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탐험가 마젤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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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누구냐는 상식 문제는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문제라고 생각해. 정답은 마젤란이잖니. 아빠가 어렸을 때도 이런 저런 퀴즈에 많이 나왔던 문제였던 것 같구나. 그런데 마젤란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나. 아빠는 마젤란이 어느 사람인 줄도 몰랐거든. 그렇다고 아빠가 그런 마젤란이 궁금해서 오늘 소개할 책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을 읽은 것은 아니란다. 이 책의 지은이가 아빠가 좋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라서 이 책을 읽은 거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이고,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들이 좋았단다. 그래서 이번에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을 읽은 거야.

이번 책 또한 무척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마젤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서는 마젤란이란 사람을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 하기야 그러니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시도했겠지. 이따가도 이야기하겠지만 마지막에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세계일주의 마무리까지 했을 텐데 그것이 조금 아쉽더구나. 자, 그러면 마젤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

이 책의 첫 문장 “일의 발단은 향료였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의 향료는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없으면 안 되는 상품이었단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 이후 인도와 이어지는 육로길이 막히게 되었고, 육로가 있어도 중간 중간에서 향료에 대한 엄청난 세금이 붙으면서 유럽 사람들은 육로길이 아닌 바닷길을 찾기 시작했단다. 그것이 대항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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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십자군전쟁은 종종 낭만적으로 묘사되듯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단순히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의도만은 아니었다. 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연합은 한편으로 홍해를 가로막는 봉쇄의 사실을 깨부수고자 했다. 유럽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위해 동양과의 무역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는 목적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 충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아오지도 못했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여전히 인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인도로 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또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싹튼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바로 바다였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르롤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쪽으로, 그리고 카보트가 라브라도를 향해 북쪽으로 떠날 수 있었던 대담함은, 그 무엇보다도 서양을 위해 간세도 물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고 인도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항로를 발견해서 이슬람의 패권을 꺾어놓고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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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이었는데, 1394년에 태어난 엔리크 왕자에 의해 전세를 바뀌게 된단다. 엔리크 왕자는 다른 책에서는 엔히크 왕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엔리크 왕자로 번역했단다. 엔리크 왕자는 포르투갈이 해양을 탐험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원을 했단다. 항해 학교를 세우고, 조선술, 천문학에 많은 지원을 했어. 그의 이런 노력은 성과로 나타나는데 처음으로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항로를 개척한 바르톨로 뮤 디아스도 포르투갈 사람이고, 인도까지 바닷길을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도 포르투갈 사람이었단다.

이런 분위기에서 콜럼버스가 인도 가는 길을 개척하겠다고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왕이었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요청을 거절을 했다는구나. 주앙 2세는 엔리크 왕자 같은 감각이 없었나 보구나.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국에 지원을 받아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일로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의 또 하나의 주역이 되었단다.

이런 대항해 시대가 한창이던 1480년경에 포르투갈에서 마젤란이 태어났단다. 마젤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고 하는구나. 마젤란이 기록에 처음 출현하는 것은 마젤란이 24살 때 포르투갈 함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래. 그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아프리카에서 치료를 받은 후 1507년 리스본에 귀향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함대를 타고 인도로 향했고 1509년 처음으로 인도에 도착했다는구나. 유럽에서 인도를 가려면 아프리카를 삥 돌아가야 하니 누군가는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도 없었으니 말이야. 그래서 서쪽 바다로 나아가면 더 빠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콜럼버스도 그런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가 신대륙을 발견했으니 말이야.

…

아무튼 마젤란은 인도에서 7년 동안 함대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여러 차례 위기를 맞고, 부상도 당했지만 끝내 살아남았단다. 마젤란은 전쟁에서 여러 가지 성과도 내어 상사로부터 신뢰를 받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장교로 진급하기도 했어. 인도에서 7년의 생활을 마치고 리스본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는 리스본은 번창하여 큰 도시로 변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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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는 이미 배가 벨렘에 입항할 때부터 놀라기 시작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할 때 그를 축복해주던 낡고 나지막한 교회 대신 이제 인도의 향료 덕분에 부강해진 조국의 첫 번째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사원이 완성되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엔 통행도 뜸했던 강에는 이제 돛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강변의 조선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더 장대한 함선들을 만들어내느라고 일꾼들이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깃발은 깃발끼리, 돛대는 돛대끼리 자국선이건 외국선이건 간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고, 정박소와 물품창고는 터질 것만 같았다. 새로 쌓아올린 웅장한 왕궁들 사이로 뻗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북적대고 있었다. 해외상관과 환금창구, 중개업소에는 갖가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인도를 약탈한 덕분에 리스본은 이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소도시에서 세계적인 도시요, 사치와 향락의 도시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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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은 리스본에 잠깐 머물다가 마젤란은 다시 해군으로 모로코 전쟁에 참여했다가 다리 부상을 입었어. 그런데 양떼를 적군이 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갇혀 있다가 탈영해서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단다. 마젤란은 왕을 만나 자신의 주장했으나 왕은 그를 믿지 않았어. 마젤란은 다시 모로코로 와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을 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명예를 회복하고 정식으로 군대를 제대했단다. 포르투갈에 돌아와서 그는 항해를 준비했어. 먼저 신대륙을 탐험한 사람이 작성한 항해보고서를 봤는데, 그 보고서에는 대서양과 나중에 태평양이라고 부르게 되는 바다를 잇는 뱃길이 있다고 했어.

마젤란은 그 통로를 찾아서 인도를 가면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빠르다고 생각했어. 그 경로로 가서 인도의 향료를 가지고 오면 자신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여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 음, 포르투갈 국왕은 또 한번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구나. 마젤란은 자신이 다른 나라를 위해서 일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는데, 국왕은 그러라고 답변을 받았단다. 그때 마젤란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어.

...

 

2.

마젤란은 1년 뒤 스페인으로 망명을 했어. 마젤란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뱃길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스페인 왕에게 후원을 받으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을 만날 기회가 없었지. 그런데 어떤 상인이 마젤란의 이야기를 듣더니 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여 그 상인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당시 스페인 왕인 칼 5세와 마젤란을 만나게 해 주었단다. 칼 5세는 결단력이 부족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젤란을 지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대.

마젤란이 칼 5세를 잘 설득했나 보구나. 그렇게 지원 약속을 받은 마젤란은 항해 준비를 했어. 선원들을 모집할 때는 향료 군도를 떠나는 항해라고만 이야기했어. 향료 군도에 가서 향료를 얻을 수 있어 다들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항해 준비를 하면서 실무자들과 갈등이 있기도 했어. 항해가 얼마나 길어질지 정확히 모르니 식량 등을 얼마나 확보하고 선원들을 얼마나 모집해야 할지 어려웠을 것 같구나. 이렇게 마젤란이 항해 준비를 하고 있는 소식이 포르투갈에도 전해졌고,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의 계획을 알고 격분했다는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할까 봐 마젤란이 사전에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구나. 포르투갈 영사가 마젤란을 찾아와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고, 스페인 왕을 찾아가 항의도 했단다. 그렇게 포르투갈 영사에서 법석을 떨다 보니, 오히려 마젤란의 존재감만 부각이 되었어. 스페인 왕도 더욱 마젤란을 보호하고 포르투갈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1년 6개월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265명의 선원들, 다섯 대의 함선이 준비되었어. 각 함선의 함장들을 마젤란이 직접 고르면 좋겠지만, 자신의 배와 다른 한 배에 자신과 함께 망명한 사촌을 함장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세 척은 스페인 왕이 임명한 스페인 사람들이었단다. 마젤란을 감시하는 역할도 있었던 것 같아. 그 스페인 함장들은 마젤란을 좋게 보는 사람이 없었단다. 마젤란은 1519년 9월 20일 드디어 대서양으로 출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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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1519년 9월 20일 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세계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날이었다. 닻이 올려지고, 돛이 펄럭이고, 대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육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하고, 가장 원대한 탐험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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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은 신대륙과 오가는 항로는 개척되어 있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마젤란이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 항로를 되돌아간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다른 함장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대. 처음부터 쉽지 않은 길이로구나. 결국 부사령관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저항을 하며 반기를 들었어. 마젤란의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부여 받은 절대 재판관의 권한으로 부사령관을 반란자로 구속시켰단다. 마젤란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선원들은 다들 놀랬어. 일정보다 한참 지난 출발한지 11주만인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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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젤란이 출발하기 전 포르투갈에서 본 항해보고서에서 본 ‘파소‘가 예상했던 위치에 없었어. ‘파소‘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를 말한단다. 마젤란은 자신이 예상했던 위치에 ‘파소’가 없어서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는 만과 강을 모두 점검하였어. 그러다 보니 또 시간은 지체되었어. 자연스레 선원들의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는 스페인 함장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켰단다. 마젤란의 사촌이 함장으로 있는 함선을 약탈한 후 마젤란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어. 숫자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오랜 전쟁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젤란은 기습 공격으로 반란을 제압했단다. 반란의 주동자인 케사다를 처형시키고 다른 함장들과 반란을 주도했던 신부는 해변가에 버리고 떠났단다. 반란에 참가했던 나머지 선원들은 강제노역을 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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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함선인 정찰 중에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제 함선은 네 척이 되었어. 마젤란은 여전히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를 찾는데 노력을 했지만, 찾지는 못했고, 이것으로 시간은 계속 지체되었어. 그리고 출항한지 1년도 훨씬 지난 1520년 10월 25일, 드디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협을 찾았단다. 나중에 이 해협은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렀단다. 마젤란은 다른 함장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보았어. 계속 항해를 하느냐, 아님 귀환 하느냐... 어떤 사람이 해협을 찾았고 일정도 많이 지체되었으니, 일단 스페인에 복귀했다가 재정비를 하고 다시 오자고 했어. 하지만 마젤란은 ‘답정너‘였어. 그는 귀환하자는 의견에 반박하고 앞으로 계속 가기로 결정했단다. 왜 물어본 거야?

그런데, 어느 날 함선 한 대가 사라졌어. 한참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어. 그 배는 알고 보니 몰래 스페인으로 돌아간 것이란다. 마젤란의 계획이 무모해 보였던 거야. 하필 사라진 배가 가장 큰 배이고 식량도 가장 비축된 배였기 때문에 남은 일행들에게는 큰 손실이었단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더 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아무도 태평양으로 그렇게 넓고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마젤란도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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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1520년 11월 22일, 그의 명령에 따라 배는 정어리강의 항만을 떠났고, 며칠 후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다(앞으로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해협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젤란은 캅 데세아도(열망의 곶)라고 명명한 곶 뒤쪽으로 유럽의 배가 아직 항행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다가 끝없이 넘실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서쪽 수평선 뒤로 보물의 섬인 향료군도가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뒤로는 동양의 제국들, 중국, 일본과 인도가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가다 보면 고향인 스페인과 유럽대륙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가 개벽한 이래 그 누구도 통과해보지 못한 대양으로 돌진하기에 앞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했다. 1520년 11월 28일, 닻을 올리고 깃발이 올려졌다. 축포를 쏘아올리면서 세 척의 작은 배는 마치 생사의 결투를 앞둔 투사가 위대한 적수에게 인사하듯 낯선 바다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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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젤란은 나머지 세 척을 정비하고 길을 떠났단다. 그야말로 그 바다는 아무리 가도 바다만 계속되었어. 그들 생각하기를 이미 한창 와서 지팡구(일본)을 지나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직 3분의 1도 못 간 상황이었단다. 이제는 굶주림과 싸움이었어. 이렇게 항해가 길어질 거라 생각을 못했으니, 식량이 금방 떨어지고 말았어. 선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소가죽으로 만든 돛 줄도 먹었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단다.

계속된 항해 끝에 마젤란 일행은 1521년 3월 16일, 드디어 필리핀 사마르 제도에 도착했단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드디어 직접 증명을 한 거야. 마젤란은 세부 섬의 왕을 만나 접견했어. 세부의 왕은 마젤란 무리에 겁을 먹고 그들을 환대했단다. 하지만, 인근의 막탄 섬에 있는 라푸라푸는 그들을 환대하지 않고 저항하고 전투 자세를 보였어. 마젤란은 그들을 얕보고 60여 명의 사람들만 데리고 갔단다. 갑옷과 총을 너무 믿었어. 사실 부하들 대다수는 이미 지체한 시간도 너무 많이 이 탐험에 지쳐 있었던 상황이라서, 막탄 섬에 가지 말고 얼른 향료 군도에 가서 향료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단다. 하지만 마젤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어. 마젤란 일행은 막탐 섬의 부족들의 어마어마한 원주민들과 맞서야 했어. 1521년 4월 27일 결국 마젤란은 허무하게 그들에게 죽고 말았단다. 위대한 탐험가이자 뱐란도 제압하고, 망망대해의 고난을 다 이겨내고 새로운 바다를 발견하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던 마젤란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망했단다. 그렇게 준비가 철저했던 사람이 그렇게 방심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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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이 죽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도 지휘관을 잃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어. 세하웅과 바르바사가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었단다. 하지만 그들도 원주민들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세하웅의 친구이자 부하인 카르발요가 배신을 하고 세하웅과 바르바사를 버리고 도망을 갔어. 그래서 세하웅과 바르바사도 원주민한테 죽고 말았단다.

카르발요가 사령관이 되었어. 그는 마젤란이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원칙을 깨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단다. 그러자 다른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카르발요도 사령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단다.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마젤란의 측근인 고메스 데 이스피노자와 대서양에서 반란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는 세바스티안 델 카노가 함장을 맡게 되었어. 남아 있는 선원들의 숫자로 보았을 때 함선 세 척을 모두 운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 대는 태워 버렸단다. 이제 남은 배는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 두 척뿐.

그들은 드디어 향료 군도에 도착을 했단다. 그들은 고국에 가져갈 많은 향신료들을 배에 싣고 드디어 고국 스페인으로 갈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트리니다드 혹 고장이 나서, 고메스 데 에스피노자 함장과 절반의 선원들은 배를 고치기 위해서 남고, 빅토리아 호만 스페인으로 출발했단다. 하필 반란에 참여했던 세바스티안 델 카노가 함장으로 있는 배였다니… 아직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라 그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가야 하니 그 길 또한 만만치 않은 항로였단다. 또 다시 식량 부족과 물 부족에 시달려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결국 스페인을 출발한 지 3년에서 12일이 모자란 1522년 9월 8일 스페인에 도착했단다. 처음 출발할 때는 265명이었는데 18명만 살아서 스페인에 도착을 했어. 그리고 마지막 사령관은 마젤란의 배신자였던 세바스티안 델 카노였는데 모든 영광을 그가 다 차지했단다. 2년 전 마젤란을 배신하고 먼저 스페인으로 돌아온 산 안토니오 호의 사람들도 델 카노의 도움으로 모두 명예회복을 했단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고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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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도착했을 때까지 있었던 마젤란과 항해기록자 피가페타의 항해일지가 사라져버렸어. 이곳 또한 스페인 정부가 자신들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일지를 일부러 없앴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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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이 중도에 허망하게 죽긴 했지만 그가 최초로 지구를 일주하고 태평양을 발견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보여준 용기와 결단력은 높이 칭송되었다고 한다. 그는 안타깝게 죽었지만 후세에 영웅과 신화로 남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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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 항해기록자 피가페타는 항해하는 3년 내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지를 쓰고 그날의 요일도 기록했는데 분명 수요일이었는데,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을 했을 때 그곳은 목요일이라고 했어. 피가페타는 하도 이상해서 일지를 다시 점검했지만 빼먹은 날은 없었어. 당시 세계일주를 처음 하다 보니, 자전 방향으로 세계일주를 했을 때 지구 한 바퀴를 돌면 하루가 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 나중에 이런 현상 때문에 날짜 변경선도 만들고 그랬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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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284)

베르데 곶에서의 체류가 시간도 짧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씩씩한 기록자 피가페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식료품을 사려고 해변까지 갔다온 선원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는데, 육지는 목요일이라는데 배에서 수요일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의 3년 동안 매일같이 일지를 적어온 파가페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그렇게 해서 한 주가 지나고, 1년이 지나도록 날짜를 계산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루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것일까. 그는 자기처럼 매일 선박일지를 쓰는 키잡이 알보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도 아직 수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루가 달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데 곶에서 처음으로 관찰한 새롭고 중요한 이 현상은 전생애에 걸쳐 그를 흥분시키고 몰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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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은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 평가를 발췌하면서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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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어떤 업적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는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젤란의 행위는 당시 모든 행위들을 능가한다. 그의 명성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면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천,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토록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와의 성스러운 전쟁을 위해 떠난 다섯 척의 보잘것없고, 힘없고, 외로운 배들의 찬란한 용기가 영원히 잊히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기려 했고, 함대의 마지막 배 한 척이 이를 완수했다는 점에서 마젤란 자신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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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얼마 전에 책더미에서 어떤 책을 찾다가 아빠가 오래 전에 산 베른하르트 카이의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전 2권)>이란 책을 발견했단다. 그렇지, 아빠가 이 책을 샀었구나. 그때는 마젤란에 대해 궁금해서 샀던 것 같은데, 책더미 속에 있다 보니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되었던 것 같구나. 이 책도 언젠가는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진짜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일의 발단은 향료였다.

책의 끝 문장: 한 인간이 자신의 짧고 덧없는 일생을 바쳐 수백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단지 꿈에 불과했던 것을 현실이 되게 하고 스러지지 않을 진실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탐험의 시대는 거대한 배은망덕의 시대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위해서 전세계를 정벌해나간 저들 정복자들이 국왕에게 받은 대가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콜럼버스는 사슬에 묶인 채로 세비야에 돌아왔고, 코르테츠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피자로는 살해되었으며, 남태평양을 발견한 누녜즈 데 발보아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포르투갈의 투사이자 시인인 카모엔은 비열한 시골 관리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동지인 위대한 세르반테스처럼 몇 달, 몇 해를 오물통 같은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카디스와 세비야의 골목길엔 귀향 선원들과 병사들이 불구가 되어 피폐해진 모습으로 열병에 시달리면서 거지떼처럼 헤매고 있었다. - P72

더 이상은 마젤란도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위해 바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좀더 경이롭고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칼 5세는 말하자면 소극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이었는데, 성격과는 달리 이 원정대의 항해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후원에 나섰다. 마젤란이 가졌던 남자다운 확고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원정의 대담한 때문인지, 무엇인가가 이 젊은 군주에게 특별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매주마다 진척사항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는 등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장비와 항해 준비에 열심이었다. 때문에 일에 장애가 생길 때면 마젤란은 국왕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왕의 서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의지가 박약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이 황제는 그의 긴 통치기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굳건한 신의를 지키며 이 위대한 이념을 실천해나갔다. - P115

그리고 이 순간 마젤란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신의 업적이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그가 12년 전에 도착한 바 있던 말라야 언어권의 한 변두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는 향료의 섬에 도달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섬을 찾게 되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곳을 찾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업적의 본질은 향료의 섬이 아니라 누구든지 바다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 그것이 태양이 지는 쪽이든 뜨는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추측해 왔고, 꿈꾸어 왔던 일이 한 인간의 용기에 의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된 것이다. 진정으로 지구는 둥글었다. 한 인간이 지구를 둥글게 한바퀴 돌아온 것이다. - P235

사령관이 누군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로 주로 그를 겨냥했다. 벌써 두 번이나 투구를 머리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령관은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용감한 기사로서 더 이상 후퇴하려 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켰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을 대치해서 싸웠는데, 마침내 인디오 한 명이 사령관이 얼굴에 갈대로 만든 투창을 던졌다. 사령관은 노하여 이 공격자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창이 찔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지지 않자 사령관은 이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오른팔이 창에 찔려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절반 정도밖에 뽑지 못했다. 이를 보고 적군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중 하나가 단칼에 왼쪽 다리를 내리치자 사령관은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인디오들은 모두 그에게 덮쳐 창이나 다른 무기들을 가지고 그의 몸을 마구 찔러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자 빛이요 위안이었던 지도자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 P258

이제 하룻밤, 하루 낮, 이제 하룻밤만 지내면 된다. 단 하룻밤. 그리고 마침내(모두들 갑판으로 뛰쳐나가서 행복감에 전율하며 한 덩어리로 얼싸안았다) 산루카에서 바다와 만나는 구아달키비르 강이 육지 한가운데로 은띠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3년 전 265명이 마젤란의 지휘 아래 다섯 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던 것이다. 18명의 선원들은 비틀거리면서 배에서 내리자 간신히 무릎을 꿇고 이 딱딱하고도 고마운 고향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1522년 9월 6일, 항해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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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평전 - 105년 만의 귀환
박균.정규화 지음 / 이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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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얼마 전에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미륵 평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이 책은 박균 님과 정규화 님 공저란다. 2010년에 초판이 나왔고, 2025년에 개간본이 나왔는데, 아빠는 2025년 개간본으로 읽었단다. 그 15년 사이에 공동저자이자 평생을 이미륵 님과 그의 작품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신 정규화 님께서 고인이 되셨고, 이미륵 님은 고국을 떠난 지 105년만인 2024년에 비록 유해이지만 우리나라로 돌아오셨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105년 만의 귀환>으로 하셨구나. 더욱 뜻 깊은 개간본이 된 것 같다.

아빠가 이 책을 보고 유튜브로 이미륵 님을 검색해 보니, 옛날 영상이긴 하지만 몇몇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찾아 보았단다. 그 영상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고 정규화 교수님이 등장하는데, 정말 이미륵 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하신 것 같더구나. 자, 그럼 이미륵 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간단히 이야기해볼게.

 

1.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으로 미륵이라는 이름은 아명으로 이미륵의 어머니가 딸만 셋만 낳고 절에 치공을 드린 후 낳은 아들이라서 아명을 이미륵으로 했다는구나. 이 책에서는 본명 이의경과 아명이자 필명인 이미륵을 모두 사용했지만 아빠는 이미륵으로 통일해서 이야기를 할게. 이미륵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군에 태어나셨어. 그의 삶에 대한 읽다 보면 얼마 전에 읽은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 대한 내용과 겹치는 내용이 많단다.

이미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동빈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했단다. 하지만 나라 정세는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어. 너희도 역사를 배웠으니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들을 알고 있겠지.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1910년부터는 신식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어. 이미륵의 아버지는 회복을 하시고 다시 안 좋아지기를 반복하다가 1913년에 돌아가시고 말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을 시키려고 했는지, 이미륵은 11살 나이에 결혼을 했단다. 결혼 후 7년 만에 딸을 얻었지만 세 살 때 그만 죽었다고 하는구나.

1917년에는 독학해서 경성의전에 합격하여 의학 공부를 시작했단다. 의대를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수배령이 내려져서 고향으로 피신했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망명하여 유럽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셨어. 그렇게 그는 중국 상하이로 갔단다. 유럽 유학을 준비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사에서 간호사를 육성하는 일을 맡았단다. 그리고 1920년 4월 여권을 발급받고, 1920년 5월 상해를 출발하여 유럽에 도착하게 된단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이야기했듯이 함께 유럽에 간 안봉근의 도움으로 그는 독일 남부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서 지냈어.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을 검색해보았더니 아직 있더구나. 그곳에서 지내다가 1922년 뷔르크부르크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낯선 언어로 하는 의학 공부는 쉽지 않았어. 당시 독일 남부 지역에는 수십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는구나. 생각보다 많은 숫자로구나. 그런데 친일파의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미륵은 한국에 이어 독일에서 공부했던 의학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뮌헨 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단다.

…

1927년 유덕학생회(옛날에 독일을 덕국이라고 불렀는데, 유덕 학생회는 덕국에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구나.) 소속의 이극로가 연락을 해왔단다. 세계 피압박 민족 결의 대회에 조선 독립을 의제로 제출하려고 한다고 했어. 이극로, 김법진, 이미륵은 함께 <한국의 문제>라는 글을 써서 세계 피압박 민족 결의 대회에 제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부결되어 안건에 상정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1927년 하반기, 이미륵은 알 수 없는 신열로 고생을 했다는구나. 오랜 타지 생활로 몸에 탈이 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는 스위스에서 세 달 동안 요양을 하고 치유가 되어 다시 뮌헨으로 돌아왔어.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서 로자 마우러라는 여자와 만나 교제를 했다는구나. 그런데, 나중에 로자는 나치의 육군부대에 들어가 통역사로 일하면서 멀어졌다고 하는구나.

…

생물학을 전공하던 이미륵은 1928년 ‘재생’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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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의경은 강인한 생명력이란 결국 ‘생’에 대한 항구적이고 독자적인 재생 의지에 달려 있음을 인식했다. 살아남은 개개의 객체들이 때로는 잘려나간 부위를 때로는 상처 입은 부위를 스스로 복원시켜 생명을 연장하였고, 자율적인 복원 능력을 상실한 것들은 결국 도태되고 소멸해버리고마는 ‘진정한 생명의 원리’를 의경은 오히려 생물학의 연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체’의 놀라운 재생력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생의 신비’에 감동했다. 그것은 단지 실증적 실험의 결과로써 뿐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생의 본질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경험세계였고, 의경은 바로 그 본성에 포진해 있는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재를 ‘재생’의 의미로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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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이미륵은 직업을 바로 가질 수 없어서 가난하게 지냈단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지냈단다.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로 자일러 박사의 초대를 받았어. 자일러 박사와 식구들은 이미륵의 서예와 동양 철학에 매료되었단다. 특히 자일러 박사의 아내가 감동을 많이 받아 이미륵에게 잘해 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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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7)

한국의 지성인들은 대부분은 아주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습자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서체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개인이 지향하는 정신적 이데아를 미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개성을 담은 서체로써 그때그때 강하게 혹은 유연하게 자기 사상을 표출하기도 하고, 동시대인과의 예술적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서예는 그 자체로 한국의 전통문화입니다. 그것은 나를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나의 영혼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예술혼의 원천이지요. 사람들은 가장 독특하면서도 난해한 글자체인 초서로 운(韻)에 갇혀 있는 시 문학을 아주 자유분방하고 추상적인 회화예술로 바꾸어 놓지요. 붓은 나 자신을 아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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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이미륵은 자일러 박사의 가족과 연을 이어가 그의 집에서 지냈단다. 자일러 박사 부부는 이미륵을 양아들이라 생각하고 지원해주었어. 이미륵도 이때부터 오랫동안 타지의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해.

 

2.

이미륵은 1931년부터 단편 소설을 비롯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을 썼어. 그리고 한국의 종교와 사상 등을 발표하여 우리나라를 독일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어. 독일에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지. <압록강은 흐른다>의 첫 번째 이야기 <수암과 미륵>을 1935년에 발표했어. 이때부터 필명을 이미륵이라고 했다고 하는구나. <수암과 미륵>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을 독일어로 소개를 했단다.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독일 사람들을 위해 중국어 사전도 편찬하려고 했는데 독일어를 잘하는 중국인을 찾기 어려웠다고 하는구나.

1942년에는 <어느 한국인의 유년에 대한 회상>을 발표했어. 그 즈음 이미륵은 1927년 뮌헨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가르쳤던 스승 쿠르트 후버 교수를 다시 만났어. 쿠르트 후버 교수는 동양 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이미륵과 교류를 하면서 동양 사상에 대한 공부를 했단다. 그런데 쿠르트 후버 교수가 나치에 저항하는 비폭력 저항 단체 ‘백장미’에 참여를 했다가 발각되어 잡혀간 뒤 처형당하고 말았단다. 이미륵은 그의 가족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단다. 그런 행동은 나치에게 끌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나눈 정(情)이 아니겠니..

…

이미륵은 유년 시절부터 독일에 정착할 때까지의 소재로 쓴 단편소설들을 모아서 1944년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된단다. 당시 세계 2차 대전의 말기로 세상이 어려운 시절이라서 그런지 바로 출간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5월 출간되었다고 하는구나. 책이 출간되고 독일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 인간성이 말살된 전쟁이 끝난 뒤 출간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인간미가 풍부하면서 신비한 동양의 이야기였단다. 책이 출간된 지 삼 일만에 한 매체에서 시작된 좋은 평가는 계속 이어졌단다. 그러면서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세계에서 유명해졌어. 책을 통해 그려진 고귀한 문화를 가진 한국을 알렸고,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했단다. 독일 여러 매체들에서 책에 대한 리뷰는 이어졌단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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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05)

독일에서 이름난 잡지와 지역신문에서 연이어 화려한 찬사의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은 매혹적인 삶으로 충만한 낯선 문화의 먼 나라 신비로운 이야기일 뿐 아니라, 마지막 행에 이르러 깊은 감동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고국 땅에서 나온 큰 울림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격정과 힘을 얻는다. 우리는 작가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신비한 나라, 수천 년 동안 유지해온 심오한 정신과 본성 그대로의 순수성을 강탈했던 일본 군대의 포악성에 밤새도록 생각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미륵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울쳐 있었고, 부유하게 태어난 그의 정신적 기질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중국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별이 그토록 오랜 세월 계속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 독일에서 제2의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늘 연평도와 고요한 송림, 고향의 언덕, 그리고 한국에 두고 떠나온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너무도 섬세하고 순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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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은 흐른다>가 성공하면서 이미륵은 그 뒷이야기들을 준비했단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널리 유명해지면서 독일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제대로 된 전문가는 부족했어. 그래서 이미륵은 해니쉬 교수의 추천으로 1947년 뮌헨 대학에서 동양학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어. 한국에 대한 강의도 하고 한국어를 소개하기 위해 <한국어 문법>을 저술하기도 했단다. 동양 철학도 강의했는데 특히 <맹자>를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한시를 번역하여 소개했어. 그에게 배운 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뮌헨대학의 동양학부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었어. 그가 계속 독일에서 우리나라를 알리는 일을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단다.

1950년 1월 갑자기 심한 발작과 통증이 찾아왔어.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라고 했단다. 수술을 하고 나서 요양소에서 지냈어. 양어머니 자일러 부인과 제자 애파가 병상을 지켰어. 하지만 그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50년 3월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단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이구나. 그의 작품을 사랑했던 많은 독일인들이 이미륵을 추모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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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이미륵은 절대 자유의 신봉자였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개성을 억압하고 획일화시킨다고 인식했다. 그는 부모가 원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고, 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을 깨우치기보다는 부모가 숟가락으로 떠넘겨주는 것을 떠받아 먹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이들에겐 자유가 필요하고, 그 자유를 통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론과 정치적 주제 포스터가 생을 구원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오직 인간 영혼의 가장 내면적인 가치를 울리게 했을 때 삶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치유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역설했다.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내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나야 하고, 의사는 피딱지와 오물딱지를 씻겨줄 뿐, 진정한 치유는 자기 속으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 아물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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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독일 펜클럽 부회장인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어. 그 때 그는 시간을 내어 이미륵의 누나 이의정을 만나 이미륵의 독일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하는구나. 이 책의 지은이 정규화 교수 등은 이미륵을 한국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의 독립 운동과 한국을 독일 세계에 알리는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단다.

…

이미륵이 우리나라를 떠난 것은 1919년,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한 살.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데 돌아오지 못한 채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타국에서 지내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이미륵은 고향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출하신 것 같구나. <압록강은 흐른다>는 전쟁이 끝난 1946년 삭막한 독일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었단다. 어떤 평가는 1946년의 최고의 독일 문학은 한국 사람이 독일어로 쓴 작품이라는 극찬도 있었다는구나.

<이미륵 평전>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이미륵 님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었는데 그때마다 가슴에 콱 막히는 느낌이었단다. 그런 감정들이 쌓여 병이 생기신 것은 아닌가 싶구나. 얼마 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500번째가 출간되었는데 바로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하는구나.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고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024년 11월 14일 이른 아침 시간, 독일 뮌헨 근교의 작고 조용한 도시 그래펠핑의 공원묘지.

책의 끝 문장: 1996년에 발간된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문을 이미륵의 애제자였고, 훗날 뮌헨대학교에 봉직하던 Wolfgang Bauer(1930~1997) 교수가 써줘서 더욱 돋보였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오직 이 종교만을 추종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가르침을 그릇된 교리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미신이니, 우상숭배이니 하는 말들을 했고, 사람들을 기독교와 이교도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오직 하나의 가르침에만 주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정말 새로운 개념 "종교"가 나타났다! 이후 사람들은 구교인지 아니면 신교인지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물었다. 기독교인들은 한국 땅에서 자신들의 선교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고, 시민들을 교육하였다. 그들은 이 땅의 모든 우상 숭배자들을 몰아냈고, 당목을 베어냈고, 미신적인 종이형상과 신모(神帽)를 불태워버렸다. 새로운 가르침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곳곳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 P125

늘 신을 향한 믿음 속에서 성장해온 한국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개의 낯선 종교들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유교, 인도의 불교, 팔레스티나의 기독교가 그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모든 종교를 숭상했지만, 오히려 그 낯선 객들이 서로 화합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싸우고 또 서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데 그런 종교들마저 이젠 유물론에 위협을 받고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 종교들이 언제 이 땅에서 유기될지, 또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을 정복하게 될지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는 단 한 번도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 민족은 그들의 땅에 들어온 모든 가르침에 감사하지 않았던가. 유교에서는 도적적 질서를, 불교에서는 절제를, 기독교에서는 이웃사랑을 배웠다. 그런데 유물론을 통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 P127

"창공의 어두운 벨벳 속에 박혀있는 작은 은빛 점으로 빛나고 있는 허공의 별을 가리키며, 서양 사람들에게 저 별들은 아득히 먼 별 무리 어딘가에 있는 Altair와 Wega이지요. 두 별은 저기 하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자존심이 강한 청년별과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별은 서로를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지요. 그것은 두 성좌 사이에 바로 강물이 놓여 있기 때문이겠죠. 그 두 별 사이에 있는 너무도 광대한 은하수, 우리 고향에선 그 희뿌연 우윳빛 길을 은하수라고 부르지요." - P142

"그는 결코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다. 한국인 이미륵의 내면 깊숙이 깃들어 있었던 그의 사상과 그의 유산들. 그것은 지혜의 단편이고, 동양의 질서이고, 조화이며, 신의 장소이다. 꽃잎의 그림자는 꽃잎 아래 드리우고, 강줄기는 강바닥 속에서 결코 넘치는 일이 없으며, 밤을 배회하는 사람의 길 위에 뜬 달과 저 멀리 떠난 친구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책상 위의 갓등도 그대로이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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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위하여 - 작가 츠바이크, 프로이트를 말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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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평전인줄 알았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이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재미있게 잘 쓰지만 그동안 아빠가 읽은 평전도 모두 괜찮았단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 <프로이트를 위하여>에서 알 수 있듯이 전대미문의 학자 지그문크  프로이트에 관한 책이란다.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그 동안의 평전과는 좀 다른 구성이었단다. 프로이트 평전은 1부에만 구성되어 있고, 2부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가 주고 받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츠바이크가 여기저기 기록한 프로이트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더구나. 더욱이 1부는 츠바이크의 다른 책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의 3부를 발췌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다른 책, 츠바이크의 기록 등을 짜깁기하여 편집된 것 같았어. 아빠가 가장 싫어하는 편집 방식이로구나.

츠바이크가 이런 편집을 좋아했으려나? 그래서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우리나라 서점에서는 검색이 안되더구나. 혹시 다른 책제목으로 출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다 검색해서 확인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출간된 <정신의 탐험가들>이라는 책인 것 같더구나. 이 책의 차례를 보니 3부의 제목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더구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의 이런 짜깁기 편집은 외국의 출판사에서 한 것으로 그대로 번역 출간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슈테판 프로이트의 팬으로는 실망스러운 편집이로구나. <프로이트의 위하여>의 3부에 나오는 기록도 다른 책 <어제의 세계> 등에 실린 글인데 <어제의 세계>는 아빠도 가지고 있는 책이란다. 유독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은 여러 출판사의 중복, 짜깁기 출간이 잦은 것 같더구나. 프로이트에 대해 궁금하고, 그런 궁금증을 츠바이크가 해결해 준다는 생각으로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이런 짜깁기 편집으로 실망을 하고 말았단다.

 

1.

실망스러운 편집은 편집이지만, 1부 프로이트에 관한 츠바이크이 글은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츠바이크의 흡입력 있고 묵직한 필력을 엿볼 수 있었단다.

…

책의 시작은 ‘병’의 의미로 시작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법의 변천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원시시대와 고대 의학을 거쳐 현대 의학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현대 의학은 많은 의료 장비를 이용하여 치료를 하지만 장비의 도움 없이 영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단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라는 논문에서 신경증이 성적인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기존의 학자들과 달리 억압이라는 것은 숨기지 말고 밖으로 내놓아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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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옛 방법이 은폐하려 애쓰던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했다. 모르는 체하지 말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돌아가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눈 돌리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외투를 입히지 말고 벌거벗기라는 것이다. 충동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틀어쥘 수 있다. 악마의 심연에서 충동을 끌어내 거리낌 없이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은 미학이나 문헌학 못지않게 도덕이나 수치심과는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세기가 얼버무리고 싶어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 고백의 문제를 시대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인들뿐 아니라 도덕병에 걸린 그 시대 전체를 치료하는 일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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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조수, 비서, 조교도 없이 평생 혼자 분석하고 연구했다는구나.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대. 그런 규칙적인 생활 때문인지 평생 건강하게 지냈다는구나. 그리고 그런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남을 의식하는 글쓰기가 아닌, 단지 결과의 산출물로만 생각한 글쓰기였기 때문에 글들이 무미건조하고, 냉정하고, 창백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선동하거나 선전하는 내용은 없지만 엄격한 조형력 있는 글들이라는구나.

…

프로이트의 의대 시절, 심리학도 신체기관을 연구하면 알게 되는 생리학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대.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최면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있다고 해서 파리에 가서 그들과 교류도 했다는구나.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심리라는 것이 신체가 아닌 심리적, 초심리적 원인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몇 달 뒤 빈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대. 그 일로 빈의 다른 학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규 교수가 될 수 없었지만, 프로이트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

…

프로이트는 최면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브로이어와 공통 연구도 했는데, 프로이트는 이때부터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단다. 당시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기여 의식도 아니고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무의식을 연구할 생각은 프로이트와 같은 천재들만의 영역이었지. 무의식의 핵심은 꿈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분석하면 당사자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단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꿈도 의식으로 조작하여 본심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는구나. 하지만 어린이들의 꿈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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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25)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처음으로 입증한다. 꿈은 우리 감정 능력의 밸브이다. 우리의 작은 세속적 육신 속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막강한 욕만, 헤아릴 수 없는 괘락욕과 생존 본능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소원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옹졸하게 꽉 짜인 일상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쾌락의지를 천분의 일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룰 수도 없는 한없는 욕망이 더없이 궁색한 소액 연금 생활자, 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못된 욕망들이 음란하게 들끓는다. 지배권이 부재하는 권력의지, 억눌리고 비겁하게 일그러진 무정부주의적 욕구, 감춰진 허영심, 열정, 질투 등.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여자들이 지나다니며 저마다 순간적인 정욕을 도발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그 모든 소망과 소유욕은 똬리를 튼 채 독사처럼 틀어박혀 혀를 날름거르며 새벽종이 우릴 때부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 밤마다 꿈이 이 모든 응어리진 소원들에 배출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영혼은 그런 대기압 아래에서 폭발하거나, 갑자기 흉악한 난동이라도 부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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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심리학이 성과 관련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는구나. 성에 대한 의식은 아무래도 사춘기 이후에 형성되다 보니 사춘기 이후 연령에 대해서만 분석을 하다가 아기 때부터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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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58)

프로이트는 깨달았다. 성 의식은 사춘기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갑자기 몸 안에 주입되는-대체 그것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다는 말인가?-것이 아니라, 오히려-모든 강단 심리학보다 천 배는 더 심리학적인 언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해주었듯이-영글다 만 인간 속에서 성 충동이 그저 ‘깨어날’뿐이라는 사실, 따라서 성 충동은 잠든 채로(말하자면 잠복 상태로) 오래전부터 어린이의 신체 속에서 현존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아가 걷기 전에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두 다리에 지니고 있듯이, 말할 수 있기 전에 언어 욕구를 지니고 있듯이, 성욕도-목전에 맞는 행동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하면서-유아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유아는-결정적 표현!-자신의 성욕에 관해 안다.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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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학문이 쉽지 않다 보니,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너희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구나. 양해 바란다. 1부 프로이트 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츠바이크가 프로이트의 업적에 대해서 정리해 준 부분이 있는데,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잘 담겨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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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현재 우리는 프로이트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모든 인간 영혼의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가치를 새롭고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서 예술, 연구, 생명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성하든 반대하든 프로이트의 사상 체계로부터, 그의 견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창조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외부인은 모든 영역에서 삶의 중심부-인간적인 것-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의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철학이든 교과서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규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문가들이 망설이는 동안, 개별성과 궁극적 가치에 관해 추밀 고문관과 학자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참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괴테가 잊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새겨놓은 창조적 의미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결실이 있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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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2부에서는 츠바이크와 프로이트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와 엽서들이 실려 있는데, 1908년부터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인 1939년까지의 편지와 엽서라고 하는구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방의 편지를 읽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어. 둘은 서로 존경하는 모습이 편지 속에서 느껴지더구나. 츠바이크는 새로운 책이 나오면 꼭 프로이트에게 보내주고 프로이트는 답장을 쓰면서 그 책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기도 했단다. 뿐만 아니라 당대 유명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리뷰가 인상적이어서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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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당신이 빠짐없이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거의 모든 특성들은 그 자신의 특성에 기인하며, 우리에게는 특이한 것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심리 구조입니다. 사실 성적 기질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을 더 상세히 설명해야 하겠지요. 우선 그것은 학대하고 맟설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분석 없이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 각 인물들과 각 문장들을 통해 정신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카라마조프 씨네 사람들>이 도스토엡스키의 가장 개인적인 문제인 아버지 살해를 다루며 범행과  무의식적 악의에 관한 정신분석적 원리를 그 근거를 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표현한 기이한 성애는 충동적 발정이거나 승화된 연민입니다. 자신의 영웅들이 사랑할 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등에 관한 회의[=양가감정]는 그의 심리학이 어떤 독특한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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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짜깁기 편집한 책이라서 실망했는데, 그래도 츠바이크와 프로이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실망감을 다소 해소한 것 같구나. 이 책 1부에 보면 츠바이트가 프로이트를 한 줄로 평한 글이 있는데, 그 글을 소개하며 오늘 편지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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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면, 프로이트는 평생 메스를 들고 철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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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건강이요, 부자연스러운 것은 질병이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그의 관을 영국 땅에 묻었을 때, 우리는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그곳에 바쳤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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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스 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 김나연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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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부터인가 뉴스에서 자주 ‘엡스타인 사건’이 등장하였고, 유명 인사들이 엮여 있는 엄청난 스캔들이라고만 대충 알고 있다가 몇 달 전에 유튜브 방송에서 자세하게 알게 되었단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 등 전현직 대통령과 빌 게이츠, 영구 앤드루 왕자 등이 연루되어 있는 십대소녀들을 상대로 한 불법 성매매 사건이었어. 한창 트럼프 대통령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 즈음, 이란과 전쟁을 일으켜서 자신의 엡스타인 사건의 연루설을 덮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그리고 빌 게이츠의 아내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가 이혼한 이유도 빌 게이츠가 엡스타인 사건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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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

얼마 지나지 않아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는 CBS 게일 킹과의 인터뷰에서, 27년간 함께한 남편 빌 게이츠와 이혼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엡스타인과 남편의 관계였다고 밝혔다. 멜린다는 킹에게 “빌이 제프리 엡스타인과 만나는 것이 싫었고, 그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라고 전하며, 본인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 엡스타인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느낀 소감은 이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후회했습니다. 그는 혐오스러운 자였어요. 악의 화신 그 자체였죠. 피해 여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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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주범인 엡스타인은 감옥에서 자살을 했는데 그 자살 또한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없는 우연들이 겹쳐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 무엇보다 그들에게 희생당한 피해자 중에는 십대 소녀들도 있었어. 그 중에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엮은 <노바디스 걸>이라는 책을 앞서 이야기했던 유튜브 방송에서 소개해주어 알게 되었단다.  그 책을 구입하면 그 피해자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고, 이 무지막지한 사건에 대해서 더 궁금하기도 해서 읽어보기로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책의 지은이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는 이 책이 출간되기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더구나. 이것도 음모론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맞는 것 같더구나. 그건 차차 이야기해줄게.

사실 이 책을 읽는 것은 피해자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감정적으로 힘들었단다. 이렇게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직접 경험을 한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구나. 그럼 버지니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1.

버지니아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단다. 버지니아의 아빠는 스카이라는 사람이고, 버지니아의 엄마 린에게 스카이가 두 번째 남편이란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 대니가 있었고. 린과 스카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버지니아이고, 둘째가 스카이디라는 아들이란다. 버지니아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 주신 말도 탔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단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어. 특히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 아버지가 은밀히 버지니아를 애무하고 성추행을 하기 시작하다가 성폭행까지 한 거야. 아버지가 완전 변태였구나.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에게 버지니아를 맡겠는데 그 놈도 변태였어. 둘은 자신의 딸을 바꾸어 성폭행을 한 거야. 이제 고작 11살인 딸을 말이야. 짐승만도 못한 놈들. 엄마라도 딸을 보호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버지니아의 엄마는 버지니아를 멀리하고 딸이 성폭행 당하는 것을 외면했어. 완전 콩가루 집안이구나.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해서 요도가 감염이 되어 병원에 갔더니 처녀막이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엄마는 그때도 진실을 숨기고 승마 때문에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단다. 집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 같구나. 얼마 뒤에 버지니아는 초경을 겪었는데, 버지니아의 엄마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구나. 엄마의 무책임도 버지니아를 지옥으로 몰아넣어 원인 중 하나였단다. 아무도 버지니아의 편이 없었어. 친척들과 함께 캠핑장을 갔는데, 아버지가 버지니아를 때리는 일이 있었는데, 버지니아는 친척들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대.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버지니아는 집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불운한 경험을 겪었단다. 엄마는 버지니아를 ‘그로잉 투게더’라는 시설에 보내서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곳은 탄압과 강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어. 버지니아는 그곳에서 도망가다가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 탔는데 하필 그 사람이 또 다른 악마이었어. 모텔로 데리고 가서 성폭행하려고 했어. 그가 방심한 틈에 무작정 도망가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리무진에 태워줬는데 그의 집으로 끌고 갔어. 그곳에 자신과 비슷한 어린 소녀들이 있었어. 그 또한 착한 얼굴을 한 악마였단다. 그때 버지니아의 나이가 고작 15살이었단다. 행복하게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야 할 시절에 버지니아는 악마들 사이에 휩싸여서 자라났던 거야.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는데, 당시 아버지가 일하던 마러라고 리조트의 헬스 클럽 라커룸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단다. 마러라고 리조트는 트럼프가 주인으로 있는 리조트인데, 아버지의 소개로 트럼프를 만나게 되었고, 트럼프의 소개로 부잣집 베이비 시터로 일하기도 했대. 지금까지의 삶도 지옥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 헬스 클럽에서 그보다 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의 단짝인 길레인 맥스웰이란다. 길레인 맥스웰은 마러라고 클럽에 손님으로 왔다가 버지니아에게 마사지를 제안했단다. 버지니아도 생각하기를 마사지 기술을 배우면 생계 유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좋다고 했어. 그렇게 길레인이 버지니아를 어떤 저택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마사지를 가르친다면서 어떤 남자를 마사지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이었단다. 마사지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제프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단다. 그때 버지니아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단다. 어린 시절 성폭행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런 곳에 오게 되었구나. 그 이후 2년 동안 제프리 엡스타인와 길레인 맥스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단다.

 

2.

이후 엡스타인의 저택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 성접대, 마사지에 대한 기술을 배웠어. 누군가는 그곳에서 왜 도망가지 못하냐고 물어보지만, 어린 버지니아에게 그렇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가끔씩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버지니아는 늘 성폭행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부잣집에서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제프리 엡스타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엡스타인은 대학에서 과학 관련된 학과를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대. 이런 전공과 경력으로 나중에 과학계 저명 인사들과도 교류를 하게 되었대. 버지니아는 엡스타인의 저택에 머물면서 마사지를 배우고 어느 정도 마사지 실력이 늘어나자 엡스타인은 버지니아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기 시작했대. 그들은 대부분 재벌 또는 유력인사로 뉴스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어.

엡스타인과 길레인이 타겟으로 하는 소녀들은 생리를 막 시작한 앳되고, 약점이 있는 소녀들이었어. 버지니아는 그들의 강요에 의해서 자신도 다른 소녀들을 저택으로 데리고 온 적이 있는데 이 일로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했다는구나. 엡스타인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 소유의 리틀 세인트 제임스라는 섬을 가지고 있었어. 그곳에도 엡스타인 소유의 저택이 있는데 그곳에서 주로 성접대를 했단다. 버지니아도 그곳에서 성학대를 당했는데 이 때쯤에는 버지니아는 포기 반 순종 반 상태였던 것 같아.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들이 가라는 대로 갔어. 그러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은 버지니아를 믿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 버지니아에게 고급 사교 교육을 시키기도 했어. 외국에 다닐 때 버지니아를 데리고 가서는 그곳의 유력 인사에게 버지니아를 떠넘기기도 했어. 그렇게 그들과 함께 다니다가 영국의 앤드루 왕자를 만나게 된 거야. 그리고 그에게 성적 착취를 여러 번 당하게 된단다. 이 일이 나중에 드러난 이후 앤드루 왕자는 영국 왕족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단다.

…

엡스타인이 버지니아를 점점 믿는 것 같아서 버지니아는 서서히 탈출 계획을 세웠단다. 태국에서 마사지 전문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어. 그러자 아무 의심 없이 엡스타인은 태국의 8주 교육 코스를 신청하고 숙박도 예약해 주었단다. 그래서 처음으로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태국에 왔단다. 그때가 2002년 19살 때였어.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러 온 호주 사람 로비를 만나게 되어 둘은 첫눈에 반했단다.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버지니아는 자신이 살아왔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어. 로비는 그런 버지니아를 이해해주었고, 둘은 만난 지 10일만에 결혼했단다. 엡스타인이 사람을 보낼까 봐 걱정했는데 버지니아는 정면돌파를 선택했어. 버지니아는 엡스타인에게 전화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엡스타인은 ‘잘 살아라’하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어. 그것으로 이후 5년 동안 엡스타인과 연락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는구나. 이제는 로비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3.

버지니아와 로비는 태국 주변 나라로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호주로 가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단다. 로비의 부모님은 이탈리아 계였는데, 아들이 갑작스러운 결혼에 당황하셨을 법한데, 그래도 잘 대해주셨단다. 로비의 부모님 댁에서 잠시 지내다가 그들은 독립을 했단다. 여느 젊은 부부처럼 둘이 티격태격 할 때도 있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 2006년 첫 아들 알렉스가 태어났고, 2007년에는 둘째 타일러를 낳았단다. 그런데 둘째 타일러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5년만에 엡스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소름이 돋았다고 하는구나. 엡스타인과 길레인이 고발당한 상태라면서 검찰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어. 버지니아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고발당했던 엡스타인은 가벼운 형량에 보석금으로 금방 풀려났단다. 그를 조사했던 경찰은 엡스타인이 그렇게 보석으로 풀려나자 화가 나서 그가 십대 소녀들을 성착취하고 성매매했다는 증거를 확보해서 연방수사관을 찾아가 재고발을 했지만, 이번에도 엡스타인은 13개월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았어. 그것마저도 대부분 외부에서 출퇴근하는 혜택을 받았다는구나.

…

2010년 버지니아는 셋째 엘리를 출산했어. 얼마 후 영국 데일리 메일의 처처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어. 에드워즈 변호사가 도와준다면서 엡스타인의 저택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어. 영국 기자답게 앤드루 왕자의 성접대 이야기도 해달라고 했단다. 망설이던 버지니아는 텔레비전과 신문 등에서 앤드루와 엡스타인이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버지니아는 실명으로 그들의 만행을 밝히기로 결심했단다. 데일리메일과 인터뷰가 세상에 다시 내딛는 첫 번째 인터뷰였단다. 버지니아는 인터뷰 및 증거 등 자료를 제공하면서 기사 제보에 대한 일정 금액 보수를 받았단다. 언론사가 다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 줄 알았어. 이 일로 인해 돈 받고 인터뷰를 했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어. 사람들 참 못났구나. 자신의 딸이 그런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까. 이후 버니지아는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돈은 따로 받지 않았어.

다시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미국에 살고 있는 식구들이 생각났어. 특히 아버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그 점에 있어 버지니아를 이해할 수 없더구나. 자신을 낳아주긴 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하고 자신의 친구에게도 성폭행하게 하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란 말인가. 그냥 짐승새끼지.. 하지만 버지니아는 가족이 필요했나 봐.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호주로 두 차례 초대를 했단다. 하지만 그 짐승새끼는 여전히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버지니아에게 고의로 음란 사진을 보여주곤 했어. 그 일을 남편 로비가 알게 되어 로비는 버지니아의 아버지가 크게 싸우고 아버지는 일찍 미국으로 돌아갔단다.

아버지 말고도 오빠 대니와 동생 스카이디도 보고 싶고 고향이 무척 그리웠어. 결국 버지니아와 로비는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했단다. 아빠는 버지니아의 이 선택도 이해가 가질 않았단다. 악몽 같은 기억만 있는 고향으로 가면 아픈 옛기억만 다시 떠오를 텐데 말이야. 미국에 도착해서도 에드워즈 변호사, 시그리드 변호사와 함께 제프로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의 만행을 계속 폭로했단다. 오빠 대니와 남동생 스카이디는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도 있었어.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와 만나면서 지냈는데, 아버지가 그들의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대니와 스카이디는 버지니아가 어린 시절 아빠한테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어. 그제서야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손주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니와 스카이디에게 아버지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한 짓을 이야기했단다. 대니와 스카이디가 놀란 것은 당연했어. 대니는 그 이후 아버지와 의절을 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 버지니아가 엡스타인으로부터 성착취를 당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엡스타인으로부터 모른 척 해달라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거야. 아빠가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짐승새끼라고 했는데,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할 것 같구나.

버지니아는 더 이상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플로리다를 떠나 콜로라도로 이사갔단다. 콜로라도에는 엄마가 새아버지와 살고 있었어. 버지니아의 어린 시절 엄마도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버지니아에게는 살가운 가족의 품이 그리웠나 봐. 콜로라도에서 버지니아는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단다.

…

 

4.

에드워즈 변호사와 시그리드 변호사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ABC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고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했으나 끝내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단다. 엡스타인의 로비로 ABC 방송국 같은 거대한 방송국의 방송까지 막은 거야.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한편 로비의 아버지 프랭크가 암 투병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리고 미국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그래서 다시 호주로 돌아가기로 했단다. 호주로 돌아오긴 했지만 버지니아는 소송으로 미국에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단다. 엡스타인은 여러 차례 재판에 섰지만, 파트너인 길레인 맥스웰은 지난 6년 동안 교묘히 빠져나가 재판을 안 받다가 2015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단다. 길레인은 재판에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민사 소송을 진행해야 했어. 버지니아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고발을 하게 되자 다른 피해자들도 용기를 내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 참석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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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이애미 해럴드 소속 탐사저널리스트 줄리 K. 브라운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엡스타인 탐사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 이 탐사 보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엡스타인의 만행을 알게 되었어. 그런 여론에 힘입어 엡스타인은 2019년 7월 다시 성매매와 인신매매 등으로 체포되었어. 이 때 즈음 버지니아는 미국연방수사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 버지니아의 생명을 노리는 징후를 포착했다면서 조심하라고 했어. 그래서 버지니아는 자신은 절대 자살하지 않겠다는 글을 게시했단다. 혹시 자살로 의문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글을 쓴 것이야. 그런데 2019년 8월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간수들이 감사하는 교도소에서 어찌 자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타살 논란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그의 죽음은 자살로 일단락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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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543)

실제로 엡스타인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었음에도 자살 감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한때는 수감실 동료가 있었지만, 사망 당일 밤에는 혼자 수감실을 쓰고 있었다. 엡스타인의 수감실에서 불과 15피트(약 5미터) 떨어진 책상에 앉아 있던 간수 두 명은 밤 10시 30분부터 아침 6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순찰하며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간수들은 잠을 자거나 인터넷 서핑을 했고, 나중에 순찰을 마친 것처럼 기록지를 조작했다. 엡스타인의 자해 행위나,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엡스타인을 살해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보안 카메라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작동 중이었던 다른 카메라들을 확인해보니 엡스타인이 사망한 밤에 해당 구역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자객이 몰래 침입했을 가능성은 배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엡스타인의 동생이 고용한 법의학 전문의의 공식 부검 보고서로 상황은 반전됐다. 그는 엡스타인의 목 부위에서 발견된 골절과 연골 파손 흔적이 “타살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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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었지만 길레인을 비롯한 공범들은 아직 있었어. 그리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언론 매체들에서도 더 많은 취재를 하기 했단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에서 엡스타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했어. 버지니아도 더 많은 매체에 나가서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의 만행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단다. 아픈 과거를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버지니아에게도 힘든 일이었어. 결국 숨어 지내던 길레인 맥스웰도 체포되었어. 버지니아는 미국과 호주를 오가는 강행군 때문인지 수막염에 심하게 걸렸고 그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목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고 말았어. 수술을 했지만 목에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일반적인 생활도 쉽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재판 등 공적인 일도 계속 했단다. 그런 와중에 2020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때문에 활동도 쉽지 않았어.

엡스타인 사건의 핵심 가해자였던 앤드루 왕자로부터 결국 사과를 받아내고 합의금을 받아냈단다. 앤드루는 왕족 자격 박탈을 당하는 수모도 당했어. 그리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하던 길레인 맥스웰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받았단다. 그간 노력이 어느 정도 보상이 된 기분이었지만, 버지니아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았어. 재판을 진행하면서 잊혀졌던 일들이 다시 또렷이 기억되면서 트라우마가 생겨났고, 목뼈 골절 후유증으로 고통은 날로 심해졌단다. 그러다 보니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고 진통제를 한꺼번에 240개를 먹기도 했어. 다행히 가족들이 발견하여 살아났어. 버지니아는 가족들을 보면서 다시 삶의 의지를 찾기도 했단다. 그런데 하늘은 버지니아를 그냥 두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섬유조직염이라는 병에 걸려 전신에 극심한 통증과 압통을 겪어야 했단다.

…

비록 너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실명으로 밝히지 못하는 가해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버지니아는 희망을 이야기했단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도록 범죄예방을 집중하는 단체를 지원하고 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는 기금을 마련하는 계획도 세웠단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행복을 찾는 일상을 살아가겠다면서 책은 끝이 났단다.

그래서 행복하게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면 좋았겠지만 결말은 그렇지가 않았단다. 책의 앞부분에 이 책의 편집자 에이미 월러스의 말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남편 로비 덕분에 버지니아가 일상을 찾긴 했지만, 그들의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단다. 나중에는 남편 로비가 버지니아에게 폭행을 했었던 것 같아. 버지니아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던 것 같고… 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대. 거기에 2025년 3월 버지니아는 교통사고로 더 다쳐 몸은 더 안 좋아졌대. 이 책을 준비하면서 출판사 편집자와 메일을 주고 받는 일이 받았는데, 죽음을 암시하는 글들이 있었고 자신이 죽어도 책은 꼭 출간해 달라는 메일을 남긴 채 2025년 4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구나.

…

그 어려운 시절을 다 견뎌냈는데, 하늘은 계속해서 버지니아를 시험대에 올려 놓았고, 결국 계속되는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프더구나. 하지만 몇 년 전 버지니아가 자신은 절대로 자살을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버지니아의 자살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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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그러던 중 트위터에서 누군가 “미국 연방수사국이 초부유층과 권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성 글을 올렸고, 나는 이에 응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만약 내가 갑작스럽게 죽는다면, 누구도 사고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의사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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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버지니아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져서 읽기 쉽지 않았지만, 한 개인이 거대 세력을 맞서 싸운 기록이고, 책 띠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꾸려고 한 인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피해가 없길 바란다.

오늘은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책의 끝 문장: 고로 이 책이 우리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현실로 단 한 걸음이나마 더 다가서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단 하나의 삶이라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소명을 다한 셈이다.

 


나는 괴물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친족 성폭력, 부모의 방임, 심각한 폭행과 추행, 강간까지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10대가 되어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다른 소아성애자들에게 성착취를 당했고, 두 사람은 내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빌려주었다. 나는 반복적으로 이용당하고 모욕당했으며, 목이 졸리거나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성노예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막 넘긴 무렵,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2002년에 탈출했다. - P29

알레시는 지시대로 차를 세웠고 차에서 내린 맥스웰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또다시 포식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이번 포식자는 이전에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아버지와 포리스트, 론 에핑거, 혹은 에핑거가 떠넘긴 남자와도 달랐다. 맥스웰은 ‘최상위 포식자’였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침착하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지만, 속은 그만큼 탐욕스럽고 욕심도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맥스웰의 매혹스러운 외면을 꿰뚫어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말처럼 본능적으로, 내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지 알아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맥스웰에 대한 첫인상은 마러라고에서 만났던 다른 부유한 손님들을 처음 맞이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나중에 그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138

마음속에는 또 다른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일곱 살 때와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이 된 나도 윗사람들한테 칭찬받고 싶어 했고 실제로 칭찬도 자주 들었다.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돈만 건네받는 게 아니었다. 당시 내게 돈보다 간절했던 말도 함께 들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수치심과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도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만족이라고 여겼다. 이처럼 서로 어긋나는 감정이 한곳에 엉켜 새긴 매듭을 풀어내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 P224

평범한 여자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요세프버그 부녀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편과도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 앞에 나서는 일을 진지하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딸들이 어떤 일을 견뎌야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 우리가 그 비극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멘토였던 루스 메노어가 말 한 마리로 비영리 단체 빈세례모 센터를 일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 같은 이들을 위해 그런 터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잠든 뒤, 로비와 나는 잠들 때까지 서로의 두려움과 희망을 속삭이듯 주고받았다. 나를 짓밟은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이제는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확신이 뚜렷해졌다. - P400

삶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이따금 뉴스나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이름이나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이 성적인 행위를 하라고 강요했던 수많은 유명 남성이 그곳에 불쑥 나타났다. 나를 직접 학대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만났던 저명인사의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도 그에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가령 빌 클린턴이 조지 W. 부시와 함께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의 복구 작업을 지원하러 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득히 전생 같은 과거에 미국의 국군통수권자였던 이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 아찔해졌다. - P403

나는 정말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엡스타인과 맥스웰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 채 낯선 타국으로 끌려다니던 처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 단단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저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겁 많은 소녀는, 아제 가해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신념의 상징으로 대중 앞에 선 강인한 여성이 되었다. 비방 세력이 부모의 자질을 운운하며 내 아이들까지 공격의 과녁으로 삼았을 때, 내 안의 분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맹렬함으로 타올랐다. - P469

가슴 아픈 고백이지만,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훨씬 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엡스타인 사건을 그저 운 나쁘게 불거진 유례없는 일로 치부하려 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가 사냥한 피해자의 수가 워낙 막대해 독보적인 괴물처럼 보일 뿐, 그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여성을 소모품처럼 여기고 함부로 다루는 그 오만한 시각은, 법망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는 현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지금도 아무런 제약 없이 일상을 영위하며, 견고한 권력의 울타리 안에서 평온을 누리고 있다. - P635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앤드루 왕자의 합의금이 지급됨에 따라, 나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나의 재단 ‘소어’를 전문적인 조직으로 키워나가기 위한 길고 신중한 과정을 시작했다. ‘소어’의 목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집중하는 단체들을 지원함으로써 인신매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나아가 대중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의 징후를 더 쉽게 포착할 수 있도록 돕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뒷받침하는 기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왕실에서 나온 그 돈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데 쓰일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 P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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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ㅣ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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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었단다. 클라우드 시리즈는 시대를 앞서 살아간 거장 100명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시리즈란다. 기행문과 평전의 콜라보라고 할 수도 있지. 아빠는 그 동안 세 편을 읽어보았는데, 그 인물에 대해 알게 되어 좋고, 책에서 소개된 곳을 가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단다. 모두 100권을 출간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38권까지 출간되었더구나. 그 클라우드 시리즈의 시작인 1권이 오늘 이야기할 <셰익스피어>란다.

셰익스피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그를 거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여 1권을 셰익스피어로 정하지 않았나 싶구나. 아빠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리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구나.  셰익스피어 작품이 대부분이 희곡인데, 아빠에게는 희곡 읽기는 소설보다 쉽지 않거든. 그래서 다른 고전보다 손이 적게 가더라구. 조금씩 천천히 찾아서 읽어는 볼 생각은 있단다.

 

1.

클라우드 시리즈 1권 <셰익스피어>는 2018년 출간되었고, 지은이 황광수 님이 셰익스피어를 발자취를 여행한 것은 2014년이었단다. 2014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지 450년 되던 해로 많은 행사들이 있었던 해라고 하는구나.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스트랫퍼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대. 그의 생가는 여전히 잘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대. 그의 생가가 잘 보존된 것은 후대 작가들이 돈을 기부하여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아버지는 존 셰익스피어는 장갑 장인이자 지방 최고 행정관이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어려운 일들이 계속 겹쳤어. 윌리엄 이전에 태어난 형제들은 모두 흑사병으로 죽고 말았대. 어렸을 때의 기록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데, 18살에 결혼을 하고 26살에 연극무대에 짠 하고 나타날 때까지 약 8년 간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셰익스피어 평전을 쓰는 작가들이 이 시절을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채운다고 하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꽤 있어서 셰익스피어가 그 시절에 이탈리아에 갔었다는 설도 있지만,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에 간 적은 없다고 하더구나.

….

18살에 윌리엄은 26살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을 하는데, 과속을 해서 결혼을 서두른 것 같다고 했어. 결혼한 지 6개월만에 첫 딸을 출산했대. 그런데 아내의 이름이 너무나 유명한 배우의 이름과 똑같구나. 영화배우 앤 해서웨이의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지 궁금하더구나.

지은이 황광수 님은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을 떠나 런던으로 이동했어. 그리고 런던을 배경으로 작품인 <헨리 6세>, <심벌린> 등을 이야기를 했어. 이렇게 지은이의 여행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배경이 되는 곳들이었어. 그 많은 작품들의 모든 배경지를 갈 수 없었지. <멕베스>의 경우는 스코틀랜드가 배경인데, 그곳을 못가는 아쉬움을 이야기하면서 <멕베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

런던을 떠나 파리로 향했어. 너희도 좋아하는 도시 파리. 파리에는 셰익스피어 관련된 서점이 하나가 있단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서점인데, 우리가 간 날은 하필 쉬는 날이라서 닫힌 문만 보고 왔잖니. 언젠가는 문을 연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가 볼 수 있겠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유명한 작가들도 즐겨 찾던 서점을 유명해져 지금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된 서점이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파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 <끝이 좋으면 다 좋다>를 소개해주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의 집으로 이동했어. 괴테의 집에 방문한 이유는 괴테가 셰익스피어를 극찬해서

시로 남길 정도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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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특성, 즉 외적 감각에 호소하기보다는 내적 감각에 호소하는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우리의 내적 감각을 향해 말한다. 이것을 통해, 상상의 그림 세계가 활성화되며, 완벽한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덧붙일 수 없다. 정확하게 여기에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환상의 바탕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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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프라하, 부다페스트, 빈을 거쳐서 이탈리아로 넘어갔단다. 셰익스피아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어. 베로나를 배경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오셀로>, 로마를 배경으로 한 <페리클레스>를 설명해주었어. 아빠가 셰익스피어를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도 참 많더구나.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지도자와 이름은 같지만 다른 인물을 그린 작품이래. <페리클레스>는 서아시아와 지중해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를 엮은 희곡이라고 하는구나.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라는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배경으로 썼다는구나.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실수연발>이라는 작품은 고대 시라쿠사 사람들의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은 네 남녀의 사랑싸움 이야기, <아테네의 티몬>은 몰락한 자본가의 이미지를 통해 돈의 속성을 비꼬는 희곡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나중에 읽을 책을 고민할 때 이 책의 차례를 보고 하나 골라서 읽어도 좋을 것 같구나. 오늘은 독서편지가 밀린 것도 있으니 이렇게 짧게 마치련다. 양해 바람.

 

PS,

책의 첫 문장: 어스푸레한 방 안에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불멸성에 관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알지 못한다.



안내판 뒤쪽으로 "내 뼈를 옮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폭풍>을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하고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16년 몸져누웠다. 그의 생애와 함께 흘러왔던 모든 것, 그가 이룩했던 모든 것이 절대적 단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먼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한번 쓰고 고치는 법이 없었던 창작과 달리, 고칠 때마다 새로 작성한 유서가 무려 134통이나 되었다. - P83

로마인들이 배스를 건설한 것은 기원후 60년이었으니, 그들의 열정은 거의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나를 불가항력적인 감탄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대략 기원전 50년부터 5세기 동안 브리튼을 지배했다. 그들이 로마의 군대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산과 들과 강을 피로 물들였다. 브리튼인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제국은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샘의 족장들은 제각기 왕국을 건설하여, 브리튼에 일곱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이른바 ‘앵글로 색슨 7왕국’이다.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들은 로마제국에 대해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 P107

로미오는 자신을 순례자로, 줄리엣을 성자로 비유하며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렇지만 그가 사용하는 종교적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베일일 뿐이고, 이들의 행동과 말에는 자연적 세계관이 더 깊이 침투해 있다. 이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그들의 욕망은 자연의 의지 또는 본성일 뿐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던 이 세계관은 심리적 층위와 제도 및 관습적 층위 사이의 충돌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말투에 역설과 모순을 주입한다. - P200

전쟁 속의 사랑을 이만큼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이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두 남녀의 사랑을 참담한 역사적 현실 속에 던져두고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극’이라는 미학적 전형까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투철한 현실주의와 빛나는 실험 정신이 런던의 극장가에서 환영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사랑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P238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대담한 말장난, 비유와 생략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이다. 사회적 안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발화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협받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에게는 글쓰기의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불화하는 인식론(또는 지식이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몹시 당혹스러운 딜레마이며,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다수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들을 이해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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