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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 평등한 세상으로 향하는 진실의 발걸음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정재윤 옮김, 임승수 해제 / 롤러코스터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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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VIII / 롤러코스터 1번째 리뷰] 이 책은 그리스의 전(前) 재무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쓴 청소년을 위한 경제책이다. 하지만 나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딱히 구분하지 않으련다. 왜냐면 0세부터 19세까지 '미성년'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는 절대로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수준'을 고려해서 책읽기를 권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수준은 절대로 '남'이 결정할 일이 아닌 '어린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일이다. 그러니 책의 리뷰를 전하는 처지에서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고, 읽는 이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초중고'로 따로 구분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다만 이 책은 '독서수준'이 조금 높은 어린이가 읽기에 좋은 책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싶다. 조기 경제교육 붐이 일고 있는 지금 중·고등학생이 읽기에 적합한 책이라 여겨지는 책이라도 초등생도 얼마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그렇다.

이 책은 두 개의 경제체제를 서로 비교분석하며 미래세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직접 어느 경제체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자신들이 살아갈 사회에 유익한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어린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제학개론'에나 어울릴 만한 딱딱한 경제용어나 풀이로 쓰여지지 않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와 봤음직한 <영화>의 줄거리를 소재로 삼아 두 가지 경제체제의 원리를 소개하였다. 두 가지 경제체제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말한다. 물론 경제학적인 용어로는 사회주의보다 '공산주의'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지만, 여기서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처럼 '북유럽 복지국가의 경제형태'에 걸맞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최근 그리스 경제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관계로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조금 더 바람직한 경제체제인 듯한 인상으로 경제학을 풀어낸 책이라는 것도 밝혀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미래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나쁜 경제체제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글쓴이는 '경제체제, 그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어느 쪽 경제체제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경제체제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어떤 식으로 운영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전 재무장관 출신인 탓에 '자본주의'로 살아본 경험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참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장점을 살렸더라면 그리스의 현실 경제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양쪽 모두에 장단점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래세대의 주역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완성하고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경제체제'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한 나라의 경제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란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그리스 경제상황은 썩을대로 썩어버린 정치세력들이 집권을 하며 그리스의 경제를 좀 먹고 그리스 젊은 세대들의 미래마저 암울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어린 세대'에게 있음을 당부하고 있다. 부디 어린 세대들은 올바른 '선택'으로 현재의 어른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바로 '불평등'이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자본주의는 순기능이 마비가 되고 온갖 사회문제는 점점 심화되고 해소되는 일이 사라지게 되어 버린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수단이 바로 '부자'들에게 쏠린 부를 '빈자'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수단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써먹어야 하는데,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해지면 가장 먼저 '정경유착'이 발생해서 부패한 정치인이 장악한 권력으로 부당한 경제수단을 연이어 악용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부추길 뿐이니 한 나라의 경제가 망가지는 일은 순식간이고 절대불변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애초에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왜냐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애초에 '빈부격차'를 방지할 수 있는 '부의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한정된 자원'의 낭비를 애초에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꼭 필요한 물건만큼만 생산하면 그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처럼 우리의 하나 뿐인 지구환경을 황폐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점만 있다면 어느 국가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정치세력', 다시 말해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인들이 '절대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착한(?) 정치인들이 욕심(?)으로 가득한 경제인들의 경제활동에 적절히 개입하고 부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공평무사한 정책만을 실행할 수 있도록 국민들 하나하나가 올바르고 공정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조건', 또한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걸 어느 정도 실현한 국가들이 바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고 말이다. 그러니 절대 실현불가한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한 번 정국이 불안정해진 나라에서 이러한 선진적인 시민의식이 발현하고, 그 싹이 터서 성숙한 민주질서를 갖추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리고, 피를 부르는 혁명이 자행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경제발전'이라는 사실은 이미 '대한민국'이 증명한 팩트다. 그런 대한민국조차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을 이루기까지 지난하고 복잡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강요받아야만 했는지...그 어려운 일을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세대의 주역이 깨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암울하다고 '가상현실'로 도망가서 허상의 행복만을 누리려는 나약한 마음을 갖지 말고, 나쁜 현실을 깨뜨리고 나쁜 고리를 끊어나가 궁극적으로 '밝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금세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좋은 것을 '갖추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애초부터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좋은 사회이겠지만, 좋은 것을 갖추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남 다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오오오력'을 해서 그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면 아주는 아니어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좋은 것을 갖출 수 없는 '희망 없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다른 사회'로 떠나는 방법도 있겠지만, 글쓴이는 희망 없는 사회속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지 다음의 설명을 들으면 금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 뿐인 지구'가 망가졌다고 '또 다른 지구'를 찾아나설 생각인가?"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불평등이 만연한 회생불가능한 국가일지라도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가닥 희망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그 희망을 따라 나설 의향이 있다고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독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도 희망이 없어보였다. 나치 독일군을 쳐부술 소련군(해방군)이 자신들이 위치한 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리곤 했지만, 현실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샘솟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이루어졌다. 만약 그 의지가 없었다면 희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고 희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치주의가 지나간 자리에 공산주의가 시뻘겋게 타올라 희망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아직 진정한 희망이 다가오지 못한 까닭이다. 만약 거기서 굴복하고 희망을 의심하며 '좋은 삶'을 포기한다면 그냥 끝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희망이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 내게 '꼭 알맞는 것'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 경제체제의 장단점을 깨우쳐 스스로 선택하고 '실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좋은 경제체제'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해봄직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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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미국, 어떻게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79
유종선 지음 / 내인생의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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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XVII / 내인생의책 9번째 리뷰] 사실상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초강대국일지는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경제성장은 점점 더뎌지고 있고 경쟁상대인 중국은 바짝 쫓아왔으며, 이대로 가면 조만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보다 압도적으로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지도 벌써 오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전망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 전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경제가 앞으로도 주춤거리고 있어야 하고, 중국의 경제성장은 앞으로도 '두자리 수'에 가까운 높은 수치로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축통화'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적 방어수단은 운신의 폭이 넓고, 중국의 경제성장 원동력은 '내수경기 불안'으로 침체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이 경제대국 1위로 발돋움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상황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크름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양쪽에서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과거에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하며 미국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었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런 판국에도 미국을 '초강대국'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미국이 '초강대국'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우리 나라에서 저멀리 떨어져 있는 '태평양 건너의 머나먼 나라'인데 말이다. 그건 우리 나라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를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데 미국의 역할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이 앞으로도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큰 변화는 당분간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경제위기와 같은 일로 미국이 '국외문제'에 더는 간섭할 수 있는 힘을 상실했을 경우에, 우리 나라로서는 크나큰 변화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이 미국이 빠진 틈을 타서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다. 더구나 '남북'으로 갈라져서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주춧돌' 하나가 빠진 틈을 타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하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안심일테지만, 대한민국의 '경제'부터 주변국들의 영향에 쉽게 휘둘리는 상황이다보니 우리 스스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구한말'에 청일러에게 휘둘렸던 것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당시 고종임금은 청일러의 세력확장에 맞서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지만, 미국은 애초에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방관하는 자세만 취하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제국과 손을 잡고(가쓰라-테프트 밀약) 조선과 필리핀을 사이좋게(?) 노나먹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이후에는 한국에 '점령군'으로 첫발을 디딘 미국은 그후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를 띠며 한국에 원조를 했으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미국도 틈만 나면 '한반도 문제'에서 발을 빼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주 노골적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거액의 방위분담금을 요구하며 한국을 압박했지 않은가. 현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달라진 건 없었다. 결국, '주한미군' 주둔비에 해당하는 금액은 해가 갈수록 늘어날 것이고, 한국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을 요구한다면 '주한미군'도 결국엔 철수하게 될테다. 이럴 정도로 미국의 국력과 경제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간접적이나마 말이다.

그렇다면 한때는 세계를 주름잡던 '초강대국'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미국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세계적인 경제 위축'과 함께 '기후위기'라고 불릴 정도로 매년 끔찍한 재난이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에서 '가뭄과 식량난'이 일어나면 아프리카만 못살고 배고프고 마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기후위기로 찾아온 가뭄과 식량난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정국 불안'을 불러일으켰고, 크고 작은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이주민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아프리카 주민들'이 세계 여러 나라로 '난민신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해마다 늘어나는 난민들로 인해 몸살을 앓게 된 '유럽 선진국들'조차 난민신청을 거절하게 되고, 갈 곳을 잃은 난민들은 전세계적으로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되고, 설령 난민으로 받아들여진다고해도 전세계의 경제가 침체되고 각종 기후재앙까지 벌어지며 경제적 피해를 받게 되자 '자국이기주의'를 내세운 '보수정파'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각국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쟁까지 벌이는 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지금의 러시아 푸틴과 이스라엘 네타냐후가 주변국들과 전쟁을 벌이는 까닭도 '자국의 경제위기' 때문이고, 그런 경제위기가 발생한 까닭도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에 따른 전지구적인 위기와 재난 때문에 벌어진 일인 셈이다. 미국의 경제위기라고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면 미국은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섞여있는 '다인종-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주 질긴 '인종차별의 역사'가 현재의 미국을 발목 잡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위기속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을까?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향후 100년간은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다. 과거의 로마제국도 '팍스 로마나' 시절로부터 수세기동안 제국의 지위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망한 것처럼 미국도 결국엔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을 대신할 수출길을 열어놓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주변국'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며 평화로운 안정을 도모하는 선진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미국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쌓는 일이다. 이는 '세계경제의 중추(허브) 역할'을 우리가 직접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자립경제를 완성한 것만이 아니라 '군사력 강국'으로 부쩍 성장하여 그 어떤 나라도 감히 대한민국을 넘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역량을 갖추었다고 심어놓으면, 그 어떤 나라도 감히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보고 있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곧 망한다. 그때에는 전세계가 새로운 '힘의 논리'로 재편될 것이다. 그때에 대한민국이 강대국들이 노나먹는 '파이'가 될 것인지, 세계 여러 곳의 '파이'들을 제 몫 단단히 챙길 것인지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해나가야 할 숙제인 셈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놓치게 될 때, 약육강식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란 말이다. 그때에 대한민국은 강대국이 되어 있을까? 약소국의 설움을 톡톡히 치룰까? 바로 우리가 맞이 해야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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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이야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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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 '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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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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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점점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디지털 치매'라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노래방에 가면 '좋아하는 노래의 번호' 정도는 습관적으로 눌러 신나게 불러재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지인들의 연락처'도 같이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백업'을 미리 받아놓아서 그럴 염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지인들의 연락처'를 척척 눌러서 연락하지는 못한다. '검색기능'이 너무 익숙해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 책은 '거꾸로' 생각을 해보란다. '처지를 바꾸서 생각해보기'는커녕 '내 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는데 익숙해져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일 수도 있겠다.

  허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해보았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전문용어(?)로 '배려'라고 한다. 이 책에는 8명의 명사들이 나름의 생각을 '뒤집어서' 펼쳐보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승자독식',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 '시', '공동체', 그리고 '평화'에 관한 각각의 편견들을 한껏 뒤집어 보았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볼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뒤집힌 세상이 불편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또 한 번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려'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인 것이다. 그런 '배려'가 전문용어인 까닭은 '그것'은 아무리 남발되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하고, '배려'를 배푸는 사람은 박수를 받기 때문이다. 설령 그 '배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이자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2008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벌써 16년이나 지난 책이라서 '책내용'을 읽다보면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신박한 까닭은 십여 년 전에 '미래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의 '현재'인 까닭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 당시에 '예상'했던대로 지금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그 예측이 사뭇 달라지게 진행된 것도 있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엔 '예측'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심각한 현실문제'가 되어 버린 '불평등'은 너무나 정확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이를 테면, 2008년 당시엔 '중산층의 몰락'을 위험하다고 경고했었는데, 2024년인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내용이다. 이 책은 '승자독식 사회'의 위기를 경고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위기가 '현실'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계층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회속에서 '경제적 계급사회', 즉 '새로운 신분제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몇몇 '소수'가 경제적 부를 독차지한 세상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99%의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족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스운 일이지만 '경제적 부의 불균형'이 벌어진 사회현실에 별로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히려 좋단다.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에서 어떻게 '아파트 몇 채'를 손에 쥔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대해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는 착각(?)에 빠져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자신들은 '경제적 유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사회적 전반적인 문제를 오히려 '문제없음'으로 인식하고, 집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오르는 '집값' 말고는 이들도 변변한 재산이 없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상위 1%라는 '재벌계급'에 낑기지도 못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동산 재벌'이 될 것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을 찬양할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한민국 1%'만 만족스럽게 만드는 '승자독식'이 판을 치게 냅둘 것인가? '언제까지' 말이다. 현재의 2, 30대 청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다. 사회는 점점 팍팍해지고, 비전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도록 깜깜한 세상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점점 물가는 오르고, 정규직 취직은 '뽑지를 않으니'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이 되느니 알바나 뛰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극을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니' 따위는 헛소리나 나불거린다. '라떼'는 사절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나마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청춘들은 '노력한 만큼 골병만 드는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정책은커녕 '실업급여'마저 '시럽급여'를 받아먹는다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서 말한대로 '생각'이란걸 하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정보의 바다를 넘어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정작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습관적'으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엄지를 놀려서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들을 보면서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미디어를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 생각에 '진입'하기도 전에 넘겨버리기 바쁘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온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태클을 걸어주면 '땡큐'다. 나는 거기에 수백만 가지 '반박'을 날려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에너지'는 현대인들의 눈에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미쳐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왜냐고?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미쳤다. '강대국'이란 이유로 '주변국'을 간섭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펴는가하면, '납치'를 당했으니 '테러집단'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학교나 병원, 심지어 '유엔'일지라도 대량살상무기를 터뜨리고 보는 '피의 보복'이 당연하다고 나불대고 있다. 또한, 핵오염수를 자국내에서 처리하는 것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바다에 '걸러서' 버리겠다는데도 소위 강대국이란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증명되지 않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막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자칭 선진국들의 방관'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남'이 해결해주겠지라면서 넋을 놓고 기다리면 될까? 택도 없는 소리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맘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돼! 아무리 납치를 당한 처지라고 해도 '테러단체'만 골라 잡아야 곱게 봐줄 수 있지 마구잡이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면 누가 '응원'해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네가 저지른 폭력만큼 너도 똑같이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꺼야. 피의 보복은 언제나 그랬거든! 핵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너희 식수로 쓰라고 말했잖아. 그 오염수를 쬐끔 '누출'했을 때 질색하고 난감해하던 모습을 보니 결코 안전해보이지 않더만. 그런데도 또 방류하겠다고, 더 많이 방류하겠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혼자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잘 울리는 '환경'이 있는 법이다. 나의 외침에 '공명'이 울려서 여기저기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다. 만약,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그런 때가 찾아왔을 경우에 내가 외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도 계속 외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외침이 '공허'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화답'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란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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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
베르길리우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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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네이스>의 줄거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뒤를 이어 트로이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3부작'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리스인인 호메로스에 의해 기원전 8세기에 쓰인 작품이며, <아이네이스>는 로마인인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기원전 1세기에 쓰인 작품으로 엄연히 말하면 전혀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도 세 작품은 교묘하게 줄거리가 이어진다. 그 까닭은 바로 <아이네이스>를 쓴 목적이 '로마의 건국 이야기'에 신묘한 힘을 덧붙이기 위한 '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베르길리우스에게 '건국신화'를 한 편 쓰라고 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위해 마지막 필력을 다하다 병에 걸려 '미완성'인채로 전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에 '미완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불에 태우지 말고 발표하라 명령을 내린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 12권' 모두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베르길리우스는 평생 호메로스를 흠모했기에 그의 작품을 본따서 <아이네이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이 <아이네이스>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그때까지도 덜 알려졌던 '호메로스'도 덩달아서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베르길리우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서 서술자 단테를 지옥으로 데리고 안내를 맡은 이가 베르길리우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단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거의 모든 영웅들이 죽어가는 전투에서 가족과 함께 떠나라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충고를 받고 온가족과 그를 따르는 '트로이인 생존자들'과 함께 정처없는 항해를 떠난다. 이렇게 아이네이아스가 떠나는 긴 항해는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올랐던 이야기 <오디세이아>와 정말 많이 닮았고, 아이네이아스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라틴인들의 땅(이탈리아)'에 도착하고부터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일리아스>와 꼭 닮았다. 하지만 완전 판박이로 베낀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복수'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의 주제는 '로마 건국'이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생존과 귀향'이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주제도 '생존'이긴 하지만, 그 생존 목적이 바로 '로마 건국'에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애초에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아이네이스>를 썼기 때문에 '로마 건국'을 주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초의 황제가 등장할 자신의 조국이 고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에서 유래되었다는 볼품 없는 건국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보다 훨씬 더 신비하고, 신묘한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아들'이 로마 건국의 시조라는 썰을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로마명 '베누스')'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우라노스의 '거시기'가 아닌 '제우스의 딸'로 못을 박았다. 이로 인해 로마 건국의 시조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이지만, 그 로물루스의 조상이 트로이인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이며, 아이네이아스의 엄마는 여신 '아프로디테'이고, 그 여신의 아버지가 바로 '제우스'라는 점을 밝힌 셈이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은 '제우스의 후손'이 건국을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아이네이스>의 골자 되겠다. 어쩌면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현지 답사까지 하면서 '제우스의 후손'인 점을 더 명확하게 꾸미려 했으나, 여행중에 걸린 병이 악화되는 바람이 그 뜻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미완'으로 남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완의 유작으로도 로마제국이 여신 아프로디테의 후예가 세웠다는 정설(?)을 만들어냈으니 그 목적은 '완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여신들의 전쟁'이라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모험과 전쟁은 '인간의 몫'이었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여신들의 끝없는 다툼'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신이 바로 '헤라'와 '아프로디테'였다. 그리고 두 여신이 다투게 된 까닭은 바로 '파리스의 심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말이다. 불화의 여신이 결혼식장에 던져두고 간 '황금사과'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 명의 여신 앞에서 누구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인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를 뽑으면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아테나를 뽑으면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아프로디테를 뽑으면 '최고의 미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스는 '최고의 미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헤라와 아테나는 아프로디테와 '미모대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아프로디테'가 하는 일마다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전쟁의 패배로 '트로이'는 멸망하게 되었고, 그후 '트로이인들'은 거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트로이인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그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는 <일리아스>의 격렬한 전투속에서도 여신의 도움으로 번번히 살아남게 되었고, '트로이 목마'로 인해 끝내 멸망에 이른 트로이 성에서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로마건국'이라는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갖은 모험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허나 아이네이아스의 고난은 곧 '여신들의 전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헤라는 아이네이아스를 죽이고 싶었고, 죽이지 못한다면 생고생을 시켜야 속이 풀렸으며, 위기나 고난에서 벗어나는 꼴을 보기만해도 화가 치밀어서 '또 다른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네이아스와 그 일행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맞보게 한다. 허나 그럴 때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심지어 제우스에게도 찾아가서 자기 아들 살려달라고 확답을 받아냈고,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가 최강의 무구를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에게까지 달려가 '아들의 안위'를 봐달라고 통사정을 할 정도였다. 어렵사리 이탈리아에 도착하고서 주변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때에도 어김없이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안배하며 '로마건국'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쉼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다. 물론, 전쟁의 막바지에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모든 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오직 아이네이아스만의 힘으로 적들을 제거하고 '건국'을 완성하지만, 그 전에 이미 '아프로디테'가 거의 모든 것을 다 안배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일 정도였다. 그만큼 여신들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신들의 전쟁'을 슬며시 벗겨내고 읽으면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과정이 세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네이스>는 당시 로마인들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신들에 의해 운명적으로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조국 로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아이네이스>를 로마 건국의 '당위성'이란 주제로 읽어야만 하는가? 독자는 나는 '로마인'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뻔히 아는 정황에서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읽어야만 할까?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 책 <아이네이스>를 오늘날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애초에 '이야기'는 만들어질 뿐이다. 바로 '목적'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순수'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시조를 '트로이'에서 찾았다. 로마는 '신화'조차 그리스에서 빌려왔다. 그러니 '시조'를 빌려오는 것도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들이 사랑했던 '그리스'와 '트로이'에서 각각 '신화'와 '신조'를 빌려와서 '균형(?)'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을 '트로이'에서 왔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트로이인'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것이 '로마인'이 갖춘 포용력(?), 관대함(?)의 표상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부각하지 않고, 배울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는 관대함으로 일관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런 장점을 '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나타냈다. 그렇게 로마인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배타성'을 배제하고 배울 것을 확실히 배우며,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덕'을 갖춰나갔다. 그런 로마인들의 장점이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를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책을 널리 반포하라 명령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로마는 '황제정'으로 바뀐 뒤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았던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에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들더니 끝내 '배타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이다. 그렇게 로마는 <아이네이스>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망해갔다. 그 정점을 이룬 '책'을 읽으며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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