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는 과학자라는 인종을 잘 모르시는군요. 우리는 특별한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이란, 지적 욕구입니다. 그 강력함은 보통 사람들에게 식욕이나 성욕과도 같거나 그 이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날 때부터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414)

저는 위험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환경의 문제를 극복하고 건전한 시민 생활을 보냅니다. 혹자는 내면의 분노를 훌륭히 승화시켜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분노가 날 때부터 가진 폭력 성향과 연결되어 흉악 범죄자로 치닫는 사람도 나타납니다. 자신의 직장에서 총을 난사하는 그런 패거리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없애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지금 네메시스 작전이 누스의 마음에 공포와 불안, 그리고 분노를 심고 그의 자존심을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 세계에서 미움받는 존재라고 각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작전을 진행하면 누스는 고도의 지성을 그대로 혼이 황혜화되겠지요.”

 

(462)

군산 복합체의 중심에 있다 보면 지배 논리란 것이 굉장히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고는 했다. ‘공포였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싶은 정책 결정자는 다른 나라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크게 퍼뜨리기만 하면 됐다. 판단의 근거를 국가 기밀이란 벽으로 감춰 버리면 매스컴도 확인 없이 이 위협론에 올라탔다. 그저 그것만으로 막대한 자금이 세금에서 국방 예산으로 흘러들어 군수 기업 경영자들에게 갈 대가가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심어진 공포는 국경 밖으로 전파되어 다른 나라도 미국을 따라서 군사 예산을 늘렸다. 이런 국가 간의 긴장은 의심 때문에 현실에 비해 훨씬 고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전쟁으로 이어져 특정인만 이득을 얻는 무한한 금맥이 형성됐다. 게다가 위정자로서는 외적을 만들면 덤으로 지지율도 오른다는 이익이 생겼다.

 

(474)

이웃과 친하게 지내기보다 세계 평화를 외치는 게 더 간단하지. 알겠나, 전쟁이라는 것은 형태만 바꾸었을 뿐 서로 잡아먹는 건 똑같네. 그리고 인간은 지성을 써서 서로 잡아먹으려는 본능은 은폐하려 하네.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애국심 같은 핑계를 주물럭대고 있지. 하지만 저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짐승하고 똑 같은 욕구일세. 영토를 둘러싸고 인간이 서로 죽이는 것과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침팬지가 미쳐 날뛰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어디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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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그때부터 서청의 민중 탄압은 더욱 포악해졌다. 이 무렵에 많은 서청 단원들이 경찰로 특채되었고 제주경찰서 서장도 서청 출신이 되었다.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한라산에 백두산 호랑이가 왔노라! 공포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구타가 일상화되어 한번 걸려들면 언제 끝날지 모를 고문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남로당의 민애청 소속 청년들은 지하로 더욱 깊이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민애청에 속하지 않은 청년들도 잡히면 민애청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려워 무조건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상이 있든 없든, 뭔가 한 일이 있든 없든 간에 잡히기만 하면 무조건 개 패듯이 했다.  


(41-42)

미군정은 서청에 이어 도내 우익 청년 단체도 경찰 보조 인력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10월 말경에 미군방첩대의 지휘 아래 몇 개의 군소 우익단체를 합친 단일조직체 대동청년단(대청)이 결성되었다. 그동안 여론에 밀려 좌익이 붙인 삐라를 떼고 그 위에 자기네 삐라를 덧붙이는 따위의 소극적인 활동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이 아연 활기를 띠며 수배당한 청년들이 지하로 잠적하여 생긴 빈 공간을 차지하려 달려들었다. 서청과 마찬가지로 경찰을 도와 피의자 검거에 나서는 무서운 존대로 변신한 것이었다. 우익 학생 조직인 학생연명(학련)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들은 세를 불리려고 시국 강연회, 삐라와 포스터 살포 활동을 맹렬히 벌여나갔다. 이제 법을 쥔 자는 우리다! 우리가 법이다! 우리 말이 법이다! 우리가 빨갱이라고 하면 빨갱이다!


(42-43)

그렇게 공포에 짓눌린 가운데서도 단독선거 반대를 내건 2.7사건이 터졌다. 설마설마하던 남조선만의 단독 선거 책동이 1월 중순이 되자 바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는데, 5 10일 이전에 남쪽만의 선거를 치른다고 했다. 지난 삼년 동안 온 나라 백성이 갈구해온 통일국가의 꿈에 대한 공식적인 전면 부정이었다. 온 천지가 분노와 탄식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남로당과 민전이 2 7일을 기해 전국적 총파업을 일으키고 김구와 김규식 등 우익 세력이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단독선거 반대의 함성이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터져나왔다. 공장 노동자, 부두 노동자 들이 파업을 단행했고, 전기 노동자는 송전을 중단했고, 철도 노동자는 철도 운행을 중지했고, 통신 노동자는 통신을 두절시켰다. 수많은 학생, 농민, 노동자들이 가두시위에 나섰고 경찰지서들이 공격당했다.


(68-69)

, 여러분, 이제 울음을 멈춥시다! 언제까지 우리가 울기만 할 겁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매 맞기만 할 겁니까? 저놈들은 용철이처럼 우리도 매를 때려 죽일 거우다. 저놈들한테 매 맞아 죽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앉은 채 매 맞아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일어납시다. 일어나서 싸웁시다. 싸웁시다! 복수합시다! 여러분, 저 악독한 서청 강도들을 이 땅에서 몰아냅시다! 여기는 우리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땅을 저 침략자들이 짓밟고 있습니다. 저 육지 놈들이, 저 육지 경찰 놈들이, 저 서청 놈들이 이 땅을 짓밟고 있습니다. 침략자들을 물리칩시다!”


(86)

미군정이 딘 소장을 둘러싼 최고 수뇌부가 항공편으로 날아들어 비밀회의를 열었는데, 딘 소장을 대변한 경무부장 조병옥이 화평 정책을 내세운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무섭게 몰아붙였다. 김익렬이 모처럼 얻어낸 산부대와의 약속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군정 당국에 의해 파기되었다. 정책은 화평이 아닌 강경 무력 진압으로 급선회했다. 남쪽만의 단독선거인 5.10선거가 코앞으로 닥쳐왔으므로 그전에 군대를 투입해 저항 세력을 속전속결로 진압해버리자는 것이 미군정의 의도였다. 순식간에 경비대의 대이동이 이루어졌다. 온건파 김익렬이 해임되었고, 9연대도 일부만 남기고 육지부로 전출시키고 수원에 있던 11연대를 불러들였다.


(87)

갑자기 교체된 11연대는 9연대와 달리 일본군이 쓰던 99식 장총 대신에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군비 일체를 미제로 일신했다. 박격포, 로켓포 등 중화기도 들어왔다. 일본군 출신 중령 박진경이 연대장이었다. 그 무렵 경비대에서는 그때까지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민족주의 세력이 제거되고 그 자리를 일본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박진경은 북소학교 운동장에 박격포와 로켓포를 진열하고 사살한 시체들을 관덕정 마당에 늘어놓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수많은 사람들을 연행해 포로수용소에 수감했다.


(95-96)

조천리 사람들은 목장에 도착한 즉시 이슬 젖은 풀밭에 선 채로 얼마 동안 집회를 가졌다. 조천리와 와흘리 산부대 청년들 몇 명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했다. 저놈들은 우리를 반역자라고 하는데, 왜 우리가 반역자인가? 우리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것이지 민족에 반역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애국이지 왜 반역인가? 오히려 단독정부를 지지하여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반역 행위다. 이 나라의 허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 국방경비대는 우리 편이니 곧 해결이 날 것이다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128-129)

외세에 대한 싸움이 이제는 동족 간의 싸움으로까지 번져갔다. 산과 해변의 대립은 살벌했다. 좌우 양쪽이 번갈아 서로를 죽이고, 그 가족을 죽이고, 그 집에 불을 질렀다. 복수심에 눈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친구가 친구를 잡아먹고, 친척이 친척을 잡아먹었다. 천년의 공동체,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끈끈한 우애와 혈연의 공동체, 씨줄 날줄로 정교하게 엮인 그 돈독한 공동체가 무참히 찢겨나가고 있었다. 일찌감치 군경에 장악당한 읍내의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위에 붙어라, 아래 붙어라 산에 붙어라, 해변에 붙어라.”


(189-190)

방화에 살인에 도취된 자들이 환각 속에서 계속 불을 지른다. 고함치고 총을 난사한다. 겨우 불을 피해 벗어난 사람들을 향해 총알이 사정없이 날아간다. 참새떼가 날고, 닭이 날고, 사람들과 개, 돼지, , 말 들이 달아난다. 총격에 쫓긴 사람들이 혼비백산 울담을 타고 넘어 산 쪽으로 도망친다. 근처의 대숲이나 덤불숲에 뛰어든다. 닭들도 덤불 아래로 오르르 숨어든다. 죽어가면서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내년 농사를 위해 보관 중이던 씨앗 망태가 타고, 이 집 저 집 곳간에서 쥐를 없애고 곳간을 지켜주던 업신 구렁배암들이 타 죽는다. 닭 한마리라도 구해보려고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던 소년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울담을 넘어 도망치던 청년이 총에 맞아 돌덩이 하나 가슴에 안고 엎어지고, 아기 안은 아낙이 솜옷 입은 등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쓰러진다. 쌀독은 물론 간장독, 된장독, 부엌의 물 항아리, 솥단지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와장창 깨진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노파들이 궤 속에 보관 중이던 호상옷 보따리를 챙겨 허리춤에 매고 불 밖으로 나가려고 허둥대고, 매운 연기를 마시고 캑캑거린다.


(199-200)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어느 순간 검은 구름이 크게 찢기면서 그 틈새로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폭포수처럼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 사다리를 타고 주황빛 불의 날개를 펄떡거리면서, 불의 칼을 휘두르면서 수많은 천사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불의 칼, 불의 날개들이 이글거리면서 지상을 휩쓴다. 하느님이 명령한다. “그러니 너희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라!” 최고 사령관 로스웰 브라운이 단호하게 천명한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이승만이 명령한다. “공비 토벌을 빨리 끝내라. 시일을 끌면서 이렇다 저렇다 보고하지 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다.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지체 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조병옥이 맞장구친가.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월남민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다. “한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서청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축복을 청합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곧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어서 그 붉은 무리들을 소탕하고 오시오!” 연대장 송요찬이 외친다. “일본 군대는 이러지 않았어! 더 잔인하게! 더 잔인하게!”


(245-246)

사람은 누구나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증오 없이는 싸우지 못하는 법, 지휘관은 신병의 마음속에서 증오의 불씨를 지피려고,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 밑바닥 깊이 숨어 있는 야만성을 일깨우려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빨갱이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증오조차 없이 죽여야 했다. 아무리 하느님은 뜻, 하느님의 명령이라지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있다는 생각이 신병을 괴롭혔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수가 없었다. 상관이 무서웠다. 한라산의 산군보다 더 무서웠다. 우물쭈물했다간 무지하게 얻어맞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250)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직급의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져 있었다. 고문과 살인이 너무도 흔해졌고 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 무서운 광증은 집단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광기에 중독된 자들이 법을 가진 자, 법을 쥔 자가 되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죽이고, 시키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마구 죽였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인간에게 목숨을 준 신에게만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그들은 마치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은 죄인데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니, 게다가 그것이 애국 행위라니, 참으로 기묘한 희열이고 최상의 쾌락이자 최고의 자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힘에 도취되었다. 희생자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존재처럼 보였다. 매일 한명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떠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323)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죽음이 아무 보람도, 아무 가치고 없는 죽음이 되어버렸어. 그게 원통해! 도대체 이건 인간의 죽음이 아니여. 짐승이라도 이런 떼죽음은 없어. 너무 억울해, 원통하고 절통해! 우린 결코, 우린 결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여! 너무도 원통해 죽어도 죽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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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미군정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공식 출범한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했던 것이다. 미군정이 삼팔선 이남 조선에서 유일한 정부라고 했다. 인민위원회 체제가 미군정의 행정체제에 반영되기를 원했던 도민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해방의 기쁨과 열광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도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민위원회 간부들 중에서 미군정에 발탁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개는 친일파의 재등용이었다. 일제의 착취 기구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로 복귀하다니, 하급 관리들은 그만두더라도 친일파의 고위직 재등용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면서기를 하던 자들이 버젓이 면장으로 승진하여 복직하기도 하고, 순사 노릇 하던 자들이 경찰서장, 지서 주임이 되었다. 명칭이 순사에서 순경으로, 주재소에서 지서로 바뀌었을 뿐 복장도 검정색 일본 순사 제복 그대로였고, 무기도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99식 혹은 38식 장총과 일본도였다.


(108-109)

해가 바뀌어 1946년이 되자 제주도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졌다. 미국과 소련이 삼팔선을 경계로 조선을 둘로 분할하여 오년간 통치하려는 음모에 대한 반대였다. 한시바삐 독립하기를 갈구하던 조선 백성들에게, 특히 지난 반년 동안 뜨거운 열정 속에 새 나라 건설의 꿈을 안고 달려온 청년들에게 그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해방자를 자처한 미국과 소련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경악 속에서, 조선 땅을 삼팔선으로 두동강 내어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차지하려는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천리에서도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신탁통치 반대 집회가 열렸다.


(131)

해방 후 맞는 첫 봄, 신생의 기운이 제주섬 도처에서 샘솟듯 기운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새봄, 새 학교, 새 일꾼, 새 나라, 해 희망! 그 모든 것이 청년들, 소년들의 것처럼 생각되었다. 꽃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침울했던 청년들의 가슴도 꽃망울 터지듯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렸다. 해방 직후 시작된 집단적 열광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전장과 탄광 등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지독한 절망감이 이제 급격하게 강력한 에너지로 바뀌어 그들을 추동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지금은 귀향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상태라 취직난이 극심하지만 친일파들이 물러나면 자리가 생기리라고, 그러한 집단적 열광은 곳곳에 신설 중학원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133)

일제의 노예 경험이 너의 마음에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 그렇다, 내 나라, 내 땅을 다시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거하여 신탁통치 운운하면서 남북분단을 획책하고 있지만, 그것은 열화 같이 일어난 거족적 반대 투쟁에 의해 반드시 분쇄될 것이다.”


(162)

정두길 : 순태 너는 박헌영파지만 난 여운형이 맘에 들어. 그가 말하는 좌우합작에 나는 찬성이여.

부대림 : 나도 여운형이 좋아. 한독당 김구 선생의 노선도 좋아 보이고.

박털보 : 미국이나 소련이나 우리에겐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이여, 독립의 훼방꾼!

양순태 : 하아, 해방과 훼방! 거참 딱 맞는 말이네예.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

정두길 : 그래서 온 나라 온 백성이 이렇게 외치는 거 아니우꽈? (구호를 외치듯이 큰 소리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조선 사람 조심하자!


(166-167)

장영발 : 허허, 상옥이 말이 틀린 건 아니주. 무정부주의는 작년에 울던 매미 신세가 돼버린 게 사실이여. 나는 다만 그 자치주의 정신은 지금도 이 제주 땅에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주. 국가 속의 자치 공동체! 그 정신은 죽지 않아. 결코 죽지 않아!(이마에 깊은 골을 만들면서) 물론 제주도 독립은 불가능한 일이주. 그러니 그걸 정치적으로 주장한다면 미친놈의 미친 소리가 되는 거여. 그런디 우린 무슨 본능처럼 은연중에 마음속으로 그것 비슷한 걸 생각한단 말이여. 왜 그럴까? (양미간을 모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 왜 그런지를 생각해봤주기. 제주인의 성격이 유별하다는 걸 난 일본에서 고학하면서 노동운동 할 때 알았어. 남과 비교해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잘 모르잖는가. 노동현장에서 보니까, 일본 노동자들은 순종적인 데 반해서 우리 제주 출신들은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더란 말이여. 우리 제주인은 성질이 좀 거칠고 완강해.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산천을 닮는다고 하는디, 우리 제주도가 바람 많고 돌투성이에 거친 화산섬이라 그럴까? 그럴지도 모르주. 그리고 제주 출신은 단결심이 좋았어. 똘똘 뭉쳐 있었주. 바로 그런 단결심이 그 많은 노동쟁의를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만든 거여. 제주인은 집단으로 사고하고,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거든.


(265-266)

극심한 불행과 좌절의 연속인 지난 일년이었다. 대흉년의 굶주림과 호열자에 짓눌린 죽음의 시간이었고, 강제공출, 복시환 사건, 친일파 재등용, 단독정부 추진 등등 미군정이 자행한 총체적 모순이 만들어낸 절망의 시간이었다. 해방의 감격과 미래에 대한 꿈이 참혹하게 짓밟힌 한해였다. 이제 사람들은 피폐했던 마음에 다시 활기가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환한 빛이 가득해졌다. 정두길은 감격이 북받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군정을 반대하는 거대한 실체가 거기에 있었다! 정두길에게 그것은 소름 끼치는 강렬한 충격이었다.


(296)

조병옥은 3.1절 발포 사건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정당방위였다고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심지어 사살은 내가 시킨 바다. 발포 명령자를 처벌하라고? 발포는 내가 명령했으니 처벌할 테면 나를 처벌하라라고 싸늘하게 비웃었다. 읍내 공무원들이 모인 시국 강연 사리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이었다. 너무도 놀라운 발언이어서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이 말이 도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337)

무자비한 테러 행위로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서북청년단의 존재가 제주 사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간 육지부의 각 도시, 각 읍면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대규모로 세력을 확장해온 서청은 좌파 인사와 집회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 백색테러의 대명서로 떠올랐다. 신임 도지사 유해진이 자신의 경호원으로 일곱명을 데리고 들어온 이래 서청 단원의 입도가 두어차례 이어져 지금은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충남 부대의 탄압에 시달리던 도민은 이제 그보다 훨씬 사나운 세력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승냥이가 나가더니 범이 들어온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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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조천리 김해 김씨의 젊은 반역아 집단을 대표하는 최초의 인물은 솔뫼 김명식과 목우 김문준이었다. 솔뫼는 이론가였고 목우는 현장 활동가였다. 처음에는 서울의 같은 단체에서 함께 일하던 두 젊은이는 곧 헤어져 한 사람은 서울, 다른 한 사람은 일본 오사카로 활동 영역을 달리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 창간 역원이면서 1면의 논설란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열정적인 논객이었다. 자유가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인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누구이고 맑스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그 시절에 그의 논설은 새로운 사상에 목마른 청년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신문사를 떠나 정치조직운동에 투신한 그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세간의 이목을 모은 바 있었다. 그 사건으로 투옥된 그는 모진 고문과 옥독(獄毒)으로 병을 얻어 형기 중간에 출감했지만, 이미 몸은 형편없이 망가져 반신불수에 청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271-272)

면장을 마을 밖으로 내친 시위대는 예순살의 원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동쪽으로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만세동산으로 행진해갔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때 올라 만세를 불렀던 동산에 그 운동의 주역으로 징역살이를 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오른 조천리민들의 가슴에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조천리의 모든 항일운동의 원천은 만세동산이었고, 항일로 점철된 마을의 수난사는 언제나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런 만세동산에서 만세 소리가 다시 터져나온 것이다. 만세동산의 남쪽 사면을 빈틈없이 뒤덮은 군중은 강풍 맞은 대숲처럼 다 함께 온몸을 흔들면서 열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이십육년 만에 터져나오는 조선 독립 만세였다. 열세살 창세도, 열여섯살 행필도 땅에 두 발을 쿵쿵 구르면서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땅, 그 땅에서 기운이 솟아올라 그들의 몸에 넘쳐오르는 것 같았다. 온 세상, 온 우주가 환희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한층 가깝게 다가온 한라산을 향하여, 그 아래 질펀하게 펼쳐진 푸른 들판을 향하여, 저 푸른 희망을 향하여 함성을 지르고 또 질렀다. 휑하니 비어 있는 일주도로 또한 밝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질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 독립 만세!


(295-296)

우리 삼팔선이 그어진 중도 몰랐수다. 전쟁 중에 정신없이 살아서……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출국심사하는 맥아더 사령부 미군이 우리한테 물읍디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거 무슨 말이냐고,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 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327-328)

조천리민 여러분! 그동안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수과?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수과? 부모 없는 설움보다 나라 없는 설움이 더 컸수다. 왜 놈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참말로 치가 떨립니다. 멸시당하고 매 맞고…… 아아,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굴레에서 풀려났수다. 여러분, 고맙수다. 이 기쁜 자리에 우리를 불러 이렇게 축하해주시니 참말로 고맙수다. 하지만 우리가 축하받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어른님들이 있수다. 극악무도한 살인적,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다가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순국열사, 우리 마을 조천리가 낳은 영웅들, 그분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애도를 표합시다!”


(333)

청년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저 악독한 왜놈들을 위해 종노릇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지긋지긋해여마씸. 식민지 청년이란 얼마나 가난하고 누추하고 비굴한 존재였수과? 우리는 채찍 맞아 돌아가는 팽이처럼 날이면 날마다 매 맞고 구박을 당해야만 했수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족쇄와 쇠사슬이 풀리고 해방이 왔수다. 금방 안세훈 선생님의 말씀, 참말로 옳은 말씀이우다. 이제 청년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시대란 말이우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375)

일제의 극심한 압박에 짓눌렸던 제주 사회는 일본군이 떠나자 도처에 신생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사방 초목도 억압에서 벗어난 듯 더욱 푸르고 푸른 바다, 푸른 하늘도 새로운 빛으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밭마다 돌담 안에 가득 실린 조 이삭들이 탐스럽게 자라 풍작을 기약하고 있었고, 알뜨르, 진뜨르 비행장도 농토로 복구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분 공장, 단추 공장, 방직 공장이 작업을 재개했고, 공습으로 파괴된 주정 공장은 복구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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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일설에 의하면 안동 김씨도 나름 계산을 했다고 한다.

왕이 되기 전, 어린 이 이명복의 연이 끊어져 어느 안동 김씨의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겁도 없이 대문을 두들기며 연을 달라고 하든지 그럴 용기가 없다며 차라리 포기할 텐데, 이명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 않아서 하루 종일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는 이명복의 우유부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왕으로 세워 설령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살아 있는 대원군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껏 이하응의 처신으로 보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7-28)

물론, 국가적으로 천주교를 문란하다고 여긴 시대였다고 할지라도, 무려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다시피 한 대원군을 마냥 존경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가를 새로 창업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오직 개인의 통치력만으로 시대적 병폐를 끊고, 이전 세상과의 긍정적인 단절을 이룬 인물로 대원군만 한 인물이 또 있던가?

첫째, 60여 년의 세도정치를 끝냈다.

둘째, 300년 만에 비변사를 해체했다.

셋째, 300년 만에 붕당정치를 끝냈다.

넷째, 300년 만에 경복궁을 재건했다.

다섯째, 400년 만에 서원을 제대로 철폐했다.

여섯째, 역사상 최초로 양반들에게 군포를 부과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73)

미군 대위 틸톤(Mclane Tilton)은 부인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나는 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 섬에서 치른 전투만큼 끔찍한 기억은 찾아볼 수 없소.”

신미양요는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로저스 제독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 퇴각을 결정한다. 조선 출정을 통해 미국과 로저스 제독이 얻어 낸 것은 없었다. 조선을 개항시키기는커녕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조차 받아 내지 못한 출정이었다. 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선에 큰코다친 미국이었다.


(96)

한 사람만 더 언급하자면 동학을 진압한다고 핑계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당시의 일본군 사령관이 오시마 요시마사다.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이 낯선 이름은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얼마 전까지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다. 그리고 전범임에도 사형을 면하고 일본의 총리까지 역임했던 기시 노부스케도 조슈번 출신이자 아베 신보의 외조부다. 당연히 아베 신조 역시 조슈번 출신이고,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정한론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이었으니 최근 일본의 정치 권력을 잡은 주류들의 사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97-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기어이 막아선 이순신.

우리 강토를 짓밟은 외적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고, 침략자의 후손들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량해전을 설계했던 이순신.

이순신은 비록 노량에서 전사하지만, 그는 일본 에도막부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에도막부와 조선은 250년의 평화를 유지했으니, 이순신의 노력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짓밟히고 에도막부에 눌려 있던 자들이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정한론이 다시 대두됐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반도가 다시 침략당했다.


(151-152)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이 외세와 치른 전쟁들이다. 모두 일본의 선제공격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선제공격에 앞서 일본은 단 한 번도 전쟁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다.

일본인이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무사도, 즉 사무라이 정신은 형식이자 겉치레에 불과했다. 사무라이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이었을 뿐, 그들 내면의 뿌리에는 닌자 정신이 깔려 있던 것이다.


(176-177)

민비는 임오군란 당시 도망 중에 만난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신처럼 받들고 살았다. 성리학 국가 조선의 궁궐을 무당이 마음껏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진령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무당의 결정으로 벼슬이 주어지기도 했다. 민비가 세자의 건강을 기원하며 금강산 1 2천 봉마다 쌀을 뿌린 것 또한 진령군의 진언 때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민비가 시해되기 전까지 조선의 서열은 고종 위에 민비가 있었고, 민비 위에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


(201)

서재필의 큰 오점은 따로 있다. 부유한 나라 미국 국적의 서재필이 가난한 나라 자신의 모국 조선에서 너무 큰 돈 욕심을 낸 것이다. 독립협회의 고문 자리를 받아들여 10년을 계약한 서재필은 독립협회가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자, 남은 7 10개월의 급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사퇴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황국협회까지 만들어 독립협의를 해산시키려 한 고종은 그깟 돈이 대수냐며 서재필의 남은 임기만큼의 급료를 모두 지급하였으니, 지금 돈으로 30억쯤이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만일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었다면, 서재필은 조선에 남아 있을 생각도 있었다.”


(203-204)

1951년 서재필은 88세의 나이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눈을 감았다. 이후 미국에서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서재필의 묘소가 한국 뉴스에 나오자, 여러 기독교단체가 그의 유해 송환을 주도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서재필의 유해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려는 순간, 한국의 역사가들은 현충원의 정문을 막아섰다.


(233-234)

회고의 애국계몽운동단체는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였다.

회장 윤치호와 부회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구성된 신민회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여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고,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기호흥학회, 서북학회, 호남학회 등 각 지역에 학회가 설립된 것도 신민회의 역할이 컸다. 이 밖에 신민회의 주도로 평양에 자기회사가 설립되었고, 대국에는 태극서관이라는 출판사도 설립됐다.

신민회의 또 다른 특징은 비밀결사적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신민회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다. 비밀결사의 앞뒤 연락책 정도만 알 뿐이었다. 대신 비밀조직인 만큼 신민회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계속 준비했다.


(269)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며 나라까지 잃었음에도 그는 대단히 풍족하게 살았다. 국권피탈기 고종의 행동들은 그저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된 후 고종의 독립운동이란 것들은 모두 자신의 황제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최소한 잃어버린 강토의 회복과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만백성의 자주성 회복을 천명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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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10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친 내용들이 놀라워요. 몰랐던 내용들이 많아서 읽을때마다 놀랍네요.

bookholic 2024-04-11 11:23   좋아요 0 | URL
그런 내용을 오래 기억하면 좋을텐데, 금방 까먹어 버리네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