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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평점 :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 김병순 / 갈라파고스 (2012) [원제 :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2004)]
[My Review MMXXVI / 갈라파고스 5번째 리뷰]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콘크리트 지지층', '아스팔트 보수'를 넘어 이젠 '극우파'를 자처하는데에도 아무런 부끄럼을 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보수지지층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보수'가 점점 이상해지는데 '정당정치'를 하고 있는 우리 정치생태에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투표'밖에 할 일이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보수지지자'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매우 신중치 못하는 것을 넘어 '무개념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다름 아닌, '12·3 비상계엄' 이후에 벌어진 '탄핵정국'에서 보여준 극렬한 극우폭동사태 때문이다. 서부지검 폭동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라고 보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사태 '이전'이나 '이후'에도 극렬한 집단시위는 달라지지 않았기에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다. 너무도 '상식이하'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과 정당일지라도 '과격'을 넘어서 '폭력'적인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후퇴할 수는 없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보수지지자들의 뇌구조(?)를 파헤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바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다. 이 책에서 밝힌 이유를 살펴보련다.
이 책의 원제는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What's the Matter with Kansas?>다. 출간된 해는 2004년이었는데, 당시 미국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부시(공화당)가 당선되었다. 뭐, 그럴 수 있다.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실제로 당선된 것이 처음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진보 일색'이었던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의 터전이었던 '캔자스 주'가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글쓴이 토마스 프랭크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고 설파했다.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이 '무조건' 진보 진영을 지지해야만 하는 규칙 같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보수 진영'을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왜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내는 보수 진영을 지지하느냔 말이다.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쥐꼬리만한 세금 감면'과 '현저히 줄어든 복지정책'으로 저들이 처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전혀 없을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캔자스 주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고, 부자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기고 저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정책'은 최대한 많이 끌어오려는 진보적인 색채를 뚜렷이 보여줬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보적이던 캔자스 주 시민들이 '보수'를 지지하기 시작했단다. 그들이 당선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낼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도대체 왜?
이 책을 들여다보면, '미국 정치의 민낯'이 낱낱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미국 정치에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관계로, 책의 비판적인 내용들이 우리의 피부에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 쎄한 책이긴 하다. 하지만 그 핵심만 파악하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의 핵심이 바로 '가난한 이들의 뇌구조(!)는 단순하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소득계층의 사람들은 학력이 낮은 편이다'라는 뜻이다. 뭐,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능력'을 비꼬는 내용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노동자'와 '농민'을 생업으로 삼은 집안의 자녀들이 '고학력, 고소득 직장'을 구하려는 열망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의 농부라고해서 무작정 가난하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땅은 굉장히 넓다. 사람의 일손으로 일구는 땅뙤기가 아니라 트랙터로 '직진'만 반나절을 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농장을 운영하고 있기에 절대빈곤계층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캔자스 주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 '고학력군'에 속할 필요성이 그닥 없는 셈이다.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보수가 바로 이 빈틈을 파고 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을 중심으로 보수가 은밀한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의 '저학력 일색'인 노동자와 농민 들을 대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이른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영웅'인 당신들이 부도덕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겠느냔 말들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낙태 금지 법안'을 폐기하려는 민주당의 정책을 음해하기 시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잘 아는 캔자스 주 시민들이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막으려는 저열한 짓거리에 동참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면서, '상식적인 윤리'를 내세우며 민주당의 정책들에 딴죽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낙태'라는 것이 우리 일상에 주는 충격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해보면 찬성하는 쪽보다는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길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보지지자였던 유권자들을 자연스럽게 보수지지자로 끌어들이는 활동을 꾸준히 벌였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이념'적 색채까지 마구마구 버무리면 진보진영의 상식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이고, 진보정당의 정책들도 마찬가지로 너무도 위험한 정책이라는 것을 훨씬 쉽게 전파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민자 문제'다.
이민자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긴 한데, '이민자의 인권'을 보호해주려다 정작 '나의 인권'이 침해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의 정책 변화를 지켜보면 이해하기 쉽다. 애초부터 '이민자의 나라'였던 미국이 '이민'을 긍정적으로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터전을 일군 '1세대 이민자'인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살았을 때에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흑인 이민자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함께 살아갔다. 그러다가 '흑인은 노예다'라는 차별적인 인식이 팽배해지더니 '인종차별'은 미국 백인들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저들이 '프론티어 정신'으로 영토를 급격히 넓혀나가던 '제국주의 시절'에는 흑인이건, 인디언이건, '유색인종'들은 차별해도 괜찮은 대상이었지만, 거대한 미국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엄청난 일손이 필요했고, 그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서 '유색인종'의 이민은 꾸준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인들도 '차별은 나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특히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차별정책을 폐지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곧바로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서 미국은 누구라도 차별받지 않는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 시절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몰려드는 이민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고, 급기야 '백인 서민계층' 노동자들의 일자리마저 빼앗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여론이 속속 감지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버드 대학 같은 '고학력계층'에서도 '같은 점수'를 받고도 '유색인종'에게 할당된 몫이 있어 '백인 학생'이 차별을 받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백인 학생'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유색인 학생'이 장학금을 타는 일이 벌어지자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이민자 정책을 옹호하는 정치인의 인기는 점점 식어만 갔다. 여기에 '미디어 언론'의 기승은 더했다. 백인 범죄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유색인 범죄에 대해서만 '대서특필'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색인=예비 범죄자'라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이런 이유 때문에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 이민자들은 '백색테러'에 벌벌 떨면서 지내야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보수정당은 이를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나아가서 모든 이민자를 받지 않겠다는 정책까지 밀어붙인다. 심지어 미국시민권을 '고액'을 내야만 내주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애초에 가난한 이민자들은 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다. 특히, '가난한 유색인종'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꽤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지적한다. '진보는 너무 어렵게 말한다. 반면에 보수는 쉽게 말한다'라고 말이다. 뭔 말이냐면, 비가 내리는 이유가 궁금한 아이에게 대답을 해줄 경우에 '선량한 똑똑이들'은 과학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한낮은 태양빛 때문에 온도가 올라 수중기가 발생하면, 뜨거운 공기가 상승하듯 따뜻해진 공기속의 수증기로 상승하는데, 그 수중기가 일정량 이상으로 모이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름'이 생성되고, 그 구름속에서 '응결'한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었다가 얼음알갱이가 되었다가 하면서 반복을 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구름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작은 얼음알갱이에 수증기가 달라붙어서 점점 크기가 커지게 되고, 그러다 결국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지면 빗방울이 되어 대지를 적시게 된다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반해 '은밀한 선동꾼들'은 그걸 '신의 섭리'라면서 '하느님의 눈물'이라고 우아하게 포장하고 만단다. 너무 쉽지 않은가? 당신이 유권자라면 누구의 말을 곧이 듣겠는가?
이처럼 '진보진영의 상식'은 너무 어렵다는 말이다. '인권'은 소중하지만 왜 '이민자의 인권'까지 챙겨줘야 하냔 말이다. 또한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진보세력들은 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는 왜 찬성하느냔 말이다. 모든 이의 인권이 소중하다면 '뱃속의 아기'도 소중히 다뤄야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 간단하니 '보수진영의 논리'가 먹혀 들어가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캔자스 주 가난한 시민들은 '애국시민'으로 거듭나면서 젊어서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투쟁세대가 늙어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세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고 토마스 프랭크는 낙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한 나라의 대통령조차 '음모론 신봉자'가 되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서 민주시민들의 저지로 막아낸 계엄령을 '야당의 선동'에 이용당한 어리석은 짓이라며 자신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계몽령'을 선포했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국회를 점령(?)한 '야당의 폭거'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며 어느 한국사강사는 울분을 토한다. 국회의 정당한 요구에 '거부권'으로 일관한 행정수반의 책임은 없단 말인가? 아니 자칭 '한국사 강사'라는 사람이 '비상계엄'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윤석열의 계엄령이 '비상식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냔 말이다. 또한, 이들을 행태는 종교의 탈을 쓴 '전광훈 사이비교주(목사직 박탈 당했으므로)'의 국민저항권 운운하는 발언으로 종합할 수 있다. 감히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정치적 활동을 일삼는 '전광훈의 상식'이 상식일 수 있냔 말이다. 저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극우지지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한결 같이 가난하고 애국심만 가득하다.
이제 우리는 '보수 우파'의 진면목을 다시금 살펴볼 때다. 가난한 노동자는 무조건 '진보'이고, 부유한 부자는 반드시 '보수'를 지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때에는 '근거'가 정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누군가의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왜 '남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느냔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나 정치에 있어서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은 100% '선동꾼'이다. 반면에 정치 좀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의 말을 경청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밝히는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한 번' 지지했더라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정치인은 '권력의 맛'을 보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더라도 오랜 세월 정치에 몸을 담으면 정말이지 '오물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오물덩어리가 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기성찰'을 해야할 위인이 정치인인데, 그런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늙고 낡은 정치인을 대신해서 젊고 참신한 정치인을 뽑으면 정치를 잘 할 거라는 생각은 아주 큰 오산이다. 이른바 '정치경험'이 일천한 이들이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더 빨리 쉬어버리기 일쑤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자기 생각'대로 소신있게 지지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지지했다면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지지한 정치인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가 잘하면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말고, 잘 못하면 못한다고 맴매를 아끼지 말라. 그렇게 해도 잘할까 말까다. 이 책을 읽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의 민낯을 까발려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진보의 물색 없음도 동시에 볼 수 있다. 도대체 그 똑똑하다는 진보인사들이 왜 저열한 보수의 선동질 하나 막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진보다 어렵게 말하기보다 쉽게 말하는 '상식'을 배워야 한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진리는 언제나 '심플'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