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1 - 뮤직박스의 암호를 찾다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1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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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I / 그린애플 1번째 리뷰] 본격적인 '추리소설 탐독'을 준비하던 와중에 독특한 '탐정 소설'을 하나 발견했다. 무려 '프랑스 100만 부 판매 실적'을 선보인 베스트셀러다. 어린이책 치고는 대단한 실적이긴 한데 우리 나라보다 책 판매가 활발한 프랑스에서 '100만 부'가 대박인 것인지, 중박인 것인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럴 때 '아는 지인'이라도 좀 있었으면 디테일한 궁금증을 해갈하면 좋으련만, 그조차도 없이 오로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재미난 책을 찾아내서 스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중이다.

이 책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는 '추리소설'이라기엔 많이 부족하다. 추리의 요소보다는 '프랑스 궁정'에 대한 배경묘사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 무척 재밌다. 실제 '역사적인 배경'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공주 '엘리자베트(1764~1794)'로 실존 인물이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손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의 오빠가 바로 '루이 16세'이고, 올케가 '마리 앙투아네트'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며 '베르사유 궁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왕실 가문의 사람들'이 펼치는 '궁정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역사소설'인 것도 아니다. 실존 인물이 등장인물로 나오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지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톡톡히 보인 듯 싶다. 더구나 '공주'가 등장을 하니, 소녀 독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책일 것이다.

그럼 '탐정'은 언제 나오냐고? 글쎄, 이 책에서 '추리적 요소'를 찾기는 힘들다. 굳이 추리할 수 있는 내용이란 '암호 코드의 비밀'을 풀어서 '암호문'을 해독하는 장면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럼 '공주 탐정'이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음...탐정 역할을 공주가 맡기는 한데, 실상은 그 '탐정 놀이'를 통해서 엘리자베트가 '수학 공부'를 대신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공주가 워낙 말괄냥이에 공부하고는 담을 쌓아서 간단한 덧셈과 구구단도 외우길 싫어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궁정 최고의 '가정교사(실은 '귀족 출신')'가 엘리자베트를 전담하여 교육을 실시했지만, 번번이 공부하기 싫다고 퇴짜를 놓기 일쑤인 엘리자베트 앞에서 두손 두발을 들고 '교육 포기 선언'을 국왕 앞에서 하는 것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할 정도다. 하지만 새로운 온 '가정교사(역시 귀족 출신)'는 이런 엘리자베트에게 딱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교육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탐정 놀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공주 탐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하프시코드 연주를 하는 '뮤직박스'에서 아주 비밀스런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추리'가 시작되는데, 무려 3부작에 걸쳐서 세 가지 '뮤직박스'를 찾아내어 차례차례 암호문을 풀어내어 마침내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책내용의 골자다. 그렇지만 그 추리적 요소가 너무나도 간략하고 간단하게 서술되고 있어서 '추리소설'이라고 불리기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을 소개할 땐 '추리소설'이 아닌 소녀들이 좋아할 '어린이책'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당할 듯 싶다.

여기서 '뮤직박스'라고 소개한 소재가 흔히 '오르골'이라고 불러주면 느낌이 좀 달라질 듯 싶다. 원래는 '뮤직박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는 '일본식 표현'인 오르골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 '뮤직박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 '하프시코드(피아노처럼 생겼지만, 그보다는 좀 작은 건반악기. 피아노의 전신으로도 불린다)를 연주하는 뮤직박스'가 아름다운 연주를 자동으로 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아름다운 연주에 맞춰서 '인형 연주자'가 실제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뮤직박스를 엘리자베트 공주가 실수로 망가뜨렸다가 다시 고치는 과정에서 그 속에 '비민암호문'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암호문의 내용은 '두 번째 뮤직박스'를 찾는 단서가 된다.

사건은 비록 매우 단순하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엘리자베트 공주는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배우게 되고, 평생을 함께 한 소중한 친구도 얻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공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새삼 깨닫게 되는데, 과연 부러울 것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을 '아름다운 공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뮤직박스'에 담겨 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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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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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 / 창비 9번째 리뷰]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한강의 소설들'을 뒤늦게 탐독하고 있다. 하지만 리뷰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노벨문학상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한강의 주제의식'으로 파고들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하나같이 다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에 대한 '감'을 잡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에 한강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고통 3부작]으로 소개하였다. 물론 작가 본인이 이 작품들을 쏟아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니, 수긍이 가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로는 이 세 작품은 [불편 3부작]이었다. 첫 번째에는 '채식'이 불편했고, 두 번째에는 '불륜'이 불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정신병'이 불편했다. 세 가지 모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포용하기에 너무도 불편한 것들이니 말이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다.

'채식'이 불편한 까닭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유별나기 때문이다. 가리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함께 식사할 때마다 '별도'로 챙겨주어야 하는 수고를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려 차원'에서 그런 정도의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채식주의'가 나쁜 짓도 아니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채식주의자들에게 배려를 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전통음식이 '육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철저하게 '비건'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한식'은 동물들의 절규가 한없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고기육수'가 그렇고, 각종 '젓갈'은 또 어떤가?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뚜껑을 열고 올려지는 '낙지 한마리'는 화룡점정일 것이다. 한 겨울 얼음위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고 '학살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덩치가 큰 '고래사냥'과 같은 것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비건'을 선언한 이들은 그러한 모든 '살풍경'을 멈춰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들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은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불륜'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다. 이건 '불편'을 넘어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줬던 '흔한(?) 일상'일지라도, 형부와 처제가 상간을 벌이는 일을 아름다운 예술로 포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몽고반점>을 읽다보면 그것이 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왜냐면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게 또 말이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위해서 '옷을 벗고 알몸이 되는 일'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이라 하더라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는 없다. 더구나 예술을 빙자한 '외설'이 너무도 판을 치는 속물적이고 저급한 예술쟁이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이들은 외설인 '포르노그라피'를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예술가든, 일반인이든 '예술'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건 아름다움이 주는 '황홀감'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낯뜨거움'을 구분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 형부는 처제의 '몸'을 예술적 도구로 삼아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꽃피우려 했으나 결국은 '상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냥 '범죄'다.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불륜과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이것을 '예술'로 포장하려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예술'로 한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평생 비밀로 하고, 두 번 다시 시도되지 않았어야 '최소한의 예술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이었기로소니 '그 작품(몽고반점2)'을 어디에 내놓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결국엔 '소멸'시켰어야 할 아름다움이었다. 지독하게 불편한 예술품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마지막 '정신병'은 앞의 두 작품의 불편마저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최종적 불편함'이었다. 정신병동에 입원할 지경이 된 영혜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혜가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나무 불꽃'에서 그 이유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영혜가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을 선택했으며, 겉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는 것이 편했고, 형부가 영혜의 몸에 직접 그려준 '꽃'을 보고 즐거워 했으며,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 '물구나무'를 서고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으며, 동물이 먹는 '먹이'를 거부하고, 식물이 되기 위해 '햇빛'과 '물'만을 찾았고,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다녔다. 이런 행위 모두가 일반사람들에겐 그저 '미친짓'으로 보일 뿐이지만, 영혜 자신에겐 실로 중차대한 '순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 그 자체'다. 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 멈추지 못하고, 끝끝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일까? 과연 무엇이 영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나? 영혜, 스스로가 말하기로는 모든 것은 '꿈' 때문이라고 했다. 꿈에 나온 '얼굴'이 두렵고 무서워서 이 모든 '불편함'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불편한 것은 '영혜의 미친짓'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폭력'이 미치도록 불편했던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옹색하고 옹졸한 것일까? 왜 한 사람의 '아픈 환자'를 이처럼 모질게 대하느냔 말이다. '유별난 사람'을 포용할 줄 모르는 사회는 끔찍하다. 모두가 정상인데 '비정상'인 것이 섞여 있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개성 넘치는 사회'가 주는 활력을 감안한다면, 넘치는 재능과 끼를 주체하지 못해 '색다른 개성'을 뽐내는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영혜'가 보여주는 '유별남'을 그의 남편이 보듬어주고, 처댁 식구들이 감싸주고, 이웃들이 배려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영혜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혜가 뿜어내는 '불편함'도 더는 불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쓰고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고,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폭력의 근거'로 삼아 정당방위라고 애써 포장한다. 자신의 속좁음, 옹졸함 따위는 무던히도 감추면서 말이다. 그래서 난 영혜가 보여주는 불편은 감당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나도 옹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불편을 남에게 끼치게 되면 일단 주변사람들이 먼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런 고통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 할 수 있을 듯 싶어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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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토끼
김지윤 지음 / 반달(킨더랜드)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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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 / 반달(킨더랜드) 1번째 리뷰] 사실 '유아'와 '어린이',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정의는 굉장히 모호하다. 몇 살, 몇 개월부터 정확하게 어린이와 청소년을 구분할 것인지, 그 구분을 '나이'로 할 것인지, '지능수준'으로 할 것인지, '인지발달'이나 '정서발달'로 정할 것인지, 그 어떤 것도 우리 사회는 정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미성년에 속하는 아이들을 유아, 어린이, 아동, 소아, 청소년, 미성년 등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으며, 여기에 무슨 기준을 따른 것인지 명확하게 밝힌 적도 없다. 그저 '학령'을 기준으로 만6세부터 초등학교 학생으로 부르고, 6년 동안의 초등교육을 2년 단위로 나눠서 '저학년(초등1,2학년)', '중학년(초등3,4학년)', 그리고 '고학년(초등5,6학년)'으로 부르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 전을 '유아'로 부르고,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청소년'이라고 부르길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구분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학년에 따른 '교과편성'을 달리 했을 뿐, 정작 이를 받아들이고 배우는 '학생들의 수준편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6세 아이들인데도 어떤 아이들은 이미 초등3학년 수준의 학업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한글'과 '셈'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이 공존하게 되고, 실제로 1학년 학생들의 수업내용은 '한글'도 떼지 못한 학생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그 내용의 '수준'도 어른이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고난도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가 들어갔는데 공부나 숙제는 학부모가 도맡아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담임선생도 학습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겐 '별도의 학원(공부방) 수업'을 듣고 학교에 보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대체 학교선생들은 뭘 가르치는...쿨럭쿨럭

각설하고, '그림책'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만 읽는 책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서론이 길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초등3학년'까지는 그림책을 부모님과 함께 읽으며 '배경지식'과 더불어서 '감성지능'까지 함께 익히는 것이 바람직할 정도다. 특히 '침대맡에서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정서안정'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니 '그림책'은 어린 시절에 절대적으로 많이 읽어주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그렇다고해서 '다양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 서너 권을 반복적으로 읽어줘도 무방하다. 오히려 '익숙한 이야기'가 아이들을 안심시켜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주어야할 부담감을 덜게 되어 부모님의 얇아진 지갑 걱정도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럼, 아주 어릴 때는 부모가 대신 읽어주는게 맞겠지만, 한글을 떼고, 스스로 책을 읽을 나이가 충분히 되었다면 '그만' 읽어줘도 무방한 것은 아닐까? 정답은 '반반'이다. 물론 아이가 스스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리해도 좋다. 하지만 부모님께 읽어달라고 조르는 아이라면 계속 읽어주는 것이 더 낫다. 이때 부모가 사정이 있어서 읽어줄 수 없다면, 아이에게 '지금은 읽어줄 수 없는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네 나이가 몇 살이데, 아직까지 응석을 부리는 거야", "이젠 너도 컸으니 스스로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해"라는 이유를 들면서, 억지로 떼어내려고 한다면, 아이가 '독서'를 싫어하는 계기로 작동할 수도 있으며, 아이의 정서에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 젖을 떼고, 이유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처럼 윽박지르며 반강제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책을 읽으려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와 함께 책을 읽으며 즐기는 시간을 오래 끌고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그림책'에서 아이들에게 읽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림책'은 글보다 '그림'이 우선인 책이다. 그러니 '글자'만 읽어주는 단순한 독서법이 아닌 '그림'을 읽어주는 고난도의 독서법을 부모가 먼저 선행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그림'에서 스토리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흔히 '스토리텔링'이라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학부모는 '독서전문가'가 아니기에 한 권의 그림책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뽑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비법'만 알아도 웬만한 전문가 뺨 칠 정도로 잘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먼저, 등장인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림책속에서 '주인공'을 찾아내는 것인데, 몇 번만 하면 아이들도 '주연'과 '조연'을 구분할 수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숨은그림찾기'하듯 그림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그림책 <복숭아 토끼>는 '제목'에서부터 주인공이 누구인지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찾기가 굉장히 쉽지만, 다행히 책의 그림속에 주인공인 '토끼'가 제법 잘 숨어 있다. 더구나 우리 '민화' 형식의 그림체가 아주 형형색색 알록달록하게 강렬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색채 감각'을 익히기에도 아주 효과적인 그림책이다. 그렇게 '주인공 찾기'를 하면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기'를 하는 것이다. 그럼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는 것'이 아닌 '주인공 찾기 놀이'로 이해하게 된다. 즉, 책을 읽는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 독서교육이 힘든 까닭은 아이들이 책을 '놀이'가 아닌 '학습'으로 인식해서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니 독서는 곧 '놀이'라는 공식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

자,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을 해줘도 된다. 만약 아이가 아직도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다면, 아까의 놀이 단계를 계속적으로 반복해도 좋다. 물론 놀이책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해도 좋고, 같은 책으로 놀이를 계속하게 될 때는 아주 조금씩 '주인공 토끼'가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대강의 줄거리를 살짝살짝 가미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글자 강박'에 들려서 글자부터 읽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직 아이가 '한글떼기 전'이라면 글자부터 읽을 게 아니라 '말'부터 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차피 '한글'을 떼기 전이라면 '아는 글자', '익숙한 글자'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전체를 리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가 '알고 있는 글자', '이해하고 있는 글자'부터 유혹을 하면서 차근차근 천천히 학습하길 바란다. 그리고서 '그림'만으로 대강의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이때, 될 수 있으면 '전문성우'의 흉내를 내면 좋다. 최대한 등장인물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연출하면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말이다. 또한 '상황'에 맞는 목소리로 리딩을 하면 아이들은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고, 부모가 가리키는 '그림'에 주목을 하면서 이야기에 따라서 '그림'이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환상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연상법 훈련'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능력을 타고 났으니 특별히 가르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학부모는 아이와 함께 즐거운 책읽기에만 열중하면 된다. 억지로 읽어주는 건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아이의 상상력에 뒤쳐져서 학부모가 미처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테지만, 그럴 때에는 아이에게 '스토리텔링'을 맡겨도 좋을 것이다.

그럴 땐 학부모가 적절히 '발문(질문)'을 던지면서 아이가 더욱더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주의할 점은 '간단한 질문'이 아닌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대답을 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 반대로 '간단한 질문'을 하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게 되면 아이는 '짧은 표현력'으로 대답할 말을 잊어버리고 답을 하는 부담감에 입을 꼭 다물 수도 있다. 그러니 최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길게 하고, 아이는 답을 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 '말문'부터 틔일 수 있도록 해주면 좋다. 여기서 명심하면 좋은 것이 바로 '칭찬'이다. 아이가 무슨 답을 하든 모두 정답처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과할 정도로 칭찬을 퍼부어주어라. 그래야 아이의 말문을 빨리 틔우고, 독서가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당연지사다. 칭찬을 해서 춤을 추는 건 고래만이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니면 '즐거운 독서'를 함께 하고서, "또 읽어줘"라는 무한 되돌이표에 빠져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시간을 '타이머'로 맞춰놓고 하는 방법도 있고, '횟수'로 맞춰 놓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밥이 다 될 때까지',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라면서 '상황'으로 독서 종료를 맞춰 놓을 수도 있고, '특별한 글자'가 책 속에서 나오면 '그 글자'가 나올 때까지만 읽어주겠다고 정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특별한 그림'이 나오면, "오늘은 여기까지다"라면서 끝맺기를 해도 좋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약속정하기'다.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거, 알고 있지?"라면서 생활규칙을 지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려주어야 한다. 이때 돌발상황으로 아이가 울면서 떼를 쓴다면, 무작정 달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엄마도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내일 다시 엄마랑, 또는 아빠랑 함께 다시 읽어줄게. 자, 약속!"이라면서 '새로운 약속'을 지켜야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이 그림책 <복숭아 토끼>는 우리 민화를 그림으로 선보여주고, 등장인물도 '민화'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물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우리 민화속의 동물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토끼는 '다산'과 '장수'를 상징하고, 복숭아도 '장수', 봉황은 '왕'을 상징하며, 물고기는 '번성'과 '출세'를 의미하고, 호랑이는 '액막이'와 '산신령', 포도는 '다산'과 '풍요', 수탉은 '벼슬', 그리고 흑룡은 '수호신'이자 '비'를 내리는 영험한 동물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문양만 보고도 그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으니, '예술적 교양'을 함양하는데에도 아주 탁월한 그림책이다. 더구나 우리 만화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색감'을 훈련시키는데에도 아주 훌륭할 것이다. 그림책이 비싼 이유도 바로 이렇게 '활용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왕 책을 구매하셨다면 뽕을 뽑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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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는 연애중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CMXXXV / 이봄 3번째 리뷰] <내 누나>(2014), <내 누나 속편>(2017)에 이은 세 번째 '단행본'이다. 일본의 패션 잡지 '앙앙(an an)'에 연재한 만화를 모아서 펴낸 책인듯 싶은데, 다 읽으니 그저 그랬다. 처음으로 읽었던 <내 누나>는 너무 좋았다. 누나가 남동생에게 인생선배로서 코칭을 해주는 컨셉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남자는 잘 모르는 '여자의 속마음'을 남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주는 점에 배울 점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리 세 편을 다 읽기는 했는데, 굳이 3권이나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같은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패션 잡지 성격상 '여성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내용이 인기 있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남성독자'인 나에겐 '그래서,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점으로 결말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0대 커리어우먼인 '지하루'가 말하는 내용은 늘 '여성이 바라고 바라는 남자'가 대화의 1순위였다. 그래서 '어제'의 데이트 상대가 어쨌고, '오늘'의 데이트 상대는 어땠으며, '내일'의 데이트 상대는 저랬으면 참 좋겠다는 것이 대화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지하루가 늘 내뱉는 말은 "살 빼고 싶다"는 말이다. 근데 남동생이 누나에게 "늘 같은 말 뿐이다"라고 핀잔이라도 줄라치면 누나는 "오늘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네. 여자의 말에는 '같은 말'이 없어. 비록 '같은 말'처럼 들리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말뜻도 달라지는 거야. 여자의 '본마음'을 캐치하지 않으면 인기남이 되기 힘들어.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할 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상황이 달라졌는데, '같은 말'을 하는 걸까요? 같은 말을 했으면 '뜻'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자들은 그 말의 본래 뜻을 잘 이해하는데, 왜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쓰는 걸까요?

처음엔 이런 '차이점'이 신선했고 '여자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탐독하려고도 했으나, 그 열기는 금방 시들해지고 말았다. 지하루가 바라는 것이, 다시 말해, 30대 여성이 '사회생활'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그저 그런 '속물근성(?)'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30대 남성이 바라는 '속물근성'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의 도시남녀들은 서로가 바라는 '속물'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수준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여자의 속마음'을 굳이 알아챌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저 저들의 '개인적 취향'에 걸맞는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이 전부인 '만화'가 되고 말았다. 이걸 굳이 3권이나 읽고서 깨달을 필요가 없는 셈이었다.

마스다 미리의 인기비결은 그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물론 그 인기가 '현재진행형'은 아니지만, 한시절을 풍미했던 인기작가의 성공비결을 분석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보이진 않았다. 그저 '유머스러움'이라는 것이 유일한 비결처럼 보였다. 그마저 '철지난 유머'여서 그리 신명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다른 팬들도 <내 누나> 시리즈에서는 크게 실망하고, <수짱> 시리즈에서 받았던 감명을 이어가지 못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수짱>에서는 그 인기비결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을까? 다음 책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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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시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5 스켑틱 SKEPTIC 15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9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CMXXXIV / 바다출판사 14번째 리뷰] 25년에 7년전 잡지를 읽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학잡지'이고, 또한 '과학적 회의주의'에 입각한 칼럼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절 '철지난 논쟁'이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2018년은 '박근혜 탄핵'이 이루어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째가 되는 해다. 그 시절에 날선 공방이 오고 가던 것은 바로 '유사역사학'과 '사이비역사'에 대한 날선 비난이었다. 이 잡지의 제목이 '무신론의 시대'라고 달려 있으나,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살짝 작은 글자로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도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역사왜곡'을 하려던 세력이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철저한 역사왜곡이 진행되어 왔었다. 바로 '일제의 식민사학'이었다. 일제는 '한국지배'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일본 역사의 지위 '아래' 두려는 작업을 실시했으나 쉽지 않았다. 왜냐면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역사는 늘 일본 역사보다 상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기 위해 억지주장이라도 해야 했으나 확실한 물증도 없이 역사를 왜곡했다가는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아시아국가로서 체면이 손상될 우려가 있기에 매우 치밀하고 철저한 '왜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내놓은 것들이 '임나일본부설'이었고, '광개토대왕 비문조작', 그리고 '칠지도 명문해석 논란' 따위 였다. 하지만 이런 왜곡 시도는 허술했던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대부분 '왜곡의 실체'까지 파악하여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학자들이 저지른 '식민사학의 뿌리'는 매우 큰 문제를 낳았다. 우리 역사의 실체를 낮잡아보는 '자학사관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못났다'고 공식화 해버리니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소위 '민족사관'으로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살리자는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맞불을 놓으니, 이런 역사학이 '비과학적'이라면서 국뽕에 물든 '국수주의'에 불과한 날조된 역사라고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난을 쏟아내는 학자들이 대학강단에 선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강단사학자'라고 불리고, 이에 맞서 국수주의 역사관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재야에 묻혀서 '학계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다고 하여 '재야사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양단에 서서 서로를 향한 날선 비판과 비난이 마구마구 쏟아지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박근혜 정권'은 역사교과서를 기존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하겠다는 발표를 해버린다. 이유는 학생들이 배우는 '검정교과서'가 좌익사상에 물들고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대단히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정교과서'를 편찬해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하필 그런 '국정교과서'를 편찬하는 주최가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인 것이 도마에 올랐다. 여기저기에서 교육정책에까지 '식민사관'과 '보수우익적 정치색'을 심으려는 것이냐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교과서' 이야기는 잠잠해졌고, 그때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가 전국에서 딱 1곳뿐이었다는 뉴스가 장식되었었다.

그런데 현재 2025년이 된 지금은 어떤가? 민주주의가 위협당하며 '반국가세력'을 처단하려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에 '뉴라이트'가 주장했던 이야기는 '극우유튜버'들이 계속 이어왔고, 그런 극우적 망상을 신봉한 윤석열은 끝내 '계엄령'을 선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걸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 당시 '젊은역사학자모임'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이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2017),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2018)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한국의 고대사'는 재야사학자들(그들은 '사이비역사학자'라고 부른다)에 의해 날조되다시피 했다며 '과학적 연구 검증'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에 '과학적 검증'을 들이대서 아주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웠다. 겉보기에는 아주 신선했다. 대중들은 '한국 역사'에 자긍심을 키워가고 있으니, 그런 자긍심에 '과학적 검증'으로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이런 기대에 쇠말뚝을 박고 말았다. 과학적 검증 결과, 대중들이 즐겨보는 '재야사학자'들의 역사저술은 '사이비'에, '날조'였고, '유사과학'과 마찬가지인 '유사역사학'으로 점철되어 한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자긍심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객관적'으로 짜친 역사라는 이야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사관의 뿌리'가 제거되지 못한 결과, '자학사관의 한국사'가 다시 불거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잡지에 그 '강단사학자'의 이름이 보인다. 기경량, 안정준...이들은 '회의주의 과학잡지'에 자신들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포장해서 사이비과학을 경계하듯 유사역사학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역시나 '한국의 고대사'를,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또다시 폄훼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가 명백한 '위서(가짜 역사책)'이니 이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한국의 고대사'도 사실무근이며, '한사군'은 실존했고, '낙랑군'은 현재의 평양에 위치했으며, '임나일본부'까지는 아니어도 과거의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므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시절의 늙은 학자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다. 젊은 조교수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서울대학교 역사학부를 졸업한 수재들이 이런 소리를 한단다. 일본의 극우논객이 할 법한 이야기를 아주 술술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경악을 했더랬는데, 이 잡지에, 그 시절에, 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버젓이 살아숨쉬며 '애국시민'을 선동하는 극우세력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사이비'라면서 공격했던 재야사학자들이 애써 키운 '한국 역사의 자긍심'은 모두 날조에 가깝고, 잘못된 사실에서 기인한 '욕망'이니 버려야 옳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런 목적으로 '과학적 검증'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당시에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더 궁금하다. 그럼 잠시 '무신론의 시대'를 살펴 보자.

이 잡지가 편찬된 2018년을 기준으로 미국시민들의 '종교관'을 여론조사했는데, 놀랍게도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힌 비율이 2000년 초반보다 늘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교회를 가지 않는다'는 사람도 늘어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의 비율도 확실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무신론'이 대세를 굳혀 가고 있다고 본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하긴 유럽에 있는 수많은 성당과 교회에서 더 이상의 '예배(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신도들이 찾지 않으니 점점 관광목적으로 방치될 뿐, 실제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있는 건축물이 점점 늘어난다고 말이다. 이처럼 서양사람들의 '종교관', '신앙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무신론'이 확신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회의적이다. 여전히 신앙은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다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줄긴 했으나 그것이 '종교의 위세'까지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인 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만 봐도 '신'을 믿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열세다. 그러나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다수가 '있다'고 대답한다. 이 말인즉슨 '과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신의 존재'를 믿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종교활동'을 통해서 신앙심, 그 이상의 무엇에 대단히 열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성당이나 교회, 절 등에서 '신앙인'들이 설교나 법회를 열 적에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보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단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특정정파'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특정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나라가 산다는 따위의 설법을 아주 자연스럽고 공공연하게 한다고 한다. 이게 바람직한 신앙이고, 종교인지는 차치하고서, 수많은 신도들이 신부님의 말씀, 목사님의 설교, 스님의 강독을 들으면서 '믿숩니다'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의 일부분일 것이다. 전광훈이 나와서 '헌재'를 폭파하라는 설교에, 전한길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고 강의를 한다. 왜 종교와 역사가 맞물려서 쌍으로 메롱을 떠는가 말이다. 식민사학자들이 '유사역사학'이라고 비난을 할 때, 그런 비난을 좋아할 대상이 누군지 주목했다. 전광훈, 전한길의 한목소리에 누가 좋아할지 생각해보면 답은 얼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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