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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 삼국지 1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허경대 글, 정규하 그림, 손영운 기획, 나관중 원작 / 채우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 삼국지 1> 나관중 / 손영운 / 허경대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XI / 채우리 27번째 리뷰] 수많은 <삼국지>를 읽었지만, 이 책만큼 허섭한 책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제한'이 많이 따랐다고 하더라도, '삼국지의 매력'은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줘야 했을 텐데, 어느 것 하나 '장점'이라고 꼽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울대 선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책의 해설'에 관한 내용은 꽤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조차 웬만한 <삼국지> 마니아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만큼 우리 나라에 <삼국지> 독자팬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을 텐데, 그런 점에서 많이 미흡한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수천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삼국지>이기에 수많은 '등장인물의 얼굴'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은 힘들었을지 몰라도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위촉오 각각 10명 씩(총 30명) 정도의 인물은 특징을 좀 잘 살렸어야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것도 많이 부족했다. 그 가운데 가장 아쉬운 점은 '유관장 삼형제' 가운데 유비가 가장 나이가 많다(?)도 했으면서도 유비만 수염이 없는 캐릭으로 그렸다. 심지어 '삼고초려' 때에는 유비 40대, 제갈량 20대인데, 유비는 여전히 수염 하나 없고, 더 어린 제갈량이 오히려 수염을 그려 넣어서 더 늙어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오타는 '하후돈'을 '하 장군'이라고 호칭하는 것이었다. 아니 '하후 씨 가문'인데, 왜 '하 씨'로 호칭한 것일까? 이런 자질구레한 실수까지 곳곳에 보이니 전혀 몰입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암튼, 아쉬움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그래도 <삼국지>이기 때문에 짚어 볼 것이 있기는 하다. 다른 <삼국지>에서는 접하기 힘든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정리하려 한다. 먼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통 <삼국지>라고 읽는 것들은 대부분 '모본(毛本)'이라 부르는 것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 모성산(毛聲山)과 그의 아들 모종강(毛宗岡)이 당시에 출간된 모든 <삼국지통속연의>를 모아서 '통일성'을 높이고, '간결한' 문체로 다듬어 새로운 책으로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정사 <삼국지>는 서기 280년 진(晉)나라 때 촉한 출신의 인물 '진수'가 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무려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초기다. 실로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사'가 어찌 '연의소설'로 쓰여지게 되었을까? 그건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훗날 나관중에 의해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 송 시절에는 '서민문학'이 발달하기보다는 시와 같은 고급진 '귀족문학'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역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달달 외울 정도로 학식이 높은 분들에 의해 향유 되었으나, 명나라 시대가 되면서 귀족적, 사대부적인 고급스러움은 퇴색하고, '연의소설(장편소설)' 같은 서민문학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 같은 방대한 내용은 '한 꼭지씩'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만 따로 뽑아 '장(章)'이나 '회(回)'로 구분하는 '장회소설'로 만들어져서 전기수(이야기꾼)나 설화인(舌話人)이 입담을 섞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나관중은 이를 한데 모아 '집대성'할 생각을 떠올렸고, 수없이 많은 '장회소설'을 모으고, '역사기록(진수의 <삼국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놓은 <배송지서>, <자치통감> 등등)'을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도 하며 새롭게 총정리를 했던 셈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나관중이 썼다는 '원본'은 사라졌고, 훗날 명나라 가정제 때 세간에 떠도는 <삼국지연의>를 모아서 정리를 했고, 청나라 때 '모본'이 등장하면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진수가 쓴 <삼국지>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판이하게 다른 책이다. 가장 큰 차이는 진수는 '조조'가 위업을 닦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았고, 나관중은 충과 의를 따져서 유비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까닭은 110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조조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뛰어난 재능과 빛나는 업적만 놓고 본다면 당대 '조조'를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가 행한 행동들이 '황제(헌제)'를 볼모로 삼고 권력을 함부로 찬탈한 '패자'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조는 '명예'보다 '실리'를 더 중시하였다. 그 덕분에 위촉오 세 나라 가운데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나라가 이루는 큰 업적을 쌓았지만, 그 이미지가 그닥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유비는 실제 '역사기록'에 도덕군자로 소개될 정도로 인자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실제로도 유비를 따르는 백성들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 유비는 '군웅할거의 시대'에 변변한 영지도 얻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유비를 따르는 신하들도 다른 군웅집단에 비해 '배신'을 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똘똘 뭉치는 양상을 보일 정도다. 그래서 훗날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의 신하가 되지만 '촉한 출신'이었던 진수도 유비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해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천 년이 지나는 동안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가장 인기가 높은 위인'은 누구였을까? 두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로 '유비쪽 인물들'이었다. 더구나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 시기에 '홍건적'이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후한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의 일화를 입에 올릴 때면 비슷한 느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인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원결의'다. 실제 역사에는 없는 기록이지만,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가슴 뜨거워지고 뭉클해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주인공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삼형제가 단연코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삼국지>는 '도원결의'로 시작해서 '오장원에 지는 별'로 마무리하는 '촉한정통론'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더구나 '원나라 몽골족'에게 큰 피해를 본 '한족'들은 <삼국지연의>를 읽으며 자신들의 뿌리가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의 혈통을 '정통'으로 보기 시작했고, 비록 무능한 황제였지만 '헌제'를 핍박해서 황위를 찬탈한 '조조 가문'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편향된 인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유비'를 헌제의 숙부로 퉁치고 '유황숙'이라는 네임벨류를 단단히 심어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계보를 보면, 유비가 경제의 아홉 번째 아들인 '중산 정왕 유승'의 아들로 나온다. 6대 경제는 '전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훗날 광무제가 '후한 시대'를 열었고,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 소제, 그리고 헌제로 이어져서 '전한 경제부터 후한 헌제까지' 무려 30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이 지난한 세월동안 '직계 혈통'일지라도 엄청나게 먼 사이가 될 터인데, 헌제와 유비는 '직계' 혈통 사이도 아니었다. 만약 직계 혈통이었다면 유비가 돗자리나 짜며 연명했을 턱이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유황숙'이란 호칭은 나관중이 '조조'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당대에 형주의 유표, 서촉의 유장도 '같은 유씨'이고, '황족 출신'이었는데, 왜 '유황숙'이란 호칭을 유비만 줬겠는가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유표가 <삼국지연의>에서 홀대 받은 까닭도 살펴보자. 유비가 별다른 '영지'도 얻지 못하고 빌빌 거리고 있을 때, 유표는 알짜배기 땅이었던 '형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우리는 <삼국지연의>만 읽으면 유표를 별별 일 없는 무력한 군주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유표는 원술과도 맞짱을 떴고, 손견을 궁지로 내몰 정도로 실력자였으며,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을 치를 때에는 원소와 함께 조조를 공략할 정도로 큰 세력을 갖추고 있던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은 바로 그의 영지에서 제갈량, 방통, 서서, 사마휘, 최주평 등과 같은 걸출한 위인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표가 얼마나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잘 키우려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왜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를 형편없이 저평가 했을까?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유표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 활약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토록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었으면서, 왜 그 인재들이 유표를 도와 대업을 이루려 하지 않았던 걸까? 그게 바로 '유표의 한계'였던 것 같다. 장자였던 '유기'는 허약했고, 서자였던 '유종'은 어리고 나약했다. 더구나 유종의 생모인 '채씨'는 아주 못됐다. 그래서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꿍꿍이를 벌이다 끝내 나라가 망하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유표가 진정 실력이 뛰어난 위인이었다면, 이런 못된 아내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유표가 늙고 건강까지 나빠지자 젊은 시절의 실력만큼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점점 저물어가는 유표 세력이었기에 수많은 인재들이 유표에게 기대지 않았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원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능력자'였던 원소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조조에게 패배를 하면서 몰락의 길로 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 결과만 놓고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원소에게 부족한 딱 한가지는 바로 '결단력'이라고 폄하하곤 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 속에서 너무 잘 그려 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원소를 저평가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결단력도 없고 우유부단하며 팔랑귀를 갖고 있어 '좋은 말'을 귀담아 들을 분별력까지 없는 인물이 '반동탁연맹'에선 총대장을 역임했고, 적시적기에 공략을 해서 '공손찬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며 하북 일대의 일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겠는가?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것은 조조가 잘 나서라기보다는 '천운'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일 것이다. 패자는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의 못난 점만 부각한 것도 참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못다한 이야기는 <삼국지 2>에서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