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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2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부지런히 프랑스 대혁명 2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혁명 세력이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것으로부터 루이 16세의 단두대 죽음까지그들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다소 과격하다고까지 생각되지만,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란다.

,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그걸 느꼈을 거야. 백성들은 변화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많지, 어제의 동지들이 사소한 의견 차이로 등을 돌리지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 그의 별명은 청렴인사였단다. 그 만큼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개인적인 사생활에서 원리 원칙을 중요시했어.

1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코뱅파는 원칙적이면서 급진적인 성향이었어. 그렇다 보니, 온건함을 보이는 지롱드파에 불만이 많았던 거야. 그리고 프랑스의 모든 사람들이 공화정을 원하는 것은 아니야. 서부지역에서는 왕정을 지지하면서 혁명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반혁명군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단다. 그들은 루이 17세를 왕으로 세우겠다면서 파리로 진격 시도도 했어. 그리고 프랑스 주변 국가에서도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횡전개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어. 국내외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 1789년에서 몇 년이 지나갔지만,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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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2)

장 봉 생탕드레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혁명에 지쳐 있습니다. 부자들은 혁명을 싫어하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빵이 부족하고, 비난해야 할 것은 우리라고 사람들은 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기력을 북돋우려고 우리는 모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체들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빵이 없지만 곡물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곡물을 꼭 쥐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살 길을 긴급히 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혁명을 완수하도록 우리를 돕기 원한다면 말입니다......

방데와 그 인근의 도에서 생긴 혼란이 아마도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한 것은 그들 모두의 가슴속에 자유에 대한 신성한 열정이 질식되어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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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국을 해결하는 방법을 로베스피에르는 어디서 찾았을까?


1.

로베스피에르의 답은 공포 정치였단다. 먼저 루이 16세의 아내, 한 때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재판소로 소환했단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전쟁 때, 오스트리아에 정보를 빼돌렸다는 의심을 샀고, 루이 16세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단다. 그렇게 루이 16세에 이어 마리 앙투아네트도 기요틴이라고 부르는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했단다.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안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군사정부 시절 때 많이 사용하던 말인데, 원래는 사회의 질서와 안녕이라는 뜻인데, 이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핑계로 강력한 제재와 통제를 한다는 의미가 더 컸어. 공안위원회에서도 그런 일을 했어. 사회와 질서와 안녕을 해치는 자가 있다면 처벌을 했어. 그냥 감옥에 가두고 훈시를 해도 좋았겠지만, 대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공안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은 처형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 같구나.

처형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같이 프랑스 혁명을 이루었지만 반대진영에 있는 사람들마저 기요틴으로 보냈단다. 온건파였던 당통도 기요틴으로 보내 처형시켰단다. 당통이 사생활이 좀 문란하기도 했었는데, ‘청렴인사였던 로베스피에르는 그런 당통을 늘 싫어했어. 반대 진영의 리더까지 단두대로 보내는 마당에, 잘못 몸을 사리면 다로 삶을 마감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단다. 예전에 다른 책을 읽고 쓴 독서 편지에서 이야기했듯이 화학자로 유명한 라부아지에도 이 때 기요틴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는데, 머리 잘리는 것이 일상이던 시대였던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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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구체제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국내 통관세 세무 관리 노릇을 한 징세 청부인 스물일곱 명을 죽였다.

그들 중에는 위대한 화학자 라부아지에도 있었다.

루이 16세의 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도 죽였다.

이는 복수의 살인이었다.

그렇게 공화국을 정화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제안하에, 보클뤼즈와 부슈뒤론의 연방주의자들왕당파들의 재판을 위한 인민위원회를 오랑주에 창설했다. 이 위원회는 사형 332건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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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포 정치는 어떻게 끝이 날까? 그건 한가지 밖에 없어. 그 공포 정치를 행하는 자가 죽으면 되는 거야. 그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아 현실이 되었단다.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들이 권력을 잡았어.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은 자살 시도로 삶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자살 시도는 턱이 날라간 상태에서 미수로 그쳤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로베스피에르도 결국 기요틴에서 삶을 마감했대. 프랑스 대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후 공포정치로 정적들을 마구 죽인 것은 좀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구나. 다같이 힘을 모아 쓰러진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썼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의견이 다른 이들을 모두 죽이고 혼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그 생각이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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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264)

뤼오가 썼다. “, 혁명에서 각 개인의 열정은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 열정들은 가장 활발한 이들을, 이 혁명을 그 목적에 이르도록 이끌 능력이 가장 많은 이들을 사형대로 보낸다. 열정에 빠져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사형 집행인의 손으로 서로를 죽이고,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약화하며, 인류 역사의 이 놀랍고 숭고한 모험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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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난 프랑스. 여전히 혼란의 시기를 겪는단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사회 불안이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가 없겠지. 파벌들의 권력 다툼은 여전했단다. 이런 시기 전쟁터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점점 유명해지던 이가 있었으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란 사람이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빠가 학창 시절 참고서 표지 모델로도 유명했던 적이 있었어. 그 출판사는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왜 나폴레옹을 표지 모델로 했을까. 그의 말로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 나폴레옹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민심을 얻었는데, 그도 로베스피에르파라는 의심을 사서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도 있었단다. 자칫 하면 기요틴으로 가는 수가 있었으니

로베스피에르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이들은 부르주아 집안의 젊은이들로, 그들은 온건파 세력들이었단다. 그들은 여러 명의 총재를 두는 총재 정부를 수립했는데, 그들 또한 정치적으로 아마추어였단다. 아무래도 부르주아 집안들이다 보니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했을 거야. 여전히 나라는 산으로 가고, 빵 값은 계속 오르기만 하고심지어 로베스피에르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었단다. 왕이 지배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었고현재가 힘들면 과거의 힘듦을 잊고 어렴풋한 추억 하나만 믿고 과거를 찾는 모습들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구나. 그래서 최악의 정당들이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것 같아.

당시 프랑스 나라 사정은 이렇게 안 좋지만, 다행히 나폴레옹 덕분에 나라 밖 외부의 침략에 의한 어려움까지는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어. 나폴레옹이라는 이 사람도 권력욕이 있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급진적인 것 같지는 않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듯 했어. 사람들을 보내서 총재 정부에 대한 민심을 듣고, 총재 정부의 상황을 알아보게 하기도 했어. 하지만, 총재 정부 사람들도 나폴레옹의 권력욕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프랑스에서 먼 지역인 이집트와 전쟁에 그를 보냈어. 나폴레옹이 육지에서 하는 전투는 강하지만, 바다 위에서 하는 전투는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토를 떠난 이후, 프랑스 군대는 영국 군대 등에게 패하게 되었어. 특히 지중해 해상권을 영국이 다 차지하게 되어, 프랑스와 이집트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과 연락이 끊기게 되었어.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단다. 그리고 여론을 살피고, 언론을 조정하면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어. 백성들이 들으면 기분 좋은 말도 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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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그가 말했다. “시민 총재들이여, 나는 이 칼을 오로지 공화국과 그 정부의 보호를 위해서만 뽑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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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494)

보나파르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그대들에게 그렇게 빛나는 모습으로 남겨 놓았던 이 프랑스를 가지고 무엇을 했소?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남겨 놓았소! 나는 전쟁을 재발견했소. 나는 당신들에게 승리를 남겨 놓았소! 나는 그 반대를 발견했소! 나는 당신들에게 이탈리아로부터 수백만 남겨 주었소! 나는 어디서나 약탈의 법칙과 빈곤을 발견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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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그리고 통령 정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단다. 여기까지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란다. 지은이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를 지칭하게 되니까, 그 시점까지가 프랑스 대혁명의 종점이라고 생각한 것 같구나.

나폴레옹은 이후 황제라고 자칭하고,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여 엘바 섬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백일천하를 이루었다가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하여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뒷이야기가 있단다.

아빠가 이 책을 쉽게 읽은 것이 아니라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이해한 부분만 이야기를 했어. 그렇다 보니 잘못된 부분도 있을 텐데 이해바라고, 나중에라도 그런 부분을 알게 되면 아빠한테도 알려주길 바람. 그럼, 이상.


PS:

책의 첫 문장 : 이전의 프랑스 왕이요, 루이 16세였던 루이 카페는 1793 1 21일 월요일, 아침 10 20분 조금 전에, 그렇게 단두대에 올랐다.

책의 끝 문장 : 인생은 얼마나 짧은지! 세상의 변화는 얼마나 느린지!


산악파는 열이면 열 모두 사형에 표를 던졌고, 평원파의 38퍼센트가 그들과 함께 찬성표를 던진 반면, 오로지 14퍼센트의 지롱드파만이 시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코뱅 당원들 중 가장 결연한 자들 눈에는 지롱드파의 이 ‘신중함’이 위태한 이 시기에 비난받아 마땅한, 위험한 계산일 뿐이었다. - P12

뤼오가 결론지었다. "얼마나 이상한 국가인가. 모든 일에서 극단을 달리다니! 프랑스는 왕을 숭배했다가, 마지막 왕을 죽였다. 가톨릭 신앙의 멍에 아래 기꺼이 숙이고 들어갔다가, 막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중간 조치는 전혀 모른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은 무엇일까? 비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녕, 나의 친애하는 친구여, 더 보지 않으려 내 눈에 띠를 맨다네……"
- P138

전에는 신권을 가지고 있던 왕이, 왕비가, 1788년 자유를 위해 일어났던 바르나브가, 마르세유 대표자들과 함께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 공격에 나섰던 바르바루가, 브리소가 그들의 ‘머리를 창문’에 내놓았다면, 그들처럼 널빤지 위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할 수 있는 이가 누구겠는가?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외쳤다.
"사람들이 나에게도 역시 공포의 생각을 심으려 했으나, 위험이 나에게 뭐 그리 중요한가? 나의 생명은 조국의 것이고, 내 심장은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나무랄 것도, 수치스러워할 것도 없는 일이 될 것이다."
- P155

"혁명 정부의 동력은 덕이며 동시에 공포입니다. 덕이 없으면 공포는 파국을 초래합니다. 공포가 없다면 덕은 무력합니다."
기요틴은 사람들을 고결하게 만드는 기계와 같은 것이었다.
- P170

나폴레옹이 형 조제프에게 썼다. "나는 삶에 큰 애착이 없으며, 큰 애정을 갖고 삶을 바라보지도 않고, 항상 전투 전야의 마음 상태로,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죽음이 한가운데 있을 때 걱정이나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속된다면, 형님, 나는 결국 지나가는 마차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성은 종종 이런 것에 놀랍니다. 그러나 이는 이 나라의 도덕적 광경과 습관적 우연이 나에게 만들어 놓은 경향입니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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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8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8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독서 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에는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책을 이야기해줄게. 막스 갈로가 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두 권짜리 책인데, 오늘은 1권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줄게. 처음 이 책을 알았을 때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역사 교양서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설 책이었어. 프랑스 대혁명을 소설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야. 그래서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읽기는 쉽지 않았단다.

막스 갈로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나폴레옹>이라는 소설로 유명하단다. , 그럼 프랑스 대혁명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아빠의 잘못된 기억으로 몇몇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감안하고


1.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빼놓을 수 없잖아. 원래 루이 16세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어. 그래서 왕이 되는 수업도 하지 않았지. 루이 16세 이전의 왕이 루이 15세였는데, 루이 15세는 루이 16세의 할아버지였어. 루이 15세는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의 장남도 따로 있었어. 그러니까 루이 15세의 장남과 장손이 왕의 수업을 받았던 것이지. 그런데 장남과 장손이 모두 죽고, 뒤늦게 세손이 된 루이 16. 그리고 루이 15세마저 죽고 말았단다. 그래서 준비도 없던 루이 16세가 왕이 된 것이야. 때는 1774년이었어.

그런 걸 국민들이 알았을 리 없었어. 그러니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감으로 국민들이 환호를 했어.

하지만, 루이 16세는 국정 운영에 대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그래서 늙은 신하인 모르파에게 멘토 역할을 부탁했어. 재무 총감으로는 튀고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개혁을 하려고 했어.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부터 이어진 외국과 전쟁으로 나라 빚이 많았거든. 그리고 계속되는 흉작으로 밀가루 값이 폭등을 했고이런 흉작이 이어져서 루이 16세에 대한 국민들의 환호는 오래 가지 못했어. 예상치 못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서 루이 16세가 잘 대처하면 모르겠지만, 루이 16세는 예상 가능한 일에도 잘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었어. 생각하기 귀찮고 그냥 사냥이나 놀거리를 찾곤 했지.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왕비로서 자격 미달이었단다. 사교와 유흥을 좋아하는 젊은 아가씨였어. 신하들과 귀족들이 사교를 좋아하는 마리 주변에 권력의 꼬리라도 잡아보겠다고 모여 들었어. 그나마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던 이가 앞서 이야기한 재무총감 튀고르였는데, 그의 개혁의 칼날이 왕과 왕비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를 사임시켰지. 그리고 튀고르의 뒤를 이어 클뤼니라는 이가 재무 총감이 되었는데, 튀고르의 개혁 정책을 모두 뒤집어 엎어 놓았단다.

….

이 시절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었단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전쟁인데, 프랑스는 영국과 관계가 안 좋았단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고 있었어. 그렇다 보니 이 또한 나라 빚을 늘어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었단다.

루이 16세와 마리는 어렸을 때 정략적으로 결혼을 했단다. 그러나 그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했어. 루이 16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병원에서 시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리의 오빠로부터 조언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7년만에 제대로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고 하는구나. 모두 2 2녀를 낳았는데, 두 아이는 어렸을 때 병으로 죽고 성인이 된 아이는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고 했어.


2.

앞서 재무 총감 올라 개혁 정책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나 클뤼니라는 바람이 있다고 했잖아. 다행히 그는 일찍 죽고 말았어.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네케르라는 사람이 재무 총감이 되었는데, 그는 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속도 조절을 하는 개혁이었어. 이것으로 민심을 얻게 되었어.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하고 잘렸단다. 이렇게 국민들의 민심을 얻고 있는 재무 총감을 자르고, 루이 16세는 나라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어.

국민들은 이 모든 것을 왕비 탓으로 돌렸어.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자가 프랑스를 망쳐 놓는다고심지어 루이 16세와 낳은 왕자가 다른 남자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퍼트렸어. 네케르가 추진하려고 했던 개혁은 심플하단다. 특권층에서 면제되었던 세금을 부과하는 거야. 네케르의 후임이었던 칼로라는 사람도 네케르의 개혁 정책을 그대로 따랐어. 그렇게 되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특권층들의 반발이 셌겠지. 하지만 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인 것이야. 백성들도 계속 폭동을 일으켰단다. 1789년 역사적인 해에도 크고 작은 폭동은 계속 되었고, 나라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단다. 네케르가 다시 투입되었지만, 나라가 너무 많이 망가져서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어.

지난번 <이야기 프랑스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의 세 계급의 대표인 성직자(1신분), 귀족(2신분), 시민(3신분)의 대표들이 모여서 정책을 결정하는 삼부회가 열렸어. 하지만, 결과는 늘 2(성직자, 귀족) : 1(시민). 시민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지. 3신분들은 테니스 코트로 장소를 옮겨서 독자적으로 의회 기구를 만들었으니 국민 의회였단다. 이 때 국민 의회의 대표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람으로, 프랑스 대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란다. 아마 한 손가락을 뽑으라고 해도 뽑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루이 16세와 정부는 독단적으로 보이는 국민 의회를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지. 갈수록 대립하였고, 백성들은 어차피 굶어 줄을 바에야 싸우고는 죽자는 심정으로 다시 봉기를 하였단다. 이번에는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단다. 프랑스 대혁명 초반부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바스티유 감옥 점령이었단다. 대혁명을 이끌었던 이들 중에 몇몇 중요한 사람들을 들자면, 앞서 이야기했던 국민 의회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에 앞장섰던 국민방위대의 총사령관 라파예트,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통해 혁명의 바람잡이를 했던 마라 등이 있었단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왕은 우왕좌왕했고, 왕비는 자신이 모국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단다. 그들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선택했단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얼마 전에 잡혀와 다시 파리 튈르리 궁으로 돌아왔단다. 분노한 일부 백성들은 왕을 죽이라고 했지만, 아직 프랑스 헌법상 루이 16세는 왕이었고, 단지 직무정지 상태였던 거야.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루이 16. 뭐라도 해야겠지. 그는 왕비의 조언을 듣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단다. 전쟁이 일어나면 혼란해질 테니 이때 다시 권력을 되찾겠다는 생각이었어.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주변국들이 그 여파가 자신들의 나라에도 끼칠까 봐 프랑스를 상대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단다. 그 중에 오스트리아 군대, 프로이센 군대, 그리고 루이 16세를 지지했던 자들이 망명해서 만든 군대가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단다.


3.

혁명이 성공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가 안정까지 찾아주지는 못했단다. 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고 국내 정세로 불안했어. 혁명을 성공한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간의 알력 다툼이 이어졌어. 급진파는 로베스피에르 등이 이끈 자코뱅파가 있고, 온건파는 브리소 등이 이끈 지롱드파가 있었단다. 둘이 대립을 하면서도 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같았기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나서 3년 뒤인 1792 9월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포하게 되었단다. 이제 루이 16세는 왕이 아니라 일반 국민이 되었단다. 그리고 루이 16세 가족은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단다.

이제 국민 의회는 왕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하는데, 왕은 이미 재판을 받은 것이라면서 그냥 두자고 하는 이들이 있고, 다시 재판을 통해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단다. 아참, 국민 의회는 국민 공회로 탈바꿈했는데, 언제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더구나.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부터 국민 공회로 바뀌어있었어. 아빠가 책을 집중해서 읽지 않은 탓인가 보구나. 국민 공회는 결국 루이 16세의 재판을 열었단다. 1972 11 13일이었어.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인 생쥐스트가 재판에서 루이 16세의 죄목에 대한 연설을 했어. 이 연설로 생쥐스트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단다. 루이 16세는 반역 행위로 결국 사형을 판결 받았단다. 그 판결의 찬반수가 거의 비슷했다고 하니, 한때 왕이었던 이를 죽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루이 16세가 유죄라는 것에는 일말 의심이 없이 707:0 으로 판결이 났어. 하지만, 사형에 대한 찬반 투표는 1 387:334, 2 361:360… 간발의 차로 그의 사형이 결정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그는 서른 여덟 살 파란만장한 삶을 단두대에서 마감했단다. 때는 1793 1 21일이었어.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지만, 왕이 안되었다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아버지와 형이 죽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 위에 올랐던 루이 16. 준비도 없었고, 타고난 리더십도 없는 무능했던 왕 루이 16.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 위에 있었어도 혁명은 일어났을까?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면 안 일어났을까? 왕이 누가 되었든 혁명은 시대의 흐름이라 피할 수 없었을까? 아빠는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여기까지 프랑스 대혁명 1권에 대한 이야기란다. 2권에서는 루이 프랑스 대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이야기될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 그는 프랑스의 왕이었다.

책의 끝 문장 : 그 추수는 유혈이 낭자할 것이다.


"무엇을 원하시오? 나는 업무에 짓눌려 있고, 겨우 스무 살일 뿐이오. 모든 것이 나를 어지럽히고 있소." 모르파에게 루이가 말했다.
"오직 결정을 내리는 것만이 그 혼란을 멈출 것입니다. 지연하는 것은 일들을 쌓이게 하고 심지어 망치기까지 합니다. 미룬다고 해서 일들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에 대해 결정하는 그날에 또 다른 하나가 생겨날 것입니다.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전하의 운명이 될 영원한 풍차입니다." 모르파의 대답이었다.
- P49

‘국민의회’
루이는 이 단어를 되뇌고, 앞에 높인 팸플릿과 그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그는 마치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서둘러 그 속으로 내던져질 준비가 된 듯이, 현기증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의 육체가 망설임과 그 위로 덮쳐 오는 두려움을 동시에 표현하듯이 앞뒤로 비틀거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 P159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 카니발의 외침을 질러 대며, 창끝에 머리들을 달아 내돌리고 있었다.
"반란이야." 루이 16게가 둔탁한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
- P190

로베스피에르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평민 출신입니다. 정의와 인류와 자유에 대한 사랑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열정의 하나입니다. 열정이 지배적일 때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황금이나 명예에 대한 갈증과 같은 다른 종류의 열정들에 자기 영혼을 열었을 때는 그것에 영광과 정의와 인류와 백성과 조국,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것이 인간 마음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범죄와 정직함 사이에, 폭군과 인류의 은인 사이에 존대하는 차이점의 전부입니다. - P338

생쥐스트가 외쳤다. "행복하지 않은 인민에게는 조국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공화국을 세우기 원한다면, 인민들을 부패시키는 불확실과 빈곤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내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빈곤이 대혁명을 탄생시켰고, 빈곤이 이것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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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4-25 0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행복하겠어요.♡

bookholic 2021-04-25 09:18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이 독서편지는 아이들에겐 아직 비공개^^
즐겁고 화창한 일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새파랑 2021-04-25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나중에 공개되면 아이들이 깜짝 놀라면서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bookholic 2021-04-25 19:45   좋아요 1 | URL
언제쯤 공개해야 할까 고민중입니다 ㅎㅎ
 
이야기 프랑스사 - 골 지방의 선사 시대부터 20세기 프랑스까지 이야기 역사 8
윤선자 지음 / 청아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즘 우리가 즐겨 듣고, 너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중에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삽입곡 <one day more>가 있잖아. 영어 가사로 제대로는 못 부르지만 흥얼거리는 그 노래. 우리 식구들 모두 좋아해서 자주 듣곤 하지. 그래서 너희들은 동화로 각색된 <레 미제라블>도 읽었지. 영화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보지는 못하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하지만, 아빠도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단다. <레 미제라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지만 말이야. 그리고 사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어진 져 수십 년 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배경이란다. 어찌했든 크게 보면 프랑스 대혁명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아빠는 생각해.

그렇게 너희들의 질문을 받다 보니, 오래 전에 사둔 책이 생각이 났단다. <이야기 프랑스사>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책도 생각이 났어. 그래서 이번에 연이어 읽었단다. 먼저 <이야기 프랑스사> 먼저 이야기 해 줄게. 한 나라의 오랜 역사를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해볼게.


1.

프랑스의 역사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 시대 때 만들어진 라스코 동굴 벽화란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작년에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에서도 나왔었잖아. 그러니 오늘은 생략. 짧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기원전 500년 경 철기 문화를 가진 켈트 족이 오늘날 프랑스 땅으로 이주를 해서 골(Gaule) 지방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 켈트 족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고 하는구나. 후에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지방에서 전쟁하면서 쓴 <갈리아 전쟁기>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갈리아 전쟁기>를 읽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구나.. 슬픈 기억력이로구나.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어원은 오래 전에 그 지역이 거주하던 파구스 부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구나.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시기에는 프랑스 땅은 갈리아로 불렀는데, 로마의 속주였지. 그 당시에 로마식 건물들이 많이 지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도 있대. 로마의 속주로 있을 때, 가끔 켈트 족이 항전을 했지만 로마의 대군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지. 당시 프랑스 땅은 로마에서 파견된 속주의 총독에 의해 관리가 되었고, 로마의 유화 통치에 의해 골 지방의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성격을 띠었다고 했어.

종교도 골 지방의 토속 종교인 드루이드교와 로마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가 1세기경에 기독교가 유입되기 시작했다고 했어. 3세기 이후에는 게르만 족 중에 프랑크족과 알라만 족이 자주 침략해 왔다고 했어. 골 출신의 장군이 그들을 무찔렀는데, 그렇게 게르만 족과 전투를 통해 힘을 얻은 포스툄이라는 사람이 골 제국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이내 로마에 다시 병합되었다고 했어.

4세기에는 훈족이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프랑스 땅 쪽으로 이동해 왔단다. 이때를 게르만족 대이동이라고 불렀어. 이 때 로마의 국력은 많이 쇠퇴해서 게르만족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어그래서 게르만족의 왕국들이 프랑스 땅에 나라를 세웠어. 이때 프랑스 북부 지역에 클로비스라는 사람이 프랑크 왕국을 세웠단다. 프랑크 왕국은 여러 왕조들이 바뀌면서 이어졌는데 그런 왕조 들 중에 유명한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가 있단다. 이 때는 이미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가 나뉘어져 있던 시기였는데,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의 성상 금지 조치에 반대하면서 교황과 결탁하여 동로마와 적대관계를 갖기도 했어. 이 부분에 대한 내용도 얼마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에서 나왔던 내용인 것 같구나.

카롤링거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은 샤를마뉴 대제였단다. 왕인데, 대제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나중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는 카롤루스이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로 부르기도 해. 그가 왕위에 올랐던 것은 768년부터 814년까지였단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경제적으로 도량형을 통일을 하고 화폐도 체계를 갖추었다고 했어. 또한 문예도 부흥시켜 이 때는 카롤루스 르네상스하고 부르기도 한단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부흥은 그가 죽고 나서 내분으로 분열이 되었다는 거야.


2.

그렇게 내분된 프랑크 제국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어. 이슬람 민족인 사라센 족,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노르만 족들이 침입했어. 그로 인해 나라는 더욱 분열이 되었고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공국이라고 부르는 여러 봉건주의 국가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백작이니, 공작이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 직함들이 바로 봉건 국가들의 지배자 직함이었단다.

===================

(79)

그 과정에서 그들은 백작이라고 불렸고, 그들이 소유한 영지는 백작령이라고 불렸다. 몇 개의 백작령을 합한 대영주들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후작 혹은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여러 개의 백작령과 공작령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프랑스 동부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루아르 강 북부에는 프랑드르 공국이, 서부에는 로베르 르 포르 공국이 있었고, 이 두 개의 공국 사이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노르만족에게 양도한 노르망디 공국이 있었다. 이런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과 공작들은 상위 군주로서 왕을 섬기긴 했지만, 각자 가지의 영역을 다스리는 독립된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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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왕도 봉건 영주들이 번갈아 가면서 했다고 했어. 그러다가 위그 카페 왕조가 세습을 했다고 하더구나. 이 당시 왕의 권력은 무척 작아서 왕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했대. 봉건 사회는 세 개의 신분이 뚜렷했어. 성직자, 기사, 농노. 보통 기사들은 말 타고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텐데, 엘리트 지배 집단을 기사로 보면 된단다. 국왕부터 평기사까지 모두 기사 계급이라고 보면 된단다. 농노는 영주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주로 농사 지내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신체의 자유가 없었어. 영주가 다스리는 경제 생활의 기본 단위인 장원 안에서 생활했단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고, 땅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십일조로 인해 재력도 컸다고 하는구나. 성직자들에 의해 당시 사회가 통제가 되었고, 학문, 문화 등이 이루어졌다고 했어. 성직자 중의 최고는 교황이었고, 그 밑에 대주교, 주교, 교구사제, 신부, 수도사 등이 있었어. 신부는 농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해. 그래서 신부는 농노 출신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성직자의 권한이 크고 재력도 크다 보니, 영주와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많아졌대.

11세기에는 농업 기술이 진보하여 생산량이 늘었고, 그런 생산량이 늘어보니 남아 도는 생산물들이 생겼고, 그걸 팔아야 하니 상업도 발달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성채 밖에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살게 되었어. 나중에 그들은 중세 도시 시민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단다. 그들은 길드를 만들어 자신들의 조직을 보호하기 했지만 봉건 사회에서 그들도 영주의 소속이어야 했어. 상인들은 영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코뮌 운동을 벌이기도 했단다.

상징뿐이던 왕이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카페 왕족이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단다. 뚱뚱보로 불리던 루이 6세부터 왕권 강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존엄왕이라 불리게 되는 필립 2(필립 오퀴스트)에 와서 왕권이 많이 강해졌단다. 영국 존 1세가 소영주의 약혼녀를 빼앗는 횡포를 저질렀는데, 이를 이유로 필립 2세는 존 1세가 차지하고 있던 로르망 지역을 몰수했고, 1세는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단다. 예로부터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권력이 세졌는데, 필립 2세도 존 1세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권이 세졌단다. 그리고 국민들도 전쟁의 승리에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국민 감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대. 그런 힘을 바탕으로 필립 2세는 남프랑스 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대. 필립 2세의 아들 루이 8세는 금방 죽고 루이 9세도 십자군 원정에서 죽고 말았어.

필립 3세를 거쳐 필립 4필립 4세는 교황과 대립을 세우기도 했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나라들의 역사를 알아 보다 보면 기독교의 역사도 같이 봐야 하는 것 같더구나. 프랑스의 역사도 마찬가지당시 기독교 개혁이 있었다고 했어. 왜냐하면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했잖아. 그렇다 보니 부정부패가 많아졌다고 했어. 그래서 내부로부터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 유명하다고 하는구나. 클뤼니 수도원은 영주로부터 독립을 하고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너무 근본 원칙을 따져서 종교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를 했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에 이단 척결의 목적으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8차에 이어진 십자군 원정이 결국 실패로 끝이 나자, 교황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에 반해 왕권이 강화되었단다.

12세기 들어서면서 교회는 이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마녀 사냥도 이때 생긴 것이란다. 유대인도 이단으로 취급되어 이때부터 유럽사회에서 유대인을 멸시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 같아. 이때 유대인을 이단을 취급한 이유는 예수를 죽인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유였다고 하는구나.


3.

긴 역사 이야기를 흐름을 쭉 이어서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아빠가 그럴 능력은 없고,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해해줘. 중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기…. 이 시기는 흉작이 이어지면서 경제도 위축이 되었대. 그리고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어 프랑스도 많은 피해를 입었대..

그리고 1337년부터 1452년까지 백년전쟁이 있었어. 이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 프랑스의 일부 제후들이 영국 편을 들기도 했대. 프랑스의 왕조인 카페 왕조의 왕 샤를 4세가 왕위 계승할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자, 필립 4세의 외손자가 다음 왕위 계승자 1순위가 되었는데, 그 사람은 에드워드 3세라는 영국인이었어. 프랑스 왕을 영국인에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필립 4세의 사촌인 필립 드 발루아를 왕으로 세웠어. 그러자 에드워드 3세는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했어. 그 외에도 영국의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대.

백년전쟁 와중에 프랑스 내의 왕들끼리의 전쟁, 그러니까 내전도 함께 벌어졌대.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는 등 프랑스는 밀리는 형상이었는데 그때 나타난 영웅이 그 유명한 잔다르크였단다.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완전히 분리가 되었고,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대. 이것은 유럽의 다른 나에도 영향을 주어 국경선이 확실해졌고, 그로 인해 민족성이 강해졌다고 했어.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 국가 재건에 힘썼어. 그리고 국력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군사력 증강에 노력을 하였어. 15세기 중반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서히 다시 경제를 회복되었다고 했어. 경제가 회복된다고 했지만, 일부 계층, 즉 상인(부르주아)들의 이익만 많이 커졌어. 돈이 많아지면 권력도 생기는 법.. 상인들이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프랑스는 해외 정벌에 나서서 이탈리아와 전쟁을 했고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탐내기도 했어.


4.

루이 13세는 아버지 앙리 4세가 살해당하면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 모후라는 사람이 섭정을 했는데,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라 프랑스 국민들이 싫어했어.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모후 일가를 몰아냈어.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에서 국가 업무를 일임했단다. (1624) 리슐리외는 무엇보다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단다. 리슐리외가 죽고 마자랭이 후임이 되어 나랏일을 했단다. 루이 13세도 오래 못살고 루이 14세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단다. 마자랭이 계속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국민, 고등법원 할 것 없이 마자랭을 싫어했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서 루이 14세는 한때 피난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태양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최고권력자가 되었단다.

루이 14세는 어른이 되고 재상 없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어.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 말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단다. 강력한 왕권과 절대 왕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통해 국토를 확장해 나갔지만, 그런 전쟁으로 나라 빚은 늘어만 갔지.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을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이 많았는데, 프랑스도 그 영향권에 있었어.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이 늘었는데,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어. 그들은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공화주의를 주장하다 보니 절대 왕정을 주장하던 루이 14세에게 밉보이게 되어서 탄압을 받았단다. 이 시기 문화적인 측면을 보면, 15세기 후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문화 부흥이 일어났고 건축이 발달하였다고 했어. 베르사유 궁전도 이때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어 책의 보급이 늘어났고, 상인들도 쉽게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면서 그들의 지적 수준이 올라갔어.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은 살기가 어려웠단다. 경제라는 것이 오늘날도 그렇지만 호황과 불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 무역이 활발해지면 다시 회복이 되었단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층이 많이 성장하였고, 그들은 정치적 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적 지적 활동에도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부르주아는 전통적인 귀족들과 대립하기 시작했어.

태양왕 루이 14세가 77세에 사망을 했는데, 왕위를 이어받을 장남, 장손이 다 죽고 증손자뿐이었어. 그래서 2살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단다.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는 루이 14세가 진행했던 정책들은 모두 뒤집어 버렸고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시켰어. 아무래도 자신이 귀족이니까 그랬겠지. 성년이 된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능력이 없었고 부인에게 휘둘리던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루이 15세가 죽고 난 다음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단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공주였는데, 마리 또한 왕비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어.

루이 14세부터 전쟁으로 인한 나라 빚은 점점 커져만 갔고, 대흉작까지 발생하여 민심을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단다. 한편, 시민 의식들은 많이 올라가 있었지. 루이 14세 이후 계몽사상가들 중심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어. 이때 유명한 계몽사상가들로는 몽케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있었단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유주의 사상의 성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


5.

프랑스의 신분제도는 성직자인 1신분, 귀족인 2신분, 나머지 사람들은 3신분이었어. 국민 대다수는 3신분이었고, 새로 급부상한 부르주아도 3신분이었어. 그런데 나라 정책을 결정할 때는 항상 각 신분별 동일한 권한이 주어지니, 기득권 세력인 1신분과 2신분이 같은 결정을 하면 늘 결과는 2:1이란다. 그래서 3신분은 그들 만의 의회인 국민의회를 정식으로 출범했단다. 당연히 루이 16세는 반대를 했지. 하지만, 민병대까지 조직한 국민회의는 절대 다수의 지지를 많으며 무시 못할 힘을 갖게 되었어. 그리고 그들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되었단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어.

프랑스 대혁명. 너희들도 학교 다니면서 많이 보게 될 1789년이었단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국민의 권리 선언을 했단다. 프랑스 대혁명은 아빠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읽은 <프랑스 대혁명>의 독서 편지 때 자세히 이야기할게. 오늘은 이미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썼으니 프랑스 대혁명 부분은 더욱 짧게 이야기하마.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을 들은 유럽 국가들이 연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하여 프랑스는 먼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했어. 한편 루이 16세는 식구들과 함께 몰래 도망 가려가다가 잡혀 오기도 했단다. 그리고 끝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어. 대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국민의회 내부에서는 갈등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단다. 이 공포정치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공포정치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럽고, 서로 반대파를 못 죽여 안달이었단다. 이런 혼란이 계속 될 때는 군사력을 가진 이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데, 이 때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어. 유럽 전쟁에서 연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게 되었단다. 나폴레옹 전쟁 영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사라진 황제라는 호칭을 다시 자신에게 붙였단다.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민족주의가 성장한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단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가 프러시아에 대패하였고, 이후 모든 유럽국가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섬에 귀양을 가게 되었단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파리에 진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백일도 넘기지 못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권력을 잃게 된단다. 이를 가리켜 백일천하라고들 한단다.  나톨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끌려가서 18215얼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시대도 끝이 났단다.


6.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후 루이 18세가 왕정복고를 외치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프랑스 시민들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후 민중봉기와 혁명이 반복해서 일어나다가 1848년 드디어 공화제 헌법이 제정이 되었고,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대통령이 루이 보나파르트라고 나폴레옹의 조카였단다.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아 대통령이 된 것인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반동정치를 일삼았어.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보통 선거를 폐지하는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고 있었어. 그러더니 다시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하면서 나폴레옹 3세라고 불렀단다. 러시아와 벌인 크림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막강한 군사력도 가지게 되었어.

파리 도시 계획을 세워 파리를 정비하기도 했단다. 그의 집권 후반기에 경제가 불안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기가 하락되었어. 그리고 프러시아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단다. 이때 의회는 다시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이 되었단다. 격변의 시기인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건축물이 세워졌는데, 구스타프 에펠이라는 사람이 세운 그 유명한 에펠탑이란다.

프랑스 사회는 제국주의라는 세계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 건설에 힘을 썼어. 제국주의 시대에는 각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라 내 편, 네 편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였단다.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는 1차세계대전으로 폭발했어. 연합국이 승리를 했지만 승전국들도 피해는 엄청났단다.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면서 유럽은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했어.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어. 연이어 일어난 2차세계대전으로 전세계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어. 1940년 독일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친히틀러 세력인 페탱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어. 독일과 친독일 정부를 상대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한 이들이 있었고 레지스탕스들의 지도자는 드골이라는 사람이었단다. 드골은 임시 정부를 만들었고, 그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대통령이 되기도 했단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와 함께 나라를 안정을 찾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아빠가 이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그 메모를 바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다시 읽어보면 역사의 흐름이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하는데, 마치 양자가 점프하는 것처럼 띄엄띄엄인 것 같구나. 늘 그렇듯 이해해주길 바란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서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또 이야기해보자꾸나. 그럼, 안녕


PS:

책의 첫 문장 : 프랑스 지역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80만 년에서 기원전 1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책의 끝 문장 : 그리고 5월 혁명을 겪은 이후의 프랑스 문화계는 또 다른 변화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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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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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 되던 해였단다. 100년이라고 하면 매우 기념할 만한 시간인데, 아빠 기억으로는 그리 많은 행사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아빠가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2019 4 11일 임시정부가 세워진 날을 즈음하여, 각종 매체에서 100주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뿐이지,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2018년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서는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임시정부 26년의 여정을 따라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고 하는구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그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책이 바로 <임정로드 4000 km>인데, 그 책을 이번에 읽었단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례길이 있는데, 이 책의 지은이들은 임시정부가 행적을 따라 가는 임정로드도 순례길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이야기했단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광복을 할 때는 충칭(중경)에 있었다는 내용만 알고 있지, 중간에 여러 곳을 거친 것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세세한 곳들을 알게 되어 좋았단다.


1.

이 다큐에 참석했던 이들이 임정로드를 모두 다녀오는데 20 21일이 걸렸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짧게 다녀올 수 있는 코스도 알려주고 있단다. 만일 시간이 넉넉해서 풀코스를 간다면, 이 책을 들고 지은이들이 다녔던 길을 그대로 가면 좋은 가이드가 될 것 같구나. 임시정부의 역사적인 장소와 사건에 대한 것만 이야기하는 주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주의해야 할 점과 숙박, 교통에 대한 정보도 주고 있는 좋은 여행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단다.

서울을 출발하여, 상하이, 자싱, 항정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충칭으로  이어지는 긴 여행길이었단다. 상하이로 출발하기 전에, 서울의 임시정부 관련 장소 먼저 소개해주었단다.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후 국내에 들어와서 머물렀던 경교장을 소개해주었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유해가 계신 효창공원도 소개해주었단다. 그분들이 효창공원에 그곳에 계셨구나, 이번에 알게 되었단다. 외국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그곳으로 모셔온 것도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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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김구 선생이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당시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단장 박열 선생을 통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서 국내로 모셔오게 한 것이다. 의거 이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긴구 선생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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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 공원은 이렇게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구나. 뿐만 아니라 효창운동장이 효창 공원 앞에 떡 하니 있어 가로 막고 있다고 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승만이 그런 일을 벌인 것이란다. 백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한 짓이 아닌가 싶구나. 그 뒤의 박정희도 만만치 않은 짓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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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효창공원 입구부터 거대한 축구장(효창운동장)이 있습니다.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 남쪽을 막고 있습니다. 효창운동장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9 <2회 아세아축구선구권대회> 개최를 구실로 독립운동가의 표를 이장하고, 운동장 건설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효창원에 경찰을 배치해서 시민들의 참배를 막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만행이 이 전 대통령이 쫓겨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1969, 박정희 정권은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이 능선으로 이어진 머리 쪽에 느닷없이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만들어진 건데, 이 역시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의 묘역과 삼 의사 묘역 머리 쪽에 버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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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9 4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생겨났단다.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하는구나. 상하이의 서금이로라는 거리에서 생겼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몰라서 지은이들도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하더구나. 정확한 위치는 아니더라도,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져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 하나 없다고 했어. 이곳뿐만 아니라, 지은이들이 가는 임시정부 유적지 대부분이 표지석이 없어서 어디가 어딘지 정확히 모른다고 했어. 아무튼 알아두자꾸나.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곳은 서금이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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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곳 서금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장소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 명명된 국가가 만들어진 곳이며,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이 정립된 곳이다. 우리 헌법이 세계만방에 공표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반복되는 건국절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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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련된 분들을 소개해주었는데, 아빠가 알고 있는 분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던 분들도 많았단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예관 신규식이라는 분이란다. 나라가 망하고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살아 남으신 다음, 임시정부에 온 인생을 희생하신 분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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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선생(예관 신규식)의 집을 나오니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나 봅니다.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고,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까지 맡으셨던 분의 거처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운 좋게 선생의 집에 거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 안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지만, 선생의 거주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번째, 두 번째 청사처럼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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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선생의 홍커우 의거와 도쿄에서 이봉창 선생의 의거 이후, 그 배후로 지목된 김구 선생은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피신한 곳이 중국 자싱이라는 곳이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피신하고 있었는데, 그 때 도움을 주신 분이 중국인 주푸청이라는 분이란다.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임시 정부 요인들을 2년 동안 도와 주신 것이란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그 일을 주푸청과 그의 식구들이 해 주신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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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한번 상상해보자. 이름만 알던 지인에게 무려 현상금 200억 원이 걸렸다. 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다. 결코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남남에 가깝다. 만에 하나 그 사람을 숨겼다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내 몸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런데 지인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숨겨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혹자는 거절에 그치기는커녕 현상금 200억 원에 눈이 멀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 1932, 중국인 주푸청 선생에게 찾아온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200억 유혹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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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백범 김구 선생의 자싱 피신 생활에 대한 내용은 좀 알고 있단다. 왜냐하면 오래 전이긴 하지만, 중국 작가 하련생님의 소설 <선월>을 읽었는데, 그 소설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자싱에서의 생활을 그린 것이었거든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구나. 너희들도 나중에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어.


3.

일제 36년의 기억은 우리에게 아픈 기억들이 너무 많단다. 그 중에 가장 아픈 기억은 위안부들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구나. 이번 임정로드 길에도 위안부들의 유적지가 있다고 하는구나. 난징에 있는 리시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이 바로 그것이란다. 리지샹 위안소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있던 곳이었단다. 그곳이 위안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확인된 것이, 위안부였던 고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 때문이었다는구나. 중국에서는 과거 아픈 기억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을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진열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에서 우리나라 위안부들을 위한 건물이 있다는 것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구나. 그리고 진열관 광장에는 동상이 있는데, 위안부 시절 임신했던 고 박영심 할머니의 동상이 있다고 하는구나. 고맙긴 한데, 우리나라는 뭐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부끄럽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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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2015 12 1, 정식 개관했다. 위안소를 주제로 한 전시관 중 압도적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2003 11 21, 박 할머니가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증언하자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난징 중심부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3,000m^2 규모로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진열관 가운데에는 마당이 있는데, 한쪽 벽면이 70명의 할머니 얼굴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70명 할머니 중 다수가 한국 출신이다. 광장 가운데 박영심 할머니가 위안부 시절 임신했을 당시 모습이 동상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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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란 분이 있단다. 이 분도 아빠가 좀 알고 있단다. 예전에 정정화님께서 직접 쓰신 <장강일기>를 읽은 적이 있거든..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이후, 얼마 안 있어 여자 혼자의 몸으로 상하이까지 가시고,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신 분이란다. 임시정부 요원 중에 그 분의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몇 번이라 국내에 왔다 갔다 하시고,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단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광복 후 그도 나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특히 백범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남편 김의한이 납북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고 하는구나. ,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정정화님께서 쓰신 <장강일기>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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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인사들이 그대로 미 군정에 부역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러난 일제의 자리를 미 군정이 채운 상황, 한평생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정정화 여사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서울에 자리를 잡았지만, 믿고 의지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9 6 26일 암살당했다. 이후에 시련의 연속,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40년 지기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남편 김의한이 납북되었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 여사는 부역죄로 끌려가 투옥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 여사는 1991년 사망할 때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고 조용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 이어진 독재정권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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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밖에 많은 분들과 유적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한 분만 더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를 해야겠구나. 아빠도 처음 들어보는 분인데 조명하 선생님이라는 분이야. 그분은 익숙지 않은 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키신 분이란다. 꼭 기억을 해야 할 또 한 분의 독립 의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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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조명하 선생, 아마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 조명하 의사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다. 마치 무협지 주인공처럼, 혼자 무공(?)을 연마했다. 단도 한 자루를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그것도 당시 히로히토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없애 버린 것이다. 1928 5 14, 대만 타이중에서 의거한 스물네 살 청년 조명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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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가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 같다는 것이야. 일단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곳이 많았고, 관리되고 있는 곳도 다녀간 사람들이 너무 적단다. 그렇게 잊혀지고 찾는 이가 없고, 시간이 흐르면 그곳은 사라질 거야.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임시 정부. 그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유적지들을 좀 잘 관리했으면 좋겠구나. 임시정부 요원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마움을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희들도 그러길 바래.

임정로드 4000km 말고 약산로드 7000km도 있다고 하는데, 그 책도 한번 보고 싶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임정 프로젝트>을 진행하며 가장 자주 내뱉었던 말이 있다. “헛헛하다.”

책의 끝 문장 :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은 움직임들이 생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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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2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봐야지 하고 깜박 잊고 있었네요. 약산로드와 함께 다시 바구니에 넣어놓습니다. ^^

bookholic 2021-03-22 08:42   좋아요 0 | URL
독립 운동 유적지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책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즐독하시고, 즐거운 한 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3 - 연산군에서 선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3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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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시리즈 세 번째 책을 읽었단다.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형식을 그대로 책으로 엮어서 읽기 편한 시리즈란다. 아빠가 어렸을 때 역사를 안 좋아했고, 나중에 커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잖아.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으면 했는데, 아빠의 아이들이 맞는 것 같구나. 슬쩍 역사 관련 책들을 사다 두었는데, 안 읽는 것 같구나.

아빠가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도 안 되고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알려주는 유튜브를 찾아봐야 하나그래도, 지루하더라도, 역사책 읽고 나서 아빠는 너희들에게 역사책 이야기를 해보련다.

이번 역사저널 그날 3권은 조선시대 연산군부터 선조시대까지의 이야기란다. 연산군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통틀어 최고의 폭군이라고 할 수 있지. 너희들도 이제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 알게 될 거야. 무오사화, 갑사사화로 많은 신하들을 내치고, 직언을 하면 죽여버리니, 누가 왕에게 제대로 된 조언이나 충언을 하겠는가. 듣기 좋은 말만 하겠지. 직언을 하는 신하가 없고,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보니, 보다 못한 내관 김처선이 직언을 했는데, 그 또한 살아남을 리 있겠니,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 연산군은 김처선을 죽이고 그의 이름인 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는구나. 허허, 그 흔한 성씨인 을 빼 준 배려에 감사해야 하나.

그와 반대로 김자원이라는 내관은 온갖 감언이설을 하여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온갖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연산군의 영혼의 파트너라고 하면 장녹수라는, 역시 악명 높은 이가 있단다. 궁궐 안에 모든 신하들이 그를 멀리하고, 가끔 보면 듣기 좋은 말만 하고쿠데타가 안 일어나면 이상한 일이었단다. 신하들이 합심하여 쿠데타, 그러니까 반정을 일으켰는데, 너무 쉽게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단다. 연산군의 측근과 간신들, 그리고 장녹수는 처형 당하고, 연산군은 강화도 위쪽 교동도로 유배를 보냈단다. 유배를 간 지 두 달 만에 역질로 죽고 말았단다. 그의 나이 새파란 서른 하나.


1.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을 역사적으로 중종반정이라고 한단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이 중종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정작 중종은 반정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구나. 신하들이 연산군을 몰아내서 중종을 왕위에 얹혀 놓은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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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중종반정은 명분은 있었으나, 준비는 부족했던 사건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준비된 왕이 없었고, 중종 스스로도 왕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존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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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른다고 모두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부인이었던 단경왕후는 폐위당했단다. 단경왕후가 연산군의 측근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유근의 딸이기 때문이었어. 어떤 심정이었을까. 왕이 된 자신의 아내를 폐위시키는데 아무 말도 못한 왕. 다음 부인도 신하들이 정해주었어. 장경왕후가 왕비가 되었어. 장경왕후는 8년이 지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장경왕후는 산후열로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불쌍한 중종그 이후 다시 왕비를 뽑았는데, 이번에는 간택으로 왕비를 뽑았다고 하는구나. 사극을 보다 보면 간혹 왕비 후보를 뽑아 고르는 간택이 가끔 나오는데, 이 때가 조선시대 최초의 간택이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간택된 왕비가 문정왕후 윤씨란다. 문정왕후는 나중에 명종때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독차지하여 여인천하를 이룬 인물로 유명하단다.

….

앞서 이야기했지만 준비도 없이 왕이 된 중종그래도 권력을 잡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겠지. 주위에는 온갖 공신들의 압력에 기를 펴지 못할 때 그가 손잡은 이가 신진세력의 대표주자 조광조였단다. 아빠도 예전에 조광조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조광조라는 인물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을 잘못 만나서 안타까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단다.

중종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을 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조광조에 변심하고 훈구파의 모함까지 더해져서 조광조를 반역의 누명을 씌어 죽여 버렸단다. 조광조가 너무 왕을 다그치면서 개혁을 주장해서 중종이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원래 종중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구나. 반정공신을 몰아내기 위해 조광조를 이용했고, 조광조를 몰아내려고 훈구파의 심정과 왕실의 경빈 박씨를 이용했고, 심정과 경빈 박씨를 몰아내기 위해 김안로를 이용하고, 김안로를 몰아내기 위해 양연이라는 사람을 몰아내고 말이야. 어떤 이가 우스개로 중종의 법칙이라는 말까지 했단다. 중종반정으로 준비 안된 상태로 왕위에 올라서, 왕 자리를 존속하기 위한 그만의 비법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는 조선 왕들 중에 다섯째로 오랜 기간인 38년 동안 왕을 했단다.


2.

이번 시대에 몇몇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먼저,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 임꺽정이 유명해진 것은 아마 홍명희의 소설 때문일 거야. 그 이후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말이야.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왜 의적이 되었을까. 당시 평민과 천민에 대한 수탈이 무척 심했단다.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고 빚이 늘어나고 시절이었어. 조정에서는 알아봐주지도 않고그의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조선 민중의 힘을 볼 수 있었단다.

이번에는 양반 한 분을 이야기해줄게. 국어책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이자 문인으로 알려진 정철. 예전에 이미 다른 책들에서 정철의 본모습을 알게 된 다음부터 그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안 좋아져서, 정철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이 책에서도 노회한 정치인으로써 정철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면서 관련된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정철이었고, 무려 3~4년 동안 이어졌으며, 죽은 사람만 1000여명에 다다른다고 하는구나. 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란다. 정철이 속해 있던 서인이 권력을 잡는데 정여립을 이용했던 것이고, 이 사건의 배후에는 당시 왕이었던 선조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정치인으로써 정철은돌직구를 날리기도 하는 신조 있는 정치인이면서, 자신의 세력을 위해 감투를 쓰고 무리한 수사까지 하는 인물이었단다. 앞서 이야기한 정여립 사건도 이런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고, 진실도 밝혀내지 못하고 반대파만 신나게 처단한 사건이었던 거야. 그렇다고 그의 말년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단다. 기축옥사로 서인들과 함께 권력을 잡았지만, 선조의 세자 책봉 당시 선조와 다른 의견을 내 놓았다가, 좌의정 딱지 떼이고 좌천된 뒤 유배까지 떠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 뒤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그 또한 허망한 인생이로구나. 문학적 재능으로 글이나 열심히 썼다면 더 좋았을 것을

….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있단다. 이 사람은 위인은 아니야. 그런데 그가 남긴 독특한 기록이 있어 소개되었단다. 손자의 육아일기 <양아록>을 쓴 거야. 예나 지금이나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행복하겠니. 그런 마음을 갓난아기 때부터 손자에 대한 글을 쓴 이문건. 나중에 십대가 된 뒤에는 손자와 갈등을 담기도 했는데, 역시 기록이라는 것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또다른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람 한 명 더 소개해 줄게. 조주삼이라는 사람이란다. 이 사람은 83살에 과거 시험을 붙었다고 하는구나. 과거 시험이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83살이라니그의 불굴의 의지와 83살에 과거에 붙었을 당시 그의 느낌을 상상해 보았단다. 얼마나 기쁘고 짜릿했을까. 조주삼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시대 과거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시험제도가 상당히 복잡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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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단순 명쾌하게 조선의 과거 시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문과는 크게 대과와 소과로 나뉩니다. 소과는 다시 진사시와 생원시로 나뉘는데요. 진사시와 생원시에는 초시와 복시가 있고, 합격자는 진사시, 생원시 각각 100명씩 총 200명입니다. 이렇게 소과에 합격하고 나면 대과를 볼 수 있습니다. 대과에는 초시, 복시, 전시 3단계가 있는데요. 초시와 복시는 각각 초장과 중장, 종장 3단계의 시험을 보게 됩니다.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을 하고, 그중 33명을 복시에서 뽑습니다. 여기서 뽑힌 33명은 마지막 절차인 전시, 즉 왕 앞에서 보는 시험을 통해 최종 순위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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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과에 합격을 하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대과에 시험 보게 되는데 대과는 오늘날 5급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성균관은 한 달에 2일 휴일을 주곤 하는데 그때 유생들은 반촌이라는 곳에서 놀곤 했는데, 그 반촌이 오늘날 대학로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니대학로가 현재 그 자리에 생긴 이유가 반촌이었나 싶더구나.

마지막으로 승정원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간단히 이야기하고 마칠게. 승정원일기는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조선 초부터 승정원에서 기록한 일지란다. 조선 초의 기록은 전쟁으로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인조 때부터의 기록인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는구나. 3243권으로 되어 있고, 24250여만 글자로 되어 있대. 번역을 시작한지 2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 진척율이 10%라고 하는구나. 인력이 충원되더라도 앞으로 100년은 넘게 걸린다고 하니, 대단한 기록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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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한가지만 더 이야기할게. 나중에 너희들이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육십갑자로 된 역사적 사건을 많이 접하게 될 거야. 그때 대략적인 년도를 추측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아빠도 꼭 기억하고 있어야겠구나. 10간이고 숫자가 10개이니까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내용인데 미처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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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연도의 끝자리 수 쉽게 외우는 법

10

연도

4

5

6

7

8

9

0

1

2

3

*10간의 ()’으로 시작되는 해는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처럼 끝자리 수가 4이다. ‘’,  도 이렇게 외우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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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잠언의 한 구절은 중요한 진실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끝 문장 : <승정원일기>가 완역되면 그런 인상도 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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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2-21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철. 아이들이 관동별곡땜에 치를 떨지요 ㅎㅎ 양아록은 만화책으로도 나와있는데 할아버지의 손주에 대한 사랑과 교육열은 시대를 초월하는것 같아요 아이들이 만화다 보니 재미있게 읽더군요 *^^*

bookholic 2021-02-21 13:58   좋아요 1 | URL
정철이 문학에만 전념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 만화로 된 양아록은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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