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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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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 / 김경원 / 다산초당 (2017)

[My Review MMCXLIX / 다산초당 3번째 리뷰]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것은 딱 질색하더니 급기야 복잡한 것조차 생각하기 싫어해서 단순하고 간단한 것만 찾으려 한다. 그런데도 단군 이래 가장 '스펙'이 높은 젊은이들은 대학진학률도 전세계적으로 최상위권인 까닭에 무식한 것은 참지 않는다. 단순하고 간단한데 '유식'하게 보이려면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바로 '요점정리', '핵심정리'를 딱 해서 단박에 알아듣게 만드는, 쉽게 말해 '원포인트 레슨'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어떤 학문이든 '딱 한 마디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 학문에 정통해야 하고, 통달해야 한다. 정말이지 빠삭해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든, '핵심'을 찌르든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므로 아주 쉽게 딱 한 마디로 알아 들을 수 있게...암튼 무지 쉽게 초고수의 능력을 갖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요즘에는 '가능'하다. 어떤 분야든지 그쪽에서 통달한 누군가가 나와서 '초심자'도 단박에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요점'만 딱 짚어서, '핵심'사항만 콕 찔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진정한 능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독서' 분야에서 그런 능력자가 되길 희망하는데 아직은 '도전정신'만 가득할 뿐이다. '실력'도 없이 무턱대고 '다독'만 하고 있는 그런 초심 모드로 말이다. 암튼, 철학 분야에도 그런 유형의 책들이 즐비한 요즘이다. 이 책도 그런 의도로 출간되었고 말이다. 지은이는 '하타케야마 소'라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철학과를 전공한 '철학 강사'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좋아하는 모양으로 주요 저서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철학 입문>이란 책을 펴냈다고 한다.

'생각하는 힘'이란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유명한 말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의 뜻도 알고 있는가? 대부분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실제로 한 말은 "네 무지(無知)를 알라"는 말을 했고, 풀이를 하면, '네가 모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니 '당신도 모르는 것이 있어'라는 말이 뭐가 그리 대단한 '진리'라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뜻풀이를 하자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되 물으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리스 시민들에게 찾아가 '문답법'을 실시했다고 한다. 전쟁영웅인 장군에게 찾아가 '용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최고의 부자에게 찾아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단다. 그리고 장군은 "그거라면 내가 잘 알고 있지. 용기란 적을 앞에 두고서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는 것이오"라고 당당히 말했단다. 한편 부자는 "아, 행복 말인가. 그거야 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지. 행복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라네"라고 자신있게 말했단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되물었다. "그럼 '작전상 후퇴'를 하고 전쟁에서 승리를 한 장수가 있다면 용기가 없는 거겠군요?", "그럼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은 사람은 얼마를 주고 사면 행복할 수 있소이까?" 이런 대답하기 곤란한 고약한(?) 질문이 몇 번 오가다 보면 용감한 장군이라도, 그리스 최고의 부자라도 '할 말이 없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오"라고 꾸중을 하면서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라고 대답하자, 성이 난 장군과 부자는 "그럼 소크라테스, 당신은 잘 아시오?"라고 성질을 내면서 물으니, 소크라테스는 "나도 모르니 질문을 한 것 아니겠소.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현명함을 깨우쳤다오. 그리고 끝없이 배움의 자세로 공부할 따름이오"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니, 그리스 시민 가운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얄밉고 제거해버리고 싶은 '1순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청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다니니 정치인들이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고, '사형판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죄목은 '신을 믿지 않음(무신론)', '청년들에게 불온한 사상(문답법)을 전파함' 등을 내세워서 말이다. 똑똑한 사람이 잘난 체까지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권력'을 갖지 못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튼, 생각하는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이리 길게 했다. 그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뻔한 답이지만 다름 아닌 '철학'이다. 이 책도 그런 의도에서 출간되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는지는 너무 유명해서 두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다. 대학진학률도 50%를 겨우 넘기고, 만화책이 아니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교과서조차 '만화책'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온통 그림투성이고, 교육용 영상자료도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집중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의 독서인구가 정말 많다고 자랑을 하지만,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고 있는 책도 대부분 '만화책' 아니면 '대중잡지'라고 한다. 나 어릴 적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지 알고 있느냐면서 제발 책 좀 읽으라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는데, 요즘의 일본은 그때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다. 하긴 우리 나라 젊은이들도 책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즐겨 읽어서 그렇지 '독서인구'가 예전에 비해서 정말 많이 늘긴 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철학책'은 과연 얼마나 읽을까? 요즘엔 정말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철학책'을 읽지는 않는다. '너튜브' 같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아주 쉽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을 더 많이 즐겨본다. 요즘 '인문교양'을 다룬 동영상 강좌가 정말 많으니, 굳이 힘들게 책을 읽는 이들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중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은 재밌는 철학책이 나온 것이다. 재밌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책 말이다.

이 책에는 37명의 철학자가 등장해서 '철학 논쟁'을 벌인다. 고대철학에서부터 중세철학(신학)을 거쳐 근대와 현대의 철학까지 '철학사의 흐름'을 유유히 탐색하듯 매끄럽고 맛깔나게 이어지는 철학적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더구나 철학자들의 '일러스트'까지 수록되어 있어서 '초심자의 흥미'를 샘솟게 만들었다. 일러스트가 어째서 '흥미'를 끌 수 있느냐 하면, 정말이지 다들 '미남자'로 미화(美化)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추남'으로 유명한 소크레테스까지 잘 생기게 그려넣었다. 내가 가르치는 한 여고생은 "이렇게 잘 생긴 철학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책이 어렵지 않았어요"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하긴 '아이돌'이 왜 인기가 많겠는가. 힘든 군생활도 '관물대 여신'을 매일 갈아끼우며 버티...쿨럭쿨럭

이렇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정작 '철학'에 관심을 갖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중요한 철학 내용으로 눈길을 돌리면 '철학 논쟁'을 주제로 배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소년범죄'를 다루면서 엄벌을 줘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철학자들을 찬반으로 나누어 그 '철학자들의 대표 사상'을 근거로 삼아 한 편의 '법정드라마'처럼 공방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기초 상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철학자들의 논쟁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법정드라마나 의학드라마를 볼 때 '전문가'라서 즐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있으면 쉽게 '철학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논쟁을 읽어가면서 '철학자들의 대표 사상'에 익숙해지게 된다. '소년범죄' 논쟁에서는 엄벌을 줘야 한다는 쪽에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고, 엄벌에 반대하는 쪽에는 역시나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과 '공자'가 등장했다. 철학에 관심이 있던 분들이라면 '양적 공리주의'와 '질적 공리주의'가 대결을 벌이면서 이상적인 공자철학과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쟁의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책의 내용은 그닥 어렵지 않다. 논쟁을 '대화'를 중심으로 이어나가고, '대화의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면 '논쟁적 대립'속에서 철학자들의 대표적 '철학사상'이 극명하게 대립하며 보다 뚜렷한 철학적 윤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초심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다음 논쟁 주제'로 넘어가면 앞서서 이야기했던 철학사상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질 것이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앞서 등장했던 철학자가 '1회성 등장'이 아니라 '수차례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대표철학사상'의 맥락을 반복해서 엿볼 수 있으니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철학사상가들의 대표철학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철학사상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철학사상을 참고해서 '자기만의 가치관 형성'을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이 철학교육의 핵심포인트도 여기에 있다. 위대한 철학사상을 달달 암기하는 것도 좋은 공부방법이긴 하지만, A라는 철학자가 B라는 사상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외운다한들 뭐에 쓸 것이냔 말이다. 옛날에는 '백과사전식 지식'을 누가 더 많이,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AI검색'을 통해서 아주 쉽게 해결될 사안이다. 그러니 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모르는 것을 애써 '아는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고백하고 '배우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내 삶을 바람직하게 이끌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나는 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라도 더 배움을 늘려나가야겠다. 그렇게 하면 나는 10년 뒤에 많은 것을 깨달은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해 있을 거야. 그때 내 꿈을 실현해 나가야겠다. 공자께서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하셨으니, 늘 겸손한 자세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나도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이런 삶은 멋진 것 같아. 더욱 정진하자!...'가치관 형성'이란 이런 것일 게다. 물론 이것과 정반대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도 마주할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다. 남의 이익에 앞서 내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손해 보는 삶은 '실패한 삶'이다. 무조건 승리하고 쟁취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 당한다. 절대 뒤쳐지지 말자.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이런 삶은 정말 멋지고 신 날 것 같아!...이 둘이 만나면 어떤 논쟁을 벌일까?

사실 철학수업은 늘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아이들은 막상 철학수업을 어렵게만 생각한다. 그 까닭은 '철학사상'이 매우 심오하고 어렵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철학수업을 대신하면 된다. 누구의 철학도 아닌 '자기 철학'이니 크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 철학'을 관철시킬 수 있는 '타당한 근거'만 부지런히 찾아오면 된다. 여기서 '타당한 근거'가 바로 '철학자들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의 대표사상이 '나의 가치관'과 가장 비슷한지 찾아내면 그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철학수업은 준비완료다. 나머지는 치열한 논쟁을 할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자신감 뿜뿜하고 싶다면 '자기 가치관'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반론에도 흔들리지 않을,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 단단히 무장하면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그리고 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 역시 '철학사상'에서 찾으면 된다. 찾기 어렵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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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자본주의, 왜 변할까? - 책가방문고 29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6
데이비드 다우닝 지음, 김영배 옮김, 전국사회교사모임 감수 / 내인생의책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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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6 : 자본주의, 왜 변할까?>  데이비드 다우닝 / 김영배 / 전국사회교사모임 / 내인생의책 (2011) [원제 : Political and Economic Systems: Capitalism (2010년)]

[My Review MMCXLIII / 내인생의책 13번째 리뷰]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아니 애초에 '공산주의'는 실현된 적도 없다. 공산주의 이념은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그 이념으로 실현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는 21세기를 맞이하지 못하고 1990년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를 표방한 나라들은 남아 있다. 중국, 북한, 쿠바 등이 그렇지만, 이들 나라조차 완전한 공산주의 이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일부 이념적인 부분만 남겨 놓은 채 실상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경제체제를 도입해 국제무역의 일원으로 합류하고 말았다.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고립된 채'로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돌아야 하고, 경제는 굴러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고, 한 나라의 경제는 폭망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이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다가 끝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공산주의에 장단점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주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다름 아닌 '대공황'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패전국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 원인이 되어 '패전국들의 경제'가 폭망하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길이 없었고, 그래서 승전국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지 못하고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경제 주도권은 영국(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자본주의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정부(정치인)의 간섭 없이 잘 굴러갈 것이라 굳게 믿었다. 허나 잘 굴러갈 것이라 믿었던 미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하는 듯 싶었지만, 그 성장은 '거품'에 불과 했었고, 마침내 1929년에 주식시장에 엄청난 대폭락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유망한 듯 싶었던 회사와 공장 들이 줄줄이 폐업을 하자, 이들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도 줄줄이 도산을 했고, 투자자는 한 순간에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실업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기만 했다.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자 자본주의의 성장엔진은 멈춰버렸고, 무역도 끝내 붕괴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대실패였던 것이다.

이렇듯 '초기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율적으로 굴러가며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끝은 '경제 대공황'이었고, 전세계는 경제가 멈춰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맞이한 '자본주의의 대실패'를 극복하고자, 전세계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발판 삼아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과 함께 '공산주의'가 시작되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무너진 자본주의를 되살리려는 '수정 자본주의'를 내세웠고, 또 한 편으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독일의 나치즘, 일제의 군국주의)'이 등장했다. 그 덕분에 전세계는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해야만 했다. 경제 문제는 이처럼 큰 파급력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지만 '파시즘'을 내세웠던 이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무너진 경제를 단번에 되살리려는 시도를 했으나,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경제 회복력'에 비해 효과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무너진 경제를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되살리려 하는 '비도덕적인 방법'이 전세계인들에 호감을 얻을 리도 만무했고 말이다. 그 결과 '파시즘'을 해결책으로 내세운 국가들은 차례대로 패배를 했고, 살아남은 경제체제는 두 가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였다. 그리고 이 두 체제는 뜨거운 열전 뒤에 '경제력'으로 우위를 가르는 '냉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 세기의 대결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대결의 초기에는 '공산주의'가 우세를 점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비는 전 세계적으로 격차가 컸고, 후진국에서는 이 격차가 너무 극명했기에 이를 타파할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진 듯한 '공산주의'는 정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방법 또한 '가진 자의 것'을 국유화시켜 '못가진 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니 얼마나 간단한 방법이고, 공평한 방법이냔 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렇게 공평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잘 했지만, 공평한 선에서 출발한 이들의 '공정한 경쟁 욕구'마저 꺾어버렸기 때문에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은 눈에 띄게 더뎠고, 성장발전으로 얻을 이익이 줄어드니 공산국가에서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몫'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은 점점 하락했고, 사람들은 불만이 늘었지만, 공산국가에서는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발전'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불만세력'을 숙청하고 감시해서 '공산주의 이념'만 강요하는 꼴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못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같은 나라는 '자본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등소평(덩샤오핑)의 '흑묘백묘 이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라는 뜻인데, 풀이하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경제를 살릴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사유재산을 활용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국가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 중국의 경제성장은 눈에 띄게 되살아났고,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며 국제무역에도 합류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외국기업들을 자국내에 유치할 수 있었고, Made in China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자유무역을 선도하는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 같은 시기에 WTO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 월가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시위는 곧 확장 되었고 전세계 경제대도시에서 세계무역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분명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그들이 시위를 벌인 까닭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정의와 공정'이었다. 세계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할수록 지구는 병들어 갔고, 숲은 황폐해졌으며,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은 엄청난 동물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들이 만든 체인점에서 내놓은 '정크 푸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부유하고 윤택하게 만든 '자본주의'가 매우 부도덕한 일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선진국의 부는 후진국들을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민낯에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부를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동력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때문에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였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이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살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잘사는 나라 속에서도 몇몇 부자들의 풍요를 위해서 대다수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두가 함께 잘살 수는 없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한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공산주의의 부활'이 필요한 것일까?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본주의 성자의 끝'은 완전한 공산주의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정답이 아니고, 올바른 대안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다시금 '전쟁의 광기'를 되살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유일한 방법은 '기술 혁신'뿐이다. 쉽게 말해, 이익을 창출하는데 이전보다 더 효율적인 기술을 도입해서 '원가 절감'하고, '성능 향상'을 도모해서 다른 상품보다 '경쟁력'을 높여 수익을 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단지 그게 힘들기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전세계는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점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경쟁력을 선점한 '기존의 강대국'들이 최근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기술 혁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펼쳐지고 있어 문제다. 미국의 트럼프는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관세수입'으로 극복(?)하겠다며 연신 똥볼을 차고 있고,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경제위기를 감추고 국뽕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려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중국의 시진핑은 패권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만 부도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지 못해 국제적 밉상으로 낙인이 찍혀 왕따를 당한 화풀이로 만만한 나라를 상대로 힘자랑하기 바쁘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이후로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카이치 총리는 극우보수의 결집을 돌파구로 삼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되돌아가기 위해 일본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더욱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런 어려움 뒤에 '위대한 일본'을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세뇌를 당한 듯,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국가정책을 따를 뿐이다. 과연 깨어 있는 일본국민은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있더라도 그들이 일어나서 국가에 저항하는 일에 앞장을 설까? 일본의 선택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일본은 그런 저항을 해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일본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변신하는데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그건 아니다. 가장 가까운 대한민국이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 일본은 강한 자 앞에서 철저히 복종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절대 안 된다. 일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이게 자본주의의 실체다. 오직 '실력'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게 해주고, '도덕'은 알고도 애써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폐기처분해야 마땅할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 '부를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딴에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비정한 경제체제를 좌시할 수는 없다. 실력을 키워 더 많은 부를 얻게 만들지만, 도덕적으로 해이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만 잘살기를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모두가 잘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뿐인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동식물을 비롯해서 약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 얻는 수익창출 방법은 되도록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피치 못하게 '약자의 희생'이 발생했다면,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당연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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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비만, 왜 사회 문제가 될까? - 책가방문고 25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5
콜린 힌슨 & 김종덕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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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5 : 비만, 왜 사회문제가 될까?>  콜린 힌슨, 김종덕 / 전국사회교사모임 / 내인생의책 (2011) [원제 : What Can We Do About Obesity?]

[My Review MMCXLII / 내인생의책 12번째 리뷰] 옛날에는 뚱뚱한 사람을 부러워했다. 왜냐면 뚱뚱한 만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비만'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상 '먹거리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거의 없었다. 늘 배고팠고 늘 부족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인류는 먹을거리가 지천에 넘쳐나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날씬하다 못해 호리호리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통통하다 못해 뚱뚱했는데, 이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홀쭉하면서도 근육질에 탄탄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뚱뚱해지고 심하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할 정도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그건 먹거리의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먼 옛날에 비해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먹는 양'은 늘어난 것에 비해서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가 된 셈이다. 왜냐면 '좋은 음식'은 값이 비싸졌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음식'은 대부분 가공식품으로 '정크푸드(쓰레기음식)'라고 불릴 정도로 건강에 해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알맞게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반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나쁜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고, 배부른 대신에 건강을 잃어버린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비만'은 부유한 계층보다 가난한 계층에 더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보다 '고열량, 고칼로리 식단'이 현대인을 비만에 이르게 한다고 정의 내렸다. 그래서 '패스트푸드' 대신 '슬로푸드'를 먹고, '글로벌푸드' 대신 '로컬푸드'를 즐겨 먹음으로써 비만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캠페인 홍보(?) 같은 이야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만 문제를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문제'로 격하시킨 듯한 인상이 느껴졌다. 이 책이 출간 된 시점이 2011년이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문제가 비일비재 했다. 그런데도 '비만 문제'를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나쁜 음식을 즐겨 먹는 '식습관의 문제'로만 인식한 것은 아쉬웠다.

요즘 <케데헌>의 인기로 인해 미국의 어린이들은 '입맛'이 바뀌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밥투정을 할 때 부모들이 즐겨 쓰는 해결법으로 '조미김'에 밥을 싸서 '김치 조각'을 곁들여서 먹이곤 했는데, 미국의 어린이들이 '한국 음식'을 즐겨 먹기 시작하자, 빵이나 케익으로 한끼를 해결하기보다는 '김밥'에 '단무지'로 배를 채우려 한다고 한다. 물론 '한국 음식'에 대한 인식이 '고퀄리티'인 까닭에 자녀가 한국 음식을 즐겨 먹고 '정크 푸드' 같은 빵, 과자, 탄산음료 같은 것을 멀리 하는 것에 환영하면서도, 미국의 부모들은 정작 '김밥'을 쌀 줄도 모르고, '조미김'이나 '단무지' 같은 반찬을 구할 곳도 마땅찮은 상황이라서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완제품'으로 나온 한국 음식들은 미국 현지에서는 비싼 값에 팔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재료를 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에 '한국계 이민자'가 있으면 가깝게 지내려 하고 그들을 통해서 '한국 식단의 식재료'를 구하는 방법부터 간단히 만들 수 있는 '한국 음식'까지 배우려는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한인 교포들은 환영하면서도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씁쓸하다고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계 자녀가 '점심 식사'로 싸가는 김밥과 김치, 잡채 같은 음식을 보며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미국에 정착해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한국계 미국인 학부모들'은 과거의 설움과 상처가 떠올라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한국 음식'에 대한 평가가 호평 일색으로 돌변(?)한 요즘과 같은 상황에 감개무량할 지경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음식'으로 마련한 점심 도시락이 얼마나 '건강을 고려한 음식'이었느냔 말이다. 냉동 피자나 냉동 햄버거에 감자튀김과 탄산 음료로 한끼를 떼우는 미국 어린이들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지 않느냔 말이다. 영양학적으로도 더 우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도 낯선 음식, 낯선 냄새 라는 이유만으로 놀림감이 되는 어처구니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돈이 있으면 더 건강한 음식을 찾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은 이런 시대를 맞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대다수 미국의 어린이들이 형편 없는 음식으로 건강을 해치고, '비만'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그건 미국 사회가 점점 가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가가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값이 싼 '나쁜 음식'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학교 급식' 같은 것이라도 개선해서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좋은 음식'을 제공해주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인 탓에 '주'마다 정책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 예산'도 주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도 '부자'와 '빈자' 사이에 엄청난 간극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비만' 같은 문제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곳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가 많아서 '비만' 같은 문제는 뒷전이 되기도 한단다.

이는 비단 미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릴 것 없이 '비만'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부의 불평등' 때문이고 말이다. 단순히 '정크 푸드'와 '글로벌 푸드'를 멀리하고 '유기농' 같은 '좋은 음식'과 '로컬 푸드'로 해결될 시점을 훨씬 지나고 말았다. 현재 '슬로 푸드'와 '로컬 푸드'의 원재료 가격이 엄청 오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처럼 고물가 시대에 비만은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고질병처럼 느껴진다.

한편, 자신이 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꼭 살을 빼는 것이 좋다. 물론 '좋은 음식',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부유한 계층이라도 살이 찐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최근 20Kg 정도 감량에 성공했다. 요즘에는 '살 빼는 약'도 있다고 하는데,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삼시 세끼 챙겨 먹으면서도 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쓴 방법은 '밀가루 음식'과 '설탕'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평소에 면 종류의 음식을 너무 좋아했는데 '라면'을 비롯해서 '빵', '과자' 같은 음식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메밀 100%'로 만든 면 요리는 가끔 먹었다. 정말 면이 땡길 때 말이다. 그리고 달달한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탄산 음료는 말할 것도 없고 '믹스 커피'도 딱 끊었다. 이렇게 하면 정말 마실 음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신 마셨던 것이 '블랙커피'와 '보이차'였다. 물론 물도 많이 마셔야 한다. 커피나 차 만으로 수분을 보충하면 신진대사에 불균형을 초래하기 때문에 '물 이외의 음료'를 마신 양만큼은 꼭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음식은 배불리 먹었다. 밥은 되도록 '현미밥'으로 절반만 먹는다는 느낌으로 먹었고, 고기와 채소, 그리고 과일(너무 달지 않은)로 배를 채우는 식단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식단을 차리려면 가뜩이나 오른 물가 때문에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구내식당'에서 먹을 때는 배불리 먹고, 집에서 먹을 땐 가볍게 먹는 방식으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녁 6시 이후'로 물만 마셨다. 이런 방법으로 음식 조절을 하면서 적당한 운동(하루 2만 보 이상)을 하며, 매일 체중을 확인해보니 하루에 200g~500g 정도씩 빠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1~2kg씩 체중감량에 성공하니 나름 뿌듯하고 현재는 74~75kg으로 20대 시절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을 하루 아침에 끊는게 어디 쉬운 일일까? 하지만 '고도비만'이 되니 고혈압에, 고지혈증, 그리고 고혈당까지 찾아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이 모든 증세를 단박에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바로 '살을 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기왕 빼는 거 확 빼세요"라고 말하길래, 20kg을 감량하려 목표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요요현상'을 없애려면 '살 빼는 약'이나 '지방흡입' 같은 수술의 도움 없이 '식단조절+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체중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빼는 것도 중요했다. 물론 날마다 빠지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300g을 힘들게 뺐는데, 다음날 의도치 않은 과식으로 1kg이 늘어있는 것을 보면 좌절할 만도 하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약이나 수술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을 빼면 언제든, 원하는 만큼 꼭 살을 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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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이 문제일까? - 10대에게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왜 문제일까?
김동광 지음 / 반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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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제일까?] <왜 과학이 문제일까?>  김동광 / 반니 (2023)

[My Review MMCXXXIV / 반니 1번째 리뷰] <왜 문제일까?> 시리즈가 나왔었다. 벌써 2년 전이다. 독서논술쌤으로 지내다보면 이런 유형의 책은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신간소식'을 제때에 들을 처지가 못할 정도로 '현역'에서 은퇴한 선생이다보니 좀 발빠르게 챙겨서 읽지 못할 뿐이다. 한때는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을 주고 리뷰를 부탁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리즈 책이니 틈틈이 읽어볼 작정이다. 암튼, 시리즈 책 목록을 훑어보니 초등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읽으면 좋을 내용으로 주제를 선별해 놓았다. 인문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통합교과'로 문이과 융합형 교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읽으면 '관심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끌어들여, 궁극적으로는 '사탐/과탐' 영역과 연관이 된 내용이기 때문에 학습에도 도움이 될만한 훌륭한 참고 자료로 가득했다. 나의 학창시절에도 이런 유형의 책들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면 '사탐/과탐' 영역을 단순히 암기하기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어서 학업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방법도 저절로 터득했을텐데 말이다. 옛날에는 그저 죽어라 외우고, 나중에 대학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서야 겨우 이해하는 느려터진 학습법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해박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계셔서 '코칭'이라도 제대로 받았더라면 좋으련만, 공부하다 생긴 '호기심'과 '궁금증'을 질문하면, 그 당시에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걸 쓸데없이 왜 물어!"라는 대답과 함께 꾸중만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논술쌤이 되고 보니, 그건 그 선생님도 잘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왜냐면 나도 잘 모르는 걸 학생들이 물어보면 짜증부터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학생이 어떤 질문을 하든 다 대답할 수 있도록 이책저책을 탐독하고 있다. 그래도 모르면 '다음 시간'에 제대로 답변해주기 위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답을 찾으면서 말이다. 이건 '선생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학생을 칭찬해주지는 못할 망정 '핀잔'이나 '꾸중'을 하는 선생은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책 <왜 과학이 문제일까?>는 과학이 인류에게 미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과학이 우리에게 일으킨 많은 문제들을 되돌아보고, '과학 지상주의'에 빠져들어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밝혀냈다. 더구나 오늘날의 과학은 '거대과학화' 되고, '상업화' 되어 꼭 필요한 과학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돈(이익)'을 얼마만큼 벌어 들일 수 있는 과학연구인지부터 따지기 때문에 '첨단과학'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는 '부자'를 위한 과학', '권력'을 위한 과학으로 되려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경향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말이다. 거기다 과학이라는 분야조차 '차별'이 심해서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차별도 심심찮게 폭로가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엄청난 이득에 취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평등을 조장해서 선택받은 소수만을 위한 과학으로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 과학으로 인한 문제들에는 어떤 예가 있을까? 먼저, 전쟁과 과학발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우려스럽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독가스'라는 대량살상무기이자 독성 화학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맨해튼프로젝트'라는 '거대과학의 시작'으로 인해 핵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터뜨려 엄청난 인적 · 물적 파괴를 직접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과거의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까지 목숨을 건 처절한 전투를 벌어야 해서 '전쟁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낄 수라도 있어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1차 · 2차 세계대전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포탄과 폭탄, 그리고 독가스와 핵폭탄 같은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전쟁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더 많은 인명살상을 결과로 겪고 나서야 '전쟁의 위험성'을 새삼 깨닫게 되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다 전쟁의 양상도 확연히 바뀌었다. 과거의 전쟁에서는 참전하는 '군인'만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전후방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총력전'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이다. 도시를 향해 쏘아진 '독가스'와 '핵폭탄'이 과연 누굴 죽였겠느냔 말이다. 아무런 대비도, 방비도 없이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학살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은 전쟁의 시기에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왜냐면 적을 얼마나 많이 죽이고, 더 빨리 죽여서, 상대국을 무력화시켜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적의 심장부라고 여기는 곳이라면, 그곳이 전방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고 '선제타격'을 하며 상대국이 미처 대비하지도, 방비하지도, 그래서 '반격'하지 못하게 초토화시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탓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 전국민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군대와 산업'이 결탁해서 최후의 하나까지 짜내서 상대를 섬멸시키려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는 '거대과학의 탄생'을 실현시키고 만 셈이다. 개별적으로 연구해오던 '과학'에서는 꼭 필요한 연구도 하지만, 과학자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지만, '거대과학'으로 총력을 기울이려면 '엄청난 연구자금'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적 낭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연구자금'만큼 '성과이익'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만들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제위기(?)를 감수해낼 국민들이 과연 있을까? 그렇기에 거대과학을 추진하는 정부에서는 '이익이 날 만한 과학연구'에만 연구자금을 몰아주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꼭 필요한 '기초과학연구'에는 성과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연구자금이 말라가고, 당장 눈앞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안정적이고 확실한 연구에만 엄청난 자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과학연구가 먼 미래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거대과학화'된 과학연구자들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생명과 안전,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가져다 줄 '연구성과'까지 특정 국가와 기업에게 '로열티'와 '지적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물론, 특허와 같은 '재산권 소유'는 당연히 보장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엄청난 연구자금을 투자해서 '신약'을 개발했는데, '공짜약'으로 무료배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제약회사의 지적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1회 투여' 비용으로 1억 원이라는 고액을 책정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이런 식이라도 '재산권 보장' 운운할 수 있을까? 이런 조치는 한마디로 '돈 없는 가난한 환자들'은 신약조차 써보지 못하고 그냥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기업이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돈장사를 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이런 예는 에이즈, 백혈병,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 실태를 아주 생생히 겪어보았다. 과연 앞으로도 '환자의 생명'을 두고 부자와 빈자로 구분 짓는 행태를 반복해야만 할까?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이익을 챙기는 선을 넘어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연구 개발'로 나온 신약을 효과적으로 처방하기 위해서 국가가 나서서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형태로 치료방법이 발견되는 즉시, 그 혜택도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온 국민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과학계에도 여전한 불평등' 때문이다. 특히, '첨단과학'이 발달 할수록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과학은 점점 발전하는데, 그로 인해서 기존의 세대는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그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해 '정보교육'까지 제공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빈부격차'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가 첨단기기를 '공짜'에 가깝게 싸게 제공하고, 그 기기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무상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은 그런 '기기'를 쓸 시간적 여유도 없고, 그런 '교육'을 들을 시간에 추가근무수당을 챙기기 위해 일터로 나가는 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부자들만을 위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게 문제가 된다. 여기에 더해 '인종차별', '여성차별'은 아직도 과학계의 평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떤가? 왜 과학이 문제가 되는지 여실히 보이지 않은가? 우리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첨단과학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편리함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공될 뿐이고,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일상은 더 빈곤하고, 더 불편한 진실만 마주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삼성 반도체가 수출 호황을 맞았다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가 아무리 많이 팔린다고 해도, 내가 '삼성전자 주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그닥 좋은 일도 아니다. 물론 한 기업이 성장하면 국가경제도 성장하는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질 거라는 '낙수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낙수 효과'를 실현시킨 정부는 전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기분만 좋을 뿐이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이 나의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나라의 경제는 성장했는데, 가난한 나의 삶은 더 가난한 방향으로 추락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부자들만 더 큰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으로 후퇴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민의 세금으로 발전시킨 과학적 성과가 제대로 '나의 삶'을 풍족하고 편리하게 만들고 싶다면 '비판적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과연 이런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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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 책가방문고 23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4
루스 윌슨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설동훈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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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더잘 시리즈 4]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4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루스 윌슨 / 전국사회교사모임 / 설동훈 / 내인생의책 (2010)

[My Review MMCXXXI / 내인생의책 11번째 리뷰] 이주(Migration)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기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로 떠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국제이주'나 '이민'이란 말로도 쓰고 있으나,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살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2010년 이전에 벌어졌던 '사례'가 소개되어 있으나, 이 글을 쓰는 2025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사례를 예로 들어서 리뷰하고자 한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이 지금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강제이주', '난민' 문제는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자국보호와 자국이익이 우선시 되는 '자국우선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극우화'로 인해서 이주민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천박해진 선진국들의 낯뜨거운 민낯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오버투어리즘'이 문제되고 있다. 엔저효과(?)로 인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일본을 찾아갔지만, 시골 구석구석까지 탐방하듯 관광을 하며 소비를 하는 '한국관광객'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 관광객'들이 일본에서 주로 관광하는 곳은 '유명 대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로 인해 짭짤한 수익을 본 곳은 '도쿄' 같은 대도시 정도였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관광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외국관광객들이 '값싼 일본돈'을 물쓰듯 펑펑 쓰고 돌아다녔지만, 그로 인해 수익을 창출한 곳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정도였고, 일본 소상공인들에게는 별로 수익이 돌아가지 않아서 '서민 경제'는 빨간불이 켜진 셈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 바람에 외국인들은 자국에 비해서 엄청 싸다며 엄청나게 소비를 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서민들은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올라서 가뜩이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는데, 외국인까지 무지막지하게 들어와서 '싹쓸이'를 해버리니, 일본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빈곤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단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이중가격제'를 허가하고, 외국인 손님과 일본 지역 손님에게 '가격차등'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이를 '차별'이라 느끼고 일본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버리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관광객을 향한 차별정책을 추진하는 이상한 행보를 걷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외국인 혐오'다. 외국 관광객이 일본을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일본문화'까지 존중하는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절'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이게 단순 관광객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본으로 '이주'를 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일이 매우 빈번해졌다고 한다. 물론 일본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자 '고국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일본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면서 '민폐'를 끼치거나 '일본문화'를 폄하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를 넘어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EU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지세대 시위'는 점점 극우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큰 문제다. 물론 EU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극우열풍(?)'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고, 특히 10대, 20대의 젊은 층이 그런 '극우세력화'하려 시위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극우화'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화가 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외국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자국의 젊은이도 일자리가 부족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외국 이주민이 들어와서 더욱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맞지 않은 점이 있다. 외국인이 구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낮은 임금의 노동이고, 자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고학력, 고임금, 사무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극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게 되면 각국의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복지정책의 혜택'을 보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젊은 세대가 폭발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외국인들을 먹여 살리는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세금인상'과 같은 정책을 쏟아내는 선진국에서는 더욱더 가열찬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프랑스가 그렇다.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세금인상안'을 내놓고, '복지혜택'은 줄이는 정책을 쏟아내자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비단 프랑스뿐 아니라 '경제 적신호'가 켜진 나라들은 요즘 대부분 이렇게 성난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단다. 그리고 이들은 '외국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고 말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선 미국은 어떤가? 관세 전쟁을 해서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실상은 만만한 '동맹국'들을 후려쳐서 뜯어낸 돈으로 잔치를 벌이려 했던 것이 들통났다. 그러다 대한민국 이재명 정부가 굳건히 버티며 불리한 협정문에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자 '조지아'주 이민관리국(ICE)이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체포감금한 뒤, 강제추방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미국인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공장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하던 고급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이 완공된 뒤에 미국에 눌러앉아 살 사람도 아니고,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올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한 일도 철저히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당국은 이들을 '불법이민자' 취급을 했고, 미국에서 내쫓아 마땅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물론, 이 사건의 결말은 대한민국의 완승, 미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이민정책'에 완벽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로 이민으로 성공한 미국조차 '이민'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더는 '이민'을 환영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정상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끝나고 난 뒤의 '반세기 동안의 평화 번영'이 인류의 역사를 되돌이켜 봤을 때 '비정상'이었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만큼 폭력이 일상이던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럼 앞으로 '이민'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펼쳐질 거란 예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주'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게 되면 피치 못하게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에도 아프리카 · 아시아에서는 정치갈등이 심해서 혼란 끝에 '내전'을 벌이고 있으며, 오랜 갈등과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면 '먹고 살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는 '난민'이 속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이주'를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발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유엔난민기구(UNHCR), 국제이주기구(IOM) 등에서 이주 난민을 도와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국제기구조차 '재정 부족'을 호소하며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선진국들의 경제여건이 지금보다 더 나았던 2010년대에도 '재정 부족'을 호소했는데, 요즘처럼 선진국들조차 '재정난'을 호소하며 내부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더 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재정적 여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재정 지원이 원활하다고 '난민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말이다. 유대인 경전 <탈무드>에도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말했다. 난민들에게, 이주민들에게 적은 임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대책이란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일자리'는 늘 부족했고, 경제가 호황일 때에도 '외국인 차별'로 인해서 이주민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주민들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훌륭한 이주민'에 대한 예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도 소개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가 전쟁을 피해서 미국에 이주했을 때, '외국인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더라면,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했다면 오늘날의 초강대국은 아마도 '그 나라'가 아니었을까? 물론, 아인슈타인이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으니 '외국인 이주민'이었을지라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뛰어난 인재'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평범한 외국인들은 입국을 거절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인재를 서로 영입하기 위해서 각국이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얼마나 현명하고, 누가 뛰어난 업적을 남길 줄 알고 '골라서' 환영한단 말인가? 일단 누구라도 환영해서 받아들인 뒤에 잘 대우하고,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대만계 미국인 잰슨 황이 왜 대만이 아닌 미국에서 '사업'을 했겠느냔 말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사업'을 벌이기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훌륭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세계 모두는 '이주'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와 그런 사회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독일의 메르켈 정책의 사례처럼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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