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5 : 자본주의의 역습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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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VIII / 돌핀북 5번째 리뷰] 이 책 참 재밌다. 아마 누가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를 할 때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기적의 공부법'이 완성되는 것처럼 '경제적 관점'으로 모든 학문을 읽으면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먹고 사는 문제(흔히 '먹사니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런 와중에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풀어놓은 부분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는 부유해지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잉여생산물'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부자는 유일했다.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만이 찐 부자였던 것이다. 단순히 '잉여생산물'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오래도록 부를 소유하고 있을 수 없었다. 흔히 '탈무드 격언'이라고 소개되는 말로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 물고기를 주는 방법으로도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또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또다시' 물고기를 구걸해야만 할 것이다. 반면에 물고기 잡는 방법을 터득하면 배가 고플 때마다 스스로 배를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잉여생산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한 부를 쌓았다고 할 수 없다. 언젠간 다 소모해버릴 것이고, 운이 나쁘면 한 순간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허나 '생산수단'을 갖고 있으면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생산'해서 만들어 쓰거나 팔거나 어쨌든 '마르지 않는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전근대 시대'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는 '권력자'뿐이었다. 정치적 우두머리거나 종교적 수장이 되어야 안정적으로 생산수단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시대'가 되면서 권력의 향방은 종교가 무너지고 이성이 빛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 인해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에게 '생산수단'을 차지할 권리와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자본주의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 자본주의를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하였다. '초기 자본주의'(애덤 스미스), '후기 자본주의'(케인스), '신자유주의'(하이에크, 시카고학파)로 말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가장 처음 등장한 자본주의로 '정부의 개입이 없고, 세금도 거의 없는 상태'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에는 자유가 필요하다'면서 자유롭게 방치한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시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결국엔 안정을 찾아간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간섭이 없어야 시장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해서, 규제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규제 없는 과열 경쟁은 곧 '공급 과잉'을 불렀고, 결국 '경제대공황'으로 시장은 낭패를 보게 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후기 자본주의(수정 자본주의)'다.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며, 땅속 깊은 곳에 돈을 묻어두면 그 돈을 찾으려 모든 사람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될 것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이른바 '뉴딜 정책'이 그런 것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세금'으로 공공사업을 벌이고, 그렇게 벌인 공공사업으로 실업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소득'이 생긴 노동자가 소비를 활성화하고,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였기에, 정부는 '세금'을 걷어들이고, 다시 그 세금으로 '복지정책'을 펼쳐서 국민들을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부를 재분배하면서 자본의 독점을 막자, 그 부작용으로 경기 침체, 장기 불황,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말았다.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을 보장하지 않고서 강한 규제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 인한 시장 불균형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침해하자 손해를 크게 본 자본가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않아 '경기 침체'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서 '장기 불황'까지 이어지자 '물가 상승'을 동반한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나빠진 경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강조된 것이 바로 '자유로운 시장'이었다. 다시 '초기 자본주의 시기'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오늘날 '주류 경제체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경기가 활성화된 것은 좋았는데, 돈이 없는 '중소기업'보다는 돈이 많은 '대기업'에게 더욱 유리해지게 되었고, 대기업보다 더 유리해지고 이득을 많이 본 것은 '다국적기업'이었다. 왜냐면 정부의 규제를 철폐하다시피 했고, 세금도 현저히 낮췄기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이들은 '돈 많은 자본가들'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돈 없는 노동자들은 '세금이 낮아진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왜냐면 이들은 애초에 낼 세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더 올리기 위해서 '임금인상'은 해주지 않으면서, 수익손실이 날 때 잽싸게 손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인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리는 꼼수를 썼다. 그동안에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노동자 해고'를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비정규직은 그런 규제에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는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욱 빈자가 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점점 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일까? 과거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이론이 대안을 제시하곤 했는데, 과연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도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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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 2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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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MVII / 열린책들 20번째 리뷰] 노통브의 책들을 '관통'하고 있다. 원래는 '독파'하려고 했으나, 지금 그녀의 책들을 2~3권씩 동시다발적으로 읽어재끼고 있는데, 내가 그녀의 책들을 10여 년 전에 읽다가 그만 두었는지 이제 막 기억이 떠올랐기에 '관통'하려고 든 것이다. 긴 말 할 것도 없이 노통브의 책들은 '흥미, 그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이 그 당시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주 자극적인 소재들로 어그로를 잔뜩 끌어모은 뒤에 살인, 강간, 정신병 같은 것들로도 모자라서 온갖 '그로테스크(기괴한, 괴상망측한)'한 것들만 잔뜩 늘어놓고 나서야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짖궂은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물론 노통브의 소설들이 '읽을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면 그녀의 소설엔 '기발함'도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을 끌어내는데 천재적인 솜씨를 지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전공분야인 '언어학'적으로는 천재가 맞고 말이다. 그러나 절대 친절하지는 않다. 그 천재적인 솜씨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조곤조곤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걸 굳이 살인자 캐릭터나 끔찍한 범죄자의 말과 행동에다가 교묘하게 숨겨두고 독자들로 하여금 직접 찾게 만들곤 한다. 그렇다고 굉장한 '추리소설'을 쓴 것도 아니어서 읽는데 '몰입감' 따위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녀의 주특기는 '말장난(언어유희)'이 전부인 탓에 추리를 하기 위한 '단서'에 대한 암시나 복선 따위를 대놓고 제시해 놓았기에 그녀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대개 '뒷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예측까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결론이 뻔한 이야기어도 '읽을 가치'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로테스크함으로 치덕치덕 잔뜩 발라놓은 탓에 '두 번'은 읽고 싶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도 10여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라는 것을 중간쯤 읽고 나서야 기억에 떠올랐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만 별로 강추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취향이 독특하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라면 도전할 만도 하겠지만 말이다.

<시간의 옷>의 기발함은 '폼페이가 사라진 날'이 서기 79년이 아니라 서기 2579년이라고 주장하는 26세기 서방국 집권자 중 한 사람이자, 자칭 '미남'이라고 불리는 셀시우스(맞다! 우리가 온도 단위로 부르는 '섭씨'의 원래 이름이다)가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를 한 '아멜리 노통브(맞다! 작가 본인이다)'가 1995년에서 '타임슬립(?)'을 해서 26세기 어느 날, 어떤 방에서 마주친 미남(?)과의 대화록이다. 여기에 그로테스크함은 그녀가 수술대 위에 올랐다가 깨어보니 26세기인 2580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책을 다 덮고 나면 <시간의 옷>이란 소설은 다 뻥이란 소리다. 그런데도 온갖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대담이 오고 간다. 한마디로 궤변의 장광설만이 전부란 소리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하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의 '입담'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마주하고서 오직 '입씨름'만으로 무사귀환(?)할 수 있었다. 논리정연함이 단 1도 없는데, 그녀는 논리정연하게 '셀시우스'라는 자칭 '천재적 미남(?)'과의 논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실질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기에,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생환'을 한 셈이고, 죽음으로 내몰고 간 저승사자와의 논쟁에서 이겨냄으로써 저승사자의 버림(?)을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수술대 위에서 마취되었다가 마취가 풀려서 깨어난 것에 불과한데도 그녀는 그동안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 생생한 기억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독자라면 이렇게 읽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오컬트적이고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든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셀시우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시록>의 예언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 말들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지력을 발휘할 대목이라도 있는 듯이 탐욕스럽게 주워담기를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미래 시대의 비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또 별것 아니다. 90년대 쓰여진 소설이라서, '세기말'에 예측한 약 600년 뒤의 미래 모습이 전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경험했던가. 경제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위기'를 겪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최악의 '기후재앙'을 맞고 있으며, 대체에너지는커녕 '화석연료'를 끊지 못해서 지구는 불과 100년 뒤에는 회생불능의 지구환경을 맞이할 것으로 과학자들이 전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핵전쟁'으로 인해서 지구가 작살이 나고서야 온 인류가 반성을 하고 '완전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 겨우겨우 어둠을 밝히는 정도로 살고 있다고? 그러는 자칭 미남씨는 '화산폭발'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정도로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말이다. 뭐, 어느 정도 앞뒤 맥락이 맞는 뻥을 쳐야 '읽을 맛'이라도 날 것이 아닌가?

결론만 말하자면, 노통브의 책 가운데 이 책은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현재는 '절판' 상태다. 그래도 노통브의 책들은 이번 기회에 전작을 완독할 예정이다. 아직 십여 권 정도...많이 남았다. 천재 소설가의 민낯은 궁금하지 않지만, 그녀의 유명세,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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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4-22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노통브의 책을
읽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어느 순간, 끊어 버렸구요.
이 리뷰로 갈음해도 될 것 같습니다.

異之我_또다른나 2025-04-22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통브에 대한 평가들이 다들 대동단결하네요.
그 옛날에는 왜들 그렇게 환호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들입니다.
 
채사장의 지대넓얕 4 : 보이지 않는 손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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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4 : 보이지 않는 손>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2)

[My Review MMVI / 돌핀북 4번째 리뷰] 드디어 '경제'로 넘어갔다. '역사'파트에서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부를 쌓아왔던 세력이 근대를 넘어서면서 '자본주의'의 핵심인 '공급과잉의 문제'를 마주하면서 좌절했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특히 '초기 자본주의'에서 중시했던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시장에 대한 신뢰도'는 높이면 시장은 완전 경쟁 체제 안에서 자율적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바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책에서 이미 배웠다.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문제점도 극렬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냐면 애초에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완전 경쟁'이 이루어져서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조율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경쟁은 공정하게 치뤄지지 않았다. 부를 많이 가진 자들이 '독점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자, '더 많은 부'를 끌어모으기 위해서 '노동자'에 대한 처우를 개떡같이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냐면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은 너무 많고 흔하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인권비'는 더 낮출 수 있었고, '노동환경'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소득감소는 곧바로 '소비감소'로 이어지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일찌감치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탐욕이 '노동시장'을 교란한다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지적은 소위 '가진자'들의 반감을 샀고, 이에 마르크스는 '못 가진자'의 단결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공산주의 선언>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으로 자본가들을 타파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면 참으로 노동자들의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바로 '러시아(구 소련)'와 '중국'이다. 이들의 시작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널리 퍼졌고, 세계는 요동쳤다. 그 와중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이후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이 이어졌다.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에서는 3권까지 이런 내용을 다루었고, 4권에서는 그 이후의 대한민국 현재시대에서 알파와 채사장이 다시 만나면서 '경제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카페 창업'과 맞물려서 돌아간다.

애초에 시작은 '채사장의 지식카페'로부터 비롯되었다. 채사장은 독특한 아이템으로 '지식'을 앞세운 카페테리아를 선보이며 고객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심지어 채사장만이 가진 특별한 지식인 '시간여행'까지 공개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경제지식'을 쌓은 알파가 채사장의 바로 옆에 새로운 카페를 개업하게 된다.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앞세워서 '무한 경쟁'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권의 말미에는 알파가 다급하게 채사장의 지식카페를 찾아온다. 왜냐면 새로운 카페가 개업을 했는데, 알파와 채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본'을 앞세워서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뒷이야기는 5권에서 이어지겠지만, '무한 경쟁'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윤 창출'이 목적이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뛰어들기 때문이다. 이걸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채사장은 '최소한의 상도덕'을 주장했지만, 알파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창업은 '나쁜 짓(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알파의 창업으로 인해 채사장의 이익이 줄어들었으니 손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채사장과 알파, 그밖에 '또 다른 카페들'이 창업을 이어나가면서 수많은 고객들이 몰려오는 '골목상권'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어난 고객으로 인해서 전체 수요는 더욱 커졌기 때문에 창업으로 인한 '공급과잉'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독 '특별한 카페'에만 수요가 몰리는 현상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부의 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훨씬 더 큰 문제를 낳는다. 바로 '거대 자본가의 등장'과 함께 모든 수요를 독점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사장과 알파의 카페 근처에 '새로 생긴 대형 카페의 등장'으로 인해서 알파에게까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알파는 알바생(직원)까지 해고하기에 이르는데, 이로 인한 문제도 5권에서 다룰 것이다. 물론 '해결책'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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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텅구리 - 한국 최초 신문 연재 네컷만화로 100년 전 날것의 식민지 조선을 보다
전봉관.장우리 편저, 이서준.김병준 딥러닝 기술 개발 / 더숲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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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V / 더숲 10번째 리뷰] 신문 한 켠에 '네컷만화'부터 읽는 것이 내 어린 시절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시사만화'라는 것에 어릴 적부터 눈이 뜨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것이 아니고, 그저 '만화'라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80년대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을 접하면서 '한국만화'와 일본 만화의 차이점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때만 해도 '만화책'을 읽으면 바보 취급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보곤 했지만,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시사/풍자'라는 것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남들이 읽다가 버리고 간 신문쪼가리를 형님들(재수생과 복학생)이 펼쳐 들고서 이런저런 '알은 채'를 하는 것을 귀동냥을 들으면서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세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사만화'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최초의 '네컷만화'인 <멍텅구리>(노수현)를 다시 복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읽고 싶었다. 물론 일부의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존재감'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를 읽을 수 없었으니, '그 맛'을 꼭 맛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까무룩 잊고서 문득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뽑아 들고 읽었다. 무려 800여 쪽에 달하는 묵직한 느낌만으로도 뿌듯했을 정도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니 애초의 기대만큼 충족하진 못했다. 기대감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일단 '오늘의 유머 감각'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나 어릴 적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같은 기라성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안방극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주일, 남보원,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등의 원로 희극인들에게 '유머'를 배웠던 나인데도, 최멍텅과 윤바람, 그리고 신옥매가 펼치는 1920~30년대의 배꼽 빠지는 유머 감각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이면 찰리 채플린이 전성기를 지날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최멍텅의 '멍텅구리 짓(슬랩 스틱 코미디)'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가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 웃고 싶어도 맘껏 웃을 수 없는 시기,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와 맞물려 있다보니 수많은 '인텔리(지식인)'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일제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꿈을 펼쳐낼 수 없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싶어도 '날개를 활짝 펼 공간'이 없던 암울한 시기였던 것이다. 최멍텅도 그러했다. 만석꾼의 아들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에 버금가는 능력자였다. 그런 그조차 '날개'를 펼 수 없는 시절이었는데,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했던 조선인들의 설움은 오죽하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웃을 수 없었다. 당시의 조선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설움'을 앞세우고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장면만이 상상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20년대를 지나 30년대로 접어든 <멍텅구리>의 연재 내용은 '시사풍자'라는 애초의 날카로움마저 사라져서 그야말로 '촌극(우스꽝스런 사건)'만을 쏟아낼 뿐이다. 최멍텅은 '늦깎이 학생'이 되고, 신옥매는 '꽃나라(화국)여왕'에 등극하는 꿈을 꾼다. 윤바람은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최멍텅에게 빌붙어 살고 말이다. 후반부에는 신옥매도 자취를 감추고, 최멍텅의 아들 똘똘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다 '모던 보이/걸'로 대변되는 신풍속을 보여주다. '낭만자살 열풍'을 소개하고서는 쓸쓸한 연재 마감을 하고 만다.

책을 덮고 나니, 꼭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1925년의 풍경을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단 말이다. 일제의 엄혹한 통치에 조선인들의 삶은 날로 핍박 받았고, 일상은 빠르게 무너지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네컷만화'조차 맘껏 펴내지 못하는 자유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자유의 소중함'을 그저 잊고 살고 있는 셈이다. 마치 '공기 없는 세상'에선 단 1분도 살지 못하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아주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인데 너무 낯설기만 했다.

더구나 '만화형식'인데도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복원상태'가 그리 양호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원본, 그대로' 되살리려 꽤나 노력했을 것인데, 그림체는 너무 번져보여서 '그림체'가 뭉게져 보이고, '활자'도 너무 작아(노안이 와서 그럴 수)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 옆에 '프린팅'된 글자를 읽고서 판독하려 했는데, 그 글자조차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800여 쪽이 넘는 책인데 돋보기를 쓰고 읽기에도 부담스러웠고 말이다. 여러 모로 읽기 불편해서 좀처럼 몰입하기에 힘겨웠다.

하지만 100년 전 우리의 '근대사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것만큼은 참 좋은 기회였다. 연재 시작부터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전편'을 싣고 있어서, '연재의 의도'도 함께 파악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애환'도 더불어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옛날의 '일상 생활'을 엿보는 일은 엄청 힘든 일이었는데, 친절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좋았다. 이런 특혜는 <멍텅구리> 만화만 읽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이었다. 이를 테면, 옥매가 최멍텅에게 결혼조건으로 '간장게장'과 '양담배' 등을 내건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일제가 '우리의 전통'을 없앨 목적으로 '간장게장 담그기'를 불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민물생선'을 먹고 '디스토마 질병'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어나서 내린 조치라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날것'을 음식으로 먹기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왜 유독 조선의 풍속을 금하는 일에는 그토록 열성을 보였는지, 그 의도가 뻔하다. '양담배 수입금지' 조치도 마찬가지다. 일본산 담배를 강매하기 위해서 '더 질 좋은 서양담배의 수입'을 금하고, 세금 착취가 용이한 일본담배만을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니 신옥매가 내건 결혼조건은 '완곡한(?) 거절 의사'였던 것인데, 최멍텅은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오로지 '직진'만 하면서 온갖 멍텅구리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머라는 것이 '부연설명'을 하게 되면 더는 웃기지 않은 속성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만화'가 아닌 '인문역사책'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읽고 즐기는 책이 아니라 읽으며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는 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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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1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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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둠의 괴물에게 집어 삼켜지지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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