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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이야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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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 '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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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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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점점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디지털 치매'라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노래방에 가면 '좋아하는 노래의 번호' 정도는 습관적으로 눌러 신나게 불러재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지인들의 연락처'도 같이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백업'을 미리 받아놓아서 그럴 염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지인들의 연락처'를 척척 눌러서 연락하지는 못한다. '검색기능'이 너무 익숙해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 책은 '거꾸로' 생각을 해보란다. '처지를 바꾸서 생각해보기'는커녕 '내 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는데 익숙해져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일 수도 있겠다.

  허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해보았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전문용어(?)로 '배려'라고 한다. 이 책에는 8명의 명사들이 나름의 생각을 '뒤집어서' 펼쳐보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승자독식',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 '시', '공동체', 그리고 '평화'에 관한 각각의 편견들을 한껏 뒤집어 보았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볼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뒤집힌 세상이 불편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또 한 번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려'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인 것이다. 그런 '배려'가 전문용어인 까닭은 '그것'은 아무리 남발되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하고, '배려'를 배푸는 사람은 박수를 받기 때문이다. 설령 그 '배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이자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2008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벌써 16년이나 지난 책이라서 '책내용'을 읽다보면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신박한 까닭은 십여 년 전에 '미래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의 '현재'인 까닭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 당시에 '예상'했던대로 지금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그 예측이 사뭇 달라지게 진행된 것도 있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엔 '예측'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심각한 현실문제'가 되어 버린 '불평등'은 너무나 정확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이를 테면, 2008년 당시엔 '중산층의 몰락'을 위험하다고 경고했었는데, 2024년인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내용이다. 이 책은 '승자독식 사회'의 위기를 경고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위기가 '현실'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계층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회속에서 '경제적 계급사회', 즉 '새로운 신분제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몇몇 '소수'가 경제적 부를 독차지한 세상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99%의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족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스운 일이지만 '경제적 부의 불균형'이 벌어진 사회현실에 별로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히려 좋단다.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에서 어떻게 '아파트 몇 채'를 손에 쥔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대해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는 착각(?)에 빠져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자신들은 '경제적 유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사회적 전반적인 문제를 오히려 '문제없음'으로 인식하고, 집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오르는 '집값' 말고는 이들도 변변한 재산이 없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상위 1%라는 '재벌계급'에 낑기지도 못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동산 재벌'이 될 것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을 찬양할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한민국 1%'만 만족스럽게 만드는 '승자독식'이 판을 치게 냅둘 것인가? '언제까지' 말이다. 현재의 2, 30대 청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다. 사회는 점점 팍팍해지고, 비전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도록 깜깜한 세상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점점 물가는 오르고, 정규직 취직은 '뽑지를 않으니'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이 되느니 알바나 뛰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극을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니' 따위는 헛소리나 나불거린다. '라떼'는 사절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나마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청춘들은 '노력한 만큼 골병만 드는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정책은커녕 '실업급여'마저 '시럽급여'를 받아먹는다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서 말한대로 '생각'이란걸 하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정보의 바다를 넘어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정작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습관적'으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엄지를 놀려서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들을 보면서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미디어를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 생각에 '진입'하기도 전에 넘겨버리기 바쁘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온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태클을 걸어주면 '땡큐'다. 나는 거기에 수백만 가지 '반박'을 날려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에너지'는 현대인들의 눈에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미쳐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왜냐고?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미쳤다. '강대국'이란 이유로 '주변국'을 간섭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펴는가하면, '납치'를 당했으니 '테러집단'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학교나 병원, 심지어 '유엔'일지라도 대량살상무기를 터뜨리고 보는 '피의 보복'이 당연하다고 나불대고 있다. 또한, 핵오염수를 자국내에서 처리하는 것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바다에 '걸러서' 버리겠다는데도 소위 강대국이란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증명되지 않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막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자칭 선진국들의 방관'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남'이 해결해주겠지라면서 넋을 놓고 기다리면 될까? 택도 없는 소리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맘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돼! 아무리 납치를 당한 처지라고 해도 '테러단체'만 골라 잡아야 곱게 봐줄 수 있지 마구잡이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면 누가 '응원'해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네가 저지른 폭력만큼 너도 똑같이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꺼야. 피의 보복은 언제나 그랬거든! 핵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너희 식수로 쓰라고 말했잖아. 그 오염수를 쬐끔 '누출'했을 때 질색하고 난감해하던 모습을 보니 결코 안전해보이지 않더만. 그런데도 또 방류하겠다고, 더 많이 방류하겠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혼자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잘 울리는 '환경'이 있는 법이다. 나의 외침에 '공명'이 울려서 여기저기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다. 만약,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그런 때가 찾아왔을 경우에 내가 외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도 계속 외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외침이 '공허'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화답'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란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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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
베르길리우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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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네이스>의 줄거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뒤를 이어 트로이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3부작'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리스인인 호메로스에 의해 기원전 8세기에 쓰인 작품이며, <아이네이스>는 로마인인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기원전 1세기에 쓰인 작품으로 엄연히 말하면 전혀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도 세 작품은 교묘하게 줄거리가 이어진다. 그 까닭은 바로 <아이네이스>를 쓴 목적이 '로마의 건국 이야기'에 신묘한 힘을 덧붙이기 위한 '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베르길리우스에게 '건국신화'를 한 편 쓰라고 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위해 마지막 필력을 다하다 병에 걸려 '미완성'인채로 전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에 '미완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불에 태우지 말고 발표하라 명령을 내린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 12권' 모두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베르길리우스는 평생 호메로스를 흠모했기에 그의 작품을 본따서 <아이네이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이 <아이네이스>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그때까지도 덜 알려졌던 '호메로스'도 덩달아서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베르길리우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서 서술자 단테를 지옥으로 데리고 안내를 맡은 이가 베르길리우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단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거의 모든 영웅들이 죽어가는 전투에서 가족과 함께 떠나라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충고를 받고 온가족과 그를 따르는 '트로이인 생존자들'과 함께 정처없는 항해를 떠난다. 이렇게 아이네이아스가 떠나는 긴 항해는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올랐던 이야기 <오디세이아>와 정말 많이 닮았고, 아이네이아스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라틴인들의 땅(이탈리아)'에 도착하고부터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일리아스>와 꼭 닮았다. 하지만 완전 판박이로 베낀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복수'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의 주제는 '로마 건국'이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생존과 귀향'이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주제도 '생존'이긴 하지만, 그 생존 목적이 바로 '로마 건국'에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애초에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아이네이스>를 썼기 때문에 '로마 건국'을 주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초의 황제가 등장할 자신의 조국이 고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에서 유래되었다는 볼품 없는 건국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보다 훨씬 더 신비하고, 신묘한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아들'이 로마 건국의 시조라는 썰을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로마명 '베누스')'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우라노스의 '거시기'가 아닌 '제우스의 딸'로 못을 박았다. 이로 인해 로마 건국의 시조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이지만, 그 로물루스의 조상이 트로이인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이며, 아이네이아스의 엄마는 여신 '아프로디테'이고, 그 여신의 아버지가 바로 '제우스'라는 점을 밝힌 셈이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은 '제우스의 후손'이 건국을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아이네이스>의 골자 되겠다. 어쩌면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현지 답사까지 하면서 '제우스의 후손'인 점을 더 명확하게 꾸미려 했으나, 여행중에 걸린 병이 악화되는 바람이 그 뜻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미완'으로 남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완의 유작으로도 로마제국이 여신 아프로디테의 후예가 세웠다는 정설(?)을 만들어냈으니 그 목적은 '완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여신들의 전쟁'이라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모험과 전쟁은 '인간의 몫'이었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여신들의 끝없는 다툼'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신이 바로 '헤라'와 '아프로디테'였다. 그리고 두 여신이 다투게 된 까닭은 바로 '파리스의 심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말이다. 불화의 여신이 결혼식장에 던져두고 간 '황금사과'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 명의 여신 앞에서 누구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인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를 뽑으면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아테나를 뽑으면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아프로디테를 뽑으면 '최고의 미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스는 '최고의 미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헤라와 아테나는 아프로디테와 '미모대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아프로디테'가 하는 일마다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전쟁의 패배로 '트로이'는 멸망하게 되었고, 그후 '트로이인들'은 거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트로이인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그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는 <일리아스>의 격렬한 전투속에서도 여신의 도움으로 번번히 살아남게 되었고, '트로이 목마'로 인해 끝내 멸망에 이른 트로이 성에서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로마건국'이라는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갖은 모험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허나 아이네이아스의 고난은 곧 '여신들의 전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헤라는 아이네이아스를 죽이고 싶었고, 죽이지 못한다면 생고생을 시켜야 속이 풀렸으며, 위기나 고난에서 벗어나는 꼴을 보기만해도 화가 치밀어서 '또 다른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네이아스와 그 일행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맞보게 한다. 허나 그럴 때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심지어 제우스에게도 찾아가서 자기 아들 살려달라고 확답을 받아냈고,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가 최강의 무구를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에게까지 달려가 '아들의 안위'를 봐달라고 통사정을 할 정도였다. 어렵사리 이탈리아에 도착하고서 주변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때에도 어김없이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안배하며 '로마건국'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쉼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다. 물론, 전쟁의 막바지에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모든 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오직 아이네이아스만의 힘으로 적들을 제거하고 '건국'을 완성하지만, 그 전에 이미 '아프로디테'가 거의 모든 것을 다 안배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일 정도였다. 그만큼 여신들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신들의 전쟁'을 슬며시 벗겨내고 읽으면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과정이 세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네이스>는 당시 로마인들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신들에 의해 운명적으로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조국 로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아이네이스>를 로마 건국의 '당위성'이란 주제로 읽어야만 하는가? 독자는 나는 '로마인'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뻔히 아는 정황에서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읽어야만 할까?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 책 <아이네이스>를 오늘날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애초에 '이야기'는 만들어질 뿐이다. 바로 '목적'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순수'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시조를 '트로이'에서 찾았다. 로마는 '신화'조차 그리스에서 빌려왔다. 그러니 '시조'를 빌려오는 것도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들이 사랑했던 '그리스'와 '트로이'에서 각각 '신화'와 '신조'를 빌려와서 '균형(?)'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을 '트로이'에서 왔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트로이인'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것이 '로마인'이 갖춘 포용력(?), 관대함(?)의 표상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부각하지 않고, 배울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는 관대함으로 일관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런 장점을 '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나타냈다. 그렇게 로마인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배타성'을 배제하고 배울 것을 확실히 배우며,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덕'을 갖춰나갔다. 그런 로마인들의 장점이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를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책을 널리 반포하라 명령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로마는 '황제정'으로 바뀐 뒤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았던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에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들더니 끝내 '배타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이다. 그렇게 로마는 <아이네이스>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망해갔다. 그 정점을 이룬 '책'을 읽으며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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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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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세이아>는 <일리아드>와 쌍을 이룬다. 같은 '호메로스'가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둘은 굉장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서사를 이야기했다면, <오디세이아>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귀환서사'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같은 영웅은 결코 아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길 고대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 말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본능(생의 의지)'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일리아드>보다는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더 친밀감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영웅적인 모습에는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는 법이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뇌와 고난을 겪는 모습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법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꾀가 많은 영리한 사람인데도 그토록 모진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살펴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오디세우스'의 공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가 트로이측을 속이고 패배한 척 '목마' 하나만 덜렁 남겨놓고 후퇴한 '기만술'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을 잃은 그리스 연합측이 승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트로이를 응원했던 '신들의 분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0년 만에 승리를 거둔 그리스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귀환을 서둘렀는데, 오디세우스도 귀환길에 올랐다가 그만 '포세이돈의 아들'을 해코지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포세이돈은 분노를 참지 않았고, 오디세우스를 바다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고향땅 이타카를 밟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고난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겐 제우스가 '고향땅으로 귀환할 운명'을 점지해준 까닭에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예 죽일 수는 없었지만. 죽음보다 못한 고난을 겪게 하며 무려 10년 동안이나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전쟁 10년, 고난 10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형벌을 겪게 된다. 20살의 건장한 청년이 40살의 장년으로 만들 기나긴 세월이다.

 

  한편, 고향땅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남편이 없는 설움, 아버지가 없는 설움을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10년 넘게 공석이 된 자리(?)를 탐내는 변방의 귀족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스릴 주인이 없는 왕국을 탐냈고, 지켜줄 남편이 없는 여인을 탐냈다. 그래서 이 두 자리를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 '결혼'을 청하러 매일낮밤을 페넬로페를 희롱하고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 왕국과 어머니를 지켜야 할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가 지키려 했으나 아직 십대에 불과했던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 확인하고서 발만 동동거리는 형편이었다. 이에 페넬로페는 아들의 귀환만 기다리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수의를 만든다는 핑계를 대고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낮에는 열심히 수의를 짰다가 밤이면 낮에 짰던 수의를 도로 풀어내면서 말이다. 과연 꾀보 오디세우스의 아내답다 하겠다.

 

  허나 그런 기지만으로 버티는 것도 10년이 지나니 별소용이 없었다. 왕국내에서도 오디세우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핑계삼아 망나니 같은 귀족들의 편을 들어 '왕국의 비밀'이 하나둘 세어나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신자가 생긴 것이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이 되면 페넬로페는 저들 귀족 가운데 한 명과 '강제결혼'을 치뤄야 할 것이고, 텔레마코스는 왕국에서 쫓겨나 방랑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일궈낸 터전이 송두리채 다 빼앗길 판이 된 셈이다. 이에 텔레마코스는 이타카를 몰래 빠져나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신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고 곧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확신도 받아오게 된다. 그런데도 20년 간 빈자리였던 것을 오디세우스가 되돌아온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땅 이타카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부터 '권선징악'이 실현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동서고금의 정의론'이 실현되고, 오랫동안 갈고 또 갈았던 '복수의 칼날'이 여기저기 번쩍거릴 때마다 독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인간적인' <오디세우스>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니면서 고생을 했다지만, 페넬로페도 그에 못지 않게 고생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분노의 창칼로 '정의의 심판'을 내릴 때, 페넬로페도 '심판자'가 되었어야만 했다. 적어도 악한 짓을 저지른 '시녀(여자)들'만이라도 페넬로페가 처벌하는 '당사자'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복수는 오직 오디세우스의 몫이었고, 페넬로페마저도 '심판의 대상'이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20년동안 '정숙한 아내'로 남아있었는지 검증받아야 했단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20년 동안 '전리품'으로 여인을 탐했고, '미녀들의 유혹'에 넙죽 홀려서 황홀한 나날들을 몇 년간이나 보냈으면서, 페넬로페는 '시월드'에서 없는 남편을 대신해 시중을 들어야 했고,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으며, 그럼에도 욕정에 빠지지 않는 '정숙한 아내'로 남았어야만 했다. 그 모진 시련을 다 이겨내고도 '심판의 날'까지도 오디세우스에게 정숙함을 검증받고 '통과'해야만 했다. 꽤나 부당한 처사라고 보여지지 않는가 말이다. 정말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수천 년전의 '성평등 의식'이 오늘날과 같을 수는 없을 테지만, 우리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오디세우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삼고 있는데, '여성독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대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하겠기에 그런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아>를 여성독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바람직할 것인가? 현대판 <오디세이아>는 분명 온갖 불륜과 바람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남편'이 정숙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귀환(?)'한다는 내용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 과연 20년 동안이나 '여성편력'으로 화려한 대장정을 치루고 돌아온 남편(혹은 애인)을 제정신으로 맞이할 '정숙한 아내'가 현대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질문일 뿐이다. 과연 바람둥이 남자를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하며 정숙한 여자'가 있다면 존경받는 위인으로 삼을 만할 것인가? 아니면 역발상으로 20여 년간 '남성편력'으로 장식하며 수많은 수펄들을 끌어안았고 현재도 끌어안고 있는 매혹적인 여왕벌(?)만을 기다리는 '순정남'을 위인으로 삼을만 하냔 말이다.

 

  이따위 '순정남'이 있을지라도 어떤 남자도 '위인'으로 존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정숙한 남편'을 정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숙한 아내'는 정상(?)으로 볼 수 있느냔 말이다. 왜 여자에게만 이따위 '굴레'를 짊어지게 하고 남자들만의 '환상속의 아내상'으로 삼고서 여성들에게 강요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여성독자들에게 '페넬로페'가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직접 '오디세우스'가 되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를 읽었다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험'과 '여행'을 떠나서 견문을 넓히고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라고 권유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정이 '고행길'일지언정 그것이 '인생'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침실 따위가 아닌 진정한 여행가들이 언제든 돌아가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귀띔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오디세우스>를 바람직하게 읽었다 할 것이다.

 

  우리는 곧잘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맹점에 빠지곤 한다. 책에 적혀 있으니 '진실'이고, '사실'만 담겨 있을 거라고 말이다. 더구나 '고전'처럼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권위'에 짓눌려서 '잘못된 개념'을 곧이곧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고작 몇 살만 차이가 나도 '세대차이' 운운 하면서 어찌 수십, 수백, 수천년 전의 책을 곧이 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경전>일지라도 시대에 맞은 올바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책에 나와 있는 문구를 밑줄까지 쳐가며 달달 외우는 것은 하릴없는 짓이다. 차라리 외우지 말고 '소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다음 '표현'을 해야 바람직하다. 그리고 내것으로 만든 표현을 주고 받으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면, '내것'이 올바른지 그른지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내것'을 많이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책들, 즉 <고전>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동시대 뿐만 아니라 수세대에 걸쳐 오랫동안 '검증'해온 책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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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1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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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이야기한 '서사시환(敍事詩環: 서사시를 모아 이야기 순서대로 모은 것)'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순서대로 제목을 나열하면, <퀴프리아>(스타시노스), <일리아스>(호메로스), <아이티오피스>(아르크티노스), <소 일리아스>(레스체스), <일리오스의 함락>(아르크티노스), <귀향>(아기아스 또는 에우멜노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텔레고네이아>(에우감몬) 순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이야기는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디세우스의 이타케 귀환'까지 이어졌기에 전반적인 서사는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만 남아 있기 때문에 나머지 작가의 이야기들마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같이' 수록되어 널리 읽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으로 <일리아스>의 시작과 끝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독자들이 훨씬 많을 것인데, 정확히 짚어보자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지 9년이 지나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의해 분노로 시작해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11일동안 장례식이 치뤄지는 것으로 <일리아스>는 막을 내린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트로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꼽히는 '파리스의 심판'은 <일리아스>의 앞의 이야기에 해당하고, 더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등장하고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킬레우스가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아 죽고 난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일리아스>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분을 삭히는 내용까지인 셈이다.

 

  그래서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단연 '아킬레우스'이고, 그가 '분노'한 까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럼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하였는가? 그 까닭은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한 지도 어언 9년에 이를 정도로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총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차지할 생각만 앞세우고, 총사령관인데도 전쟁을 승리할 계책 따위조차 변변히 내놓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황이 그리스 쪽으로 우세했던 것도 오직 '아킬레우스' 덕분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가멤논은 전황이 불리하니 '신의 노여움(아폴론의 분노)'을 풀기 위해 아폴론 신전의 신녀를 풀어주라는 장수들의 건의에 호탕하게 '자기몫'을 내놓기는커녕 내놓은만큼 '자기몫'을 챙기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몫이었던 '브리세이아'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자기몫의 전리품도 잃고, 정정당당하게 차지한 전리품을 빼앗기는 명예도 잃고, 사랑하던 여인까지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자 극도로 분노를 하고 '전장'에서 빠져 더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달래기는커녕 자기몫을 챙기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린다.

 

  이렇게 그리스군의 핵심이었던 '무적의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빠져버리자 전황은 역전되어 트로이군이 우세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의 장난에 의해 그리스군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트로이를 밀어붙이게 된다. 이때 파리스가 성난 그리스군을 상대로 '일대일 대결'을 요청하니,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그 대결에 응하면서 잠시 대치상태를 만들게 되었다. 허나 파리스는 애초에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창 한 자루 던지는 것으로 대결은 메넬라오스의 승리로 끝났고,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칼에 곧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애초에 트로이의 편을 들었던 여신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바람같이 낚아채서 헬레네가 있는 침실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파리스는 헬레네와 사랑을 나누고, 메넬라오스는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파리스를 겁쟁이, 비겁자라고 놀리면서 총공격의 선봉에 서니 트로이는 속수무책으로 성벽 앞까지 밀리고 만다.

 

  여기서 '신들의 참견'을 잠시 언급해보자. 그리스와 트로이가 전쟁을 벌이는 대서사시에 신들도 편을 갈라 양측을 응원할 뿐만 아니라 '참견'까지 하며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데 열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은 헤라와 아테나를 필두로 포세이돈(헤라 오빠니까), 헤파이스토스(헤라가 엄마니까), 테티스(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엄마니까) 등이고, 트로이를 편드는 신들은 아프로디테(파리스가 황금사과 찜콩했으니까)를 필두로, 아레스(아프로디테의 불륜남이니까), 아폴론(그리스군이 자신의 신전을 탈탈 털어 훔쳐갔으니까), 아르테미스(아폴론 동생이니까) 등등이 아주 시기적절하게 등장해서 전쟁을 북돋우고, 살육을 부추기며, 아주 지랄찬란하게 10년 동안 인간들을 갈갈 해버린다. 하지만 애초에 '트로이 전쟁'을 계획한 것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맘 먹은대로,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의 이름이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전쟁을 일으키고 조율했으며, 애초부터 트로이는 이 전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을 정해놓았으며, 비록 그리스가 승리를 거뒀을지라도 결코 손쉽게 이기지는 못하도록 10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참전하고 비명횡사하도록 안배해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우스 이외의 다른 신들은 '보조출연'일 뿐이고, 그런 신들이 열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제우스'가 일찍부터 정해놓은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트로이 전쟁'은 또 다른 이름으로 '신들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올림푸스에 오른 신들이 두 차례에 큰 위기인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극복한 뒤에 저들끼리 단단히 서열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한 판 승부를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불사의 몸을 지닌 신들이 싸워봤자 승패를 가룰 수 없는 일이기에 신들을 숭배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의 전쟁을 대신 치르도록 안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들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신들이 안배해놓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시험삼아 '대리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들의 대리전일 뿐이었던 '트로이 전쟁'으로 인해 이름을 길이길이 남긴 것은 '필멸의 존재'였던 인간들의 몫이었다. 무적의 용사 아킬레우스, 지혜보따리 오디세우스, 그리고 조국을 지키다 스러진 영웅 헥토르, 그리고 세계 최고의 미녀 헬레네 등등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업적이 줄줄 흘러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싸움에 휘말리게 만들었던 '신들의 이름'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신들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셈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일리아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는 이유는 고대인들이 감동했던 대목과는 사뭇 달라야 할 것이다. 고대인들은 '그들만의 영웅'이 전장의 꽃으로 산화하며 아름답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영웅적인 서사에 매료되어, 자신들도 전장에 나서면 그들처럼 용감히 싸우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현대인들에게 <일리아스>는 그리 감동적이거나 격동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고작 전리품 하나 때문에 삐쳐서 전장에 나가지도 않고 동료 전우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해서 '영웅'이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무리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하지만 적장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풀이로 삼아 능욕을 저지르는 아킬레우스는 그저 미치광이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에 감동 운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서 느껴야 할 바는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생각의 틀이 바뀌는 전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기원전 12세기 즈음에 벌어진 전쟁을 기원전 8세기 즈음에 살던 작가가 써낸 고대의 서사라는 점에서 완전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현재의 독자들이 <일리아스>를 읽을 때에는 자연스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읽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신들이 정한 '운명'을 거슬러 저마다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고대 독자들의 눈에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인간의 삶 때문에 더욱더 신을 경배하게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는 관점으로 <일리아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다시 말해, 아킬레우스는 비록 죽었을지언정 그의 영웅다운 용맹스러움을 배울 수 있으며, 헥토르도 비운의 죽음을 당하지만, 침공하는 적들과 맞서 조국을 수호하고, 백성을 지키며,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염려하며 지키려는 진정한 수호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모두가 죽고, 남겨진 것도, 얻은 것도 거의 없이, 오직 '허무'만 남게 되는 전쟁의 쓸모없음을 깨닫았으면 좋겠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트로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패망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은 전리품과 인질들은 남김없이 그리스 참전장수들의 몫으로 분배된다. 전쟁의 원인으로 꼽혔던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도 원래의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극적으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 만이 후손을 남겨 '로마'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했지만,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중이다. 하지만 10년 전쟁으로 탕진한 것에 비한다면 초라한 승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끝자락은 언제나 허무하다. 승자도 물론이거니와 패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익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려고 하는 것일까? 고작 몇몇 사람들의 명예와 이득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국가나 민족의 자존심이 무어 그리 대단하길래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한단 말이냐? 결국엔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인데 말이다.

 

  이런대도 전쟁 운운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이 바로 '독재자'가 틀림없다.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면 나라를 망칠 원흉이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솎아내길 바란다.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강력한 무기와 막강한 화력으로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면 이득만 남는 전쟁을 할 수 있다며 달콤한 유혹을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건 '무기매매상인'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전쟁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골빈놈이니 주디를 꼬매뿌려도 무방하다. 절대로 '전쟁'은 아니 될 말이다.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은 독자들이라면 '반전'은 상식일 것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관점으로 읽으면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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