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삭발한 수도원 교사는 창백하고 신경질적이며 야심에 넘치는 변호사 로베스피에르와 각별히 친해진다. 더군다나 이 둘의 관계는 처남 매부 간으로 발전해 나가려는 참이다. 막시밀리앙의 누이인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오라투아르 교단의 교사를 수도승 신분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곳곳에서 둘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돈다. 왜 이 혼사가 결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여기에 두 남자가 서로 증오하게 된 이유가 숨겨져 있는 듯이다. 예전에 친구였던 두 남자는 후일 목숨을 걸고 세계사에 남을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 무렵 그들에게는 자코뱅도 증오도 낯선 단어이다. 증오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의원 자격으로 프랑스의 새 헌법을 장만하도록 빈털터리 변호사에게 금화를 빌려준 것도 다름 아닌 삭발승 조제프 푸셰이다. 이 일화는 그가 나중에 자주 맡게 될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다른 사람에게 세계 역사에 남을 경력을 쌓도록 발판을 받쳐 주는 역할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옛 친구를 배반하고 등을 밀쳐 쓰러뜨릴 것이다.

 

(32-33)

이처럼 조제프 푸셰는 평생 막후의 인물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막후의 인물은 결코 눈에 보이게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권력을 온전히 가지고 있으며 모든 끝을 손에 쥐고서 조종하지만 결코 책임자로 거론되지는 않는다. 항상 누군가를 일인자로 만들어 방패로 내세우고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앞으로 몰아가다가 그가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다 싶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바로 이것이 푸셰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노련한 모사가인 푸셰는 공화국과 왕정과 황제의 제국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숱한 에피소드에서 스무 번이나 의상을 바꿔 가며 한결 같은 명배우의 솜씨로 이 역할을 연기한다.

 

(40-41)

바로 이 순간 조제프 푸셰의 성격 중 또 다른 특징이 처음으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철면피이다. 그가 어떤 정파를 배반하고 떠날 경우 그는 결코 서서히 그리고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은밀히 조심조심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훤한 대낮에 냉랭히 미소 지으며 너무도 당연한 듯이 이제껏 적수였던 자에게 직진해서는 적수의 말과 주장을 몽땅 그대로 떠안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아연실색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한때의 동지들이 자신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중과 여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항상 승자 편에 있는 결코 패자 편에 있지 않는 것만이 그에게는 중요할 따름이다.ㅏ 그는 번개처럼 빠르게 돌아서서 지독히 상대를 경멸하는 태도로 돌변할 수 있을 만큼 상상을 뛰어넘는 철면피여서 보는 사람이 어느새 넋을 잃고 감탄까지 하는 지경이다. 푸셰가 자신이 신봉하던 깃발을 내던지고 다른 깃발을 열광적으로 펼쳐 드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하다. 어떨 때에는 단 한 시간, 아니 단 일분이면 충분하다. 그는 이념을 따라가지 않고 시간을 따라간다. 시간이 조급히 질주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속력을 내어 뒤쫓아 갈 것이다.

 

(68-69)

세계의 역사는 대개는 용감한 자들의 역사로 서술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다는 아니다. 세계의 역사는 비겁한 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정치란 공동체의 의견을 선도하는 것이라고 믿으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의견이라는 법정을 만들고 거기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바로 이 법적 앞에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전쟁도 항상 이러다가 일어난다. 위험한 말로 불장난을 하고 민족 감정을 자극하다가 정치가는 범죄를 범하게 된다. 이 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악덕과 잔인성도 인간의 비겁함만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적은 없다. 따라서 조제프 푸셰가 리옹에서 대중을 학살한 것은 공화주의자의 열정 때문이 아니다.(그는 열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온건주의자로 밉보일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설마 그가 수천 번 리옹의 도살자라는 호칭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은 이 호칭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히게 된다. 그가 나중에 공작의 망토를 두른다 해도 손에 묻은 핏자국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106-107)

로베스피에르에 맞선 반란에서 푸셰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위태로운 역할을 맡아 막후에서 비밀리에 활약했지만 대부분의 역사서는 이런 그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지 않다. 몇몇 얄팍한 역사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서술한다. 그렇기에 역사가들은 당시의 박진감 넘치는 마지막 날들을 다룰 때 대개 탈리앵과 바라스와 부르동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탈리앵은 연극배우 마냥 열정적으로 연단에서 단도를 휘두르며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 했고, 바라사는 험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군대를 소집했으며, 부르동은 탄핵 연설을 했다고 서술한다. 한마디로 역사가들은 테르미도르 9일에 펼쳐진 대서사극의 주연 배우들을 묘사하지만 푸셰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사실 그는 그 운명의 날에 국민공회라는 무대에 서서 함께 연기하지 않았다. 그는 무대 뒤에서 이 무모하고 위험한 연극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한층 더 어려운 일을 맡는다. 그는 장면들을 구성했고, 배우들을 연습시켰고 눈에 띄지 않게 어두운 데서 리허설을 했고 시작 신호를 보냈다. 어둠,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진정한 영역이다. 후세의 역사들은 그가 맡은 역할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쳤지만 한 동시대인은 이미 그의 활약을 감지했다. 바로 로베스피에르이다. 그는 공공연히 푸셰를 음모의 괴수라는 딱 맞는 호칭을 불렀다.

 

(131)

특히 천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한동안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멀리 추방되어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야만 참된 과업의 폭과 높이를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은 모두 유배를 거쳐서 생겨났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 모세와 예수, 무함마드와 붓다, 모두 중대한 가르침을 전하기에 앞서 침묵의 광야로 가야 했고 사람들과 동떨어져 지내야 했다. 밀튼은 실명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을 갔고 세르반테스는 감옥에 갇혔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지냈으며 단톄는 망명을 했고 니체는 살이 에이는 듯 추운 앵가딘 지역을 거주지로 택했다. 물론 이들은 맨 정신으로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이들의 수호신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끔 은밀이 조율했다.

 

(152)

인간이란 돈과 사치를 좋아하며 사소한 일탈과 은밀한 쾌락을 즐긴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런 건 상관없다. 그저 조용히 처신하기만 하면 된다. 공화국 치하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던 거물급 은행가들은 이제는 태연히 부정 거래를 하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푸셰는 그들에게 정보를 넘겨주고 그들은 그 대가로 그에게 이익의 지분을 넘겨준다. 마라와 데물랭이 이끌던 언론은 피에 굶주린 개마냥 물어뜯었건만 이제 언론은 고분고분 꼬리치며 푸셰의 다리에 감긴다. 언론 역시 채찍에 맞기보다는 비스킷을 얻어먹고 싶어 한다. 한동안 애국지사들이 야단법석을 피웠지만 이내 조용해졌고 쩝쩝대며 먹는 소리만이 들린다. 푸셰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뼈다귀를 던져 주거나 몇 차례 세게 때려서 애국지사들을 구석으로 몰아낸다. 이미 그의 동료들과 모든 정파들은 푸셰를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유쾌하고 유익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를 화나게 해서 부드러운 앞발에 숨긴 갈퀴 발톱을 내밀게 만들면 좋지 않다는 것도 깨닫는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독히 멸시를 당하던 이 남자는 갑자기 수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그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덕에 그에게 발목이 잡힌 사람들이다. 론강가에 놓인 파괴된 도시 리옹은 아직도 재건되지 못했지만 리옹의 산탄 학살 사건은 벌써 잊히고 푸셰는 인기를 모은다.

 

(173)

며칠 수 제1통령 보나파르트는 출정했을 때보다 백배는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러고는 모든 장관과 친구들이 그가 패배했다는 첫 번째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즉시 누군가로부터 들은 게 분명하다. 첫 번째 희생자는 너무 많이 앞서 나갔던 카르노이다. 그는 장관직을 잃고, 푸셰를 포함한 다른 장관들은 직책을 유지한다. 푸셰는 워낙 조심스러워서 충성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물론 충성했다는 증거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한심한 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한 인물임을 입증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의 변함없는 모습을 또 한 차례 확인시킨 셈이다. 만사가 잘 될 때는 믿을 만한 인물이지만 만사가 꼬일 때는 믿지 못할 인물이 바로 푸셰이다. 보나파르트는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 나무라지도, 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푸셰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199)

푸셰가 나폴레옹에게 이런 힘을 행사한다는 사실이 동시대인들에게는 수수께끼였지만 그 힘은 마법이나 최면술을 써서 얻은 게 아니라 노력을 통해 습득한 것이다. 숙련된 솜씨로 부지런히 일하고 체계적으로 관찰을 한 덕에 얻은 힘이다. 푸셰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황제가 알려 준 것 뿐 아니라 황제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까지 온갖 비밀을 알고 있다. 마술사처럼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 국민 뿐 아니라 주군까지도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푸셰는 황제의 부인 조제핀을 통해서 부부 생활의 가장 내밀한 세부 사항까지 알고 있고 바라스를 통해서 나폴레옹이 굽이굽이 출세의 계단을 오르면서 했던 일들 모두를 알고 있다. 또 재계 인사들과의 친분 덕에 황제의 사유재산의 제반 상황을 감시한다. 보나파르트 일가는 숱한 지저분한 일들을 저지르는데 이 역시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형제들이 도박을 하다가 사고를 치든 누이 폴린이 방탕한 성생활을 즐기든 그는 놓치지 않는다.

 

(271-272)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그들 중 하나를 내각에 들여 놓으면 된다. 진짜 공화주의자 하나만 있으면 부르봉의 백합기를 빨갛게 치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귀족들은 고심하다가 갑자기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을 떠올린다. 이 사람은 2, 3주 전에 모든 접견실을 돌아다니며 고관들을 예방했고 왕과 장관들의 책상을 수많은 건의서로 뒤덮었다. ‘그래, 이 사람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부려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빨리 이 사람을 은거 생활에서 끌어내자!’ 어떤 정부가 난관에 처하거나 유능한 중개자나 협상가, 질서를 창출할 사람을 필요로 할 때면 그 정부는 늘-총재정부든, 통령정부든, 황체치하든, 왕국이든 상관없이-깃발을 들고 행렬을 이끌 줄 아는 남자 조제프 푸셰에게 눈을 돌린다. 결코 믿은이 가지 않는 성격을 지녔지만 외교적 수완을 갖춘 믿음직한 일꾼이기 때문이다.

 

(273)

그는 이런 말로 왕의 동생을 진정시킨다. “너무 늦었습니다. 왕께서는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벌이는 모험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황제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저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이렇게 그는 왕정의 호감을 얻는다. 만일 부르봉 가문이 승리를 거두면 자신이 그들의 조력자라고 생색을 낼 수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승리하면 부르봉 가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양다리를 걸쳐서 일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법을 성공적으로 구사해 왔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된다. 그는 이제 황제와 국왕, 두 군주를 동시에 충성스럽게 섬기는 신하가 되려고 한다.

 

(287)

후일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패배자 나폴레옹은 푸셰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내게 진실을 들려준 건 배신자들뿐이었다.” 사무친 원한을 토로하는 대목에서조차도 메피스토펠레스만큼이나 비상한 능력을 갖춘 푸셰를 경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천재가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이 범속함이기 때문이리라. 푸셰가 자신을 기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어쨌든 푸셰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목이 마른 사람은 물에 독이 들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 물을 향해 손을 뻗치는 법이다. 나폴레옹은 충실하고 무능한 사람보다는 믿을 수 없지만 영리한 사람을 신하로 삼는 길을 택한다. 10년을 치열하게 대립했던 사람들이 어중간한 우정을 나눈 사람들보다 서로 더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경우는 놀랍게도 종종 있다.

 

(319-320)

푸셰 주변의 걸출한 인물들은 모조리 나락으로 추락했다. 미라보는 사망했고 마라는 살해되었으며 로베스피에르와 데물랭과 당통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푸셰와 함께 파견의원으로 활약했던 콜로는 열애에 있는 기아나 섬으로 추방당했으며 라파예트는 정치생명을 잃었다. 혁명을 함께했던 동지들은 모두 멀리 떠났고 자취를 감췄다. 이제 푸셰가 모든 정당의 신뢰를 받고 선출되어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하는 동안 세계의 지배자였던 나폴레옹은 남루한 옷으로 변장을 하고 일개 장군의 비서 행세를 하며 가짜 여권을 가지고 해안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뮈라와 네가 총살될 날을 기다리고 있고 나폴레옹 덕에 왕 행세를 하던 보나파르트 일가는 다스릴 나라 하나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서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다니는 신세이다. 다시없을 세계의 전환기를 이끈 세대는 한때는 명성을 떨쳤지만 지금은 모조리 몰락했고 오직 푸셰만이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암암리에 계획을 세우고 물밑 작업을 끈기 있고 집요하게 이어 온 덕분이다. 지금 내각과 원로원과 국회는 그의 노련한 손 안에서 말랑말랑한 밀랍처럼 맥을 못 추고 평소에는 교만하던 장군들도 연금을 잃을까 떨면서 어린 양처럼 새 의장을 떠받는다. 프랑스 시민과 민중은 그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루이 18세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고 탈레랑도 안부를 전한다. 워털루의 승리자 웰링턴은 친밀히 소식을 전한다.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는 실이 공개적으로 푸셰의 손을 거쳐 가는 건 처음이다.

 

(331-332)

백일천하라는 나폴레옹 주연의 막간극이 끝난 후 1815 7 28일 국왕 루이 18세는 백마가 이끄는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푸셰가 열심히 준비한 덕에 국왕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환영 인파가 마차를 에워싸고 집집마다 걸린 부르봉 왕가의 흰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미처 깃발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히 수건이나 식탁보를 지팡이에 달아서 창문가에 걸쳐 놓는다. 저녁에는 수많은 불빛이 도시를 환히 밝히고 기쁨에 겨운 사람들은 영국과 프로이센 점령군의 장교들과 춤추기까지 한다. 성난 고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서 사전 예방책으로 배치된 헌병들은 할 일이 없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국왕의 새 경찰장관은 새 주군을 맞을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두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튈르리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를 공손히 모셨던 충실한 신하 오트란토 공작은 이제 같은 장소에서 루이 18세를 기다리고 있다. 22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그는 루이 18세의 형인 폭군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던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성왕 루이의 후손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서류에는 폐하를 진심으로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서명한다. (친필로 쓰인 10개 이상의 보고서에는 이런 글귀가 한 자 한 자 적혀 있다.) 그가 벌인 미치광이 공예 중에서 가장 아찔한 재주를 부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 재주를 마지막으로 줄타기와 같던 그의 정치 역정은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346-347)

세계 역사를 한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자가 권력을 잃으면 전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게 된다. 그는 러시아 조정에 여러 차례 변죽을 울렸지만 초청장은 오지 않고 웰링턴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벨기에는 국내에 이미 왕년의 자코뱅파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이에른 왕국은 조심스럽게 말을 돌리고 오랜 친구 메테르니히 공작은 이유 없이 쌀쌀하게 군다. “, 그러십니까! 오트란토 공작께서 그러고 싶으시다면 오스트리아 영토로 들어와도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작의 체류를 묵인하려 합니다. 하지만 빈으로 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당신이 빈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탈리아로 가서도 절대 안 됩니다. 빈에서 멀지 않은 동북부 주를 제외한 다른 지방의 소도시를 택하신다면 조용히 처신하겠다는 조건하에 공작의 체류를 허가하겠습니다.”

 

(349)

15년 동안 운명이 위협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날렵하게 운명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마침내 그가 꼼짝도 못하게 되자 운명은 이 패배자를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정치인으로서 굴욕을 겪은 것도 모자랐는지 조제프 푸셰는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사생활에서도 뼈아픈 굴욕을 겪게 된다. 1817년 프라하에서 일어났던 작은 에피소드는 마치 소설가가 지어내기라도 한 듯이 너무도 재치 있게 푸셰가 어떤 내적 굴욕을 겪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을 겪은 푸셰에게 이제 불행은 섬뜩한 캐리커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는 남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정치인 푸셰에 이어서 이제는 남편 푸셰가 굴욕을 당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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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2)

헐버트 눈에 비친 서울은 자연의 상쾌함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첫 편지(1886 7 10)에서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어머니는 안도하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 신문 기고문에서, “서울은 높이 치솟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산 정상을 따라 만들어진 서울의 성벽은 거리가 5~6마일 정도가 된다. 높이는 몇몇 곳에서는 2,000 피트도 더 된다.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이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라며 서울의 공기를 반복적으로 칭찬하였다. 서울에는 매가 머리 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맴돌고, 밖에 나다니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간 뱀이 목덜미에 떨어질 판이라고도 했다.

 

(47)

헐버트는 영어에서 학생들이 ‘f’‘r’, ‘v’, ‘th’ 등의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했다. ‘will not’‘willot’으로 발음하는 등 연어 발음에서도 어려움이 나타났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장치 국제무대에서 영어를 원활하게 구사해야한다면서 발음 교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장 암송이 영어 공부의 첩경이라며, 학생들이 문장을 완전히 암송해야만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은 한문 서예를 공부해서인지 펜으로 영어 쓰기는 아주 잘했다. 일부 학생은 심지어 자신보다 더 잘 썼다고 회고했다.

 

(59)

헐버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1890 1 27)에서 저는 조선인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이 저를 붙들도록 하겠습니다.(I am going to make myself so valuable to Koreans that they can afford to let me go.)”라면서 조선에 계속 남아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정치경제, 국제법 등을 망라한 서양의 근대 서적을 조선 글자로 소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전설과 신화를 수집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을 낼 예정입니다. 조선어와 여타 언어 사이의 유사성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뒤이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에만 관심이 있다면서 자신은 수학책도 소개하고 학교용 교과서 출판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헐버트의 이러한 결기는 조선이 근대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진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사민필지>의 저술과 교과서 편찬 등의 결과물을 낳는다.

 

(77)

그는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글자 하나당 발음 하나의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 수백 년 동안 존재했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하나의 발음과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적게 든다.”라고 조선어가 영어보다 우월함을 설파했다. 그는 이어서 어떤 문장에 영국인들이 스무 단어를 써야 할 때 조선인들은 열세 단어만 쓰면 된다.”라고 조선어의 언어학적 우수성을 갈파하였다. 또한, 동사의 어형 변화 형태를 설명하면서 영어 ‘give’와 우리 말 주다를 비교하였다. 그는 “’준다의 어근이며, ‘주게는 미래시제의 어근이고, ‘주어는 과거시제의 어근이다. 직설법 형태의 어미는 모두 이지만 어간과 어미 사이의 음절 이 들어가 주난다가 되고, 이를 준다로 줄여서 말한다.”라고 풀이하여 언어학의 천재성을 과시했다.

 

(86)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 책이 아닌 각 나라의 사회제도를 폭넓게 담은 일반사회책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판된 지리, 사회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사민필지>는 머리말에 이어 태양계, 땅떵이(지구)를 설명하고, 이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서로 각 대륙의 나라를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각 나라 설명에서 조선인들의 상식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 군사력, 정치체계, 사회제도 등을 담았다. 헐버트는 각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면서 정사를 임금이 마음대로 하는 나라와 백성의 주장을 존중하는 나라로 구분하였다. 미국은 대통령을 4년마다 선출하고, 국민 대표기관인 의회가 있고, 재판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하였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주권재민 사상을 심어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여긴다. 헐버트는 또 각 나라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정치체계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다. 1등급은 미국을 포함해 12개 나라이고, 러시아, 일본은 2등급에, 조선은 청나라와 함께 3등급에 분류되었다. 조선은 전제군주의 나라로 신분제가 있고, 한자를 힘써 공구부하고 유고만을 준행하며,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124-125)

헐버트는 한국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과서 체계를 갖추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한성사범학교에 재직하던 1900년 봄 새로 부임하는 학부대신을 만나 교과서 편찬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여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고 한 편지에서 밝혔다. 여름에는 수학책을 완성하여 학부에 넘겼다며 곧 책이 출판될 것이라고 했다. 학교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교과서 중문이 쇄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관립중학교 시절인 1902년에도 교교서 발간을 위해 자금을 댈 단체를 고위 직급의 한국인들과 함께 구성하였으며, 보통학교에서 사용할 12권의 책을 결정하여 곧 인쇄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그동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책 발간이 어려웠는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뻐하였다. 각 책 당 5,000부를 찍고 책값도 비용을 감당하는 수준에서 책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책들이 전부 한글로 출판되기에 한자에 대한 오랜 투쟁의 승리하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책들이 어떤 형태로 출판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가 교과서 편찬에, 그것도 한글로 된 교과서 편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127)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을 잃지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면서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힘을 기르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 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는 또 미국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위배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한국에 교육 투자를 강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크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이 말은 한국인들의 깊숙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라며 한민족의 성공 잠재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142)

대한제국의 안녕과 근대화는 나를 비롯한 이곳 외국인들도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은 한국인들에게만큼 나에게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한국인들의 삶과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이란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임이 아니다. 타인의 희망과 권리를 무시하는 독립은 무정부상태가 뒤따른다. 진정한 독립이란 국가든 개인이든 자연물이든, 어떤 존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을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아직 자유를 살짝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종속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국가의 모든 힘을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 쏟아부어야 한다. 대한제국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세운 최상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로 들어서고,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교양 있는 충성스러운 인민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들어섰을 때만이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대한제국의 안녕을 참으로 바라는 한 사람이 한민족의 행운을 간곡하게 빈다.” 대한제국이 어떤 독립을 이뤄야 하는가를 명쾌히 제시하였고, 헐버트의 한민족 사랑이 오롯이 담겼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헐버트의 연설을 대한제국이여 전진하자라고 이름 지으며, “헐버트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라고 보도했다.

 

(150-151)

만약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과도한 지적 부담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고, 반상제도를 고착시키고, 편견을 추구기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한자를 내던져 버리고 자신들이 모든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다는 법은 없다. 이제라도 한글을 써야 한다.”

헐버트는 또 1896 10 <조선소식>  “나는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리리라 믿는다.”라고 하여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한글 전용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전용하고 한자가 보완적 기능을 하는 현실을 보면서 헐버트의 예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88-190)

헐버트는 대중음악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을 선택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현저히 빼어나고 듣기에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래라면서,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음식에서 쌀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아리랑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조선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식인 쌀에 비유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까지도 읽어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1883년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의 진짜 마지막 공연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로서 아마도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다.”라고 아리랑의 미래를 예견하였다. 그는 아리랑 후렴구 노랫말은 서정시요, 교훈시요, 서사시라면서,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다. 부르는 이들마다 노래가 다르다. 조선인들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조선인들의 예술적 끼를 칭송하였다. 조선 음악이 나라 밖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 헐버트는 한민족의 음악적 재능을 세계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이 오늘날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한 세기도 전에 예견한 혜안이었다.

 

(215)

헐버트는 책을 마치며 한민족에세는 참으로 감동의 글을 남겼다. 그는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은 역사가의 본분이 아니며, 역사가는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예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한민족이 장차 경이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희망하는 예단은 허용돼야 한다.”라고 하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고 예언하였다. 헐버트가 한민족 역사를 15년 동안 천작하며 내린 한민족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자 결론이지 않은가.

 

(219-220)

헐버트는 미국인 그리피스가 1882년에 쓴 책 <은둔의 나나(Hermit Nation)>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서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헐버트도 조선에 오기 전에 이 책으로 조선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헐버트가 조선에 와 보니 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았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 보지도 않고 일본인이 쓴 글만 읽고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은둔을 뜻하는 ‘hermit’이라는 단어도 오늘날의 한국인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편안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리피스가 미국의 한 잡지에 한국에 대해 글을 기고하며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기고문 내용도 백제를 히악시(hiaksi)’라고 하는 등 오류가 넘쳐났다. 헐버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평곤> 1902 7월호에 그리피스 기고문에 대한 반박의 글을 실어 “’pigmy’라는 단어는 아프리카의 왜소한 흑인종을 가리킨다. 미국인들이 이 기고문을 읽으면 한국인을 미개한 열등 민족으로 인식할 것이 뻔하다.”라며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관한 글을 쓰려면 제발 한국에 직접 와서 보고 쓰라고 호소하였다. 1904년 런던의 한 수도원 행사에서 헐버트는 그리피스와 직접 맞닥트리기도 했다. 그리피스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친일 연설을 하자 헐버트는 그리피스에게 다가가 어디 두고 보자라며 대판 설전을 벌였다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226)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종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모국 미국의 친일정책을 비난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미국의 처신에 대해 한국에 어려움이 닥치니 미국이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When the pinch came we were the first to desert her, and that in the most contemptuous way, without even say good-bye.)”라고 공사관을 맨 먼저 철수한 미국을 맹비난하였다.

 

(276)

<재팬크로니클>이 석탑 약탈을 공식화했음에도 다나까는 계속 버티며 석탑을 돌려주지 않았다. 헐버트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도 석탁 약탈 사실을 폭로하였다. 1907 7 10일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연설을 하며 경천사 십층석탑 약탈 사건을 예로 들었다. <만국평화회의보>가 헐버트의 주장을 보도하자 <뉴욕포스트>등 국제적인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였다. <뉴욕타임스>도 헐버트 회견 시가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베델도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일본에 석탑 반환을 촉구하였다. 석탑 약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제적으로 들끓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이 석탑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본국에 건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1918년에 가서야 석탑을 돌려주었다. 두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이 이 문제를 국제여론전으로 몰고 감으로써 결국 석탑이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서 뒹굴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과 개관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헐버트가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아마도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장 사진 증거가 없었다면 일본이 과연 약탈을 인정했겠는가? 헐버트가 희망한대로 언젠가 석탑이 원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300-301)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은 나라의 운명은 물론이고 고종 황제와 특사들 개인의 운명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묻는다면서 7 20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7 24일에는 소위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시켰다. 헐버트는 특사증을 발급한 고종 황제가 퇴위 되어 더 이상 특사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1919년 미국 의회에 제출한 한국 독립 호소문에서, 일본이 고종 황제를 재빨리 퇴위시킨 것은 자신이 고종 황제의 특사로 조약상대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친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고 밝혔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인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미 서거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도 일제의 위협에 한국에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308-309)

헐버트는 1907 11월 미국의 서부 지역을 돌면서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 단체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 11 15일 자 기사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청년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헐버트는 강연에서 제군은 낙심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오. 일심성의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일본이 강하다 하나 일본 문명은 뿌리 없는 꽃과 같소. 결단코 오래지 아니하여 한국에서 일인 세력이 패망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수십 년 살았기에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일본의 학정을 눈으로 보았소. 이제 미국에 돌아와서 나의 힘을 다하여 공론을 일으키려고 지금 미국의 각 지방을 다니는 중이요. 한국은 장래에 여망이 많은 나라이오니 제군은 힘을 다하여 독립 준비를 게을리하지 마시오.”라고 한국 청년들에게 호소하였다.

 

(342-343)

헐버트는 3.1혁명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던 <미구 한국평론> 1919 10월호에 <1차 세계 대전과 한국(Korea’s Part in the War)>를 기고하였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인류애가 고상함이나 영웅주의에 묻힌다면 이는 인류에 대한 모반이다. 3.1혁명은 신의 손(hand of God)’이 작용한 것이며 한국의 독립은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이듬해 1 <국제관계>지에 기고한 <일본과 한국(Japan in Korea)>에서, 일본과 한국의 반목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얕보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하였다. 이어서 한민족은 3.1만세항쟁에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하는 대신, ‘자유를 달라(We must and shall be free)’고만 외쳤다면서 3.1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평가하였다. 이는 한민족의 문명 수준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헐버트는 1949 7월 죽음을 앞두고 가진 언론 회견에서는 3.1혁명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문화적 가치라고 정의하였다.

 

(364)

2004년 다트머스대학을 방문하여 헐버트 기록을 추적하던 중 헐버트가 졸업 45주년을 앞두고 모교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가 눈에 들어왔다. 헐버트가 70을 바라보며 친필로 작성한 자신의 삶의 흔적이었다. 필기체로 휘갈겨 쓴 기록부를 세세히 읽다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헐버트는 신상기록부 나의 일생(My Life Story)>란에 자신과 한민족의 관계를 정의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한민족에 대한 충심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원문 : I have been fighting for the rights and liberties of 18,000,000 people whose love I hold as my most precious possession and whatever the outcome I dream that loyalty to such a cause is worthwhile.

 

(373)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일제의 한국 지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에는 무한한 부끄러움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을 거족적으로 펼치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에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와중에 공화제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에 대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면 이렇게 떳떳하게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가 해방으로 맞았지 독립운동으로 맞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형이하학적 착시 현상이다. 만약 친일파가 그랬듯이 우리 민족이 일본에 충성만 하고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이 우리에게 독립을 그저 선서할 리가 만무하다. 영국의 처칠은 실제로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지 않았는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이 패전하였다 해도 광복을 맞을 수 없었거나, 한참 뒤에나 맞았을지 모른다.

 

(408-409)

먼저 한민족은 보통 사람도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였다. 한글은 각 글자마다 하나의 소리만 있는 우수한 글자다. 또 하나는 한민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 전함으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세계 해군 역사를 빛나게 했다. 또 하나 한민족을 빼어나게 만든 업적은 오래전 한 왕에 의해 고안된 역사 기록문화이다. 왕은 역사기록청을 만들어 국사를 편견 없이 적도록 하고, 3년마다 기록을 정리하여 3부씩 책을 만들어 각기 다른 장소에 보관토록 했다. 이 기록들은 한민족의 절대적 기본 역사서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록문화는 세계사에서 유일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민족은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민족 흡수 문화를 보여 주었다. 기원전 1122년 중국에서 기자가 5천 명의 중국인을 이끌고 넘어왔을 때 한민족은 이들을 토착화하여 한민족으로 만들었으며, 어떠한 내분도 없이 1천 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1919 3.1혁명 때 보여 준 한민족의 충성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전에 만세 항쟁 계획을 알면서도 일본 당국에 밀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입증하였다. 3.1혁명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이다.”

헐버트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도 간과한 선조들의 위업을 들어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천명하였다. 우리는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잖은가.

 

(421)

헐버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세계주의자이자 영원한 한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한민족은 두뇌가 우수하고, 독창성이 뛰어나다. 교육유전자가 남달라 성공 잠재력이 무한하다.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여 나라를 지켜 내는 끈기와 생존력을 지녔다.”라며 한민족의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풀이하였다. 헐버트는 또 생을 마감하면서,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증언하며 한글 등 다섯 가지 예를 들었다. 헐버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래 가치를 확신한 참 한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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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그날 아침 우리 농가를 나설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내 안에 어떤 새로운 지도가 펼쳐졌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이제 비범한 소녀가 되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탐험가들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저 멀리 신비로운 해변의 존재를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내 안에 갑작스럽게 마젤란이 등장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윌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윌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왔을지, 떠돌이라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일지 궁금해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66)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한 건 꽃피는 사랑에 관해 조언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43)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164-165)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셸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188)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문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277)

세스는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그를 스물두 살이 아니라 여든 살의 노인으로 보이게 했다. 세스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순간 나는 한때 동생을 아꼈던 어린 누나의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두려움과 혼란을 풀어내고 애틋함만 남기고 싶었다. 동생을 구해주고 싶었다. 동생의 악함과 세상의 악함을 내 선한 행동으로 상쇄하고 싶었다. 나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내 안에 있었다고, 그러니 네 안에도 생각지 못한 면이 존재할 거라고 세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284)

긴 진입로를 벗어나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나를 만들어준 이 공간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트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았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채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16)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사실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고 우리 땅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아무리 모른 척, 아닌 척 한다고 해도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윌은 자신이 어느 부족인지 말해준 적이 없었고, 너무 소심하고 어둑했던 나 역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젤다에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원주민들이 끔찍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젤다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게 똑같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정부에 이익이 되면 정부는 국민들이 고통받더라도 그냥 해버리니까.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거죠.”


(322)

초여름 빗물로 불어난 하얀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매우 아름다웠다. 곧 저수지가 될 거니슨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댐이 건설되고 거니슨강 하류에 수문이 개방되어도, 지금 흐르는 강물의 일부는 변함없이 아래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더라도 강물은 어떻게든 물길을 찾아내 꾸준히 흐를 것이다. 그러면, 노스포크강을 따라 새로운 삶을 꾸린 나는 그 반대편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85-386)

그러나 지난 4월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 앞에 달라 붙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아폴로 13호의 드라마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전쟁 때문에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와중에 겨우 세 명을 위해서 온 나라가 숨죽이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폴로 13호 승무원들이 무사히 그들이 귀환할 때까지 여드레라는 긴 시간 동안, 나도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귀환한 이후로도 뉴스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뉴스를 틀어놓고 앉아 베트남 특파소식을 지켜보았다. 미군 지상군이 캄보디아로 쳐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보았고, 닷새 뒤에는 켄트주립대학교의 푸른 잔디밭에 쓰러져 죽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보도는 계속되었고 이전의 비극은 새로운 비극으로 가려졌다. 내가 아들들에게 선물한 세상은 두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적이고 혼란스러웠다. 그냥 외면하고 눈을 돌려버릴 수가 없었다.


(415)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흙 두 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415-416)

그랬다. 젤다의 말이 옳았다.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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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상에서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성교육 전문가가 누굴까? 바로 양육자.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내 아이에게만큼은 꼭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해주고 싶을 것이다. 양육자는 자녀에게 올바른 성 개념과 가치관을 심어줄 의무가 있다. 가치관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삶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지를 판단하는 관점이다. 양육자는 자녀가 성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을 잘 세우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55)

양육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울지 마. 남자는 씩씩해야 해.”

착하기만 한 남자는 매력 없어.”

너는 꼭 여자처럼 행동하는구나.”

남자인 네가 참아야지.”

남자가 그렇게 힘이 약해서 어떡하니.”

남자는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져야 해.”

남자가 비겁하게.”

남자애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


(62)

자기 몸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을 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성교육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성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 출발점이 내 몸과 소중한 곳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따라서 양육자가 아이에게 소중한 곳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부터 양육자가 아이에게 음경이라는 성기의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자.


(79-80)

성기가 커지고 꼿꼿해지는 것을 발기라고 한다. 발기는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경험한다. 남자의 성기인 음경 속에는 뼈가 없다. 대신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해면체라고 부르는 조직이 요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평소에 보고, 느끼고, 냄새 맡거나 상상하면서 뇌가 자극될 때 뇌에서 명령을 내리면 음경에 피가 모여든다. 해면체에 피가 가득 차서 혈관이 확장되면 발기가 일어난다. 음경 주변의 근육이 긴장하게 되고 음경이 딱딱해지는 것이다. 고무장갑에 물을 넣으면 크기가 커지고 단단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98)

이렇듯 잠자리 분리는 너무 성급하게 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따뜻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 아이와 따로 잔다는 것은 단순히 잠자는 공간을 분리하는 것을 너머 아이만의 독립된 공간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아이가 개인적이고 독립된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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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


(44)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더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66)

5000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포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섬서성 웨이허강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 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구근 덩어리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종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86-87)

즐겁게 살아간다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 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을 추구할 때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


(95-96)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106-107)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공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 1세기 때 채옹의 <금조>,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125)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193)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197-198)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20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조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226)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1935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 1946년에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했다.)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종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토기’, ‘민무늬토기=청동시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245-247)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 정에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홍산문화의 옥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홍산문화의 제사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254)

후지무라의 조작은 단순히 한 고고학자의 공명심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무조건 올리려고 하는 일본의 쇼비니즘적 시각과 야합한 결과이다. 후지무라가 유물을 파묻다 발각된 카미타카모리 유적은 사실 후지무라가 구덩이에 자기가 만든 석기 몇 개를 파묻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지무라에 의해 이 석기는 70만 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유물로 변했다. 이 말이 맞다면 세계 최초의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세계 문명의 기원이 일본이며,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신토이즘)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종교라는, 극우 세력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얘기였다. 후지무라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는 곧 바로 극우 성향의 교과서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 회장이 쓴 교과서 <국민의 역사>의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라는 여러 황당한 망언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극우세력의 준동에 후지무라의 위조가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고고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암묵적인 동조를 했다. 극우 사관이라는 독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후지무라의 위조는 더욱 활개를 칠 수밖에 없었다.


(269-271)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이라는 뜻의 호우를 따서 이 이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에 따르면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를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옻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282-283)

(슐리만)가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라이모스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모스의 황금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라이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리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프라이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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