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녀는 자기 삶에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아이들과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다. 프리먼이 아무리 험상궂게 찌푸리고 협박해도 괴로워하는 그 어미를 완전히 조용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일라이자는 내내 한없이 애처롭게, 자기들 세 명을 갈라놓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자기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듭거듭 호소했다. 아까 한 약속들 만약 그 세명을 함께 사주기만 한다면 정말 얼마나 충성하고 순종할 것인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밤낮으로 얼마나 열심히 일할 것인지 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세 명 모두 살 만한 돈이 없었다. 거래는 성사되었고, 랜들은 혼자서 가야 했다. 그러자 일라이자가 아들에게 달려갔다. 뜨겁게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고, 얼마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는 내내 소년의 얼굴 위로 비처럼 그녀의 눈물이 떨어졌다.


(200-201)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주인들도 있을 것이다-헐벗고 반쯤 굶주린 비참한 노예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잘 입고 잘 먹고 행복한 노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각 목격한 그런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용인하는 제도는 잔인하고 불공평하고 야만적인 제도이다. 비천한 삶을 있는 그대로, 또는 그렇지 않게 묘사하는 소설을 쓸 수는 있다-어쩌면 진지한 척 엄숙한 태도로, 무지라는 축복을 자세하게 열거할 수도 있다-노예 생활의 즐거움에 관해 안락의자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어 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밭에서 노예와 함께 일하도록 해보라-노예들과 오두막에서 같이 자고-곡물 껍질을 같이 먹도록 해보라.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사냥을 당하고, 짓밟히도록 해보라. 그들은 전혀 다른 아이기를 갖고 돌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가련한 노예의 마음을 알도록 해보라-노예의 비밀스러운 생각들-백인이 듣는 곳에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생각을 알아보도록 해보라. 밤에 깨어 있는 노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도록 해보라-<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관해 노예와 진심 어린 믿음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해보라. 그러면 노예들 100명 가운데 99명은 충분히 똑똑해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 자신과 똑같이 열정적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227)

이제 나는 어디서 구출을 기대해야 할지 암담했다. 마음 속에선 희망이 솟다가도 짓밟히고 시들어 갔다. 내 삶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이보다 일찍 늙어 가는 것이 SRUWUTEK. 앞으로 몇 년의 시간과, 고된 노동과 슬픔, 그리고 습지의 독기 어린 공기가 그 효력을 발휘할 것이었다-나를 무덤으로 떠밀고, 썩어 잊히게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땅바닥에 엎드려 말로 다 하지 못할 비통함으로 신음하는 것뿐이었다. 구조의 희망은 내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을 던져 준 유일한 빛이었다. 이제 그 빛이 흔들거리고, 약해지고, 작아지고 있었다. 이제 실망의 한숨 한 번으로 그 빛은 완전히 꺼지고, 나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삶의 끝으로 가야 할 것이었다.


(254-255)

제가 말씀드리죠, 엡스.” 배스가 말했다. “그건 완전히 틀렸어요-완전히 틀린 거란 말입니다-거기엔 어떤 정의도 어떤 당위성도 없어요. 설사 내가 크로이소스만큼 부자라고 해도 노예는 한 명도 두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다들, 특히나 빚쟁이들은 더 잘 알겠지만 나는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기가 있죠-신용 대부 제도 말입니다-그건 협잡입니다. 신용 대부가 없으면 빚도 없어요. 신용 대부는 사람을 유혹에 빠지게 만들죠. 현금 거래만이 사람을 악에서 구해 낼 겁니다. 어쨌든 <노예제> 예기로 돌아가 하나 물어볼까요. 요점만 말해서 댁은 댁의 깜둥이들에 대해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무슨 권리라니!” 엡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돈을 주고 그들을 샀잖소.” “<물론> 그러셨죠. 법은 선생이 노예를 보유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니까요. 하지만 법한텐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래요, 엡스, 법이 가지는 <거짓말쟁이>라는데, 거기에 진실은 없는 거죠. 법이 허락한다고 해서 전부 다 옳은 걸까요? 만약에 사람들이 댁의 자유를 빼앗고 댁을 노예로 만드는 법을 통과시킨다면 어떨까요?”


(257)

배스가 말을 받았다. “내가 뉴잉글랜드에 있었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나와 똑같았을 겁니다. 노예제는 부당하다고,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겁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속하며 붙들어 두는 걸 허락하는 법이나 헌법에는 어떤 이성도, 어떤 정의도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물론 자기 재산을 잃는 건 힘든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댁의 자유를 잃는 것과 비교하면 별로 힘들지 않을 겁니다. 아주 공평히 말해서, 댁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저기 엉클 에이브럼의 권리보다 조금도 크지 않아요. 피부가 검고 흑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 지류에는 우리 둘만큼 피부색이 하얀 노예들이 많은 걸까요? 영혼의 색에도 차이가 있을까요? ! 체제 전체가 잔인하고 터무니가 없어요. 댁은 깜둥이들을 갖고 있다가 교수형에 처해질지도 모르지만, 저라면 루이지애나에 가장 좋은 농장을 갖고 있대도 한 명도 소유하지 않을 겁니다.”


(307)

그 아늑한 작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나를 맞은 건 마거릿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집을 떠날 때, 그 아이는 겨우 일곱 살, 장난감을 갖고 놀며 조잘거리던 작은 소녀였다. 이제 그 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랐고-결혼해서, 눈이 빛나는 한 소년을 옆에 데리고 있었다. 노예가 되어 불행하게 살았던 할아버지를 잊지 말라고, 마거릿은 자기 아이에게 솔로몬 노섭 스톤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자, 마거릿은 감정이 북받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엘리자베스가 방으로 들어왔고,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앤이 호텔에서 달려왔다. 그들은 나를 껴안았고, 눈물범벅이 되어 내 목에 매달렸다. 그러나 설명보다 상상이 더 나을 수 있는 장면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덮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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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습니까? 내가 멍청한 것 같아요? 내일 태양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밤새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짓은 안 합니다. 태양이 스스로 그 사실을 증명할 테니까요. 가끔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뮤얼이 연기를 망친 건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거기에 익숙해지세요. 또한 당신이나 내가 떠들어댈 수 있는 어떤 문제보다도 더 잔인한 문제들을 버질 스스로 안고 있기도 해요. 곧 그 괴물들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혼자가 되자마자. 걱정 마세요.” J.C.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고삐를 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


(153)

내 삶을 돌아보면 볼수록 서부영화의 정교한 세트장처럼 보였다. 언뜻 보면 모든 것이 고풍스럽운 진짜 같고, 수수께끼와 가능성이 가득한 것 같다. 방금 바람에 불어온 고운 흙먼지, 나무로 만든 낡은 스윙도어, 물결무늬처럼 일그러진 유리창, 손으로 그린 간판, 이 모든 것이 모험을 약속한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늙은 카우보이들이 포커를 치고 비극적인 술집이 아니다. 그냥 합판으로 지은 빈 건물일 뿐이다. 난방기 옆에서 기술자가 토마토수프를 끓이면서 곰 오양 젤리를 한 입 먹고, 비타민 C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여기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 그냥 몇 사람이 여기저기 서서 라테 한 잔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248)

나는 예술을 위한 전쟁에 나선다. 세상이야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세상이 널 실패작이라고 단정할지도 모른다. 네 가슴에 주홍 글씨를 꿰미 달고, 너를 가리켜 천박한 협잡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등 뒤에서 속삭이듯 조롱을 던지는 소심한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저들이 너를 미워해서, 라디오 토크쇼에 나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수다를 떨어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267)

우리는 악기들을 완벽히 조율한 오케스트라였다. 아이폰에 중독되고, 컴퓨터에 집찾하고, 트위터와 포르노에 열중하고, 연극을 싫어하는 십 대들이 객석에서 최면에 걸린 듯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 셰익스피어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이들이다. <뉴욕타임스>가 아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기만 한다면, 작품이 스스로 살아난다. 객석의 아이들은 척추를 울리는 오르가슴처럼 이 연극을 느끼고 있었다.


(312)

에드워드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비단처럼 매끄럽고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서워할 것 없네. 자네가 공연에 한번 빠지더라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자네도 마찬가지고. 자네 지금 자신의 두려움에 지고 있어. 자넨 이 공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닐세. 나도 그렇고, 버질도 그래. 공연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공연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아. 대역들의 리허설을 봤는데, 특히 스코티의 연기가 아주 좋더군.”


(314)

극장에서 연기하는 것이 나한테 이렇게나 고귀한 직업인 이유가 바로 이거야. 무대에서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애쓰다 보면, 인생에 집중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네. 모든 환상과 혼란에서 벗어나 명징한 현재에 살게 되는 거지. 우리 인생은 현재에 집중하려고 우리가 매 순산 기울이는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어. 진정한 현재를 사는 능력이 커질수록 철이 드는 거야. 무대는 그런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플랫폼일세.”


(316-317)

모든 결정이 중요하네. 어떤 때는 시간이 휙휙 지나가고 달력의 페이지가 달라져도 우리는 매일 하는 사소한 일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어아니면 모두 미리 예정된 거라고 속이거나. 하지만 아니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딛고 걷는 걸세. 햄릿의 대사를 연습한다면, 아주 많이 연습한다면, 무대에서 때가 됐을 때 그 대사를 관객에서 잘 전달할 수 있겠지. 연습하지 않으면 전달하지 못할 테고. 운은 의도의 잔재야. 아버지가 아들 옆에 있어주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그 아들이 무사히 자랄 가능성이 높아. 알겠나?” 그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병원의 하얀 불빛이 검버섯이 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내 말은, 건강한 결혼 생활을 하려면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되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건자네 노력만으로 충분하다는 거네.”


(325)

마흔 살까지 기다려 봐, 똘똘이. 그러면 알게 될 거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인생은 완만한 경사의 쭉 뻗은 오르막길이 아니야. 지식과 재능을 조금씩 쌓아서 결국 부처처럼 깨달음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고. 아주 징글징글한 습지야. 진창이야. 발 한번 떼기가 내내 비틀린 길이었다가.” 이지키얼은 완전히 평온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333)

끝났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 배우 서른아홉 명이 땀방울이 무대 위에 문자 그대로 흩뿌려져 있고, 나무로 된 세트 곳곳에 누군가가 긁어서 표시한 자국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 쓰레기통행이었다. 의상의 솔기에 붙여두었던 우리 각자의 이름이 뜯겨나갈 것이고, 의상은 대여점으로 돌아가 언젠가 또 다른 배우가 입게 될 날을 기다릴 것이다.


(340)

지난 몇 달 동안 내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데도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새로 내리는 눈의 가벼움 속을 걸으면서 나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지만 헤어질 거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녀 같은 여자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나를 바친 것. 이 아이들을 얻은 것은 똑똑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아이들의 아빠가 된 나는 행운아였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모종의 이유로 나를 헝클어놓았기 때문에 곧게 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우리 결혼 생활을, 우리 사랑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깃털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며 우쭐거리는 공작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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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객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에서 방관자가 될 수 있냐고, 손 놓고 우리 인생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냐고, 없죠? 근데 여행을 가면 남의 인생의 객이 되어서 그들의 인생을 구경할 수 있는 거야. 방관해도 된다고. 여행지니까, 남의 인생이니까. 그러니까 여행을 가면 맨날 인생에서 주인이 돼야 하네, 주체가 되어야 하네, 그런 부담 좀 덜고 한 발짝 떨어져서 인생을 좀 느긋하게 관망하고 즐길 수가 있는 거라고. 인생에서 방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그래서 여행이 좋은 거야.”


(180)

골 빠지게 애써봐야 결국은 한두 개, 많아 봐야 몇 가지 깨달음 안에 갇혀서 사는 거예요. 표현만, 말만, 단어만 좀 바꿔가면서, 지가 깨달은 그 몇 가지 안에 갇혀서 답답하게 사는 거라고. 그러니까 인생이 이렇게 지루한 거야. 결국 반복일 뿐이니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하고, 애써서 깨닫게 되는 게 결국 인생은 뻔하고 지루한 반복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라고. 그걸 깨닫기 전에는 다들 인생이 졸라, 뭔가 있을 줄 알지.”


(332-333)

나는 노인이 돼서,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좋겠어. 식당은 아주 붐비지는 않고, 그렇지만 단골들이 있어서 문닫을 걱정은 없어. 그래서 구석 자리라면 종일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아. 간단한 요기도 할 수 있지만, 주로 커피와 차를 팔아. 근데 게다가, 술도 내어줘. 여름엔 시원한 술, 겨울엔 따뜻한 술, , 가을엔 대충 사장 맘대로 술, 그런 식당엘, 오후에 찾아가서, 앉은 채로 졸아. 배를 먼저 채우고 커피를 기다리는 그사이를 늙은 몸이 못 견디고 조는 거야. 고개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아무도 깨우지 않아. 귀에 익은 소음에 스스로 깨어보면 식당은 여전히 적당히 분주하고, 앞에는 커피가 적당히 식어도 맛있어. 어느 날은 식당이 끝날 때까지 졸고, 가까운 지인이기도 한 사장이 나를 깨워서 집으로 보내주는 거지. 그런 식당이, 늙었을 때는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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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 나라 모든 남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릴 때는 모두가 참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찬성의 외침이 울렸다.

법률에서는 이 나라 남자의 절반 이상에게 투표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에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27)

누가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을 내릴 때 참여 못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학살당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92)

모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신문들 대부분은 여전히 솜 강 전투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척하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인 평가를 하려 들면 애국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낙인을 찍죠. 노스클리프 경은 정말로 군국주의 독재체제에서 살고 싶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 국민은 전쟁이 별 성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129-130)

이번에는 청중석에서 아까와 다른 편이 환호성을 질렀고, 피츠는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설이 보기에는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었다. 모드가 일어서서 그 점을 지적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건 어느 한 나라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독일에 대한 비난은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았고, 군국주의에 빠진 우리 언론은 그런 거짓을 더욱 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마치 그 일이 정당한 이유 없이 벌어진 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육백만 군대가 독일 국경으로 이동한 사실은 잊어버렸습니다. 프랑스가 중립선언을 거부했다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몇몇이 야유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소리를 들으면 갈채를 보내기 어려운 법이지. 에설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독일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럽의 안정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벨기에의 정의나 독일 군국주의의 처벌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실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싸우는 겁니다.


(244)

블라디므로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으로 알려진 그는 마흔여석 살이었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몸단장에 허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나머지 깔끔하지만 고상하지는 않은 차림이었다. 한때는 머리 전체가 붉었지만 일찍 숱이 줄기 시작해 지금은 주변에 머리칼의 흔적만 남은 반짝이는 대머리였다. 세심하게 다듬은 반다이크 수염은 연한 적갈색에 회색이 섞여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발터는 그가 매력도 없고 잘생긴 외모도 아니어서 그리 특별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393-394)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책 한번 본 적 없는 조지 배로는 자신이 데카르트나 렘브란트, 베토벤보다 더 뛰어나다고 느꼈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었다. 그들 모두 학교를 다니는 내내 과장된 선전을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영국 군대의 승리만 가르칠 뿐, 패배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런던의 민주주의는 가르치치만 카이로에서의 압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영국에서 실현되는 정의는 배우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행되는 태형이나 아일랜드의 기아, 인도에서의 학살은 알려주지 않았다. 가톨릭 신도가 신교도를 화형에 처한 일은 배우지만, 신교도 역시 기회만 있으면 가톨릭 신도에게 똑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빌리의 아버지처럼 선생들이 세상은 공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아버지는 거의 없었다.


(497)

이른 새벽, 프랑스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거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차는 작은 마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역플랫폼과 철도 옆 도로에 모여 기차를 지켜보는 모습에 그는 깜짝 놀랐다. 밖은 어두웠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등 불빛 아래서 또렷이 보였다. 남녀와 아이들이 수천 명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리는 대신 매우 조용히 있었다. 남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자를 벗었고, 경의를 표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거스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세계의 희망을 싣고 지나가는 기차를 보기 위해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539)

빌리는 계속 말했다. “그럼 이제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겠습니다. 이 전쟁은 영국 의회에서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모든 내용은 작전상 보안이라는 허울에 가려져 영국 국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군이 떳떳하지 못한 비밀을 숨길 때는 쓰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싸우고 있지만 전쟁은 선포된 적이 없습니다. 영국 수상과 그의 동료들은 독일 카이저와 그 밑에서 싸운 장군들과 똑 같은 처지입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제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빌리는 자리에 앉았다.


(563)

모드는 마침내 거울의 방에 들어섰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방들 중 하나로, 크기가 테니스코트 세 개를 붙여놓은 정도였다. 한쪽 벽에는 열일곱 개의 창문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열일곱 개의 아치형 거울이 창을 비추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첫번째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에게 알자스로렌 지방을 포기하겠다는 서명을 강요했던 장소라는 점이었다. 이제 독일은 바로 그 원통형의 둥근 천장 아래서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미래에 입장이 바뀌어 복수할 날을 꿈꾸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남에게 수모를 주면 머지않아 돌아오는 법이지. 모드는 생각했다. 여기 조인식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632)

저는 그런 시절이 지났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군대뿐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아버지가 설교할 때처럼 격정적인 흥분이 묻어났다. “이번 선거는 미래에 대한 것이고, 이 선거로 우리 아이들이 어떤 나라에서 자랄지 결정됩니다. 우리가 자랐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노동당은 혁명을 원치 않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를 보아온 결과 혁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진정하고 중대하고 근본적인 변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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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0)

발터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애국자였지만 독일이 현대화되고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조국이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이룬 업적, 근면하고 능률적인 독일 국민들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발터는 독일이 많은 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분방한 미국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교활한 영국인들로부터 외교를, 유행을 선도하는 프랑스인들로부터는 우아한 삶의 기술을 배워야 했다.


(265-266)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칠일 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사건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 발터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하긴 보스니아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다들 황태자가 암살당한 일에 놀라긴 했지만, 그 일이 세계 전체에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약간 당황한 정도였다.

발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암살이 어떤 징조인지 정확히 알았다. 이번 사건으로 독일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런 위험한 순간 조국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 발터 같은 사람들의 역할이었다.


(275)

내 운명은 두 군에 달렸군. 발터는 생각했다. 러시아의 차르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한쪽은 어리석었고 다른 한쪽은 늙어빠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드와 나,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유럽인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이것이 군주제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고 뭔가!


(376)

세계 대부분의 의회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양원제였다. 피츠는 지위가 높은 귀족과 주교,, 고위 판사로 이루어진 상원에 속했다. 하원은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하원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원과 하원 의회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지은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웨스트민스터 공전에 모여 회의를 했다. 시계탑의 시계는 빅벤이라 불렸는데, 피츠는 빅벤이 원래 탑 안에 있는 커다란 종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꼬집길 좋아했다.


(410)

지난 이 주간 그런 일이 반복되었죠. 모드는 절망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나라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이 묵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뒤로 물러설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러시아는 협상하는 대신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국제평화회담에 나와 문제를 해결하길 거부했다. 프랑스는 중립으로 남을 기회를 얻었지만 일축했다. 그리고 이제 영국은 방관자로 남을 수도 있는 쉬운 길을 두고 전쟁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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