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구틈틈 씨의 매일 - 틈틈이 그리고 쓰고 키우며 발견한 오늘의 행복
구틈틈 지음 / 청림Life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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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IV / 청림Life 1번째 리뷰] 내가 가장 즐겨읽는 책을 꼽는다면 인문철학이나 과학, 역사, 사회과학, 고전문학 따위가 있겠고, 제자들과 함께 읽는 '어린이책'을 가장 많이 읽고 있지만,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잔잔한 '낭만소설'이다. 그래서 한 번 손에 든 '로맨스소설'은 책을 다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읽고, '로맨틱한 영화'는 보고 또 보는 타입이다. 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배경으로 '사랑'이란 주제를 밑바탕에 깔아놓은 모든 것들을 심하게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밀당'은 싫어한다. 그건 '사랑의 설레임'을 각성시켜 콩닥콩닥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사랑은 '설레임'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믿음직한 사랑에 더 끌린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고, 옆에 있어도 좋지만, 곁에 없는 '바쁜 일상'을 보내더라도 늘 옆에 있는 것처럼 든든한 사랑을 더 선호한다. 그렇게 변함 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난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모습을 늘 상상하곤 한다.

물론 현실속의 찐 가족은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상상속의 가족을 떠올리곤 한다. 현실은 '낭만'을 허락치 않지만 상상속에서는 '낭만' 가득한 가족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상을 표현화한 이 책이 한 눈에 맘에 들었다. 두 아이와 치루는 전쟁 같은 육아현장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상상속 나래'를 통해서 나는 그 무엇보다 먼저 '사랑'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쟁보다 더한 '육아'에 지쳐버린 엄마아빠들에게 이 책은 색다른 '비타민'을 선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래그래~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이 시대의 엄마아빠 독자들이 많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착 보면 모든 정황이 다 떠오른다. 직장동료였던 두 남녀가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에 골인한 다음 '두 아이'의 엄마아빠가 되면서 아빠는 '돈 벌어오는 기계'를 자처했을 것이고, 엄마는 '육아전쟁 총사령관'에 강제 임명되어 다른 직업을 겸할 수 없는 '독박육아'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후에 벌어질 '경력단절', '부족한 생활비', '대책없는 노후대책 마련' 따위의 고민을 하기도 전에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실감하며 무리를 해서라도 '맞벌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는 '현재'라는 것이 한 눈에 파악된다. 그래서 '구연진 씨'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웹툰 형식으로 그려서 올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름을 '구틈틈'이라고 쓴 까닭도 웹툰에 매진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육아전쟁을 치루는 '틈틈이' 연재를 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리 밝혔고 말이다. 웹툰의 소재가 고갈될 까닭은 없으리라 '사랑스런 아이들'이 웹툰에 올릴 소재를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줄테니 말이다. 오히려 엄마인 자신이 육아에 지쳐서, 시간이 없어서, 때로는 정신이 없어서 웹툰을 올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기에 '최대한 간단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기도 하다. 채색을 포기하고 '연필'로만 그린 듯한 형식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냥 읽고만 있어도 그런 점들이 다 보인다.

웹툰 연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가 고갈되지 않는 것'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감동(의미) 전달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일테다. 몇 컷 되지 않는 짧은 웹툰의 핵심은 바로 후자다. 요즘 같은 '저출생 시대'에 육아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자들이 얼마나 된다고...실제로 '저출생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는 모습은 점점 줄어드는 학교내 '학급 수', 유치원과 어린이집 수, 마트 안에 '육아용품 판매대' 규모의 축소 따위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동네 공원을 산책할 때에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오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모차(유아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정작 그 안에 타고 있는 건 '아기'가 아니라 '반려견'인 경우가 더 많아졌다. 심지어 반려견을 품에 안고 '우리 애기'라고 칭하는 이들도 많아져서 헷갈릴 지경이다. 그러니 육아전쟁 같은 소재를 찾는 독자들도 덩달아서 점점 더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 육아를 하지 않는 독자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여야 한다. 그런 보편적인 소재는 바로 '사랑'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정말 아름답고 감동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틈틈 씨의 매일'은 정답이다. 사랑으로 가득한...한마디로 '꿀 떨어지는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찐사랑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육아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단박에 알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더구나 남편이 경제적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아내가 '독박육아'을 하고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루하루가 전쟁 같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스런 아이들일지라도 말이다. 구틈틈 씨는 이런 육아전쟁을 치루고 있으면서도 '행복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두 아이가 방을 어지럽혀서 치워도 치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방청소 할 필요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현실도피를 하라는 에피소드를 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잠시잠깐의 '현실도피'를 할 수 있을지언정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지럽힌 방안을 알아서 뒷정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은 도로 '지옥같은 현실'로 되돌아와 방청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다 청소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또 다른 방'을 어지르고 있을 것이다. 잠이 들 때까지 말이다.

이런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남편이 늦은 귀가를 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남편도 힘든 직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쉬고 싶은 맘'만 가득하다. 더구나 지랄같은 상사가 자신의 스트레스를 스스로 해소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쏟아내기라도 했다면 더욱더 피로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쉴 곳이 필요했던 남편의 기대와 달리 '집 안이 이미 지옥'이 되어 버렸다면 아내에게 "청소도 안 하고 뭐하고 있었어? 됐고! 밥이나 차려, 배고프니까. 난 씻고 나올게"라는 말이 나온다면, 그 다음은 '부부싸움'이다.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고서 아이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벌벌 떨며 '불안 증세'를 보이게 될 것이고, 가정은 화목하거나 행복한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이웃집 구틈틈 씨의 매일>에는 그런 대목이 전혀 없다. 이 부부에게는 '싸움'이나 '갈등' 자체가 아예 없어서 그런 것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세상에 그런 부부는 없다. 그래서 이 책에 '남편 노경록'에 관한 에피소드가 몇 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남편과 사이가 좋았다면 분명 더 많았을테니 말이다. 물론 이 책에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면 둘 사이에 '애정전선은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주말 같은 날에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남편의 분량'이 있을텐데, 그런 에피소드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물론 남편 노경록 씨가 '건축현장'이라는 주말이 따로 없는 일정을 보내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두 아이와 아빠와의 관계가 극히 행복해보이고 있다는 점도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전쟁 같은 육아'를 하면서 '부부싸움'이 없는 것이 더 어색하다. 웬만큼 서로에게 무신경하지 않을 바에야 말이다.

하긴, '보여주지 않아야 할 것'은 애초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나은 작품을 쓰는데 좋은 결정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요즘 트랜드가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고민까지 하고 난 뒤에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니 더욱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완벽한 사랑'을 찾다가 그만 노총각이 되어버린 나 자신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싶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느냐고 말이다. 진즉에 꾸렸다면 잘 했을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데 필요충분조건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 그런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노라고 말이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직도 노총각인 나는 '이 책'이 너무 부럽다. 사랑이 고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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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제인 오스틴 - 그래픽으로 읽는 제인 오스틴 인포그래픽 시리즈
소피 콜린스 지음, 박성진 옮김 / 큐리어스(Qrious)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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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III / 큐리어스 3번째 리뷰] 앞서 영국인들이 사랑한 소설 2위로 <오만과 편견>이 뽑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작가인 '제인 오스틴'에 대한 글을 찾아보다가 이 책 <인포그래픽 : 제인 오스틴>을 발견했다. 이 시리즈는 '문화·예술 분야'의 실존 인물에 대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인포그래픽' 방식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물론 실존 인물 뿐만 아니라 '셜록 홈즈'라는 소설 속 허구적 인물까지 집중 조명했더랬다. 왜냐면 셜로키언(또는 홈지언)이라는 두터운 팬층에 대한 분석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를 좋아하는 팬이 있는가 봤더니 '제이나이트(Janeite : 제인 오스틴의 열렬한 애독자)'가 존재한다고 한다.

좀 의심스럽긴 하다. 분명 제인 오스틴은 '브론테 자매(<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을 각각 저술한 세 명의 자매 소설가들)'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인기와 명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정말 '애독자 층'이 두터울 정도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나 TV시리즈가 꾸준히 제작되는 것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뒷북을 치고 말았다. 나조차 <비커밍 제인>(2007)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꽤나 유명한 인사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대해서 극찬과 비난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특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널리 알려진 마크 트웨인은 "그녀의 무덤에서 정강이뼈를 파내서 해골을 패주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과 편견>에 대해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이 밋밋한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고, 세속적인 결혼에 목을 메는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주로 썼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직시하려 했던 마크 트웨인의 작품관과 서로 맞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짐작할 수 있었고, 일부는 공감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확실히 '오스틴의 소설'에서 사회비판 같은 것은 다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오만과 편견>에서도 '비판적인 대목'은 엿볼 수 있다. 19세기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돈 많은 남자'에게 목을 매는 현상이 팽배하다보니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랑' 없는 결혼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속 여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돈 많은 남성'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사랑보다 돈을 앞세운 결혼에 반대한다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절제되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엿볼 수 있다. 오스틴의 '필력'이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릴 정도로 '파급력'이 강하지 못했고, 꽤나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여성작가'가 드물었던 19세기 사회에서 그만큼이나마 '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작가가 몇이나 있었느냔 말이다. 남성작가들 가운데서도 사회 문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작가는 손을 꼽을 정도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의 비난에 가까운 혹평은 너무 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긍정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특히 "젊은 여성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갖가지 곡절과 감정, 그리고 성격에 대한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는 월터 스콧 경의 칭찬은 공감되었다. 이는 남성작가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저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여성만을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남성작가들로는 '여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없었는데, 그걸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소설에서 해냈다는 칭송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대 소설가 가운데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소설가는 단연 '셰익스피어'를 꼽겠지만, 제인 오스틴은 '소행성'에 빗댈 수 있겠다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칭찬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오스틴의 모든 소설이 이렇게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 전개가 밋밋하다 못해 '멀건 죽'과 같다는 비난도 있었고, 영국 여성들이 겪을 법한 세속적이고 천박한 인습에 사로잡혀 그 어떤 지성이나 위트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차라리 '자살'을 소재로 쓴 것들이 더 품위가 있어 보일 지경이라며, 그녀의 소설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나마 마크 트웨인보다는 좀 더 품위 있는 비평 같았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 가운데 <오만과 편견>만 읽은 터라 이런 평론들에 대해서 뭐라 덧붙일 말은 없었다. <이성과 감성>, <엠마> 등등을 읽어본 뒤에 이와 같은 평론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행여 '여성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닌지도 함께 알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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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런 킹덤스쿨 4 - 도시 쿠키 vs 시골 쿠키 쿠키런 킹덤스쿨 4
김언정 지음, 이태영 그림, JA Korea(국제비영리청소년교육기관) 감수 / 서울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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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II / 서울문화사 7번째 리뷰] 경제에 있어 '도시와 시골'의 상관관계는 '소비와 생산'과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도시'는 세련되었고 '시골'은 투박한..한마디로 '촌스런'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 연상되면서 '소비활동'은 우월하고 '생산활동'은 열등한 개념마저 잘못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시킬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도시의 직장인은 '화이트칼라', 그밖의 생산공정 업무를 맡고 있는 직업인을 '블루칼라'로 지칭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요즘에는 이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이미지' 만큼은 여전히 그러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만약 '생산'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소비'는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의 가치', '노동자의 인권'을 하찮게 여기는 분위기는 왜 생기는 걸까? 그건 '황금만능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돈만 있으면 '없던 상품'도 척척 만들어지고 '무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느냔 말이다. 우리 주위의 '노동자'에게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수고가 없다면 우리의 일상은 절대로 편리하지도 않고, 풍족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린이경제교육 속에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생산활동'이 고되고 힘들어도 아주 훌륭한 가치가 담겨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노동의 가치'가 고귀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건전한 경제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소비활동'에만 교육에 중점을 두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만이 가치가 높다고 여기고 '적은 돈'을 벌지만 '꼭 필요한 직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할 수도 있게 된다. 이를 테면, 겉모습만 보고서 도시거주민은 부자고, 시골거주민은 가난하다는 선입견을 갖게 될 수도 있고, '하는 일'을 잣대로 경제수준을 가늠하는 잘못된 경제관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조기경제교육을 한답시고 '투자교육'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투자금에 '이자'와 '배당금'만으로도 웬만한 노동자들의 월급만큼 벌 수 있다면서 '무노동'으로 평생을 놀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잘못된 경제관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 가운데 여유자금을 따로 활용하여 '돈이 돈을 벌어오는 투자이익'을 모아서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 덧붙여져야지, 젊어서 한탕 크게 돈을 번 다음에 남은 여생은 편하게 지내라는 식으로 조기경제교육을 한다면 안 된다.

이 책 <쿠키런 킹덤스쿨 4>에 이르니 '도시경제'와 '시골경제'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하려는 듯 싶었는데, 용감한 쿠키를 비롯한 블루반 학생 쿠키들이 도시에 도착해서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만 늘어놓고, 정작 경제교육에 해당하는 내용은 터무니 없이 빈약해진 것이 아쉬웠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서 살짝 벗어나 추가적인 내용을 보충설명하고 말았다. 그나마 유의미한 내용은 '수요와 공급'에 대한 개념이었는데, 그마저도 '교과서 수준'에 딱맞는 내용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그럴만한 까닭은 있을 것이다. 바로 '사회교과서'에 담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기획하다보니 '한 챕터로 묶기 곤란한 내용'을 한데 짜깁기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마법천자문>에서도 스토리 상 '억지스럽더라도' 필수교육으로 지정된 한자를 어쩔 수 없이 넣다보니 엉뚱하다 싶은 모험이 펼쳐지면서 독자조차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럴 경우에'는 과감하게 편집하고 생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육자의 처지에서는 '꼭 익혀야 될 내용'이라 여긴 탓에 교과서에 넣었는데, 학습만화에서는 과감하게(?) 생략을 해버린다면 곤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암튼 그런 연유로 학생 쿠키들이 '킹덤스쿨'을 벗어나 '낯선 도시'에서 엉뚱한 모험을 벌이며 중간중간 '꼭 알아야 할 경제지식'을 한도막 두도막 토막내서 배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학습만화의 한계'를 접할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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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의 숲 16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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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I / 시공사 17번째 리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일테지만, 2위로 꼽은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여겨질 법도 하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만과 편견>은 '오만한 남자와 편견 가득한 여자'가 사랑을 하고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뻔한 줄거리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너무 뻔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의 어디가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이유인지 파헤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18세기 영국사회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둔 '베넷 가문의 상속권'은 엉뚱하게도 다른 남성인 사촌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베넷 씨의 네 딸 가운데 한 명이 '사촌 콜린스'와 결혼을 한다면 아버지(베넷)의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콜린스의 아내로서 정당하게 '재산권'을 보호하고, 다른 세 딸과 어머니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영국 이외의 다른 이웃나라에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 등장하는 영국사회의 여성들은 '결혼'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린 나이(십대)에 이미 결혼 적령기를 맞이하고, 이십대 초반이라도 '노처녀' 취급을 당하는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가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여성의 경제활동'이 변변찮던 18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이 무도회장에 나가 남성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 <오만과 편견>의 깊은 주제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결혼에 목메는 여성들의 '로맨스(칙릿)소설'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럼 <오만과 편견>의 진짜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다. 당시 결혼은 오직 남성에게만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졌고, 여성은 남성의 프로포즈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수락/거절'이란 단 한 번의 찬스(기회)만 주어졌을 뿐이다. 이때 여성이 꼽은 이상적인 남성은 '부와 지위'를 얼마나 소유했느냐 뿐이었다. 왜냐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철저히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 많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도 가정교사를 하거나, 삯바느질을 하는 등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액수가 여성이 '홀로서기'하기에는 너무도 적었던 탓에 여성이 '사치'라도 부릴라치면 '아버지의 도움', '남편의 도움', 그리고 '아들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다 애초에 '상속'이 불가하니 여성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 넘겨준 재산으로만 넉넉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그나마 여성의 부는 미혼 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의 '먹잇감'으로 노려지기 마련이라 아버지나 전 남편이 넘겨준 '돈 많은 과부'는 당시 남성들의 신붓감 1순위였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여성은 사회활동의 '주체'로 당당해질 수 없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들었던 여성들은 오직 남성들의 부에 따라 팔자(?)가 바뀌는 '뒤웅박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교모임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야만 했고,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본성'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당당한 여성인 '엘리자베스'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도 어쩔 수 없이 18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단 한가지 '남성의 선택'에 몸둘 바를 두지 못하는 평범한 여성이 아닌 당당히 '스스로의 선택'을 강하게 어필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펼쳐 보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통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당찬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한 가치라서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7~80년대 대한민국 여성들이 어릴 적에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가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단순한 '로맨스소설'로 읽으면 아쉽다. 베넷 가문의 딸들, 제인, 엘리자베스, 막내 리디아,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까지 이들이 남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 누구인지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먼저 제인과 빙리는 가장 평범한 커플이다. 돈 많고 착한 남편과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착한 아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커플은 굉장히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커플'은 실제로 맺어지기 굉장히 힘든 타입이기도 하다. 선남선녀에 착한 남녀는 서로에게 연애조차 '소극적'인 까닭에 주변의 격렬한(?) 도움이 없으면 만남조차 힘든 커플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만나기만 한다면 더할나위 없는 커플이긴 한데 말이다. 그래서 착한 남자는 불같은 여자에게 휘둘리다 홀랑 벗겨 먹히기 딱 좋고, 착한 여자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상처만 받고 청순을 가장한 청승만 떨다가 좋은 시절을 망쳐버리고 마는 안타까운 사연도 꽤나 많다.

반면에 리디아와 위컴은 '사랑의 도피'까지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을 한다. 물론 사랑이 뜨겁다고해서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더구나 리디아는 철부지에 위컴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기꾼이다. 이런 사기꾼과 철부지 커플은 서로 죽이 잘 맞으면 '부부 사기단'으로 꿍짝을 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패턴'을 보여주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도 둘의 사랑은 서로 불타올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으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해결되면 다시 달라붙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분노유발 커플'이다. 될 수 있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은 엘리자베스의 절친이었던 샬럿과 콜린스 커플이다. 애초에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 당했고, 이후로 키티와 리디아까지 찝쩍거리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과 결혼을 하고 만다. 이를 두고 엘리자베스는 친구인 샬럿을 안쓰럽게 여기지만, 주위의 평판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행운을 어리석게도 뻥 차버렸다면서 위로를 해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비록 콜린스가 못 생기고 무례하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상식 이하'로 낮게 폄하하면서 오직 '순종적인 아내'로만 있기를 바라는 덜 떨어진 구시대적 남편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못난 남성인데도 콜린스는 '가진 재산'이 많았다. 더구나 직업은 '목사'이고 베넷 씨가 죽고 나면 엘리자베스의 집과 재산마저 모두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모로 콜린스와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무례한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친구인 샬럿은 콜린스의 아내 자리(?)를 낚아챘던 것이다. 비록 돈에 팔려가듯 성급하게 결정한 결혼이었지만 주위에서는 오히려 샬럿의 결혼을 부러워한다.

그렇다면 샬럿의 결혼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을까?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콜린스의 재산'보다 훨씬 더 많고, 젊은 나이에 잘 생겼으며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품위까지 갖춘 다씨라는 남성과 엘리자베스가 결혼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자베스가 다씨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까닭이 자신의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다 못해 '편견' 가득한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영국사회에 어디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이 결혼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남자의 청혼을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런 여성은 평생 혼자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인 오스틴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 성격이 엘리자베스와 같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커플을 가장 이상적인 결혼으로 본을 삼았다. 무릇 멋진 남성은 멋진 여성을 알아보는 법이라듯이 말이다. 그래서 '다 갖춘' 다씨는 '완벽한' 엘리자베스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는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짰다.

자, 이렇게 <오만과 편견>을 마무리하면 좋을까? 아니다. 오늘날에는 '결혼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결혼을 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중요하고, '집안끼리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요즘 '비혼'이 너무 확산된 까닭이 바로 젊은 세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문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사회에는 여성이 스스로 '경제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경제독립'을 할 수 없기에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저출생 문제'와 '인구 감소 문제'로 이어져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오만과 편견>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인권'을 올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경제 문제'가 도리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결혼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장식한 이 책을 읽을 '가치'를 좀처럼 찾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적인 것들'을 남성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지 않으면, 요즘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의 '결혼'은 돈 문제는 남자가 해결하고 여성은 '예쁜 미모와 착한 마음씨'만 갖추면 모든 것이 충족되고 해결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양쪽 모두가 여유 있게 돈을 버는 상황이 아니면 애초에 결혼을 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오만과 편견>을 '오만한 남자'와 '편견(선입견) 가득한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선남선녀가 결혼을 전제로 한 '경제적인 고민'을 이야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경제적 고민'이 생겼을 때,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그런 일방적인 부담을 '사랑의 척도'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값비싼 선물을 주어야만 뜨거워지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고민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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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2 : 말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LXX / 엘릭시르 14번째 리뷰] 책의 줄거리는 점점 심각해져만 간다. 책의 제목이 '말세편'인 것처럼 온세상이 멸망할 징조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전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점입가경으로 전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종교의 수장들과 특수한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하나 같이 한국의 퇴마사들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 바티칸의 이단심판관을 필두로 성당기사단, 검은편지결사, 그리고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려는 목적의 어쌔신과 차이나 마피아까지 '홍수편' 이후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퇴마사들을 개별적으로 찾아서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애초에 <해동감결>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내의 명왕교 잔당과 인도 힌두교의 이단교파인 깔끼파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퇴마사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거기에 '홍수편'에서 등장했던 대악마 블랙엔젤이 다시 등장해서 퇴마사들을 이러한 곤경에서 구해주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아니 악마가 왜 퇴마사들을 도와주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때쯤 '악마의 교묘한 계획'이 번뜩 떠오르게 된다. 바로 퇴마사들이 하려는 '세상의 구원'을 돕는 척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한 개수작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퇴마사들은 '악마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들고 만다. 그건 바로 '같은' 인간이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의 풀리지 않는 갈등이 끝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악마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저들끼리 죽자고 서로 싸우길 바라는 것이었다.

이쯤해서 '말세'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한 번 정리해 봄직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현재도 그렇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 '예언가'들은 한결 같이 '종말의 그날'을 언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성경>에서 언급한 '요한묵시록'이고, 이를 바탕으로 노스트라다무스는 '정확한 날짜'까지 언급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었다. 다행히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날짜'가 틀린 것으로 확인 되었고, 세기말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말세'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말세는 지나간 것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만약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까? 그리스도교 방식일까? 이슬람교 방식일까? 아님, 불교식이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이비종교'에서 말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일까?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마치 '예언가의 재림'인듯 저마다 특색 있는 인류 종말의 형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일단 어떤 특정 '종교의 방식'대로 말세가 찾아올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그분'을 믿는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것이라는 묘사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선별적인 구원 방식'이 왜 불가능하냐면 믿고 안 믿고를 무엇으로 '증빙'할 것이냔 말이다. 전지전능한 그분께서는 '불신자'를 구별할 능력이 있다손치더라도, <성경>에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만 해도 천국행 티켓(구원)을 주겠노라 했다던데, 굳이 먼저 믿음을 증빙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애매한 방법으론 말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말세를 피할 수도 없으니, 종교적 방식의 말세는 몰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종교가 아니라면 '도덕적 방식'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이드신 어른들은 버릇없는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보면서 '말세'를 언급한다. 이렇게 부도덕한 세상이 도래하면 정말 세상은 망하는 것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수천 년전 '어른'들도 그렇게나 많이 말세를 언급하였지만, 그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아무리 망나니처럼 행동을 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면 또다시 '말세'를 언급하지만, 그 말세 또한 멀쩡하게 잘 돌아갔다.

그럼 말세는 어떻게 찾아올까? 좀 더 현실적인 파멸을 언급하자면 '전쟁'밖에 없을 듯 싶은데, 온세상이 파멸될 듯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20세기에 펼쳐졌지만 세상은 지금도 멀쩡하게 돌아간다. 물론 3차 세계대전을 언급하고 있는 요즘은 쪼큼 걱정되긴 한다.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끼리 서로서로 쏘아대면 하나뿐인 지구는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어져 결국 인간은 절멸할 수도 있을테니 진정한 '말세'가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도 진정한 말세와는 사뭇 다른 양상일 것이다. 분명 살기 힘든 세상이 되긴 하겠지만 '전쟁의 상처'는 언제나 극복하곤 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 진정한 말세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그건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찾아오면 말세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신 따위를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을 믿지 못해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서 신(종교)을 찾는 거라면 그게 바로 '말세의 시작'인 셈이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신의 말씀(뜻)만을 쫓는 행위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절대로 싸움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런 종교의 신이 하신 말씀 가운데 '서로 싸워도 좋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종교전쟁 따위가 발생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느 신(절대자)이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였나? 결론만 말하면, 그런 종교도 없고, 그런 말씀도 없다. 오직 사랑하고, 자애하고, 자비로워 지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런 세상이 곧 '천국(파라다이스)'이라고 일컫었다. 그러니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불신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말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면 절대 찾아올리 없다. 이것이 팩트다.

그러나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이 꼭 발생하곤 한다. 우리는 그를 '파멸자'라고 부른다. 누가 파멸자인지,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파멸자인지 깨닫지 못하나, 때가 되면 그 '파멸자'가 누구인지 확연히 알게 된다. 이 책 <퇴마록>은 바로 그러한 때를 '말세'라고 가리켰다. 그리고 그 파멸자가 언제, 어디서 등장하는지 <해동감결>에 고스란히 적혀 있고, 그때가 곧 임박할 것이라고도 정확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파멸의 날은 고작 4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단다. 그런데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풀이 근처에 있다는 격언처럼 '파멸자'가 말세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파멸자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구원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구원자, 또한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이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분명한 것은 '말세'가 곧 찾아온다는 사실 뿐이다. 과연 퇴마사들의 행보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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