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IX / 이봄 13번째 리뷰] 작가의 '한결같음'은 매력일까? 권태일까? 딱히 '전작(全作)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작가에 꽂히면 그의 저작물을 닥치는대로 읽고, 사 모으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오랜만에 '마스다 미리'가 걸려들었는데, 이 작가는 좀 한결같다. 그래서 좀 지루한 감이 있기도 하다. 그 까닭은 '3, 40대 독신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벌써 마스다 미리 작가의 13번째 리뷰인데 조심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예전 리뷰에서 썼던 내용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면서 리뷰를 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루하면 더는 읽지 않을텐데, 꾸준히 읽는 것을 보면 단순한 권태는 아닌 모양이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긴 한데, 그게 뭔지 딱 와닿지 않은 것 같다.

제목에서 '반려견'을 다루고 있지만, '치비(히토미가 어릴 적에 붙여진 반려견의 이름)'를 그리 많이 다루진 않았다. 그보다는 '사와무라 씨 댁, 세 식구'에 관한 일상이야기가 주를 이룰 뿐이다. 그리고 무려 결혼한 지 40여 년 간의 일상을 불쑥불쑥 꺼내들 뿐이다. 그런데도 비슷비슷한 '일화'들이 주를 이룬다. 참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 식구들이다. 오죽했으면 1편에서는 '오랜만에 여행을 가다'가 제목이었겠는가. 그런데 뜬금없이 2편에선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궁금하겠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사와무라 씨 댁'의 가족들의 평균 연령이 60세인 탓이 가장 크다. 그렇다. 반려견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개의 평균수명은 견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작은 견종은 10~15년, 큰 견종은 20~30년을 산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제 고희(70세)를 맞이한 사와무라 씨에게는 "내가 돌볼테니 개를 키웁시다"라는 말을 내뱉기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일본인들은 가족끼리도 '폐'를 끼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니,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피곤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음씀씀이'다. 불편해도 가족이니 괜찮겠거니 마구 일을 벌이는 것도 실례지만, 가족끼린데도 불편을 꺼리고 눈치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사는 것도 예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암튼, 이 책의 주된 주제는 '노년의 삶'이다. 초고령화 사회로 돌입한 것 때문인지 한국과 일본은 연일 '저출생 문제'를 들이대고 '인구감소'를 크나큰 재난마냥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그나마 일본의 인구가 한국보다 2배 많은 것이 현재라서 조금 덜 심각하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우리보다 더 심각한 '경제문제(잃어버린 30년)'를 안고 있어서 '노후대책'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아진 것은 사실인 듯 싶다. 거기에 '고독사', '1인 가정',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노인' 등등의 문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종종 마주할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노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문제가 되기 '전'에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을 정도로 '지루'하지만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딴에는 언제까지 '한결같을 것'인지 오기로 읽고 있는 느낌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늙음에 대한 평범한 고찰'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늙게 되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발상의 전환'같은 고도의 전략적인 '일상 탈출'을 계획하지 않게 된다. 그저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느낄 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도 아주 장점이 없지는 않다. 아주 작은 변화도 금방 '눈치' 챌 수 있게 되고, 아주 사소한 즐거움도 놓치지 않게 된다. 젊어서나 어려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었던 '작은 변화'조차 늙은이의 삶에 포착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탓에 노인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물'보다 느려서 움직임조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식물'에 관심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변화도 '꽃'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하나, '벌레' 한 마리, '바람'에서 느껴지는 냄새 하나하나에서 모두 '기운'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인의 초능력'인 셈이다. 우리는 이를 흔히 '노련함'이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하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50살이 넘어가니 슬슬 그 초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언제까지 그 초능력을 사용하며 살아갈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 내리는 봄비가 그치고 나면 좀 따스해지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I 시대, 우리의 질문 - AI와 우리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 13
미리엄 메켈.레아 슈타이나커 지음, 강민경 옮김 / 한빛비즈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III / 한빛비즈 167번째 리뷰] 질문이 필요하다. 먼저, 우리는 AI 시대를 살아가는가? 이미 '살아가고' 있다. 아직 우리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미 상당한 기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 귀에 벌써 익숙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AI 시대'속에서 잘 살아갈 것 같은가? 대답하기 곤란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흔히 말하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공존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AI 기술의 발달 '속도'를 지켜본다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AI는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의 일상을 점거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을 점거한 AI 기술이 우리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런 결론조차 '50 : 50'으로 갈리는 편이다. 이런 결론이 우리에게 결코 좋은 결론이 아니다. 왜냐면 어떤 기술력이 등장했을 때 기대감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에 따른 '보완점'을 내놓으면서 '대책'이나 '대안'을 마련하기 마련인데,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면 어느 쪽에 맞추어서 '장단'을 맞춰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가장 좋은 대안은 '인간과 AI가 서로 공존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춰야 하는 결론밖에 내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존'은 정말 좋은 결론인가? 공존도 두 가지 '방법론'으로 나뉜다. 하나는 '켄타우로스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보그 방식'이다. 켄타우로스 방식은 '반인반마'의 특성처럼 인간과 AI의 장점을 살려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고, 사이보그 방식은 인간과 AI의 '완벽한 융합'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런 분류법은 오직 '생산성'만을 따졌을 때 내릴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공존은 '윤리적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예컨대, 소설이나 음악, 미술과 같은 분야에서 '창작자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저작권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원작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소설가가 'AI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대략적인 '밑그림'을 짜놓은 소설에 작가 본연의 문체와 구성력으로 직접 손봐서 내놓은 결과물을 과연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만약 이게 '창작의 영역'으로 인정이 된다면,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데이터'로 삼은 AI 작가가 내놓은 '2차 창작물'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10초만에 뚝딱 만들어진 창작물의 소위 '대박행진'을 해서 엄청난 수익을 냈다면, 그 수익은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인가? 당연히 'AI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출판사의 것'인가? 만약, 켄타우로스 방식으로 '중간개입자'가 있어서 그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반영되었다면, 그의 '창작물'로 인정해야 옳은 것인가? 아니면 사이보그 방식으로 AI 칩셋을 '이식'한 사람이 매 10초마다 내놓은 창작물의 소유주로 인정받아야 마땅한가? 결국엔 '기준점'이 모호해서 그 어느 쪽으로도 인정하지 못하고, 어느 쪽으로 인정을 해도 여전히 문제의 소지는 남게 된다.

물론, 이런 모든 논란은 AI가 '완벽하다'는 가정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AI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한다. 이를 '할루시네이션'이라고 하는데,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확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허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새로운 거짓말'을 계속에서 늘어놓는 AI의 답변을 마주할 때마다 절망하게 된다. 과연 이 도구를 계속 신뢰하면서 쓸 수 있겠느냐는 회의감이 부쩍 늘어나게 된다. 더구나 AI에게 입력한 '데이터의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다. 인류의 지식을 총망라했다고 자부한 AI들이 내린 '인간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데에도 놀라움을 넘어 끔찍할 지경이다. 대다수의 결론이 부정적이었으며, 그 부정적인 평가의 대다수도 '인류는 멸종시켜야 한다'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가? 이는 인류가 남긴 '기록'이 인류에게 마냥 우호적이지 않다는 경향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AI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점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데에 AI의 기술은 매우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고, 그 결과 또한 놀라울 정도다. 그러니 사람이 일일이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작업은 '고귀할' 수는 있으나, '생산성'은 꽝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유용한 도구를 반드시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히 다뤄야 한다. 왜냐면 AI는 우리에게 마냥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AI 스스로는 '선악의 기준'을 모른다. 그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추려내고 '확률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보이는 데이터를 모아다가 '우리가 제시한 틀'에 맞추어 내놓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작업했다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았을 '팔이 세 개인 사람'을 천연덕스럽게 내놓는 것이 바로 AI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결과물을 내놓았다고해서 AI를 그냥 폐기하지도 못한다. 왜냐면 사람이 직접 그렸다면 아무리 빨라도 3~4시간이 걸렸을 작업이라도, AI는 불과 10초 이내에 뚝딱 해치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셈이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AI 기술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술력을 보완, 발전시켰을 때의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지만, 딱히 문제점을 개선할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왜냐면 인간은 AI의 결론을 볼 수 있지만, AI가 그런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AI는 '인간의 언어'를 해독해냈지만, 인간은 'AI의 언어'나 AI의 언어구사 방법' 등의 일련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살펴보려면 또다시 'AI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AI의 도움을 구해봐야 그 또한 'AI의 언어'이기에 인간은 도저히 'AI의 마음속(?)'을 알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AI가 내놓은 달콤한 결과물에만 취할 뿐이다.

그래서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그 '달콤함'이 인간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이 'AI의 생성수단'을 양껏 이용하되, 최종적으로 '인간이 검수하고,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는 소극적인 결론만을 내놓을 뿐이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AI 기술을 적극 도입해서 '생산성'을 최대로 높이되, 그 결과물에 대해서 최종적으로는 '인간'이 개입해서 해가 되는 것은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존에도 문제는 또 있다. 바로 '평균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이조차 버거울 것이라는 점이다. '평균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공존방식으로 크나큰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은 '주15시간'만 노동을 하고도 엄청난 부와 여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조차 버거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평균 이하의 사람들'은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럼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풍요를 누리고 살기 위해선 우리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누군가에게 팔아서 남은 이득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완벽하게 공평한 나라'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꿈꿨지만, 현실에선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지 않은가. 부의 불균형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경제가 '정상작동'하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계속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극심하게 '양극화'가 되어서도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 바로 '평균 이상 vs 평균 이하'의 대립구도가 그럴 것이다. AI라는 유용한 도구를 잘 활용하는 사람들에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부를 창출해낼 수 있겠지만, 그 도구가 아무리 유용해도 '그림의 떡'처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에겐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둘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는 것이다. 뭐,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금'을 활용해서 '연금' 형식으로 부의 균형적 분배 장치를 만들자고 하지마, AI가 없던 시절에도 해내지 못한 숙제 아니던가?

그리고 문제는 또 있다. AI가 내놓은 엄청난 생산력도 그동안 만들어놓은 '인류의 창작물(데이터)' 수천 년간 쌓여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데이터도 고작 2026년이면 모든 데이터를 다 써버리고 마는 '고갈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럼 인간의 독창적인 창작물을 'AI의 처리속도'에 맞춰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게 불가능하니,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2차, 3차 가공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심지어 'AI와 AI'가 협업(?)을 해서 내놓은 생성물이 넘쳐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완벽한 자율시스템이니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AI가 선사한 생성물의 풍요로움을 그저 만끽하기만 하면 된다는 낙관주의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근친교배'로 인해서 인류가 번성하길 포기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AI끼리의 근친교배(?)로 인한 생성물도 위험하기 짝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거짓말 잘하는 AI'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그럴 듯한' 정보를 가지고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한들, '불량품'을 양산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검수, 선택'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좋은 기대를 하긴 힘들다. 왜냐면 이미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데이터'를 검수하고 선택하는데에도 '케냐의 일꾼'을 고용해서 시간당 2달러(한화 약 3000원)라는 값싼 비용을 제공하고서 쌓은 업적이기 때문이다. 미래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다가올 AI 시대의 본격화를 막을 도리는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게으르다면 결국 인간은 유용한 '도구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AI를 도구로 이용해서 부를 거머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AI의 도구로 전락해서 영화 <모던타임즈>의 명장면처럼 살아갈 것인가? 그건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이 책 <AI 시대, 우리의 질문>을 읽으면 느낄 것이다. 이미 '결정'되어 있다. 당신이 이미 살아온 방식, '선택'한 습관에 따라 결정지어졌기 때문이다. 어떠한 결정이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 한 어린이의 불평을 잘 듣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숙제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왜 이걸 다 해야 해요? 이딴 걸 배워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AI가 나보다 더 글을 잘 쓰고, 계산도 잘 하고, 조사도 잘 해요. 그런데 왜 이걸 제가 해야 해요?" 틀린 말인가? 어차피 AI가 더 나은 결과물을 내는데, 왜 사람이 직접 해야 할까? 이 질문에 핵심이 있다. 당신이 '도구'를 쓰는 삶이 될지, 아니면 '도구의 도구'로 살아가게 될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8 - 천하삼분(天下三分)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II / 위즈덤(WISDOM) 8번째 리뷰] 결국 유비가 서촉땅을 얻었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고 제갈량이 내놓은 계책이 '천하삼분지계'였는데, 드디어 천하를 셋으로 쪼개는 형세를 갖춘 것이다. 조조의 북위, 손권의 동오, 그리고 유비의 서촉, 이렇게 천하는 셋이 되었다. 허나 갈 길이 멀다. 이제 막 '한 황실의 복위'를 위해서 주축이 될 거점을 마련했을 뿐, 여전히 '헌제'는 승상 조조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으며, 손권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유비가 나아갈 길은 이토록 험난한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정도라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비에게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는 바로 '제갈량의 존재'다. 유비가 화려한 비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와룡선생'이라 불리던 제갈량과 함께 하면서부터였다. 공명이 있었기에 유비는 '적벽대전'에서 형주를 빌릴(?) 수 있었고, 형주를 발판 삼아 '서천땅'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천연요새와 다를 바 없는 '서촉'을 기반으로 방어를 굳건히 하고, 천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힘을 기를 것이다. 이제 유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유비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유비는 유장에게서 서천땅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뺏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유비가 유장의 영내로 '군대'를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천땅(한중)'의 주인, 장로 때문이었다. 장로가 유장을 공격했기에 홀로 막아낼 수 없었던 유장은 '유비군'을 구원군으로 요청한 것이다. 유장의 신하들 중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유비는 세상이 다 아는 효웅인데, 늑대(장로)를 몰아내고자 호랑이(유비)를 끌어들이는 격이라며 성문 앞에서 목을 메어 자살하면서까지 유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충신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유장은 '그릇'이 작았다. 그에게 너무도 과분한 충신들의 간언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유비는 방통과 함께 서천땅으로 들어왔고, 유장을 대신해서 장로와 싸우러 갔다.

그런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장로의 공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선봉으로 나선 마초의 공격은 장비의 용맹과 공명의 지혜로 '우리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한중땅이 워낙 험준한 지형이었기에 수비에 치중하는 장로군을 서둘러 공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유장에게 '병사와 병량미'를 요구했으나, 유장은 자신들도 가진 게 없다며 '늙은 병사와 쌀 약간'을 보내왔을 뿐이다. 이에 불같이 화를 내는 유비는 장로군을 뒤로 하고 유장을 치러 군사를 되돌렸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더 싸우다가는 '병량'이 떨어져서 진퇴양란에 빠져 자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유장이 틀어박혀 있는 '성도(서촉의 수도)'로 쳐들어가 유장을 잡고, 서촉을 차지했다.

애초에 이렇게 했으면 되었을텐데 왜 유비는 방통을 잃어가면서까지 뜸을 들였던 것일까? 어차피 유장을 공격(!)해서 서촉을 빼앗을 거였으면서 말이다. 그간 유비는 도겸에게서 '서주'를 얻을 때도, 유표에게서 '신야'를 얻을 때에도 도덕군자처럼 굴었다. 거듭 사양하고, 또 사양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애써 얻은 '서주'를 여포에게 거저(?) 내어주고 자신은 더 작은 '소패'로 옮겨가기까지 했을 정도다. 더구나 노숙이 찾아와 빌려간(?) 형주를 되돌려 달라고 했을 때에도 '서촉'을 차지하면 당연히 돌려줄 것인데, 서촉의 주인이 자신과 '친족'이라서 쉽사리 빼앗을 수 없어서 그런다고 할 정도로 유비는 인의를 중시했다. 그런데 유장을 구원하러 왔다가 결국은 '서촉'을 차지하고 말았다. 이런 180도 다른 행보는 과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여기에는 '도리'를 지키지 않은 유장의 태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는 과거에도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를 죽이라고 조언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여포와 손을 잡고 함께 조조와 싸우기도 했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조조에게 빌붙어서 유비는 여포를 죽이라고 했을까? 그건 여포가 먼저 유비를 '배신'하고 위기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서주땅까지 주며 함께 조조와 맞서자고 했건만, 여포는 끝내 유비를 배신하고 조조의 공격에서 유비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비는 끝내 여포를 죽이라 했다. 아무리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여린 공자처럼 굴더라도 유비는 '인의'를 저버린 사람에게까지 한없이 아량을 베푸는 멍청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비군이 왜 장로군과 싸우고 있었던가? 유장 홀로 장로와 맞서 싸울 수 없었기에 대신 싸워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와주워 온 유비를 돕지 않고, 뒤에서 '장난질'만 치고 있다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유장이 먼저 '인의'를 무시하고 배신했으니 유비로서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명분을 찾게 되자, 드디어 유비는 '결전'을 시행하고 서천땅을 차지한 것이다.

자, 이렇게 서천땅을 찾았으니, 동천땅(한중, 장로)도 찾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먼저 선수를 친 건 조조였다. 조조는 대병력을 이끌고 '한중'을 차지하러 왔던 것이다. 이때 방덕이 힘을 내어 막았으나 '양송'이란 간신배(특히, 뇌물을 유독 좋아함)에 의해 방덕의 목숨이 위급하자 조조에 투항을 해버리고 만다. 방덕이 투항을 하니 장로군도 더는 막을 수 없었고, 양송의 배신으로 인해 장로는 조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조조는 오히려 장로가 그간 '한중'을 잘 보살펴왔다면서 상을 내린 반면에 양송의 도움으로 한중을 차지했는데도 조조는 양송을 '배신자의 표본'이라면서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렇게 한중을 차지하여 위세가 등등해진 조조군의 신하들은 내친김에 서촉까지 공략하여 유비를 단숨에 제압해버리자고 조언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조는 군사를 물려버린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날 수도 있고,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도 기진맥진해 있으니 쉬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를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의 장면과는 사뭇 다르다. 그 당시 곽가도 '속전속결'을 주장했고, 조조는 그에 따라서 원소의 아들들을 끝까지 쫓아서 전멸시켰었다. 그런데 왜 조조는 느긋하고 무뎌진 것일까?

그건 아마도 '적벽대전의 패배' 때문일 것이다. 조조는 적벽대전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100만 대군을 움직일 때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를 거두며 가는 곳마다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패를 경험한 이후에는 행보가 매우 신중해졌다. 그리고 '의심'도 많아졌다. 그래서 공명도 조조의 '의심병(?)'을 이용해서 다음 번의 '한중공략'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용병술도 상당히 둔해졌다. 예전 같으면, 서촉과 동오의 '양동작전'이 벌어졌다면, 대군을 반으로 쪼개서 신속하게 진퇴를 결정하며 적들을 능수능란하게 물리치는 용병의 귀재로서 손색이 없도록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조가 많이 무뎌졌다. 한중을 차지하고서 굳이 대군을 되돌려서 '합비'를 치러 갔다. 공명이 형주의 일부를 손권에게 돌려주면서 '합비공략'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조도 동오를 정벌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낼 작정이었기에, 장료에게 군대를 맡겨 합비를 공격하러 보냈으나, 손권이 먼저 선수를 쳐서 '합비'를 거의 함락직전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장료의 군대'가 합류하고, '악진'이 기를 쓰고 지켜내니, 도리어 손권이 섣불리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때 '감녕'이 목숨을 걸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손권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게 손권군은 퇴각을 했고, 이때부터 '료라이~(장료가 온다)'라는 소리만 들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손권이 동쪽에서 공격해 들어가자 공명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공략'에 들어갔다. 애초에는 '촉오동맹'에 따라서 유비군이 위기에 처한 손권을 구하러 가야했지만, 공명이 그런 허튼짓을 할 까닭이 없다. 공명은 '한중'도 차지하고, 한중을 지키러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는 조조의 처지를 생각해서, 동맹국에게 도움도 주는 절묘한 방식으로 동맹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자, 이때에는 '황충과 엄안'이 대활약을 펼친다. 칠순이 넘은 노익장을 제대로 보여준 것인데, '천탕산 전투'에서는 적장 하후연까지 두동강을 낼 정도였다. 그렇게 조조의 원군이 오기도 전에 황충과 엄안은 '정군산'까지 점령을 하면서 북위를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을 완벽하게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쩌랴. 공명이 한중을 차지한 것도 잠시 '형주'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한중을 빼앗긴 조조는 '사마의'에게 점점 더 힘을 실어주고, 한편으로 동오의 손권을 자극해서 '형주'를 완전히 빼앗아 유비의 숨통을 조이도록 만들었다. 과연 유비는 '형주'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당시 형주를 지키고 있던 인물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다음 권에서 알아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I / 21세기북스 37번째 리뷰] 이 책을 읽다보니, 시인은 어두운 시대의 저항정신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수능세대로 아니고 마지막 학력고사세대에게 너무 깊은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면 솔직히 힘들다. 더구나 '공대출신'에게 코칭해주는 스승도 없이 '문학적 사유'에 뛰어드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지 정녕 몰랐다. 그냥 물가에서 물장구 치는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아니라는 아찔한 생각만 들 뿐이다. 이런 '문학'에 관한 문외한 수준인데 감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니...덜컥 책 구매부터 하기에 앞서 '제목' 아래 달려 있는 '부제'를 먼저 읽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굴뚝이었지만, 어쩌랴, 부제를 보았더라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구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어로 'no lo se(놀로세)'는 우리 말로 '나는 모른다'는 뜻이란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스페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원주민의 정체성'을 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유럽계통 백인의 혈통'임을 인정받고자 했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유럽(스페인) 사람들에게 '백인 혈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졌다. 그리고서는 오랜 독립투쟁을 거쳐 어렵사리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았고,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내부 문제로 불안정한 일이 불거질 때마다 그들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빈번하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1521년 '코르테스'라는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백인화 된 것'에 대해서 승리라고 말하지도,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는 절멸 당한 '선주민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패배했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모른다'는 말을 언제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일까?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뜻할까? 아니면 '주관적인 해석'을 어찌 내려야 좋을지 모를 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뜻할까? 결국 어느 한 쪽이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그 결과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할 때 써야 옳은 표현일까? 참으로 애매하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냥 모른다라고 쓸 것이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쓰는 게 맞다고, 또는 옳다고 하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썼다고 할테지만, '독자'들은 그 '모른다(놀로세)'는 한마디에서 수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을 감안해서 '놀로세'라는 한마디가 뜻하는 바가 얼마나 위대한 표현인지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몰랐던 상황'에서 깨닫게 된 처지가 되었을 때의 반향은 어떠했을까? 침략자 코르테스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핏줄'을 더럽힌 뒤에 '혼혈'이 되었지만, 자신들은 '백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정복자들처럼 피부색이 하얗고,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쓰고 있으며, 정복자의 문화와 신앙까지 무엇 하나 '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메스티소)은 몰랐다.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 바다 건너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백인들이 정복한 '원주민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문화는 '이동'이 가능하긴 하지만 '본래 땅주인의 것'이 훨씬 더 우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핏줄'이 아무리 정복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원주민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정복자의 영광'까지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메스티소는 멸망한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자의 핏줄로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그런데 또 이걸 몰랐다. 자신들이 '백인'이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던 탓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아스테카 문명'의 진면목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의 말도 잊어버렸고, 원주민의 문화도 잃어버렸으며, 원주민의 신앙도 깨끗하게 버려벌였다. 유럽 본토인들에게 까이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다시 재건해야 하는데, 재건할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시 '본토인의 문명'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땅에서 '유럽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것 말이다. 그것이 또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유럽의 것'하고는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만 굳건히 했을 뿐이다. 이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저항정신'이었던 것이다. 별다를 것이 없어 존심을 상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년 동안의 고독>(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며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마력을 지닌 소설이라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10쪽을 다 읽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뭐가 마술인지 마력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놀로세~ 그런데 이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서는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고,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일상적 삶에서 확인되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적 현실이라는 믿음에서 '문학이해의 시작'을 할 수 있다는데, 이게 탈중심적인 새로운 세계 인식의 방법이라는 소개만 이해할 뿐, '사실주의'의 기존 인식 방법과 새로운 인식 방법의 차이점을 구별해주는 스승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암튼,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쾌거라는 사실만 이해했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루벤 다리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영광과 승리를 대변하는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나카노르 파라 등 네 명의 시인을 대표로 삼아 그들의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난 그 시에 담긴 '의식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말이다. 이렇게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책을 덮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리뷰를 써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모르면 모르는 채로 솔직히 쓰는 것'이다. 이마저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게 된다'는 사실만은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젊은 시절에는 '기록'도 남기지 않고 '기억'에 의지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아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모르는 것'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말 당연한 이치지만, 그렇게 '몰랐던 것'을 다시 배우려 덤비니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밖에는 아무런 도리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면 모르는대로 '기록'을 남겨놔야,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해서 좀더 수월하게 '앎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심오한 '시의 세계'를 파고들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물가에서 물장구치는 수준을 넘어서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까지는 올라갈 생각이다. 적어도 '해설'을 이해할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 내 안의 힘을 발견하는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4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 / 21세기북스 36번째 리뷰] 에리히 프롬의 철학은 다른 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정평이 나 있다. 심지어 너무 난해한 철학에 익숙한 이들은 '쉬운 철학'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낼 정도라서 프롬의 철학은 철학도 아니라고 폄하할 정도다. 그만큼 쉽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을 막연하게 어렵다고만 하는 분들이 접근하기 아주 좋은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쉽다고 했지 만만하게 보면 절대로 안 된다. 프롬의 철학은 '깊이'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함'에 놀랄테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프롬은 양극단에 있는 개념조차 모두를 아우르는 '통찰력'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프롬은 진화론적인 과학적인 관점이나 창조론적인 종교적인 관점까지 다 포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선불교의 깨달음도 동시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사상적 유연함 때문인지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 건국'에는 반대하고,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롬의 철학을 아주 잘 반영한 책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고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다. 이 책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프롬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나면 분명히 앞에 소개한 책들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라면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나조차 그런 독자 가운데 하나였으니 말이다.

먼저, 프롬의 삶은 '존재지향적인 삶'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삶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소유'를 우선시하고, 최종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은 '무의미'할 뿐이다. '진정한 부자'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는 가진 재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부르지만, 단지 '가진 것'이 많기만 한 사람을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는 것'이 많은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소유'한 것이 많을 뿐인 사람은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진정 '부자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을 척척 뿌려대는 사람을 보면, 그가 지닌 '위력' 또한 어마어마할 것으로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진정한 부자'로 느껴지진 않는다. 왜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부를 쓰는 것은 너무 하찮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면 '거대한 힘'으로 느껴지긴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런 부자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성까지 별로라면 그저 '플렉스(돈지랄)'하는 것일 뿐이라 여길 따름이다. 그런데 엄청난 재력으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기꺼이 자산을 베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먼저, 그가 가진 힘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인격' 또한 훌륭하니 저절로 공경심이 솟아날 것이다. 거기다 돈 쓰임새가 올바르다면, 그런 이를 우리는 '진정한 부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의 존재'를 여실히 느낄 수 있고, 그런 존재만으로 우리는 안심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지향적인 삶'이라 할 것이다.

프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불안과 절망에서 구원한다고도 말했다. 이는 남녀 사이의 '애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해동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전 인류에 대한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사랑이다. 앞서 '진정한 부자'의 예를 들었으니 계속 이어 가겠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가 '존재감'을 뿜뿜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할 일조차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단지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돈을 긁어 모을 수 있는 재능'까지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이런 대단한 능력자들이 그들이 가진 힘을 '선과 악', 어느 방향으로 쓸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다. 이를 테면, 트럼프 같은 초일류 부자가 하는 짓을 보면 어떤가? 아주 선한 방향으로 그가 지닌 재능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랑'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 가족, 자기 인종, 자기 국가에 한정된 사랑을 표할 뿐이다. 그가 추구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는 그래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설령 그의 방식대로 미국이 다시 '위대한 국가'로 재탄생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다른 나라'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 뿐이다. 더구나 그 희생조차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강요되고, 위협받은 상태'에서 억지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트럼프가 '그냥 부자'일 뿐이지, '진정한 부자'는 아니며, 그가 가진 부로 얻고 싶어하는 '위대한 미국'이란 정책도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허울 좋은 허상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에측할 수 있게 된다. 어떤가? 철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용하고, 쉽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게 바로 '에리히 프롬 철학의 장점'이다.

기왕 '사랑'이란 말이 나왔으니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 대해 잠시 언급해보자. 프롬의 남녀간의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가슴 설레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인연)'이라고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프롬은 '사랑의 감정'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을 너무 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이나 동화속 왕자와 공주처럼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아니 '마법같은 연애'를 경험해본 적이 있었나? 나도 그런 적이 없지만,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랑으로 결혼까지 성공한 예를 본적이 없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단 '만남'을 가졌고, 그 뒤에도 빈번하게 '사귐'을 하다가 '다툼과 싸움'도 참 많이 한 다음에 '사랑의 감정'이 싹터서 끝내는 '웬수같은 사랑'이 결혼이란 결실을 맺는 경우는 흔하게 보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랑의 기술'이라 말했다. 마치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라면, '멋진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그림 연습'부터 열심히 하는 것이 순서인 것처럼 말이다. 사랑도 잘 하고 싶다면, '운명적인 상대'를 못 만났다고 푸념하지 말고 '운명적인 상대'가 되기 위해서 먼저 노력하고, 서로에게 그런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사랑의 기술'을 닦고 또 닦으라고 조언했다. 어떤가? 꽤나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게 바로 철학의 명쾌함이다.

또한, 그런 멋진 사랑꾼이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야 비로소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찌 타인을 진정으로 배려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래서 노예처럼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상대를 여왕처럼 떠받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은 '왕'으로 군림하면서 상대를 '하녀' 부리듯 하찮게 대하면, 그 또한 진정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그건 마치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서로 어울리는 듯이 보이지만, 둘 다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불완전한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서로 '확실한 존재'를 갖추고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동시에 상대를 위해 배려(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당당한 '주체'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처럼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말했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악질적인 독재자에게 충성했던 독일 국민과 소련 인민 들이 바로 그렇다고 예를 들었다. 이런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롬은 '중세인'과 '근대인'을 비교했다. 중세인은 신분사회 아래에서 자유를 잃고 '속박'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들은 '자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자유'를 잃고도 억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런 그렇게 제한된 삶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깨우친 근대인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본연이 지닌 욕망의 문제이기도 했다. 욕망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권리'인만큼 그 권리를 뺏을 권한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논리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프롬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예를 들면서 비판했는데, 당시에 '프로이트의 성욕구 해방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성적으로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든 '학대받고 싶은 욕망'이든 나름 존중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사디즘적인 욕망을 지닌 이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행사할 자유를 갈망할 것이고, 마조히즘적인 욕망을 가진 이는 상처받고 싶고, 학대받고 싶어할 자유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히틀러의 욕망'과 '독일국민들의 욕망'이 서로 상호충돌하지만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치즘'은 성공적으로 독일국민을 지배할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은 '독재자의 입맛'에 맞게 약소국의 국민들을 학대하고 학살에 가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디즘'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지만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딱이다. '마조히즘'도 개인 취향이지만, '학대받는 행위나 독재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나치즘에 휘둘린 독일국민들이 어떻게 끔찍한 행위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순종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의 스탈린의 통치행위도 그랬고, 현재 진행중인 '극우성향의 광기'가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나라도 윤석열의 내란선동에 '찬성'하고, 탄핵반대를 외치면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극우단체가 꽤나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에, '자유'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맹종'하는 것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중인 셈이다. 그들은 '독재자의 명령'이 부당한지, 옳지 않은지, 따지지도 않고 '맹종'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런 희생을 막연하게 '애국'으로 포장해주는 이들의 궤변에서 '달콤한 쾌락'을 느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은 불안과 허무를 먹고 자란다고도 말했다. 저들은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철저히 자신을 파괴하고 맹종과 방종을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삼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나날들을 '애국'이라 포장하는 독재자에게 기꺼이 복종하곤 한다. 그러나 독재자 윤석열이나 애국시민들이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이 사라지거나 무너지면 '홀론 존재'할 수 없는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런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으로 이성 회복, 사랑 충만, 책임감 투철, 그리고 관심 폭발 등과 같은 '덕(모럴)'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 다시 말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야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권위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에 따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려는 '능동적인 자세'만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이성을 공유하는 전인류를 모두 같은 동포로 여기는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보편적인 사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사랑을 함으로써 '완벽한 존재'에 이를 수 있다면서 존재지향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위한 최고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것도 어렵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쉽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