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나는 어려서부터 남자들에 대해 한 가지를 알아냈다. 그 족속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 그것을 나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배웠다. 차가운 밤마다 되살아나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악몽을 통해서였다.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보다 훨씬 더 변덕과 욕정에 휘둘리면서도, 오히려 그런 기질을 우리에게 덮어씌운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위선이다.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 온 위선.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보라. 그래, 악마가 이브를 유혹한 건 지식을 얻으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이브는 자신을 깨우치려 했을 뿐이다. 그렇게 미끼를 물고 나서, 이번엔 아담이 호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마치 제 욕심만 아는 어린아이처럼 그 일부를 탐했다. 그런데 다시 보라. 남자는 이성으로, 여자는 감정으로 지배된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378)

나는 늘 내 마지막 순간이 정원에서일 거라 생각했다. 뿌리에서 하늘로 뻗는 약초들의 날카롭고 푸른 향기에 둘러싸여, 축축하고 비옥한 흙이 마지막 베개가 되고, 고양이 수염이 주름진 뺨을 간질이며, 집과 집 멀리 들판에서 아이들, 손주들의 목소리와 웃음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리고 토마스의 나무를 베고 사포로 문지르는 꾸준하고 참을성 있는 리듬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그런 순간. 나는 항상 그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신이 내 삶의 태양을 먼저 앗아가실 리 없으니까. 토마스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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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저는 딱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정도가 회사에서 월급 받은 만큼 일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신경을 더 쓰면 돈을 더 받아야 맞는 계산인데, 아니, 최소한 복지라도 더 받아내야 정당한 거래인데, 과연 제가 더 신경 쓴다고 회사에서 뭘 더 해주겠어요?”


(144)

홈페이지에 올릴 프로모션 캠페인 시안을 가져갔더니 여기는 1밀리 자르고 저기는 1밀리 더하고라더라. 근데 그건 인쇄 광고가 아니고 온라인 시안이란 말이야. 그걸 픽셀도 아니고 밀리미터로 수정하라는 게 웬 말이니? 거기에 색감은 뭐라는 줄 알아? ‘냉랭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게하래.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러면 원하시는 스타일의 레퍼런스라도 보여달라고 했더니 뭘 내밀었게? 패션잡지에 실린 나이키 화보였어. 아니, 캠페인 페이지 디자인을 패션 화보처럼 만들라는 거야? 메시지는? 설명은? 심지어 그 화보는 하얀 바탕에 모델들이 나란히 폴짝폴짝 뛰고만 있는 사진이었다고!”


(309-310)

대연아, 삶은 길이로 가치가 매겨지는 게 아니야. 네가 길거나 짧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중요하지. 막말로, 우린 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어. 운이 없어서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거나 지나던 다리가 끊기거나. 정말 희귀한 확률로 타고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벼락에 맞을 수도 있지. 희박하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한 죽음이야. 그렇게 보면 평등하지 않아? 우린 그중 하나를 운 나쁘게 만났을 뿐이야. 하지만 또 운이 좋게도 시기는 알 수 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가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하면 되는 거야. 내 마흔 해의 삶이 누군가의 여든 해보다 과연 가치가 없을까? 어쩌면 이미 난 그들보다 큰 행복을 누렸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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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정조 이후의 왕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였습니다.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들이 어린 왕들을 앉혀놓고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하면 그냥 도장이나 찍어주는 존재였어요. 외척 가문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왕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 명복만큼은 그런 왕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아들의 파워를 키우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습니다. 자연스레 개혁의 핵심을 왕권 강화에 둡니다. 그리고 세도정치 아래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진 민심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련의 경제 개혁을 단행하지요.

 

(28-29)

흥선대원군은 끄떡하지 않습니다. 잔뜩 독기를 품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해요.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뜻이 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나는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니요.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 정도로 흥선대원군은 서원 정리에 엄청난 힘을 쏟습니다. 물론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만동묘도 폐지합니다. 만동묘는 명의 신종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런데 당시 명은 망하고 없는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준 은혜를 기리기 위해 당시 황제의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죠. 만동묘는 철저한 사대주의의 상징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기어이 만동묘를 폐지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아직까지는 흥선대원군의 힘이 그 시대의 성리학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누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9)

이 얼마나 굴욕적입니까? 명성황후 정권 하나 살리자고 나라의 국격, 나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망가뜨리다니요. 외교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우호관계요? 혈맹이요? 그저 웃고 말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단어들이 얼마나 겉바른 수사(修辭)들인지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외교사를 보세요. 절대 우방도 절대 혈맹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 존재할 뿐입니다. 당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잃습니다.

 

(86)

1885,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거문도를 영국이 점령해버려요. 그런데 조선 정부는 거문도가 영국에서 불법으로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도리어 청에서 연락이 와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봐라하고요. 조선은 청에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런 일 없는데요?” 또 다시 청이 연락해옵니다. “아냐, 분명 거문도가 점령되어 있을 거야. 가서 잘 알아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문도에 영국 깃발이 떡하니 꽂혀 있는 거예요. 외세가 자국 땅에 들어와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정부라니요!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정권 유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112)

개항 이후 집권세력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정권 유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외세의 힘을 빌립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도시 빈민과 구식 구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SOS, 갑신정변이 벌어지자 급진개화파를 제압하기 위해 청에 SOS,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또 청에 SOS를 보낸 그들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품으로 뛰어들어요. 심지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몸을 피합니다. 정말 일관성 하나는 끝내줍니다. 이렇게 고종 정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외세는 힘을 빌려줍니다. 하지만 절대 공짜로 도와주지는 않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아관파천의 비용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160)

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메킨지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

 

(193)

전등은 1887년에 최초로 불을 밝힙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전등불이 맨 처음 밝혀진 곳은 경복궁입니다. 향원정 연못가에서 불을 밝혔는데 불이 확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맨 처음 들어온 전등불은 시원찮았던가 봐요. 동력이 부족해서인지 깜박깜박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등불을 건달불이라 불렀습니다. 한편 이때 전등을 밝히는 동력은 증기기관이었는데요. 증기기관을 식히기 위해 향원정 물을 썼는데, 그 바람에 연못이 뜨거워졌나 봅니다. 그곳에서 놀고 있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거예요. 이걸 본 사람들이 또 난리를 피우죠. “물고기들이 저렇게 죽다니 이게 웬 괴변이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요.

 

(274)

의열단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김원봉입니다. 항일무쟁투쟁에서는 쓰리 봉, 세 명의 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첫 번째 봉이 김원봉, 두 번째 봉은 김두봉, 세 번째 봉은 양세봉입니다.

 

(305-306)

비슷한 이름도 많이 나오고, 중복되는 이름도 곧잘 등장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픕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름도 잘 바꾸고 조직 구성도 잘 바꿉니다. 이 시기에 가끔 이청천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실은 지청천이에요. 그런데 조직명의 경우는 바꾸는 데 제약이 따릅니다. 쓸 단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앞의 고유명사로는 조선이나 한국이나 대한’, 그 뒤에 따라붙는 말로는 혁명이나 독립같은 단어밖에 쓸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중복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름을 골라 쓰는 데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단어를 쓰는 쪽은 주로 사회주의 쪽이고, 한국과 대한이라는 말은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진영에서 많이 썼습니다.

 

(345)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보도한 어떤 신문이 헤드라인으로 이런 문장을 뽑았어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이 신문은 임시정부의 수립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첫 번째 내용이었다는 것은 전하지도 않았어요. 이걸 받아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일제 강점기라는 길고 긴 터널을 뚫고 이제 막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런데 다시 외국이 신탁통치를 하겠다니요. 거기에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했는데 소련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다니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당연히 소련은 나쁜 놈들이고, 미국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소련은 사회주의니까 그들을 추종하는 좌익 세력도 덩달아 나쁜 놈들이 되는 거고요. 결국 그 신문의 보도 하나 때문에 여론이 확 뒤집혀버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오보였어요. 대한민국 언론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보였습니다. 이 오보로 인해 우익진영의 반탁반소운동이 거세어져 찬탁 입장을 밝혔다고 오해를 받은 송진우가 암살당하고 다른 인사들 역시 큰 위협을 받습니다.

 

(406-407)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을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만 그치겠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학생의 편지입니다. 열다섯 살 소녀가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거리에 나가다니, 얼마나 절절한 마음입니까? 소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해요. 경찰이 쏜 총에 가녀린 몸이 풀썩 꺾였지요. 민주주의를 위해 어린 목숨을 버린 겁니다. 그러자 이젠 초등학생들까지 나옵니다. “우리 언니, 우리 오빠, 우리 형들을 잡아가지 마세요!”하고 당당하게 외치면서요.

 

(481-484)

한편 저곡가의 구조는 농촌 사회를 어렵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났지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이러한 이촌향도 현상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수출 중심입니다. 수출을 하려면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이 싸야 해요.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쌀값이 싸야 하고요. 쌀값이 비싸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곡가 정책을 유지한 거예요. 당연히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어봐야 남는 게 없으니 자꾸 도시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시로 사람이 몰리다 보니 인력이 남아도는 겁니다. 임금을 낮춰도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저임금과 저곡가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삶의 질은 아주 열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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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9)

오마니……

부르며, 나는 외할머니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오세희를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정 어려운 건 또다시 외할머니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혼자 남은 외할머니의 외로움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내게 그랬듯 딸이 겪을 외로움을 걱정했지만 우리 셋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은 사실 외할머니였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동족 하나 남지 않은 세상에서 밭을 매듯 하늘의 어둠을 깁는, 맹목적으로 날갯짓만 할 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새, 내게 외할머니는 그런 존재에 가까웠다.


(100-101)

자이니치뿐 아니라 일본 기업인이나 예술단체도 잠시 열렸던 북한의 국경은,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1980년대 이후부터 다시 극도로 제한되었다. 북한 정부는 심지어 북송 사업에 가족을 보낸 자이니치에게조차 좀처럼 초청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입국 신청서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며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아버지 없이 자란 손주들을 보살피면서 살 수 있으리란 기대로 버텨왔던 외조부모는 절망에 휩싸였다.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던 그해-1996년이었다-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북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건 나라에 빚이 늘고 물자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경제난을 넘어 대기근이 시작된 것이다. 자이니치 공동체에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소와 돼지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 들판에서 서식하는 쥐와 뱀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산의 나무들은 그 껍질이 다 벗겨졌고 먹을 만한 풀 역시 자라는 족족 뽑혀 나가는 중이라고도 했다. 어느 병원에서든 항생제 하나 구할 수 없고 학교와 관공서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해 문을 닫고 있으며 평양의 최상급 호텔들도 난방이 되지 않는다는 소문 역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북한이 대외적인 시선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아는 자이니치 공동체는 주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평양 시내의 호텔들마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현실은 소문마다 참혹하리란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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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그 노트에는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이라 불렀던 궁극의 이른이 미완의 상태로 적혀 있었다. 그의 목표는 신의 마음이 담겨 있는단 한 줄짜리 방정식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나, 끝내 신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2)

* 빅뱅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무엇이 빅뱅을 유발했는가?

* 블랙홀의 내부(또는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 우리 우주에는 웜홀(wormhole)이 존재하는가?

* 4차원 이상의 고차원 공간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 우리 우주 외에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가? ,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가 존재하는가?


(27)

뉴턴이 발견한 운동 및 중력이론은 기존의 운동법칙을 하나의 원리로 묶은 최초의 통일이론이자, 인간의 지적 능력이 낳은 최고의 산물이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포프는 뉴턴에 대한 존경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뉴턴이 있으라!”는 신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났다.


(39)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전기와 자기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수학적으로 대칭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맥스웰의 방정식에는 이중성(duality)’이라는 대칭이 존재한다. (전자기파)에 포함된 전기장을 E라 하고 자기장을 B라 했을 때, E B를 맞바꿔도 맥스웰의 방정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이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기와 자기가 동일한 힘의 두 가지 측면임을 의미한다. 맥스웰은 E B 사이의 대칭을 이용하여 전기와 자기를 통일했고, 그 덕분에 19세기 과학은 위대한 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55)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면, 물질과 에너지를 포함하여 당신이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도 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체중은 증가한다. 그런데 이 초과질량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움직이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초과 질량의 출처는 바로 운동에너지이다. 이는 곧 운동에너지의 일부는 질량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한다.


(83)

양자의 개념은 1900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제기한 간단한 질문에서 탄생했다. ‘뜨거운 물체는 왜 빛을 발하는가?’ 물체를 불에 달구면 특정한 색의 빛이 방출된다. 인류는 이 사실을 수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릇을 만드는 도공들은 가마의 온도가 수천 도에 도달하면 그 안에 넣은 도기가 적색에서 황색을 거쳐 청색으로 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것은 성냥이나 촛불, 또는 라이터만 있으면 즉석에서 확인 가능하다. 촛불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 아래쪽은 푸른색을 띠고, 위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면서 노란색-붉은색으로 변한다.)


(96)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두고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멍청한 이론처럼 보인다고 했고, 전자파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던 슈뢰딩거조차도 자신의 이론에 대한 확률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도 일부 물리학자들은 파동이론의 철학적 의미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는 중이다. 당신이 어떻게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양자역학과 관련하여 내가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한 가지뿐이다.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119-120)

지난 100년 사이 최고의 발명품으로 손색이 없는 트랜지스터를 예로 들어보자. 이 조그만 회로소자는 장거리 통신 네트워크와 컴퓨터, 인터넷 등 정보혁명을 견인한 일등공신이다. 간단히 말해서, 트랜지스터는 전자의 흐름을 제어하는 일종의 밸브이다. 수도 파이프에서 장착된 밸브를 돌려서 수량을 조절하는 것처럼, 트랜지스터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전자들 중 극히 일부만 통과시키는 초미세 전자밸브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면 작은 신호를 크게 증폭할 수 있다.


(132)

약력은 다양한 원자의 핵을 단단하게 유지시킬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원자핵이 더 작은 입자로 붕괴되는 과정에 관여한다. 앞서 말한 대로 지구의 내부가 뜨거운 이유는 그곳에서 방사성붕괴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산폭발과 지진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의 원천은 약력인 셈이다. 중성자는 상태가 불안정하여 양성자와 전자로 붕괴되는데(이것을 베타붕괴beta decay라 한다.), 붕괴 전과 붕괴 후의 물리량이 보전되려면 제3의 입자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유령입자로 알려진 뉴트리노이다.


(141-142)

둘째, 표준모형은 각기 다른 힘을 서술하는 여러 이론을 인위적으로 묶어놓았기 때문에 다소 부자연스러우면서 누더기 같은 인상을 준다(한 물리학자는 표준모형을 칭찬하는 것은 마치 오리너구리와 땅돼지, 고래를 하나로 묶어서 희한한 동물을 만들어놓고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을 예뻐할 생명체는 엄마밖에 없다고 말했다.)


(160)

블랙홀과 관련된 책과 논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블랙홀에서는 아무것도 탈출할 수 없다고 했지만, 호킹은 이것이 양자이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블랙홀이 완전이 검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빛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때문인데, ‘완벽한 암흑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확정성원리에 위배된다. 양자세계에서는 암흑조차도 불확실하다. 그리하여 호킹은 블랙홀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양자복사quantum radiation를 방출한다는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79)

1920년대에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우주에 적용하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대부분이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팽창하지도, 수축되지도 않으면서 항상 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서 얻은 해는 우주가 격렬하게 팽창하거나 수축된다고 강변하고 있었다(아인슈타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것은 리처드 벤틀리가 제기한 질문의 해답이었다. 중력이 작용해도 우주가 붕괴되지 않는 이유는 팽창하는 힘이 중력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206)

* 대칭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들어낸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와 표준모형은 다양한 원소와 소립자로 매우 혼란스럽지만, 대칭을 도입하면 깔끔하게 정리된다.

* 대칭은 이론의 공백을 메워준다. 대칭을 도입하면 이론에 나타난 공백으로부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와 소립자를 예측할 수 있다.

* 대칭은 무관해 보이는 객체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대칭은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전기와 자기, 그리고 페르미온과 보손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더 큰 항목으로 통일시킨다.

* 대칭은 의외의 자연현상을 알려준다. 대칭은 반물질과 스핀, 쿼크 등 새로운 입자와 물리량을 예측했으며, 결국 사실로 판명되었다.

* 대칭은 이론을 망칠 수도 있는 의외의 결과를 제거해준다. 양자보정에서 나타난 무한대와 변칙은 대칭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

* 대칭은 고전적인 이론을 업그레이드해준다. 끈이론의 양자보정은 매우 엄밀한 과정이어서, 원래 이론을 수정하여 시공간의 차원을 결정해준다.


(212-213)

홀로그램 원리hologram principle라는 기이한 이중성도 예상치 못한 발전을 이끌었다. 홀로그램이란 3차원 물체의 모든 정보를 2차원 플라스틱 평면에 저장하는 기술이다. 평평한 면에 레이저를 쪼이면 갑자기 허공에 3차원 입체 영상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3차원 영상의 모든 정보가 2차원 평면스크린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영화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나 로봇 R2-D2를 실물처럼 볼 수 있고, 디즈니랜드에 있는 유령의 집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유령을 만들 수도 있다.


(216)

스티븐 와인버그는 끈이론을 북극점을 찾기 위한 인류의 노력에 비유했다. 고대에 작성된 모든 지도에는 북극점에 커다란 구멍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구 어디서나 나침반의 바늘은 그 신비한 장소를 가리켰지만, 북극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북극점이 존재한다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하나도 없었기에, 일부 사람들은 북극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9년에 미국에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가 마침내 북극을 정복했다.


(225)

초대형 가속기가 완성되면 끈이론에서 예측된 미니블랙홀의 존재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 끈이론은 중력과 소립자를 모두 포함하는 만물의 이론이므로, 물리학자들은 가속기에서 미니블랙홀이 발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미니블랙홀은 진짜 블랙홀과 달리 에너지가 입자 몇 개 분량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의 에너지가 미니블랙홀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도 지구는 멀쩡하니까, 미니블랙홀이 지구를 삼킬 걱정은 붙들어 매도 된다.)


(233-234)

인류원리는 우리 우주와 관련된 이상한 실험적 사실을 설명해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의 모든 상수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세팅된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미국의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우주는 마치 우리가 등장할 것을 처음부터 예견했던 것 같다고 했다. 핵력이 지금보다 조금만 약했다면 태양이 점화되지 않아서 태양계는 암흑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강력이 지금보다 조금만 강했다면 태양은 이미 수십억 년 전에 연료가 고갈되어 죽은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핵력의 세기가 기적처럼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252)

그러나 이 세상을 이해할 때에는 증명 가능하고 재현가능하며 반증도 가능한과학을 동원해야 한다. 이것이 논지의 핵심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면서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마다 각양각색인데, 이 상황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흐를수록 몇 개의 방정식으로 축약되면서 더욱 단순하고 강력해진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의 매력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과학을 넘어선 영역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뜻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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