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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텅구리 - 한국 최초 신문 연재 네컷만화로 100년 전 날것의 식민지 조선을 보다
전봉관.장우리 편저, 이서준.김병준 딥러닝 기술 개발 / 더숲 / 2024년 12월
평점 :
[My Review MMV / 더숲 10번째 리뷰] 신문 한 켠에 '네컷만화'부터 읽는 것이 내 어린 시절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시사만화'라는 것에 어릴 적부터 눈이 뜨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것이 아니고, 그저 '만화'라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80년대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을 접하면서 '한국만화'와 일본 만화의 차이점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때만 해도 '만화책'을 읽으면 바보 취급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보곤 했지만,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시사/풍자'라는 것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남들이 읽다가 버리고 간 신문쪼가리를 형님들(재수생과 복학생)이 펼쳐 들고서 이런저런 '알은 채'를 하는 것을 귀동냥을 들으면서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세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사만화'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최초의 '네컷만화'인 <멍텅구리>(노수현)를 다시 복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읽고 싶었다. 물론 일부의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존재감'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를 읽을 수 없었으니, '그 맛'을 꼭 맛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까무룩 잊고서 문득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뽑아 들고 읽었다. 무려 800여 쪽에 달하는 묵직한 느낌만으로도 뿌듯했을 정도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니 애초의 기대만큼 충족하진 못했다. 기대감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일단 '오늘의 유머 감각'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나 어릴 적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같은 기라성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안방극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주일, 남보원,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등의 원로 희극인들에게 '유머'를 배웠던 나인데도, 최멍텅과 윤바람, 그리고 신옥매가 펼치는 1920~30년대의 배꼽 빠지는 유머 감각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이면 찰리 채플린이 전성기를 지날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최멍텅의 '멍텅구리 짓(슬랩 스틱 코미디)'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가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 웃고 싶어도 맘껏 웃을 수 없는 시기,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와 맞물려 있다보니 수많은 '인텔리(지식인)'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일제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꿈을 펼쳐낼 수 없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싶어도 '날개를 활짝 펼 공간'이 없던 암울한 시기였던 것이다. 최멍텅도 그러했다. 만석꾼의 아들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에 버금가는 능력자였다. 그런 그조차 '날개'를 펼 수 없는 시절이었는데,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했던 조선인들의 설움은 오죽하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웃을 수 없었다. 당시의 조선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설움'을 앞세우고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장면만이 상상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20년대를 지나 30년대로 접어든 <멍텅구리>의 연재 내용은 '시사풍자'라는 애초의 날카로움마저 사라져서 그야말로 '촌극(우스꽝스런 사건)'만을 쏟아낼 뿐이다. 최멍텅은 '늦깎이 학생'이 되고, 신옥매는 '꽃나라(화국)여왕'에 등극하는 꿈을 꾼다. 윤바람은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최멍텅에게 빌붙어 살고 말이다. 후반부에는 신옥매도 자취를 감추고, 최멍텅의 아들 똘똘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다 '모던 보이/걸'로 대변되는 신풍속을 보여주다. '낭만자살 열풍'을 소개하고서는 쓸쓸한 연재 마감을 하고 만다.
책을 덮고 나니, 꼭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1925년의 풍경을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단 말이다. 일제의 엄혹한 통치에 조선인들의 삶은 날로 핍박 받았고, 일상은 빠르게 무너지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네컷만화'조차 맘껏 펴내지 못하는 자유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자유의 소중함'을 그저 잊고 살고 있는 셈이다. 마치 '공기 없는 세상'에선 단 1분도 살지 못하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아주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인데 너무 낯설기만 했다.
더구나 '만화형식'인데도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복원상태'가 그리 양호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원본, 그대로' 되살리려 꽤나 노력했을 것인데, 그림체는 너무 번져보여서 '그림체'가 뭉게져 보이고, '활자'도 너무 작아(노안이 와서 그럴 수)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 옆에 '프린팅'된 글자를 읽고서 판독하려 했는데, 그 글자조차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800여 쪽이 넘는 책인데 돋보기를 쓰고 읽기에도 부담스러웠고 말이다. 여러 모로 읽기 불편해서 좀처럼 몰입하기에 힘겨웠다.
하지만 100년 전 우리의 '근대사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것만큼은 참 좋은 기회였다. 연재 시작부터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전편'을 싣고 있어서, '연재의 의도'도 함께 파악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애환'도 더불어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옛날의 '일상 생활'을 엿보는 일은 엄청 힘든 일이었는데, 친절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좋았다. 이런 특혜는 <멍텅구리> 만화만 읽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이었다. 이를 테면, 옥매가 최멍텅에게 결혼조건으로 '간장게장'과 '양담배' 등을 내건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일제가 '우리의 전통'을 없앨 목적으로 '간장게장 담그기'를 불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민물생선'을 먹고 '디스토마 질병'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어나서 내린 조치라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날것'을 음식으로 먹기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왜 유독 조선의 풍속을 금하는 일에는 그토록 열성을 보였는지, 그 의도가 뻔하다. '양담배 수입금지' 조치도 마찬가지다. 일본산 담배를 강매하기 위해서 '더 질 좋은 서양담배의 수입'을 금하고, 세금 착취가 용이한 일본담배만을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니 신옥매가 내건 결혼조건은 '완곡한(?) 거절 의사'였던 것인데, 최멍텅은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오로지 '직진'만 하면서 온갖 멍텅구리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머라는 것이 '부연설명'을 하게 되면 더는 웃기지 않은 속성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만화'가 아닌 '인문역사책'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읽고 즐기는 책이 아니라 읽으며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는 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