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명 1> 바실리 그로스만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1>을 읽는다. 앞으로 2,3권이 기다리고 있고 줄거리도 모르고 처음 접하는 작가라 안전하게? 도서관에서 바로대출 신청으로 받았다. 그것도 안전하게 1권만 먼저. 결론만 말하자만 천천히 읽어나가다보면 언젠가 3권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아직 1권의 250 여 페이지만을 읽었을 뿐이지만 2차 세계대전의 가장 참혹한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의의가 있다. 몇 달 전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작가인 앤터니 비버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당연하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전개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한 앤터니 비버의 기록과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같은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결이 너무나도 다르다. 소재의 특성상 재미를 논하는 것이 사실 꺼려지지만 앤터니 비버의 기록도 그 자료의 방대함과 정확성, 그리고 한 쪽에 편중되지 않은 시각과 전투 참가자들의 다양한 인터뷰들을 보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그야말로 소설이니만큼 문장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부상 소식을 듣고 찾아간 어머니가 마침내... 결국 아들의 시신을 마주하고 느끼는 감정과 소회, 그리고 아들과 함께 했던 짧은 삶을 돌아보고 그 심정을 묘사한 문장들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절절함의 표현이라니... 정말 아들을 군대에 보내 본 엄마라면 모를 수가 없는 심정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감정은 인간본연의 감정다. 내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 본 엄마라서 더 절절하게 다가온 건 맞다.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역사상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스탈린 그라드 공방전은 참전한 소련 병사의 평균 수명이 24시간, 독일군이 7초마다 한 명씩 죽어나갔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동부전선 최악의 전투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전쟁이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공방전이어서 6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를 배경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러시아와 독일의 시가전, 다양한 전술과 전략, 새로운 무기의 도입, 이름난 장수들과 참모, 저격수들의 활약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인들이 그 전쟁을 어떻게 겪어냈을지를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어떠한 기록물들보다 오히려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앤터니 비버의 책을 읽다 말았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작품은 특별한 주인공 없이, 전쟁에 처한 러시아 온 계층의 사람들이 주인공인 듯 하다. 아직까지 특별하게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주인공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반복해서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도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어서 노트에 각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짧게 기록하며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세히 읽기가 되기도 하고 스토리 파악에도 도움이 된다. 


시만스끼는 전쟁 지구 위생청 정치과로 호출되었고, 또다시 특수과로부터 병원의 이념적 불량함이 보고된다면 전선으로 보내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제 죽은 중위의 어머니 앞에서, 꼬미사르는 전날 세명의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에, 그런데도 자신은 샤워를 하고 요리사에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삶은 양배추절임을 주문했으며 사라또프 시영 상점에서 구해온 맥주 한잔을 마셨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꼈다. - P217

또 죽은 중위의 어머니 앞에서, 간호사쩨렌찌예바는 군사기술자인 자신의 남편이 군 참모부에서 일하면서도 한번도 전방에 가지 않았고, 샤뽀시니꼬프보다 한살 위인 아들은 항공기공장 설계부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꼈다. 지휘관 또한 자신의 죄를 깊이 의식했다. 그는 전투요원임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병원에서 복무하며 질 좋은 개버딘 옷감과 펠트화를 집에 보냈는데, 저 중위가 죽으며 어머니에게 남긴 것은 목면 제복 윗도리 하나뿐이 아닌가.
- P217

죽은 환자의 매장을 담당하는 남자, 살집 두둑한 귀에 입술이 두꺼운 반장도 자신과 함께 자동차에 올라 묘지를 향해 가는 이 여인 앞에서 죄의식을 느꼈다. 관이 얇고 질 나쁜 판자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18

죽은 이들은 내복 하의만 입은 채 관에 뉘여 공동묘지에 촘촘한 간격으로 매장되었다. 비문은 울퉁불퉁한 판자에 보기 흉한 글씨로 쓰였는데,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는 싸구려 페인트가 사용되었다. 물론 사단 의무대대 보건소에서 죽은 자들은 관조차 없이 구덩이에 그냥 던져지고 비문도 잉크로 쓰여 비 한번 오면 그냥 지워져버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또 전투에서, 숲에서, 늪에서, 계곡에서, 들판에서 죽은 이들은 어떤 손길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모래나 마른 나뭇잎, 바람에 매장되었고…………… - P218

그럼에도 함께 자동차를 타고 묘지를 향해 가며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매장되냐고, 다 함께 묻히는 거냐고, 시체에는 어떤 옷을 입히느냐고, 무덤 위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냐고 캐묻는 이 여자 앞에서, 반장은 관이 얇고 질 나쁜 판자로 만들어진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 P218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앞에서는 누구나 죄의식을 느낀다.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모두가 그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애썼으나 전부 헛짓에 불과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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