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너는 왜 구레나룻을 기르고, 통바지를 입고, 그렇게 요란한 신발을 신는 거야?”

글쎄, 멋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일종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그래, 멋으로 저항을 하는 거지. 이 재미없고 감옥 같은 학교를 향해서.”

 

(186)

이곳처럼 야생적이지 않았어. 이미 학생들도 학교를 초월한 어른들의 가치가 물들어 있었거든.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할까. 부모님이 어떤 직업이고 알만큼의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과 부를 소유했는지가 중요했어. 보다 중요한 건 권력을 세습하고 부를 상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무언가를 성취한 거나 다름없었거든. 또 어느 정도의 성적을 갖고 있으며 어떤 학교를 갈 수 있는지도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러한 잣대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애들끼리 몰려다니며 어른들과 유사한 권력 놀이를 했어. 오히려 물리적인 힘에서 오는 권력은 야만스러운 것에 불과했지.

 

(245)

그를 따라 절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 둘 숫자를 세어 나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대며 절을 하니 마음 한편이 경건해지는 것만 같았다. 백 번을 하니 이마와 콧등에 땀이 맺히고 몸이 후끈후끈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그와 속도도 달라졌다. 이백 번, 삼백 번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반복하니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상민이와의 우정, 지민이와의 사랑, 곁에 있는 민재 그리고 나에 대해서 말이다. 복잡했다.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내가 두 명이 된 것 같았다. 절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나와, 생각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나로 말이다. 오백 번, 육백 번어떤 정의도, 결론도 내리지 않기도 했다. 그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몸은 지쳐갔다. 그럼에도 끝까지 해보고 싶다는 묘한 오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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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동춘) 그런데 왜 이들이 쿠데타라는 것까지 감행하게 되었을까요? 20세기 군사독재의 기억과 21세기 신자유주의 현실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윤석열, 김용현 이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장,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군부와 사법기관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시대인이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망상 속에 있으니까 쿠데타라는 터무니없는 일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죠. 한편 그 배경은 매우 현재적입니다. 제가 이번에 친위쿠데타 사례들-1900년대부터 페루, 튀니지, 터키 그리고 쿠데타는 아니지만 브라질과 미국에서 일어난 난동 사태를 죽 살펴봤는데, 모두 신자유주의시대에 우익들이 통치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진영 몰락 이후 우파세력은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경쟁 상대 없이 통치를 해왔는데, 양극화라든지 혐오라든지 계속 터져 나오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행정권과 의회권력의 충돌을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쿠데타 같은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26-27)

(김동춘) 오늘의 세계체제라고 하는 건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타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민주주의로 적절하게 제어해온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1 1표제로는 체제가 붕괴하게 생겼으니까 자본가들이 일정 정도 양보를 한 것이지요. 가장 진보적인 형태가 사민주의 복지국가라면 군사독재는 가장 퇴영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1992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민주주의와 타협할 필요가 없어지자 자본주의의 고삐가 풀려버린 거예요. 그렇게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폭주가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복지국가였던 영국과 미국이고, 그 정도로는 안 망가져도 세계화 여파로 이주노동자들이 밀려들자 유럽에서도 극우세력이 등장합니다. 사민당, 노동당도 몰락하거나 우경화됐죠. 이렇게 최근 한 20년 사이에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징후들이 나타났는데 좀 극단적 형태가 미국, 영국, 브라질이라고 볼 수 있어요.

 

(43)

윤석열과 그 일당이 주장하는 통치행위라는 예외적 권력은, 왕에게 법을 지키지 않아도 특권을 주었던 중세에나 있을 법한 일로서 독재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윤석열이 입에 달고 다니던 자유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왕이나 권력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법치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비상계엄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동한 것인지를 헌법과 법률에 규정해 놓았다.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길이다. 윤석열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자였다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이 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전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며 압제를 저지를 수 있는 이상성격자에 불과하다.

 

(55)

첫째, 9명 임명직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된 헌재가 국민이 선출한 300인 국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둘째, 헌재 결정의 타당성 여부를 가릴 견제 기관이 존재하는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가 아니므로) 과두체제이며, (견제받지 않으므로) 독재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두적인 독재기관은 때때로 민의를 배반하고 독재지향적인 권력, 특권층의 이해에 영합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64)

시민의회는 일반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소규모 대표들이 공공정책에 대해 심도 있는 숙의를 거쳐 결정을 내리는 민주적 기구이다. 시민의회는 통계적으로 전체 시민을 대표할 수 있도록 추첨으로 구성되면, 운용은 숙의를 핵심으로 한다. 숙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이성적 토론을 통해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흔히 다수가 참여하는 방식은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의 충돌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나, 시민의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참여하더라도 숙의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다.

 

(71)

한국사회가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시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모델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시민의회와 양원제를 결합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의회와 양원제의 도입은 일회성 개헌을 위해서도 유용하지만, 지속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읍면동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기초지자체 민회, 광역지자체 민회를 거쳐 국가 민회를 구성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이는 국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고,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완화하는 유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정치권이 아닌 국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99-100)

취재 후 1 6개월가량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치는 더욱 오염됐다. 그 결과 우리 앞에 남은 것은 폐허다. 가장 정치적이어야 할 대통령은 철저하게 정치를 버렸다. 가장 헌법을 할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다. 이 위험하고 불성실하며 비민주적인 대통령은 분명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이후는 얼마나 다를까. 국민의힘은 내란우두머리 피의자 대통령과 절연하긴커녕 부정선거 음모론과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마저 에둘러 감싸고 있다. 방탄 논란과 강경 일변의 전략에 갇힌 민주당은 갈등과 대립을 끊어내고 미래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정당의 적대적 공생만 견고해지는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만 말하는 것은 정확한 처방이 될 수 없다. 오랜 실패에서 확인됐듯 개헌은 신속한 방법도 아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이 맡겨져 있는, 선거 직전에 반짝 다루다 거대 양당의 최대 이익만 반영하고 마는, “정말 중요한선거제도를 논의해야 할 때다.

 

(119)

나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좋은 삶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라고 믿는다. 자연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존중이 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나의 믿음이 법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 그리고 집단 책임성에 대한 개인 권리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생태적 상호의존성을 인정해 인간 삶의 자연적 조건을 내재화하고, 이를 헌법과 인권법, 재산권, 기업의 권리 및 국가 주권을 포함하여 모든 법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오슬로선언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함께 생각하고, 이를 이뤄나가기 위한 개인적인, 또 집단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좋은 삶을 위해.

 

(155)

자연에는 나쁜 디자인이 없습니다. 나쁜 디자인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자연의 어떤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그 기능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이 결합돼 있을 것을 알 수 있어요. 자연의 또다른 속성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바로 이게 예술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학교에서 저는 예술은 완벽한 형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예술작품은 단 하나의 요소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미켈란젤로나 르 코르뷔지에 등으로 이어져 오는 고전예술 전통입니다. 그런데 제가 했던 작업은 그것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어요. 우선 살아있는 세계를 작품 속에 들어오게 허용하면, 완벽함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자연은 쉴 새 없이 변하기 때문이죠.

 

(226)

기후는 지구생명체의 거대한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지구 못 생명체의 수많은 작은 날숨과 들숨이 어우러져 기후라는 거대한 순환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라투르는 지구 바깥에서의 시선을 멈추고 지구 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선을 위해 임계지대(critical zone)’에 주목한 바 있다. 그곳은 지구에서 날씨가 바뀌고, 강과 산과 평지가 있고, 바다가 있는 영역이며, 중생들이 거기에 깃들어 생명을 이어가는 곳이다. 칠게, 생합, 흑꼬리도요는 이 임계지대 안의 갯벌에 깃들어 살고 있고, 인간은 이 임계지대 안의 건실한 땅을 부쳐 먹고산다. 존재들의 이 상호 의존을 캐런 버나드 같은 양자역학자는 내부작용(intra-action)’이라고 표현하며, 동아시아에서는 천인상을(天人相應)’이라는 말로 표현해왔다. 환경이라는 용어에는 주인공과 배경이 따로 있지만 천응상응이라는 말에는 주인공과 배경이 따로 없다. 천지는 서로 감응하며 살고 죽는 존재들로 꽉 차 있다. 주역의 언어로 말하자면, “만물은 생생(生生)한다.”

 

(237)

모태 신앙이 기독교이고 평생 예수가 긴 머리카락의 백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예수가 백인일 확률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을 갖추자 진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는 백인인가? 백인들이 그려놓은 모든 그림에서 아담과 이브는 명백한 백인이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홀딱 벗고 살았다. 선약과를 따 먹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을 느껴 중요 부위를 겨우 가렸다. 이건 애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이다. 그렇다면 지구에서 사시사철 홀딱 벗고 살 수 있는 지역이 어디인가? 열대지역뿐이다. 그리고 열대지역에서 태어난 인종의 피부는 결코 휠 수 없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짓밟을 때 그들은 에티오피아 지역을 에덴동산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는 명백하게 백인이 아니다. 창조론을 믿느냐, 진화론을 믿느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을 100% 따르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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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4-03 0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에 나쁜 디자인이 없다”는 아예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나쁜 디자인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다 다른 숨결이 다 다른 몸을 입고서 다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더 낫거나 좋은 모습(디자인)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결이 아니라, 그저 다른 숨빛으로 살기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숲을 제대로 본다면, 나무 한 그루에 달린 잎이 모두 다르게 생겼고, 강아지풀조차 잎이 모두 다르고, 토끼풀도 다 다른 크기와 모습인 줄 알 테지요. 다 다르기에 어울리며 살아가는 숲(자연)일 뿐, 나쁘거나 좋은 모습(디자인)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러한 결을 읽고서 마음에 새길 적에 비로소 사람 사이에서도 누구나 다르게 마련인 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 여기는 대목 가운데 하나로, ‘흰사람(백인)’이기에 살갗이 희지는 않는데, 너무 모릅니다. 흰사람도 들숲에서 일하며 뛰놀 적에는 아이어른 모두 ‘구릿빛’이게 마련입니다.
 
















(64)

유모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다. 엘파바는 악마의 씨일까? 반은 인간이고 반은 요정일까? 설교자로서 아빠가 제 구실을 못한 벌일까, 아니면 몸가짐이 헤프고 기억력이 나쁜 엄마에게 내려진 벌일까? 아니면 그저 모양이 괴상한 사과나 다리 다섯 개 달린 송아지처럼 단순한 기형에 불과할까? 유모는 악마와 신앙, 민간 전승 따위의 영향으로 자기가 세상을 보는 눈이 흐릿하고 혼란스러운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멜레나와 프렉스 부부가 분명 아이가 아들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프렉스는 일곱 번째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일곱 번째 아들이었으며, 심지어 그는 집안의 7대 목사였다. 어찌 다른 성의 아이가 감히 이토록 상서로운 순서를 따를 수 있겠는가?

유모는 어쩌면 이 초록색 아기 엘파바가 부모를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자기만의 성과 색깔을 고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52)

, 과학은 자연을 해부하여 보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부분으로 축소하지요. 마술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마술을 조각조각 나누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부분을 잇지요. 분석보다는 통합니다. 기존의 것을 파헤치기보다는 새로이 조립하지요. 정말로 재능 있는 사람의 손에서는(이 대목에서 그레일링 교수는 머리핀에 찔려 비명을 질렀다.)…… 예술입니다. 사실 누구나 마술을 우월한, 아니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 할 거예요. 마술은 회화나 연극, 암송 같은 여러 예술과 다른 면에서 우월합니다. 마술은 세계를 꾸미거나 표현하지 않아요. 세계가 되는 거예요. 더없이 고귀한 소명이라 할 수 있죠.”


(348)

아니야. 나한테 영혼이 있다는 증거가 어딨어?”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너한테 양심이 있을 수 있겠니?”


(349)

어떤 것이 더 나쁠까, 피예로? 개성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것과, 고문과 감금과 굶주림을 통해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것 중에서? , 넌 네 주변의 도시 전체가 불차고 진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어 가고 있는데도 박물관의 귀중한 감상적인 초상화를 구할 걱정이나 할 거야? 잘 좀 따져 봐!”

하지만 무고한 방관자, 예를 들어 아무한테도 도움 안 되는 사교계 귀부인이라 할지라도 진짜 사람이야. 초상화가 아니라고. 네 비유는 논점을 회피하고 축소하는 거야. 범죄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거라고.”

사교계 귀부인은 살아 있는 초상화로서 자신을 과시하는 쪽을 택했어. 그러니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 응분의 대가야. 일전에 한 얘기로 되돌아가서,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너의 악이야. 넌 할 수만 있다면 상대가 사교계 귀부인이든, 이 모든 압제적인 체제에 기대어 번창하는 기업의 사장이든 상관 않고 구해 주겠지. 하지만 다른 이들, 더 진짜인 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그래서는 안 돼. 네가 그들을 구할 수 없다면 못 하는 거야.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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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아일리시, 다른 때였다면 불법 구금으로 고등법원에 고소했을 겁니다, 래리를 꺼내왔을 거예요. 하지만 국가비상법 때문에 인신보호영장(불법 구금 방지 목적으로 행하는 구속적부심사 제도)이 중지됐어요, 국가가 특별 권력으로 사실상 사법부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164-165)

날씨에 기억이 있다. 하늘에 무르익은 봄이, 날렵한 제비가, 온통 새까만 칼새가 있다, 돌아온 새를 보면서 세월이 흐르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열매를 당연하게 여겼던 순수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군가 내미는 열매를 받아서 맛을 보지도 않고 깨물어 먹었고, 아무 생각 없이 씨방을 버렸다. 아일리시는 피닉스 공원에서 혼자 걸어 다니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눈앞에 자기 생각밖에 보이지 않는다. 잎이 넓은 나무들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위를 올려다보며 저 나무들 밑에서 흘러간 시간을, 나무들이 나이테로 기록하는 세월을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가고 그녀는 붙들 수 없다, 세월이 계속 흘러가지만 떠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끌고 간다.

 

(168)

그녀는 집 안을 통과하는 달()을 지켜본다. 멍든 새벽빛이 요람 안의 벤에게 닿고, 제멋대로인 그 빛이 어린아이처럼 아일리시에게 딱 달라붙어 자는 몰리에게 닿는다. 새벽이 왔지만 낮은 달아났다. 그녀는 이제야 깨닫는다. 어둠을 덧없게 만드는 빛을 거짓이고 진실하며 흔들림 없는 것은 밤이다. 아이들을 품 안으로 불러들이지만 자신의 위로는 거짓이고 이 집은 피난처가 아님을 안다.

 

(210)

인생이라는 세월에 먼지가 쌓이고, 그 세월이 서서히 먼지로 변한다,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겠지, 한쪽 눈만 감아도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 래리가 곁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지만 마주치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다, 아일리시는 양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캐럴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다고,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고,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여움은 희망이라는 옷을 입은 슬픔이다.

 

(225-226)

뉴스가 나오자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라디오를 꺼버리고 생각한다, 이건 뉴스가 아니다, 뉴스가 전혀 아니다, 모래주머니에 나른하게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군인을 집 안에서 내다보는 민간인이 뉴스다, 모래주머니에 기대어놓은 소총이 뉴스다, 군인의 깔깔 웃는 입, 아스팔트에 아무렇게나 버린 패스트푸드 포장지와 종이컵이 뉴스다, 저 위쪽 거리에 살다가 떠나기로 결심한 은퇴자 부부가, 그들이 진입로에서 하는 말다툼이, 차에 실을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손을 펄럭거리는 아내가, 굳은 표정에서 아내를 보는 남편이, 아내가 아이처럼 끌어안은 검정 가방이, 그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 뉴스다. 자동차에 실린 모든 짐이, 남편이 올라앉아서 겨우 닫는 자동차 트렁크가, 마지막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진입로 대문이, 밤이 와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뉴스다. 일주일 동안 빨간불이었다가 결국 꺼져버리는 신호등,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할 자동차, 점점 쪼그라드는 거리의 분위기, 셔터를 내린 가게들, 합판을 댄 창문들, 쉰 목소리로 밤새 짖는 개들, 통화가 너무 위험해서 이제 전화하지 않는 장남,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뉴스다.

 

(235)

아빠는 늘 너와 함께 있어, 아일리시가 말한다. 떠나 있어도 마찬가지야, 그게 그 꿈의 의미야, 아빠는 항상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집에 온 거야. 왜냐면 아빠는 늘 네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아빠는 지금 여기서 팔로 너를 감싸고 있어, 아빠는 항상 여기 있을 거야. 왜냐면 어렸을 때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아빠는 너를 너무 많이 사랑했어. 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을 빼앗거나 지울 수는 없어, 나한테 설명을 묻지는 말고 그냥 진실이라고 믿어, 그게 진실이니까, 그게 인간 마음의 법칙이야.

 

(307)

아릴리시는 주먹을 쫙 쥐고 발끝으로 땅을 민다. 살아서 아이들을 보고 싶다. 총격이 멈추면서 머리 위에서 깊은 정적이 열리고 반란군 병사가 소리친다, 아일리시는 손을 흔들어서 살아 있다고 알리기가 두렵다, 그녀는 세상과 절대적으로 맞닿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가 갑자기 죽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아스팔트에 박힌 자갈을 본다, 수십억 년 전에 열기가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지구의 돌,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가야 한다, 내면의 힘이 몸속에서 퍼지고 눈을 감자 지나간 세월과 아직 살지 않은 시간이 보인다, 갑자기 무언가가 아일리시를 일으켜 움직이게 만든다, 그녀는 달리는 몸이 된다.

 

(354-355)

예언자들의 노래는 그 어느 때나 항상 반복되던 똑 같은 노래임을 깨닫는다, 칼의 도래, 불에 삼켜지는 세상, 정오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태양, 어둠에 잠긴 세상, 곧 눈에 보이지 않도록 쫓겨날 사악함에 대해서 예언자가 길길이 날뛸 때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분노,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종말이다, 세상은 어느 곳에서는 늘 끝나고 또 끝나지만 다른 곳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종말은 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상의 종말이 당신 나라에 찾아가고 당신 동네를 방문하고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머나먼 경고, 짤막한 뉴스, 전설이 되어버린 사건들의 메아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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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의 교사인 파블로 뮤리엘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들에게 이런 좋은 대학교들은 모두 필드스톤 같은 이질적인 환경이라고 설명한다. 필드스톤을 졸업한 학생들은 이런 대학교에 가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익숙한 커리큘럼에서 마음껏 공부를 하게 되지만 유니버시티 하이츠 졸업생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라켈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브롱크스 아이들의 꿈인 중산층 진입에 가장 유리한 고지에 들어간 것이다. 라켈에게도 대학교 졸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고등학교 동창들이 줄줄이 대학을 중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역시 대학을 졸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너는 자격이 있어, 너는 자격이 있어를 되뇌었다고 한다.

 

(62)

외로운 사람들도 일종의 궁핍을 겪는다. 이들이 겪는 궁핍은 인간관계의 부족, 즉 친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인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이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 그렇게 보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어색해지는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대인관계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친구를 사귀고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막는다. 이는 그 개인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궁핍한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환경이다.

 

(77)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도날드 트럼프는 이 사건을 두고 “(뉴욕주에) 사형제도를 재도입해야 한다며 이들을 사용하자는 전면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트럼프는 이미 그때부터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사고에 기반한 분노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인기를 쌓아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인종주의자들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돌아선 것이 아니다. 트럼프는 나중에 이들의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당시 게재한 광고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104-105)

칼슨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들이 주머니를 독점하면서 주머니는 남성의 실용성과 호기심의 상징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우선 남자가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에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포켓 사이즈(pocket-size)’ 버전이 생겨났다. 일하는 남자들이 언제든 도구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준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었다. 철학과 과학, 건축과 농업,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였던 제퍼슨은 주머니에 작은 가위와 줄자, , , 온도계, 나침반 등 다양한 (포켓 사이즈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해서 걸어 다니는 계산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제퍼슨이 휴대한 물건 중에는 상아로 만든 노트도 있었다. 제퍼슨은 쓰고지울 수 있는 상아 노트에 생각을 적고 나중에 집에 가서 종이에 옮겼다고 한다. 그에게 주머니는 움직이는 실험실, 작업실이었던 셈이고 이는 계몽된 남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17)

지금은 어떨까? 몇 년 전 한 대학교 캠퍼스 옆에서 아이폰 수리점을 운영하는 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깨진 화면을 수리하러 오는 사람 중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 많으냐는 게 내 궁금증이었다. 내 주변에서 화면이 깨진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답은 깨진 화면 수리를 원하는 고객은 90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 이유를 두고 온라인에서도 많은 추측이 있지만 여자 옷에 스마트폰이 들어갈 주머니가 남자 옷만큼 많지 않아 손에 들고 다니는 시간이 길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196-197)

미국인의 문제는 문화적 폐쇄성이었다. 미국인들은 남미와 남유럽 문화를 영미 문화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의 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맵거나 향이 강한 음식을 흥분제라고 생각했고 이런 음식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향이 강한 음식은 카페인이나 알코올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취급했고 그런 음식을 좋아하다 보면 결국 코카인과 헤로인 같은 중독성 마약에 빠져들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인들은 올리브를 기피했고 마늘과 식초가 반드시 들어가는 피클 같은 음식도 피했다. 물론 지금 미국인들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갖고 있어서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지위 상징이 되었다. 이런 태도가 과거 미국에도 퍼져서 남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같은 남유럽 문화에서 먹는 것처럼 다양한 식재료와 향신료가 사용되었더라면 대기근과 대공황을 견디기 훨씬 쉬웠을 거라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이들에게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배려가 아니라 삶과 경험을 풍성하게 해주는 고마운 요소다.

 

(209)

이렇게 조니 뎁의 인기가 시들어가던 시기가 앰버 허드와 결혼 생활을 하던 때라고 해서 허드를 악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허드가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었느냐와 상관없이 뎁의 인기하락은 본인의 관리 능력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 할리우드에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남자 배우가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런 인물로 대표적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우니 주니어는 그런 일을 젊은 시절에 겪으며 바닥을 치고 올라온 반면 뎁은 50이 넘어 인기가 사그라지는 시점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예계 소식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롤링스톤> 2018년에 실은 기사 조니 뎁의 문제는 이 모든 잘못이 분명하게 뎁 본인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사는 조니 뎁은 술과 마약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으며,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라이트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현재 뎁은 재산을 날리고 고립되어 있으며 한 번만 더 실수하면 업계에서 추방당할 것이라는 잔인한 진단을 내렸다. 앰버 허드의 칼럼보다 4년 앞서 나온 기사였다.

 

(251)

슐츠의 아내 진 슐츠는 2000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회상하면서 그의 만화가 워낙 부드러운 톤을 갖고 있어서 스포츠는 여학생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는 당시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내용을 그려도 사람들은 반발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피너프>의 캐릭터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자아이들이 스포츠 활동을 하는 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 슐츠는 남편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여성들이 불평을 하고 법안 통과를 촉구했기 때문이지, 남성들이 준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11)

하지만 미국의 중산층 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흑인들의 상황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중요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상황에서 흑인들의 추가적인 요구는 지나치다고 여겼다. 사회의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니 성급하게 요구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백인들의 생각에 대해 킹 목사는 유명한 <버밍햄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분리의 날카로운 고통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기다리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나운 무리가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침없이 폭행해서 죽이고 당신의 형제와 자매를 물에 던져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증오가 가득한 경찰이 흑인을 욕하고 발로 차고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 기다리는 것이 왜 힘든지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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