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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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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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었단다. 클라우드 시리즈는 시대를 앞서 살아간 거장 100명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시리즈란다. 기행문과 평전의 콜라보라고 할 수도 있지. 아빠는 그 동안 세 편을 읽어보았는데, 그 인물에 대해 알게 되어 좋고, 책에서 소개된 곳을 가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단다. 모두 100권을 출간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38권까지 출간되었더구나. 그 클라우드 시리즈의 시작인 1권이 오늘 이야기할 <셰익스피어>란다.

셰익스피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그를 거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여 1권을 셰익스피어로 정하지 않았나 싶구나. 아빠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리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구나셰익스피어 작품이 대부분이 희곡인데, 아빠에게는 희곡 읽기는 소설보다 쉽지 않거든. 그래서 다른 고전보다 손이 적게 가더라구. 조금씩 천천히 찾아서 읽어는 볼 생각은 있단다.

 

1.

클라우드 시리즈 1 <셰익스피어> 2018년 출간되었고, 지은이 황광수 님이 셰익스피어를 발자취를 여행한 것은 2014년이었단다. 2014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지 450년 되던 해로 많은 행사들이 있었던 해라고 하는구나.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스트랫퍼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대. 그의 생가는 여전히 잘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대. 그의 생가가 잘 보존된 것은 후대 작가들이 돈을 기부하여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아버지는 존 셰익스피어는 장갑 장인이자 지방 최고 행정관이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어려운 일들이 계속 겹쳤어. 윌리엄 이전에 태어난 형제들은 모두 흑사병으로 죽고 말았대. 어렸을 때의 기록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데, 18살에 결혼을 하고 26살에 연극무대에 짠 하고 나타날 때까지 약 8년 간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셰익스피어 평전을 쓰는 작가들이 이 시절을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채운다고 하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꽤 있어서 셰익스피어가 그 시절에 이탈리아에 갔었다는 설도 있지만,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에 간 적은 없다고 하더구나.

….

18살에 윌리엄은 26살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을 하는데, 과속을 해서 결혼을 서두른 것 같다고 했어. 결혼한 지 6개월만에 첫 딸을 출산했대. 그런데 아내의 이름이 너무나 유명한 배우의 이름과 똑같구나. 영화배우 앤 해서웨이의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지 궁금하더구나.

지은이 황광수 님은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을 떠나 런던으로 이동했어. 그리고 런던을 배경으로 작품인 <헨리 6>, <심벌린> 등을 이야기를 했어. 이렇게 지은이의 여행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배경이 되는 곳들이었어. 그 많은 작품들의 모든 배경지를 갈 수 없었지. <멕베스>의 경우는 스코틀랜드가 배경인데, 그곳을 못가는 아쉬움을 이야기하면서 <멕베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런던을 떠나 파리로 향했어. 너희도 좋아하는 도시 파리. 파리에는 셰익스피어 관련된 서점이 하나가 있단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서점인데, 우리가 간 날은 하필 쉬는 날이라서 닫힌 문만 보고 왔잖니. 언젠가는 문을 연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가 볼 수 있겠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유명한 작가들도 즐겨 찾던 서점을 유명해져 지금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된 서점이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파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 <끝이 좋으면 다 좋다>를 소개해주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의 집으로 이동했어. 괴테의 집에 방문한 이유는 괴테가 셰익스피어를 극찬해서

시로 남길 정도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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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특성, 즉 외적 감각에 호소하기보다는 내적 감각에 호소하는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우리의 내적 감각을 향해 말한다. 이것을 통해, 상상의 그림 세계가 활성화되며, 완벽한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덧붙일 수 없다. 정확하게 여기에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환상의 바탕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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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프라하, 부다페스트, 빈을 거쳐서 이탈리아로 넘어갔단다. 셰익스피아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어. 베로나를 배경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오셀로>, 로마를 배경으로 한 <페리클레스>를 설명해주었어. 아빠가 셰익스피어를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도 참 많더구나.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지도자와 이름은 같지만 다른 인물을 그린 작품이래. <페리클레스>는 서아시아와 지중해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를 엮은 희곡이라고 하는구나.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라는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배경으로 썼다는구나.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실수연발>이라는 작품은 고대 시라쿠사 사람들의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은 네 남녀의 사랑싸움 이야기, <아테네의 티몬>은 몰락한 자본가의 이미지를 통해 돈의 속성을 비꼬는 희곡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나중에 읽을 책을 고민할 때 이 책의 차례를 보고 하나 골라서 읽어도 좋을 것 같구나. 오늘은 독서편지가 밀린 것도 있으니 이렇게 짧게 마치련다. 양해 바람.

 

PS,

책의 첫 문장: 어스푸레한 방 안에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불멸성에 관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알지 못한다.



안내판 뒤쪽으로 "내 뼈를 옮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폭풍>을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하고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16년 몸져누웠다. 그의 생애와 함께 흘러왔던 모든 것, 그가 이룩했던 모든 것이 절대적 단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먼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한번 쓰고 고치는 법이 없었던 창작과 달리, 고칠 때마다 새로 작성한 유서가 무려 134통이나 되었다. - P83

로마인들이 배스를 건설한 것은 기원후 60년이었으니, 그들의 열정은 거의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나를 불가항력적인 감탄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대략 기원전 50년부터 5세기 동안 브리튼을 지배했다. 그들이 로마의 군대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산과 들과 강을 피로 물들였다. 브리튼인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제국은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샘의 족장들은 제각기 왕국을 건설하여, 브리튼에 일곱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이른바 ‘앵글로 색슨 7왕국’이다.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들은 로마제국에 대해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 P107

로미오는 자신을 순례자로, 줄리엣을 성자로 비유하며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렇지만 그가 사용하는 종교적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베일일 뿐이고, 이들의 행동과 말에는 자연적 세계관이 더 깊이 침투해 있다. 이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그들의 욕망은 자연의 의지 또는 본성일 뿐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던 이 세계관은 심리적 층위와 제도 및 관습적 층위 사이의 충돌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말투에 역설과 모순을 주입한다. - P200

전쟁 속의 사랑을 이만큼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이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두 남녀의 사랑을 참담한 역사적 현실 속에 던져두고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극’이라는 미학적 전형까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투철한 현실주의와 빛나는 실험 정신이 런던의 극장가에서 환영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사랑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P238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대담한 말장난, 비유와 생략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이다. 사회적 안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발화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협받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에게는 글쓰기의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불화하는 인식론(또는 지식이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몹시 당혹스러운 딜레마이며,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다수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들을 이해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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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평전 - 한글운동의 선구자
김삼웅 지음 / 꽃자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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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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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김상웅 님의 인물 평전을 가끔 읽는데, 오늘은 그런 책읽기의 일환으로 김삼웅 님의 <주시경 평전>을 읽었단다. 근현대에 한글 운동을 하신 주시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주시경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적을 것 같구나. 아빠도 그랬거든. 어린이를 위한 주시경 위인전은 좀 있어도 어른들이 볼만한 주시경에 관한 책이 적은 것 같았어.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주시경은 짧은 삶을 살다가 가셨더구나. 그래서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한글 사랑만큼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분이란다.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에서 태어나셨는데, 같은 해에 백범 김구도 황해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김구보다 훨씬 앞 세대이신 줄 알았는데, 동년배셨구나. 주시경이 1914 37세 나이로 요절해서 그렇게 생각이 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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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국난기에 인재가 많이 나타나듯이, 같은 해에 황해도 해주에서 백범 김구가 출생하였다. 김구와 주시경은 걷는 길이 달랐으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김구는 동학에 들어가 소년접주가 되고 신민회 참가, 105인 사건, 투옥, 해외망명, 임시정부 주석 등을 지내며 항일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에 참여한 이후 국내에서 한글과 국문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짧은 생애를 바쳤다. 독립협회 등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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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의 본명은 주상호로 어렸을 때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지냈어. 그리고 좀 커서는 서울에 가서 배재학당에서 공부를 했대.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나갔단다.

 

1. 한글은 우리나라의 정체성

배재학당에서 많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스승으로 있던 서재필과 인연을 맺게 되어 20대 초반에 최초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게 된단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자신의 글을 싣기도 했어. 이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의 위원으로 참여했단다.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려고 한다는 헛소문이 돌았는데, 이 헛소문 때문에 독립협의 간부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어. 이때 주시경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단다. 이 헛소문은 영향력이 세지는 진보세력인 독립협회를 무너뜨리려고 한 친러수구파들이 조작한 것이었어.

서재필이 미국으로 떠난 후에, 주시경은 이종일이 창간한 <제국신문>에서 근무했단다. 제국신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수 성향의 신문이라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신문은 순한글로 된 신문으로 대중과 부녀자를 상대로 한 신문이었단다. 주시경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하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국민계몽운동에 동참하였고, 청년학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1906 <대한국어문법>이라는 문법책을 출간했단다. 그 전까지 제대로 된 한글 문법에 대한 책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맞춤범과 문법 체계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1907년에는 <안남망국사>를 번역하여 반면교사로 삼게 했단다. 3년뒤 결국 우리나라도 망하고 말았지만… 1907년에는 또 대한제국 학부에 국문연구소가 창립되었는데, 이곳의 책임위원으로 위촉이 되어 활동했단다. 그래서 <국문연구의정안>을 작성하여 한글의 문자 체계와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했어. 나라가 위기가 빠졌던 당시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를 썼는데, 주시경은 한글을 통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신 거야. 그야말로 한글 연구와 보급에 모든 걸 걸었어. 사실 우리나라와 한글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잖니. 한글은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일맥상통하고 말이야. 주시경 또한 한글이 곧 우리나라임을 여러 글을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1910 <국어문법>의 서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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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74)

이 마음이 없으면 몸이 있어도 그 몸이 아니요, 터가 있어도 터가 아니니, 그 국가의 성쇄도 언어의 성쇄에 있고, 국가의 존부도 언어의 존부에 있는 것이니, 그 국가의 존부에 있는 것이니, 그 국가의 존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금의 세계 열국이 각각 제 언어를 존숭하여, 그 언어를 기록하여 그 문자를 각각 자음이 다 이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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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국어문전음악>, <소리길>을 출간하였어. 주시경이 한글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국문연구소의 책임의원으로 했던 것인데,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면서 국문연구소는 강제 폐지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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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광문회에 참여하여 국어사전 편찬 준비를 했어. 광문회는 후에 조선어학회로 되었고, 광복 후에는 한글학회가 되었단다. 광문회에서 활동하던 주시경은 처음으로 우리글을 한글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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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 님이 지어 쓰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나,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는 신문관 발행의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다. 이 이름이 일반화하게 된 것은 한글학회전신인 조선어연구회’(1921 12 3일 창립)에서 1927 2 8일 창간한 기관지 <한글>을 발행한데 이어 또 훈민정음 반포 8주갑 병인면(1926) 음력 9 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하여 가갸날로 명명한 뒤, 1928년에는 가갸날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1946 10 9한글날이 공휴일로 제정되면서부터라 하겠다. 그런데 이 한글이란 이름을 제일 먼저 지은 분은 신명균(1889~1941) 님이라고도 하고, 최남선(1890~1957) 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믿을 만한 말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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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1914 7 27일에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병명은 허로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빈한에 의한 영양실조와 과도한 연구와 강의에 의한 과로사로 추정된다고 하는구나. 주시경 선생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고 한글 연구를 더욱 해주시고 광복까지 맞이했다면 우리나라 한글은 더 발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구나. 주시경 선생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의 제자들이 이어서 한글 운동을 주도하였단다. 남한에는 최현배 님이, 북한에서는 김두봉 님이 바로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한글 운동을 이어가셨다고 하는구나.

이 책의 편집 상태가 좀 아쉬웠단다. 그 전에 김삼웅 님의 평전들을 보면, 인용한 글들은 문단을 달리 하고 들여쓰기와 글자 크기를 작게 해서 확실히 구분을 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었단다. 그래서 이 글이 지은이 김삼웅 님의 글인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단다. 그렇게 아쉬운 편집이었지만, 그래도 주시경 선생의 짧지만 뜨거운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의 열정을 자세히 알게 되어 좋았단다.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려는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지는데, 이런 것들이 주시경 선생 같은 분들의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단다. 주시경 선생의 삶과 생각을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의 삶은 짧았지만, 그의 사상은 영원하리.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리나라의 심장부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학자나 사상가의 이름이나 아호를 붙인 연구소가 많이 설립되어 우리의 학문이 건전한 토대 위에 서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글은 지난 700년 동안 한민족의 정체성이고, 분단 70년이 되는 지금 남북 겨레의 공통점이다. 남북 8천 만 겨레와 해외 교포 교민 800만의 원형질이다. 이 원형질은 한국어(조선어)를 통해 공유된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우리가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한 언어는 한국어뿐이다. - P12

조선 글자가 페니키아에서 만든 글자보다 더 유조하고 규모가 있게 된 것은, 자모음을 아주 합하여 만들었고, 단지 받침만 때에 따라 넣고 아니 넣기를 음의 돌아가는 대로 쓰나니, 페니키아 글자 모양으로 자모음을 옳게 모아 쓰려는 수고가 없고, 또 글자의 자모음을 합하여 만든 것이 격식과 문리를 더 있어 배우기가 더욱 쉬우니, 우리 생각에는 조선 글자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학문이 있는 글자로 여겨지노라. - P78

가령 동서양 사기(史記)라든지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든지 법을 규칙 같은 천만사를 모두 국문으로 번역하고 아무쪼록 국문을 연구하여 남이 알기 쉽도록 만들겠더면 사람마다 세계 형편도 알기 쉬울 것이요, 성경현전의 좋은 말과 좋은 행실을 보아서 모두 지식도 늘도 행실도 점잖아질 터이요, 내 나라 일과 남의 나라 일을 보아 분변하는 애국성(愛國性)도 생길 터이거늘, 한문으로 기록한 책만 보아야 하겠고 수 십 년을 공부하여야 성공할는지 말는지 한 한문 공부만 하여야 될 줄만 아나니,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은 아니로되 국문을 등한히 여기고 힘쓰지 아니할 것이 아니기로 두어 마디 설명 하거니와 국문이 발달되는 날에야 우리 대한이 세계에 독립부강국이 될 줄로 짐작하노라. - P151

다시 해가 바뀐 1909년 2월 23일 통감부는 출판물의 원고 검열과 배일 항일 출판물의 압수를 합법화하는 출판법을 공포했다. 이 조처로 연말까지 5,767권의 민족운동 관련 책이 압수되어 소각되거나 일본으로 실려갔다. 9월 2일을 기해 일본군이 남한의병 대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의 씨를 말렸다. 영국 기자 F.A. 맥켄지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전하며, 번잡하고 유복했던 마을 제천이 "온전한 벽도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그릇도 하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고 보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학살에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모두 탈취하고 모두 불태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 P166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리라.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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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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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책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몇 년 전에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책을 읽고 프라다 칼로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안타까운 그의 삶과 독특한 미술세계로 인해 아빠의 뇌리에 각인된 그런 화가였단다. 그래서 언젠가는 프라다 칼로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시에는 프리다 칼로에 관한 적당한 책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단다. 얼마 전에 다시 문득 프리다 칼로가 생각이 나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아빠 취향에 맞는 책이 한 권 검색되더구나.

그 책이 바로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줄 서정욱 님의 <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였단다. 간단히 책 소개를 읽어보고 괜찮을 것 같아서 구매하긴 했는데, 혹시 책이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을 했단다. 아무래도 아빠와 거리가 먼 미술과 화가에 관한 이야기잖니. 그런데 책은 자세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쓰여 있었어. 문장도 높임말로 말하듯 쓰여 있어서 마치 지은이가 이야기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단다. 이 책을 통해서 프리다 칼로의 삶과 그림을 알게 되어 좋았단다. 여전히 프리다 칼로의 안타까운 사고와 그로 인해 고통을 점철된 삶은 여전히 안타깝구나.

 

1.

프리다 칼로는 1907 7 6 4녀중 셋째 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독일계, 어머니는 멕시코계였어.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라던 프라다 칼로는 의사를 꿈꾸며 공부하던 어느날. 그 어느날은 1925 9 17일이었어. 프리다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프리다가 쇠파이프가 몸을 관통하는 끔찍한 중상을 입고 말았단다. 당시 병원에서는 프리다에 대해서 어렵다고 판단하여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프리다의 남자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는 병원에 간절히 부탁을 해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극적으로 살아났다고 했어.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프리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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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간과 사람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그 순간을 함께했던 유일한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하면 떠오르는 그 사고의 순간에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던 그 사고에서 프리다 칼로를 처음 목격한 의사는 그녀의 치명적인 부상을 보고 그녀를 포기하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렸던 사람도 그 사람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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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가 극적으로 살아나기는 했지만, 자신도 일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자신의 꿈인 의사도 포기하고,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단다. 알레한드로의 부모는 프리다와 자신의 아들을 떨어뜨려놓기 위해 아들을 멀리 유럽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어. 프리다는 알레한드로를 붙잡기 위해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프리다가 그린 여러 자화상들 중에 가장 아름답게 그림 그림이라고 하는구나. 아빠가 오늘 독서 편지에서 소개한 그림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들쳐보던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서 확인해 보렴.

프리다 칼로는 자화상도 많이 그렸고, 주변 인물들도 많이 그렸는데 자신의 남자 친구였던 알레한드로를 그린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의 초상>이란 그림을 그렸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28년인데, 1952년이 되어서야 알레한드로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쭉 개인 소장으로 있다가 1994년 알레한드로가 죽은 이후 그의 집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하더구나. 프리다 칼로의 여러 작품들이 그렇게 나중에 공개되는 경우가 꽤 있었어.

 

2.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자 멕시코에서는 국민화가로 알려져 있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사람이란다. 프리가 칼로보다 21살이나 많고 이미 두 번이나 이혼을 했고, 바람둥이로 소문이 난 디에고 리베라. 주변에서 만류를 했음에도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을 한단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로부터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치료비로 거금이 나가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를 진심으로 사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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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27)

이런 모든 상황에도 프리다 칼로는 남편을 비하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디에고 리베라. 시작

           디에고 리베라. 창조자

           디에고 리베라. 내 아이

           디에고 리베라. 내 남자 친구

           디에고 리베라. 화가

           디에고 리베라. 내 연인

           디에고 리베라. 내 남편

           디에고 리베라. 내 친구

           디에고 리베라. 내 어머니

           디에고 리베라. 내 아들

           디에고 리베라.

           디에고 리베라. 우주

           통합의 다양성

           왜 나는 그를 디에고 리베라라고 부르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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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에고와 결혼을 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원했지만, 바람 피우기를 밥 먹듯이 하는 디에고와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안정된 삶이었을 거야. 심지어 디에고는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도 바람을 피웠어. 프리다는 디에고와 동생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추억(심장)> 1937년에 그렸단다. 이 그림은 심장이 몸 밖에 나와 있는 그림으로 프리다 그림은 초현실주의와 보기 불편한 그림으로 화풍에 변해갔단다. <두 명의 프리다>라는 작품도 심장에 몸 밖으로 나와 있는데, 이 또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그림이었어.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 남편의 계속된 이혼 요구로 1939년 이혼을 하게 되었고, 마음의 고통을 <숲 속의 두 누드>로 표현하였단다. (1939년 작)

프리다 칼로는 이런 마음의 고통을 위로 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위로가 된다면 여자도 상관없었어. 한 때 동성 연애도 했다고 했어, 그리고 얼마 후 프리다 칼로는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은 다시 디에고 리베라였단다. 다시 합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그 이후에도 자주 별거를 했다는구나. 1940년 이후 본격적인 개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프리다 칼로의 걸작들이 나오기 시작했대. <가시목걸이와 벌새가 나오는 자화상> (1940년 작)도 이 즈음 그렸어. <디에고와 프리다>(1944년 작)는 프리다와 디에고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그림이래. 이 책에서는 각 그림들을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풀어주는 느낌으로 아주 좋았단다.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대부분 휘발되었구나.

1949년 디에고는 영화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바람을 피웠는데, 프리다는 이를 <디에고와 나>라는 그림으로 대응을 했단다.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유명한 미국의 팝가수 마돈나도 프리나 칼로의 대표적인 광팬이라고 하는구나. 마돈나가 보유한 프리다의 그림이 있는데 <나의 탄생>(1932)이라는 그림인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프리다의 그림들 중에 가장 기괴한 그림인 것 같구나.

프리다 칼로는 한때 트로츠키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대. 트로츠키? 아빠가 알고 있는 러시아의 그 트로츠키 맞단다. 레닌이 죽고 나서 스탈린이 반대파를 거침없이 숙청할 때 해외로 쫓겨난 트로츠키. 당시 갈 곳이 없던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망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였단다. 그런 트로츠키와 프리다 사이에 썸씽이 있었으니, 디에고 리베라도 아차 싶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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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05)

트로츠키가 일반인이었다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연인의 작품을 걸어놓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며,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소련 공산주의 혁명의 3대 거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걸어놓는다면 비난할 사람이 없었죠. 추종자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프리다 칼로가 이 그림을 준 것은 어쩌면 그를 존경하던 디에고 리베라를 향한 보복 심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배신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을 자신이 차버림으로써 남편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남편은 트로츠키를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그가 소련에서 축출당해 갈 곳이 없을 때 멕시코로 망명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부인의 불륜 상대가 자신이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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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리다는 트로츠키와 사랑은 금방 끝내고 헤어지면서 <레온 트로츠키에 바치는 자화상>(1937년 작)을 그려서 트로츠키에게 주었대. 이 그림은 보기 드물게 큰 그림으로 61x76cm나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나이차이가 28살이나 난다고 하는구나. 트로츠키는 헤어진 다음에도 끝까지 구애를 했지만 프리다는 끝내 받아주지 않았대. 아빠가 트로츠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좀 구차해 보이는구나.

 

3.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 이후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았고, 그 후유증으로 임신도 몇 번을 실패하고 결국은 아이를 갖지 못했대. 프리다 칼로는 아기를 엄청 갖고 싶었다고 하는데, 참 불쌍하구나. 유산을 하고 나서 <헨리포드 병원>(1932년 작)을 그렸는데, 사연을 모르고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지만, 프리다 칼로의 사연을 알고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는 그림이란다. <나와 나의 인형>(1937년 작)은 세 번 유산을 하고 절망과 좌절의 시기에 그림이래. 세 번의 유산을 하고 인형을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 인형과 함께 있는 자신을 그림 그림이란다. 인형이 아니라 아기와 함께 있는 그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크고 작은 수술들을 계속 해왔어. 1950년 건강이 또 악화되면서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 수술은 오히려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대. 그러다가 파릴 박사라는 사람의 수술로 몸이 좀 회복되었대. 그래서 그 고마움을 전달하기 위해 <파릴 박사의 초상화가 있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그렸단다. 이 그림을 보면 좀 독특하단다. 파릴 박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 있는데, 평범한 자화상은 아니었어.

프리다 칼로의 그림 몇 작품을 간단히 이야기를 해볼게. 자세한 설명은 책을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작은 칼자국 몇 개>(1935년 작)이라는 그림도 그냥 보면 공포스럽고 기괴한 그림이란다. 이 그림은 남자가 여자를 칼로 죽인 사건을 신문 기사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래. 아무래도 그 여자가 프리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서 공감하고 그린 그림일 거라고 했어. <>(1940년 작)은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보니 달콤한 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프리다 칼로가 그린 그림이란다.

죽을 때만이라도 자다가 평온히 죽는 것을 희망하는 그림. <생명의 꽃>(1944년 작)은 꽃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꽃을 상상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꽃은 붉고 기괴한 꽃이었단다. 자기만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받는 그림으로 그림 속의 꽃이 남녀 생식기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단다. <모세>(1945년 작)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를 읽고 감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야. 복잡하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그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 작품이야. <마르크스는 병자를 건강하게 하리라>(1954년 작)은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가 마르크스를 추앙하고, 미국 자본주의를 멸시하는 그림이란다.

<인생이여 만세>(1954년 작)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으로 죽기 8일 전에 완성했다는구나. 프리다의 그림에서 보기 드문 정물화로 먹음직스러운 수박들을 그린 그림으로 프리다의 작품들 중에 가장 보기 편한 그림이 아닌가 싶구나. 평생 자신의 고통을 그림에 담은 것 같은 그림들을 그리다가 원래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 같은 마지막 그림. 그림 제목도 찬란한 <인생이여 만세> 예전에 민태기 님의 <판타레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락그룹 콜드플레이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에서 자신들의 노래 제목을 따왔다고 했는데 그 그림이 바로 <인생이여 만세>이고 스페인어로 <비바 라 비다(Viva la Vada)>이다.

오늘 독서 편지는 프리다 칼로는 죽기 얼마 전 남긴 일기로 맺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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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죽기 얼마 전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난 건강하게 잘 탈출했다.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절대 어기지 않을 생각이다. 디에고 리베라에게 감사하고, 나의 테레에게 감사하고, 그라시 엘리타, 그리고 딸에게 감사하고, 주디스에게 감사하고, 이사우아 미노에게 감사하고, 루피타 주니에게 감사하고, 파릴 박사와 폴로 박사와 아르만도 나바로 박사와 바르가스 박사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삶을 지탱하려는 나의 엄청난 의지에도 감사한다.

기쁨, 인생 만세. 디에고 리베라 만세. 테레 만세. 나의 주디스 그리고 내게 놀라우리만치 잘해주었던 모든 간호사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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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하는 일마다 너무 잘 풀려 세상 걱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다.

책의 끝 문장: 유언은 그녀의 생전 이루지 못한 소원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프릴다 칼로는 다다이즘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927년이라면 새로운 미술 사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때였고, 장래에 화가가 되기로 한 프리다 칼로는 그런 것들을 유심히 보고 따라 하려 했죠. 그중 하나가 이 실험 작품(미구엘 리라의 초상)입니다.
먼저 다다이즘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다이즘은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미술 사조입니다. 설명을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다이즘이 아닙니다. 알쏭달쏭하시죠? 다다이스트들이 한 말을 보시죠.
"우리가 다다라고 부르는 것은 공허에서 비롯된 엉뚱한 짓거리다." – 후고 발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 리하르트 웰젠베크
- P40

프리다 칼로는 평생 엄청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적 관계를 통해 고통을 위로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 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 P102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상상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도 그 이상이었고요. 그것은 둘의 행동이나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이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자신과 디에고 리베라를 아예 반씩 잘라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죠.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하게 말입니다. - P119

<도르시 헤일의 자살>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프리다 칼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고통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시간을 두고 희석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프리다 칼로의 방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양편에 오해를 낳았던 이 그림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현재는 익명으로 기증되어 피닉스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P211

조금 아프다고 해서 수술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받는 것이죠. 또 한 번의 수술로 모든 증상이 해결된다면 다시 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받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프리다 칼로는 사고 이후 32번 이상 수술을 받았습니다. 39살이 되던 1945년에도 프리다 칼로는 또 한 차례 척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혹시나 좋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물론 잘못 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이전 수술 이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아직은 젊으니 기대를 해본 것이죠. - P281

1944년 프리다 칼로는 한 평론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몸에 흐르던 피를 보았던 생생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탄생,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에 관한 나름의 생각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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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평전 - 지조의 시인·한국학자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42
김삼웅 지음 / 지식산업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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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라는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잠깐 등장한 조지훈 시인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그래서 조지훈 시인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는데, 아빠가 좋아하는 김상웅 님이 쓰신 <조지훈 평전>이 있더구나. 그래서 그 책을 사서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김상웅 님이 쓰신 평전들을 아빠가 많이 읽었는데, 최근에는 안 읽은 것 같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에 대해서 평전을 쓰고 계시는구나. 최근 사진을 봤는데,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이시더구나. 건강히 오랫동안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한다.

아빠는 조지훈 시인이라고 하면 청록파 시인으로 대표적으로 <승무>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단다. 그런데 조지훈 시인은 그저 한 사람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겠더구나. 그가 살았던 시대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있어 가장 암울하고 어두웠던 시대였는데, 그런 시대를 살면서 권력에 빌붙어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불의에 쓴 소리를 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단다. 이 책에는 조지훈 님의 글들도 많이 발췌되어 많이 실려 있는데, 시도 좋지만 그의 산문들이 더욱 좋았단다. 오늘날의 지난 정권에도 깔맞춤인 글들도 있었단다.

 

1.

조지훈 시인은 1921 1 11일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단다. 중종 시대 개혁가로 이름 날린 조광조의 후손이었어. 아버지 조헌영 님은 일본 유학 후 항일 투쟁을 하셨고 3.1운동 6주년 기념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어. 할아버지는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셨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아버지를 통해 얻은 와세다대학의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다고 하는구나. 17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 고서점을 내기도 했다. 이 즈음 한용운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일송 김동삼이라는 분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형무소에서 시신을 찾아가라고 했어. 그런데 일제가 무서워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있을 때, 만해 한용운은 김동삼 님의 시신을 업고 심우장에 모셔와 장례를 치렀단다. 조지훈은 이런 한용운의 모습을 보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어.

조지훈은 19살에 <문장>지에 <고풍의상>이라는 시가 당선되면서 정식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어. 그리고 20살의 그의 대표작 <승무>라는 시를 발표했단다. <승무>라는 시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난 시인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20살의 청춘의 시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단다. 천재는 다르긴 다른가 보다. 조지훈 시인은 <백지>라는 동인지를 출간하여 활동 영역을 넗혀 나갔단다.

1939년 독립운동가의 딸 김위남과 결혼하였고, 아내의 이름이 남자이름처럼 보여서 조지훈 시인은 아내에게 김난희란 예명을 지어주었단다. 194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인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거되었는데 조지훈 시인은 어리다고 금방 풀려났다고 하는구나. 아까 1921년생이라고 했으니 1942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나이로 해도 22살이구나. 1943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징용 통지가 날라왔어. 다행히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여 징용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 시인은 일제에 압박에도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단다. 그는 시인으로써 순수시를 추구하면서 일제를 외면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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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조지훈은 반대편이었다. 일제말기 수많은 문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귀축영미를 저주할 때, 그는 침묵하거나 순수시를 통해 조선의 전통과 불교적 선()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너도나도 인민과 조국, 계급을 주창할 때도 자신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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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중에 변절자에 대해서도 비판했지만, 개과천선한 변절자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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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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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5, 그의 나이 25살에 드디어 해방이 되었단다. 그는 해방된 조국을 위해 자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청년문학협회 등 여러 조직에 참여해서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명륜전문학교, 경기여고교사, 여자의전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어. 그의 청춘은 해방과 함께 꽃길만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2.

해방 후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발표했는데, 조지훈에게는 이 시집이 첫 시집이었단다. 해방 후 조지훈은 순수시를 많이 쓰셨지만, 민족주의 진영의 소신파였어. 조지훈 시인이 그렇다고 순수시를 쓰고 사회참여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중에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참여시뿐만 아니라 독재를 따갑게 비판하는 평론도 많이 쓰셨단다.

1947 10, 27살에 고려대 교수로 임용되었어. 하지만 얼마 안가 6.25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전쟁 통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매부도 죽고, 할아버지는 자진하였다고 하는구나. 정말 힘든 시절이구나. 조지훈 시인은 피난을 가게 되었고, ‘공군종군문인단에 들어 군인과 함께 움직이면서 창작 활동을 했단다. 이 단체에 들어서 그는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대.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시 문인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 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작품들을 찾아 모아 전집을 기획했단다. 전에 도올 김용옥 님의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한용운 전집 작품은 끝내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귀하는데 힘을 써야 할 정부는 이승만 독재를 위해 계략만 꾸미고 있었단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조지훈 시인은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동안 지향했던 순수시를 접고 저항시를 쓰기 시작했단다. 4.19를 앞두고 지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시는 시라기 보다 격문이라고 볼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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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 왔는가 동포여!

정말 우리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는가 서러운 형제들이여!

 

서른 여섯해 동안의 그 숨막히는 굴욕(屈辱)을 피눈물로 되찾은 이 땅위에

갈등(葛藤)과 상잔(相殘)과 유리(流離)와 간난(艱亂)이 연거푸 덮쳐와도

입술을 깨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우리 말없이 살아온 것은 참으로 무엇을 기다림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우리의 단 하나의 보람 단 하나의 자랑 단 하나의 숨줄마저 무참(無慘)히도 끊어진 오늘

겨레여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살아야 하는가 원통한 원통한 백성들이여!

 

 자유세계(自由世界)의 보루(堡壘)에 자유(自由)가 무너질 때 철()의 장막(帳幕)을 무찌를 값진 무기(武器)가 같은 전선(戰線)의 배신자(背信者)의 손길에 꺾이었을 때,

아 자유를 위해서 피흘린 온 세계(世界)의 지성(知性)들이여!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만을 말해다오 그것을 가르쳐다오 자유(自由)의 인민(人民)들이여!

 

공산주의(共産主義)와 싸우기 위하여 공산주의를 닮아가는 무지가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곳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세운다면서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는 폭력(暴力)이 정의(正義)를 역설(逆設)하는 곳에

버림받은 지성(知性)이여 짓밟힌 인권(人權)이여 너는 정말 무엇을 신념(信念)하고 살아가려느냐.

무엇으로써 너의 그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긍지(矜持)를 지키려느냐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하늘이여!

 

백성을 배신(背信)한 독재(獨裁)의 주구(走拘) 앞에 연약한 민주주의의 충견(忠犬)은 교살(咬殺)되었다.

온 나라의 마을마다 들창마다 새어나오는 소리 없는 울음소리.

 사랑하는 동포여 서러운 형제들이여 목을 놓아 울어라. 땅을 치며 울어라. 내 가슴에 응어리진 원통한 넋두리도 이제는 다시 풀길이 없다.

 

찢어진 신문과 부서진 스피커 뒤로 난무(亂舞)하는 총칼, 이 백귀야행(白鬼夜行)의 어둠을 어쩌려느냐.

정말로 정말로 잔인한 세월이여!

 

새아침 옷깃을 가다듬고 죽음을 생각는다.

육친(肉親)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이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여!

 

진주(眞珠)를 모독(冒瀆)하는 돼지, 그 돼지보다도 더 더럽게 구복(口腹)에만 매여서 살아야 할

이 삼백 예쉰 날을 울어라 삼만 육천날을 울기만 할 것인가.

원통한 백성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짓밟힌 자유여!

정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불행(不行)한 불행한 신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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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2월에 쓴 <지조론>에서는 당시 독재를 찬양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단다. 그리고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들이 동참할 때 조지훈 시인도 함께 동참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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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조지훈은 4월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혁명 대열에 직접 참여하고, 혁명 후에는 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지식인들이 하기 어려운 발언을 쏟아냈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용히 힘을 기르라. 먼저 황폐한 학원을 재건하고 출발전야의 제2공화국이 제군의 피를 헛되이 하지 못하도록 깨끗하고 거창한 압력을 주라. 반동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국민 앞에 고발하고 주권자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선두에 나서라. 무엇보다 먼저 제군들이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마련해야 하고, 제군들이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제군들의 고귀한 피가 또 한 번 뿌려져야 할 때야 올런지도 모른다는 의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제군의 발언권이 증대되어야 하고, 그 발언권은 제군들이 자중하는 위의와 단결과 정화 속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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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안일하고 방향을 잃은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하고, 민주당 등 정치계에도 쓴소리를 했단다. 이런 것은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아야겠구나. 대통령 탄핵 인용이 되었다고 해서 방심하고 안일한 자세를 가지면 안 된다. 아직 내락 세력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 대선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하여 살아있는 민주세력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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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조지훈은 이 시기 누구 못지않은 영향력 있는 논객이었다.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참으로 혁명정신은 지하에서 통곡하고 병원의 베드 위에서 저주하고, 학원의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침통한 우수와 뉘우침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오직 순정과 의분으로 혁명에 임했던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족하고 물러설 때 식자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그런 자세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의 전형으로서의 영예를 성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마침내 바로 그대로 맹점이 되고 말았다. 혁명정신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대로 피는 학생들이 흘리고 공은 정치가들이 따로, 민중의 신임은 혁명대변 세력이 받고, 칼자루는 반혁명 세력이 쥐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바로 인세무상(人世無常)의 그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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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단다. 그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권은 민간에게 이양한다는 말만 믿고 처음에는 그렇게라도 나라가 바로 선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어. 하지만 군인들이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면서 권력에 대한 야욕을 알고 나서는 조지훈 시인은 태세전환을 하여 비판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였단다. 결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지.

 

3.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열심이셨단다. 1961 9월에는 국제시인회의를 위해 벨기에에 갔다가 세계일주도 하셨다고 했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고전국역위원회의 3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셨어. 이 단체는 민족문화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지훈 시인이 1대 연구소장을 맡기도 했단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는 <한국문학사대계> 7권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식민사관을 청산하려는 노력을 했어. 그리고<한국민족운동사>도 저술하였단다.

40대의 조시훈 시인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어. 1960년대 중반에는 한일협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등 여전히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어. 그가 이렇게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특히 소화기 계통이 어렸을 때부터 안 좋았는데, 그 병으로 결국 1968, 우리나라 나이로 48세에 적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시고 말았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시로 썼는데 그 시를 가족들 앞에서 직접 낭독하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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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97)

절정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어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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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늘은 조지훈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단다. 이 책을 읽으니 그가 달리 보이더구나.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조지훈 시인이라고 이야기해야겠구나.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들을 좀 읽어야 하는데, 아빠가 읽은 조지훈 시인의 시는 교과성에 실린 것뿐. 조지훈 시인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팬심으로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이상.

 

PS,

책의 첫 문장: 조지훈은 1921 1 11( 1920 12 3)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 202번지에서 조헌영과 유노미의 3 1녀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연구가 부족하고 능력 또한 못 미쳐서, 선생의 향내 나고 매운 문학과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를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나온 것이 아닌가 두렵다.


<지조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P6

고루거각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신을 바라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나니 나의 선(禪)은 곧 멋밖에 아무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 P127

1950년대 고래대학교 국문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다(知多)’ 선생으로 통하셨다는 이야기를 제자분들로부터 들었다. 워낙 박학다식이라서 지어 올린 별호였다고 한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위에다 내 성(姓)을 올려놔 봐. ‘조지다’가 되는군"
좌중이 박장대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P135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 P168

<20세기의 한국>을 조감한다는 것은 곧 우리 근대문화의 거의 전 과정을 부관(俯觀)하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희랍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로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알려진 교훈이거니와 오늘의 한국-우리들의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찾는데 일조가 될까하여 이 책을 엮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거울에 비친 20세기 세계사상의 한국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자아는 각자가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제 모습을 찾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한다고 할 수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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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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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게. 이 책의 차례를 보고 뭔가 오타가 있다고 생각했어. <님의 침묵> 초판본이 실려 있는데, 페이지 표시한 부분이 406~226으로 되어 있고, 페이지도 내림차순으로 적혀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해당 페이지를 살펴보니 차례를 그렇게 적은 것이 이해가 되더구나. <님의 침묵> 초판본을 그대로 싣다 보니, 세로 쓰기가 그대로 되어 있고, 책 페이지는 초판본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도록 되어 있었단다.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권의 구성을 보면, 먼저 도올 김용옥 님이 쓰신 <님의 침묵>에 실린 시들에 대한 설명이 130여 페이지까지 실려 있고, 137페이지부터 225페이지까지는 만해 한용운 연표가 실려 있단다. 연표의 페이지 분량이 꽤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과 연관된 사람들, 역사적 사건들이 자세하게 실려 있단다. 그 점도 좋았단다. 그리고 406페이지로 가서 뒤에서부터 <님의 침묵> 초판본이 담겨 있었단다. 이런 걸 영인본이라고 했던 것 같아.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그대로 실은 것 말이야. 그래서 당시 맞춤법으로 적혀 있어 직관적으로 그 뜻이 와 닿지 않는 시들도 있었단다.

소리 내어 읽으면 대충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 그럼에도 당시의 말 뜻을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아빠는 오디오 북의 도움을 받았단다. 밀리의 서재에서 <님의 침묵>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이 책의 초판본을 함께 읽는 것이었지. 그렇게 읽으니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의미도 쉽게 전달되었단다. 가만 생각해 보니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이 엄청 유명한데, 아빠는 그 시집을 완독한 적이 없었더구나.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님의 침묵>에 실린 88편의 시를 모두 읽어보았는데, ‘님의 침묵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도 다들 좋았단다. 독립운동가나 스님이 아닌 시인으로도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좋은 시들이 많았단다. 너희들도 학교 시험에 한용운 님의 시들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88편 모두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아빠처럼 오디오 북의 도움을 받아서 읽으면 어렵지 않을 것 같구나.

 

1.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2권은 <님의 침묵>에 실린 시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단다. 88편의 시를 모은 시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단다. 지은이 김용옥 님이 말씀하시기를, 시집 <님의 침묵>은 첫 번째 시 님의 침묵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여든여덟 번째 시 사랑의 끝판으로 끝나는 연작시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어. 첫 번째 시 님의 침묵에서는 님이 떠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마지막 시 사랑의 끝판에서는 떠난 님이 다시 온다고 읊고 있단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지금은 주권을 잃었지만, 다시 독립을 하고 만다는 것을 시로 지은 것이라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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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만해의 시가 연작시라는 것은 주체의 흐름의 구성이 매우 명료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별을 이야기한 님의 주제는 이제 마지막에 님의 오심으로 귀결되고 있다. 오서요라는 시는 85번째로 실려 있는데, “오심의 당위성에 관하여 읊고 있다. 님의 오심은 너무도 마땅한 것이고, 그 마땅함을 가능케 한 것은 님을 기다려온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만해는 이미 25년 전에 광복을 예견하고 독립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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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에 실린 사랑의 끝판이라는 시는 아빠는 이번에 처음 읽어봤는데, 희망찬 미래를 나타내는 그야말로 끝판왕 같은 시 같더구나. 이 책에 실린 것은 초판본이라서, 그대로 적기가 쉽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찾아서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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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 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짓습니다 에그 저 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줄이 緩急을 잃을까 저허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름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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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시집에 이 계속 등장하는 이것은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조국을 의미한단다. 첫 번째 시에서 떠난 조국이 마지막 시에서 돌아온다는 것시집의 구성도 완벽하구나.

….

<님의 침묵>에는 인물에 관한 시들도 여럿 등장한단다. 모두 일제에 항거했던 역사적인 인물들이었어.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 장수를 안고 촉석루 아래 남강으로 뛰어내려 죽은 논개를 추앙하는 논개의 애인이 되야서 그의 묘()라는 시가 있었단다. 굳이 논개를 추앙하는 시를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제에 항거한다는 마음을 굳은 의지가 아닐까. 진주성 전투는 비록 마지막에는 무너졌지만, 임진왜란 당시 그리고 그 이후 일본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준 전투였다고 하는구나.

================

(40-41)

논개나 이순신, 김시민, 김성일, 김천일, 최경회 같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 항쟁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또다시 일본놈들이 이 조선삼천리금수강산을 짓밟는 강도질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제2차 진주성대첩 때 성내에 있었던 6만 명의 국민들이 모두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열흘 동안에 25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24번을 이겼고 마지막 한 번만 졌다. 그때는 성내에 사람이 없었다. 처절한 전투였는데 결코 일본이 승리한 전투가 아니었다. 조선땅에 있던 왜군 10만이 집결하여 4만 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만 생각하면 치를 떨었고 다시는 진주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시 3백여 년 후에 일본의 식민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집필하고 있는 이 시점의 정권은 일본의 한국상륙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현실인가! 지금와서 동아시아에 나토 비슷한 집단군사동맹체제를 만든다면 화약고를 자처하는 꼴이 아닌가?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아무리 보수라 할지라도 국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전쟁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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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명의 임진왜란 당시 여인 계월향에 대한 시가 있단다. 계월향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왔는데, 북한에서는 논개만큼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평양성 전투에서 김응서가 왜장을 죽이는데 계월향이라는 기녀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어. 왜장을 죽이고, 탈출하다가 계월향은 부상을 입게 되고 죽여달라고 했다는구나. 계월향에 대한 시를 실은 이유도 논개에 대한 시를 실은 이유와 같다고 볼 수 있단다. 그 밖에 여러 시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시들은 모두 조국을 사랑하고 독립을 열망하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단다.

도올 김용옥 님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데 서슴지 않는 분인데, 이 책이 쓰여진 작년 10월에도 이미 우리나라 정부는 무너지고 있었기에 그의 비판 강도가 강했고, 읽은 이들은 시원했단다. 한용운 님의 시를 설명해주는 책으로서 서문 대신 서시를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에 실었는데 2권에도 시를 통해 책을 마무리했단다. 친일 정권, 무능 정권을 강도 있게 비판하면서 말이야. 그 중에 일부를 발췌하면서 오늘 독서 편지는 마치련다. 그래 연산군 닮았어.

================

(133)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모태로 한 법질서,

세계사 민주주의의 모범을 달려온

조선민중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실이

고작 요 따위 양아치정권일까요?

대통령이 사법 입법 질서를

뭉개뜨리고

매일밤 술만 마시고 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은 개인적 슬픔의 사연이라도

있었습니다.

오서요. 어서 오서요.

이제 엎어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끝판입니다.

 

오늘 우리 민중의 요구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닙니다.

폭정에 대한 해명도 아닙니다.

이 사회의 리더십이 저열해지고

퇴락하고 있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현 정권은 역사의 근원적 퇴행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

 

PS,

책의 첫 문장: 나는 본시 이 책을 집필할 때는 만해의 다면적 생애 그 전체를 다룰 생각이 없었고, 오직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 한 권의 언어를 집중적으로 나의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책의 끝 문장: 한강은 흐릅니다.



만해라는 존재는 평화 그 자체이다. 평화는 단지 전쟁(싸움)의 부재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이 부질 없는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달성되는 것이다. 만해의 시는 이러한 해탈이 사랑의 단절이 아니라 사랑의 속박으로 달성된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하고 있다. 평화는 문명의 궁극적 목표이며 자연의 원상(元相)이다. 평화라는 가치가 없으면 진과 선과 미가 모두 불인(不仁)해진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부재하면 모험조차 불인해진다. 인류의 역사는 과정이며 노경(老境)이 없다. 끊임없는 청춘의 노래이다. 청춘의 꿈은 항상 비극의 결실을 수확하게 마련이다. 이 우주의 모험은 꿈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항상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수확한다. 이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만해는 자유라고 부른다. 이 민족에게 자유는 해방을 의미하며 일본이라는 사악한 권력의 패망을 사실로서 전제한다. - P20

민중들의 생활이 다 무너져 젊은이들은 삶을 설계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자식 낳을 꿈도 꾸지 못한다. 물가는 치솟고 세계적으로 모범적으로 의료체졔를 망가뜨려 사기업화시키려 하고, 이상(異常)적인 금융체제 속에서 투자가들은 불건강한 투기에 시달리고 있으며, 부동산, 토목공사, 건설업이 모두 건강한 싸이클을 벗어나고 있다. 이에 기후위기가 가중되고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던 사회통합이나 공통체모랄이 붕괴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독자적으로 해결해나갈 힘이 있다. 만해의 시대로부터 오늘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의 진보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자결권을 확보하여 왔다. 이제 와서 반일 종족주의를 반성하고 친일로 나아가자니! 이게 도무지 국가비젼을 만드는 자들이 할 말인가? - P44

만해문학에 쎅씨한 느낌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아름다운 여인 선호 성향" 운운하는 것은 만해문학의 오묘한 질감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본다 하는 것이 정론일 것이다. 여기 중요한 것은 "젊은 여자"가 아니라, 길에는 우주론적 법칙과 인간론적 행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론적 법칙은 객관적인 질서가 나에 선행하지만, 인생론적 법칙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발자취라는 질서에 선행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행동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사전>이 말하는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 즉 "이루어지가는 것이 본성이다"라는 인간의 능동성과 책임성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이라는 것이다. 도덕이란 자연의 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내재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 갑니다."
- P79

만해는 어쩌다 술이 들어 거나하게 취하면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한다.
"만일 내가 단두대에 나감으로 해서 나라가 독립된다면 추호도 주저하지 않겠다."
- P83

만해, 금강산 표훈사에서 안중근의사의 기대를 읊은 한시를 짓다.
<해주에 사는 안중근> : "일만석의 뜨거운 피와 열말의 큰 담력, 담금질 끝낸 서릿발 칼날 칼집속에 넣어두고, 벽력치는 의용 홀연히 밤의 적막을 깨드리니, 육혈포 탄환은 꽃처럼 날고 가을빛은 드높더라."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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