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8 : 대륙의 탐험가 호모 사피엔스 - 어린이를 위한 호모 사피엔스 뇌과학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정재승.차유진 지음, 김현민 그림, 백두성 감수 / 아울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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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8 : 대륙의 탐험가 호모 사피엔스> 정재승, 차유진 / 백두성 / 아울북 (2024)

[My Review MMCCX / 아울북 4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아홉 번째 리뷰는 어린이 뇌과학 프로젝트를 담은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8>이다. 어린이 뇌과학을 표방한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와 세트로 구성된 어린이책인데, 이 책은 좀 더 '인류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취지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나러 간 아우린들의 모험담을 담았다. 앞선 책에서 이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만나고 이제 '호모 사피엔스'를 만났는데, 아우린들이 여러 차례 웜홀을 통해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점점 '호모 사피엔스'들이 사는 모습은 달라지고 있다. 이번에는 지구가 온통 꽁꽁 얼어버린 '빙하기'를 맞았는데, 아우린들이 발견한 호모 사피엔스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책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 보자.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8> 관점 포인트 : 인류의 발자취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누비며 살아 간다. 그러다 맞이한 '빙하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들어가게 된다. 현재의 세계지도를 봤을 때는 호모 사피엔스가 걸어서는 절대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것일까? 실제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로 들어간 호모 사피엔스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넜다는 증거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최초로 들어갈 때에는 '걸어서' 건너갔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다름 아닌 '빙하기'였기 때문이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베링 해협(베링 육교)'이 꽁꽁 얼어붙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빙하 위'를 걸어서 간 것이기 때문에 이동 당시에는 '그곳'이 바다인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2만년 전 그 추운 빙하기 때, 호모 사피엔스는 빙하로 꽁꽁 언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그건 호모 사피엔스가 사냥해서 잡아먹던 '먹잇감'들이 그쪽 길을 통해서 먼저 이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빙하기'라고 해서 지구가 온통 얼음투성이인 것은 아니다. 극지방에 가까운 곳은 빙하로 덮혔겠지만, 적도 근처에서는 여러 생물들이 살 수 있는 따뜻한 기후로 번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온대기후' 지역까지 얼음이 꽁꽁 얼어버리는 빙하기가 찾아오자 여러 동물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지구 이곳저곳으로 '대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동물들의 대이동을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도 덩달아서 대이동을 하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앞으로 '빙하기'가 절대 찾아오지 않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지구의 공전 궤도자전축이 수만 년마다 주기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빙하기'가 찾아온 것인데, 이 주기가 맞아떨어지면 지구는 다시 추운 '빙하기'를 맞이하게 될 거야.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런데 '기후위기'로 인해서 지구가 너무 빠르게 뜨거워지는 바람에 공전궤도와 자전축의 변화에 따라 찾아오는 빙하기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맞이할 수도 있고 전문가들은 경고를 한다. 올겨울도 2~3주 동안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긴 추위가 닥쳤다. 극지방에 머물고 있어야 할 '한기'를 내려오지 못하게 막아주던 '제트기류'가 약해졌기 때문이라는데, 이렇게 제트기류가 약해진 원인이 바로 '바닷물 온도'가 너무 뜨거워졌기 때문이란다. 그로 인해서 생기는 기후변화가 극심해져서 맞이한 결과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없고, '인간 활동'에 의해서 발생한 변화이기 때문에 아주 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구의 기온은 원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애초에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축이 변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기는 '기후변화'가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기후 변화'는 완전 다르다. 자연스런 기후 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속도로 '온도'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생태계'가 변화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멸종하고 있는 것이 아주 우려스러운 현실이다. 물론 호모 사피엔스 때문에 멸종된 동식물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 당시엔 과학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사냥을 한 것이기 때문에 '무분별한 포획과 남획 문제'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더구나 오늘날의 현생 인류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멸종되는 동식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인류는 변화된 기후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연에 살고 있는 생물종은 '급격한 기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생태계가 망가지면 결국 인류도 살아남기 힘든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나가는 글 : 한편, 한반도에도 '호모 사피엔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한반도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구석기인)의 흔적이다. 물론 이들이 '우리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류의 발자취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빙하기' 무렵에 살았던 한반도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육지로 이어진 아시아 대륙이 한반도와 일본열도까지 쭈욱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의 서해(황해) 바다와 남해 바다는 훨씬 남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동해 바다는 '내륙의 커다란 호수' 형태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는 먹잇감을 따라서 대이동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반도에 살던 '한국인의 조상'은 언제 왔을까? 아마도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에 살던 '신석기인'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들은 구석인들과는 달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움집을 짓고 토기를 빗으며 농사도 짓던 '정착 생활'을 했으니까 말이다.

이 책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서 인류의 발자취와 기원을 찾아나선 아우린들의 모험을 핵심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때문에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역사책'에 나온 지식과 더불어 이 책을 함께 읽으면 더 넓은 배경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과목과 과목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통째로 배우는 교과통합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책속의 배경지식을 '따로 국밥'처럼 나누지 말고 한데 엮어서 '융합'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AI 시대가 펼쳐지면 이런 현상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인공지능 AI조차 '문과 AI'와 '이과 AI'로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상식'으로 모든 것을 통섭적인 지식으로 간직하고 언제든 필요할 때 꺼내서 활용하는 자세로 학습해야 할 것이다. 뭔가 더 복잡할 것 같으면 그냥 다양한 지식을 쓸어담기라도 해야 한다. '정리'는 나중에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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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2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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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2>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IX / 문학동네 2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여덟 번째 리뷰는 기상천외한 해석을 보여준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2>다. 앞서 1권 리뷰에서 애초에 '정본'이 없는 <삼국지>에서 '신선한 해석'보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2권에서도 그러한 신선함은 여전히 돋보이며 이런 '해석'을 70년대'에 이미 해노았다는 기발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고우영 화백은 천재가 분명하다. 그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에도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비평을 담아낼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진정 용감한 분이기도 했다. 그럼 2권 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2> 관점 포인트 : 먼저 차례를 살펴보면, 4장 '늑대 여포와 돼지 동탁', 5장 '미녀 초선과 트라이앵글', 그리고 6장 '파란만장한 간웅 조조'다. <삼국지>를 좀 읽어보신 독자라면, 이쯤해서 주된 줄거리는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낙향하며 '여백사 살인 사건'을 일으킨 사건으로 시작해서 사도 왕윤이 자신이 아끼던 '초선'을 앞세워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는 '연환계(일명 '미인계')'를 써서 동탁 암살에 성공한 사건까지 이어지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여기서는 아쉽게도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인 '장비'의 서민적인 영웅담을 엿볼 수 없었다. 6장에서 조조의 아비가 서주 도겸을 만난 뒤에 황건적의 잔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조조가 도겸을 토벌하려는 과정에서 '유관장 삼형제'가 잠시 등장하는 것뿐이기에 그렇다.

암튼, 2권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2가지인데, 하나는 '여백사 일가족'을 몰살시킨 조조가 거병에 성공하여 진류땅에 정착하지만, '여백사의 저주(?)'로 인해서 조조의 아비도 허무하게 도륙 당한다는 업보(카르마)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 하나는 초선이 제 한 목숨을 내놓고서 벌이는 '연환계(이간질)'로 인해 동탁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 평범한 스토리라인일 뿐인데, 그럼 뭐가 '천재적 발상'이고 '날카로운 비평'이란 말인가?

그건 다름 아닌 '조조'를 진정한 악인으로 만들어놓은 '여백사 일가족 살해' 사건을 조조의 아비가 '황건적 잔당에 의한 도륙'으로 연결하는 스토리라인을 짰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권선징악적 결말'에 해당하는 우리식 도덕윤리의 결정판을 <삼국지> 속에도 오롯이 담아 놓은 것이다. 즉,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을 고전 중의 고전인 <삼국지>에도 담아 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 고전속에서는 '권선징악'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모략'이라고 해서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과 날조만이 난무할 따름이다. 그속에서 우리가 건질 교훈 따위는 '사람 쉽게 믿지 마라'는 것뿐이다. 이는 오직 '힘의 논리'만을 강조할 뿐이다. 힘쎈 이는 남을 속일 필요도 없고 '정정당당(?)'하게 밀어붙이면 저절로 얻게 되지만, 힘이 약하면 '지혜'를 써서, 다시 말해, 상대를 속여서 이익을 얻어내면 그뿐이라는 '경제적인 동물적 본성'만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 도덕적인 행동만 일삼아야 한다는 교훈 따위는 일절 없는 셈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중국 고전 <삼국지>에 권선징악이라는 코드를 심어두었다. 조조의 아비가 속절없이 도륙을 당한 것은 '조조'가 악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이다. 여느 <삼국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인 셈이다.

한편, 사도 왕윤과 초선이 꾸민 연환계에 걸려든 동탁과 여포는 속설없이 계략에 당하고 만다. 하지만 연환계의 핵심은 '알고도 당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동탁과 여포는 어찌하여 계략인 걸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건 다름 아닌 '초선의 미모'가 너무도 예뻤기 때문이다. 사실 '초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나관중이 살던 시기 이전부터 널리 퍼진 이야기속 미녀인 '초선'을 <삼국지연의> 속에 슬쩍 끼어넣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명대 이후에는 <삼국지> 속의 미녀는 으레 '초선'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럼 고우영은 초선을 어떻게 <삼국지> 속에 살려냈을까? 사실 한 여자를 두 남자에게 던져주고 서로 질투와 시기를 벌이게 만드는 '삼각관계'는 너무 흔한 스토리일 것이다. 그렇게나 식상한 이야기인데도 늘상 이런 이야기에 솔깃한 까닭은 바로 '여자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예뻤길래 알고도 속았느냐는 것이다. 그걸 고우영 화백이 '에로티시즘'으로 아주 그냥 녹진녹진 녹여버린 셈이다. 사실 여포가 아무리 바보라도 '(양)아들의 혼례를 주선하기 위해서 며느리 될 여자를 데려다가 한 달이 넘도록 감춰두고 있다'는 사실 앞에 속아넘어갈 순딩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포는 동탁 앞에서 '호위무사' 행세를 하며 '초선'을 바라보기만 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그쯤 되면 여포도 '여자 한 명'을 포기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우영 화백은 그럴 때마다 '초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여포의 마음에 불꽃을 활활 태우게 만든다. 한마디로 "너무나도 원통해요. 나 초선은 여포의 여자인데, 돼지같은 동탁에게 몸을 망치고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는 메시지를 얼굴 표정, 손짓 한 번으로 여포에게 전한 것이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여포가 이런 초선을 두고서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한 달음에 방천화극을 꼬나쥐고 동탁을 죽이고도 남았으리라. 이걸 곁에서 눈치챈 동탁의 사위 '이유'가 큰일 나겠다싶어서 동탁에게 옛 고사를 일러주면서까지 코칭을 하며 동탁에게 '여자 한 명 vs 온 천하'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조언하게 된다. 동탁도 멍청이가 아닌지라 '초선'을 여포에게 주고 자신은 '천하'를 취할 것이라 다짐을 하지만, 초선은 그 사실을 알고나자 '열녀 행세'를 하며 동탁 앞에서 자결을 하는 쇼를 펼친다. 늙은 남자는 자신이 젊은 육체를 만족(?)시켜 줄 수 없음을 서글퍼하며 놓아주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젊은 육체가 늙은 자신이 아니면 앙댄다고 앙탈을 부리며 달겨들면 늙은 남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젊은 육체' 하나만을 빼앗기지 않으려 드는 것이 '필연적'이다. 동탁이 딱 그짝이었던 것이다. 이걸 고우영 화백이 너무나 잘 그렸다. 속된 말로 '심금'을 울린 셈인데, 정말이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화끈하고 가슴 방망이가 두근세근 뛰면서 "나 아직 안 죽었어요"라는 빵빠레를 울릴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천재적인 발상'은 초선이란 여인이 행한 애국적인 공로가 어떻게 가능했냐는 궁극적인 물음에 해답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막 열여섯 살 먹은 어린 여자가 '나라사랑'이 무엇이며, 국가 공직의 자리에 올랐던 적도 없는데 '한 황실'에 충성을 다 바쳐 역적 처단에 앞장 서겠냐는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 같은 '왕윤의 부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인생'이 망가지는 것인데, 그게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우영 화백은 이 원천적인 힘을 '초선의 첫사랑'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니 쉽게 거절할 수도 없었고 아무리 큰 고통이 따른다해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랑의 힘이다. 그렇지만 '왕윤과 초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어떤 이는 초선이 '왕윤의 친딸'이라고도 하고, '왕윤의 수양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초선은 왕윤에게 '딸 같은 존재'였기에 둘 사이의 애뜻한 마음은 있을지언정 '현실적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런데 사도 왕윤은 나라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열여섯 살 초선은 연인의 고충에 자기 마음도 심란해졌다. 그런데 연인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바로 '미인계'를 써서 동탁을 암살하는데 성공하면 왕윤의 큰 고심이 해결될 수 있단다. 이걸 어찌 안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왕윤과 초선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동탁 암살 이후 '왕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사실 동탁이 제거되더라도 '정국 안정'을 위해서 천자를 안정적으로 옹립하고, 세력을 길러 주위를 태평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왕윤은 동탁 암살 이후 '급발진'을 하면서 동탁의 잔당을 척결하는데 앞장선다. 바로 '이각과 곽사' 등을 포섭하지 않고 처단하는데 열을 올린 것이다. 물론 충성심에 그럴 수는 있겠지만, 당장 '군사적 힘'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수로 역적 토벌에 나선단 말인가? 그 결과 이각과 곽사가 천자를 손쉽게 탈취(?)했고, 왕윤은 그 자리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 똑똑하던 왕윤의 마지막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왕윤이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한 까닭을 다름 아닌 '사랑하는 여인, 초선의 죽음'에서 찾으면 답이 되지 않을까?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이게 너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정말이지 기발한 발상이다.

나가는 글 : 오늘날의 독자들이 보기에는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스토리'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원작'은 고우영 화백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1978년 작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이문열 평역 삼국지>도 고우영 화백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받았고, 영향을 받아 탄생한 셈이다. 그렇기에 <고우영 삼국지>도 필독서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하다.

다만,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들에게 권장하기가 민망하다. 에로틱한 대목이 많이 연출되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그림체'가 직설적으로 야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그런데 이게 더 야하다. 사실 '야함'이라는 것이 대놓고 벗기고 드러내는 것보다 '보일 듯이 안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에로틱하기 때문이다. 이걸 전문용어로 '감칠맛(!)'이라고 하는데, 미각 중에서도 단맛, 쓴맛, 신맛, 짠맛보다 훨씬 입안에서 황홀한 느낌을 주는 맛이 '감칠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조차 '다섯 번째 맛'으로 감칠맛을 정식 등록해야 한다고..쿨럭쿨럭.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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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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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마을 23]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이양수 / 김영사 (2007)

[My Review MMCCVIII / 김영사 3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일곱 번째 리뷰는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탐구한 철학자 <롤스 & 매킨타이어>다. 세상은 완전하게 불공평하지만 '불평등'은 참을 수 없었던 두 철학자가 공평한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원칙을 두고 뜨거운 논쟁을 펼친 내용이 담겼다. 그렇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완벽히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원칙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 불가능에 도전한 두 철학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맛이 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롤스 & 매킨타이어> 관점 포인트 :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철길 위에 사람을 놓아두고 몇 명을 죽여야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밴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대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리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죽지 않는 선택'을 고르는 일이다. 그러나 달리는 열차를 멈추거나 날아오르게 할 수 없다면 1명을 죽이거나 20명을 죽이는 두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 모두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의롭지 못한 상황조차도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정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뭔가 원칙을 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 1명이 죽든 20명이 죽든 '운명의 주사위'에 맞겨 놓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방법이라고 우길 수 있다면 그래도 좋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 '정의 원칙'을 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에 그런 '정의 원칙'이 무색하리만치 '각자 도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를 위한 희생을 '평가절하'하고 어리숙한 사람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단 말이다. 말이라도 그런 위대한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미덕이 사라지고 철저히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정의'인냥 살고 있단 말이다. 그러다 불행이 찾아와 주위의 도움을 청하지만 도와주는 이도 없다. 온세상이 '복불복'이 된 세상 같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정의론' 같은 허무한 논쟁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정의가 무너진 세상을 살고 있으니 진정 행복한가 되묻고 싶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무심한 사람들에겐 '정의'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일테다.

그런데 새삼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전세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 이야기다. 우리가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공동체주의'다.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말이다. 힘의 논리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세계가 요동을 치며 '힘의 판도'를 예측하지 못해 모두가 불확실성에 빠져 불안해 하는 요즘, 예측 가능하고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부쩍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걸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도 얼마나 치열하게 '각자 도생'하며 살아가는 무한경쟁 속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외국의 현실을 살펴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른바 초강대국이라 일컫는 '미국'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트럼프가 내세운 정책들이 도리어 평범한 미국인의 삶을 소용돌이 치게 만들었느냔 말이다. 유럽은 또 어떤가? 제국주의 시절에 싸아놓은 부와 명성으로 그동안 떵떵거리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 약발(?)이 다 떨어져서 경제가 휘청거리고 정치가 안정을 찾지 못하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까지도 마찬가지고, 인도, 브라질 등을 비롯해서 중진국을 넘어 새롭게 위상을 세우려 했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죄다 휘청거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단적으로 이들 나라의 '공동체주의'가 어떤가 보라. 애초에 도덕과 윤리가 명함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강대국이자 선진국이라 불리던 나라들도 이 모양인데, 그 뒤를 쫓던 나라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헌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새삼 '공동체주의'가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스럽기 짝이 없던 일면이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비상계엄'이란 위기를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온 국민이 깨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각자 도생만이 유일한 해법인줄 알았다가 '공동체'를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정의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우리가 살 길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도 확실히 제시해준 셈이다. '정의'를 바로 잡지 않으면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르게 될지 말이다.

나가는 글 : 뜬금 없이 '대한민국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다름 아니다. 이 책이 쓰여진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자유무역협정' 따위가 우리가 논할 수 있는 사회 정의에 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니 '그때의 선택'이 어떻게 결정되었어야 정의로웠던 것인지 그 당시의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때 그때의 정의'는 사실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골머리 썩게 만드는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나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더 건전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정책이나 법 제도라도 '악용'하고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면 몇몇 소수의 이익만을 보장할 뿐이고, 더 큰 공동체를 위기로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어떤 제도를 '선택'하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최대한 살려내어서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이 더 핵심적이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점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을 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지만.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런 롤스의 견해를 회의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심지어 매킨타이어 같은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롤스의 <정의론>은 무한한 도덕적, 윤리적 사상이 밑바탕이 되어야 겨우 실현가능한 '원초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정의실현의 가능성'조차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스가 옳았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고, 정의 구현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와서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도덕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때 우리는 도덕은 누구나 당연히 지키는 선(善)이니, 경제적 풍요만 이룰 수 있다는 행복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경제성장'은 허울 좋은 숫자(통계) 조작에 불과했고,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인해 빈부격차는 심각해졌으며, 도덕은 땅에 떨어져서 모두가 행복해야 할 '공동체주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게 되었나? 정의는 사라졌고, 불공평은 심화되었고, 불평등은 일상이 되었다. 그때 '법치주의'가 살아야 정의를 살릴 수 있다며 야당 대표를 '악마화'하고 사법 정의를 '정적 제거'로 활용한 결과 어떻게 되었나? 정치는 실종되었고 몰염치가 일상이 되었으며 국민은 '갈라치기'를 당해서 심각한 사회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런 사회혼란을 일거에 불식시킨 사건은 '일 잘하는 머슴(대통령)'을 뽑은 결과였다.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새 제도'를 신설한 것이 아닌 '기존의 법제도를 준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엄정하고 공평하게 시행했을 뿐'인데, 마치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그 까닭은 바로 '도덕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똑같은 법 제도인데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하니 '정의'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롤스가 말했던 '원초적 입장'이 실현된 것이다. 거기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기존의 정책과 제도를 활용하니 누가 이익을 보든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무지의 베일'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다. 권력자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서 꼼수를 부리지 않고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대원칙'을 세우고 실행하니 공평한 결과를 얻게 된 셈이다.

롤스는 누구나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면 정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이득을 챙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국가정책이 이런 대원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제무역에서도 이런 원칙이 지켜진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정의는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말에 '지구촌'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니 거대한 지구도 '마을'쯤으로 느껴졌기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뿐인 지구를 더 사랑하자'는 뜻도 있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위해 인류가 행해야 할 단 한가지는 바로 '정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주의'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할 수 있는 도덕적 마음가짐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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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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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VII / 문학동네 2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여섯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만화 삼국지' 가운데 최고봉을 자랑하는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이다. 나는 고우영 화백이 2005년에 별세하셨을 때, 화백의 유작들을 탐독했었는데, 벌써 20년이 훌쩍 흘렀다. 그런 의미로 해마다 연초가 되면 늘상 읽던 <삼국지>였기에 올해는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부터 다시 읽어볼 작정이다. 새삼 다시 읽으니 예전에 읽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다가왔다. 1978년에 신문에 연재를 시작했다지만 당시에 유년 시절을 보내던 내가 읽었더라도 뭔 내용인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90년대에 들어서 '단행본'이 나왔기에 틈틈이 보다가 새천년이 넘어서 결국 화백께서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었다. 당시엔 만화책 사볼 돈도 궁하던 시절이었고, 한창 먹고 사는데 바쁘다보니 책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5년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을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던 즈음에 화백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고우영 화백의 만화책은 좀 유별나게 다가온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관점 포인트 :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올컬러 만화'는 참 드물었다. 거의 대부분 '흑백 만화'였고, <소년 챔프>나 <아이큐 점프> 같은 '주간 만화잡지'의 표지나 일러스트 정도가 컬러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참 대한민국 최초의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을 잊을 뻔 했다. 한 권에 500원이나 하던 ㅎㅎ. 암튼 <고우영 삼국지>도 처음엔 흑백으로 먼저 접했다. 그런데 역시 만화는 '컬러판'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한 눈에 싹 들어오고 '손글씨'가 아닌 '서체'로 프린팅이 되어 '가독성'도 대단히 높아졌다. 특히나 고우영 화백의 손글씨는 깨알같기로 유명해서 읽을 때 애를 먹기 일쑤였다. 암튼 흑백판이 아닌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한 올컬러판이 훨씬 좋다는 점을 밝힌다.

암튼 <삼국지>는 '정본'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늘날에는 나관중이 직접 쓴 판본이 전해지지도 않으며, 굳이 '원본'이니, '정사'니, '완역본'이니 따지며 읽을 필요도 없다. 왜냐면 아무 것이나 읽고 즐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으려면 '10권의 분량'이라는 압박감에 수많은 <삼국지> 가운데 하나만 골라서 읽어보려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팁을 줄 수 있다. 대한민국 정치색이 '보수 성향'이라면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권하고, '진보 성향'이라면 <황석영 정역 삼국지>를 권한다. 또한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원전 완역판>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신판이자 완성도를 추구한다면 <박상률 완역 삼국지>를 추천한다. 이 넷 중에 하나만 골라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삼국지>의 원전격은 다름 아닌 <고우영 삼국지>가 되겠다. 실제로 읽어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고우영 삼국지>를 읽다보면 '이문열'을 읽는 느낌도 나고, '황석영'을 읽는 느낌도 나며, '요시카와 에이지'를 읽는 듯 하면서도, '박상률'의 신작을 읽는 느낌도 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면 <삼국지>를 읽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해석'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삼국지>가 가장 먼저 출간했지만, 이조차 '중국 판본의 삼국지'를 일본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소설이다. 그걸 참고 삼아 한국의 고우영 화백이 '한국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을 가미했고, 그걸 바탕으로 '이문열 평역', '황석영 정역', '박상률 완역'의 순서로 펴냈다. 물론 각각 '저본'으로 삼은 책들은 다르지만 역시나 <삼국지>는 '해석'이 묘미인 셈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 독자라면 '재미'를 추구하기 마련이고, <삼국지>의 재미는 색다른 해석이 가미되어야 읽을 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색다른 해석의 재미를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판본은 역시나 <고우영 삼국지>를 꼽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 고우영 화백이 얼마나 촌철살인의 해석을 가미했던지, 연재 당시에 군부독재정부의 '검열'에 원본이 누더기가 될 정도였다. 검열 기준은 첫째, 야하면 안 되고, 둘째, 사회비판은 허용 안 되며, 셋째, 욕설이나 비속어도 불허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고우영 삼국지>는 80년대 기준으로 충분히 에로틱 했고, 독재정부 비판의식이 가득했으며, 사회적으로 억압된 불만욕구의 분출을 하기 위해 속시원한 욕설과 비속어 등을 마구 사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본다면 전혀 에로틱하지도 않고, 군부독재를 겨냥한 비난이 맞나 싶고, 욕설이라기보다는 어느 지역의 구수한 사투리를 적어놓은 듯 싶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언뜻 눈에 띄지 않지만, 당시를 살아본 독자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수위조절 실패'였기 때문에 검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현재는 '무삭제판'으로 그 모든 풍자와 해학을 다 엿볼 수 있다. 이런 풍자와 해학에 대한 내용은 후속편에서 좀더 심층적으로 다뤄보겠다.

나가는 글 :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의 차례는 1장 '황건당 (Yellow Club)', 2장 '도원결의', 3장 '십상시의 난과 네로 동탁'이다. 흔한 <삼국지> 스토리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만의 특색은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삼국지>에서는 이 대목에서 주인공으로 다름 아닌 '유비 현덕'을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어지러운 난세에 영웅이 탄생했는데, 그 이름이 유비이고, 그는 중산정왕의 후예로 무너져가는 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불세출의 영웅이 납시니 모두가 주목하시라...라면서 일장 연설조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가는데 반해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단연 '연인 장비'가 주인공이다. 황건당이 등장하기 이전에 '장비'가 돼지고기를 팔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도원결의를 맺기 위해 '장비'가 유비를 찾아나서며 질질 끌고가다시피 한다. 십상시의 난으로 어지러운 형국에서 탁현 누상촌에서 모병을 한 뒤에 거병을 주도한 것도 '장비'가 되겠다.

그럼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왜 유비가 아니라 '장비'를 주역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삼국지'를 서민 중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황건당이 왜 일어나게 되었단 말인가? 백성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도적떼가 되어 난리가 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는 그런 백성들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하게도 '온갖 영웅들'을 등장시켜 영웅들의 활극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그렇지 않다. 시종일관 못 먹고 못 살겠다고 고충을 토로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풀어낸다. 그리고 이런 빈곤한 백성들의 고충을 제대로 들어주는 이를 '진정한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그렇지 못한 영웅들은 '난세의 간웅'으로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이런 구도로 읽으면 <삼국지>에서 왜 유비가 진정한 영웅이고, 조조가 난세의 간웅인지 여실히 증명이 되지 않느냔 말이다. 이게 정말 '신의 한 수'다. <고우영 삼국지>를 읽는 맛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식이기에 '고달픈 백성들'을 위한 행보를 걷지 않은 여러 군웅들은 뛰어난 능력을 갖췄어도 한낱 필부이거나 악당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황건당의 장각이 그렇고, 치세의 능신으로 평가받는 조조도 그렇고, 4대에 걸쳐 재상을 누렸던 원소도 그렇고, 혼세에 대담한 능력을 발휘한 손견도, 이리 같은 야욕만 가득한 동탁도, 의리도 없이 배신만 일삼는 여포도,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권력과 금은보화에만 관심이 쏟던 십상시와 하진 남매, 수많은 고관대작들, 심지어 영제, 소제, 헌제까지 죄다 무능한 필부이거나 악질적인 악당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딱 하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저 몸을 일으켰으니 대단한 영웅일 수밖에 없다는 아주 명약관화하고 이해하기 쉬운 플롯 전개가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삼국지>에서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참맛이다. 그 덕분에 여타의 <삼국지>에서는 이놈도 영웅 같고, 저놈도 영웅 같고,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으로 읽히고 만다. 앞서 말한 악당과 영웅의 경계가 분명해야 <삼국지>를 읽는 진정한 맛이 날텐데 여타의 <삼국지> 등은 이런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난세의 영웅들의 모험담'에만 치중한 셈이라 읽다보면 어느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독자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 까닭으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가난한 서민들의 말과 행동을 '대변'하는 인물로 장비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이 책에서 '장비의 말과 행동'은 다름 아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목소리이고 사회비판을 하는 핵심 포인트다. 이걸 놓치지 않는다면 <고우영 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될 것이다. 2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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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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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 인문과사상사 (2008)

[My Review MMCCVI / 인물과사상사 3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네 번째 리뷰는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다. 시대흐름상 1920년대 일제식민 치하의 상황이 펼쳐져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시대 구분법에 따라 일제의 '문화통치기'에 해당하는 시점인데, 1919년 3·1운동이 폭발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등 강렬한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그것인데, 그것 말고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맹활약을 하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 가운데 7권에서 주목한 것은 '사회주의의 열풍'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간 '분단된 현실'을 감안해서 사회주의 운동은 '공산주의'와 함께 싸잡아서 무시한 덕분에 한동안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이름 석자를 감추려 했고, 윤석열 독재정권 때는 '홍범도 장군의 동상'마저 철거하려 들었겠는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사회주의 배척현상이 아주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관점 포인트 : 1920년대 일제는 소위 '문화통치'를 실시했다. 그동안 조선인들을 향해 '무단통치'를 일삼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발가벗겨 쇠좃매로 피떡이 되도록 치욕을 주던 일본인들은 이제 조선인들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로 열어주었고, '취업의 길'도 열어주었으며, '농지개혁' 따위를 통해 조선에서의 곡물생산량 증대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조선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었다지만 '돈 많은 일본인 학생'들에게만 편중된 교육을 실시하였고,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매달 '월사금'을 내지 못해 담임선생에게 매를 맞고 학급생들에게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싫으면 자퇴를 해야 했고 말이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서당'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교육을 하려 했지만, 일제는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조선인의 문맹률은 무려 80%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전국의 학교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조선인 학생이었다. 최악의 교육환경이었지만 그 속에서 꽃 피운 아름다운 결실이긴 했지만, 이들 우수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도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와 유혹에 넘어가 '친일의 길'을 걸은 지식인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은 점점 더 삶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살아날 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전세계는 '소련의 탄생'과 '사회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조선민중들도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 그렇다고 일시에 조선민중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제국주의(군국주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공산주의'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격한 공산주의보다는 온건한(?) 사회주의 열풍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사회주의란 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를 말한다. 저 혼자 잘나고 잘먹고 잘사는 것을 배격하고, 모두가 고르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고 싶었기에 사회주의는 하나의 '사상(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기보다 '처세의 상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몇몇 소수만 잘먹고 잘사는 세상보다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데 그걸 마다할 '가난한 민중들'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 좋은 '사회주의'를 마다하는 이가 있다면 정말 욕심꾸러기일 수밖에 없으니, 그런 욕심꾸러기를 혼쭐 내주는 것은 '상식'이라면서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민중들은 '계급 투쟁'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가(부르주아)'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영원한 투쟁의 역사의 현장을 몸소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조선민중들은 일제를 향해 '노농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원산총파업' 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일제의 탄압으로 파업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시작으로 더욱 가열차게 활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광주학생운동은 '민족의 단결'을 부르짓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학생들간의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졌다'고 평가절하하는 이들은 매국노로 찍힐 정도로 민족감정은 들끓었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가해자인 일본학생들은 처벌하지 않고 조선학생만 강력한 처벌을 하자 이에 불만을 표출한 조선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부당함을 소리 높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별다른 철회조치를 하지 않자 전국 194개 학교에서 학생 54,000여 명이 시위를 이어 나갔다. 학생운동이 '항일운동'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일제시대 3대 운동으로 3·1운동,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을 꼽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열차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우발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26년 11월 3일에 결성한 '성진회'라는 학생 비밀결사가 이미 조성되었고, 이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항일운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처우를 부당하게 일삼자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으로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이렇게 가난하고 못사는 것도 억울한데 사사건건 공평치 못하고 부당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조선민중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3·1운동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독립투쟁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무장독립 투쟁'이 쉽지 않게 되자 조선민중들은 '계급 투쟁'과 '노농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더구나 사회 곳곳에서 '조선인 차별 정책'이 개선되기는커녕 점차 심화되는 현실을 깨닫고 '민족적 투쟁의식'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일제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 '세계정복의 야욕'은 더욱 키워나갔고, 그 결과로 중국내 영토를 침략하며 급기야 만주와 몽골를 넘어 중국 대륙 전체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벌어지던 조선민중들의 투쟁은 일제의 강렬한 탄압과 수탈로 짓밟히고 있었다. 일제의 '야만성'은 간토대학살로도 잘 드러난다. 일본 관동지방을 휩쓴 대지진으로 대혼란이 일고 수습이 쉽지 않을 것 같자 '일본정부'는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바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와 강도, 심지어 부녀자 강간을 일삼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에 성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색출해서 학살했다. 무려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조선인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쥬엔고쥬세엔(10엔 50전)"을 발음해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만 발음할 수 있다는 'ㅈ'과 'ㅊ'의 중간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선인만 죽은 것이 아니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과 몽골인 등도 죽었고, 일부 장애가 있는 일본인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여버렸다고 물타기(?)를 하며 조선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희생자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만큼 일본 정부의 책임을 강력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간토대학살'로 인한 중국과 몽골의 진상조사와 사죄, 그리고 배상까지 일본정부는 일사천리로 해결했는데 반해, 대한민국은 이에 대한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물론 의식 있는 '일본지식인들'이 일본정부에 진정서를 내고 문제의 해결을 신속히 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최대 희생자를 낸 대한민국 당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어 미적지근하다고 한다. 심지어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상당수가 '간토대지진'으로 인하 발생한 '대학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게 그냥 덮힐 사안인가? 한일간의 대결이 벌어지면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반일정서가 팽배한 대한민국에서 왜 이러는 것일까?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거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고 넘어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착착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과거의 문제도 척척 해결해나가면서 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약소국'을 면치 못했기에 온갖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으며 넘겨야만 했다. 허나 이제 강대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고 감히 대한민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날이 온 것 같지 않은가. 나는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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