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 번역가들은 왜 배신자일까? 신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살지 못하게 언어를 흩어놓았는데도 갈라진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해서, 니므롯처럼 신의 뜻에 반한 배신자가 되었나?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오갈 때는 손실이 불가피하므로 원저자든 독자든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바벨 이전에는 정말 언어로 인한 혼란이나 소통 과정의 손실이 없었느냐는 것이다. - P45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이 만든각종 들짐승과 새에 아담이 이름을 붙인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사물과 이름이 명징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나날이다. 여기에는 혼란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 P46
그런데 문제는 나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신다. 그런데 뱀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도 나중에 뱀의 말을 인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필멸의 존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이 사실이 되었지만, 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데도 태초에는 말이 뜻하는 바가 자명했다고 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가 헷갈릴 만도 하지 않았나? - P46
그렇다면 우리가 언어를 서로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혼란과 어긋남과 손실은 언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혼란이다. 사물과 이름 사이에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결속도 없다. - P46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대부분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보코프는 축어역 (word-for-word)만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 텍스트의 축어적 의미가 아닌 텍스트의 정신을 번역한다는 자유로운 번역은 작가를 ‘중상하는(traduce)‘ 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 P47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해 "직역(直譯)이냐 의역(意譯)이냐의 논쟁, 번역학계 용어로는 충실성과 가독성의 논쟁이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하느냐, 아니면 독자가 최대한 편하게 읽을수 있도록 옮기느냐의 차이다." 직역과 의역, 축어역과 의미역 대립 항에 충실성과 가독성 개념이 연결되었다. 담론상 스펙트럼에서 직역에 가까운 글은 부정적으로는 ‘번역 투‘라거나 ‘어색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으로는 ‘표현이 새롭고 신선하다‘거나 ‘원문에 충실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의역에 가까운 글은 긍정적으로는 ‘한국어로 쓴 글처럼 읽힌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했다‘ 등의 평을 받는 한편 부정적으로 말하면 ‘밋밋하고 진부하다‘, ‘충실하지 못하고 번역가가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와 별개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면 오역이라고 본다.
... 간단한 문장이지만 문맥에 따라, 글의 종류와 어조에 따라,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성격이나 태도, 말투에 따라, 수십 가지 다른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수십 가지 번역을 해놓은 다음에 다시 영어로 역번역 (back-translation)을 하면 결과물이 그만큼 다양하지 않고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표현으로 수렴된다. 한국어는 어미와 조사가 발달해서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어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좋은 번역이 될 수 없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어조와 뉘앙스를 선택하지 못한다면 분명한 오역은 아닐지라도 뭔가 흐름이 원활하지 않거나 삐걱거린다거나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번역이 될 수 있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다루는 번역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 P75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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