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천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문명 세계는 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비잔티움 제국이었습니다. 100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50만 명에 육박했던 반면 유럽 내에는 인구가 만 명이 넘는 도시조차 없었거든요. 도시 규모가 문명 발달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그 규모를 통해 사회 조직의 체계나 운영 능력을 엿볼 수는 있죠. 아무튼 도시 규모를 기준으로 하면 이 시기 유럽과 비잔티움 제국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5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아직 도시 이름이 좀 낯설죠? 그렇지만 뜻을 알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이라는 뜻인데요, 성인을 뜻하는 세인트(Saint)’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표현 야고(Yago)’가 합쳐진 말이에요. 콤포스텔라는 별의 들판이라는 뜻입니다. 합치면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의미가 되지요.


(106)

대성당은 규모가 큰 성당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교가 자리한 지역에 있는 주교좌 성당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주교는 기독교 사제 중 고위 성직자에 해당합니다. 주교가 맡은 지역이 크거나 중요할 경우 대주교로 격상시켜 부르고요.


(247-248)

그래서 중세인들은 교회를 천상의 공간처럼 건축하기에 이릅니다. 지상에서 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천국과 좀 더 가까운 공간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죠. 그곳이 바로 고딕 성당입니다. 고딕은 건축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인들은 그 힘을 이용하여 천상의 세계로 한 걸음 다가가려고 했죠. 직접 고딕 성당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이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280)

사실 고딕이라는 표현은 후대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원래 중세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죠. 쉬제르 자신은 라틴어로 오푸스 모데르눔이라고 일컬었는데, 스스로도 이 건축법이 새롭다고 생각했는지 현대적 양식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리고 프랑스 밖에서는 이 양식을 오푸스 프란키제눔’, 프렌치 스타일이라고 불렀어요. 프랑스풍이라는 이야기인데 지금이야 메이드 인 프랑스하면 패션이나 음식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이때는 고딕 성당을 떠올린 셈입니다.


(281)

사실 고딕이라는 용어는 고트족의 양식을 뜻합니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죠. 고트족은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고딕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볼 수 있거든요. 중세 건축을 지칭하는 말로 고딕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자리라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비평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시기 이탈리아 사람의 눈에는 알프스 산맥 너무 유럽에서 유행했던 중세 성당이 야만적으로 느껴졌던 거죠.


(308)

어쨌든 영국이 다채로운 고딕 천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초기에 상당한 건축적 역량을 축적해두었던 덕분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면서 영국에서 수많은 교회가 지어지고 엄청난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곳곳에 크고 웅장한 노르만 양식의 로마네스크 교회들이 들어섰던 모습을 기억할 겁니다. 당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최첨단 건축을 이끌던 노르만왕조가 11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하면서 유럽 건축사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잘 훈련받은 영국의 건축 장인들이 점차 대범한 시도를 했죠.


(335)

역사적으로 11세기 후반부터 유럽 곳곳에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중 최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었죠. 볼로냐 대학의 설립은 10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58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지요. 볼로냐 대학은 이렇게 해서 명실공히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교가 됩니다. 볼로냐 대학은 역사가 긴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에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죠. 그 무렵 프랑스 파리에도 대학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영국 옥스퍼드에도 대학이 세워집니다. 자기네 나라 학생들이 다른 나라 대학을 기웃거리는 게 자존심 상했나 봐요.


(398)

초고층 건물을 지으면 경제가 안 좋아진다는 징크스를 말합니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지어지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인데 최근에는 아랍 에미리트 공화국이 부르즈 칼리파라는 엄청난 초고층 건물을 짓다가 국가 부도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고층 건물의 저주가 계속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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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06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63빌딩이죠 아마?^^

bookholic 2021-05-07 00:08   좋아요 2 | URL
이젠 등수 안에도 못들지만, 마음 속에 일등은 63빌딩이죠...ㅎㅎ

미미 2021-05-06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산티아고가 이런 뜻이었네요.^^ 콤포스텔라도 어감부터 좋은데 뜻도 예뻐요ㅋ.ㅋ 이 책 어딘가 책장에 있는데 아무래도 소장용인듯 합니다ㅋ

bookholic 2021-05-07 00:12   좋아요 2 | URL
미미님 책상 위의 chaos 속 cosmos 같은 책들 속에서 안 보였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을 소장용에서 탈출시켜 주십시오~~~
 















(22)

발이야말로 우리 몸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부위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성기도, 심장이나 뇌도 아니고, 그리 대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대평가를 받아 온 장기(臟器)도 아닌, 발 말이다. 발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몸이 보내는 묵직한 신호가 바로 발에서 흘러나온다. 땅을 디딤으로써 우리 몸과 땅을 접촉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모든 비밀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물질의 원소들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질적인 존재라는 비밀, 발은 소켓에 꽂는 우리의 플러그나 마찬가지다.


(34)

공식적인 이름과 성이라…… 이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인가. 그런 식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고 개별적인 특성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해당 인물을 떠올리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세대별로 유행하는 이름이 따로 있어서 갑자기 모든 사람이 마우고자타나 파트리크, 그리고…… 맘소사, 정말 듣기 싫은 이름이지만, 야니나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지칭할 때 이름과 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볼 때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표현이나 느낌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미를 상실한 단어를 아무렇게나 내뱉기보다는 이것이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41-42)

평소 유독 대화를 나누기 힘든 상대가 있는데 대부분은 남자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많은 남자들이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을 경험한다. 사회적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감소되고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증상이다. 이러한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수많은 생각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은 듯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한 도구와 기계류에 관심이 집중되고, 2차 세계 대전이나 정치인 또는 악당과 같은 유명 인사의 이력에 흥미를 느낀다. 반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은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50)

사람이 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68)

별과 행성에 대한 채널이 있으면 좋겠다. ‘우주의 영향력에 관한 채널.’ 이런 유의 방송 또한 화면이 지도들로 구성될 것이며, 우주의 영향력을 선으로 표시하고, 행성의 충돌을 구역별로 보여줄 것이다. “화성이 황도(黃道)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 저녁에는 명왕성의 영향력이 구역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러니 차를 차고나 실내 주차장에 두십시오. 칼은 치우고, 지하실로 내려갈 때는 조심하실 것을 당부합니다. 이 행성이 게자리를 통과할 때는 목욕을 피하시고, 가족 간의 다툼도 삼가십시오.”


(69)

밤이 되면, 나는 금성을 관찰하면서 아름다운 처녀자리의 이행과정을 상세히 추적해 본다. 나는 이 처녀자리가 이브닝 스타처럼, 아니면 마술처럼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태양 뒤편으로 저무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영원한 빛의 불꽃, 땅거미가 질 무렵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이 무렵에는 단순한 차이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한 땅거미 속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70)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무엇을 행하든 끝내 믿지 못하리라.

태양과 달이 서로에게 의심을 품으면

둘 다 곧 하늘에서 사라질 것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86-87)

점성학이란 실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나는 늘 믿어 왔다. 그것은 상당 부분 경험에 의존하는 견고한 지식이며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지식이다. 주변인 중 몇 명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며, 그들의 삶에서 구체적인 순간들을 태양계와 일치시켜야 한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과 공통으로 연관된 사건들을 확인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유사한 별자리를 패턴이 곧 유사한 사건을 나타낸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그 순간에 점성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별과 행성이 그것을 결정한다면 하늘은 우리 삶의 문양을 만들어 주는 일종의 형판(形板)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이곳 지구에서 벌어지는 작은 세부 항목들을 통해 천체에서 일어나는 행성들의 배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오후의 폭풍우, 우체부가 문틈에 밀어 넣은 편지, 욕실에 망가진 전구. 어떤 것도 그 질서를 피할 수 없다. 내게 그것은 술이나 아니면, 짐작건대 인간에게 순수한 희열을 안겨 줄 것 같은, 새로 개발된 마약과도 같다.


(88)

하지만 오늘날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고안해 낼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만 쉬지 않고 떠든다. 똑같이 낡은 생각들을 그저 계속해서 쏟아내고만 있는 것이다. 현실은 쇠잔해졌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가 노화하듯이 현실에게도 똑 같은 법칙이 적용되어 나이를 먹는 것이다. 몸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인 감각 또한 아폽토시스(apoptosis), 그러니까 세포 자멸에 굴복하고 만다. 아폽토시스란 물질이 피로와 탈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는 일종의 세포 자멸사다. 그리스어로 이 단어는 꽃잎의 떨어짐을 의미한다. 세상은 꽃잎을 떨어뜨렸다.


(121)

내게는 한 가지 이론이 있다. 우리의 소뇌가 대뇌에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프로그래밍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를 잘못 만들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모델이 교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소뇌가 대뇌와 제대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 그러니까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스스로 완벽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혈액 속의 칼륭 수치가 떨어졌어. 세 번째 경추에 긴장이 느껴지네. 오늘은 혈압이 낮으니 몸을 움직여야겠다. 어제 먹은 마요네즈가 내 몸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너무 높여 놓았으니 오늘은 먹는 것을 조심해야겠군.


(124)

우주에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곳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그곳에서 세상은 망가지지 않았고, 에덴동산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거기에서 인류는 어리석고 엄격하기만 한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마음과 직관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는 족쇄를 채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개인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나 특정한 역할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기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아픈 사람만이 진정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156)

사실 인간은 동물이 그들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빚을 청산하고, 현생의 모든 업보를 명부에 기록하고 갚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나는 동물로 태어나 살았고, 먹었고, 녹색 초원에서 풀을 뜯었고, 새끼를 낳았고, 내 체온으로 자식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고, 둥지를 지었고, 내게 주어진 의무를 모두 완수했노라고 말이죠. 인간이 그들을 죽일 때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어제 내 눈앞에 쓰러져 있었고, 아직도 거기에 있는 그 야생 멧돼지처럼 업신여김을 당하고, 진흙탕에 더럽혀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썩은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왜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어때서 인간의 이성이 사소하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동물들이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구속으로 자유로, 틀에 박힌 관습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단계로.


(161)

나쁜 꿈을 처리하는 오래된 방법은 화장실 변기에 대고 그 꿈을 큰 소리로 말한 다음,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이다.


(179-180)

봄은 단지 짧은 막간일 뿐이고, 그 뒤에는 강력한 죽음의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다. 우리는 포위된 상태로 살고 있다. 인생의 한순간을 잘게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엔 옷장 속의 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간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 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230)

내 나이에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294)

시간이 작동하는 건 바로 우리 때문이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 문득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들은 우리가 개를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볼 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 개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개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묶어 놓기도 하고, 쓸데없이 번식하지 않도록 불임 수술을 시키기도 하며, 아플 때는 치료받게 하려고 수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개는 무엇 때움에, 어떤 목적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어떠면 우리 또한 그런 방식으로 별의 영향력에 굴복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도 인간의 감수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어둠 속에서 계단에 앉아 생각했던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301)

불꽃은 빛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가장 순수한 밝기에서 만들어진다고, 가장 오래된 전설은 이야기한다. 인간이 태어나려고 하면 먼저 불꽃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우주 공간의 암흑을 뚫고, 그 뒤에는 은하수를 통과하여 날아가다 마지막으로 여기, 지구로 떨어지기 직전에 그 가여운 불꽃은 행성의 궤도에 부딪힌다. 각각의 부딪힘으로 인해 불꽃은 특정한 속성에 물들고, 그렇게 점차 어두워지고 희미해진다.


(340)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묭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71-372)

그는 또한 신문을 갖고 와서 읽어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게 혐오감을 일으킬 뿐이다. 신문은 우리를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서 우리가 진짜 느껴야 할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내가 언론의 권력에 굴복하고, 그들의 지시에 내 생각을 맞춰야 한단 말인가?



(380)

윌리엄 블레이크는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작품을 남긴 시인이면서 급진적인 사상가였고,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였다. 또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에 얽힌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독특한 예언자적 전망을 피력하면서 이를 예술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상징체계를 통해 재창조한 선지자이기도 했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블레이크는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유작인 <예루살렘>(1804~1820)의 시구처럼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노력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고, 자연에 대한 통합적 사고와 전체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자연 생태계의 일부로 보고,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해 온 토카르추크가 블레이크의 시를 작품의 모토로 설정한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리라.

   -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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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는 2000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지권-생물권 프로그램(IGBP)’ 회의에서 처음 인류세 개념을 제안했다. 당시 회의에서 자꾸 홀로세가 언급되는 것에 굉장히 언짢아하던 파울 크뤼천이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홀로세를 살고 있지 않아요.” 놀란 동료들이 그럼 무슨 시대냐고 물어보자 크뤼천은 알맞은 단어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입에서 ‘Anthropocene’, 인류세가 튀어나왔다. 인류세가 공식 석상에서 처음 쓰이는 순간이었다.


(30)

인류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공식 지질시대인 홀로세(Holocene)를 우선 알아야 한다. 홀로세는 빙하기 이후 지금까지의 비교적 따뜻한 시기를 말하며, 1만 년 가량의 시간에 해당한다. 홀로세는 전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Holos’에서 유래했다.


(51)

1. 인류세가 지질학, 층서학적으로 실재하는가?

2.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가?

두 안건 모두 위원 34명 중 29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인류세가 정식 지질시대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는 소식이었다.

인류세실무그룹은 인류세를 정식 지질시대로 인정하자는 내용의 제안서를 2021년까지 국제층서위원회에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이 제안서가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학연합에서 통과되면 인류세가 공식화된다. 우리의 이름 인류가 지질연대표에 새겨지는 것이다.


(74)

고생대의 대표적 화석은 삼엽충, 중생대는 암모나이트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주의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지금 시대의 어떤 화석을 발견할까?

현재로서는 닭 뼈가 유력한 후보다. 동 시간대에 77억 인구가 약 230억 마리의 닭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 한 명당 닭 세 마리꼴이다. 2008년에는 한국에서 조류독감으로 인해 약 1000만 마리의 식용 닭이 살처분돼 매립되기도 했다. 그럼 그 뼈들은 어떻게 될까? 썩거나 화석이 된다. 닭 뼈는 산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보통은 잘 썩지만, 매립지 환경은 산소가 별로 없기 때문에 화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116-117)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는 유인원이다. 유인원은 인간을 제외하면 다섯 종이 있는데,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기번(긴팔원숭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오랑우탄이다.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유인원인 오랑우탄은 100년 전 23만여 마리에서 현재는 11만여 마리로 줄였다. 그중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심각한 멸종위기 종으로 사바주의 키나바탕안강에는 2002년에 1100여 마리가 살다가 지금은 700마리 정도로 줄었다. 팜유 농장이 늘고 벌목 등의 이류로 숲이 황폐화되면서 오랑우탄들은 인간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거나, 조각난 숲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146-147)

인류의 운명을 바꾼 돌, 청동, 철처럼 플라스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 생산되며 현대 문명을 접수했다. 현 시대는 지질학의 관점으로 보면 인류세, 문명사적으로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이은 플라스틱기() 시대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며 누르는 자판, 노트북 본체, 마우스, 전원선, 스탠드 조명, 의자 바퀴까지 모두 플라스틱 소재가 포함돼 있다. 현대인이라면 하루 최소 한 번 이상은 플라스틱을 쓰게 되고, 둘러보면 어디에나 하나쯤은 보일 정도로 생활 반경 안에 널려 있다. 플라스틱은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167)

가장 섬뜩한 점은 미세플라스틱이 어류, 야생동물, 그리고 인체에 머물면서 해당 종에 미치는 유해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리처드 톰슨 교수가 미세플라스틱의 존재를 밝혀낸 지 겨우 15년 정도. 플라스틱을 먹으면 건강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따져보면 플라스틱이 발명된 지 대략 150, 본격적으로 사용된 지는 60~70년 남짓이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아직 잘 모른다.


(230)

인류세는 생물권, 수권, 암석권, 대기권 등 지구를 구성하는 여러 권역에서 인간의 활동이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다. 그중 대기오염처럼 도시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경우는 드물다. 대도시에 살면 생물다양성이 감소해도 잘 모르고, 정수된 물을 사용하며, 여름 휴가 기간에나 산성화된 바다로 놀러 간다. 변하고 있는 지구 현장을 외면하기 쉬운 생활 방식 속에서 어떻게 해도 차단되지 않는 것이 공기다. 지금의 국가 정책과 생활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미세먼지 재앙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마스크를 쓰거나, 창문을 닫고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정도다. 금성에 간 우주인도 비슷할 것이다. 선체 안에서만 편하게 숨 쉴 뿐 밖으로 나갈 때는 기능성 헬멧을 착용해야만 한다. 더 나아질 길이 있음에도 우리는 점점 금성 같아지고 있다.


(287)

이 질문은 2020년의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77억 지구촌 사회에도 적용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후 변화를 일으키거나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와요.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지구를 더 바꾸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력하고 우리의 행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낳는 것이죠. 인간은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종이에요.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종보다 강력한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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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4-2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4~75쪽 밑줄긋기하신 부분이 저랑 같네요! 핑크닭뼈 아이디어가 신선했었어요
287쪽 인용하신 부분... 우리가 의도치 않은 결과라도 책임을 피할 순 없는것 같아요 인류가 강력한 종이라는게 참 씁쓸하기도 합니다

bookholic 2021-04-26 23:59   좋아요 1 | URL
점점 불편한 진실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가장 강력한 종일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종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과연 인간은 여섯번째 대멸종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나른해도 되는
일요일 오후...
피 한 잔과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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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4-25 16: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피 한잔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활력이 솟아 책이 술술 잘 읽힐것 같은 마법의 쥬스 같아요^^

bookholic 2021-04-25 19:39   좋아요 3 | URL
혈액형을 확인 안하고 먹어서 그런지, 활력은 솟지 않고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달게 잤어요...^^

새파랑 2021-04-25 17: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묽은 피네요^^ 집이 멋있어 보여요 ㅎㅎ

bookholic 2021-04-25 19:40   좋아요 3 | URL
집이 멋있는 것이라 카메라 어플이 좋아서 ㅎㅎ
다음에는 피 원액을...^^

deadpaper 2021-04-25 17: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4월은 잔인한 달. ㅎㅎ

bookholic 2021-04-25 19:40   좋아요 2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음료는 4월에 어울리는 음료~~^^

미미 2021-04-25 17: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악ㅋㅋㅋㅋ저도 한잔 마시고 싶네요ㅋㅋ🙄

bookholic 2021-04-25 19:41   좋아요 2 | URL
드실 때 혈액형 잘 확인하고 드시길...^^

mini74 2021-04-25 19: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양소 파괴되기 전에 얼릉 드세요 *^^*

bookholic 2021-04-25 19:43   좋아요 3 | URL
완샷했어요....^^

붕붕툐툐 2021-04-25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에 피가 빠질 수는 없죠! ㅎㅎ나른해도 되서 나른한 휴일입니다!ㅎㅎ

bookholic 2021-04-26 00:2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붉은 피가 없다면 커피라도....^^
 














(59)

맨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 내부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성은 결혼으로 인해서 접하게 된 주위 세계의 부자연스러움에 항거했다. 무거운 스커트 버팀쇠와 답답한 코르셋으로 대표되는 부자연스러운 장중함에 항거하여 싸웠다. 마음이 가볍고 매인 곳 없는 빈 여인은 수천 개의 창문이 달린 장엄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고 있었다.


(109)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입만 가지고 지껄였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건성으로 듣고, 매력적인 애교나 반짝이는 경쾌함에만 빠져, 떠오르기 시작하는 생각은 얼른 내팽개쳐버렸다. 뭐든지 끝까지 말하거나 끝까지 생각하거나 끝까지 읽는 법이 없었다. 참된 경험의 의미와 맛을 캐보려고 진득하게 매달리는 적이 없었다. 책이나 공문서와 같은 인내와 집중을 요하는 진지한 것을 종아할 턱이 없었고, 꼭 필요한 편지 같은 것만 마지못해 성급하게 끄적이는 글씨로 처리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조차도 종종 얼른 끝내고 싶어한 흔적이 뚜렷했다. 인생이 이렇게 번거롭지 않았으면, 머리를 탁하고 음울하며 고독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런 게으른 기질을 끝까지 잘 받아들여주는 사람만이 그녀에게서 훌륭한 남자라는 인정을 받았고, 긴장을 요구하는 사람은 귀찮은 현학자 취급을 받았다. 궁정의 기사들이나 친지들 가운데 좋은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단박에 멀리했다. 오르지 즐기자. 그리고 생각이나 계산, 절약 따위에 방해받지 말자. 이런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고,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주장이었다. 다만 감각에 따라 생활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거 그것이 그 세대 전체의 모럴이었다. 그녀는 분명 그러한 시대의 모럴과 더불어 살았고, 또 그 모럴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졌다.


(110)

극단적일 정도로 서로 다른 이 부부보다 성격학적으로 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부부를 만들기란 어떤 소설가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신경의 맨 끝, 피의 리듬, 기질의 말초적 진동에 이르기까지 함스부르크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봉가의 루이 16세는 성격과 특징 모두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안티테제를 보여준다. 한쪽은 무거운데 다른 한쪽은 가볍고, 한쪽은 비둔한데 다른 한쪽은 나긋나긋하고, 한쪽은 곰팡내가 나는데 다른 한쪽은 거품처럼 끓어오르고, 한쪽은 무신경한데 다른 한쪽은 파르르 떨도록 신경이 예민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우유부단한데 아내는 너무 성급하게 결단을 내리고, 남편은 신앙심이 투철하고 독신자인 체했으나 아내는 쾌활하고 세속적이고, 남편은 겸손하고 겸허하되 아내는 애교 만점에 오만하고, 남편은 현학적이나 아내는 경박하고, 남편은 검약하나 아내는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은 지나치게 근엄한 반면 아내는 절도 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남편은 묵직한 바도 속에 깊은 흐름이라면 아내는 물거품이요 춤추는 파도였다. 남편은 혼자 있을 때가 제일 편한데 아내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무리들의 한가운데 있었다. 남편은 동물적으로 둔감함으로써 안락하게 많이 먹고 독한 술을 마시기를 좋아했으나 아내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음식은 아주 조금, 얼른 먹어치웠다. 남편의 본령은 잠에 있었고, 아내의 본령은 춤에 있었다. 남편의 세계는 낮이고, 아내의 세계는 밤이었다. 따라서 이 부부의 생활 시계 바늘은 해와 달처럼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잠자리에 드는 밤 11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제대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락실로 내일은 무도회로 모레는 또 다른 곳으로,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 몇 시간이고 사냥을 하며 돌아다닐 때 그녀는 겨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습관, 취향, 하루 일과 어느 한 가지도 공통되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그들 생의 대부분을 따로 살았다. 거의 언제가 잠자리를 따로 했던 것처럼.


(244-245)

민중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는  사물을 의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사물을 단지 인간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사고력만을 가진 것이다. 민중의 이해력으로서는 결코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이다. 프랑스 백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디에선가 자기들에게 부정을 저지르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복종하고 굴종하면서 보다 좋은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믿으며 기다렸다. 새로운 루이가 왕위에 오를 때마다 깃발을 흔들었고, 영주와 교회에 공손히 세금을 바치며 부역을 해왔다. 그러나 허리를 낮게 구부리면 구부릴수록 압박은 가혹해졌고, 세금은 더욱 더 탐욕스럽게 그들의 피를 빨았다. 프랑스는 넉넉한 땅이었으나 곡물창고는 텅텅 비었고 소작인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였다.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과 아름다운 하늘을 누리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판이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빵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진탕 먹는 자가 있기 때문이며, 의무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권리를 독차지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명철한 사고와 탐구에 앞서 나타나기 마련인 어렴풋한 불안이 점차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다. 볼테르, 루소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잠을 깬 시민계급은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독서하고, 저작하고, 의지와 소통을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서운 폭풍에 앞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부농의 집은 약탈을 당했고, 영주는 압력을 받았다. 거대한 불만이 오래 전부터 먹구름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246)

이제 먹구름이 갈라졌다. 팸플릿이나 논쟁서가 비처럼, 우박처럼 쏟아지고 문서와 청원이 홍수처럼 넘쳐흘렀다. 프랑스에서 이처럼 시끄럽게 거론되고, 쓰이고, 입에 오른 사건은 일찍이 그 예가 없었다. 인민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지원병들은 궁정도, 국왕도, 귀족도 없고 시민만이 있는 나라, 완전한 평등과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주의적인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무지몽매한 마을에까지 돌아다니며 퍼뜨렸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에는 이미 뚜렷이, 볼테르나 디드로의 저작 속에는 보다 미묘하고 은밀한 필치로, 왕정이 결코 신의 뜻에 의한 한 한의 정치 체제도 아니며, 현존하는 최상의 것도 아니라고 쓰여 있었다.


(261)

그뒤의 나날은 불멸의 문자로 세계사에 새겨져 있었다. 단 한 권의 책만은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둔감하기 짝이 없는 루이 16, 그가 썼던 일기장이다. 그 일기장의 7 11일의 대목에는 아무 일도 없음. 네케르 씨 출발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며, 국왕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때려부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이 일어났던 7 14일 역시 똑 같은 비극적인 언어, “아무 일도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다.


(298)

그러나 혁명은 자꾸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혁명이란 밀려오는 흐름과도 같은 것이므로 정체는 재앙이며, 후퇴는 종말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기 주장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더 많이 자꾸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휴식 없는 행군의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신문이었다. 혁명의 아이들, 혁명의 골목대장들은 주저 없이 대열의 앞에 섰다. 펜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유라는 말을 휘둘렀고 난폭하고 무절제했다.


(320-321)

불행과 함께 이 특별한 여자의 내부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이 성격을 바꾸어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불행 때문에 새로운 성격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래 전부터 있어온 싹을 불행이 꽃피우게 한 것일 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현명해지고, 활동이 왕성해지고, 활발해진 것은 마지막 고통스런 해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모든 것이 이미 싹으로 영혼의 은밀한 한구석에 숨어 있었고, 감각의 유치한 도박성 한구석에는 전혀 다른 반쪽이 그 대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인생을 가지고 장난 전혀 애쓸 필요가 없었다 만 해왔다. 인생과 맞서서 싸울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강한 자극을 받자 모든 에너지가 총동원된 것이다. 생각해야 할 때가 오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으로 생각하고 숙고하게 되었다. 또 일을 해야만 할 때는 일을 했다. 우월한 위치에서 비참해 보이지 않으려면 운명적으로 커지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성숙해졌다. 내적, 외적 생활에서의 완전한 변모가 튈르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324)

우리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아이들과 관련된 생각만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행복이라는 단어와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두 아이들을 통해서일 뿐입니다.”라고 그녀는 한탄했다. 그러고 또다른 편지에는 너무나 슬플 때면 나는 작은 아이를 불러옵니다.”라고 썼다. “하루 종일 혼자였습니다. 아이들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아이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내 곁에 두고 싶습니다.”


(326-327)

어머니로서의 이 기록을 전에 쓴 다른 편지들과 비교해보면 똑 같은 손으로 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마리 앙투아네트와 과거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너무나도 달랐다. 행복은 불행과 너무나도 다르며, 절망은 자만과 그렇게도 차이가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영혼 속에, 미완성의 순종적인 영혼 속에 불행은 그 각인을 똑똑히 찍고 말았다. 지금까지 흐르는 물처럼 용해되어 흘러가던 어떤 성격이 그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넌 언제 너 자신이 될 거냐!”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절망적으로 탄식했다. 관자놀이에 최초의 백발이 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드디어 그 자신이 된 것이다.


(433)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프랑스 혁명에서도 두 종류의 혁명가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와 복수심에 불타는 혁명가가 그것이다. 대중보다도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이상주의적 혁명가는 증오심에 불타는 혁명가들을 그들에게로 끌어올려 그들의 교육, 문화, 자유, 생활방식을 향상시키려고 했고, 오랫동안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온 증오심에 불타는 혁명가들은 풍족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들은 전에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함으로써 분노를 해소시키려고 했다.


(442)

일생 동안 왕을 뒤따라다녔던 완전한 무감각이 이 절박한 최후의 순간에는 시련을 겪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무신경이 결정적인 순간에 루이 16세에게 어떤 도덕적인 위대함을 부여했다. 그는 공포감도 흥분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옆 방에 있던 4명의 시 위원은 단 한번도 그가 소리 높여 흐느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듣지 못했다. 가엾고 연약한 남자에 불과한 위엄 없는 왕은 가족들과의 이별 장면에서는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지 못했던 힘과 위엄을 보여주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0시에 여느 날처럼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가족에게 이젠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꺾을 수 없는 그의 의사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그녀에게 가겠노라고 그가 거짓말까지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517)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시누,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나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움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이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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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24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테판 츠바이크 믿고 담아갑니다!^^

bookholic 2021-04-24 12:04   좋아요 2 | URL
저는 좋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부모로써 짠하더군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서니데이 2021-04-24 13: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품절도서였는데 다시 주문가능해졌네요.
전에 읽었지만 인용된 부분 읽으니 새로 읽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bookholic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ookholic 2021-04-25 00:03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 헌책방에서 사두고 이제서야 읽었어요..^^
좋은 책은 계속 품절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면 좋겠네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일요일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