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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ㅣ 쾌자풍 2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 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III / 해냄 4번째 리뷰] 2권까지 읽고 나니, 이우혁이 이 책 <쾌자풍>을 통해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조금쯤 감이 잡힌다. 국어교과서에서도 늘 강조하는 '주제파악'을 잘하는 요령은 비문학 장르에서는 '중심문장'을 찾아내는 것이고, 문학 장르에서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럼 여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다 파악해야 하느냐? 그러면 좀더 다각도로 다채로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주동인물'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쾌자풍>에서는 그 주동인물이 바로 '지종희'라는 주인공이 틀림없다.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 무림의 고수를 일거에 제압하고, 여진과 몽골 따위의 시정잡배들까지도 눈빛 한 번으로 통솔하는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이야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기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 너무 당연한 이치인 까닭에 그리 주목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다. 허나 이것이 한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외국에만 가도 그 '선'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저 먼 서양까지 가버리면 애초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 철저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이 우리가 넘지 않는 '선'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네 경우엔 '선'을 넘었을 경우에도 말로 훈계하고, 경고하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쌍욕을 던지고, 심하면 주먹이 오고 가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경우엔 '선'을 넘으면 일단 '총'부터 꺼내들고 점잖은 사람은 '경고사격'을 허공에 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총을 갈기고 다치거나 죽거나, 그런 문제는 '나중'으로 돌려놓고, 서로에게 유리한 증거를 내세우며 법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차이는 우리는 '선'을 넘어도 사람이 죽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선'을 넘게 되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거나 '둘째 이유'로 밀려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단 말인가?
<쾌자풍>의 주인공 지종희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문약한 서생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타고난 체력이 뛰어난데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서 조그마한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면 곧잘 따라하는 '눈썰미'까지 장착(?)한 재주꾼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데 무술이나 무예라는 '싸움기술'까지 가르치면 큰일(!) 치르겠다는 친형 지두희와 그의 스승(공운)이 지종희에게 일체의 싸움기술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에 철저히 훈육하며 가르치려 했던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종종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제 힘만 믿고 함부로 주먹(힘)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들이 동네에서 뛰어놀면서 저지르는 일 가운데 '수틀리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패서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맘대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맛들이게(?) 되면, 그놈은 결국 사람을 해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말종이 되고 만다. 사람 살아가는데 도리와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주먹'을 쓰면 쉽게 해결하고, 제 잇속을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쾌락에 쉬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법과 도덕도 '주먹' 앞에서는 당장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고난 싸움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지종희에게 형 지두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해서도 안 되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철저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재주가 '엄청난 힘'인데, 그걸 쓰지 못하게 만들면 바보천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은 지두희는 남몰래 동생 지종희에게 '싸움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를 십수 년간 가르쳐 왔다. 꼭 필요할 때에는 그 타고난 힘을 써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애초에 그런 힘을 타고났다면 '세상의 이치'로 따져서, 세상이 '그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지종희에게 꼭 필요한 경우엔 '그 힘'을 쓸 수 있게 단련시켜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무의식 중에라도 '나쁜 쪽'으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코자, 지종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고, 그 핵심으로 결코 '선을 넘지 말라(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는 등의 도덕개념)'는 가르침을 뼈에 사뭇치도록 톡톡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천하를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지종희에게 먹혀 들어갔다. 아무리 시종잡배들 마냥 쌍욕을 즐겨쓰는 왈패처럼 굴더라도, 결코 지켜야 할 선은 넘는 법이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왜냐면 그게 옳다고, 그게 공명정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국 사람들이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도덕개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목숨'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런 가르침은 우리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이게 잘 통용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강렬하고, 더 받아들이기 쉽기에 그에 따르기 십상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강자의 이익'이 철저히 보장되는 것이 진리라고 이해하고, 때에 따라서 '강자의 요구'가 사람의 목숨인 경우일지라도 서슴 없이 목숨을 해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약자들은 이런 '힘의 논리'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식으로 쭈구리로 살아가곤 한다. 왜냐면 강자에게 반박을 하면 '강자의 힘'에 자신이 피해를 볼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별다른 반박도 하지 않고, 그저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악당이 등장하게 되면, 아무리 약자들이라도 감내만 하며 당하지 않는다. 끝끝내 저항하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반발하며, 설령 목숨을 잃거나 큰 손해를 볼지라도 순순히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 목소리를 분명하게 낸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상위개념으로 '도덕'을 따지고,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숨값(!)'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당한 일에 맞서다 목숨을 다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 모두는 분연히 일어나서 '함께' 저항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힘의 논리'가 워낙 강하다보니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악당이 등장해도 별다른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힘에 맞설 '영웅(히어로)'의 등장을 꿈꾼다. 하나 뿐인 목숨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고, 약자의 목숨쯤이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부당한 악당의 불공정한 요구에 묵묵히 참고만 살다가 '영웅'이 등장하는 때에 맞춰서 '악당'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곤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엔 그리 오래 참고만 있지 않는다. 특별한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특별한 힘이 없어도 누구나 특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도덕적 우월감(?)만 있으면 된다. 그럼 된다. 그게 '한국적 영웅(히어로)'의 특징이다.
이 소설 <쾌자풍>에서 '중원무림'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묘사된다.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무림인'들이 그들의 싸움기술(무술)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데...뭐, 뻥 같지만, 그럴 법하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편하다. 그럼 조선에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느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매한가진데 없을 턱이 있을까. 당연히 그 정도의 싸움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허나 조선에선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은 '육체적인 힘(武)'이 아닌 '정신적인 힘(文)'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원에는 육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무림(武林)'이란 세상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정신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유림(儒林)'이 있었던 셈이다. 뭐, 중원의 무림과 조선의 유림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한국인들이 좀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글공부'를 시키는 경향이 강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의협'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그런 경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다고도 본다.
또한, 지난 1권 리뷰에서도 한국인들은 '충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중국인들은 '의의 논리'에 맹신(?)을 한다고 얘기했었는데, 그럴 정도로 중국인들은 '의협(義俠)'을 대단하게 쳐준다. 쉽게 말해, 정의를 내세우며 약자를 위해서 기꺼이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쳐준다는 말인데, 여기에 너무 심취하다보니 '의리'를 너무 앞세우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목숨마저 대신 갚는 대상으로 삼고, 살인자마저 의롭다고 옹호하는 경향이 '무림'에 대한 환상으로 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뛰어난 무술, 검술, 심지어 내공(內功)까지 아우른 대단한 사람이 등장해서 세상의 정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허풍에 불가하다고 본다.
이는 조선에서 대유행한 '유림의 폐해'를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글재주를 뽐내는 것에 그쳤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련만, '사림파'를 조직하고서 '훈구파'를 견제하는 것까지는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훈구파가 사라진 뒤 '사림파의 천하'가 열리자마자 '붕당'을 형성하고 '당파'로 나뉘더니 서로간의 파벌싸움에만 혈안이 되어 '국정 발목잡기'를 기본 셋팅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물론, 이를 부추긴 것은 '왕권 강화'에 목을 맨 조선왕실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대표적인 임금이 바로 '선조'와 '숙종'이다. 선조는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도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신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왕권을 제대로 강화하려면 임금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첫째이거늘, 제 실력을 높일 방도가 여의치 않자 신하들끼리 붕당을 조직한 것을 엿보다가 서로 싸움질만 하다 왕권에게 휘어잡히는 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임진왜란'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이간질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도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몰려오자 선조는 의주 국경을 넘어 명국으로 넘어가 제 살 궁리만 했더랬다. 그리고서 한조각 양심은 남았는지, 광해군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분조'를 이끌고서 조선을 지키라 명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마저 전쟁이 끝나자마자 광해군의 입지를 흔들며, 뒤늦게 낳은 '영창대군'을 적자로 삼는 등,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이를 해결코자 붕당을 타파하고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 애를 쓴 인물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유림'에서는 그런 인물이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내세울 수 없었다. 여전히 저들의 파벌이 국가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숙종도 왕권강화를 위해서 '환국'을 일삼아 피비린내 나는 혼돈의 정치를 일삼았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으로 갈등이 심화하자, 이를 혁파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사사시킨 임금이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 나이 14살때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일찍 완수했는데도 '유림의 세상'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환국'만 주도하며 유림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일종의 말 안 들으면 죽는다는 전략이었으나, 그게 어디 조선 군중들에게 먹힐 전략이었던가? 결국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영조', '정조' 또한 유림들에게 한껏 휘둘리다가 정조 이후부터는 '세도가문'을 형성한 외척 유림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어 나라꼴은 형편없이 망해갔다.
중국의 역대 황실도 마찬가지다. 무림이 적절히 활용되어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국난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무림 세력'들이 한족의 황실을 완성한 뒤에는 여지없이 토사구팽 당하며 나가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황제 등극으로 그나마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는데, '토목지변'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지자 명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꼴이 되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이때 위기를 극복한 인물은 충신 우겸 덕분이었다. 무림은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오직 관직에 있는 뛰어난 관리의 지혜로 인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었다. 물론, 우겸이 새로운 황제(경태제)를 내세워서 포로가 된 황제(정통제)를 앞세워 항복하라고 할 위기를 극복한 것은 훌륭한 처사였으나, 문제는 포로가 되었던 정통제가 살아서 다시 명국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8년 뒤, 경태제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죽자 상황으로 물러났던 정통제가 다시 황제로 재등극하고 '천순제'가 되자 충신이었던 우겸을 숙청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은 '우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황제(천순제)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앞장 서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훗날 천순제의 손자뻘인 효종(홍치제) 때에 와서야 죄를 묻지 않고 복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무림의 세계'에서도 우겸의 충성스런 행위를 이야기하기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서 무림인사들 가운데에도 관직을 얻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세력 가운데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저들끼리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남궁칠협이라는 걸세출의 영웅을 내세운다. 당대 무림의 고수인 셈이다. 물론 무술의 달인이라도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죄인을 직접 처단하기는 뭣하다. 왜냐면 죄인의 벌을 행하는 주체는 당연히 '관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국의 사법체계에 속한 '동창'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여의치가 않다. 우겸의 아들이 상당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동창 관리쪽에서도 '고수'를 내세워야 한다. 헌데, 그런 고수를 내보내는 족족 '함흥차사'마냥 죽어나자빠지니 문제다. 그래서 동창의 우두머리 '유온'은 남궁세가의 힘을 빌리는 꼼수를 부리려 남궁칠협의 단 하나뿐인 손자 '남궁수'를 일계급 특진시키며 비밀 밀사로 사건 수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을 하는 것이 <쾌자풍>의 줄거리다.
뭐, 일일이 줄거리만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에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겸의 아들은 '여진족'의 틈바구니에 틀어박혀서 후일을 도모하며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고 있고, 동창 수장 유온은 일찌감치 우겸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요원들을 일일이 보내지만, 모두 실패하자 '무림 전체'를 다 동원해서 범인을 처단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인다. 이 와중에 중원 무림의 최고봉인 남궁세가의 손자인 '남궁수'가 동창 비밀요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 포졸 지종희'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종희가 중원의 무림 고수들을 '육모 방망이' 한 자루로 일거에 일망타진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이렇게만 줄거리를 요약하면, 호쾌한 무협 소설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이우혁은 단연코 '무협 소설'이 아니란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선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이게 또, 그런 식으로 읽으려니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게 되었다. 다만, <쾌자풍>을 통해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재확인하면서 읽는 재미만큼은 제법 솔솔하였다. 요즘 <케데헌> 보는 재미로 사는데, 전세계에 '한류 문화'는 먹히는데, '중국 문화'는 발톱의 때만큼도 관심있게 쳐다봐주지 않는 현상을 읽는 재미와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새삼 재미나게 읽고 있다. 이래 저래 중국은 한국을 쫓아오기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굳혀가며, '무협의 세계'도 읽어나가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김용과 와룡생도 '다시 읽기'를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