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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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마스다 미리 / 홍은주 / 비채 (2019) [원제 : 大阪人の胸のうち(2007)]

[My Review MMXLI / 비채 3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의 고향이 '오사카'인 모양이다. 한국인인 나로서는 '오사카(大阪)'라고 해서 딱히 떠오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여행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국내여행'도 잘 가지 않는 '집돌이'인데, 외국이야 오죽 이해하지 못할 바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잘 몰라서 '검색'을 좀 해보니, 오사카는 일본의 '간사이(関西) 지방'에 속한 지역이란다. 우리 말로 하면 '관문(關門)의 서쪽 지방'으로, 일본의 '세키가하라' 관문의 서쪽을 일컫는 지역을 말하는 거란다. 이 '간사이'에는 효고현, 교토부, 시가현, 오사카부, 와카야마현, 나라현, 미에현을 포함되어 있는데, 교토가 일본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우리의 '경기도'에 해당하는 '긴키 지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암튼, 마스다 미리는 '크게(大) 비탈진(阪) 지역'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전적 검색'을 해도 오사카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한국 사람이고 현재는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평생을 서울 근처에서 살아온 나도 '서울 사람들의 속마음'을 말해달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뭐, 서울 깍쟁이, 남산골 샌님...뭐, 이런 별칭들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들조차 몇 십 년 전에 불린 별칭들이고, 현재에는 잘 쓰지도 않고 있으며,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런 말이 있었는지도 잘 모를테니 말이다. 그런데 2007년에 쓰인 일본 오사카 사람들의 속마음을 회상한 작가의 에세이는 그보다 훨씬 더 옛날인 1980년~1990년대의 '오사카 사람들'의 일상을 추억한 것일텐데, 2025년을 살고 있는 외국 독자가 그 '속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한마디로 이 책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은 도무지 내용파악을 할 수 없는 책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까닭은 전적으로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전작주의자들을 위한 배려(?)가 담겼다고 볼 수는 없고, 그저 '인가작가'의 저작물이니 어찌어찌 '판권'을 사들여 이득을 챙겨보겠다는 의도였겠으나, 이런 '일본인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을 한국 독자에게까지 소개해주는 친절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다 미리 작가의 특색'이 아주 섬세한 감성의 언어유희가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짱 시리즈>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생겼을 정도다. 그래서 일본출판사는 '마스다 미리'가 일본인의 정서를 담뿍 담은 글들을 따로 모아서 연이어 출판하고 대박을 터뜨리곤 했는데, 아마도 이 책도 그런 책들에 섞여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아니올시다'였다. 일본 사람들에게 '오사카'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지역색(차별적 요소까지 포함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 독자들은 그런 사정까지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를 테면, 외국인들에게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두 지역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골까지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런 감정의 골이 '인류 공통적인 문제'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잘 설명하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도 있겠지만,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그 지역의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느낌적인 느낌까지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전라도 사람이 "아따 거시기해부러"라고 말하는 것에는 '말하는 사람의 기분'이나 '말하는 상황이나 정황'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령 '같은 뜻'이라고 할지라도 '말하는 사람의 성별이나 연령, 억양 등'에 따라서 또 여러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외국말'로 뒤쳐서(번역해서)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셈이다. 마찬가지로 갱상도 사람이 하는 "쫌", "마"라고 하는 말도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냔 말이다.

그런데 '표준 일본어'도 제대로 모르는 한국독자가 '오사카 일본어의 사투리'를 어찌 구분할 수 있겠으며, 그런 오사카 사투리만의 절묘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어찌 간파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전적으로 '마스다 미리'의 해석에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좁은 입지에서 이 책을 이해하려 노력해보면, 오사카 사람들은 매우 순박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인 듯 싶고, 한편으론 '만담이야기(개그)'가 재밌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일본사람들이 속단하기에 '오사카 사람들'은 웃긴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한국 사람들 중에는 '경상도 사람'에다가 '충청도 사람'을 섞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에둘러 표현하는 것보다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말 한마디한마디에 '유머'를 담아서 쿵짝을 유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오사카 출신'이라고 밝히면서 순수하고 정열적인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간간히 개그스런 행동으로 주위를 썰렁하게 만드는 캐릭터로 곧잘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해보았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캐릭터들은 대부분 '오사카 남자 캐릭터'가 많았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처럼 '오사카 여자'가 말하는 귀여운 사투리 표현 같은 것을 전혀 짐작할 수도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도 답답해 했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좋은 책'일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인'이라면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이 책이 '한국독자'들에게 얼마나 유용할지 생각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어를 '1급 이상'으로 취득할 목적을 갖고 있고, '일본 문화'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분들에게만 권한다. 교양적인 호기심으로 만족하는 독자들이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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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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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헤르만 헤세 / 이노은 / 민음사 (2004) [원제: knulp(1915)]

[My Review MMXL / 민음사 24번째 리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방랑'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안락한 삶(?)을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걱정을 끼치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딱 좋을 것이다. 하지만 <크눌프>를 읽으면 '방랑'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크눌프'는 비록 방랑하는 떠돌이에 불과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크눌프'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떠돌이라서 혐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크눌프를 '예의바른 사람', '재능이 많은 사람', '(일처리에 있어서) 똑부러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하며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귀한 손님으로 대접 받는다. 더구나 그를 처음 보는 아낙네와 아가씨 들도 처음에는 '낯선 이'에 대한 자동스런 거부감을 표출하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뿐이고 크눌프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서 어느새 마음을 활짝 열고 그를 사랑(?)할 준비를 마쳐버리고 만다. 그만큼 크눌프는 어딜 가도 환영받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런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는 크눌프가 어찌하여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되었을까? 적어도 크눌프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까지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심지어 귀한 자제들만 다닌다는 '라틴어 학교'에 재학을 하고서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신임을 받는 우수한 성적과 방정한 학업태도를 갖춘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그와 동창이었던 '마홀트'는 의사선생이 되어서 병든 모습이 완연한 크눌프를 단박에 알아보고서 어릴 적에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있게 해달라며 크눌프를 극진해 병을 치료해주고, 그의 병간호까지 도맡아서 하게 해달라고 조를 정도였다. 만약 크눌프도 '라틴어 학교'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가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했다면 '마홀트' 못지 않은 명망 받아야 마땅한 위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안락한 길이 아닌 험난한 길을 떠나게 된 사연은 실로 놀라운 진실 때문이었다. 크눌프에게 열병처럼 다가온 '첫사랑'이 결국 배신으로 종말을 맞았고, 철떡같이 믿었던 연인과의 철없는 약속 때문에 '자신의 인생'조차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연인의 배신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약속', 그 자체를 아예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리던 시절에 이런 악연을 맞게 되자 크눌프는 무엇 하나 진지하게 시작할 수 없는 아픔을 달고 살게 된 것이다. 나도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충격으로 지금껏 쏠로...쿨럭쿨럭

아무튼, 어린 시절에 받은 '충격'이 잦아들 때쯤, 크눌프는 자신을 돌아보자 '방랑'에 익숙해지고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려 노력한다. 천성이 착했고, 재능이 뛰어났기에, 크눌프는 어딜 가서나 '신사 대접'을 받았고, 실력을 인정 받아 '정착'을 권유받을 정도였지만, 그를 늘 불안하게 만든 것은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크눌프가 '사랑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잘생긴 남자였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살가운 시선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원했을 뿐, 남사스럽거나 난삽한 애정행각을 원치 않았던 크눌프는 모처럼 방문한 고향에서 '친구의 아내'가 보내는 은근한 추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심지어 우연히 만난 아가씨와 한밤의 데이트를 즐기며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연인을 발견했으나, '친구의 아내'가 보내는 지극정성(?)으로 인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그 아가씨의 '향수병'만 살짝 치료(!)하고서는 서둘러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방랑만 해온 처지에 번듯한 집도, 변변한 직장도 없는 자신과 섣불리 '인연'이라도 맺게 되면 그 아가씨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방랑만 해온 크눌프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물론 사랑의 결실임에는 틀림없지만, 크눌프는 '정착'할 수 없는 몸이었기에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마저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크눌프는 그 아가씨와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크눌프는 왜 '정착'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분명 재능도 있었고, 예절과 인성을 인정 받고 있었으니, '밥벌이' 정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분명 오늘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크눌프의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젊어서는 '고생도 사서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가정을 이룰 나이에 접어들면 '자기 밥줄'은 자기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평생을 구걸과 동냥만으로 살 수 없는 현대인에게 <크눌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소설인데도 작가인 헤세는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하고 싶은 유일한 삶이 있다면 바로 '크눌프'라면서 말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헤세는 크눌프를 통해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에 '방점'을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삶이 순탄치 못하고 '자살', '퇴학', '전쟁', '검열', '이혼', '정신질환', 등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니,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자유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 무리속에 있다면 그 자신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주변사람들'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사람의 자유로움이 현실적으로는 '비생산적'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해서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면 크눌프가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고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크눌프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사람들에게 마음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을 무한히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크눌프와 만난 사람들은 자신조차 잊고 지내던 '옛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떠올린 옛추억 덕분에 얼마나 많은 웃음을 선사하느냔 말이다. 크눌프가 '뜻밖의 방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웃을 수 없었고, 웃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크눌프는 잘생기고 예의바른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도 있다. 한마디로 그는 '신사(젠틀맨)'였다.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 아이돌'처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였던 셈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아이돌'이 어떤 존재던가? 자신만의 아이돌이 '무엇'을 해줬기에 당신의 가슴을 그리 따뜻하고 설레게 해주었는가? 고된 군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근원적인 힘도 '관물대 여신'이 전해주는 힘..쿨럭쿨럭

오늘날 <크눌프>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방랑'보다는 '주식/코인 대박'을 꿈꾸기 때문이다. 먼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난 뒤에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방랑)을 꿈꾸는 것을 정석으로 여긴다. 물론 팍팍한 현실이 그마저 허락치 않아서 소확행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먼저 떠나고서 '힐링'한 몸으로 경제일선으로 복귀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헤세가 말했듯이 '자유'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라 모두가 꿈꾼다. 다만, 누구나 만족할만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크눌프>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준다. 특히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유로움을 빙자하고서 무책임한 짓을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로움이 아니라 그저 '민폐'일 따름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크눌프적인 자유로움조차 40대가 넘어 병색이 완연해지자 '두려움'으로 찾아온다. 평생을 자유를 찾아 떠난 삶을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망가진 몸에 깃든 고통만이 자신이 지은 죄의 형벌처럼 다가오자 너무도 무서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런 크눌프에게 하느님이 찾아왔다. 그리고서는 '영원한 안식'을 선사한다. 내가 너와 함께 했었고, '나의 의지'를 너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크눌프의 영혼을 거두어 간다. 고생했다는 말씀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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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과학자 프래니 1 - 거대한 도시락 괴물 엽기 과학자 프래니 1
짐 벤튼 지음, 박수현 옮김 / 사파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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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과학자 프래니 1 : 거대한 도시락 괴물>  짐 벤튼 / 박수현 / 사파리 (2022) [개개정판: 초판 2005년] [원제 : Franny K. Stein, Mad Scientist #1: Lunch Walks Among Us (2003년)]

[My Review MMXXXIX / 사파리 4번째 리뷰] 내가 독서논술선생이 되던 해는 2005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입수능시험에 '논술'이 적극 반영되던 시절이었고, 수시와 정시 모두 '논술'을 요구하는 대학도 많던 때였다. 심지어 '논술' 성적만으로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독서논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 초등논술은 그야말로 대세였다. '아침독서캠패인'을 1993년부터 시작했던 '한우리독서논술'을 필두로 '주니어플라톤', '솔루니' 등등 논술시장은 점점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덩달아서 '어린이책'도 서점가를 강타했다. 정말 다양한 어린이책들이 즐기했고, 학부모들은 책을 고르는 것이 너무 힘들 정도로 매달 새로운 어린이책들이 수천 권씩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내 눈을 사로잡았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전10권) 시리즈였다. 누가 봐도 딱 고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책이었다. 물론 학부모들만 빼고 말이다.

유독 '어린이책'은 선택하는 사람에 따른 '편차'가 심하다. 책을 읽어야 할 어린이들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바로 뽑아 들고 읽으려 들지만, 정작 '그 책'을 사줄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은 학부모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어린이책'이 학부모들의 '검열'에 불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책 제목'에 약하다. 그래서 '초등 몇 학년이 꼭 읽어야 할'이라거나 '초등교과서에 꼭 나오는'이라는 책 제목을 보면 바로 사주는 편이다. 왜냐면 학부모들이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인데, '제목, 자체'가 초등학생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자신들은 안 읽어도 알만 한 내용일테고, 초등학생인 자녀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일테니 두 말 않고 지갑을 열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준 책을 순순히 읽을 '초등학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공부방 책꽂이에 수년 간 꽂혀 있다. 재활용 버리는 날에 거의 '새 책'으로 버려지곤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읽고 또 읽는 책'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 같은 책이다. 이런 책은 사 놓으면 무조건 '본전'은 뽑는다. 아이들이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부모들은 또 고민에 빠진다. 분명 '이 책' 같은 책은 학교 시험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며, 성적 향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 확실하며, 읽어서 정서함양에 좋을 것 같지 않은 책을 줄기차게 읽어재끼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 때문이다. 정작 학부모들은 '이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섣불리 판단하곤 한다. 물론 읽어본 어른들도 한 말씀 하시곤 한다. "아이들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까요?" 정말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하긴 학부모들이 어렸을 시절에는 이따위 '어린이책'이 전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엽기적인 내용일 뿐더러 처음부터 끝까지 '괴물'만 나오는 이런 책들을 읽는 어린이는 분명 나쁜 어린이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 되묻겠다. 당신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 계속 보고 있느냐고 말이다. 답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아무런 '교훈'도 없이 '막장'만 가득한 드라마를 실컷 욕하면서 또 보고 있는 당신을 스스로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궁여지책으로 '재밌다'는 한 마디만 할 것이다. 교훈적으로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그저 '재밌기' 때문에 보고 또 본다고 말이다. 어른들의 삶이 하룻동안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느냔 말이다. 그럴 때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국쌍(이준석 후보 때문에 '심한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겠다)'에게 상소리를 날려주는 재미로 본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도 하룻동안 학교 가랴, 학원 가랴, 숙제 하랴, 어른 못지 않게 엄청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면서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재밌는 어린이책'이 필요한 셈이다. 바로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 같은 책들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정말 별 것 없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녀가 한 명 나오는데 아주 '귀여운 과학 소녀'다. 과학 실험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실험도 뚝딱뚝딱 거릴 짧은 시간에 척척 해내는 놀라운 천재 소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과학 소녀가 좋아하는 것은 보통의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프래니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 다르기 때문이다. 제목에 '엽기 과학자'라는 것에서 귀띔을 얻었다면 바로 맞췄다. 프래니가 귀여워하는 것은 '괴물'처럼 괴상망측한 것들이다. 박쥐나 해골 따위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하는 야구 놀이에서 '야구공' 대신에 '눈알'을 뽑아다 던지는 상상을 하는 괴짜 과학 소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괴짜 과학 소녀가 엄청난 위기 속에서 학교선생님과 친구들을 구해내는 영웅이 되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프래니는 '엽기 과학자'답게 괴물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 나타난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 또 다른 괴물을 만들었고, 프래니가 만든 괴물이 선생님을 납치한 괴물을 물리치고 학교를 구해내자 모든 이들이 프래니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살짝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간단치 않은 '상상의 샘'을 건드릴 수 있게 된다. 바로 프래니의 멋진 상상력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면 영웅 대접을 곧잘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영웅'은커녕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뿐이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행동을 해야지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하면 곧바로 특별한(?) 취급을 받기 일쑤다. 분명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하는 행동'은 조금이라도 다르면 안 된다. 속담에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할 정도로 '튀는 행동'은 금기시 하는 분위기다. 책 속에서 서양의 아이들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저마다 다른 '다양한 겉모습'을 갖고 있지만, '하는 행동'은 거의 비슷했다. 수업 시간에는 반듯하게 앉아서 수업에 열중해야 했고, 수업 시간인데도 '모두가 아는 내용'일거라 생각하면 궁금해도 질문을 해서는 안 되며, 점심 시간이면 모두가 똑같은 모양과 맛의 '햄샌드위치'를 꺼내서 먹고 있다. 그런데 프래니만 다르다. 수업 시간에 독특한 눈빛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수업에 열중했고, 수업 시간인데도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했으며, 점심 시간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햄샌드위치'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마녀가 끓이는 수프 같은 것에서 끈적끈적한 음식을 꺼내먹으려 했고, 번쩍번쩍 날이 바짝 선 칼에 채소와 고기를 꽂아서 화로 위에서 굽는 쇼를 펼치며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곤 했다. 반 아이들은 이런 프래니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건 '겉모습'일 뿐이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프래니가 좋아하는 것들이 괴상망측한 모양을 한 '괴물 같은 것'일지는 몰라도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 그래서 프래니는 친구들이 괴로워하는 '망층한 모양새'를 바꾸어서라도 친구들을 놀래키지 않고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프래니, 자신의 모습'을 귀엽고 예쁜 스타일로 바꿀 정도였다. 물론 이런 변화는 친구들이 환영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신(?)한 프래니와 사이좋게 놀기도 했다. 하지만 프래니는 새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지만, 마음속까지 진심으로 즐겁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건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고, 속마음까지 속이면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에 힘듦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다. 친구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에서 그만 버려서는 안 되는 '공업용 쓰레기'가 포함되는 바람에 무서운 괴물 제조법이 완성(?)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어린이책이다. 어째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뛰어노는 교실 쓰레기통에서 '공업용 쓰레기'가 나올 수 있느냐고 따지지는 말자. 윤석열도 뜬금없이 계몽..쿨럭쿨럭..암튼 따지지 말자.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괴물이 바로 '게호박 괴물(일명 '게물')'이다. 그 '게물'은 끔찍한 모습과 어울리게 담임선생님을 납치해서 아주 높은 깃봉 꼭대기로 올라가버리는 나쁜 괴물이었다. 반 친구들은 오줌을 지리고 놀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혼비백산하여 난리법석을 피웠다. 하지만 괴상망측한 것을 사랑(?)하는 프래니는 그따위 괴물의 모습을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서 나쁜 괴물을 물리칠 방법을 떠올리려 애쓴다.

그러다 떠올린 방법은 바로 '햄으로 만든 착한 괴물'이었다. 아이들이 점심 식사로 싸온 '햄샌드위치'에서 빼낸 햄에 쓰레기통에 남아 있는 '공업용 쓰레기 찌꺼기'를 섞어서 괴물을 만들어냈는데, 프래니의 '뛰어난 바느질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기에 겉모습은 프래니 마음에 쏙 드는 괴상망측한 모습이었지만, 프래니의 마음을 닮아 아주 착한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괴물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프랑켄슈타인'의 모습과 닮았다. 이제 햄과 바느질 솜씨로 만들어낸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과연 무엇으로 햄 괴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바로 '건전지'였다. 메리 셀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박사가 괴물에게 '전기충격'을 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프래니는 천재 과학 소녀였기 때문에 그런 지식은 정말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생명력을 얻은 '햄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처럼 엄청난 괴력을 뽐내며 교실의 한 쪽 벽을 허물고 곧바로 선생님을 납치한 '게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서 '게물'과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선생님도 무사히 구해낸다. 그리고 프래니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정말 간단한 내용이지 않은가? 그런데 살짝 깊이 들여다보니 그 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었던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착한 마음씨'였다.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가 그저그런 괴상망측한 내용만 담겨 있었다면 어린이 독자들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프래니'의 엽기적인 행동에서 장난이 심하고 말썽만 부리는 친구가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또래의 어린이들은 심한 장난과 못말리는 말썽에 '나쁜 마음'을 담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의외지만 십중팔구는 그렇다. 분명히 '악의적인 장난'과 '못된 심보'를 가진 친구들이 있긴 있지만, 대개는 '본의'가 전혀 그렇지 않은 장난과 말썽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책에서 프래니가 그런 '장난꾸러기'들의 본심을 잘 드러내어주는 장면이 많기에, 어린이 독자들이 '대리만족'을 하는 듯도 싶다. 물론 모든 장난을 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친해지고 싶은데 '친해지는 방법'을 모르고 '친구들의 속마음'도 잘 몰라서 엉망진창으로 장난을 치고 못 말리는 말썽을 피우는 방법을 써먹는 친구들이 곧잘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친구들을 전문용어로 '관종'이라고 부르기도..쿨럭쿨럭

암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는 법이니 조금쯤은 '그 까닭'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특히나 '선생님'과 '학부모'는 이런 이해하기 힘든 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는 짓마다 '괴짜'와 다를 바가 없지만, 그건 그저 '겉모습'일 뿐이고,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착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엿볼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으로 어린이의 모든 것을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어른들이야 그런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면 안 되고, 그랬을 경우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잘 모르는 어른들은 철컹철컹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아직까지 그런 사리분별까지 잘 못하는 경우도 있을테고, 또 바람직한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을테니 선생님이나 학부모가 먼저 다가가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난,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를 통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랑스런 자녀와 제자 들이 때로는 '악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곤 할 때마다 '참을 인'을 마음 속으로 세 번 쓰면서, 곰곰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따져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귀여운 소녀도 '박쥐'를 좋아할 수 있고, 귀여운 인형이 아니라 '다른 인형의 목을 따버리는(?) 괴물 이빨을 가진 인형'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칼릴 지브란도 말하지 않았던가. '보이는 사랑'은 정말 보잘 것 없다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비한다면 말이다. 겉모습은 괴물일지라도 마음씨는 정말 착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함부로 단정 짓지 말고, 무책임하게 속단하지도 말자.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심오한 상상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것도 '가능성'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니 말이다. 앞으로 <엽기 과학자 프래니>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에 살짝 주목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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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걷고 싶다면 스쿼트를 하라
고바야시 히로유키 지음, 홍성민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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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걷고 싶다면 스쿼트를 하라 : 평생 건강하게 걷기 위한 하루 5분 실천 프로그램>  고바야시 히로유키 / 홍성민 / 동양북스 (2025) [개정판: 초판 2018년]

[My Review MMXXXVIII / 동양북스 3번째 리뷰] 책 제목이 '스쿼트'라서 운동이나 자세 교정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짐작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물론 '스쿼트 운동법'이 있긴 하다.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는 꼴랑 3쪽 분량의 '그림'이 전부다. 나머지는 왜 스쿼트 운동이 필요한지 강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자율신경계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을 꿰뚫는 한 가지는 '스쿼트'가 맞다. 다시 말해, 올바른 자세로 스쿼트 운동을 꾸준히 하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단 말이다.

사실, 스쿼트 운동법은 간단하다. 제자리에서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서는 동작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간단한 운동을 꾸준히 하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운동은 20~30대 젊은 계층은 잘 느끼기 힘들다. 왜냐면 이들은 이미 건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젊어서부터 건강한 운동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40대 이후에도 평균 이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50대 이후의 노년층에 들어서도 잔병치레 하나 없는 '건강한 삶'을 죽을 때까지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40대 이후에 급격히 건강이 무너진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건강을 해치는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하고 싶은 운동'이 있어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가 더는 쾌유하지 못하는 '병든 몸'이 되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뿐이다. 그것도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손쉽게 쾌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두 말 않고 당장 시작할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알려 드려야 할 것이다. 바로 아침 저녁으로 '스쿼트 운동'을 하면 된단다. 단순하게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동작을 부담 없이 반복적으로 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질병을 다 물리칠 수 있는 '면역력'을 얻게 될 것이고, '혈액순환'을 좋게 만들어서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자율신경'을 균형 있게 만들어주어서 몸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속는 셈'치고 스쿼트 운동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속이는 것이 아니란다. 실제로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이 맡은 환자를 대상으로 '스쿼트 운동'을 권하니 아주 좋은 경과를 보여주는 사례가 꽤나 많았으며, 심지어 활력을 잃고 골골대던 자기 자신조차 '스쿼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일주일만에 의미 있는 신체변화를 경험하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그냥 속아주는 것이 좋다. 돈 한 푼 들지 않고,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고, 딱 세 뼘 정도의 공간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니 아무런 부담 없이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쿼트 운동'은 특별히 어려운 자세도 아니다. 먼저 '고관절'을 풀어주는 간단한 동작으로 시작해서,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등'을 반듯하게 펴줘서 올바른 스쿼트 자세를 만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허벅지'를 조지기 시작하면 된다. 무릎은 90도가 될 때까지 굽히고, 등은 최대한 곧게 펴준다. 그 자세를 유지하면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20회씩 3세트 정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해주면 끝이다. 중요한 것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팍팍 들게 하는 것이다. 이때 앉는 동작에 숨을 내쉬고, 일어서는 동작에 숨을 들이마신다. 동작이 자연스럽고 부담이 덜 되면 차츰차츰 '운동 횟수'를 늘려주면 좋다.

스쿼트 운동은 절대로 '고강도 운동'으로 해선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이 된단다. 오히려 '저강도 운동'을 하더라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다. 특히 50대 이상의 노년은 '고강도 운동'보다 꾸준히 매일매일 하는 것이 더 좋단다. 그 까닭은 젊었을 때에는 고강도 운동을 하더라도 금방 회복이 되어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노년의 나이거나 질병으로 몸이 아픈 상태에서 갑자기 '고강도 운동'을 시작하면 오히려 운동 효과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전에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강도 운동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너무 탬포가 빠르거나 숨을 헐떡일 정도의 숨가뿐 운동을 하게 되면 우리 몸속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부조화가 뚜렷해지면서 '운동 효과'를 원하는만큼 끌어올릴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무리하게 하지 말고 처음 시작할 때는 '5회 정도' 가볍게 했다가 조금 수월해지면 조금씩 횟수를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꾸준히 하면 아주 좋은 효과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슬슬 50대가 넘어가니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결리고 아파 죽겠다. 특히 '허리통증'이 심했을 때에는 누워있는 자세조차 고통스러워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을 먹을 때도 앉은 자세가 힘들어서 서서 밥을 먹을 정도였다. 그때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이 바로 '허벅지 근육'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늘 바지를 입으면 허벅지가 낑겼는데, 그 당시에는 허벅지가 날씬해져서 '슬림핏'이 살아날 정도였다. 하지만 멋스러워진 것과는 반비례로 내 건강은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뇨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지금이야 15킬로 이상 감량에 성공해서 당뇨약도 끊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정도였다. 그래서 '스쿼트 운동'에 관심이 높아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계단 오르기 운동'도 매일매일 꾸준히 해온 덕분에 체중 감량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암튼, 저자는 '스쿼트 운동'으로 정말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7층 이상의 계단을 올라도 전혀 숨이 차지 않는다고 한다. 스쿼트 운동을 하기 전에는 '건널목'을 건널 때조차 비틀비틀 거릴 정도로 허약한 상태였고, 1층의 계단만 올라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릴 정도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올해 65세로 '스포츠닥터' 활동을 해온 사람의 경험담이 수록되어 있어서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나도 꾸준히 '스쿼트 운동'을 시작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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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힘든 말
마스다 미리 지음, 이영미 옮김 / 애니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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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힘든 말>  마스다 미리 / 이영미 / 애니북스 (2015) [원제 : 言えないコトバ]

[My Review MMXXXVII / 애니북스 6번째 리뷰] 에세이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마스다 미리' 덕분에 줄기차게 읽게 생겼다. 애초에 그녀의 '만화(단행본)'를 읽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왕 읽기 시작한 것이니 끝장을 보려고 한다. 그래서 [수필리뷰] 시리즈도 새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어디 한 번 줄기차게 읽고 써보련다.

그렇다고 해서 '마스다 미리'의 수필책을 좋아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쉽게도 내가 마스다 미리 책들에 내어준 '별점'은 별다섯부터 별둘까지 다채로웠기 때문이다.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책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셋'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별둘'이다. 왜냐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본인도) 하기 힘든 (일본)말'을 굳이 뒤쳐내어(번역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굳이 소개해봐야 '한국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일본에서는 '백화점'을 '데빠토(デパート)'라고 부른다. 영어의 'department'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인데, 마스다 미리는 옛날 사람(?)이라서 '백화점'이라 부르는 것이 익숙한데, 젊은 사람들은 '데빠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백화점'이라고 한국식으로 발음할 리가 없다. 백화점(ひゃっかてん)의 일본식 발음은 '햣카뎅'으로 할 것이다. 정리하면 일본에서는 80년대에는 '햣카뎅'이라고 주로 발음하며 '백화점'을 일컬었는데, 90년대 이후부터는 '데빠토'라고 대다수가 발음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에 가까운(?) 글쓴이는 어릴 적에 '햣카뎅'이라고 발음하던 추억이 있어 최근(2012)에도 '햣카뎅'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하도 '데빠토'라고 하니 왠지 조금 서글퍼진다는 그런 내용이다. 이걸 '한국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까? 차라리 '광화문연가'라는 노래를 '이문세 목소리'으로 기억하는지, '이수영 목소리'로 떠올리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공감 가지 않겠는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백화점'은 백화점일 뿐이고, '쇼핑 몰(mall)'이나 '아울렛', '마트'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딱히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다. 햣카뎅이라고 부르든, 데빠토라고 부르든, 그게 그렇게 크게 신경 쓸 일일까? 의미만 전달된다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고, 마스다 미리, 본인만 크게 걸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물론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에는 십분 공감을 한다. 나도 '어감'을 많이 따지는 편이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면 <사전>을 뒤져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적확한 단어/어휘'를 시간과 장소에 걸맞게 바르게 쓰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편이기에 마스다 미리의 고민(?)이 남 일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고, 마스다 미리가 느꼈을 기분 나쁨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다. 그거 대단히 피곤한 일이다. 그저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칠 경우엔 혼자서 피식 웃고 말거나 홀로 심각해지는 것으로 끝날 상황이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딱 좋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일을 참 많이 겪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 혼자만 끙끙거릴지언정 그런 '고민'이나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다. 그걸 말해봐야 십중팔구는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고민을 '글'이나 '만화'로 써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왜냐면 그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실린 내용 가운데 몇몇은 '공감'이 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면전에 두고서 '쓸모 있다/쓸모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삼가야할 '언어예절'이고, 그걸 아무런 의식도 없이 습관처럼 내뱉는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몰상식'한 사람으로 치부해도 괜찮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에피소드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일본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뒤치지(번역하지)' 않고 본연의 일본말 그대로 옮겨 놓았다면, 일본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일 수 있을 것이다. 언어공부란 '문화습득'의 또 다른 방법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서'를 읽는 것으로 일본어의 시대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특색이 '뒤쳐지는(번역된) 과정'을 통하면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 '우리말'로 풀어놓고 보니 도리어 어색한 점이 더 많이 눈에 띄고 말았다.

물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인가 작가'인 마스다 미리의 책이니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이 있어서 출간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 작가의 '섬세함'에 놀라고, '디테일'한 설명에 반해서 그녀의 책이라면 두말 하지 않고 읽는 열성팬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 평점은 '별둘'이다. 더 깎을 순 있어도 더 높여줄 순 없다. 그나마 별하나가 아니라 별둘인 까닭은 몇몇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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