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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 내 안의 힘을 발견하는 철학 수업 ㅣ 서가명강 시리즈 24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평점 :
[My Review MCMLXXXV / 21세기북스 36번째 리뷰] 에리히 프롬의 철학은 다른 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정평이 나 있다. 심지어 너무 난해한 철학에 익숙한 이들은 '쉬운 철학'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낼 정도라서 프롬의 철학은 철학도 아니라고 폄하할 정도다. 그만큼 쉽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을 막연하게 어렵다고만 하는 분들이 접근하기 아주 좋은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쉽다고 했지 만만하게 보면 절대로 안 된다. 프롬의 철학은 '깊이'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함'에 놀랄테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프롬은 양극단에 있는 개념조차 모두를 아우르는 '통찰력'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프롬은 진화론적인 과학적인 관점이나 창조론적인 종교적인 관점까지 다 포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선불교의 깨달음도 동시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사상적 유연함 때문인지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 건국'에는 반대하고,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롬의 철학을 아주 잘 반영한 책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고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다. 이 책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프롬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나면 분명히 앞에 소개한 책들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라면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나조차 그런 독자 가운데 하나였으니 말이다.
먼저, 프롬의 삶은 '존재지향적인 삶'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삶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소유'를 우선시하고, 최종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은 '무의미'할 뿐이다. '진정한 부자'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는 가진 재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부르지만, 단지 '가진 것'이 많기만 한 사람을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는 것'이 많은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소유'한 것이 많을 뿐인 사람은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진정 '부자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을 척척 뿌려대는 사람을 보면, 그가 지닌 '위력' 또한 어마어마할 것으로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진정한 부자'로 느껴지진 않는다. 왜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부를 쓰는 것은 너무 하찮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면 '거대한 힘'으로 느껴지긴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런 부자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성까지 별로라면 그저 '플렉스(돈지랄)'하는 것일 뿐이라 여길 따름이다. 그런데 엄청난 재력으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기꺼이 자산을 베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먼저, 그가 가진 힘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인격' 또한 훌륭하니 저절로 공경심이 솟아날 것이다. 거기다 돈 쓰임새가 올바르다면, 그런 이를 우리는 '진정한 부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의 존재'를 여실히 느낄 수 있고, 그런 존재만으로 우리는 안심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지향적인 삶'이라 할 것이다.
프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불안과 절망에서 구원한다고도 말했다. 이는 남녀 사이의 '애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해동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전 인류에 대한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사랑이다. 앞서 '진정한 부자'의 예를 들었으니 계속 이어 가겠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가 '존재감'을 뿜뿜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할 일조차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단지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돈을 긁어 모을 수 있는 재능'까지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이런 대단한 능력자들이 그들이 가진 힘을 '선과 악', 어느 방향으로 쓸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다. 이를 테면, 트럼프 같은 초일류 부자가 하는 짓을 보면 어떤가? 아주 선한 방향으로 그가 지닌 재능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랑'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 가족, 자기 인종, 자기 국가에 한정된 사랑을 표할 뿐이다. 그가 추구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는 그래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설령 그의 방식대로 미국이 다시 '위대한 국가'로 재탄생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다른 나라'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 뿐이다. 더구나 그 희생조차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강요되고, 위협받은 상태'에서 억지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트럼프가 '그냥 부자'일 뿐이지, '진정한 부자'는 아니며, 그가 가진 부로 얻고 싶어하는 '위대한 미국'이란 정책도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허울 좋은 허상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에측할 수 있게 된다. 어떤가? 철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용하고, 쉽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게 바로 '에리히 프롬 철학의 장점'이다.
기왕 '사랑'이란 말이 나왔으니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 대해 잠시 언급해보자. 프롬의 남녀간의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가슴 설레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인연)'이라고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프롬은 '사랑의 감정'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을 너무 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이나 동화속 왕자와 공주처럼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아니 '마법같은 연애'를 경험해본 적이 있었나? 나도 그런 적이 없지만,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랑으로 결혼까지 성공한 예를 본적이 없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단 '만남'을 가졌고, 그 뒤에도 빈번하게 '사귐'을 하다가 '다툼과 싸움'도 참 많이 한 다음에 '사랑의 감정'이 싹터서 끝내는 '웬수같은 사랑'이 결혼이란 결실을 맺는 경우는 흔하게 보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랑의 기술'이라 말했다. 마치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라면, '멋진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그림 연습'부터 열심히 하는 것이 순서인 것처럼 말이다. 사랑도 잘 하고 싶다면, '운명적인 상대'를 못 만났다고 푸념하지 말고 '운명적인 상대'가 되기 위해서 먼저 노력하고, 서로에게 그런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사랑의 기술'을 닦고 또 닦으라고 조언했다. 어떤가? 꽤나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게 바로 철학의 명쾌함이다.
또한, 그런 멋진 사랑꾼이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야 비로소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찌 타인을 진정으로 배려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래서 노예처럼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상대를 여왕처럼 떠받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은 '왕'으로 군림하면서 상대를 '하녀' 부리듯 하찮게 대하면, 그 또한 진정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그건 마치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서로 어울리는 듯이 보이지만, 둘 다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불완전한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서로 '확실한 존재'를 갖추고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동시에 상대를 위해 배려(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당당한 '주체'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처럼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말했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악질적인 독재자에게 충성했던 독일 국민과 소련 인민 들이 바로 그렇다고 예를 들었다. 이런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롬은 '중세인'과 '근대인'을 비교했다. 중세인은 신분사회 아래에서 자유를 잃고 '속박'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들은 '자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자유'를 잃고도 억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런 그렇게 제한된 삶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깨우친 근대인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본연이 지닌 욕망의 문제이기도 했다. 욕망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권리'인만큼 그 권리를 뺏을 권한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논리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프롬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예를 들면서 비판했는데, 당시에 '프로이트의 성욕구 해방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성적으로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든 '학대받고 싶은 욕망'이든 나름 존중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사디즘적인 욕망을 지닌 이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행사할 자유를 갈망할 것이고, 마조히즘적인 욕망을 가진 이는 상처받고 싶고, 학대받고 싶어할 자유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히틀러의 욕망'과 '독일국민들의 욕망'이 서로 상호충돌하지만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치즘'은 성공적으로 독일국민을 지배할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은 '독재자의 입맛'에 맞게 약소국의 국민들을 학대하고 학살에 가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디즘'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지만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딱이다. '마조히즘'도 개인 취향이지만, '학대받는 행위나 독재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나치즘에 휘둘린 독일국민들이 어떻게 끔찍한 행위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순종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의 스탈린의 통치행위도 그랬고, 현재 진행중인 '극우성향의 광기'가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나라도 윤석열의 내란선동에 '찬성'하고, 탄핵반대를 외치면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극우단체가 꽤나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에, '자유'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맹종'하는 것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중인 셈이다. 그들은 '독재자의 명령'이 부당한지, 옳지 않은지, 따지지도 않고 '맹종'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런 희생을 막연하게 '애국'으로 포장해주는 이들의 궤변에서 '달콤한 쾌락'을 느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은 불안과 허무를 먹고 자란다고도 말했다. 저들은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철저히 자신을 파괴하고 맹종과 방종을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삼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나날들을 '애국'이라 포장하는 독재자에게 기꺼이 복종하곤 한다. 그러나 독재자 윤석열이나 애국시민들이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이 사라지거나 무너지면 '홀론 존재'할 수 없는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런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으로 이성 회복, 사랑 충만, 책임감 투철, 그리고 관심 폭발 등과 같은 '덕(모럴)'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 다시 말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야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권위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에 따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려는 '능동적인 자세'만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이성을 공유하는 전인류를 모두 같은 동포로 여기는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보편적인 사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사랑을 함으로써 '완벽한 존재'에 이를 수 있다면서 존재지향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위한 최고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것도 어렵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쉽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