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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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게. 몇 달 전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보고 읽어볼 만하다 생각해서 구입했단다.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고 그의 책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이 책은 책제목을 통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려준단다. 지은이는 자신의 어머니의 경험을 통해서, 돈이 넉넉한 여성이 아닌, 보통 사람 서민의 여성의 노년이 어떻게 살아가다가 죽음에 이르는지 알려주고 있단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년의 생활, 그것도 혼자 또는 부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단다. 노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를 제대로 갖춘 나라도 드물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미래보다 현재를 살아가기 급급하게 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지은이의 어머니의 이야기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미래 이야기일 수도 있단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보통 아들과 다르단다.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동성연애자, 그러니까 게이다. 랭스에 혼자 사시는 늙은 어머니는 어느덧 87살이 되었어.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지내고 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다정하신 분은 아니었어. 생전에 폭력 성향이 강해서 오랫동안 어머니를 학대해서 어머니가 이혼 결심을 여러 번 하셨지. 어쩌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으셨는지 몰라. 하지만 그런 자유도 오래 가지는 않았어. 혼자 지내시다 넘어져서 응급실을 여러 번 가시게 되었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뼈가 약하셔서 넘어지는 일만으로도 큰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거든넘어지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부상으로 돌아가시기도 하거든

지은이는 더 이상 어머니가 혼자 지내시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양원으로 모시려고 했단다. 어머니의 집 근처 핌이라는 곳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 남동생 투더와 함께  어머니의 짐들을 요양원으로 옮기고 정리했어. 요양원에 입원시킨 날 디디에는 늦게까지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돌아왔단다.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보상이 요양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요양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몸이 좋아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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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9)

어머니 자신도 틀림없이 이런 쇠락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내심 확신하고 인정했다. 해결되지고, 개선되지도 않을 문제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내가 나아지면…” 또는 내가 회복되면…”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마치 생물학적인 사태의 추이를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쫓아버리려는 듯 말이다. 어머니는 무력감에 굴복하기 힘들어했지만 건강 상태가 좀처럼 저항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 , 어머니가 괜찮아지시면…” 또는 그래요, 어머니가 다 나으시면…”하고 대답했다. 사실 어떻게 자기 어머니에게 아뇨. 어머니는 회복 못 하실 거예요. 낫지 못하실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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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양원이라는 곳은 낯선 사람과 강제적으로 함께 지내야 한단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운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곳 생활이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요양원에서는 죽음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 배우고 체험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어. 유치원과 비슷하지만 미래가 없다는 차이가 있지. 이런 요양원을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익숙하고 편안한 자신의 집을 떠나 낯선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요양원을 누가 선택하겠어.

요양원에서 밖에 나가는 경우는 병원에 가는 일뿐 아닐까 싶다. 디디에의 어머니도 정맥염이 심해지셔서 걷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 병원에 가셨어. 하지만 병원도 노년들에게 그리 좋은 곳은 아니야. 디디에의 어머니도 병원에 갈 만큼 아프셨지만, 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셨어. 이것은 프랑스 공공의료시절의 문제점이라고 지은이는 비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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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01)
우리는 공공서비스 관할의 모든 부문에서 그랬듯, 돌봄 인력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의해 프랑스의 병원에서 얼마나 많이 감축되었는지 안다. 그 정책들은 언제나 강력한 비용 절감 계획을 작동시켜왔고, 지금도 그렇다. 병원 근무자들이라면 직종에 관계없이 프랑스의 보건 공공서비스가 파산 상태(다른 나라들이라고 썩 사정이 낫진 않다)에 다다랐다고 자주 강력하게 규탄해왔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고-반대로 사정은 계속 악화해, 프랑스 정부는 심지어 코로나19 위기 동안 병상 폐쇄라는 살인적인 정책을 추진했다-우리는 그런 상태를 거의 정상으로 받아들이며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듯 보인다. 기필코 이런 유혹에 넘어가선 안 된다. 지치지 말고 계속 분노해야 하며, 이 분노를 소리 높여 강하게 외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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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고통은 육체 건강의 문제만이 아니야. 정신 건강도 쇠약해지게 된단다. 가끔 헛것을 보거나 헛소리를 듣는 증상도 보이곤 해. 정말 쉽지 않은 생활이구나.

요양원의 재정이 넉넉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요양원의 재정은 부족하고, 인력은 늘 부족했단다. 자율성이 잃어버린 노인들의 경우 샤워나 용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도와주는 이들도 부족하다는구나. 그렇다고 더 좋은 요양원으로 모시기에는 돈이 너무 들어가니 그것도 어려워. 지은이 디디에도 자신의 어머니를 더 좋은 요양원으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어. 결국 삶의 마지막은 행복이 아닌 힘들고 불행하고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다가 마감하게 된단다.

 

2.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야.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기억하는 사람의 죽음이자, 친척들의 계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죽음이야. 어머니의 죽음은 자식들의 어린 시절의 죽음이고, 친척들과 관계의 죽음이란다. 그리고 엄마와 나만 주로 사용하던 언어들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언어의 죽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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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82)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암묵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머니를 통해 유지되어온 내 과거와의 연속성이 이제 끊어져버렸다. 혹은 몹시 느슨해져버렸다.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어떤 청소년으로 자라났는지에 얽힌 일화들을 앞으로 누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가족의 지형도, 조상의 계보도를 누가 내게 그려줄 수 있을까? (중략) 내 젊은 시절의 기록 보관자이자 역사가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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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노동자로, 평범한 어머니로 살아온 한 여성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이런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도 당연히 먼저 너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게 된단다. 아직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시지만, 역시 예년만 못한 건강으로 병원을 자주 가신다. 외출의 대부분이 병원이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단다. 인생의 황혼기라는 노년의 삶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아빠 또한 먼 미래 같지는 않구나. 삶의 의미를 찾기란 젊은 사람들도 찾기 어려운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이란 정말 어려운 것 같구나. 이 책을 통해 남아 있는 부모님의 삶, 아빠의 미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단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가는구나. 2026년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분의 1을 거의 다 채우고 있구나. 식상한 이야기지만,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에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며, 오늘 편지는 마친다.

 

PS,

책의 첫 문장: 그러니까 나는 핌(Fismes)에 두 번밖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그들에게 이제는 없는, 아니면 의존적인 고령자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수년 전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가 닥친 것, 그 때문에 아버지가 기약 없이 입원한 전문 클리닉에 매일 찾아가야 했던 것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끝나지 않는 기나긴 시련이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녀가 스무 살에 결혼한 이래 무언가 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에 처음으로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홀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이 들어 신체가 쇠약해짐에 따라 거동의 자유를 새로 방해받기 전까지 얼마 동안 되찾은 자율성을 여유롭게 누렸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난 그 손님이 자기 남편의 요양원 입소를 유사한 감상으로 환영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마침내 자유다!’라는 감상 말이다. - P43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가길, 혹은 진짜 자기 집을 되찾길 기다리며 다소 긴 기간 동안 임시 체류하러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영구히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인지는 안다. 블라디미르 장켈베비치는 이 라틴어 격언을 즐겨 인용했다. ‘죽음은 확실하나, 시간은 불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적시할 수 있다. 일단 그런 시설에 들어가면 ‘장소는 확실하다’고, 설령 시간이 아주 머지않은 듯 보인다 해도, 시간보다 훨씬 확실하다고. - P60

이 ‘전체주의적’ 성격은 매일매일 두드러져만 갔다. 어머니의 삶 전체가 구획되고 통제되었으며, 그녀를 대신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어머니는 자율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 사람으로서의 지위까지 상실했다. 그렇다. 탈인간화로 인해 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지경까지 다다른다. - P117

이 짧고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난 어머니의 이미지를 본다. 그녀는 버림받은 아이였고, 열네 살에 ‘무슨 일이든 하는 하녀’로, 가정부로, 공장노동자로 위치지어졌다… 그녀는 스무 살에 결혼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55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제 여든 살이 넘어서 자유를 발견했고, 모든 순간을 즐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녀를 책망할 권리를 가로챌 수 있겠는가? - P131

엘리아스가 쓴 이 말을 틀렸다고 하기란 불가능하다. "아직도 활기차고 가끔은 기분 좋은 느낌으로 가득한 자신의 몸이 느릿해지고 쉬 피로하며 어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다시 말해 노인들,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동일시는 다른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자신이 늙고 죽을 것이라는 관념을 극구 부정하려 하며 그에 저항한다." - P263

결국 근본에 있는 정치적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발언할 수 있는가? 이 기본이 되는 정치적 행위가 가장 극심하게 지배받고 박탈당하고 취약한 사람 가운데 그렇게 많은 이에게 여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면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 또는 어쩌면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그들에게 이제는 없는, 아니면 의존적인 고령자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말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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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24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단순히 주거지나 환경의 변화가 아닌 과거와 현재의 나로부터 완전히 뿌리뽑힘을 당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