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14 : 예술의 역사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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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4 : 예술의 역사>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5)

[My Review MMCLXXXVIII / 돌핀북 1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일곱 번째 리뷰는 어린이들의 지적대화를 위해 생각을 깊고 넓게 해주는 교양책 <채사장의 지대넓얕 14>다. 그동안 '역사', '경제', '과학', '철학'을 다루었고 이번에는 '예술'을 다뤄볼 차례다. 흔히 예술은 '음악', '미술', '체육' 영역으로 나누지만 이 책에서는 '미술사', 특히 '서양미술사'를 다뤘다. 사실 '서양미술사'에 관해서는 에른스트 H. 곰브리치가 쓴 같은 제목의 <서양미술사>(예경, 2003)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어른들도 읽기 힘든 '700여 쪽의 벽돌책'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직접 읽기에는 다소 무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채사장은 이 책의 내용을 어린이들도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듯 싶다. 물론 책 내용이 완전 똑같지는 않다. 채사장의 독특한 '지식 분류법'인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이 책에서도 훨씬 더 이해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채사장의 지대넓얕 14> 관점 포인트 : 미술을 바라보는 입장은 엄청 다양하다. 하지만 크게 고대 '고전주의', 근대 '낭만주의', 그리고 '현대 미술'로 나누곤 한다. 채사장은 이를 각각 순서대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로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구분했고 말이다. 왜냐면 '고전주의'는 핵심 가치로 이성, 질서, 조화, 균형, 비례 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흔들림 없는 진리를 추구하듯 미술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근대 이후에는 미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감성, 개성, 상상력, 주관성 따위를 핵심 가치의 우위를 두었다. 그래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달리 '낭만적 아름다움'을 아주 잘 표현했고, 채사장은 이를 '상대주의'로 구분했던 것이다.

물론, 미술에서 절대주의, 상대주의로 완벽하게 구분할 명확한 경계는 없다. 왜냐면 아름다움의 '경계'는 명확히 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성이고 조화롭고 비례가 딱 맞는 균형적인 아름다움과 각자의 개성과 주관에 따른 남다른 감성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아름다움을 구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균형미'와 '조화미'를 띠는 작품은 절대주의로,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은 상대주의로 채사장은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현대 미술은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며 '일정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자유로움을 미술에 나타냈기 때문에 '회의주의'라고 구분했다. 그런 까닭에 현대 미술은 엄청 어렵다. 하나의 작품을 이해했을지라도 '또 다른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이런 현대 미술의 장르를 따로 구분하며 나름대로 '해석'을 하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그래서 현대 미술을 이해하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로 난해하기도 한데,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술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부담 없이 미술(예술)을 즐기면 그뿐이라는 자세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미술은 '보여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니 '봐주는 이'가 없는 미술은 미술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가치를 논할 수 없다는 정도의 수준에서 미술 감상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해석하기'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 미술은 '~하기 나름'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비전문가가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겠지만, 미술 전문가의 해석만이 '모범답안'이라는 얘기도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암튼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이 책 '15권'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는 글 : 14권에서는 예술의 역사 가운데 절대주의에 해당하는 미술을 주로 다뤘다. 이집트 미술과 중세 미술도 예술의 흐름상 설명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집트와 중세의 미술은 '아름다움'은 떨어지는 대신 미술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한 예술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이집트 벽화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리기'에 충실했고, 중세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성서의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리기'에 철저한 방식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면 '초등학생 솜씨'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찬찬히 뜯어보면 그속에 '내용전달'에 충실한 메시지가 오롯히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셈이다. 그로 인해서 '아름다움'은 배제되었다.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술은 '그리스·로마 미술'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조화미, 균형미, 비례미, 어느 것 하나 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림의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리는 대상이 '신'이나 다른 '상상의 산물'일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모습'을 본떠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집트 미술에서 한층 더 발전된 모습처럼 보이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신 중심'으로 미술을 표현하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신을 찬양하는 것에 올인하는 바람에 말이다. 그러다 '르네상스시대'를 맞으며 미술계는 다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문예부흥운동'이라고 부른 까닭도 다름 아니라 '그리스·로마시대'처럼 인간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다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니, 이를 '인본주의'라고도 부른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동시대에 살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이 부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금융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고, 그 부로 '권력'을 사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재주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여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었던 점에서 절대적인 위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 가문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르네상스 예술이 폭발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메디치 가의 막대한 후원금이 있었기에 재주는 많지만 '재료 살 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가난한 예술가들을 오직 실력 하나만 보고 아낌없이 투자(!)한 덕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은 메디치 가문의 막대한 후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도 모두 메디치 가의 후원 덕분에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예술적 재능을 꽃 피웠으며,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르네상스시대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도 지적 탐구를 해볼 가치가 있지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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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 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유성호.박여운 지음, 신병근 그림 / 아울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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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 유성호, 박여운 / 아울북 (2023)

[My Review MMCLXXXVII / 아울북 4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여섯 번째 리뷰는 <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란..헥헥..'어린이 교양수업' 시리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서울대'가 보이고, '교양수업'이란 단어도 보이며, '법의학'이란 명칭도 눈에 띈다. 일단 어린이책 가운데 '서울대'가 추구하는 바는 자명하다. 일단 '학업'에 도움이 되는 책이란 얘기다. 학부모들의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다. 하지만 '교양수업'이라는 단어 때문에 망설여진다. 왜냐면 실질적인 '내신성적'이나 '대입수능'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그리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의학'이라는 명칭은 호불호가 갈리는 대목일 것이다. 일단 단언컨대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과는 아니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는 좀 다를 것이다. 미드 <CSI 과학수사대>를 즐겨 본 어린 친구라면 관심이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를 종합하면, 이 책은 어린 친구들이 '호기심'에 학부모들에게 졸라서 사달라고 할 책일 가능성이 높고, 학부모는 '서울대'라는 제목을 보고서 마뜩찮은 점이 없지 않지만 기꺼이 지갑을 열어서 사줄 책일 것이다. 그럼 논술쌤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아이들에게 여러 갈래의 '학문의 길'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진학상담용책'으로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권할 가능성이 높고, 자녀의 진학상담을 요청받았을 때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서 논술쌤이 직접 읽어볼 가능성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온라인 서점에서 '상식/교양' 부문에서 높은 순위에 오른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법의학> 관점 포인트 : 서울대 유성호 교수님은 SBS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자문역할'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서울대 교양강의 가운데 가장 수강하기 힘들다는 인기 강의인 '죽음의 과학적 이해'라는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교수님으로도 유명하다. 강의 제목에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가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아지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 '자살률'이 높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면 '삶과 죽음'은 따로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도 '태어나는 것은 내맘대로 할 수 없지만 죽는 것은 최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전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증하는 것이 '죽음'을 검색하는 연령이 60대 이상이 아닌 20~30대 젊은 층에게 더 많이 검색한다는 사실로 입증 되었단다. 그런 의미에서 '법의학'은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는 의사라는 점에서 점점 인지도를 넓히고 있는 학문이란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 '법의학자'는 그리 많지 않단다. 법의학과를 물려줄(?) 제자가 없어서 난감한 교수들도 있을 정도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 때문에 '법의학 전공'을 선택한 분이 바로 서울대 유성호 교수님이라고 한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서 '자신이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일종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라도 현재에는 꽤 만족한 삶을 살고 있으니 결코 후회는 없다고 한다. 이런 유성호 교수님의 노력(?) 덕분에 현재는 국내 유명 대학에 '법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먼저, 법의학을 전공하려면 '의과대학'에 진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의 '의대생'과 같이 6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 전공 학과를 정하고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의 실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임상 의사'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최종적으로 법의학자로 진로를 정한다면 '레지던트 과정'에서 '병리학'을 공부하고, 병리학 전문의가 된 뒤, 법의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 된다. 우리 나라에는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건국대, 연세대, 경북대 등 6곳에 '법의학 대학원'이 있고, 이 대학원에서 '부검'과 같은 실무 경험을 쌓은 뒤에 법의학자가 될 수 있단다. 치과 의사는 '법치의학자'가 될 수 있고 말이다. 법의학자와 다른 점은 '법치의학자'는 병원에서 치과 의사로 일을 하면서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란다.

'법의관'도 법의학자와 하는 일은 비슷하다. 우리 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서 일하는 법의학자를 법의관이라 부르는데, 법의학자는 연구와 강의를 더 많이 하고, 법의관은 국과수에서 수사에 필요한 부검을 더 많이 하는 차이점이 있다. 의대나 의학전문대학원을 가지 않고도 '법의학' 관련 일을 할 수도 있다. '검시조사관'이나 '법의간호사'가 있는데, 검시조사관은 '의료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뒤 '경찰청', '국방부', 그리고 '국과수'에서 과학 수사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단다. '법의간호사'는 '간호사 면허' 취득한 뒤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얻어야 한다. 그 뒤에 '법의간호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면 법의간호사가 될 수 있단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 센터'에서 일하거나 '경찰'이나 '국과수'의 과학 수사 요원, 검시조사관으로 활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법의학자는 미국 드라마 <CSI>에서처럼 '과학수사대'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있는 걸까? 아쉽게도 우리 나라 법의학자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수사관'처럼 활약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드라마 <싸인>에서처럼 법정에서 필요한 의학 증거를 밝혀내서 사건의 결과를 뒤집는 결정적 한 방을 통쾌하게 날리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단다. 물론 법정에서 살인사건의 범죄자가 째려보는 와중에 '증언'을 하는 살풍경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죽은 시체를 '부검'하는 일을 직접해야 하기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법의학자가 되면 좋은 점도 있을까? 유성호 교수님 말씀으로는 "법의학자는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는 의사입니다"라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사망한 사람은 죽은 뒤에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몸 속에 '자신이 죽은 원인(死因)'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법의학자는 '부검'을 통해서 사인을 밝혀내어 이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까닭까지 모두 밝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1987년 서울대 박종철 군이 군사독재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밝혀낼 수 있었던 것도 모진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의 몸을 '부검'한 덕분이었단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사인을 밝혔지만, 당시 중앙대 병원 오연상 의사에게 사망 진단서를 발급하라고 강요 했음에도, 오연상은 침착하게 자신이 직접 죽은 걸 목격하거나 진료기록도 없으니 쓸 수 없다고 말했단다. 그러자 경찰은 '사체 검안서'라도 작성하라고 하자 오연상 의사는 자신이 본대로 '사인은 익사 추정, 사망 종류는 불상(알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며 부검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단다. 그래서 박종철의 시신은 국과수 황적준 법의관에게 인계되었는데, 경찰이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려 '사인을 심장 쇼크사'로 발표하라고 독촉했음에도 침착하게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고 부검 감정서에 기록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세상에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연수 의사와 황적준 법의관이 '죽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폭력적인 경찰의 권력에 움츠러들어 '진실 은폐'를 했더라면 6월 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폭력 경찰들이 얼마나 지능적으로 고문을 했는지 겉으로는 상처가 거의 없었지만 부검을 하고 몸속을 들여다보자 '가슴과 목에 선 모양으로 피멍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가는 글 : 우리는 '죽음'과 관련해서 쉬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죽음은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 이미지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이른 바 '안락사' 같이 고통스런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을 '웰빙'이라 한다면 잘 죽는 것은 '웰 다잉'이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다. 드라마 같은 데에서는 '죽는 장면'을 연출할 때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서 고개를 떨구거나 손을 늘어뜨리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며, 병원에서 심장박동이 멈추는 삐~하는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다같이 오열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 죽음'과 상당한 차이가 있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의사와 의료기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비명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사투'를 벌이다 고통에 겨워 겨우 숨이 넘어가는 일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은 죽을 때 '잠자듯 고통없이 편하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자살'을 권장하거나 방조하자는 이야기가 아님을 밝혀둔다. 죽음에 대해서 인지하자는 것은 '죽음'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사는 삶'을 조명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에 달린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잘 살고 잘 죽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말'이 아니라 '같은말'일 것이다. 죽음에 대해 관심을 높이면 그만큼 '삶의 질'도 더 높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법의학자'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더 잘 들려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적어도 우리는 끔찍한 사고로 일어난 범죄를 단속할 수도 있고,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는 법의학자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공헌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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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8 : 이야기 공장 뇌, 오늘도 풀가동 중!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 글, 김현민 그림, 이고은 자문 / 아울북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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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8 : 이야기 공장 뇌, 오늘도 풀가동 중!> 정재승 / 정재은 / 아울북 (2025)

[My Review MMCLXXXI / 아울북 45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이 벌써 10번째 리뷰를 쓰게 되었다. 리뷰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26년 1월 2일'에야 '창간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그간에는 무작정 읽고 쓰는 일에만 몰입했었는데, 올해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만의 잡지(리뷰 플렛폼)'를 만들어보자는 기획을 떠올리게 된 결과다. 요즘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분들도 많은데, '종이책'을 발행할 자신은 없어서 이렇게 '블로그 채널'을 통해서 '전자책' 개념으로 꾸준히 발행할 계획이다. 아직 시작한 지 열흘 남짓밖에 지나지 않아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은 없지만, 매달 발행을 하다보면 어느 시점에 폭발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왜 '월간지'일까? 이렇게 매일 리뷰를 올릴 뿐인데 말이다. 그건 '매달 말일'에 한 달 간 쓴 리뷰를 '한 눈에 찾아 볼 수 있는 하이퍼링크'로 발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 장에서 한 달간 쓴 리뷰를 '클릭'하면 찾아가 읽을 수 있게 말이다. 아직 1월을 다 채우지 않았기에 그 월간지를 볼 수 없을 뿐이다. 이제 실제 발행일까지 20일이 남았다. 그동안 얼만큼의 리뷰를 쓸 수 있을지, 어떤 작가와 어느 장르의 책리뷰를 남길지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정재승의 인간탐구보고서 18> 관점 포인트 : 인간의 뇌는 단편적인 정보를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보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형태를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 벼락치기로 암기한 교과서의 내용은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었을지라도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는데 반해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잡담형식으로 들려준 '첫사랑 이야기'는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내용인데도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은 어린 나이일수록 이런 '이야기'를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생후 12개월부터 기억을 저장하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엄청난 양의 기억을 뇌에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억은 크게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감각 정보를 아주 짧은 시간 기억하는 것을 '감각 기억'이라 하고, 그 보다 좀 더 오래 머릿속에 남길 수 있는 기억을 '단기 기억'이라 하고, 몇 분에서 몇십 년까지 오랜 시간 기억하는 것을 '장기 기억'이라 한다.

이때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돕는 학습법이 바로 '메타 인지'를 활용한 '메타 학습법'이다. 이를 테면, 강의를 들을 때 그냥 '귀'로만 듣는 것보다 '손과 입'으로 강의 내용을 숙지하며 듣는 법이 훨씬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메타 인지를 효과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남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학습법'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으므로 학습 효과가 높을 수밖에 없으며,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시각,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을 총 동원해서 '말과 몸짓'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으므로 더 오래 기억에 저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메타 학습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이야기(스토리텔링)'로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등장인물의 상황에 따라 '감정 이입'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감정 이입'까지 병행할 때 우리는 더 오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거울 뉴런'이 있어서 '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감정 이입'을 통해서 '자신의 일'처럼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런 감정이 기억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공감 능력'도 기억력 향상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또한, 운동선수들이 주로 한다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란 것도 인간의 상상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 '실제로 한 일'이 아닌 데도 인간의 뇌는 '똑같은 경험치'를 갖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까닭에 인간의 뇌는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상상하는대로' 실현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단 말이다. 운동선수들이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승리자'가 되는 상상을 떠올리고, '이기는 방법'을 상상하면서 머릿속에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난 뒤에 실제로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면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상상이 실제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뇌의 '내후각 피질'에 위치한 '격자 세포'가 활성화된 덕분이라고 하는데, 이 부위는 뇌에서 잠재 의식과 의식을 연결하고, 기억과 탐색을 담당하는 부위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승리'를 떠올리고, '이기는 장면'을 수 차례 반복하여 떠올리게 되면, 실재로도 승리하게 되는 기적같은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무서운 장면'을 떠올리고 '귀신'이 나타날 거라 두려움에 벌벌 떨면 우연히 일어난 실재 상황에서 '귀신'과 마주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고 인간의 뇌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정말 상상하던 일이 실재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깜짝 놀라겠는가?

이처럼 '상상'은 때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을 계속할수록 똑똑해진다고 한다. 옛 어른들이 책을 많이 하면 좋다는 이야기는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책을 많이 읽은만큼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그렇게 풍부해진 상상력을 실제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엄청난 일도 능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상이 현실에서 다 재현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상상의 힘을 실제로 발휘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나가는 글 :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는 이야기가 너무 범람을 해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도 누군가에 의해서 정말 재밌고 신선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 열광했다가 점점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또 범람하게 되면 식상해했다가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면 그 신선한 충격을 만끽하며 즐거워하고 환호한다. 참 놀랍지 않은가? 이만큼 인간의 뇌는 상상력을 풀가동하면서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며 탐독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공식 같은 것도 있을까? 그걸 알면 대박을 쳐서 어렵지 않게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 AI에게 '재미난 이야기 만들어줘!'라고 명령만 하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뚝딱하고 나오는 세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더 재미난 이야기가 손쉽게 쏟아져 나오겠느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AI가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처럼 완전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현재까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I가 내놓는 이야기들은 뭐란 말인가? 그건 '이미 인간들이 써놓은 이야기'를 '나름의 틀'에 넣어서 이ㅣㄹ저리 짜깁기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인간 작가 못지 않은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AI가 많을지 몰라도 결국엔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의 결과만 만들어 낼 것이 뻔하다. 그렇기에 미래에 'AI 시대의 인간'은 창의적 상상력만큼은 제 것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간은 AI에게 한참 뒤쳐져 도움만 받다가 '노예'처럼 AI가 시키는 일만 하다가 평생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딱히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이야기'를 즐기고 직접 만들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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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7 : 음식, 인간의 마음을 요리하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 글, 김현민 그림, 이고은 자문 / 아울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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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7 : 음식, 인간의 마음을 요리하다> 정재승 / 정재은 / 아울북 (2025)

[My Review MMCLXXX / 아울북 4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아홉 번째 리뷰다. 이번 주제는 '음식과 뇌의 연관성'이다. 과연 음식을 먹는 것과 뇌과학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먹는 건 '입'으로 먹고 '뇌'는 생각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식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생각이 미치면 '음식과 뇌'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똑똑한 친구들은 바로 눈치 챘을 것이다. 인간이 활약하는 모든 주제는 바로 '뇌'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도 바로 '뇌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사실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뇌과학'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분야가 얼마쯤 될 것 같은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대세는 바로 '뇌과학'에 있다. 오죽하면 '인간의 뇌'를 흉내내는 '인공지능(AI)'를 각국에서 서로 먼저 개발하여 선점하려고 안달복달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정복해야할 주제다. 그럼 지금부터 '음식과 뇌'에 연관된 이 책의 리뷰를 시작한다.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관점 포인트 : 인간이 생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세 가지를 '의, 식, 주'라고 한다. 그런데 왜 '옷'을 맨 앞에다 둔 것일까? 옷이 먼저냐? 집이 먼저냐? 하고 따지는 것은 우선적으로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 뒤에야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식'이 맨 앞으로 와야 한다. 왜냐면 인간은 '살기 위해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인간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현대인들은 전자보다 후자의 이유로 '더 많이 먹으려' 들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기똥차게 잘 찾아먹는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음식을 섭취할 때 '쾌락'을 느끼도록 발전했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인간이 오랜 굶주린 자연환경에 방치 되어 있었더라도 지금껏 생존할 수 있는 근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먹거리가 풍족한 현대에는 왜 먹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일까? 그로 인해 '비만'이 생겼고,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며 고통 받는 요즘인데 말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먹을 것을 찾아 먹고 쾌락을 즐기다가 얻게 되는 고통인 셈이다. 심지어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이런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단다. 실제로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한 번은 '입'으로 맛볼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위'에 음식이 닿을 때라고 한다. 보통 입에서 씹고 '목넘김'을 한 음식물이 위에서 '포만감'을 느끼는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라고 한다. 특히 이 '포만감'을 느낄 때 더 많은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데, 음식을 와구와구 대충 씹고 목넘김을 하게 되면 이 '포만감'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포만감'을 느낄 때쯤에는 이미 배가 빵빵할 정도로 음식을 섭취한 상태가 되어서 늘 적당량 이상의 음식을 섭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음식은 꼭꼭 씹으며 천천히 먹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뚱뚱보가 되는 것은 정말 시간문제다.

그럼 인간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가운데 뭘 가장 잘 챙겨 먹어야 할까? 건강하고 다부진 체격을 유지하고 싶다면 단연 '단백질 섭취'를 충분히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식'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 일설에는 인간이 두 발로 걷고 지능이 발달한 까닭으로 불에 충분히 익힌 고기, '육식' 덕분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지능 발달은 몰라도 '두 발 걷기'와 육식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왜냐면 인간은 지능이 충분히 발달하기 이전에 이미 '두 발 걷기'를 했고, 영장류에서 '유인원'과 '인간'의 종이 분화된 시점부터 이미 '두 발 걷기'가 인간만의 고유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최신 학계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불의 이용(호모 에렉투스)'을 하기 전부터 이미 두 발 걷기에 능숙했고,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이전부터 인간은 '두 발 걷기'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단다. 그 증거는 유인원은 '두손 두발'이 아닌 '네 손 쓰기'에 능숙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기 때문이란다. 이 책에서는 '육식'을 즐긴 덕분에 인간이 두 발로 걸었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다면 여전히 '네 발 걷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쓰여 있는데, 어느 학설이 맞는지 좀 더 추이를 지켜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암튼, 인간은 육식을 통해서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단백질 섭취를 늘릴 수 있었고, 오메가 3 지방산, 아연, 콜린, 철분, 특히 적혈구와 DNA 생성과 뇌졸중 및 염증을 예방하는 '비타민 B12'처럼 식물에서 섭취하기 힘든 영양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꼭 먹어야 할 식품이다.

그렇다면 '채식주의'는 건강하지 못한 식단인 걸까?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비만'의 주범으로 확인된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섭취(과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육식주의'인지 '채식주의'인지는 고른 영양소를 섭취할 수만 있다면 별로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앞서 '육식'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양소가 있다면 '영양제'와 같은 것으로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는 관리를 한다면 채식주의자라도 건강한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까닭은 '육식'이 주는 불편한 마음 때문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도축, 도살, 사냥, 학살 등등)' 내 생명을 연장하는 부조리한 느낌에 심한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 살자'고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는 고결한(?) 생활습관을 갖겠다는 다짐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 싶다. 그러니 채식주의, 육식주의 등을 한다는 이유로 '유별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가는 글 : 새해가 되었으니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분들도 꽤 많을 것이다. 성공을 해서 만족스런 몸매를 자랑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초기에 잠깐 빠졌다가 도로 원상복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실망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는 왜 실패하는 것일까? 먹는 건 '입'으로 먹을지라도 맛을 느끼는 곳은 다름 아닌 '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맛'이 가장 무서운 것이고, 그 '아는 맛'을 참고 견디는 것이 힘들어서 '딱 한 입만!' 입에 넣는 순간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이성'이 멈춰버리고, 먹고 살겠다는 '본능'에 충실하게 되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것이다.

아니, 딱 한 입만 먹었을 뿐인데 '다이어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이게 뇌과학적으로 분석을 하게 되면 이렇다. 뇌에 전달되는 '맛의 정보'는 20% 정도만 미각으로 전달이 되고, 80%는 '후각'으로 전달이 된다고 한다. 근데 다른 감각과 달리 '후각'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는 뇌의 '시상'이란 부분을 거치지 않고, '변연계'로 전달이 되는데, 변연계가 하는 역할이 주로 기억을 저장하고 행동과 감정,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맛을 느끼는 것과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관여하지 않는 '본능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니 '딱 한 입만' 먹었더라도 그 맛이 촉발한 식욕까지 멈출 수는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다이어트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살기 위해 먹는 본능'으로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덕분(?)이니 원망치는 말자.

대신에 가장 좋은 다이어트는 '균형 잡힌 식단'과 '건강한 식재료'로 배를 충분히 채우되, 절대 먹어선 안 될 것들이 바로 '패스트푸드'다. 이런 음식을 '정크 푸드(쓰레기 음식)'라고 부르는 까닭은 우리 몸에 전혀 건강하지 않은 '가공 첨가물'로 맛에만 충실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건강엔 나쁘고 입(맛)만 황홀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했다면 일절 먹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10~15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한 다음에 아주 가끔(1년에 한 번 정도) 섭취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한다. 특히, 다이어트 할 때 절대로 피해야 할 식재료는 바로 '과한 양념(소스)'다. 우리가 '양념'에 길들여지는 까닭은 탄수화물은 '단맛', 단백질은 '감칠맛', 나트륨은 '짠맛', 그리고 몸에 나쁜 독소는 '쓴맛'으로 우리 뇌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달달한 맛에 취하면 탄수화물을 많이 먹은 것과 다름 없이 혈당이 급상승하고, 짠맛에 길들여지면 나트륨을 과다하게 섭취하게 되면 우리 몸이 수분을 더 많이 품게 된다. 혈당스파이크가 와서 몸속 혈당이 급상승 할 때는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게 되어 건강에 부담이 되고, 급하강을 할 때에는 우리 뇌가 위기의식으로 인식하고 음식(탄수화물)이 더 땡기게 된다. 또한 나트륨 섭취가 과다하면 물을 더 많이 들이키게 되고 결국 우리 몸속 수분함량이 늘어나서 결국 체중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 다이어트를 할 때에는 음식을 꼭꼭 씹고, 채소를 많이 먹고, 곡식과 과일의 껍질까지 섭취해서 혈당이 천천히 올랐다 내려올 수 있게 해야 하고, 짜게 먹지 않고 심심할 정도로 간을 조절해야 '과식'을 부르지 않고, '물'을 많이 마셔도 몸속에 저장하지 않고 해로운 물질과 함께 배출될 수 있도록 양념을 덜 먹는 느낌으로 식단을 조절해야 한다.

그리고 다이어트에서 빼놓지 않아야 할 것은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한 뒤에 우리 몸에 '근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근력운동'을 추가로 해줘야 한다. 운동선수처럼 심한 운동이 아니라 식사 후에는 '걷기 30분', '스쿼트 10개', '팔굽혀펴기 10개' 이상으로 우리 몸 가운데 '큰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운동으로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면 팔다리 근육이 붙고 뱃살은 쏙 들어간 균형 잡힌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식습관과 운동 습관을 기른다면 평생 잔병치레 하지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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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3 : 철학의 두 갈래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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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3 : 철학의 두 갈래>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5)

[My Review MMCLXXIX / 돌핀북 1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덟 번째 리뷰는 <채사장의 지대넓얕 13>이다. 지난 리뷰에서는 고전 철학과 중세 철학까지 절대, 상대, 회의,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철학을 비교 분석해봤다. 그럼 이어지는 근대 철학은 '어떻게' 펼쳐질까? 사실 철학을 공부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단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 말 한마디에 집중하다보면 전체를 놓치기 십상이고, 전체를 넓게 보다보면 우리가 기억해야할 나무들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어려운 것 투성이다. 이런 철학을 논리정연하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해박한 지식에 통달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것이 철학이다. 하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우리에겐 채사장이 있지 않은가. 채사장이 가는 길을 잘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철학의 실마리'를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먼 길 떠나야 할테니 차근차근 따라오면 된다. 어려울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던가. 서두르지 말자. 이 책이 반드시 도와줄 테니 말이다.

<채사장의 지대넓얕 13>의 관점 포인트 : 고대 철학에서는 '진리란 무엇인가?'에 집중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진리'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알 수 있다고 했고, 플라톤도 '진리'는 모든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를 깨달으면 알 수 있다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는 뜬 구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으니 형상과 질료가 무엇이고, 그 '변화'에 주목하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중세로 넘어와서도 '진리'는 신학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바탕으로 교부철학을 창시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주목하며 <신학대전>이란 책으로 신학을 집대성하며 스콜라철학을 완성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골똘히 연구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맞이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오랫동안 신앙에서 빛을 찾으려 했는데, 근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은 '신앙(믿음)'이 아닌 '이성'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바로 '진리'를 말이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는 진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더 궁금해 했다. 그렇게 철학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바로 '진리는 있는가?'를 묻던 '존재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는가?'를 따지던 '인식론'으로 말이다. 그 가운데 먼저 '인식론'을 살펴보자. 인식론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이 탐구의 결론은 바로 그 유명한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뉜다. 합리론자들은 이성으로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고 했고, 경험론자들은 경험적 관찰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식으로 서로 논쟁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먼저, 데카르트가 '합리론자의 대표격'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 '생각하는 나 자신'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고 단정할 수 있다면서, 인간은 끊임없는 이성적 성찰로 인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 그런데 '경험론자의 대표격'인 베이컨은 무릇 이성(생각)이라는 것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구체화 할 수 없다면서 단언컨대 생각에 앞서서 '경험'이 우선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합리론자들은 세상의 진리를 모두 다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이성'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고, 경험론자들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생각이란 막연한 상상에 불과하다며 무엇보다 참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험'밖에 없다고 반론을 던졌다.

이렇게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독일의 칸트'는 존재론의 한 갈래인 '관념론'을 가지고 와서 둘을 종합해버렸다. 이렇게 '관념론'은 철학의 관심을 '외부의 대상'에서 진리를 찾으려던 시선을 돌려서 '인식의 주체'인 내면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만큼 칸트의 관념론은 서양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셈이다. 한편 진리에 대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적 논쟁과는 논외로 '회의주의'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등장으로 말이다. 니체는 그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서구 문화의 기반이었던 그리스도교의 실체를 까발리며 실랄하게 비판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나 진리에 있지 않고,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며 실존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까지 강조할 정도였다.

정리하자면, 채사장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 그리고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는 '회의주의'로 철학을 세 가지 관점으로 구분했다. 절대주의의 계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실재론', '데카르트'로 이어지고, 상대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유명론', '베이컨'으로 이어지며,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합리론과 경험론이 종합한 뒤에 헤겔과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유물론자)이 뒤를 잇게 된다. 한편, 회의주의는 '소피스트', '쇼펜하우어', '니체', '실존주의'로 이어져서 결국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활짝 열게 된다. 회의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이나 신(믿음), 국가나 전체 따위보다 '개인'에 집중한 덕분에 다양한 사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회의주의의 후예'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가는 글 : 어떤가?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철학이 조금은 쉬워 보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다행이고, 여전히 어렵다고 말하더라도 크게 실망할 것은 없다. 세상 그 누구도 철학을 마스터 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구누구의 철학을 달달 외운 지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현대 철학의 근간은 '진리 탐구'에 있지 않다. 세상 모든 질문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진리)'가 있기는 하겠는가 말이다. 그런 것은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이 생각하는 구석, 믿는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이게 현대 철학의 시작인 실존주의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면서 다름 아닌 인간이 그렇다고 말했다. 세상 모든 물질은 '쓰임'이 있는데 반해서 오직 인간만은 '쓰임' 없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는 달리 말해서 만물이 '목적'을 띄고 만들어지는데 반해서 인간은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청소기는 '청소'할 목적으로 만들었고, 망치는 '못'을 박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누구도 망치로 '청소'할 생각을 하지 않고, 청소기로 '못'을 박으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무슨 '목적'을 띄고 태어나는가? 이 아기는 '목수'를 하기 위해 태어났고, 저 아기는 '고행'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저 태어났을 뿐이다. 이렇게 '목적' 없이 태어난 인간은 '본질(목적)' 없이 태어나기(실존) 때문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은 '쓰임' 없이 태어났으니 스스로 '쓰임'을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란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려는가? 이제 철학을 공부했으니 좀 유식하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당신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고, 어떤 진리를 탐구하길 즐기며,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구원하려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답은 없다. 다만, 개인적인 이익보다 인류 공영과 발전을 위해 이바지 할 수 있는 철학이라면 확실히 좋은 철학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철학을 많이 해야 한다. 전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흔들리고 있는 이때! 무엇보다 철학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달달 외우려 들지 말라. 외운 지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의 철학으로 뚜벅뚜벅 발자국 하나하나마다 깊숙이 새겨넣는 마음가짐하듯 걸어가야 한다. 누군가 '당신이 새긴 발자국'을 따라오는 무리가 있다면 당신이 바로 '철학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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