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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 세상의 기준에 좌절하지 않는 어른의 생활법
양승렬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1월
평점 :
[My Review MDCCCLXIV / 한빛비즈 159번째 리뷰]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명심보감>을 시작으로 어릴 적부터 적지 않은 유교경전을 읽었더랬다. 하지만 스승님께 사사받는 수업이 아닌 '독학'으로 읽었기 때문에 뜻풀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되는대로 주워 섬기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읽은 셈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좋은 말씀'에 대한 기준만큼은 명확히 새기고 있던 터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자세로 살아왔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사람을 보는 기준이 '인성(人性)'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으로 갈리는 편이다. 다시 말해, 내가 고개 숙여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마음이 고운 사람'뿐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진심을 다해서 예를 다하려고 노력한다. 허나 심성이 고약하거나 품행이 방정맞지 못하거나, 특히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절로 '호감'을 사게 되고, 반대로 부정적인 사람은 '반감'을 띠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마찬가지로 예를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내것을 아끼지 않고 가깝게 지내고 싶은 반면, 하는 일마다 투덜거리고 제 일마저 남에게 떠넘기는 몰상식한 사람과는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다.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이런 당연한 소리가 바로 <논어>에 다 적혀 있다.
그렇지만 정작 <논어>를 읽어본 사람은 내 주변을 보아도 그리 많지 않다. 행여 드물게도 읽어본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소감을 물으면 "너무 지루하고, 어렵고 딱딱한 말투 때문에 다 읽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하긴 나도 처음에 읽을 땐 딱 그랬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친절한(?) 해석'이 달려 있는 책들을 읽으면 그나마 읽을 만하다는 소극적인 권유를 하지만, 고루한 옛말투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논어>를 '현대어'로 풀어낸 책이 절실했는데, 이 책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가 딱 그랬다.
물론, 이 책의 글쓴이가 지적하듯이 <논어>를 '완역본'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데 동의하는 편이지만, 한자어휘를 남발한 책을 완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기에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요즘 세대들은 '고사성어'에 담겨 있는 지혜를 읽으면서도 "어쩔 TV~"로 대꾸하곤 하는데 말이다. 뭔가 '가르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반감부터 생겨 어깃장을 놓곤 하니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쉬운 풀이'가 절실한 편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논어>의 전체를 실은 것이 아니라 '64개의 문장'만을 꼭 알아야 할 내용으로 삼고, 오늘날의 적절한 해석을 일일이 달아놓았으니, 그나마 읽을 만한 <논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하지만, '조선 그림'에 대한 해설도 꽤나 '교육적'으로 보여서 '수행평가'에나 도움이 될 법한 '예시(모범답안)'로 삼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논어>, 그 자체니까 말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논어>를 쓴 사람은 '공자'가 아니다. 위대한 성현들인 '예수'도 <성경>을 직접 쓰지 않았고, '무함마드'도 <꾸란>을 쓰지 않았으며, '석가모니'도 <불경>을 손수 적지 않았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저작물을 직접 남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씀'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그들의 '제자'가 그분들의 '말씀'이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제자들끼리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놓았다가 따로 모아서 책으로 남긴 것이 이른바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경전'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이런 성현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라하고자 '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손수 집필하지 아니 하고 '내 제자들'에게 열실히 필기를 하라고..쿨럭쿨럭
암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논어>는 공자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적어 놓은 책이란 말이다. 더구나 공자는 교실 안에서 강의를 하는 '딱딱한 수업'을 하지 않았단다. 제자들과 함께 좋은 산천구경을 하며 다니다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BGM으로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곳에서 노닐다가 악기를 연주하다 흥이 오르면 '좋은 말씀'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고, 제자들은 그런 스승님의 흥취에 장단을 맞추다가 문득 '궁금증'이 떠오르면 질문을 던지는 꽤나 느슨하고 열린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터이니 '강의 커리큘럼'이 따로 있을 리 없고, '교과 목표' 따위를 드러낸 교과서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떠오르는 영감'을 주는대로 받아 먹는 식으로 제자들도 공자님의 말씀을 적었을 뿐이다. 그러니 <논어>에 '읽는 순서' 따위는 없다. 아무 대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이니 <논어>를 '격식'을 따져가며 읽을 필요가 전혀 없고, 읽는데 부담을 가질 필요도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부담감을 갖는 순간 <논어>를 제대로 읽기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격식'을 내려놓고 읽다보면 때론 '파격'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땐 '그런 맛'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경전>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려는 '교조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성현의 말씀을 곡해하고, 원래의 뜻을 왜곡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짓이 되는 경우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씀'은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마음의 양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논어>를 읽을 때에도 아무 거리낌없고 막힘 없이 읽어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논어>의 가장 유명한 문장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也'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직역을 해버리면, 그 뜻이 살지 못한다. 이 문장의 뜻은 한마디로 '아는 것이 많아지면 즐거워진다'는 공부하는 학생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자세라고 하더라도 '강요'하게 되면 즐거울 턱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때 시'를 강조한 듯 싶다. 언제 '학습'을 하면 가장 기쁘겠는가? 바로 '알고 싶은 것'이 생겼을 바로 '그 때' 알 수 있고, 깨우칠 수 있다면, 머릿속에 전구가 밝게 빛나듯, 지혜의 샘물이 콸콸 솟아나듯 '앓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야말로 진정 기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로 풀이를 하면, 이해가 쏙쏙 될 것이다. 이처럼 오래된 문장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공자가 살던 시대와 오늘날이 수천 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는데, 이를 '세대차이'로 셈을 해본다면 얼마나 큰 차이겠느냔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과거의 지혜'가 세월이 흘렀다고 '낡은 지혜'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면 그 때에도 '사람'이 살았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람' 사는 데에는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이를 '욕망' 또는 '욕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은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도 달라질 것이 없단 말이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던 '세상의 모습(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니 그 '양식'만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좋은 말씀'은 그대로 오늘날에도 '유용한 지혜'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논어>는 절대 고리타분한 옛글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는 지혜로 우리가 엿보고 배울 만한 '훌륭한 교과서'인 셈이다. 다만 그 교과서를 '현대어'로 슬기롭게 바꾸어 읽을 수 있는 '짬바(경륜, 또는 경험, 삶의 지혜 따위)'가 필요한 셈이다. 일단 이 책의 글쓴이가 '풀이'한 내용을 참고 삼아 읽어보길 바란다. 그러면 <논어>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충분히 쉽게 해석하며 읽어 나가는 짬바(?)가 생길 것이다. 그런 짬바로 '좋은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읽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쯤은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것도 느끼게 될 것이다. 좋지 않은 점이 보인다면 '고치고 싶은' 용기도 생길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