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낮이건 밤이건 들려오는 징과 피리와 꽹과리 소리에 남측은 상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피가 나올 때까지 제 귓속을 후벼 파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점잖지 않은 욕설을 뱉어댔다. 대중 음악의 세례 속에서 자라난 젊은 미군들이 특히 힘들어하여 ‘박자, 저 염병할 박자 좀 어떻게 해줘’하고 비명 지르다 까무러치곤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흥겨운 로큰롤 리듬에 길들여 있던 그들에게 징지쿵삐리딱징땡땡 하는 엇박자 굉음은 그저 고문이었다. 이 음파 고문에 남측은 집단 공황을 일으켰다. 숫자만 많았다 뿐이지 개별 전투력은 허접했던 중공군이 고작 악기 연주-여보게 그게 과연 연주인가-로 무섭게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당장 뾰족한 수가 필요했다.


(100)

하지만 그게 바로 전쟁이었다. 총알이 떨어져 아무 작대기나 들고 싸우다 수류탄이라도 하나 생기면 세상을 다 얻은 양 우쭐해져서 상대편 모인 곳으로 던졌다. 그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부근에 있던 수많은 군인이 방사형으로 날아갔다.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고 꿈이 있는 이들이었다. 거기서 무시했다면 고향에 돌아가 연인을 만들고 가족을 만들고 음탕한 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한 성씨의 시조도 될 수 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수십 명이 싸구려 화약을 채운 수류탄 하나로 신의 공에 맞은 볼링 핀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하여 얻은 건 고작 한두 뼘의 땅인데, 사실 군인 대부분이 저 멀리 북쪽이나 저 아래 남쪽 출신이어서 철원의 험준한 땅덩어리 한두 뼘을 맹렬히 탐낼 이유가 없었다. 따져보면 이유는 딱 하나, 남북 수령 간의 사이가 안 좋아 졸개끼리 머리통 터지게 싸우는 것이었다.


(178-179)

들어라, 미개한 국민이 자유만 원한다면 한탄하던 해방 직후의 남한 지도층은 북한이 쳐들어오니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난리를 쳤다. 그들은 북한을 혐오하려 자유를 내세웠음에도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북한을 혐오하는 척했다. 이윽고 북한이 패퇴하자 지도층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슨 복지원이니 무슨 학원이니 고상한 이름들을 단 강제수용소를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 국민의 자유를 회수했다. 백골단이나 땃벌레나 각목부대 등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관변 정치 깡패들도 기승을 부렸다. 준공무원을 자처하는 이들 정치 깡패는 사람의 어디를 때리면 가장 아픈지, 가장 상처가 크게 나는지, 가장 오랫동안 낫지 않는지 외과 의사만큼 잘 아는 자들이었다. 다만 지도층도 정치 깡패도 박복대의 자유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박복대가 입은 미국 군복 때문이었다. 군인도 아니고 군무원도 아닌 관계로 박복대의 군복에는 계급장이 없었다. 다만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8)

인쇄란 정교하고 전문적이긴 하나 숙달된 노동자한테는 다소 지루한 작업이다. 뉴스를 물어 와 기사 쓰는 신문사와 달리 의뢰인이 써 온 글을 사용하는 것이어서 약간의 교정 교열과 판형 및 용지 선택, 조판 등 뻔한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복대는 그 무한 반복이 좋았다. 박복대는 전쟁이 터지기 전만 해도 자신이 농사를 무한히 반복하며 늙을 줄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인쇄라는 무한 반복은 몸이 더 편하고, 더 배울 게 많고, 보수도 아무튼 농사보다야 많고, 자연재해라는 예상치 못한 골탕을 먹을 일도 적고, 글씨를 연습하거나 인쇄물을 읽는 등 자유롭게 사용할 시간도 많았다. 세상에 이런 작업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천생 농부인 아버지도 당장 갈아탔을 것이다. 말은 거의 없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씩 웃어주는 황 씨, 변 씨랑 지내는 것도 좋았다. 작업 전 청소, 교정 교열, 식자, 인쇄, 작업 후 청소와 뒷정리로 이어지는 매일의 일과가 퍽 행복했다. 시간이 잘 갔다. 무엇보다도 저녁밥이 너무나 맛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갈 때마다 이번에는 대체 어떤 반찬과 어떤 국이 나올까 궁금해 애가 탈 지경이었다. 한국에 있는 진미라는 진미는 모두 먹는 것 같았다. 자연히 살이 뒤룩뒤룩 쪘다. 한 해가 안 되어 80킬로그램을 훌쩍 넘겼다. 스무 살 넘은 나이에 키도 더 자라 177센티미터나 되었다. 당시 한국 남자의 평균 체격보다 많이 컸다.


(238)

들어라, 박정희 시대가 저물고 이제 세상이 좋아지나 했더니만 웬걸, 불과 두 달도 못 돼 또 다른 군인 자식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허리 좀 펴보려 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했다. 한복 입은 모진 할아버지를 만나 죽도록 맞고, 그놈이 가자 이때다 하고 튀어나온 군복 입은 땅꼬마한테 또 죽도록 맞았는데, 그놈도 간 후 고개를 들어보니 저 앞에 군복 입은 대머리가 해머를 질질 끌며 오는 중이었다. 그게 바로 전두환의 등장을 대하는 시민들의 심정이었다. 이놈의 군인들은 적과 싸울 땐 부리나케 도망치던 주제에 제 나라 국민 두들겨 패는 일에는 미슐랭 레스토랑 앞에서처럼 줄을 서 있는 모양이었다.


(349)

박복대는 오랫동안 모른 채 살아왔다. 상한 고통만큼 잃은 고통도 큼을 모르고, 크게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모르고, 우리 삶이란 아찔한 상실의 연속임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나 피비린내 진동하는 화암동 계곡에 홀로 서세 된 박복대는 제 인식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조연화에게 매달렸다. 조연화는 박복대와 정반대였다. 그녀는 손쓸 수 없이 다쳐버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돌보았다. 자기 삶을 쪼개가며 간호했다. 그런 이유로 초자연적인 치유의 비밀을 알기도 전부터, 알고 나서는 더더욱, 그녀에게 박복대는 저 참담한 헌신에서 눈을 떼 잠깐이나마 쉬게 해주는 존재였다. 박복대에게 조연화가 마땅히 달려가야 할 목표였다면, 조연화에게 박복대는 숨 돌릴 수 있는 휴식이었던 셈이다. 둘이 서로에게 자신을 가져다 묶은 이유는 그처럼 달랐다. 박복대는 자신을 완전케 해주는 사람을 찾아서, 조연화는 자신을 쓸모없게 해주는 사람을 찾아서.


(408)

부랑자의 재활을 위해 형제복지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의 운영을 위해 부랑자가 필요했다. 부랑자가 ‘나 부랑자야’하고 말할 리야 없겠으나 들어보면 어처구니없이 잡혀 온 원생이 너무 많았다. 집 주소를 쓰고 보호자 이름을 대고 전화번호까지 또박또박 읊어봤자 소용없었다. 용구산 공원에서 꽃을 꺾다가 잡혀 온 꼬마가 있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구경하다가 잡혀 온 소녀가 있었다. 늦게까지 회사 업무를 보고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터벅터벅 걷다 잡혀 온 남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잡혀 온 사태를 전혀 이해 못했고, 작은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했다느니 매형이 큰 사업을 한다느니 큰 소리로 바락바락 대들다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어디 두고 보자며 대놓고 이를 갈았는데 이 협박에 위협을 느낀 조장들한테 두들겨 맞아 자대 배치도 받기 전에 깨꾸닥했다. 그의 협박은 거짓말이 아니어서, 정말로 일주일 뒤에 전직 국회의원인 작은아버지와 크게 사업하는 매형이 찾아와 무덤을 파고 시신을 인수해 갔다.


(597)

아는 얼굴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많은 추억을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몰라 막막한 심정이었다. 맥이 풀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한 신부님마저 떠나자 이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게 걱정되어 우리 다정한 신께서 박복대가 잘 아는 얼굴, 툭하면 꿈에 나오던 얼굴,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하나를 노숙자 차림으로 창신시장 국밥집에 데려다 앉혀놓았다.


(615)

하지만 박복대는 한국전쟁은 경험했다. 북한군에게도 맞아봤고 중공군과 유엔군에게도 맞아봤고 남한군에게도 맞아봤고 깡패에게도 맞아봤고 서북청년단에게도 맞아봤고 경찰에게도 맞아봤다. 시민한테도 맞아봤고 어린애한테도 맞아봤고 자랑은 아니지만 동생과 애인한테도 맞아봤고 병 고치는 의사한테도 맞아봤고 부자한테도 맞아봤고 거지한테도 맞아봤고 외국인한테도 맞아봤고 자동차한테도 맞아봤고 젠장 곰한테도 맞아봤다. 춘천에서 맞아봤고 홍천에서 맞아봤고 서울에서 맞아봤고 이북에서 맞아봤고 철원에서 맞아봤고 대구에서 맞아봤고 광주에서 맞아봤고 삼청교육대에서 맞아봤고 형제복지원에서 맞아봤고 무슨 연구소에서 맞아봤고 깊은 산속에서 맞아봤고 자기가 사장으로 군림하는 식당에서 맞아봤다. 분명하게 맞아봤고 모호하게 맞아봤고 적당히 맞아봤고 무분별하게 맞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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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간의 삶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게 채우는 것들은 유대적인 관계, 온갖 느낌과 감정, 삶의 경험과 기억들이다. 하지만 삶이 끝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형태도 없이 사라지며 잊히고 만다.

금이 간 세상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내 차례가 돌아왔다. 언젠가는 맞부딪쳐야 할 일. 마치 누군가 갑자기 내 뺨이나 콧잔등에 주먹질을 하는 것만 같다.


(53)

책장 앞에 서서 지난 수년 동안 우리가 사 모았던 책을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다. 수십 년간 일정한 간격으로 차곡차곡 사 모은 책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나무의 나이테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99)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운명이란 것은 삶이 자연스럽게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목적을 이행하도록 결정지어진 것이 아닐까? 비록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내 신체 중에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근육들은 시들어 버릴 것이다.

내 손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늦었다는 생각에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118)

우리가 우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 또한 초신성 폭발로 인해 생성된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우주의 티끌, 우주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우주의 티끌이라 칭하기보다 우주의 불꽃 또는 섬광이라 부르면 어떨까? 우리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124)

나는 이 세상 전부를 빌려 살아왔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할부는 생각할 수도 없다. 단번에 모든 것을 갚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도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 채무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내겐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들과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손녀딸 사라가 있다. 친구와 동료들도 있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삶이 내게 건네주었던 선물이자 빚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지나온 삶에 감사하며 빛을 갚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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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런데 1318년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교황이 마녀사냥을 허가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317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 요한 22세를 향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놀랍게도 교회의 고위 사제인 주교였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교황을 살해하려 한 방법이 칼이나 무기가 아닌 주술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경악했고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분노한 교황이 마녀를 이단자로 단정할 논리적 근거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단자와 마녀를 혼동하며 마녀사냥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남부에서는 1320년부터 1350년 사이에 600여 명이 마녀로 기소되었고, 그중 400여 명이 화형에 처했습니다.


(47)

그렇다면 우리는 마녀사냥을 어떻게 경계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게을러지는 순간, 깨어 있지 않은 순간, 그래서 ‘쉬운 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마녀사냥을 일어납니다. 불행이 찾아왔을 때 문제를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고 쉽게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손쉬운 희생양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 희생양은 제거해야 할 악, 즉 현대판 마녀가 되는 것이죠. 게다가 오늘날의 사회는 수백 년 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진실 파악은 그만큼 어려워졌습니다. 마녀사냥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에 당면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백 년 전에 일어난 마녀사냥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 속에서 폭력을 일삼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깨어 있기 위함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녀사냥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118)

다이아몬드 광산 근처에 살고 있는 한 아이는 외지인에게 다이아몬드 광석을 가리키며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외지인이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자 아이는 “이 돌 안에 피가 들어 있어요. 갖고 있으면 불행을 가져와요. 우리 부족에서는 피를 부르는 돌이에요”라고 대답했죠.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에서는 그저 돌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것입니다. 이처럼 권력자들의 다이아몬드 쟁탈전에 힘없는 국민만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124)

프리타운에 끔찍한 테러가 벌어진 후 UN은 다시 한번 시에라리온 내전에 관여했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시에라리온의 평화에 도움이 됐을까요? 놀랍게도 UN은 평화유지군을 지원하겠다는 조건으로 또다시 카바 정부에게 반군과 협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강압에 못 이긴 카바 대통령은 결국 1999년 7월에 아프리카 토고의 로메에서 포데이 산코와 한 번 더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로메 협정의 주요 내용은 ‘모든 적대 행위를 끝내고 반군을 무장 해제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포데이 산코의 처우와 관련된 조항도 있는데, 놀랍게도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잔인한 학살을 일으킨 반군의 수장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모두 사면하는 것도 모자라 부통령으로 임명하라는 조항은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UN은 시에라리온의 분쟁에 깊이 관여하기보다 하루빨리 해결되길 바라며 미온적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152-153)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끝났습니다. 과연 그 많던 나치 전범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대다수의 나치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반성은커녕 숨거나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남미 국가로 도망쳤는데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탈출시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고 합니다. 독일 검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전범들이 남미로 도망쳤다는 1금 비밀문서를 확인했는데, 무려 9,000여 명이었습니다. 이 중 약 5,000명이 아르헨티나로, 1,500명~2,000명이 브라질로, 500명~1,000명이 칠레로 갔고 나머지는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로도 탈출했습니다. 당시 남미 국가들은 대체로 군사독재 정권이었기에 나치 전범들이 정착할 수 있었죠. 특히 백인 우월주의가 강했던 아르헨티나는 유럽 백인들의 이민을 장려한 만큼 나치 전범들을 선뜻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195-196)

사실 폴 포트가 사람들을 죽이는 데 명확한 기준과 이유는 없었습니다. 불만 많은 사람, 게으른 사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부터 인정 많은 사람, 용감한 사람, 똑똑한 사람, 개인주의자, 평판이 좋은 사람, 재주가 많은 사람, 돕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죽였죠. 그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할 것 같거나 방해될 것 같은 사람은 모조리 죽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폴 포트는 색출한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이들의 삼대까지 씨를 말려야 한다며 온 가족을 살해했습니다. 젖먹이들까지 가차 없이 죽였죠.


(225-226)

1918년 후반이 되지 프랑스와 미국에서 스페인 독감의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지역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페인 독감도 폭발적인 확산세가 조금은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스페인 독감도 끝난 것은 아니었죠. 해외에서 파견했던 군인들이 귀국하면서 호주에서 유럽으로 스페인 독감이 다시 퍼졌고, 미국 도시들에서도 산발적으로 독감이 퍼지다가 멕시코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숨진 사람이 약 1,500만 명인 데 반해 스페인 독감으로 숨진 사람은 5,0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입니다. 제28대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화가 구스타프 글림프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습니다. <절규>로 유명한 화가 뭉크도 스페인 독감에 걸렸는데 감염 전 자화상과 감염 후 자화상을 비교해 보면 그의 몰골이 심하게 망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77)

과거에는 단순한 전통 의상이었던 히잡은 종교와 세속, 근대와 전통, 강요와 자유를 가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히잡을 두고 여성을 향한 억압이라고 하거나, 종교적 문화일 뿐이라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히잡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가 아닙니다. 강압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히잡을 쓰거나 벗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히잡 혁명이 현재 진행형인 만큼 이제 용기를 내어 변화를 이루고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란 국민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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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번에 나 가고 나면 아들 혼자 잘 곳 찾으러 전국의 장애인 거주시설을 찾아 헤매고 있잖아. 그러다 만만 그곳의 전문보호사라는 사람, 난색을 표하며 하는 말이 가관이야. 딱한 사정이라 조언 주는 건데, 자폐장애라는 말은 숨기고 상담하래. 정 부득이하면 발달에 다소 장애가 있다고만 하래. 지적장애 뒤에 숨으라는 거지. 행동매뉴얼? 천만에. 현실은 금지매뉴얼인 거지. 사람들이 이 지경이야. 유일 보호자인 자신이 떠나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왜 마지막 선택이 동반자살로 몰리는지 짐작이나 되니? 요즘은 언론에서는 그런 기사 싣지도 않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세상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우리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73)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그닥 즐겁지도 않은 소식 전하는 꼴인지라 뭔가 송구하기도 하고, ‘나 몇 달 안 남았대’ 이런 얘기를 생글생글 해맑은 표정으로 하면 ‘이놈 진짜 갈 때가 됐구나. 정신적 문제인가?’ 할 것 같고. 무엇보다 한 사람 두 사람 만날 때마다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거든.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그 구차함. 딱 싫더라고. ‘말기암’ 이런 단어는 꺼내기조차 싫고, 듣는 사람은 또 뭔 죄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한테 그런 이야기나 듣고 있는 게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러니 그런 대화는 미리 글로 대신하고 우린 즐거웠던 인연의 기억이나 회고하면 좋겠다 싶었어.


(85)

내가 집에 있는 걸 보더니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좋아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 없는 며칠 동안의 집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다 어디 산속에 데려다놓고는 이제 여기서 살라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 어디로 도망갔는지 자기 혼자 내버려둔 채 보이지도 않는 아빠를 얼마나 원망했겠어. 그 새벽에 그놈 좋아하는 스팸과 우리집 김치 잔뜩 넣어 부대찌개 만들고 라면도 끓여주니 단숨에 두 끼 이상을 먹더라. 그리곤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잠들었지.


(127-128)

사람 인생의 황금기라는 40대가 되며 전 일찌감치 독거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나홀로 자폐아들을 키우며,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그러자 세상은 이제 아예 저를 빼놓고 돌아가더군요. 보란듯이. 대한민국에서 살인을 저질러도 복역기간 20년이 넘는 사례가 거의 없다던데, 제 형벌이 20년을 훨쩍 넘어가는 걸 보고 전 생각을 바꿨죠. ‘이건 현생의 업이 아니다. 전생에 정말 엄청난 죄를 지은 거다. 남들은 전생 최고의 중죄가 나라를 팔아먹는 거라는데, 난 최소한 삼국을 팔아먹은 게 분명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망한 건 모두 내가 한 짓이다.’ 그랬다가 엄니마저 치매와 뇌경색을 앓게 되시고, 한 지붕 세 가족 중 이제 둘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됐을 때 또 생각을 바꿨죠. ‘삼국이 아니다. 난 지구를 팔아먹은 게 확실하다.’


(212)

‘대한민국헌법’을 시작으로 ‘장애인인권헌장’ ‘서울시장애인인권증진에관한조례’를 거쳐 ‘장애인복지법’까지 샅샅이 훑었어요. 장애인 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바이블이자 실무지침서라는 600쪽짜리 <장애인복지시설 사업안내>도 꼼꼼히 읽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 길이 있었습니다. 비록 글이지만 말입니다. ‘글이 현실이 될 수 있으려나? 법과 지침이 현실이 되는 나라던가?’ 싶었지만 해야죠. 허구와 가상현실인 영화 속 시나리오는 아니니까요.


(230)

하지만 저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은, 청산의 맑은 블루가 아니었어요. 청산은 보이지도 않는 곳의 밤이었죠. 아들 없는 집에 남은 건 지독한 정적이었고, 27년간 짊어졌던 숙제를 내려놓자 찾아온 공허함이었죠. 아들이 정착한 청산은 비바람 없는 평화의 숲이고, 행복이 넘치는 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제 청산을 찾아야 합니다. 아들을 위해 비워둔 내 삶의 자리가, 이토록 짙은 어둠의 심연인 줄 몰랐으니까요. 아들을 보내고서야 실감한 짙푸른 상실, 새벽녘 찬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시리게 서늘한 짙은 쪽빛의 신새벽 하늘이 열렸습니다. 블루의 또다른 얼굴, 미드나잇 블루.


(306)

“그 원초적 기본인권을 위해 다른 인권이 어느 정도 침범받을 수 있느냐를, 최소한 직계 피붙이인 부모가 판단할 수 있게 해줘야 정상 아닙니까?” 늘 들어온 말이라는 듯, 별로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하네요.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못 합니다.” 딱 거기까지. 그리고 요지부동. 생존권 사수 투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게 안 되면 당장 체험 입소를 아예 못 하잖아요. “피 몇 cc만 뽑으면 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결국 10명이 오면 3명 정도는, 무려 국립재활원의 무려 장애인 전담 건강검진센터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네요. 그게 현실이랍니다. ‘장애인 전문 치과병원’에 이어, 이번엔 깊은 산속 ‘장애인 전담 건강검진센터’에서 또 쓸쓸히 퇴장해야 했죠. ‘전문’ ‘전담’ 이 단어는 국가고시를 거쳐 사용면허를 받은 사람들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보건복지부답지 않게 참 ‘박복한’ 병원을 만들었더군요.


(345-346)

이제 꿈을 포기하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할 순서입니다. 그러기 싫어서, 그러면 원망 다음 순서는 끔찍하고 모진 그 결정을 이번엔 정말 실행해야 하기에 또 생각해보려 합니다. ‘아직 아닐 수도?’ 아, 돈 없어서 요즘은 항암주사도 못 맞고 있었지.’ 잊을 뻔했네요. 제 교수도 ‘이제는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뭐가 남았을까?’하고 있다는 걸. 그 의사도 아들 살 곳 찾을 때까지만 살려달라는 제 말이 “그러세요” 한 책임감에 힘겨워하고 있단 걸. 이미 그가 말해준 의학적 통계적 평균 여명을 넘긴 아빠입니다. 아들 살길 찾아야 하는 제 삶의 마지막 소명, 그 간절한 소망이 저를 붙들었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제게 허락된 시간이 없습니다. 남겨진 방법이 안 보여서요.


(357)

글이 점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미 느끼고 계셨다고요?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하소연하기도 비굴해지기도 싫습니다. 제가 말 바꾸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원망할 겁니다. 어쩌면 욕을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향해서 크게 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 립니다. 네, 지금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올 겨울 이상하게 덜 춥다 싶더니 더럽게 춥네요. 속았습니다. 겨울이 끝난 줄 알았지 뭡니까? 아들이 시설에서 외롭게 버티던 날들. 그사이 년도가 바뀌어 황송하게도 아빠의 나이가 +1 되더니, 마지막 병원 입원중 시설로부터 지금까지와 다른 이상한 소식을 처음 듣고 퇴원하던 2026년 1월 8일, 갑자기 지독하게 추워졌죠. ‘왜 이리 춥지?’ 하며 옷도 벗지 못하고 무려 만 하루를 잠만 잤으니까요. 덜덜 떨면서, 염병을 떱니다. 그 무렵보다 지금이 더 춥구먼요. 계속 그러든가. 빌어먹을. 춥거나 말거나, 저는 지금 막 ‘쉼표’를 찍었습니다.


(400-401)

하지만 그럴 일이 없었어요. 바로 다음날 아침, 기숙사라면 사감쯤 돼 보이는 선생님이 일찌감치 전화를 걸어와 그러시더군요. “아시다시피 아드님의 ‘도전행동’이 우려돼서 함께하기는 힘들겠네요.” 그놈의 ‘도전행동’. 이 단어 말이죠. 자폐 치료교육 현장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복지 지원 분야에서는 늘 단골멘트죠. 주로 시설 관계자나 운영자들이 애용하는. ‘도전행동 때문에 단체생활 어려움’, 그러니 ‘입소 불가’, 혹은 ‘퇴소 처분’ 누구를 위한 단어랍니까? 누구를 배려하는 거죠? 누구의 시선이죠?


(403)

이 나라는 우리에게 늘 ‘밖으로 물러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우리는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배제의 위협에 너무 길들여져 왔습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지하철의 경고방송에서도, 거주시절의 거절규정에서도, 열차도 시설의 안전이란 건 존재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시설을 향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을 뿐, 시설의 안녕을 위협하려고 도전한 적 없습니다. 그곳은 권력이 아닙니다. 강압적 경고를 할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시설에 위험이 있다면 걷어내시고, 안전이 위협된다면 먼저 고치세요. 우리는 잘 준비된 시설의 ‘안전성 안으로’ 초대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제가 아니라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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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9)

이장은 예초기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가을이 와도 밤을 다 주울 때까지는 풀과의 전쟁이다. 가장 쓸모 없는 것들이 생명력은 오지게도 질겨 고춧대가 찬바람에 시들 때도 저 홀로 무성했다. 그가 풀을 베다 진저리칠 때면 너무 글지 마라, 죽이는 니가 흔들겄냐, 죽는 쩌것들이 힘들겄냐, 양촌댁은 아들 편이 아니라 잡초 편을 들었다. 어머니 말이 옳기야 했다. 잡초도 가만 놔두면 고추나 가지처럼 적당히 크다 멈출 테지. 제대로 크지도 않았는데 싹둑 잘라내니 어떻게든 살려고 기를 쓰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게 잡초의 운명이고 자나 깨나 잡초를 베어야 하는 건 농부인 그의 운명이다.


(78)

긴 한숨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어릴 때는 다슬기 잡고 취나물 뜯느라 애달프고 나이 들어서는 막걸리 사다 나르느라 고달픈 인생이었다. 하기야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지 애달프고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으랴. 고생이라곤 깃털만큼도 안 해본 줄 알았던 찌니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아니지, 찌니들이 고달픈 게 맞나? 스스로 선택한 것 아닌가? 아닌가? 타고나길 그런가? 그럼 애달픈 게 맞나? 이장의 머릿속이 오뉴월 논바닥의 개구리라도 가득 들어찬 양 시끄러웠다. 이럴 때는 윤 선생의 예언도 쓸모가 있다. 이장은 가뿐하게 고민을 멈췄다. 워치케든 되겄제. 이것이 사람 구실하기는 어려운 대가리의 결론이었다.


(163)

이리 멀쩡하게 이삐고 잘난 것들이 워쩌자고 이상헌디로 빠져가꼬 지 무덤을 지가 판다는디 내 속은 워쨌겄냐? 시방도 속이 쌔롬쌔롬허다. 넘이 안 간 질로 가본들 고생만 씨게 해야. 살아봉게 넘들 다 가는 질로 조심조심 감시로 넘들맹키로 사는 거이 젤이드라.


(169-170)

수평마을에서는 한발짝만 내디디면 햇빛이고 바람이고 비였다. 유리창이 덜컹거리고 벽의 어느 틈으론가 바람이 새들면 창밖 풍경을 보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걸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창문도 비에 젖고 벽도 눅눅해져 비를 맞고 있지 않은데도 빗속에 있는 듯했다. 집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자연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잘 지어져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아파트에서와는 전혀 달랐다. 하기야 처음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밤이 깊을수록 처연해지는 봄밤의 소쩍새 소리, 귀가 따갑도록 쉴 틈 없이 울어대는 오뉴월 개구리 소리, 머릿속을 두드리는 한여름 낮의 매미 소리, 가을밤 더욱 소슬해지는 고음의 귀뚜라미 소리,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듯한 깊은 밤 고라니의 험악한 울음소리가 어떤 벽도 없는 듯 여과 없이 귀에 닿았고, 하여 이 시공간을 무수한 동물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시시각각 인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늦가을부터는 밤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지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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