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이창남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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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캐드펠 수사 시리즈 5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이야기란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했으니, 곧바로 책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그 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때는 1139 10. 수도원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풀크 레이널드 수사가 병원장인 세인트자일스 병원이 있고, 이 곳에는 나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단다. 이번 시리즈의 제목을 봐서는 세인트자일스 병원과 관련된 내용임을 예측할 수 있었단다. 이번에 수도원에서 혼례가 진행하게 되어 캐드펠 수사는 이 혼례를 준비하고 있었어. 신랑은 영주인 휴언 드 돔빌 남작이라는 사람인데, 혼일 적령기가 한참 지난, 거의 예순에 가까운 그런 사람이었어. 신랑 일행이 먼저 수도원으로 오고 있었는데, 이 행렬을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했는데, 그 중에는 세인트자일스 병원의 나환자들도 있었단다. 괴팍한 성격의 돔빌 남작은 그들을 향해 채찍을 날렸어. 다들 그 채찍을 피해 도망갔는데, 일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라자루스라는 사람이 채찍을 맞았어. 이에 캐드펠 수사의 조수 중 한 명인 마크 수사가 나서서 라자루스를 보호해 주어 더 상 맞지 않았단다.

자신의 결혼식날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니신랑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잘 알겠지. 곧이어 신부 행렬도 이어졌는데, 신부는 이베타 드 마사르라는 열여덟 살의 어린 신부였단다. 열여덟 살밖에 안된 아가씨가 예순 가까운 신랑과 결혼을 한다? 이것은 평범한 결혼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거야. 가뜩이나 신부의 얼굴은 무척 어두워 보였어. 이베타는 피카르 부부의 조카였는데,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 결혼은 피카르 부부가 자신의 조카를 갑부인 돔빌 남작과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이란다. 돔빌 남작은 자손이 없었고, 사이먼이라는 유일한 조카가 있을 뿐이었단다. 이런 설정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있으니 이베타를 사랑하는 조슬린이라는 사람이었어. ,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

 

1.

기도회 때 이베타는 몰래 빠져나가 조슬린을 만났어. 수도원에서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허브약제소에서 만났는데, 감기약을 만들러 온 캐드펠 수사와 마주쳤단다. 그들은 서로 놀라긴 했는데 곧바로 피카르 부인이 이베타를 찾으러 왔어. 그녀는 세 사람을 보고 피카르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캐드펠 수사의 기지로 이 난처한 상황을 잘 넘겼단다. 두 사람은 각자 따로 약을 구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라고 했어. 역시 캐드펠 수사는 젊은이들의 사랑에 관대하고 잘 연결해주는 큐피드와 같은 사람이야. 이베타는 피카르 부인과 돌아가고 조슬린은 약제소에 남아서 캐드펠 수사에게 이베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이베타는 고아가 된 이후 삼촌 부부가 키우다가 예상한 것처럼 돔빌로부터 돈을 받고 그와 결혼을 시키는 것이라고 했어. 이베타를 사랑하는 조슬린에게 있어 그들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어서인지 캐드펠 수사에게 이야기하다가 화를 내며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

결혼식날이 되었어. 조슬린은 해고당했다고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이베타의 삼촌인 고드프리드 피카르가 거짓말로 조슬린을 고발하여 해고당한 것을 알게 된 조슬린은 피카르를 찾아갔고 둘은 고성을 오가며 다투었단다. 그들의 난동으로 수도원장과 수사들도 그들에게 모여들었고, 수도원장 라둘푸스가 중재를 하려고 했어. 그때 돔빌 남작과 함께 있던 길버트 프레스코트 행정관이 와서 혼례용 귀금속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용의자로 조슬린을 지목했단다. 조슬린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의 소지품에서 사라진 목걸이가 나왔어.

누군가의 음모가 너무 뻔해 보였단다. 결국 조슬린은 끌려가게 되었고, 방심한 틈을 나서 도망쳤단다. 돔빌 남작의 유일한 조카인 사이먼이 있었다고 했잖아. 그 사이먼이 조슬린과 친했나봐. 사이먼이 조슬린을 도와주어 건초 창고에 숨어 있었어. 그러다가 조슬린은 이베타를 구출해서 도망갈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나환자 라자루스를 만났는데, 라자루스가 도와주어 밤새 그와 숨어 있을 수 있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나환자로 위장을 했단다.

결혼식날 신랑 돔빌 남작이 나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시체가 된 돔빌을 발견했단다. 마지막 행적은 전날 조카 사이먼에게 이야기를 하고 말 타고 산책을 나간 것이 마지막이었어. 캐드펠 수사도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단서들을 찾아냈단다. 돔빌 남작은 이슬이 내린 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였어. 그러니까 밤새 다른 곳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 것이지. 나무 양쪽에 잘 보이지 않는 밧줄을 매달아 놓았는데 이 밧줄에 목이 걸려 말에서 떨어졌고, 이후 범인은 돔빌의 목을 줄라 죽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어. 엄연한 살인사건이었단다.

뒤늦게 행정장관도 와서 조사를 했는데, 행정장관은 곧바로 조슬린을 용의자로 지목했단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정황으로만 봐도 조슬린이 첫번째 용의자라고 생각했을 거야. 반면 캐드펠은 사실을 기반으로 수사를 했어. 돔빌 모자에 꽂힌 희귀한 허브를 발견하여 돔빌이 밤에 갔던 곳을 추적했단다. 그 허브가 있는 곳을 찾아갔더니 돔빌 소유의 오두막집이 있었어. 하지만 그곳에는 집사와 집사의 어머니만 계셨는데, 집사가 이야기하길 돔빌은 4년 전에 오고 그 이후로는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했어. 그러나 캐드펠 수사는 그곳에서 돔빌의 흔적을 발견했어. 그러니까 어젯밤에 돔빌이 여기에 온 것이 확실하고 집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어. 더욱이 또 다른 사람의 흔적, 즉 어떤 여자의 향수 냄새를 맡았단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돔빌은 이곳에 와서 어떤 여자와 지냈던 거야.

 

2.

한편 조슬린은 라자루스와 함께 있으면서 이베타에게 연락하여 도망갈 궁리를 했단다. 책을 읽다 보니 라자루스와 조슬린은 남남이 아닌, 어떤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캐드펠 수사는 결국 돔빌이 만난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찾아갔어. 고드릭 포드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있는 어바이스라는 여자였어. 어바이스는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하면서도 돔빌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더구나. 돔빌이 여행이나 멀리 갈 때마다 비밀리에 함께 했었대. 어바이스는 그 역할을 꺼리지 않았어. 성격답게 돔빌의 죽음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제는 수녀로 살아가겠다고 했어.

어바이스를 만나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던 캐드펠 수사는 길 잃은 말 한 마리를 발견했어. 그 말을 쫓아가보니 피카르의 시신이 있었단다. 사람들을 데려 오려고 수도원에 왔더니, 조슬린이 행정장관의 무리에 쫓기다가 싸우고 있었단다. 조슬린은 병원에서 몰래 나와 수도원에 들어온 거야. 이베타를 만나 도망가려고 했던 것이지. 조슬린이 좀 성급한 성격인 것 같구나.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고 함께 도망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좀더 기다려서 때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젊은 혈기가 신중함을 내쫓았구나. 캐드펠 수사는 조슬린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슬린이 돔빌과 피카르를 죽인 범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 어바이스와 이야기를 해보니 돔빌이 어바이스와 함께 있던 시간에 이미 조슬린은 병원으로 도망가 있었고, 오늘은 캐드펠 수사의 조수인 마크 수사가 하루 종일 조슬린을 감시했기 때문에 피카르를 죽인 범인도 될 수 없었어.

조슬린과 행정장관의 무리의 싸움이 중지되자, 그제서야 캐드펠 수사는 피카르가 죽은 소식을 알렸단다. 그러자 피카르 부인은 슬픔에 분노를 하며, 갑자기 사이먼을 붙잡고 범인이라고 소리를 질렀단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는데, 피카르 부인은 사이먼과 피카르 사이에 있던 일을 이야기했어. 사이먼은 자신이 이베타와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피카르와 거래를 하려고 했다는 거야. 그리고 피카르에게 협박을 하다가 말다툼까지 했다는 거지. 사이먼은 사실 이베타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돔빌 남작도 죽였던 것이란다. 어바이스가 캐드펠 수사에게 이야기했던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도 사이먼이었고 명백한 증거도 찾았단다.

그렇게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을 일단락되었지만, 캐드펠 수사는 피카르의 진짜 범인은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어. 캐드펠 수사는 나환자 라자루스를 찾아갔단다. 그를 보자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던 거야. 이전 시리즈를 이야기하면서 캐드펠 수사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었다고 했잖아. 그때 예루살렘에서 활약하던 기마르 드 마사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라자루스였던 거야. 그는 포로로 잡힌 후 나병에 걸리고 만 거야. 나병에 걸려서 포로로 풀려난 이후로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던 거야. 그리고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손녀가 못된 후견인의 손에 키워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지. 그 손녀가 바로 이베타였던 거야. 그 전에도 알게 모르게 손녀를 지켜봐 주고 있었던 것이란다. 그리고 이베타가 사랑한 조슬린도 잘 보살펴 주었던 것이란다. 손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후견인을 제거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이 사건이 해결되고 라자루스는 마을에서 사라졌단다. 어디선가 거리를 두고 손녀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싶구나.

캐드펠 수사 시리즈 5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단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주인공인 캐드펠 수사의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되는구나.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기대해보자꾸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139 10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수도원 문지기실을 나선 캐드펠 수사는 자신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책의 끝 문장: 분명한 게 있다면 이제 그가 영원히 슈루즈베리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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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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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책 소개를 해주는 책도 가끔 읽곤 한단다. 그 책을 통해서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 오늘 이야기할 책도 책 소개를 해주는 책인데, 독특하게도 금서들만 모아놓은 책이란다.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이라는 책이고 부제는 금서기행이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는 책들이 있단다. 우리나라도 물론 마찬가지이지. 최근에는 금서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 군사독재시절에는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런 금서를 출간한 지은이나 출판사들은 법적 처벌을 받기도 했단다.

보지 못하게 하면 더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 그렇게 금서로 지정되어 오히려 더 유명해진 책들도 많이 있단다. 오늘 이야기할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은 매일경제신문사 온라인 뉴스로 연재했던 내용을 엮은 것이라고 하는구나. 김유태 님의 책은 처음인데, 글솜씨가 좋으셔서 술술 잘 읽히더구나. 그리고 소개해주는 책들은 읽고 싶게 소개해주었어.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된 금서들 중 몇몇은 아빠의 독서리스트에 추가해 두었단다. 그럼 어떤 금서들을 소개해주었는지 몇몇 이야기해볼게.

 

1.

첫 번째 챕터는 아시아인들이 못 읽는 책들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했어.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이라는 책은 1937 12월 일어났던 난징대학살 사건에 관한 책인데, 난징대학살을 서구세계에 처음으로 자세히 알린 책이라고 하는구나. 난징대학살로 3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얼마나 잔인한 만행이었냐면, 당시 중국에 머물던 나치 출신의 독일인 욘 라베라는 사람도 일본의 만행에 치를 떨면서 일본군의 만행으로부터 20여만 명을 구출했다고 하는구나. 나치도 두손두발 다 들게 한 만행을 일본이 저지른 거야. 이 책을 쓴 지은이 아이리스 장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는데, <난징의 강간>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일본 극우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신경 쇠약을 겪다가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는구나. 일본에서는 <난징의 강간>을 반박하는 책이 오히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니, 사과와 반성을 모르는 일본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런데 일본의 만행이 이것 하나뿐이겠니. SF 작가로 유명한 켄 리우의 단편 중에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일본의 또 다른 만행 731부대의 인체실험을 소재로 소설이란다. 이 작품 또한 일본에서는 금지되어 켄 리우를 출간할 때 이 작품은 빼고 출간했다고 하는구나. 켄 리우 작품에는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도 있는데, 그렇다 보니 중국에서도 켄 리우의 작품은 일부 빠져서 출간되었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만 제대로 된 켄 리우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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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켄 리우는 이 소설에서 먼저 과거의 정보와 기억을 그래도 체험할 수 있는 기술의 발견을 언급한 뒤, 그 기술이 인간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했습니다. 반일 소설만은 아니고, 중국과 미국까지 동시에 비판한 작품입니다.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의 단편 14편이 실린 <종이 동물원> 맨 끝에 수록됐는데, 일본에서는 이 소설만 빼고 작품집을 펴냈습니다. 그의 책은 중국에서 4권 이상 출간됐는데, 중국어판에는 공산당을 비판한 대목이 곳곳에서 삭제된 채 출간됐다고 전해집니다. 한중일 가운데 이 소설을 온전한 형태로 읽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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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팡의 <우한일기>라는 책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몇 년 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갔던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책이란다. 전세계로 퍼져나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한 우한의 상황에 대해서 사실대로 쓴 글이나 이 책은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지은이 팡팡은 이 책 이후 중국 내에서 집필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구나. 글을 써도 출간해 주는 출판사가 없다는 거야. 책 하나를 금서로 지정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은이까지 억압하다니양심 있는 출판사가 없는 것인가, 공산당 정권에서 불가능한 것인가.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 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지은이 옌렌커도 금서 타이틀을 많이 갖고 있는 작가라는구나. 그의 책 중에 무려 여덟 권이 금서래. 이 책에서는 집단 에이즈 발병을 소재로 중국 공산당 정치를 비꼬는 작품인 <딩씨 마을의 꿈>이란 책을 소개해 주었단다.

...

얼마 전에 박찬욱 감독이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서 유명해진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도 소개했단다. 이 책은 호치민을 비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베트남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이래. 자국의 영웅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비판하면 금서로 지정되기 쉬운데, 너무 속 좁은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 싶구나.

 

2.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읽다가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아주 간혹 있단다. 그 불편함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작품이 분명 있단다. 그렇게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들 중에 금서로 지정되었던 작품들이 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중에도 그런 작품들이 있는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이란 작품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란다. 책 내용에 근친상간과 소아성애 등을 다루어 읽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고 하는구나.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소설도 소개했는데, 이 작품은 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구나. 이 영화는 아빠도 어떤 경유에 의해서 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20여 년 전에 본 기억이 있구나. 보면서 너무 불편했던 영화인데, 이를 원작으로 한 소설도 너무 잔인한 소재로 인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금서로 지정했었는데, 출판사의 항소로 19금 소설로 지정했다는구나.

아무튼 이 작품은 아빠는 영화로 봤지만 잔인함만 기억으로 남는 작품으로 너희들에게는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구나. 스페인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의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품은 엄마를 살해하는 소재를 했는데, 스페인 내전 당시 군부에 참여했던 지은이가 나중에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이 되었대. 그럼에도 그 사람의 작품도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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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셀라의 문학적 위상은 독특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셀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시민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프랑코의 군부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폭력의 원인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작가 스스로가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예기지요. 또 그는 금서의 작가였지만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검열관으로 일한 이후에도 그의 다음 소설 <벌집>은 또 금서가 됩니다.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작품이 금서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인생이든 문학이든 참으로 복잡한 요물입니다. 셀라가 논쟁적인 인물일지라도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가진 사회문화적 위상까지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은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와의 공동 소유물이 되니까요. 어쩌면 어머니를 살해한 소설이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일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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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작품이 밀란 쿤데라의 자국 체코에서 금서라는 것은 조금 놀라운 소식이었단다.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이 거의 필독서일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는 작가라고 하는구나. 그의 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아빠는 읽어보질 않았는데, 이 책에서 <농담>을 소개해주었는데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조만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또 다른 체코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이나는 작가의 <너무 시끄러운 고백>이라는 책도 소개해 주었는데, 두 작가 모두 체코 작가라서 그런지 두 작가를 비교하여 이야기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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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71)

한탸라는 인물의 하층민적 지위, 그리고 작가 흐라발이 한탸를 그려낸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보후밀 흐라발과 밀란 쿤데라는 같은 체코 출신 작가이면서 여러 면에서 대조적 위상을 지닙니다. 위기의 시대를 문장으로 견뎌낸 작가라는 점에서 둘은 동질적이지만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고,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에 체류하며 체코어를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지 거주지 차이만이 아닙니다. 쿤데라와 흐라발의 소설 속 주인공도 차이를 보이니까요. 쿤데라가 창조한 문학적 인물이 시대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빠진 허무주의적 지식인인 반면, 흐라발의 피조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회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바보로 묘사됩니다. 또 쿤데라의 소설에는 성적 자유를 획득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 줄곧 등장하는 반면, 흐라발의 소설에는 성적 불구의 인물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도 차이점입니다. ‘()의 실현이 한 인물의 자아를 형성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볼 때 흐라발의 남성상은 좌절된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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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한 금서들 중에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두 작품이 소개되었단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1980 4월에 출간되었대.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 1980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마치 이 책의 내용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인들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처럼 보였다는구나. <필론의 돼지>의 내용은 군인들과 전역병들의 싸움을 다룬 소설이었대. 그래서 계엄군과 광주 시민 모두 이 책을 싫어했다고 하는구나. 이문열은 정치적 노선이 아빠와 상극이라서 그의 작품은 무조건 패스. 또 다른 작품은 마광수의 <운명>이라는 작품인데, 한때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외설적인 작품을 썼다고 해서 세상에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단다. 그 이후 교수직도 잃고 힘들게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작품은 작품으로만 평가하지 지은이까지 연좌해서 평가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 밖에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 디스토피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오웰의 <1984>, 예전에 아빠도 읽어보려고 사두었다가 아직 읽지 않은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 등 금서로 지정된 적이 있는 많은 작품들이 실려 있었단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지은이 김유태 님이 노벨문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고, 예측도 하시곤 했어.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24 4월이라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조심스럽게 예측도 하셨는데, 실제 수상을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되었을 때 지은이 김유태 님은 어떤 기사를 썼을까 궁금해서 한번 찾아봤단다. 그런데 김유태 님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얼마 전에 인터뷰를 했었고, 그 인터뷰를 신문에 실으려고 준비 중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거야. 그래서 그날로 바로 작업을 해서, 한강의 노벨문학상 발표 후 다음날 한강 독점 인터뷰로 장문의 인터뷰를 싣는 대박을 터뜨렸단다. 아빠도 그 기억이 나는구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어떻게 독점 인터뷰가 가능하지?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이미 몇 주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였더구나. 그 인터뷰를 한 사람이 이 책의 지은이이고 말이야. 아빠도 이번에 그 인터뷰를 다시 찾아 읽어봤는데,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읽어야만 할 수 있는 양질의 질문이고, 한강 작가의 답변들도 문학작품 같은 답변들이라 좋았단다.

이번에 읽은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은 새로 알게 된 책들이 많아서 좋았고, 글솜씨 좋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어 좋았단다. 김유태 님의 다른 책들도 한번 눈여겨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몇 해 전 어느 주말,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서울 시내의 한 대학 중앙도서관 책장과 책장 사이에 말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책의 바다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의 강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오래된 책을 정기적으로 펼쳐 읽는 행위는 생의 곁길로 빠지면서 즐기는 잠깐의 군것질이 아니라 정신의 식탁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는 정찬의 의례에 가까웠다. 묵은내가 폐부 끝까지 전해지는 도서관을 에어포켓 삼아 숨 쉬어보는 몽상을 거듭한 나는 수은을 삼키고 불가사의하지만 흡족한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귀가하곤 했다. 일회적이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책들을 내 안에 꾹꾹 눌러 담고 나오는 날의 노을빛은 아름다웠다. 생활인으로서, 한 명의 독자로서 그것은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 P7

해외의 한 출판사 편집장이 국내의 유명 평론가에게 해준 이야기를 떠올려옵니다. 이 평론가가 ‘좋은 책의 조건’을 편집장에게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고 하네요. 저도 사석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옮겨봅니다. "첫째, 흥미진진할 것. 둘째, 새로울 것. 그리고 셋째가 가장 중요한데, 바로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 별생각 없이 드러누워 보다가 엇, 하고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움까지 있는데, 독자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지요.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의 참된 자아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나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척 팔라닉은 바로 그 점을 묻습니다. - P123

예술가의 창작이란 당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평 위에서만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었지요. 일체의 낭만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 예술의 엄숙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쿤데라는 간파했습니다. 예술의 도구화는 사회주의 예술, 좀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체이자 한계점입니다. 핸드리흐와 같은 사회주의 당직자들은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로써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순간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한계가 노정된다고 쿤데라는 확신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술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는 무한한 자유 위에서의 진보적 창조이며, 문학이란 자유와 옹호를 위한 인간의 총체적인 언어활동이 아니던가요. 현실의 의미를 밝혀내고 해석하는 것이 언어예술로서 문학의 유일하고도 입체적인 목적이며, 예술에 굴레를 확정하는 순간 이는 죽어버린 예술이자 예술의 종막이 됩니다. - P157

문학은 정치와 동떨어진 예술로 간주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반감은 독자와 문학 사이의 거리를 멀게 만듭니다. 그러나 문학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예술 장르이며 때로는 정치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이스마일 카다레는 삶으로 또 작품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러므로 영원히 빛날 겁니다. - P206

<눈먼 부엉이>를 읽은 일부 독자의 우울증과 자살은 이 책에 담긴 문장들로 생(生)의 근원을 염탐했다는 좌절과 막막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삶에서 유의미성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들은 영영 삶을 포기한 것이겠지요. 물론 이 책도, 이 글도, 삶을 지양하고 죽음을 찬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세상에 주어진 모든 삶에는 섭리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 죽음은 문학 바깥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며, 죽음을 다룬 문학은 삶의 깊이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다만 삶의 이유가 모두에게 다르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좀더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만큼은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 P333

런던에 세워진 조지 오웰의 동상의 벽면에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선과 악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오웰의 이 한마디를 저는 오래 간직할 생각입니다. 그의 이름은 필명으로, 오웰(orwell)은 그의 부모가 사는 지역에 흐르는 강의 이름입니다. 책의 바다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의 강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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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1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읽으면 좋은책 아닐까요?

bookholic 2025-12-12 22:27   좋아요 0 | URL
ㅎㅎ 네, 맞아요~~ 저도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 몇 권을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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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참 꾸준하구나.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해 주는구나. 이번에 읽은 책도 제법 최근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추가된 작품으로, 아빠는 처음 들어가는 작가의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란다. 책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책소개를 읽어보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게 된 소설이란다.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로 알려진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이라는 소설이란다. 알아보니 책표지의 사진은 1963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의 한 장면이고, 책표지에 한쪽 안대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도 알고 있을 정도로 잘생기기로 유명했던 알랭 들롱이더구나. 그냥 사진으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가 알랭 들롱이더구나. 이 정도 되면 영화도 보고 싶긴 한데, 어디서 찾아서 봐야 할지 난감했는데,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니, 무료로 볼 수 있더구나. 안타깝게 한글자막은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중에 한번 도전해봐야겠구나. 그런데 영화가 3시간이나 되니, 영화도 큰 마음을 먹고 봐야겠구나.

또 알아보니 최근에도 이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 있더구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넷플릭스를 구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당장 볼 수는 없겠구나. <표범>이라는 작품의 무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이란다. 이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 중반의 시칠리아로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 하나의 국가가 아니고 여러 공국들이 공존하던 시기였단다. 당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시기였어. 아빠가 이탈리아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소설 속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좀더 재미있게 읽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럼 이 소설의 이야기를 해줄게.

 

1.

1860 5월 시칠리아는 양시칠리아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당시 왕은 페르디난드 국왕이 왕위에 있었어. 얼마 전인 4.4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시칠리아의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치니가 일으킨 반란이었어. 그리고 주세페 가리발디라는 사람은 혁명군을 모집하여 이탈리아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단다. 그의 혁명군이 시칠리아까지 진입했단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리소르지멘토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이탈리아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하는데 성공하고 주세페 가리발디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고 했어. 당시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가 이해한 수준에서 적은 것이라서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단다.

이야기는 시칠리아의 대 귀족이자 영주인 돈 파브리초 살리나의 영지에서 시작한단다. 돈 파브리초는 귀족 가문을 이끄는 가장으로 키 크고 힘도 센 사람으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당시에는 흔치 않는 망원경도 갖고 있었어. 돈 파브리초의 아내는 마리아 스텔라야. 스무살 때 결혼하여 아이들을 일곱 명을 낳았는데 지금은 사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단다. 돈 파브리초는 아내 몰래 따로 사랑하는 마리안 나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단다. 지금은 사랑하지 아내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어. 딸 중에 콘체타는 수도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폭동으로 현재는 집에 와서 머물고 있었어.

돈 파브리초는 조카 탄크레디의 후견인으로 보살펴주고 있었단다. 탄크레디는 누나의 아들인데 고아가 된 이후 돈 파브리초가 후견인이 된 거야. 탄크레디와 콘체타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랑을 알 나이가 된 콘체타는 그 호감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게 되었단다.

어느날 탄크레디가 돈 파브리초를 찾아와 자신은 가리발디의 혁명군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찾아왔어. 돈 파브리초는 뜻이 다른 조카를 막지 않았단다. 조카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그런 어른이었어. 몇 달 뒤(1860 8) 탄크레디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한달 휴가를 왔단다. 눈 부위 부상을 입어서 한쪽 눈은 안대를 하고 왔어. 여름이면 살리나 식구들은 그들의 또다른 영지인 돈나푸가타로 휴가를 간단다. 돈나푸가타의 시장은 돈 칼로제로라는 사람인데 상업으로 자수성가하여 시장까지 된 인물이었어. 그런데 그의 아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집에만 있어서 이상한 소문들도 들었어. 천한 신분에 글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엄청난 미모를 가졌다는 거야. 그래서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 또한 엄청난 미인이었어. 그러니까 안젤리나는 아버지의 머리와 어머니의 미모를 닮은 거야.

돈 파브리초는 저녁 만찬에 시장의 가족을 초대했는데, 이번에는 돈 칼로제로는 아내는 오지 않고 딸만 데리고 대동했단다. 안젤리카의 미모에 만찬에 참석했던 모든 남자들의 마음이 설레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 중에 탄크레디도 포함되어 있었고, 탄크레디는 안젤리카와 대화를 나누었단다. 그 장면이 이 책의 앞표지에 쓰인 장면인 것 같구나.

 

2.

1860 10. 다시 전쟁터로 간 탄크레디는 주기적으로 돈 파브리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날은 자기 대신 돈 칼로제로와 안젤리카에게 청혼을 해달라고 했어. 이 일을 아내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하고 의논했고, 마리아는 탄크레디를 배신자라고 했어. 물론 돈 파브리초도 자신의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젊은이의 끓는 뜻을 꺾으려 하지 않았어. 탄크레디가 조카이지만 역시 자식처럼 대했고, 그의 뜻을 지지해주었단다.

한편 돈 칼로제로가 시장으로 있는 돈나푸가타에는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편입할 것인지를 두고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백퍼센트 찬성으로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편입하기로 했단다. 이 일은 돈 칼로제로가 주도하여 조작한 것 같은 의심이 들었지. 그래서 돈 파브리초는 돈 칼로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상인으로 성공하여 시장에 오른 것도 그와는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 탄크레디의 부탁은 들어주었단다. 그래서 돈 파브리초는 돈 칼로제로를 찾아가서 탄크레디의 청혼 소식을 알렸어. 돈 칼로제로도 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

탄크레디가 군 동료 카브리아기와 함께 찾아왔단다. 탄크레디는 이제 사랑에 눈이 멀어 안젤리카만 바라보고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사랑을 키워나갔단다. 반면 탄크레디의 군 동료 카브리아기는 콘체타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탄크레디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콘체타는 그런 관심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어. 사랑은 언제나 어렵구나.

통일정부가 세워지고 정부측 인사인 슈발레가 돈 파브리초를 찾아왔어. 슈발레는 돈 파브리초에게 통일정부의 상원의원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단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정부의 중요인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돈 파브리초는 슈발레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돈 파브리초 자신은 시칠리아의 역사를 함께 한 사람으로 시칠리아와 자신은 하나라고 했어. 그런 시칠리아 왕국이 사라졌으니 자신의 역할도 이젠 끝이 났다면서 자신은 이제 늙은 기성세대일 뿐이어서 새로운 통일정부와 맞지 않는다고 했어. 그러면서 돈 칼로제로를 추천해 주었단다. 돈 칼로제로는 그 동안 혁명군에게 적극 협조를 했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니까 새로운 통일정부와 맞다고 생각한 거야. 그동안 시칠리아를 지켰던 표범의 시대는 가고, 자칼이나 하이에나의 시대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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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236)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이다. 100, 200…..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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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마지막 장은 1910 5월로 이탈리아 통일정부가 들어선지도 거의 반세기가 되었단다. 통일정부를 반대했던 이들도 찬성했던 이들도 세상을 등졌단다. 살리나 가문은 홀로 남은 콘체타가 지키고 있지만 그 옛날의 위세는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단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가문으로 그렇게 조용히 문을 닫게 되는구나.

이 소설은 이탈리아 통일을 다룬 시기의 소설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소설로 느껴질 것 같구나. 아빠도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 소설을 통해 이탈리아 통일 시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눈크 에트 인 호라 모르티스 노스트라이, 아멘.”

책의 끝 문장: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납빛 먼지 더미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사랑,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랑의 불길과 불꽃은 1년이면 꺼져 버리고 이후 30년은 그 재로 살아간다. - P93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녁에 인사를 나누었던 구름들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죄가 크지 않아 진노한 신이 가혹하게 벌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 버렸다. 별들은 흐릿했고 별빛은 더운 공기를 뚫고 나오려 애를 썼다. 돈 파브리초의 영혼은 별들을 향해, 손으로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별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쁨을 주며 거래 따윈 하지 않는 별들을 향해. 그는 수없이 그랬듯이 공상에 빠졌다. 순수한 지성인이 자신이 계산용 수첩을 들고 곧 차디차고 광활한 공간으로 가는 상상이었다. 수첩에 풀어야 할 계산은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잘 풀릴 터였다. ‘별들만이 순수하지. 유일하게 선량한 피조물들이지.’ 그는 세속적인 공식에 따라 생각했다. ‘어느 누가 플레이아데스성단의 지참금을, 시리우스의 정치 경력을, 베가의 부부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겠는가?’ 그날은 운수가 좋지 않았다. - P108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배경으로 죄 많은 인생을 살게 될 탄크레디와 안젤리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구름과 바람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인데, 구체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미래를 뒤쫓았다. 늙고 부질없이 지혜로워졌을 때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 시절을 돌이켜 보았으며, 그리움과 후회를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욕망이 존재했으나 항상 패배하던 시기였고, 잠자리 기회가 수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했다. 억제된 관능적인 충동이 잠시 체념으로 변하기도 하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는 때였다. 그때는 성(性)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결혼 준비기간이었다. 하지만 절묘하면서도 간결한, 완전체 같은 기간이었다. 잊힌 오페라, 그러니까 은근한 암시와 익살로 수치심을 가리고 공연 중에 조화롭게 연주되지 않아 실패한 아리아들이 담김 오페라의 서곡 같았다. - P206

"슈발레, 의도는 좋아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게다가 제가 이미 말했듯이 대부분은 우리 잘못입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 경이로운 현대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일 젊은 시칠리아를 이야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휘체어에 앉아 런던 만국박람회에 끌려 나온 백 살 먹은 노파처럼 보여요. 노파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셰필드의 철강 공장에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저 침으로 얼룩진 베개와 요강을 밑에 둔 침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 P226

슈발레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민첩한 현대적인 행정부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늘’이다. 100년, 200년…..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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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5-12-08 22: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북프리쿠키 님도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5-12-07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뱃지는 왤케 크고 빛나죠?! ㅎㅎ 와...2016년부터 연속! 흠...리뷰를 이렇게 꼼꼼히, 더구나 ‘독서편지‘라는 이리 독특하고 따스한 형식, 어쩔 거여요! 앞으로 자주 들를게요! 서재의 연속 달인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5-12-08 22: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젤소님아 님도 축하드리고, 늘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부탁드립니다~~

ㄷㄷ 2025-12-1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사랑하지 아내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어‘
문장 오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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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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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란다.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늦게 알게 되어 아직 읽을 그의 책들이 많다는 것이 행복하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출판사에서 꾸준히 출판해주는 것도 고맙고.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좋아하다 보니 책 소개를 제대로 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도 아빠는 같은 책을 사지 않는 정도의 기억력은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같은 책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하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오는 경우가 있단다. 책 소개를 제대로 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누르다 보니 이런 경우 같은 작품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두 권의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구나.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 아빠가 읽은 <과거로의 여행>이란 책도 그런 책이란다.

이 책에는 <과거로의 여행>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란 두 작품이 실려 있단다. <과거로의 여행>을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두 사람이 이별을 하기 위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빠가 사 둔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별 여행>과 혹시 같은 작품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선뜻 들더구나. 그래서 그 책을 찾아 확인해 보니, 역시나 같은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이더구나. 동일 작품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가 다르더라도 하나의 제목으로 출간하는 법을 마련하면 좋겠구나. 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좀 아니지 않니? 그래서 아빠가 이 소설의 원제목을 찾아봤어. 그런데 왜 원제도 다르게 나와 있지?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책의 원제는 “Widerstand der Wirklichkeit”로 적혀 있었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번역되었어. <이별여행>이라는 책의 원제는 “Die Reise in die Vergangenheit”로 적혀 있었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과거로의 여정이라고 번역되었단다. 둘 중 하나의 출판사의 실수인가? 책 내용이 똑같은데, 두 출판사가 원제가 다르게 적혀 있다니어찌된 일인가.

<과거로의 여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책제목과 같은 <과거로의 여행>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 실려 있고, <이별이행>이라는 책에는 책제목과 같은 <이별여행> <당연한 의심>이 실려 있단다. 다행히 같이 실려 있는 작품은 서로 다르더구나. 가만, 그냥 제목이 다르니까 다르겠거니 생각했는데 혹시 이 경우도 제목만 다른 거 아냐? 다시 책 소개를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다른 소설인 것 같구나. 서두가 길긴 했는데, 그러면 이번에 읽은 책 <과거로의 여행>을 이야기할게.

 

1.

그럼 먼저 <과거로의 여행>을 이야기해줄게. 집안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화학박사가 된 루트비히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그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사장의 신임을 얻어서 사장이 병에 걸려 출근을 하지 못할 때 사장의 집에서 개인 비서 겸 연구를 했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났으니 사장의 부인이었어. 하지만 사모님이니 속으로만 짝사랑을 했어. 그런데 사모님도 루트비히에게 남몰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단다. 2년이 흐르고, 사장은 루트비히를 더욱 믿게 되었고 높은 연봉을 주면서 멕시코에서 2년간 출장을 다녀오라고 했어. 루트비히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장님의 부인이었지. 멕시코로 떠나고 나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루트비히는 용기를 내어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부인도 그 마음을 받아주었단다. 10일 후면 멕시코로 떠나는데, 10일 동안 그들은 비밀 연애를 했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아주 위험하게….

멕시코에 가서는 편지를 주고 받긴 했지만 머릿속에는 늘 부인 생각뿐이었어. 부인을 잊기 위해 열심히 일에 몰두를 하였단다. 그리고 2년이 흘러 기쁜 마음으로 귀환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유럽에서는 전쟁이 발발했단다. 이 책이 1929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이 전쟁은 1차세계대전일 듯 싶구나.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자 루트비히의 귀환은 무기한 미뤄지고, 멕시코에 남아 더 일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어. 전쟁 때문인지 부인의 소식도 끊기고, 루트비히도 부인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어 그리고 멕시코에서 어떤 사업가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또 4~5년이 지났어.

그리고 종전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러자 다시 부인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편지를 보냈어. 두 달 뒤 답장이 왔는데, 남편은 전쟁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죽고 자신은 아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 결혼도 축하한다고 했어. 그 이후 다시 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 받았단다.

….

사업차 출장으로 베를린에 가게 되었을 때 부인에게 전화를 했단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9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란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도 변하고 그들의 몸도 많이 변했겠지만, 9년 전 서로에게 느꼈던 그 마음은 그대로였단다. 하지만 루트비히는 결혼을 한 몸이니 둘은 서로 본심을 숨기고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만났단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부인에게 접근했지만, 부인은 루트비히의 마음을 알지만 그를 밀어냈단다. 집에는 하인들의 시선들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둘은 하이텔베르크로 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어쩌면 그들 생에 있어 둘이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어.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여행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은 <과거로의 여행>인가 보구나. 그리고 다른 출판사에서 제목으로 뽑은 <이별여행>도 이해가 가는구나. 이 여행을 끝으로 둘은 각자의 삶을 살아갈 테니 말이야.

그들은 하이델베르크 행 기차를 탔는데, 하필 군인들이 잔뜩 탄 기차여서 둘 만의 은밀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단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그들은 조심스럽게 호텔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빈방이 하나 있어서 들어갔는데 방은 지저분하고 사용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방이었어. 그들이 원했던 여행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기차에서는 둘 만의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깨끗한 호텔에서 행복한 시간을 기대했을 텐데그런 방에 있기 보다 산책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산책을 했단다. 둘은 과거 속을 거닐 듯 산책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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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저 그림자는 길 위에 늘어뜨린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그 인식의 두렵고 참된 뜻을 깨달았다. 시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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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으로 막으려고 해서 길을 찾아 오는 것인데, 나약한 사람의 의지로 사랑을 잊고 각자의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2.

두 번째 작품은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라는 소설이란다. 이 소설은 참고로 1925년에 출간한 소설이란다. 주인공 가 지중해 연안 휴양지 리비에라 펜션에서 머물 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 펜션에는 일곱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청년 한 명이 이 펜션으로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그 프랑스 청년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용모도 잘 생긴 청년이었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 프랑스 청년은 해박한 지식에 말솜씨가 좋았어. 그날 밤 11시 해변에 갔던 한 부인이 돌아오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 나중에 그 부인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남편만 두고 그곳을 떠난 거야. 그 부인은 앙리에트 부인이었는데 그날 온 프랑스 청년과 함께 펜션을 두고 떠난 거야.

사람들은 식탁에 모여서 이 일을 두고 백분토론이 벌어졌어. 대부분이 부인을 흉보았지만, ‘는 앙리에트 부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어. 그러자 사람들은 에게 큰소리로 반박을 했고 식탁은 큰 소리가 오가며 시끄러워졌단다. 이때 백발의 C부인이 중재를 하면서 식탁은 조용해졌단다. 이후에는 다른 손님들은 에게 앙금이 있는 것 같았는데, C부인만 에게 관심을 가졌단다.

가 펜션을 떠나기 이틀 전 C부인이 에게 20여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냈단다. 그 사건에 대한 의 의견이 어떤지 궁금하다면서 말이야. ‘는 정성을 들여 답장을 썼단다. 부인은 에게 만나자고 했고 부인은 20년 전 자신의 24시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어.

C부인의 현재 나이는 67살이고,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42살 때라고 했어. C부인은 그보다 2년 전인 40살 때 남편이 죽어 홀로 되었다고 했어. C부인은 18살에 결혼을 해서 아들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외지에서 지내고 있어서 C부인은 홀로 지내야 했어. 그래서 여행을 가기로 했어. 몬테카를로에 갔다가 카지노에 가게 되었어. 남편이 생전 카지노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서 C부인은 남편의 조언대로 사람들의 손만 유심히 봤어.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야. 손 꺾는 소리가 나는데 마치 손이 말을 하는 것처럼 카드 게임의 향방을 알 수 있는 듯한 손의 놀림과 우드득 소리어쩔 수 없이 그 손 주인의 얼굴을 봤는데, 얼굴은 24살 정도의 젊은이인데 얼굴에도 자신의 패가 다 드러나는 그런 얼굴이었어. 그야말로 포커페이스가 안되는 카지노에서는 최악의 얼굴이었지. 결국 그 젊은이는 돈을 다 잃고 자리를 뜨는데 얼굴 표정은 더 안 좋았어.

혹시 바쁜 짓은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 그래서 C부인은 그를 따라 나섰고, 삶을 좌절한 듯한 그를 보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고 말을 걸었어. 그러자 그 젊은이는 C부인을 창녀로 오해했어. 그리도 C부인은 그 젊은이를 호텔로 데려다주고 돈도 주었단다. 시간이 늦어 C부인도 그 호텔방에서 묵었어.

다음날 그 젊은이가 일어나기 전에 호텔을 빠져 나오려고 했지. 문득 젊은이의 얼굴을 봤는데, 어제의 좌절과 탐욕이 드리워진 얼굴이 아닌 명랑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어. C부인은 자신이 한 젊은이를 구해주었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자랑스러워했단다. 잠에서 깬 젊은이는 C부인에게 카지노에서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했단다.

다시 만난 젊은이는 C부인에게 고마워했어. 그러면서 젊은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단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학창 시절 이런 소설을 액자식 구성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아무튼 이번에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줄게. 젊은이는 외교관 1차 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했어. 그래서 아버지가 축하금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 도박을 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도박에 빠지게 된 것이란다. 그 이후에는 빚도 많아지고 도박을 끊을 수 없는 도박 중독이 되었어. 숙모의 귀고리까지 훔쳐서 도박을 했다고 했어. C부인은 이야기를 듣고는 젊은이에게 몬테카를로를 떠나야 한다고 권유했어. C부인이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저당잡힌 귀고리까지 찾아주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그 젊은이와 함께 해변도 거닐고, 일종의 데이트를 했단다. 어느덧 C부인은 그 젊은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았어. 펜션에서 프랑스 청년과 도망간 앙리에트 부인처럼 말이야. 앙리에트 부인을 옹호하던 에게 C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지 알겠지?

C부인은 그 젊은이를 성당에 데리고 가서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했어. 그 젊은이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기도를 올렸어. C부인은 다시 한번 그를 구원했다고 생각하여 기뻐했단다. C부인도 그 젊은이게 여행 비용과 전당포에서 찾은 귀고리를 찾아 돌려주었어. 그 젊은이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 C부인은 그러면 영수증을 써주고 나중에 갚는 것으로 하자면서 돈을 건네주었단다. 젊은이는 가고 홀로 남은 C부인은 왠지 모를 고통을 느끼게 되었단다. 그 고통의 원인을 생각해 보니 젊은이가 한 번에 가버린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 같았어.

그 젊은이가 그렇게 가버리지 않고 C부인 곁에 남았다면 타락의 길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 젊은이에게 실망한 것은 실망한 것이었어. 그 젊은이가 떠나는 기차역에 가려고 했는데, 하필 남편의 사촌누이가 나타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기차 시간을 놓치고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단다. 아쉬운 마음에 그 젊은이와 함께 했던 장소들을 따라가보았어. 그런데 카지노에서 그 젊은이를 다시 보았단다. 자신이 완벽하게 구원한 줄 알았던 그 젊은이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준 돈으로 다시 도박을 하고 있었어. 그의 얼굴에는 예의 탐욕과 광기의 표정이 다시 드러났어. 이번에는 돈도 많이 벌었는데 여전이 손은 벌벌 떨고 있었지.

C부인은 이런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젊은이는 C부인을 알아보지 못했어. 그의 어깨를 잡아서 아는 척을 했더니 그 젊은이는 엄청 당황했단다. 그는 한 번만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지켜질 리가 있는가. 그는 심지어 화를 내면서 C부인가 준 돈을 돌려주면서 내쫓으려고 했어. 그런 소란으로 다른 카지노 손님들이 그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시누이도 있었단다. C부인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 이것이 24년 전 그녀의 한 평생 중 24시간 이었던 일이었어.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 중에 24시간을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지만 그 24시간은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했단다. 당시 그 일을 겪고 몬테카를로를 떠난 것은 그 젊은이가 아니고 C부인이었어. C부인은 무작정 몬케카를로를 떠나 아들이 머물고 있는 런던으로 갔단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 젊은이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10년 전 권총 자살을 했다고 했단다. 그렇게 C부인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를 끝냈단다. 고작 24시간이 나머지 시간을 지배하여 고통스럽게 했던 C부인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고통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이 소설은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인데, 아빠가 좀 길게 이야기한 것 같구나. 그만큼 재미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니.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한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아빠는 두 번째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을 작은 차이로 고르겠다. 누구나 과거의 어떤 안 좋은 기억이 머릿속에 자리를 차지하여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먹는 일들이 있을 거야.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소설인 것 같구나. 혹시 너희들과 과거의 어떤 일이 현재를 집어 삼키는 일이 생긴다면 아빠나 엄마에게 이야기해주면 좋겠구나. 그 고통들이 입을 통해 몸 밖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가 버릴 수 있게 도와줄게.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오셨군요.”

책의 끝 문장: 그녀의 손은 가을철의 낙엽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문득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바람은 말로 꺼내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져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령 어느 날 그는 귀중한 판화 작품집을 훑어보며 램브란트 판화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미 그 판화 복사본이 그의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또한 친구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기만 해도, 며칠 뒤 그 책이 책장이 꽂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방이 마음에 들며 편안해졌다. - P21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의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 P42

그러나 그날 밤, 낯선 호텔 방에 홀로 있게 된 그는 가슴속 심장이 옆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뛰는 바람에 전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다시 끄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만 떠올랐다. 그 입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친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이렇게 느긋하게 담소만 나누는 것은 거짓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민함과 산만함, 불안과 열정으로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우정이라는 가면이 가식적으로 씌워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 P50

둘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벌써 그들 아래 보이는 집들이 희미한 빛 속에 잠겨버렸고, 황혼의 빛을 받아 가물거리는 계곡의 출렁이는 강물은 둥글게 휘어져 흐르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언덕 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들을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가로등이 그들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 포옹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 P71

나는 그녀의 명료하고 쾌활한 말투에 매우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를 따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국가의 사법기관은 이 사태를 저보다는 당연히 더 엄격하게 결정하지요. 사법기관은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대신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제 마음에 더 들기 때문입니다." - P90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 법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요. 그들은 당황해하며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이런 감정을 숨기려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조작가와도 같은 신은 감정의 모든 동작을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조형적으로 빚어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람의 감사함의 표현은 마치 열정적인 몸짓처럼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는 제 손등 위로 고개를 속였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갸름한 머리를 겸손하게 낮춘 후, 거의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제 손가락에 정중히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제 안부를 묻고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 P140

폭풍우가 요란하게 퍼붓는 사나운 밤이 지난 후 이런 감동적인 날이 밝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거리와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초록 덤불이 횃불처럼 붉은 꽃송이를 빨갛게 피워내고, 햇살에 습기가 날아가 가벼워진 대기 속에서 먼 곳의 산들이 갑자기 우리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산들이 깨끗이 씻겨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둘러보는 곳곳마다 자연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다가와서는, 슬며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저는 그에게 "마차를 타고 코르니시 해변을 달려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 P147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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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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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달 전 인 것 같구나. 신간 소개에서 겉표지가 끌리는 <블라인드 웨딩>이라는 책을 봤어. 평이 좋아서 읽어볼까 하다가 그 책을 쓴 지은이 제이슨 르쿨락의 책들을 살펴보니, 낯익은 책 한 권이 보이더구나. <블라인드 웨딩>의 겉표지과 대표적인 겉표지를 가지고 있는 <히든 픽처스>라는 책이었어. <블라인드 웨딩>을 읽기 전에 제이슨 르쿨락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히든 픽처스>를 먼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읽게 된 책이 <히든 픽처스>이란다 이런 소설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하지추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이 믹스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 소설에는 초현실적인 내용도 나오거든이 책을 읽다 보면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식스 센스> <더 아더스>가 떠올랐단다. 너희들은 위 영화를 안 봤겠지만 말이야. 최근에 이런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 있나 모르겠구나. 최근에는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그럼 바로 책 이야기를 해줄게.

 

1.

21살의 맬러리 퀸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야. 장거리 육상 선수였으나 한때 약물에 빠지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18개월째 약물을 하지 않고 약물치료센터에서 재활 중이었단다. 어느 정도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고, 센터의 코치 러셀이 추천하여 맥스웰 부부의 다섯 살 아들 테디를 돌보는 베이비시터을 하게 되었어. 테디의 엄마 캐럴라인과 처음 만났는데, 캐럴라인은 맬러리의 약물 이력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약물을 극복한 맬러리를 좋게 봐 주었단다. 그러면서 테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테디가 그림을 많이 그리는데, 그림에는 실재하지 않는 사람을 그린다고 했어. 테디의 상상 속 친구 애냐가 그 주인공인데, 애냐는 침대 밑에서 잔다고 했어. 애냐를 그릴 때는 흉측하게 그리는데 이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바로 애냐 그림이란다. 테디는 맬러리를 만나보더니 잘 따르고 좋아했단다. 테디의 아빠 테드는 엄청 깐깐하면서 유능한 엔지니어인데, 캐럴라인과 달리 맬러리의 약물 이력을 꺼려하는 느낌이었단다. 맬러리는 별채에서 생활하면서, 아침에 본채로 출근하여 테디를 봐주는 일을 시작했단다.

이웃집 사람들과도 인사를 했는데, 이웃집 미치라는 부인이 이야기하길, 70여년 전 별채 자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 애니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어. 애니? 테디의 상상 속 친구 애냐와 이름이 비슷하잖아? 테디가 이제 고작 다섯 살이라서 이름을 잘못 듣고 애냐라고 부르는 것 아니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맬러리는 별채에 혼자 있다 보면 불안하고 이상한 생각들이 들었어.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

어느날 테디가 분명 방에 혼자 있었는데, 방문 밖에서는 테디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테디의 그림은 점점 이상해져 갔단다. 다섯 살 아이가 그리기에는 너무 기괴하고 무서웠어. 어떤 남자가 애냐를 숲으로 끌고 가는 그림, 어떤 남자가 애냐를 구덩이에 넣는 그림. 애냐의 목을 조르는 그림맬러리는 이 그림들을 캐럴라인에게 보여주고 테디를 병원에 데려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 그러자 그동안 친절했던 캐럴라인은 크게 화를 냈어. 다음날 맬러리와 캐럴라인은 화해를 하긴 했지만 앙금이 남아 있었을 거야. 자신의 그림 때문에 엄마와 맬러리가 싸운 것을 알게 된 테디는 그림을 안 그리는 척 했단다. 하지만 맬러리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림을 봤는데, 이번 그림도 어둡고 음침한 그림인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섯 살 아이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잘 그렸다는 거야. 마치 어떤 혼령이 테디의 몸 속으로 들어와 그린 것처럼 말이야.

 

2.

이런 장르에서 사랑 이야기가 빠지면 섭하지. 방학이라고 이웃에 에이드리언이라는 젊은이가 와서 지내면서 정원사 일을 했어. 테디의 집도 에이드리언이 와서 잔디를 깎아주었는데, 그 때 맬러리와 에이드리언이 알게 되었단다. 그 이후 친해져서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되었지. 그런 에이드리언에게 자신이 약물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아. 어차피 지금은 거의 다 극복한 상태이니 말이야.

앞서 이야기했던 이웃집 부인 미치는 알고 보니 심령술사였단다. 맬러리는 테디의 상상 속 친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미치의 도움을 받아 유령을 불러내려 했지만, 이상한 글씨만 쓰게 하여 실패하였어. 미치는 그 실패를 맬러리 탓으로 돌렸단다.

앞서 이야기한 테디가 정밀하게 그림 같은 것들이 맬러리가 머무는 별채에서도 나타났단다. 내용은 여전히 음침하고 무서운 그림이었어. 그림으로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어. 집에서는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단다. 부부가 외출하고 맬러리와 테디만 둘이 집에 있었어. 맬러리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네 시간이나 자고 일어난 거야. 그런데 거실 벽에 온통 그 이사한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고, 자신의 손에는 그 그림을 그린 듯한 까만 먹탄 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단다. 이제 애니 유령은 맬러리에게 빙의되어 들어와 그림을 그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외출에서 돌아온 맥스웰 부부는 깜짝 놀랐고, 맬러리는 자신의 몸에 애니가 들어와서 그렸다고 이야기를 했지. 미신을 믿지 않는 맥스웰 부부는 맬러리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맬러리가 다시 약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했단다. 그래서 약물 검사도 실시해보았는데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어. 이런 일이 있다 보니 맥스웰 부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맬러리를 해고했단다.

맬러리는 에이드리언과 함께 그림들의 순서를 짜맞추면서 내막을 알아보려고 했어. 그런데 있잖니이 일은 결말부에 가서 이상하게 급반전된단다. 캐럴라인이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어. 충격적인 숨겨진 진실이 있었어. 이것까지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구나. 그 마지막 진실이 그동안의 떡밥들을 설명할 수 있어. 마지막 결론만 이야기하자만 권선징악이라는 것. 소설은 끝없이 몰아치는 폭풍같이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권선징악의 잔잔함으로 끝이 났단다.

이 책은 있잖니, 한 편의 심령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단다. 이제 지은이 제이슨 르쿨락의 <블라인드 웨딩>도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몇 년 전, 나는 돈에 쪼들려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한 연구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책의 끝 문장: 나도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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