 실종자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어. 그게 진짜 이야기야. (그의 목소리가 판결처럼 진중해져.) 20만 명의 사망자가 있는데 그걸 다룬 책도, 영화도 없어. 목격자도 없대. 침묵뿐! 너도 아무 말 안 하는 거냐! 학교에서 내전에 대해 안 가르쳤지? 이걸 보는 사람들한테 넌 뭐라고 말해? (그는 내 튜브를 또 가리킨다.) , 그 전쟁이 시작됐을 때 스물다섯 살이었어. 그 전쟁은 바트나에 있는 우리 서점에서 시작됐어. 정말이야, 1992 3월에.


(244-245)

넌 알아? 넌 십 년간의 전쟁 동안 우리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 그 놀라운 표식을 지니고 있잖아. 2000년대에 화해법이 시행되자 마키에서 내려온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요리사라고 주쟁했어. 언론 앞에서 그 말을 반복하라고 그들에게 지시한 건 바로 국가였지. 그래야만 실제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입증된 자들만을 처벌하는 사면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거든.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에서 그들은 모두 자신을 요리사라고 밝혔어. 슬픈 눈으로, 흰 손을 내려다보면서. 냄새 나는 수염과 굶주린 낯빛으로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얘기했지만, 눈빛은 차가웠어. , 우리 아버지만 아직 살아 계셨다면! 아마 껄껄 웃음을 터뜨리셨을 거야. 늘 라마단 초승달처럼 가늘고 슬픔 어린 미속로밖에 웃지 못하던 분이었는데. (그래, 나의 후리, 그 달엔 해가 뜨는 순간부터 지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 달이 점점 가늘어지고 수척해지는 건 그래서야.) 아버지는 그 도깨비들을 이겼을 거야. 그들을 조롱하고 손가락질했을 거야. 산속의 아지트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참칭해 큰 소리로 명령하면서 아버지에게 손가락질했던 것처럼. 아버진 자랑스러우셨을 거야. (놀라던 목소리가 이젠 기쁨으로 변해 있어. 그러더니 한참을 침묵하네. , 그래, 널 죽이는 것도, 널 살게 하는 것도 내겐 괴롭다. 결정은 우리 언니가 할 거야. 우린 언니의 나라로 갈 거야, 땅속으로, 뼈와 기도가 있는 그곳으로.)


(304)

이제 그 화해랑 사면 투표 이후로, 개들은 대낮에도 버젓이 돌아다니고, 기도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깔보듯 훑어본다니까. , 그들이 전쟁에서 이긴 거야. 물론 군인들도 이겼어. 오직 죽은 사람들만 진 거야.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20만 명만 진 거야.


(309)

사람은 생애 첫날을 기억할까? 그 피를? 그 비명을? 배가 힘을 주고 밀어내는 수축 감각을? 그래, 난 기억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간까지 기억하는 행운을 가졌지. 그래, 내 얼어붙은 가슴 속에 품은 내 신비로운 비취야. 나는 알라의 두 가지 비밀, 오직 그분만이 답하실 수 있는 두 가지 비밀에 손이 닿는다. 나는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야. 거꾸로 뒤집힌 존재, 신비한 물고기야. 2000 1 1, 딱 떨어지는 그날에 태어났어. 그리고 바로 전날인 12 31일에 죽었다. 딸아, 맹세하건대, 쿠란에 기록된 어떤 예언자도 이렇게 두 날짜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없을 거다.


(375-376)

그 이른바 학살들에 대해 당신이 주장하는 것에 증거가 있나요? 없어. 그저 근거 없이 떠도는 말과 이야기,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위협하는 허황된 이야기들뿐이지. 당신의 책에 있는 것처럼. 게다가,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뭘 출판하고 서점에서 뭘 파는지. 요리책과 예언자에 대한 책들을 판다고 하던데. 거기까진 좋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당신은 다시 좋은 시민, 바트나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러더니, 이 조롱꾼은 마치 가지 보고서를 마무리하듯 말했어. “당신 다리는, 사람들이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오토바이 사고라고 하던데. 치료는 받고 있나요? 보험 처리를 하면 큰 수표 몇 장 받게 될 거예요. 내가 알아봐 줄 수도 있어요. 자선 차원에서.” 그는 턱을 홱 돌려 전하기 한 대를 가리켰어. 나는 그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 난 그의 금시계를 응시했고, 그의 큰 손이 나에게 당장 이 사무실을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어. 그날 밤 나는 다리가 너무 아팠어. 썩은 이처럼 쑤셔 댔지. 나는 머릿속으로 그 다리가 내미는 자기 쪽 이야기와 싸워야 했어. 새벽이 되자 다리도 결국 내 논거에 굴복했지.


(453)

내 이름은 함라예요. 가끔은 솔직히 내 이름이 정말 그런가 의심스럽기도 해요. 여러 번의 삶과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 얼굴 하나는 부족해요. 동생, 내가 바라는 건 이거예요. 우리를 위한 권리를 얻어 주는 거. 폭행당한 여자들,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가진 여자들, 고발당한 여자들,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여자들, 납치당한 여자들, 실종된 처녀들의 권리를…… 이제 내게 남은 명예는 단 하나, 바로 내 딸뿐이에요. 난 딸아이가 결혼 준비하는 걸 돕고,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자식도 많이 낳길 바래요. 그 아이 결혼 결혼식에 참석해 눈물을 쏟지 않고 춤추고 싶어요. 가서 내 이야기를 해요. 올리브 나무에게, 돌에게, 길에게도 물어봐요. 날 와서 다시 찍어 줘요. 내 딸이 결혼할 때까지는 살고 싶어요. 내가 그 애 혼수품을 만들어 온 게 몇 년째예요. 그 아인 긴 핼렬과 수많은 여가수들의 노래 속에서 행복할 거예요. 가끔은 잘생긴 청년들이 우리 창문 밑을 지나가기도 해요.


(461)

네가 굳이 와서 숨 쉬고, 살고, 하루하루 날을 헤아리고 싶어 하는 이 나라에서, 여자는 큰 소리로 기도할 권리조차 없다. 애도하며 흐느끼는 소리도, 발꿈치로 인도 밟는 소리도 들려선 안 된다. 여자는 노래를 하거나 모스크에서 설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소리는, 나의 오래된 달님아, 쾌락의 억눌린 비명과 금세 바로 잊히는 출산의 신음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 위에서 벌거벗은 그 두 순간, 우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언제나 남자들의 수치심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502)

아무 손도 대지 않은 진실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마침내 몸을 던질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번에는 내 속으로 잠수하듯 뛰어들어, 내 상처를 다시 열고, 꿰맨 자국을 뜯어야 했다. 그리고 내 미소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 네가 내게 목소리를 되돌려줄 거야. 난 속으로 속삭였다. 나는 한 권의 책이야, 행복한 결말을, 아니 적어도 진실한 결말을 찾고 있는. 안 그러니? 이번에 나는 천 개의 인격이 되어 내 균열 속으로 뛰어들어, 내 안 깊은 곳으로 내려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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