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3 : 샤르댕 인간현상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3
심재규 지음, 권욱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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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르뎅의 <인간현상>은 매우 낯설었다. 무릇 '인문학'이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과 생각'을 다루다보니 대개 '인간'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겠지만, 인간을 '원자단위'로 쪼개놓고 분석을 시작하더니 끝내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하나'라면서 인간정신이 우리 인간의 진화를 이끎과 동시에 전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정신'으로 한곳에 모인다(그곳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는 썰을 풀어내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더랬다. 더구나 지은이가 가톨릭 신부라는 신분으로 '과학'을 '종교'적인 관점으로 풀어낸 결과라고 하니 얼핏 읽다보면, 광신도가 지껄이는 영롱한 방언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끝까지 읽어보니, 선한 지식인의 의무가 느껴지는 거룩한 말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샤르뎅이 말하는 '오메가 포인트'는 내가 줄곧 이야기하는 선도국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홍익인간 정신'과 일맥상통한 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선한 마음으로 세계인을 감동시켜 널리 인류공영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대한민국 시민이 나아가야 할 길'과 샤르뎅이 말한 '인류의 지성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곳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인데, 그곳에선 모든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갈등과 차별을 멈추고 선한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해나가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는 내용 같은 것들이다. 샤르뎅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선택했는데, 끝내는 '과학과 종교의 융합'을 이끌어내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길을 제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지구에 등장한 지 고작 '1만 년' 남짓한 시간에 스스로 절멸하고도 남아 지구를 송두리채 파괴해버릴 고약한 무기를 만들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는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잘난 체를 할만 한 것도 못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일까? 샤르뎅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맹자가 '성선설'을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보낸 덕에 이미 인간이 선하게 살아가야 할 '목적과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은 애초부터 선할 따름이며, 그렇지 않고 잘못된 길로 접어든 까닭은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애초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하지만 '반성'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대로 살더라도 남을 배려하고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당연한 요소는 애초부터 '인간'만이 가진 고유의 영역이 아니라 '최초의 생명체'에서도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분자와 원자, 그보다 더 작은 '물질'에서부터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생각하는 힘'이 바로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정의내렸다. 다시 말해,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근원 물질에서 생겨난 '생명체'도 당연히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뇌가 발달한 인간도 '생각'을 하게끔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아주 작은 단위가 '생각'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생각에 멈춰 있을 뿐이다.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생각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게 되는데, 인간(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러 아주 복잡한 생각까지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지성'만이 유일하게 '생각의 진화'를 이끌 수 있게 되었고, 그 진화의 최종단계인 '오메가 포인트'에 다다를 수 있는 것도 곧 '인간지성'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단다.

 

  읽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다거나, 하느님의 형상을 본떴으니 그 사람의 마음이 선한 것은 당연하다거나, 최초의 사람에게 이르노니, '만물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도다...같은 구절이 연상되면서, 오직 인간만이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 '최종 진화단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니 인간은 선한 본성을 되살려 '반성하는 삶'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오메가 포인트'에 다달아 온 우주를 지배(?)하라는 결론을 읽다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부님이 열거한 '과학지식'과 말씀하신 '종교교리'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발 좀 깝치지말고 착하게 살아라"라는 금쪽같은 말씀인 듯 싶다. 왜냐면 책의 내용 구석구석에서 '선한 본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잘났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생명을 비롯해서 같은 인간에게까지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만물의 영장이여, 제발 만물의 주인행세를 할 생각말고 철저한 반성을 끌어내서 만물에게 이득이 되는 생각을 먼저하고, 욕심을 버리고 베품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현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과학적 증거'를 통해 증명해낸 셈이다. 읽다보면 '논리적 비약'이 심한 듯도 보이고, '교리문답'을 듣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바람직한 인간이라면 선한 본성을 끌어내야 하며, 지구를 두 번 죽이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들 생각만 하면서 살아가라는 좋은 말씀이 가득한 책이다. 근데 샤르뎅은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어달라고 주문한다. 아마도 '종교인'으로서 비난을 받을 것을 의식해서 한 말이라고 짐작된다. 아닌 게 아니라 샤르뎅을 '악마'로 해석하며 맹비난하는 부류도 참 많다고 한다. 심지어 샤르뎅이 '악마의 대명사'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심각 공격도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샤르뎅은 '선한 마음'을 진화의 관점에서 풀어냈고, 원자단위까지 쪼개서 철저히 분석한 결론을 내었을 뿐, '이단적인 요소'는 굳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종교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그저 '착하게 살아주세요'라는 주문을 쪼끔 심오하게 풀어냈을 뿐이다.

 

  끝으로 샤르뎅은 '지식인의 의무'를 누구보다 진솔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자신이 '아는 것'을 혼자만 알고 묵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러한 노력에 의한 메시지가 '선한 마음'으로 온 우주를 뒤덮고도 남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오메가 포인트'를 이해하면, 인간의 지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그 '똑똑한 머리'로 고작 남들 등쳐먹을 생각하지 말고, '뛰어난 지능'으로 세상을 더욱 밝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쓰라는 메시지 말이다. 오늘날의 엘리트 집단이 '그들만의 잔치'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면 스팀이 팍팍 받곤 하는데, 그 잔칫상에 <인간현상>을 던져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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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중세·근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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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에 이어 '중세와 근대의 철학'을 다룬 책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는데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한편,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신은 있다'는 전제 아래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옥신각신하며 근대를 맞이했고,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설왕설래를 하며 '합리론과 경험론'이 대립을 이루다.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앙에 젖은 중세 철학자들의 사유방법과 찬란한 이성의 빛에서 황홀감을 만끽한 근대의 철학자들을 만나보자.

 

  중세시대의 철학은 '신앙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던 까닭은 깜깜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맹목적이어서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던 빡빡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을 쳐다본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다른 곳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안 본 것과 매한가지고, 못 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철학도 눈여겨볼만 한 것이 있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철학의 아퀴나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를 이상 세계로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증명하였으며, 아퀴나스는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탄탄한 논리로 증명하였다. 이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버렸던(그리스로마) 사상'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탄탄하게 세우는데 쓰였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까닭에 중세시대는 매우 모순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또한, 그리스도(하느님)에 의해 뭉뚱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철학적 사유가 아주 하릴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근대철학의 핵심'인 이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진리, 사유)'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을 내세웠는데, 크게 두 가지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바로 그것이다. 합리론의 대표주자는 '데카르트'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을 정도 '절대진리'에 해당하는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 철학적 사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합리론이다. 반면에 경험론은 '생각'하기 위해선 먼저 '경험'이 따라야 한다면서 생각에 앞서 행위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경험했기에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의 철학자들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왔다갔다하면서 '철학은 더욱더 분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논란의 종지부를 지른 이가 나타났으니,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경험없는 생각은 부질없으며, 생각없는 경험은 무쓸모다'라면서 합리적 경험론, 또는 경험적 합리론이랄 수도 있는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바로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동안에는 '사과는 맛있다'는 사실을 사과를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다는 합리론과 사과를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경험론으로 옥신각신했는데, 칸트는 사과는 '맛있다'고 인식하고, 직접 먹어봐서 '맛있다'고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사과를 '판단'한 것에 중점을 두어 "선험은 감각에 우선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칸트의 등장으로 철학적 논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으나, 헤겔이 뒤이어 등장하면서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이라면 '변증법'으로 유명하지만, 변증법의 내용을 풀어보면, 고정관념, 또는 자기신념조차 변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자기 안에 내제한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정-반-합'이다. 눈 앞에 '있던' 사과를 먹어서 '없는' 사과로 만들면, 몸속에서 소화과정을 거쳐 '에너지'로 발산할 수도 있고, 응가속에 '씨앗'으로 배출되어 또 다른 사과나무를 창출할 수도 있다. 여기서 '에너지'로 발산할 경우, 뉴턴의 '사과'가 될 수도 있고, 세잔의 '사과', 아담의 '사과', 그리고 잡스의 '사과'가 될 수 있는 등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지고, 그 '사과(정)'들은 또 다시 '부정(반)'되어 '또 다른 것(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자꾸 반복되기도 하고, 심각한 논쟁을 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침에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여명'이 밝아오기 위해 기나긴 어둠속을 헤매기도 하는 법이다. 철학의 중세와 근대가 그러했다. 물론 현대철학에 들어섰다고해서 마냥 순탄하지만도 않지만, 중세와 근대시대의 답답하리만치 지루한 공방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는 그런 논란이 일사천리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본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엉터리 정치질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지만, 이런 꼴통들이 아직까지도 높은 지지율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더 '답이 없는 세력'이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낡고 구태의연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리들이 있을까 싶지만,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뿌리 뽑는 일'이 아니라 '더욱 밝게 비추는 일'이다. 뿌리 뽑으려 해봤자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선하고 좋은일'로 세상을 가득 채우면 그뿐이다. 당장은 답답할지라도, 혹은 때려야 속시원할지는 몰라도 못난놈들과 똑같은 짓을 해봤자 '너도 똑같다'는 비아냥만 돌아올 뿐이다. 차라리 온 대한민국 시민이 교양으로 철철 넘치게 되면 '가짜'들은 설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밝은 학문'인 철학(밝을 철, 배울 학)을 널리 익히면 좋을 터이다. 그래야 저놈들이 부끄러워 뒈질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 방법 아니냐고? 낭만만큼 멋진 방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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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2 - 천년 제국 로마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벌거벗은 세계사 2
최호정 그림, 박효연 글, 김덕수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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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단순암기가 필요한 과목임에 틀림없지만, 암기의 지평을 넓이고 깊이를 더하게 되면 '역사가 감추고 있는 진면목'이 열리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이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승자가 있다는 것은 그 상대편인 '패자도 있었다'는 증거가 되므로 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승자가 독식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굳이 패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속에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다룬 알렉산드로스와 진시황이 승리를 거둔 뒤에 감춰버린 '역사의 진실'을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승자가 애써 감추고 싶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몹시 궁금하겠지만 직접 파헤쳐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공부일 것일 것이다.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면 이번 책에서 '로마와 이집트의 상관관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길 바란다.

  두 번째 책은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그리고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내용이다. 베르길리우스의 고전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은 멸망한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이아스에 후손인 로물루스가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고대 로마는 왕정을 거쳐 공화정을 이루며 크게 성장하였고, 너무나도 커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황제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비로소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했지만 오현제 시대를 거쳐 군인황제의 난립과 동서로마로의 분열, 그리고 게르만의 대이동 등의 영향으로 '천년 제국'도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은 이후 서양의 모든 나라의 기틀이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탁월했으며, 로마의 문화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져내려올 정도로 '서양문화의 근간'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편, 이집트는 로마보다 앞서 찬란한 고대문명을 일구어냈지만, 잇따른 침략으로 인해 고대 왕조는 무너졌으며,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다시금 융성의 기틀을 되찾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자리를 탄탄히 잡았지만, 로마제국이란 거센 물결 앞에 위태로운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로마와 손을 잡고 이집트의 영광을 재건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기의 미녀'가 바로 그녀다. 로마의 최고 집권자인 카이사르를 유혹하고, 카이사르 암살 이후 최고 집권자에 오른 안토니우스마저 홀려버린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지만 여왕의 노력은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의해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었고,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끝내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승자의 기록'이다. 서양이 그토록 잘난체를 하는 근거가 된 '로마의 영광'이 돋보이는 기록이며, 오리엔트가 졸지에 서양(옥시덴트)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된 전말이 또렷하게 보여지는 대목이다. 이런 역사를 배우고 익힌다면 '서양의 우월함'만 남게 되고 세계사를 배우는 애초의 목적인 '인류공영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도 서양쪽으로 기울어지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목소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로마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참 많다. 제 스스로 잘난 것 하나도 없이 남들에게서 배운 것으로 착실히 힘을 길러 정점에 올라선 '불굴의 역사'가 가장 으뜸일 것이다. 여기엔 숱한 패배를 통해서 배우고 익혀 '최상의 솜씨'를 발휘하기까지 힘 없는 약소국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바로 '로마'라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힘 없던 왕정을 고집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체제인 '공화정'으로 탈바꿈을 하고, '로마의 영광'이라고 다시 쓰게 되었던 것이다. 점점 커지는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황제정'으로 또다시 탈바꿈하게 된 것까지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등장'은 곧 '독재자의 탄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마제국은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끝내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결국 로마의 멸망은 '외부적인 요소(게르만의 대이동 등)'에서 현저하게 보이지만, '내부적인 요소(정치권력의 부정부패 등)'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탓이 더 크다고 하겠다. 왜냐면 로마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내부로부터' 건실한 체제를 갖추고, '로마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들이 끝없이 등장하며 로마를 다시금 영광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팍스 로마나' 이후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승자의 기록'에서조차 입에 올릴 수 있는 건덕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

 

  자, 이처럼 대단한 로마가 감춘 역사는 이집트의 한 여왕에 의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다. 그녀는 기울어져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친동생(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권력다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집권계층은 여왕의 이런 행보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자 여왕은 로마의 최고집정관인 '카이사르의 방문'을 계기로 이집트에 개혁을 시도하려 한다. 우리로 치면 구한말 개혁개방을 외치던 개화파와 같은 행보를 걸은 것이다. 즉, 외세의 힘을 빌어 자국의 개혁을 시도한 셈이다. 오직 이런 방법만이 '낡은 세력(수구꼴통)'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거라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외세의 힘'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그 대가 치뤄야 하는 '모욕의 역사'를 우리는 너무 잘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허울 좋은 '동맹'이란 말 따위는 함부로 거론해선 안 된다. 북중러를 상대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굳건한 동맹관계'를 위해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줘버리고나면 우리가 감당해야할 '청구서'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외세의 힘'은 절대 빌어서도, 믿어서도 안 될 것이다.

 

  암튼,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힘이 필요했고, 로마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비옥한 이집트'를 탐내던 로마의 최고사령관은 손쉽게 이집트를 거머쥘 열쇠로밖에 보이질 않는 클레오파트라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을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야심 사이에서 잉태한 아기가 있었으니 바로 '카이사리온(카이사르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겐 달가운 아이가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핏줄이었으나 '외국인 여자'에게서 난 아이를 '로마의 지배자'로 만들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버려두고(?) 로마로 훌쩍 떠나버린다. 그 사이에 이집트의 권력문제는 일단락이 되어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고 말이다. 이제는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권력싸움에 신경쓰고 있던 사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로마로 행차를 하게 된다. 로마가 새로운 권력자(황제)로 카이사르를 선택하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카이사리온)를 유일하고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식민지에서 지배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허나 황제의 등장을 거리던 '로마의 원로원'은 발빠르게 카이사르 암살을 모의한다. 카이사르의 계승자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지금이 가장 적기였으며 독재자가 사라지면 로마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 자신들(원로원)이 권력을 되찾게 되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부르투스가 공화정의 열성당원이었다. 그렇게 로마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바랐던 것이다.

 

  허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카이사르를 죽게 만들었지만, '황제의 등장'은 거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또 다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부하장수였던 '안토니우스'가 등장해서 원로원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휘몰아쳐나아갔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가장 당혹했던 이는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녀의 계획은 오로지 '카이사르'에게 달려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로마의 성난 민심으로부터 자신과 아들을 보호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포기한 것은 없다. 로마의 권력싸움이 장기화되며 권력자 중 한 명인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클레오파트라는 또다시 '외세의 힘'을 빌어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니 이번에는 '로마'를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밀어붙인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이집트의 재건을 넘어 '로마제국' 전체를 클레오파트라의 발 아래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 뒤의 결말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악티움 해전'이 승부의 갈림길이었는데, 이집트는 '안클의 사랑'이 무색하리만치 허무하게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집트의 재건'은 물 건너가게 된 셈이다. 근데 이집트의 허무한 패배가 맞기는 한걸까? 원래 해전은 '변수'가 많은 법이다. 육지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많이 말이다. 더구나 이집트 내륙에서의 저항의 기록이 전무하다.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패배했다하더라도 '안클, 두 사람'이 모두 살아 있는 참인데, 병력수에서도 열세였던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낙승(?)으로 급히 마무리된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안클의 자결(?)'로 일단락되는 것도 곧이 믿기 힘들다.

 

  그보다는 '이집트 내부'와 '로마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로마는 '외국인 집정관'도 용납할 수 없었지만, '황제'로 모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클레오파트라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로마시민들은 먼저 '외국인 축출'에 열성적이었을 것이다. 반면 여왕을 모시던 이집트의 권력계층은 겉으로는 복종하였을지라도 속마음까지 체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때를 보아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재집권을 노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사정속에서 로마와 이집트는 한판 대결을 앞두게 되었다. 해전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이집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내부에서부터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패주하고 돌아온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급감했고, 로마의 자존심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앞세워 똘똘 뭉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 내륙에서의 싸움은 '이집트의 낡은 세력'에 의해 변변한 힘도 쓰지 못하고 로마의 새로운 주인에게 홀랑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을 것이다.

 

  한 편의 소설처럼 들리는 이런 정황은 분명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른점도 있을 테지만, '패자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단초가 될 것이다. 아무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사라져버린 진실들을 그대로 묻어버리고 '승자의 기록'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기울어진 역사관'만 자리잡게 만들어 줄 것이다. '승자의 영광' 앞에 무릎 꿇고 마는 '패자의 진실'은 밝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눈이 부신 빛은 종종 '두 눈을 멀게' 만들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 로마의 영광을 추켜세우고나니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사라져버린 이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로마는 위대하지만 역시나 '정복자'에 불과할 뿐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또 다른 힘'으로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초기 로마 역사의 발자취'는 바람직한 모양새를 취했기에 배울만 하다. 허나 황제정 이후의 로마는 '거대해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몰락하고마는 모양새라 역시 배울점이 있다. 결국 '로마제국처럼'하면 망한다는 사실 말이다. 또 하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역시, '외세의 힘'이 아닌 '자국의 힘'으로 재건을 노렸다면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낡은 세력'이 커다란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구한말의 낡은 세력도 '같은 모양새'를 취하며 외세의 힘을 손쉽게 빌려대다가 끝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로마시민의 성숙한 의식'을 본받아 '이집트왕조의 신민들'이 교양을 쌓고 성숙해지길 노력하고 기다렸어야 한다.

 

  그렇게 '자국의 힘'을 키운 뒤에야 개혁이든, 혁명이든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숱한 개혁가, 혁명가들이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은 '성숙한 시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제풀에 꺾여버리고 만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시금 키워나가야 한다. 아직도 남아 제거되지 않은 '낡은 세력들'이 발악을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길 머뭇거리는 이가 있다면, 부디 깨닫길 바란다. 당신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낡은 세력들에 의해 발목이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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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1 -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진시황제의 통일 제국 벌거벗은 세계사 1
신동민 그림, 이현희 글, 김헌 외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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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나라 전체가 미쳐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로 '뻔뻔한 족속들'이 판을 치고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정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높은 지지율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정녕 부끄러움을 몰라도 '먹고 사는데' 부족함만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더 웃긴 것은 지금 돈도 힘도 '없는자'들이 더욱 내몰리고, '복지정책'은 점점 축소되고, 오직 '있는자'들을 위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도 위기감은커녕 콘크리트 지지층만 확인하고 있으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주기는 바라지도 않는다. 배부른 돼지가 현대인들의 숙원이라면 나쁘다고 욕하지 않으련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점점 '배골은 돼지들'로 넘쳐나고 있는 실정 아니냔 말이다. 아무 철학도 없고, 역사의식마저 망각해버린 돼지들로 넘쳐나는 현실을 더는 못 봐주겠다. 제발 공부 좀 하자. 어려운 책으로 말하지 않겠다. 쉽고 재미난 책으로 '대한민국의 현실'을 제대로 보길 바란다.

 

  이 책은 유명 TV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의 내용을 책으로 엮어내었다. 논란 끝에 '설민석'이 하차하고, 지금은 '대학교수'가 진행을 이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누가 진행하는 것이 그닥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역사를 제대로 '시청'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안목'과 함께 깊이 생각하는 '철학적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역사에는 '정답'도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거기에 '역사의식'을 제대로 깨우치고 난 뒤에 누구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공부했는지 되짚어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렇다. '역사'는 단지 '승자들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이득'을 위해 쓰여지는 유용한 도구다. 이것을 잊고 그저 '암기과목'으로 여기고 말면, 악독한 무리들에 의해 쓰인 '잘못된 역사의식'을 진실로 믿고 잘 길들여진 개돼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역사를 우리는 '날조'라 부르지만, 날조를 '진실'로 믿는 이들에겐 날조가 아닌 셈이 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아니 무엇이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란 것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그건 힘 없고 돈 없는 이들을 위한 역사인식인지 되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 쓰여지고, '돈 많은 자'를 위해 쓰이기가 너무 쉽다. 그런 역사를 위대하다고 떠받들면 결국엔 힘도 돈도 '없는자'들은 노예가 되고 만다. 이런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잘못된 역사인식을 배우는 것이 틀림없다. 그때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역사가 어떻게 쓰여야 온당한 것인지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없는자'에게 영광스런 역사를 쓸 때, 역사는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게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명심해야 한다. 역사는 '있는자'들을 위해 쓰일 때 가장 더러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 1권에는 동서양의 가장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의 통합을 넘어 동서양의 융합을 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와 중국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의 위업을 넘어 통합의 기초를 몸소 보여준 '진시황제'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정복을 넘어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방법을 통해 우리는 배울 것이 참 많다. 그 배움 가운데 가장 으뜸은 결코 '힘'에 의한 통합은 오래 갈 수 없으며, '모두'를 위한 정책이 아니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복자'를 위대한 업적이라고 치켜세우기 일쑤다. 지배하는 땅을 넓히고 막대한 자원을 챙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을 이름과 명성을 드높이는 것이 그 증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와 환경파괴, 그리고 '한 사람'을 드높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해야만 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정복자는 결코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려선 안 될 것이다.

 

  물론, 파괴적인 전쟁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동서양의 융합'이 일어나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딴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라 부르며 전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힘을 발휘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이 한데 섞여 '융합'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제도 숱한 전쟁을 통해 각 나라를 깨부수며 '분열'되고, '갈등'만 조장하는 것을 넘어 단칼에 도려내고 '하나로 통일'을 해내어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것을 일거에 없애고 '통일'을 넘어 '통합'을 이끌어낸 것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나, 그런 새로운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더 많은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직 하나를 위해 '모두'가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하나를 얻기 위해 '당신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놓을 이가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의'를 의해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쯤으로 묘사하기 일쑤다. 그나마 '모두를 위한 대의'라면 고려해봄직도 하건만 '알렉산드로스'를 위해, '진시황'을 위해, '윤석열'을 위해 대한민국 '전체'를 갖다 퍼주..쿨럭쿨럭

 

  암튼, 모두를 위한 역사인식이란 관점에서 '정복자들의 정복전쟁'을 살펴본다면 그들의 '문화 융합방식'에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리스식'이나 '중국식'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강압적인 통일방식은 노땡큐다. 그런 식이라면 '한국식'이 세계표준으로 삼아 마땅하는 의견에 얼마나 공감할 것이냔 말이다. 그보다는 K-POP이 보여주는 방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류열풍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식 음악'이 전세계를 강타했지만, 실상 '한국식 음악'이라는 것의 실체는 '한국만의 독특한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신나고 흥겨운 리듬에 '젊은이들의 끼와 열정'을 담아 멋들어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K-POP은 누구라도 한 번 들으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누구라도 흥과 끼만 있다면 즐길 수 있는 '컬쳐문화'로 거듭났다. 더 나아가 이제는 '한국인 멤버'가 없는 '로컬멤버'로 이루어진 K-POP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K-POP의 대세가 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와 진시황도 애초에는 이런 꿈을 꿨을테지만, 감히 실현시키지 못했던 업적이다.

 

  이제 위대한 정복군주의 업적만 나열한 역사책에 열광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 두자. 그보다는 '모두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위대함'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으로 알렉산드로스와 진시황의 공과를 논하는 역사수업이 대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을 위해서 희생이 강요되어선 절대 안 된다는 것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대화와 타협의 지난한 과정을 축소하고, 갈등과 분열로 조장된 혼란을 일거에 해결하는 멋진 활약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럴 때에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통합과 융합으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을 보듬어주어야 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멋짐'이 제대로 멋질 수가 있는 법이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 흥하는 것을 취하고 쇠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역사공부의 목적으로 삼기 마련인데, 이제 여기에 하나를 더 목표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공들여 배운 '역사인식'으로 특정 세력의 이득만 챙기는 것을 경계하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쓰여지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절실하게 되었다. 역사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역사적으로 성찰한 뒤에, 올바른 인식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돌아보길 바란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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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2 : 이이 성학집요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2
곽은우 지음, 이진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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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 가운데서도 유독 읽지 않는 '고전'이 있으니, 바로 '우리 고전'이다. 역사를 배우면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따로 국밥처럼 다루는 실수를 많이 지적하지만, 철학을 비롯해서 '고전'이라 일컫는 것들은 죄다 서양과 중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우리네 위인들이 쓴 '고전'에 대해서는 까막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는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만 하다. 심지어 외국의 고전은 곧잘 치켜세우면서 '한국의 고전'은 푸대접을 하기 일쑤다. 까닭인 즉슨, 대단히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인 탓에 오늘날에 비추어 온통 '한계점' 투성이며, 심각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내용만이 가득하기에 현대인들이 배우기에 딱 알맞은 '한국 고전'은 없다고 단언할 지경이다. 정말 그럴까?

 

  각설하고, 율곡 이이가 쓴 <성학집요>는 선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을 염두에 두어 부디 '바른 정치'를 이끄라는 마음을 담아 손수 적어내려간 책이다. 마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문에 <군주론>을 지어다 바치며 조국 피렌체를 위해서 써내려간 것처럼 말이다. 하기는 <성학집요>와 <군주론>은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제왕학'이라 부를 정도로 '군주를 위한 가르침'을 담았기 때문이다. <성학집요>도 임금이 꼭 읽어야 할 <대학>을 중심으로 <사서오경>의 핵심적인 내용만 골라서 쉽게 해설까지 곁들여 썼고, <군주론>은 제목부터 '군주가 마땅히 해야할 것'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책이니, 책의 내용은 사뭇 다를지언정 책을 지은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에는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이는 왜 선조에게 책을 지어다 바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이이가 '실천하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만 파고들어 온갖 지혜를 쌓는 것을 넘어 '배운 내용'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반영해 '바른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셈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공부하는 이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단지 부와 명예만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이이는 단언했다.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은 뒤에 뜻(목적)을 이루었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런 이이의 주장은 '선조'에게 닥친 조선의 위기를 생각하면 실로 '예언가'적인 면모가 엿보일 정도다. 속설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여년 전에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사뭇 달라진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에게 닥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했다고 전해질 정도니, 율곡 이이의 선견지명은 단순한 지레짐작이 아니라 '높은 학문의 경지'에 다다르니 보이는 날카로운 안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율곡 이이는 9번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사서오경>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꼭 알아야 할 유학의 모든 것'을 집필해낸 책이 바로 <성학집요>였던 것이다. 앞서 퇴계 이황이 <성학십도>를 펴낸 것과도 서로 비교가 될 만하지만, '이이와 이황의 비교'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터이니 다음으로 미룬다. 암튼, 이토록 뛰어난 학자가 어린 선조임금을 위해서 써내려간 <성학집요>는 조선의 근간이었던 '성리학의 핵심 포인트'만 담아두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중국의 여러 고서를 <십팔사략>이라는 역사서로 휘뚜루마뚜루 읽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을 심어두었다.

 

  <성학집요>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군자에 이르는 길'이 보이고,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오늘날로 비유를 하자면, '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쏙쏙 공부하자'는 '시나공 요약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조선의 성리학에 정수를 공부하고 싶은데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또는 <사서오경>을 두루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도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한 권만 읽어도 충분할 정도다. 그런데 이 책, <이이 성학집요>를 보면 그 속에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현실정치'에 참여를 적극 권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이만큼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숱한 '개혁정책'을 내놓은 신하가 없을 지경이다. 16세기 조선의 혼란은 단순히 '붕당정치'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선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전국통일'을 이룬 기세로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며, 대륙에서는 바야흐로 '명청교체기'로 명의 기운이 점점 쇠락해지고 청(후금)의 기운은 날로 기세등등해지는 때에 조선의 임금인 '선조'는 붕당정치로 신하들이 편가르기를 한 틈을 타서 '왕권강화'를 할 요량으로 신하들과 힘겨루기에만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붕당정치는 날로 심각해지고, 임금은 신하들의 다툼에서 '어부지리'로 이득만을 챙기며, 말려야 할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더욱 부추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으니, 율곡 이이가 보기에 한없이 안타깝기 그지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이는 <성학집요>를 지었고, 선조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바쳤다. 그리고 현실이 바뀌길 간절히 원했다. 최고권력자인 조선의 임금을 깨우치면 국제적 위기속에서도 절대 위태롭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딴에는 어린 시절 영특했던 선조를 떠올리며 '기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허나 선조는 영리하긴 했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 급급했던 졸장부에 불과했다. 끝내 선조는 이이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나라가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오늘날의 정치는 어떤가? 최고 권력자 곁에 '율곡 이이' 같은 인물이 보이질 않는다. 오직 자기 이익만을 최고로 여기며, 나라를 팔아서라도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아낌없이 퍼주는 모지리만 가득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율곡 이이 같은 '정치인'이 새로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일촉즉발의 위기속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 있겠냔 말이다. 이럴 땐 방법이 딱 한 가지다. 온 국민이 '율곡 이이'와 같은 '선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져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치고 '낡은 지식'과 '낡은 방법'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에 닥친 위기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겨내라는 말인가 의아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실상 <성학집요>는 16세기 성리학적 이념만을 읊어대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허나 <성학집요>가 분명 '적절한 위기극복 방법'을 제시한 것은 맞다. 바로 <대학>에서도 밝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뒤에 정성을 다해,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며, 범주를 넓혀 '국가'를 다스리고 나아가 '세상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자기 한 몸을 소중히 써야한다는 내용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성학집요>에 쓰인 '제왕학의 핵심'을 깨우치고 실천하게 된다면 위기를 극복하고 우뚝 선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자는 달을 가리키는데 바보는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말이 있다. 현자는 모두를 위해 '함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바보는 '제 이익'만을 탐하며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 어리석기 그지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느냔 말이다. 바보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도록 큰소리로 한데 외쳐야 할 것이다. 현자가 가리키는 달이 '하늘에서 환한 빛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고 말이다. 아무리 바보 멍충이라고 해도 비로소 '환한 달빛'을 보고 난 뒤에는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저 제 이익에만 취해서 밝은 달을 쳐다볼 생각조차 안 하는 바보에게 큰 소리로 외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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