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중종반정은 명분은 있었으나, 준비는 부족했던 사건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준비된 왕이 없었고, 중종 스스로도 왕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존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69)

결국 중종은 왕이죠. 허약해 보이지만 본인은 왕이고 조광조는 신하예요. 그런데 조광조가 추구하는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덕 정치라는 게 기본적으로 신권을 강화하는 거거든요. 신하가 중심이 되어서 성리학적 질서를 바로 세우고, 그 과정에서 왕은 도적 정치, 왕도 정치를 하면서 철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왕은 항상 몸과 마음을 닦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경연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하들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조광조가 자꾸 이런 식으로 하니까 결국 중종은 도대체 누가 왕이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131)

우리가 흔히 16세기를 사람의 시대라고 하죠. 사림파가 등장해서 훈구파와 대립하다가 결국 4대 사화가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4대 사화 이후에 사림파가 승리를 해요. 훈구 세력을 몰아낸 사림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사림 내부에서 의견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때 가장 큰 이슈는 기존의 훈구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거예요. 이 중에서 훈구, 특히 외척을 확실하게 내치자는 쪽이 동인이 되고, 일부 양심 있는 외척과는 함께 갈 수도 있다는 쪽이 서인이에요. 지역적으로는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 예전 동대문운동장 근처인 건천동에 살아서 동인이고, 서인의 영수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에 살아서 서인이 되는 겁니다.


(174)

연도의 끝자리 수 쉽게 외우는 법

10

연도

4

5

6

7

8

9

0

1

2

3

*10간의 ()’으로 시작되는 해는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처럼 끝자리 수가 4이다. ‘’,  도 이렇게 외우면 쉽다.


(190)

헌종 10(1844), 한양

전국 8도에서 몰려든 선비들이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시제가 발표되고 긴장 속에서 치러진 시험

마침내 합격자가 발표됐다.

그런데 합격자 명부의 조수삼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조수삼은 학식이 깊고 글재주가 뛰어나

당대의 문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선비.

그가 오랜 공부 끝에 과거에 합격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감탄하게 한 것은

당시 그의 나이가 무려 83세라는 것이었다.


(193)

단순 명쾌하게 조선의 과거 시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문과는 크게 대과와 소과로 나뉩니다. 소과는 다시 진사시와 생원시로 나뉘는데요. 진사시와 생원시에는 초시와 복시가 있고, 합격자는 진사시, 생원시 각각 100명씩 총 200명입니다. 이렇게 소과에 합격하고 나면 대과를 볼 수 있습니다. 대과에는 초시, 복시, 전시 3단계가 있는데요. 초시와 복시는 각각 초장과 중장, 종장 3단계의 시험을 보게 됩니다.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을 하고, 그중 33명을 복시에서 뽑습니다. 여기서 뽑힌 33명은 마지막 절차인 전시, 즉 왕 앞에서 보는 시험을 통해 최종 순위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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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10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종이라는 군주가 조광조라는 시대의
인물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나
봅니다.

준비 안된 군주는 공신들에게 휩싸
여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
하고 휘둘린 모양입니다.

83세의 과거 합격자라... 현대로 치면
이제는 사라진 사시 장수생 정도로
보면 될까요.

bookholic 2021-01-10 23:30   좋아요 0 | URL
네, 레삭매냐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한편으로는 조광조가 너무 중종을 믿은 것 같기도 하고요...
좀 윗사람 눈치를 보면서 일하지... 윗사람이 왕인데...^^
즐거운 한주 되십시오~~~^^
 














(287-288)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대표적 존재인 이응준과 김석원은 우쓰노미야의 회유책에 그렇게 발목을 잡혀버렸다.

두 장교는 그렇게 우쓰노미야의 선한 면만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제암리 학살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그 무렵 조선민족을 절망으로 몰고 갈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홍범도의 독립군을 도운 만주 조선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출병을 본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만주 출병은 그가 조선군사령관직을 떠난 직후 실현되었다.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해 대규모로 출병했다. 그러나 독립군을 뒤쫓다가 챵산리(청산리) 등지에서 대패해 오히려 3천여 명이 전사했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만주의 조선인 3만여 명을 보복적으로 학살했다. 그것이 경신참변이다.


(290)

이응준은 권총 분실 사건과 우쓰노미야에 접근한 일로 인생의 길을 180도 바꿀 수도 있었다. 우선 임시정부 밀사인 최성수와 더불어 만주로 탈출할 수 있었다. 3.1운동 무력탄압의 원흉 우쓰노미야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지석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저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우쓰노미야에게 인간적 배신을 할 수 없었다면 그가 떠난 뒤 독립운동 전선으로 갈 수도 있었다.


(338)

염창섭은 일본영사관에 소속되어,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를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만주국 건설을 찬성하게 지도하고 취약지구에 집단부락을 만드는 등 친일 행위를 하고 있었다. 원용국은 지린성 판스현에서 동포들을 회유해 항일무장세력이 발을 못 붙이도록 자위단을 조직하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배 학년 중 우등생이었던 윤상필은 관동군 참모부 조선반에 속해 있었다. 재만동포들을 만주국과 일본군 쪽으로 끌어당겨 항일세력을 와해시키는 온갖 공작을 기획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393)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이제 천명을 안다는 오십 줄 나이에 이르렀고 절반 이상이 퇴역했다. 현역장관들은 대부분 고국에 돌아와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뽑아내는 병사(兵事) 업무를 맡거나 전문학교와 중학교의 교련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퇴역한 사람들도 대개는 교련 교관 등 육사 출신에 걸맞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독립투쟁을 하고 민족혼 교육에 매달렸던 조철호가 세상을 떠나 그런 역할을 할 위인은 이제 없었다. 아오야마 묘지에서 뒷날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던지자고 한 맹세는 대부분이 추억으로만 생각할 뿐 몸도 정신도 이제 일본의 통치에 젖어 있었다.


(502)

김광서는 최후가 불행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사범대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936년 간첩죄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2년 반의 금고형을 받고 복역했다. 1939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으나 그해 12월 다시 체포되어 8년의 강제수형령을 받고 카라간다 감옥으로 수용됐다가 거기서 북부 시베리아 코미 자치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철도 노역을 했고 1942 1 26일 철도수용소 부설병원에서 영양부족에 따른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56년 유족의 탄원을 받은 소련 군사법원은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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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렇게 푹 쌓인 눈 위를 걸으니 옛날 산 친구 생각이 난다. 백두대간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녀본 후 그가 던진 한마디.

앞으론 눈 쌓인 겨울산만 다니련다.”

연유를 물으니, 눈이 쌓이면 나무뿌리를 밟지 않아도 되고 흙이 패지 않으니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는 얘기다. 미안한 마음 없이 나무의 진면목을 바라본다는 것, 겨울산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37-38)

제주에는 많은 설화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몸집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관탈 섬에 걸쳐졌다고 한다. 그 설문대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퍼 담아다 한라산을 쌓아 올릴 때 구멍 난 치맛자락 사이로 한 움큼씩 떨어져 나온 흙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오름들은 제주도민에겐 뒷동산이며, 가축들에겐 풀을 뜯는 목장이었고, 지붕을 덮을 띠가 자라는 곳이자, 굼부리 안은 목동들이 바람을 피해 누울 수 있는 안식처였다.


(50)

제주어 사전에는 곶자왈을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정의하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중산간지대의 숲을 대개 이나 자왈또는 곶자왈이라고 불러왔다. 따라서 곶자왈이란 민가 근처에 있는 숲으로, 쟁기의 날이 땅을 갈아엎을 수 없어서 농부의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땅을 의미한다.


(72)

흑룡만리(黑龍萬里). 누군가 제주의 돌담길을 흑룡만리라 했다. 용은 바다를 희롱하고, 바다는 화답이라도 하듯 비릿한 물바람을 보내어 용을 춤추게 하며, 길은 그 사이에 길게 누워 있다.


(87)

협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탐스럽게 생긴 담팔수가 나그네를 반기고,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황칠나무, 참식나무, 조록나무, 아왜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사이사이에는 예덕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멀구슬나무, 머귀나무, 때죽나무, 자귀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굴피나무, 합다리나무, 꾸지나무, 곰의말채나무, 까마귀베개 같은 낙엽 지는 나무가 살고 있다. 숲 바닥에는 바람등취(후추등)이 바위를 뒤덮고, 맥문아재비가 보석같이 영롱한 열매를 달고 있다.


(116)

너도밤나무 하면 나도밤나무가 떠오른다. 나도밤나무는 너도밤나무더러 나도밤나무 대열에 끼워달라고 조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너도밤나무는 참나뭇과이고 나도밤나무는 나도밤나뭇과이다.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잎의 모양이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로 서해안 주변의 산에서 자란다.


(127-129)

옛날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고 하면서 만약 100그루를 심지 못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을 사람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 만에 전부 심었다. 심은 밤나무에서는 싹도 나고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찾아와서 그동안 심어놓은 밤나무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다. 산신령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여러 번 세어도 아흔아홉 그루밖에는 안 되는 밤나무가 그사이에 한 그루 더 생길 수는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심기는 100그루를 심었지만 그사이 한 그루가 말라 죽은 것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옆에 서 있던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입니다.”하고 외쳤다. 산신령은 다시 그 나무에게 밤나무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 나무는 자기도 밤나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이름 붙여주고 잘 가꾸었다고 한다.


(136)

성인봉은 왜 산이 아니고 봉일까? 산의 격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곳의 높이는 984미터이다. 1000미터에서 16미터 못 미치는 큰 산이다. 사방으로 갈래를 친 겹산인데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도 깊다.

산과 봉()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이 많지만, 일단 산이라고 하면 산괴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있어야 한다. 한라산은 한라산을 떠받치고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에 산이며, 울릉도는 섬 자체가 산으로 떠받칠 땅이 없기에 봉이다.


(268)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의 일이다.

도읍은 정했는데 도읍을 감싸주고 궁궐을 지켜줄 주산(主山:도읍, 집터, 무덤 따위의 뒤쪽에 있는 산)이 없었다. 그래서 전국의 산에 연락하여 주산을 모집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들이 도읍의 주산이 되기 위해 앞 다투어 한양으로 모여들었는데,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주흘산도 열심히 한양으로 쫓아갔지만 이미 삼각산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 뒤였다. 크게 실망한 주흘산은 돌아오는 길에 이곳 문경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때 삐친 것 때문에 지금도 한양을 등지고 앉아 있다는 재미난 얘기가 전해진다.


(281)

산에서 나는 약초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체질이 있으며, 따라서 같은 병이라도 약은 달라질 수 있다. 일찍이 중국 주나라의 명의인 편작이 자신의 저서 <난경>에서 의사가 아무리 고쳐주려 하여도 병이 잘 낫지 않는 환자의 경우 여섯 가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자

둘째,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자

셋째, 음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자

넷째, 음양의 균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은 자

다섯째,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

여섯째,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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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아무로 높고 강력한 파도라도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       슈테판 츠바이크


(90-91)

, 다른 말로 하면 삶에 철학적 깊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부분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중세는 흔히 암흑시대니 뭐니 해서 역사가 후퇴한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면적으로 아주 깊은 성찰을 했던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시기이기도 했고요. 또 앞으로 보겠지만 신은 어떤 존재여야 하고 신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끝없이 탐구하는 과정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96)

참고로 가톨릭의 경우 지금도 공의회가 열립니다. 가장 최근에 열린 공의회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여기서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 공의회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성당에서도 라틴어로 미사를 지내야 했겠지요. 생각해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공의회라는 합의 방식이 지금까지 지켜진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나요?


(133)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로 모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방금 본 사진 속 바위 돔 사원이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거죠. 이 사원의 황금빛 지붕 밑에는 큰 너럭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 바위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알라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승천했다 돌아온 장소라고 알려져 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바위는 유대교와 기독교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아들을 신에게 제물을 바치려 했다고 하거든요.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133-134)

그래서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분쟁의 땅이기도 합니다. 뒤 페이지 지도를 보세요. 일단 이 도시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구역이 있고, 여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던 소수 민족입니다. 이렇게 사방 1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 안에 각자 이곳이 자기 종교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옹다옹 모여 있으니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겠죠.


(147)

11세기 무렵 기독교가 동서로 분열하며 서쪽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가톨릭이, 동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중심으로 정교회가 세워집니다. 가톨릭은 교황이, 정교회는 총대주교가 대표하게 되었죠. 이렇게 분열한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름에도 그 주장이 드러나 있습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은, 정교회를 가리키는 오서독스(Orthodox)는 정통을 의미하거든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정교회는 지금도 러시아와 그리스에서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기독교 종파입니다.


(183-184)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고대 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중세가 시작된 때라고 합니다. 물로 동로마는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단단한 방벽 뒤에서 1000년을 더 살아남긴 했지요. 그러나 살아남은 동로마를 고대 로마제국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고대 로마제국의 중심이 이탈리아 반도였다면 동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지역이거든요. 당연히 동방 문화권이고요.


(237-238)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없지만 예술이 진리를 보는 눈이 되어줄 수 있다고 했지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창작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스스로 진리를 말하지 않으므로, 사실로부터 진리를 알아내려면 시나 그림 같은 예술적 창작이 주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모방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능이고, 교육도 결국 모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방의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지요. 또한 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고 그림이 모방하려 한 진리를 추리하거나 상상하면서 그 차이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323)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르네상스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이어진 카롤링거 르네상스입니다. 이 시기에 드디어 본격적인 중세를 망라할 사회제도, 기독교 교리, 중세적 감수성 전체가 선명해집니다. 더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유산들이 복원되기 시작했고요. 초기 기독교 시대의 혼란을 넘어 서유럽 세계의 질서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중세의 암흑기가 거의 끝나간다고 할 수 있지요.


(335)

샤를마뉴가 사랑받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샤를마뉴가 화려한 로마시가 아니라 소박한 북쪽의 고향 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교황에게서 로마 황제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했지만 샤를마뉴는 평생 로마 시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거점에서 나라를 통치하다가 지금의 독일 아헨에 수도를 정한 후로는 쭉 그곳에 머물렀죠. 샤를마뉴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거예요. 샤를마뉴 치세에 게르만 문화와 그리스 로마 문화, 그리고 기독교가 융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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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구권에서는 붙박이별과 떠돌이별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예 다르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붙박이별을 스타(star), 떠돌이별을 플래닛(planet)이라고 구별해 부른다. 이런 서구의 관례를 따라 스타라는 단어를 별이라고 부주의하게 번역해오다 보니 오늘날 한국에서 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붙박이별에 국한되어 사용되곤 한다. 서구의 플래닛으로는 한자 용어인 행성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27)

플라톤은 주의 본질이 수라고 생각한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순수하고 영원하며 완전한 우주의 속성이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 이후 고대 그리스에는 우주가 흙, , 공기, 불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데, 플라톤은 각각을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와 연결시켰다. 나머지 하나인 정십이면체는 신성한 영역인 우주를 채우고 있는 에테르(ether)에 대응시킨다. 이에 따라 세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그 바깥에 순차적으로 물, 공기, 불이 위치되었다.


(42)

중세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천동설에 기반한 우주관이 계속 이어진다. 중세인들도 지구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창조한 중세인의 우주 또한 그다지 크지 않았다. 별들은 하루라도 짧은 시간 동안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했으므로, 별들이 무한한 거리에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별들이 박혀 있는 천구는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다. 다만 무한한 신의 속성을 반영하기 위해 천구 밖에는 무한한 신의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51-52)

비록 원궤도를 포기하는 아픔은 있었지만, 케플러는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다. 그는 관측 데이터로부터 행성의 타원궤도가 찌그러진 정도, 즉 타원의 반지름 중 길이가 긴 쪽과 짧은 쪽의 비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긴반지름과 공전주기 사이에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낸다. 긴반지름의 세제곱이 공전주기의 제곱에 비례함을 보인 것이다. 이 관계는 케플러의 제3법칙으로 알려져 있고, 흔히 조화의 법치(harmonic law)이라 부르기도 한다. 타원궤도라는 추함 이면에 숨겨져 있던 신성한 하모니의 발견은 분명 케플러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63)

그중 한 명이었던 헨리에타 리비트는 주당 10.5달러라는 박봉의 인건비를 받으며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마젤란은하에 있는 1777개의 변광성 관측 자료를 분석했다. 변광성이란 빛의 세기나 밝기가 시간에 따라서 변하는 별을 말하는데, 별빛의 밝기가 이처럼 변하는 이유는 별의 크기가 팽창했다가 줄어드는 진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리비트는 이 변관성들 중에서도 세페이드 변광성이라 불리는 별들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이 변광성의 최대 밝기와 진동 주기 사이에 깔끔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진동 주기가 짧을수록 어둡고 주기가 길수록 밝았던 것이다.


(99-100)

외부 은하의 후퇴속도와 거리 사이의 상관관계는 허블의 관측 이후 오랜 기간 허블의 법칙이라 불려 왔었다. 하지만 이를 이론적으로 예측한 사람은 르메트르였고 많은 천문학자들이 르메트르에게도 합당한 크레딧을 주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결국 2018년 국제천문연맹은 이 법칙을 공식적으로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아인슈타인, 에딩턴, 허블 등 당대 학계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 과소평가 받아왔던 르메트르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해진다.


(125-126)

그러나 우주가 팽창하면 온도가 떨어지고 빛의 에너지도 감소한다. 이 경우 빛의 에너지는 입자들의 질량과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보다 작아진다. 즉 빛의 에너지는 더 이상 입자와 반입자를 생성할 만큼 충분히 높지 못하다. 반면 그전에 만들어진 입자와 반입자는 충동하면서 빛으로 바뀔 것이다. 물질과 반물질은 정확하게 같은 양만큼 생성되었기에, 이렇게 서로 쌍소멸하면 결국 우주에는 빛만 남게 될 것이다.


(146)

빅뱅은 우리의 미래에 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준다. 아주 먼 미래의 우주의 모습은 어떨까?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생명도, 지구도, 별도, 은하도 모두 생기를 잃고 죽어갈 것이며 결국 빛이 없는 암흑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나중에는 허무하게 죽어갈 우주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171)


태양의 밝기는 3.84x10^27와트(W). 수소 핵융합으로 이 정도의 에너지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초당 6.4x10^14킬로그램의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어야 한다. 매우 많은 양처럼 느껴지지만 태양 전체 질량은 무려 2x10^30킬로그램에 달한다. 100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태양이 지금처럼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유지시킬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수소 연료가 있다는 뜻이다.


(200)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철, DNA를 구성하는 원소들은 모두 과거 언젠가에 별 속에서 생성되었다. 별들의 먼지로 구성된 우리 몸은 별의 탄생, 별의 진화, 별의 죽음과 초신성 폭발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도 만들어졌고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지구에 마련되었다. 우리 모두 아주 먼 과거에는 별 속에 있었다.


(250)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수렴진화는 심지어 분자단위에서도 발견된다. 외계에 생명체가 있다면 지구와 같이 탄소를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다. 탄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 중 하나이고 탄소처럼 화학적 다양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원소는 없기 때문이다. 중력이 전 우주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이듯, 지구에서 적용되는 화학법칙이 외계에서 다르게 적용될 이유 또한 없다. RNADNA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자들의 조합 방식에도 생명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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