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 반 룬 전집 2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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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는 도덕적인 명제나 행동의 원칙을 인간이 아닌 동식물에 빗대어서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를 말한다. 그래서 우화속에는 유머가 담겨 있고, 교훈을 알아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 '코끼리'가 코끼리로 남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는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황새들이 인간 아기를 날라다주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감소하는 인간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동물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는 코끼리들이 점점 줄어드는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그래서 코끼리는 '인간세상'을 먼저 경험해보기로 결정한다. 그러고 나서 '인간'이 되기로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한 코끼리가 용감하게 뉴욕으로 떠난다. 그곳이 인간세상 가운데 가장 번화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라고, 결론은 '코끼리'는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코끼리로 남기로 했다. 그건 '인간세상'에서 겪은 일들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인간도 '동물'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인간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른 동물들은 감히 인간세상에 적응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정녕 '무엇'이 인간과 동물을 다르게 만든 것일까?

  인간이 '문명'이란 것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물과는 별개로 살아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문명은 오직 '인간'만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인간들은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잃어버렸다. 문명이 점점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동물들은 서식지를 잃고 떠나야만 했다. '그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들은 끝내 멸종되고 말이다. 그래도 인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직 '문명'이 유지되고 번영하는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그렇다고 '문명'에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긴 것은 아니다. 인간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환경오염'을 시켰고, 맘놓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확보되지도 않았으며, 착하게 살기보다는 못된 짓만 골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욕심' 때문이었다. 남을 위하는 마음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 앞에 설 자리를 잃고 내쫓긴 지 오래 되었다. 그렇게 무법천지로 만들고서도 인간들은 '귀찮은 일'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뉴욕에 간 코끼리도 불운한 사건에 휘말렸던 것이다. 그 불운한 일을 겪고도 코끼리가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은 몰인정한 인간사회에서도 '착한 마음'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에 살아가는 '착한 동물들'이 먼저 도움을 주었지만 말이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인간사회'에도 아직 따뜻한 온정이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더 많기에 결국 '인간사회'는 멸종해 버릴 것이라는 게 이 '짧은 우화'의 주제다.

  도대체 인류 문명은 언제부터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왜 인간은 다른 동식물처럼 '한 곳'에서 나고 자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까지' 정복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게 된 것일까? 더구나 씀씀이는 너무나 헤퍼졌다. 지구의 자원으로도 모자라 '지구밖의 자원'을 탐내서 굳이 지구로 가져와 쓰려고 혈안이 될 지경으로 '욕심'이 그득하다. 핑계는 참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구인들의 삶'이 평안하고 윤택해질 것이란다. 그럼 지구에 사는 '다른 동식물들의 삶'도 그러할까? 인간이 확장해온 '문명' 아래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도 모두 평안하고 윤택한 삶을 '더불어'서 살 수 있을까? 답은 너무도 뻔해서 답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일 것이다. 정답이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이 '도덕적인 삶'을 말하면 위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문명'이란 것도 인간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해코지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국에 '도덕'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 책을 쓴 '반 룬'은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살다 1944년에 6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이 쓰여진 때는 20세기 초반이었을 것이다. 무려 10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다. 그때 쓰여진 책인데도 '인간세상'은 살기에 썩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긴 100여 년전이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때였으니, 인간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만행을 경험한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특히 '백인'에 대한 우월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는데도 '하얀 인간'이 쓴 책치고 꽤나 진보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대표작이 <인류이야기 (전3권)>라니 조만간 다시 읽어보아야 겠다. 십 몇년 전에 휘뚜루마뚜루 읽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말이다. 전반적인 느낌을 다시 정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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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 무기여 잘 있거라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이연호 글, 백문호 그림, 손영운 기획,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 / 채우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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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싸워서 승리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 때문만이 아니라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기면 '착한 영웅'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승리한 쪽이 언제나 선하고, 패배한 쪽은 늘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할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쟁을 참 좋아한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고인물이 썩듯' 장기집권의 야욕을 탐하는 순간부터 권력자는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감언이설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고 오직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요행수로 전쟁을 이용할 따름이다.

 

  하지만 전쟁의 끝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오직 '파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승리한 쪽도 수많은 희생자과 파괴된 터전만 남을 뿐이고, 패배한 쪽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오래도록 남긴다. 전쟁 영웅이라고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영웅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테고 더욱더 처참한 고통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터라 제정신을 차릴 새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영웅'을 추켜세우고,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는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런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도록 방치하고 만다. 왜? '애국자'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을 한 위대한 인물이며, 사악한 적들을 초토화시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낸 위인이라 칭송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적보다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며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분이 철옹성같이 안전하기 이를데 없는 '지하벙커'에 꽁꽁 숨어서 수많은 군장병들을 살벌한 전장터로 내보내 죽어나가는 보고를 받고도, 또 공격명령을 서슴없이 내리는 무자비한 권력가로 활약할 뿐이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전쟁영웅은 '살인자'를 뛰어넘는 '살육자'이며, 전쟁광일 뿐인 이들에게 절대로 권력을 쥐어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의 단순한 머리로는 '평화'란 자신의 독재에 대한 복종일 따름이고, 자신이 독재자가 되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영광스런 전쟁'을 통해 권력을 오래오래 이러나갈 생각뿐인 존재들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각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보면 어김없다. 냉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내전'의 양상들을 살펴봐도 꼭 맞아 떨어질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장에 참전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저마다 자신의 조국이 가장 강하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은 전쟁에 뛰어들었고, 각 나라들은 발달된 무기로 인해 수많은 군인들이 전장터의 이슬로 사라지는 충격속에서도 결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장터의 빈곳으로 '보충병'들을 기차로, 택시로, 심지어 걸어서라도 보급하는데만 골머리를 썩혔을 뿐이다. 후방에 남겨진 사람들도 언제든 기회만을 엿보면서 '참전'을 하려했고, 지리한 전투가 이어지며 교착상태에 빠져 '무의미한 돌격'만을 감행하는 무모한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시체들이 쓰러져 넘어진 '똑같은' 그곳에 쓰러져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달라졌을까? 달라진 것은 '대량살상무기'의 가공할 위력뿐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양상은 똑같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20살의 젊은 헤밍웨이는 '전쟁영웅'이 되고자 참전을 희망했고,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어찌어찌 고집을 피워 '구급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전장터에서 포탄의 피격을 받고 부상을 당한 뒤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게 되었고, 그 참혹함을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녹여내었다. 정녕 '전쟁'이 무엇이길래 수많은 젊은이들을 참전하게 만들고, 거기서 무슨 일을 당했길래 정반대의 '반전'을 외치게 된 걸까? 헤밍웨이는 무려 다섯 번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는 소설에 그런 경험을 제대로 살려내 '허무주의' 가득한 현대의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바로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거야!'였다.

 

  하긴 권력을 탐한 야심가들은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자'로 변신을 하여 한몫 단단히 챙겼지만, 그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사람을 죽인 경험, 부상을 당해 평생 불구가 된 경험, 그리고 숱한 씻지 못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안고 돌아와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험 따위를 생생하게 전해듣고서, 결국 '전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회의감은 곧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만들면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누리며 살길 바라는 나약한 존재로 만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이 그런 '허무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자발적인 참전으로 '영웅적인 부상'을 당한 주인공이 훈장까지 수여하며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지만,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결국 패배의 불명예를 안고서 퇴각하는 길에 '전쟁의 무상함'을 느끼고 끝내 탈영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뿐이라는 허무함이었다. 프레데릭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탈영한 신분을 숨기고 스위스로 도망가서 아내 캐서린과 함께 했던 몇 달뿐이었다.

 

  그런 20세기 허무주의를 딛고서 21세기를 맞이한 이들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란 탐욕에 눈 먼 '독재자'들만이 전쟁을 외칠 뿐이다. 이제 똑똑해진 시민들과 현명한 민중들은 그딴 독재자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다만, 미래비전 따위도 없이 그저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는 영혼없는 정치인과 추종자들만이 그런 독재권력을 옹호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가짜언론들까지 '그들만의 게임'에 참여하며 전쟁을 통해 영욕을 채우려는 검은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물론 그런 '거짓'에 속아넘어갈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주 '적은 표 차이'만으로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나니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을 따름이다. 팬데믹 시대에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안전한 대한민국'이 어쩌다 '각자도생'을 외칠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리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헤밍웨이의 말마따나, 무기여, 잘 있거라~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면 '이득'을 보는 건, 오직 독재자와 그를 옹위하는 소수자들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승전국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잡힐 뿐이고, 패전국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승전국과 패전국 '국민들의 무덤' 위에 쌓은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길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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