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품으로 묘사된, 전쟁의 한가운데 던져진 인간 군상들의 심리가 정말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을 읽는다는건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목도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데서 느껴지는 참담함이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과 행동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더 절절히 아프다... !

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과 독일의 수용소, 러시아 포로들, 그리고 수용소의 독일인들의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끔찍한 세상에서 권력을 경험한, 타락한, 굴복한, 겁먹은, 더럽고 죄많은 그 자신이 선고를 내린다.
˝끔찍한 세상에는 죄인들이 존재한다! 나는 죄인이다!˝
그런데 이 말은 곧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역설하는 말로 들린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에 자신의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 ˝운명이 인간을 이끌지만 인간은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간다. 인간은 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그 발걸음에 죄가 있다.










43
주첸꼬는 아침 당번으로 출근해 철도 쪽에서 나타날 사람들의 행렬을 기다리며 행복한 흥분을 느끼곤 했다. 행렬의 움직임이 그에겐 도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리기만 해서, 그는 유리창 너머 참새들을 주시하는 고양이처럼 턱에 경련을 
일으키며 목구멍에서 가늘고 애통한 신음을 내었다. - P334

그 주첸꼬가 바로 흐멜꼬프의 불안을 자극하는 요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흐멜꼬프 또한 술을 들이켜고 취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여자를 골라잡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존더코만도의 일꾼들은 탈의실로 이어지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 여자를 고를 수 있었다.
남자는 결국 남자 아닌가. 흐멜꼬프도 젊은 여자나 어린 소녀를 골라 바라끄의 빈 구석으로 끌고 갔다가 반시간쯤 지난 뒤 다시 우리로 데려와 경비에게 넘겨주곤 했다. 그도 침묵하고 여자도 침묵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은 여자와 술 때문도, 개버딘 승마바지 때문도, 지휘관의 크롬 도금 장화 때문도 아니었다. - P334

1941년 7월 어느날 그는 포로가 되었다. 개머리판으로 목과 머리를 맞았고, 피똥 싸는 이질에 걸렸고, 다 찢긴 장화를 신은 채 눈속으로 내몰렸고, 중유가 둥둥 뜬 누런 물을 먹어야 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말 사체에서 악취 나는 검은 고기를 뜯어내고, 썩은 순무와 감자 껍질을 삼켰다. 그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이었다. 더이상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열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났다. 그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싶지 않았다. 피똥을 싸다가 죽고싶지 않았고, 머리에 9그램짜리 금속이 박혀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퉁퉁 부은 채 발밑에서 차오르는 물속에서 헐떡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 P334

그는 께르치의 이발사였고, 아무도, 친척도, 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도 직장 상사도, 그와 함께 술마시고 훈제 숭어를 먹고 도미노 게임을 하는 친구들도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때 그는 자신과 주첸꼬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가끔씩, 자신과 주첸꼬가 거의 같은 인간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었다. 그들이 어떤 기분으로 일터에 가는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같은 일을 하는데, 즐겁게 일터로 가든 아니면 불쾌함을 느끼며 마지못해 가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 P335

하지만 흐멜꼬프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건,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 주첸꼬가 자신보다 더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주첸꼬의 타고난 끔찍한 악랄함이 흐멜꼬프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것 때문에 주첸꼬가 끔찍했다. 흐멜꼬프 자신은 여전히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이다. - P335

이제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파시즘의 시대에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목숨을 부지하는 삶보다 더 쉬운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 P335

44.
칼틀루프트는 절도 없는 행동을 증오했다. 부하들이 취해 있으면 화를 냈고, 그 자신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가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오직 부활절이 되어 가족을 만나러 갈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일찍부터 자동차에 들어앉아 슈투름반퓌러 한을 손짓해 부른 뒤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크고 눈이 큰 자기 딸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 P336

젊은 시절 그는 시골의 부모 집에서 살았다. 이 집에서 그의 삶이 지나갈 것으로 보였다. 그는 시골의 평온함을 좋아했고 힘든 노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버지 농장의 규모를 확장하려는 꿈을 꾸긴 했지만, 수입이 얼마나 되든 결국은 돼지를 치고 순무와 귀리를 팔며 쾌적하고 고요한 아버지 집에서 일생을 보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다르게 꾸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전선으로 나가 운명이 그를 위해 깔아놓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운명은 농부에서 병사로, 참호에서 참모부 경비대로, 행정병에서 부관으로, 제국 보안부 중앙 기구의 업무에서 수용소 관리 업무로, 그리고 드디어 절멸수용소의 존더코만도* 소장이라는 직책으로 그를 이끌었다.

*존더코만도: 1938~45년 나치 수용소에서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 - P336

만약 칼틀루프트가 하늘의 법정에서 답변해야 한다면, 그는 운명이 어떻게 자신을 59만명을 죽인 망나니의 길로 떠밀었는지 정직하게 말할 것이다. 

세계대전, 거대한 민족운동, 불굴의 당, 국가의 강압이라는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누가 자신의 뜻대로 헤엄쳐갈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살아갈 작정이었어요. 저는 제 의지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떼밀렸습니다. 제 뜻과 상관없이 꼬마처럼 이끌려갔습니다. 운명이 제 손을 잡아끌었지요. 그렇게 또 그와 비슷하게 칼틀루프트가 일터로 보낸 사람들도, 그리고 칼틀루프트를 일터로보낸 사람들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리라. - P337

칼틀루프트는 하늘의 심판 앞에 자기의 영혼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도 세상에는 죄인이 없다는 사실을 칼틀루프트에게 확인해줄 필요가 없었다.…………… - P337

하늘의 심판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심판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최고의 심판이 있으니, 그것은 죄인이 죄인에게 내리는심판이다. 죄인이 전체주의국가의 힘을 측정하니, 그 힘은 무한하다. 그 힘이 선전으로, 기아로, 고독으로, 수용소로, 죽음의 위협으로, 무명과 치욕으로 인간의 의지를 구속한다. 하지만 가난과 기아와 수용소와 죽음의 위협 아래 내딛는 인간의 매 발걸음에는 제약과 나란히 구속되지 않는 의지 또한 나타난다. 존더코만도 소장이걸어온 삶의 길, 농촌에서 참호로, 당적 없이 평범하게 살다가 의식 투철한 국가사회주의 당원이 되는 모든 과정에는 그의 의지가각인되어 있었다. 운명이 인간을 이끌지만 인간은 자신이 원하기때문에 그 길을 간다. 인간은 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운명이 인간을 이끌어 절멸의 무기로 사용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이 이득을 본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그 이득에 대해 알며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끔찍한 운명과 인간은 상이한 목적을 지니되 같은 길을 걷는다. - P337

선고를 내리는 이는 무결하고 자비로운 하늘의 심판관도, 국가와 사회의 행복을 주도하는 현명한 재판관, 성자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다. 그 자신, 전체주의 국가의 끔찍한 권력을 경험한, 타락한, 굴복한, 겁먹은, 더럽고 죄 많은 그 자신이 선고를 내린다. 그는 이렇게 말하리라.

"끔찍한 세상에는 죄인들이 존재한다! 나는 죄인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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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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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리 읽혀서 아쉽다. 이 작품 역시도... 음.. 공범의 윤곽은 ‘텔레그램‘이라는 단어가 등장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가가 형사. 그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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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7-29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최애 가가형사 시리즈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

은하수 2024-07-29 10:42   좋아요 1 | URL
얼른이요~~
역시 가가형사로구나 싶어지죠^^
너무 빨리 읽히는게 최대의 흠이랄까요ㅠㅠ

jedi70 2024-08-09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텔레그램 에서 범인을 눈치챘어요

은하수 2024-08-09 15:00   좋아요 0 | URL
역시 그렇게 느끼셨죠~~^^
텔레그램을 이용한다는 것이 범인의 윤곽과 범위를 확 좁혀주니까요~~
 

오랜만에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가가 형사 시리즈...
책장이 너무 빨리 휘리릭 휘리릭 넘어가니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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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가슴을 찌르는 동정심, 스스로 혼란을 느낄 만큼 날카로운 동정심이 그를 휩쌌다. 저 마르고 커다란 눈을 한 어린애 같은 얼굴들,
저 시골의 가난한 옷차림이 그에게 갑자기 놀랄 만큼 분명한 사실을 일깨웠다. 아이들, 그저 어린애들 아닌가. 부대에서는 저 어린아이의 면면이, 인간의 면면이 군모 아래, 부동자세 속에, 장화의 삐걱임 속에, 훈련된 말과 동작 속에 감추어져 있지...... 그것이 여기서는 전부 그대로 보이네. - P284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이상하게도 오늘 그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과 인상, 복잡하고 무거운 모든 짐들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것은 바로 저 소년 모집병들과의 만남이었다.
"살아 있는 힘," 노비꼬프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힘, 살아 있는 힘." - P284

군대 생활을 하는 내내 그는 상관 앞에서 기계나 무기를 잃어버리는 것에, 자동차나 모터나 탄약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힘의 커다란 손실을 동반하는 군사작전에 대해 상관들이 심각하게 분노하는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종종 상관은 더 높은 상관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두 손을 내보이며 "병사들 절반을 투입했는데도 방어 계선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화염 속으로 보냈다. - P285

살아 있는 힘, 살아 있는 힘.
그는 살아 있는 힘을, 심지어 보신주의나 명령의 형식적인 이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교활함과 고집 때문에 포화 속으로 몰아대는 경우도 몇번이나 보았다. 전쟁의 가장 비밀스러운 비극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 보낼 권리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한 권리는 모두가 공동의 대업을 위하여 포화 속으로 전진한다는 사실에 의해 유지되었다.
- P285

39
그 마음 아파하며 울음을 터뜨리던 꼴로스꼬프는
 왜 그런 글을썼을까? 왜 모스뜹스꼬이는 침묵했을까? 순전히 겁이 났기 때문에? 끄리모프 역시 마음속에 있는 것과 다른 말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말하고 쓰는 순간 그는 자신이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겼다. 자신은 늘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믿었다. 때때로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 모든 게 혁명을
위한 일이야." - P324

갖가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어났고, 또 일어났다. 끄리모프는 동지들을, 그들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하면서도 제대로 변호하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들리지 않게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고, 때로는 더 나쁜 짓도 했다. 침묵하거나 들리지 않게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었다. 당 지역위원회에서, 당 시위원회에서, 당 주위원회에서 그를 호출했고, 가끔은 보안부에서 그를 호출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그의 지인들, 당원들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번도 동지들을 모함하지 않았고, 죄 없는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도 않았으며, 밀고나 성명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친구들을, 볼셰비끼들을, 제대로 방어하지 않았을 뿐이다. - P324

수용소로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받을 수 있도록 중간에서 자기주소를 내어주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은 노파나 주부 또는 당적 없는 소상인이었다. 웬일인지 이들은 모두가 두려움이라는걸 몰랐다. 그중 어떤 노파들 ㅡ집안일 해주는 여자들, 종교적 편견으로 가득한 문맹의 유모들 ㅡ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체포되고 남겨진 고아들을 찾아 그들이 수용 시설이나 고아원에서 살지 않도록 제집에 거두었다. 하지만 당원들은 무슨 전염병 피하듯이 이 고아들을 외면했다. 이 늙은 소상인들, 아주머니들, 문맹의 유모들이 볼셰비끼 레닌주의자들, 모스똡스꼬이, 끄리모프보다 훨씬 더 양심적이고 용감하지 않은가?
- P325

왜, 정말 왜 그럴까? 무서워서? 그저 비겁하기 때문에?
인간은 공포를 극복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깜깜한 곳으로 들어가고, 병사들은 전투에 나가고, 젊은이는 낙하산을 메고 한발짝 내디뎌 낭떠러지로 뛰어내린다.
그러나 이 공포는 특별한, 힘겨운, 수백만 사람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공포다. 이 공포는 모스끄바의 납 같은 잿빛 겨울 하늘에 불길한 붉은 글씨로 울긋불긋 적힌 그것, ‘고스스뜨라흐(‘국가에 대한 공포‘를 뜻하는 약어. 작가가 만들어 낸 신조어다.)‘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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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때 보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순혈 노동자 출신이오. 아버지도 노동자였고 할아버지도 노동자였지. 내 이력은 유리처럼 투명하오. 그러나 나 역시 전쟁 이전에는 쓸모가 없었소."
"어째서요?"
"난 노동자·농민 국가가 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관료주의를 보지 않소. 하지만 전쟁 전 노동자인 내가 왜 강제노동을 해야 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 왜 내게 창고에서 감자 고르는 일을 시키는지, 혹은 거리를 청소하게 하는지 말이오. 난 그저 계급적 관점에서 수뇌부를 좀 비판했을 뿐인데 ㅡ그들은 정말 호화롭게 살았거든 ㅡ곧장 내 목을 조르는 거요. 내가 보기엔 결국 그것, 노동자가 자신의 국가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 관료주의이고, 그
속에 관료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소." - P113

다렌스끼는 보바의 말이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을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자신을 진정으로 불안하게 하는 주제에 대해 말하거나 듣는 일에 익숙지 않았던 그는 문득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눈치 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이야기하는 행복,
마음에 불안과 당혹감을 심어주기에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논쟁하는 행복이었다. - P113

여기 오두막 바닥, 술에 취했다가 다시 깨어난 이 소박한 군인과나누는 한밤의 대화, 우끄라이나 서부에서 이곳 사막까지 쫓겨온 사람들의 존재를 주위에 느끼며 이어가는 대화 속에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것, 바람직
한 것이자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것, 그래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인간 대 인간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P113

"그렇다고 내가 원한에 가득 차 있거나 한 건 아니오." 다렌스끼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허리 굽혀 백번 천번 감사하고 있지. 난 행복하오. 그리고 바로 여기 또다른 비극이 있소. 내가 행복하려면,
내 조국 러시아에 힘을 바칠 수 있으려면 이처럼 가혹한 시간이 와야 한다는 점 말이오. 참 씁쓸한 일 아니오? 차라리 저주를 받는 게 낫지." - P114

여전히 대화의 본질, 자연스러운 빛으로 삶을 밝혀주는 중요한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한 기분이었으나, 평소 생각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말한 지금 다렌스끼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보바에게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오늘밤 당신과 나눈 대화를 난 평생 후회하지 않을 거요." - P115

15
젊은 장교가 복도로 나와 호송병에게 몇마디 하고는 미하일 시도로비치를 들여보낸 뒤 그대로 문을 열어두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카펫 깔린 바닥과 꽃병에 꽂힌 꽃송이들,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숲과 붉은 지붕을 올린 농가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도살 감독자의 방이군, 모스똡스꼬이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짐승들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고, 그들의 내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피투성이 도살자들이 있는 곳 바로 곁. 그러나 카펫이 깔린이 평화로운 방과 도살을 연결 짓는 것은 책상 위에 놓인 검은 전화기들뿐이었다. - P119

적! 얼마나 단순하고 분명한 단어인가. 다시금 체르네쪼프 생각이 났다. ‘슈트룸 운트 드랑(독일어. 격랑의 시대)"에 참으로 보잘것 없는 운명이야.
 그런 시대에 레이스 장갑을 끼다니. 모스똡스꼬이는 자기 손바닥과 손가락을  살펴보았다. - P119

18
그레꼬프가 넓적한 사자코를 벌름거리며 입을 열었다. "샤뽀시니꼬프, 동지는 전출이오. 당장 연대 참모부로 돌아가시오."
세료자는 여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고, 그녀 또한 그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혀와 입천장이 바싹 말라 있었다.
구름 낀 하늘과 땅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외투를 덮고 누운 이들 모두 뜬눈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 P156

모든 게 정말 멋지고 살가웠는데. 세료자는 생각했다. ‘천국에서 추방되는군. 그가 농노를 가르듯 우리를 갈라세우려는 거야.‘ 그는 애원과 증오를 품고 그레꼬프를 바라보았다.
그레꼬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이 세료자에게는 더없이 혐오스럽고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여겨졌다. - P156

"명령은 그게 다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선전신수가 동지와 함께 떠날 거요. 여긴 무전기가 없어 아무 일도 못하니 그녀를 연대 참모부로 데리고 가시오."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부터 동지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거요. 증서를 가져가시오. 둘 몫으로 한장만 써두었소. 끄적거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내 말 알아들었소?"

갑자기 세료자는 평생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고 인간적이고 현명하고 슬픈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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