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아일리시, 다른 때였다면 불법 구금으로 고등법원에
고소했을 겁니다, 래리를 꺼내왔을 거예요. 하지만 국가비상법
때문에 인신보호영장(불법 구금 방지 목적으로 행하는 구속적부심사 제도)이
중지됐어요, 국가가 특별 권력으로 사실상 사법부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164-165)
날씨에 기억이 있다. 하늘에 무르익은 봄이, 날렵한 제비가, 온통 새까만 칼새가 있다, 돌아온 새를 보면서 세월이 흐르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열매를
당연하게 여겼던 순수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군가 내미는 열매를 받아서 맛을 보지도
않고 깨물어 먹었고, 아무 생각 없이 씨방을 버렸다. 아일리시는
피닉스 공원에서 혼자 걸어 다니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눈앞에 자기 생각밖에 보이지 않는다. 잎이
넓은 나무들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위를 올려다보며 저 나무들 밑에서 흘러간 시간을, 나무들이 나이테로 기록하는 세월을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가고 그녀는
붙들 수 없다, 세월이 계속 흘러가지만 떠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끌고 간다.
(168)
그녀는 집 안을 통과하는 달(月)을 지켜본다. 멍든 새벽빛이 요람 안의 벤에게 닿고, 제멋대로인 그 빛이 어린아이처럼 아일리시에게 딱 달라붙어 자는 몰리에게 닿는다. 새벽이 왔지만 낮은 달아났다. 그녀는 이제야 깨닫는다. 어둠을 덧없게 만드는 빛을 거짓이고 진실하며 흔들림 없는 것은 밤이다. 아이들을
품 안으로 불러들이지만 자신의 위로는 거짓이고 이 집은 피난처가 아님을 안다.
(210)
인생이라는 세월에 먼지가 쌓이고, 그 세월이 서서히
먼지로 변한다,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겠지, 한쪽 눈만 감아도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 래리가 곁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지만 마주치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다, 아일리시는 양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캐럴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다고,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고,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여움은 희망이라는 옷을 입은 슬픔이다.
(225-226)
뉴스가 나오자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라디오를 꺼버리고 생각한다, 이건 뉴스가 아니다, 뉴스가 전혀 아니다, 모래주머니에 나른하게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군인을 집 안에서 내다보는 민간인이 뉴스다, 모래주머니에 기대어놓은 소총이 뉴스다, 군인의 깔깔 웃는 입, 아스팔트에 아무렇게나 버린 패스트푸드 포장지와 종이컵이 뉴스다, 저
위쪽 거리에 살다가 떠나기로 결심한 은퇴자 부부가, 그들이 진입로에서 하는 말다툼이, 차에 실을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손을 펄럭거리는 아내가, 굳은 표정에서
아내를 보는 남편이, 아내가 아이처럼 끌어안은 검정 가방이, 그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 뉴스다. 자동차에 실린 모든 짐이, 남편이
올라앉아서 겨우 닫는 자동차 트렁크가, 마지막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진입로 대문이, 밤이 와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뉴스다. 일주일 동안 빨간불이었다가
결국 꺼져버리는 신호등,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할 자동차, 점점
쪼그라드는 거리의 분위기, 셔터를 내린 가게들, 합판을 댄
창문들, 쉰 목소리로 밤새 짖는 개들, 통화가 너무 위험해서
이제 전화하지 않는 장남,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뉴스다.
(235)
아빠는 늘 너와 함께 있어, 아일리시가 말한다. 떠나 있어도 마찬가지야, 그게 그 꿈의 의미야, 아빠는 항상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집에 온 거야. 왜냐면
아빠는 늘 네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아빠는 지금 여기서 팔로 너를 감싸고 있어, 아빠는 항상 여기 있을 거야. 왜냐면 어렸을 때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아빠는 너를 너무 많이 사랑했어. 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을 빼앗거나 지울 수는 없어, 나한테 설명을
묻지는 말고 그냥 진실이라고 믿어, 그게 진실이니까, 그게
인간 마음의 법칙이야.
(307)
아릴리시는 주먹을 쫙 쥐고 발끝으로 땅을 민다. 살아서
아이들을 보고 싶다. 총격이 멈추면서 머리 위에서 깊은 정적이 열리고 반란군 병사가 소리친다, 아일리시는 손을 흔들어서 살아 있다고 알리기가 두렵다, 그녀는 세상과
절대적으로 맞닿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가 갑자기 죽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아스팔트에 박힌
자갈을 본다, 수십억 년 전에 열기가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지구의 돌,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가야 한다, 내면의
힘이 몸속에서 퍼지고 눈을 감자 지나간 세월과 아직 살지 않은 시간이 보인다, 갑자기 무언가가 아일리시를
일으켜 움직이게 만든다, 그녀는 달리는 몸이 된다.
(354-355)
예언자들의 노래는 그 어느 때나 항상 반복되던 똑 같은 노래임을 깨닫는다, 칼의 도래, 불에 삼켜지는 세상,
정오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태양, 어둠에 잠긴 세상, 곧
눈에 보이지 않도록 쫓겨날 사악함에 대해서 예언자가 길길이 날뛸 때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분노,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종말이다, 세상은 어느 곳에서는 늘 끝나고 또 끝나지만 다른 곳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종말은 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상의 종말이 당신 나라에 찾아가고 당신 동네를 방문하고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머나먼 경고, 짤막한 뉴스, 전설이 되어버린 사건들의 메아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