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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 아일랜드
김유진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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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VII / 한끼 1번째 리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을 구분할 수 있을까? 성인을 위한 책과는 달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를 대상으로 삼은 책들은 책을 읽는 '즐거움과 유익함'을 균형잡고서 출간되어야 하기 때문에 좀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학년별 구별법'으로 1학년(초등1학년)부터 12학년(고등3학년)까지 세세히 구분해서 책을 출간해도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왜냐면 분명 '7학년 수준'으로 출간했는데도 중등1학년이 읽기에도 어려워하는 면이 있는 반면에, 초등4학년이 휘릭 읽고서 감상평까지 쓱쓱 써내는 면이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수준별 편차가 굉장히 넓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어린이책(초등권장도서)'과 '청소년책(중고등권장도서)'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조차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애매한 구분법에 따르지 않고 '성인도서'가 아닌 책을 모두 '어린이책'으로 이름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0세부터 19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자기만의 도서'를 찾아서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수준별 독서'를 하기 위한 전략은 필요하다. 아이들이 독서에 푹 빠지는 경험은 대개 '처음으로 읽는 책'의 호불호에 따라서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에도 이십대 후반에 우연히 접한 <로마인이야기 2권>(시오노 나나미)을 읽고서 '1년에 100권 읽기'에 도전하였고, 향후 20여년 동안 꾸준히 독서를 습관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직업도 바꿔서 '독서논술교사' 자격증을 따고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이런 계기가 어린이들에게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처음 읽는 책'이 자기 수준에 딱 맞고, 자신의 취향에도 딱 맞아 떨어지게 되면, 그 뒤부터는 하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하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는 '징검다리 책들'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책이 필요한데, 처음에는 쉽게 접근할 수 있던 책들이 '중간단계' 없이 너무 난해한 책으로 건너뛰게 되면 책읽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정한 수준의 책들로 차근차근 실력을 다질 수 있게 '난이도 조절'이 잘 된 책들이 필요한 까닭이다. 흔히 '청소년책'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바로 그런 책들이 되어야 한다.

이 책 <센트 아일랜드>(김유정)도 그런 '청소년책'으로 분류하는 책이다. 향수를 제조하는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하는 오디션을 준비하는 지원자들이 '서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 책의 한 문장을 꼽자면, "꿈이 있는 자들에게는 꿈 냄새가 나. 꿈이 있는 한 내 몸에 벤 꿈 냄새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다. 어린 시절에 이와 같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꿈'을 가진 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는 꽤나 많이 회자되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삼은 '자기계발서'가 공전의 대히트를 치기도 했으니, 바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와 <꿈꾸는 다락방>(이지성)이다.

<마시멜로 이야기>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 '마시멜로'를 지금 당장 먹어도 좋지만, 30분 동안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한 개 더' 얻을 수 있다는 제안을 하고, 이를 통과한 어린이를 20년 뒤에 추적조사 했더니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크게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더라는 내용의 책이다. 반면에 30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어치운 어린이의 미래는 그다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는 반전이 담긴 책이기도 하다. 고작 30분을 참고 견디는 힘의 유무가 '성공하는 자세'를 갖춘 것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는 책으로 많은 호평을 받은 책이기도 하다. 물론 '통계적'인 결론일 뿐, 정확한 근거가 있는 내용은 아니다. 30분을 참고 기다린 어린이 중에도 '성공'에 끼지 못한 삶이 있었고, 30분을 참지 않고 먹어버린 어린이 중에도 크게 '성공'해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삶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바로 힘들고 어려운 일에 닥쳤더라도 '참고 극복해내고'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습관으로 들이는 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자세라는 점일 것이다.

한편, <꿈꾸는 다락방>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공식이 존재하고, 막연하게 꿈을 꾸는 것이 아닌 '생생하게' 꿈을 꾸고, 꿈을 위해 '헌신적으로' 실현시킬 노력이 더해지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내용을 담았다. 굉장히 당연한 소리인데, 실질적으로 이를 이루는 사람이 적은 까닭은 꿈을 꾸는 것보다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매우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꾸는 사람에게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계속 주입하려 든다. 마치 '인디언의 기우제'를 연상시키는 방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역시나 대박을 터뜨린 자기계발서가 되었다.

그럼 <센트 아일랜드>에서 꿈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이다린은 '센트 그룹의 연구원'이 되는 것을 꿈꾼다. 어릴 적부터 향기에 민감한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곳은 '센트 그룹'밖에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의 반대가 심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가 '센트 그룹'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고, 불의의 사고로 실명을 하였고, 그 때문에 좋아했던 향수제조의 꿈도 포기하고 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래서 '불의의 사고'가 있었던 센트 그룹에 입사를 원하는 자신의 딸이 혹시라도 엄마와 같은 일을 당할까봐서 우려스러워했기 때문에 반대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린의 꿈'은 너무도 간절했다. 다린의 재능도 '센트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이 딱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다린은 엄마 몰래 '인턴십 과정'에 지원서를 넣었고, 1차 합격이 되어서 '최종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센트 그룹' 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룹 내부에서 엄마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불의의 사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파악하는 과정중에 '일종의 음모'가 파헤쳐지고, 이를 막으려는 세력이 '다린의 불합격'을 조장하는 일이 벌어지는 스펙타클 서스펜스 스릴러...쿨럭쿨럭..암튼 그런 스릴 넘치는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지만, '청소년책'이라서 그런지 그런 '음모론'은 최대한 자제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뭐, 엉뚱한 곳에서 '출생의 비밀'이 터지면서 사건을 딴쪽에서 터지고 말지만 말이다. 암튼 '꿈꾸는 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어서 좋았다. 살짝 교훈적이라서 밍숭맹숭한 느낌도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다린의 꿈이 여기서 완성된 것 같지는 않다. 영화속 '엔딩크리딧' 뒤에 등장하는 '쿠키영상'이 있는 것처럼 이 소설책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풀풀 풍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속작'의 여부를 확인해봤는데, 아직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뒷이야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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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킷 - 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작 텍스트T 7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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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VI / 위즈덤하우스 39번째 리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서' 써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선진국 중에서도 '남을 돕는데 매우 인색한 국가'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위권도 아닌 밑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불명예에 그리 수긍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 스스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명예로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외국인 손님이 오면 매우 친절하게 대해서 전세계 여행객들에게 칭찬을 무지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조사결과를 불신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실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풀기는 '인색'하면서 베품을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것인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곤 한다. 심지어 사소한 친절에 '감사 인사'를 할 줄도 모르고 친절한 분들에게 '갑질'을 하고, '꼴값'을 떨면서 제 스스로 품위 없음을 증빙이라도 하듯 남발하기 일쑤다.

아닌 것 같다고? 그럼 당신은 '심폐소생술'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가? 안 배운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자라면 '군대'에서나 '예비군/민방위 훈련'시에도 늘상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웬만한 직장에서는 2년에 한 번쯤 '심폐소생술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기에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 그러면 묻겠다. 지금 당신 앞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가 발생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환자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십중팔구 '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위의 조사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족이나 지인이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당연히 해야 하고,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붙잡고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다. 그런데도 '심폐소생술'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겠다는 한국인은 별로 없었단다. 부끄러운 일이다.

왜 그랬을까? 십중팔구는 '잘 할 줄 몰라서'라고 대답했단다. 몇몇 분은 '괜히 도와줬다가 잘못되었을 경우 덤터기 쓸까봐'라고 대답했고, 나머지는 '귀찮아서'라는 답변도 나왔단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 사람 생명 구하는 일보다 '바쁜 일'이 정말 대한민국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괜시리 남을 돕다가 병원에 들락거리고, 경찰서에 불려다니고,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굳이 귀한 시간을 내서 '남의 생명을 구한다'는 위중한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당신도 심폐소생술을 받지 못해서 위급한 상황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119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단 5분동안'의 응급조치만 도와주어도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인데도 말이다.

소설 <비스킷>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남들이 들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소리도 이 소년의 귀에서는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리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볼펜 딸깍거리는 소리를 낸 학생의 '볼펜'을 몰래 빌려다가(?) 부셔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소심한 복수를 저지른 것이다. 먼저 그 녀석이 나의 '예민한 청각'을 괴롭혔기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준 것 뿐이다. 다시 말해 '정당방위'란 말이다. 그런데 일이 꼬여서 그 싸가지가 나를 보더니 "내 볼펜 훔쳐간 게, 너라면서? 죽고 싶냐!"라고 말하며 싸움을 걸기에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 그리 흘러흘러 '보다 큰 사건'으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게 '주거침입죄'와 '공무원사칭죄'에 해당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는 점도 충분히 이상할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점을 믿어주면 좋겠다. 굳이 또 믿지 못할 일도 아니라는 점만 인지하고 <비스킷>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아참, 그리고 하나 더 알고 있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비스킷'에 대해서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이런 사람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단다. 왜냐면 분명 사람이지만 비스킷처럼 쉽게 부서지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스킷'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비스킷'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단다. 그들은 그렇게 '소외'되다가 끝내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존재감'이 사라져버려서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속에서 서서히 생명마저 희미해져서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비스킷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은 그들이 내는 아주 작은 '소리'를 감지해 낼 수 있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소리의 '주인공'을 인식하는 순간, 비스킷은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게 된다. '소외감'이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려 하고, 그걸 의식하는 순간, 비스킷들의 미약한 존재감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 소외시키지 않고, 알아주려고 의식해주기만 해도, '소외'는 사라지고 '존재'는 드러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고 있으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다. '정신질환자'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동이 아니라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소외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졌다. 왕따로 인한 학폭이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고 있고, 부모 자격도 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아동학대'로 인한 사건도 자주 일어나고, 먹고 살기 바쁜 현실속에서 '무한경쟁'만 강조하고, 이런 경쟁에서 뒤쳐지는 이들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해, 그대로 '소외자'가 되고 마는 비정하고 무정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이해가 된다. 바쁘게 살아도 '나 하나' 먹고 살기 힘든 판국에 누가 누굴 돕고 사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릴 적 유치원때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돕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누가 누구를 평생을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진짜 '돕고 싶은 마음'은 있기는 한 걸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서 말이다. 그저 남을 돕는 일이 좋아서 자신이 가진 '재능 한 스푼'을 나눠줬을 뿐인데, 그 도움을 받고 너무나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일이 정말 보람차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웃음을 당신은 몇 번이나 보았나? '특별한 재능'이 없어서 남을 도울 정도는 아니라고? 아무도 당신에게 '아이언맨'이 되어 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낯선 길에서 길을 물었을 뿐이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분들에게 당신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뭐, 굳이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니, 먼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움 요청'을 하듯 당신에게 길을 묻고, 무거운 물건을 저쪽까지만 옮겨 달라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 책 <비스킷>의 소년 주인공이 그랬다. 예민한 청각 때문에 '거의 사라져가는 소외자'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비스킷'들의 존재를 드러나게끔 '관심'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였기에, 소년은 '비스킷'을 돕기 위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을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제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에서도 '소외'시키지 말자. 아니 '소외' 당하지 않도록 조금만 세심히 관찰하고 관심을 가져 주자. 그 조그만 관심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한층 더 밝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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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현대지성 클래식 8
작자 미상 지음, 르네 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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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I / 현대지성 11번째 리뷰] 갈랑의 <천일야화>를 완독하면서, 이 책도 함께 읽었더랬다. 제목이 <아라비안 나이트>지만, 앞서 구분했던대로 리처드 버튼의 <천일야화>는 아니다. 아예 '작자미상'으로 소개하며 유럽의 작가에 의해서 새롭게 엮어지기 전에 '아랍 지역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바로 뒤에 '엮은이'에 따라 내용이 바뀌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다는 말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엮은이의 판본'을 참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아라비안 나이트>는 대단히 점잖은 표현으로 '고전미'를 풍기는 문장으로 엮어진 것으로 보아 '앙투안 갈랑의 판본'을 참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르네 불'이라는 삽화가의 삽화들이다. [현대지성] 출판본에 대부분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1900년대 초반에 주로 삽화를 그렸던 터라 많은 분들이 한 번 보면, '아하~'하고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그만큼 익숙한 그림체다.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고 말이다. 삽화가의 위대함은 '단 한 장의 삽화'만으로 책의 내용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삽화가가 되기 위해선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섭렵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책 <아라비안 나이트>도 '삽화'만으로 전체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만약 이 삽화를 보고도 내용파악이 안 된다면 아직 <천일야화>를 읽지 않은 독자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삽화는 인상적이다. 예술적이고 말이다.

수록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단행본'인 관계로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유명하고 재미난 이야기만 엑기스마냥 꼭꼭 짜서 수록한 듯, '12개의 이야기'만을 담았다. 하지만 <아라비안 나이트>가 '액자 구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12개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서 또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록된 이야기는 아주 알차다. 가장 유명한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어부 이야기', '신밧드의 모험', '아메드 왕자와 요정 이야기', '하룬 알 라시드 왕의 모험',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코기아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부 하산, 자면서 깨어 있는 자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알라딘과 알리바바' 이야기는 갈랑판본에서만 전해지기 때문에 그 책을 참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가 야하지 않고 건전하기에 그렇게 짐작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은 '청소년용'으로 권장하기에 딱 좋다. 기본적으로 <천일야화>는 5권 이상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전체 쪽수로도 1700쪽이 훨씬 넘는다. 이런 책을 공부하기에 바쁜 학생들에게 권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니, 아무래도 '단행본'으로 권장할만 할텐데, 그렇다고 분량을 대폭 축소한 책을 권하기엔 아쉬울 것이니 약 300여쪽 분량으로 줄여놓은 이 책이 딱 적당할 듯 싶다. 그리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크게 해치지 않는 정도로 알맞게 축약해놓은 점도 아주 좋았다. 원작의 분량이 방대하다보니 '서술'이 너무 길고 '호흡'이 늘어져서 '읽는 맛'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다. 이는 사실 셰에라자드가 '천하룻밤'동안이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늘리고 또 늘린 면이 없지 않아 작용한 것일테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만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늘여서 한 이야기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내용을 간추린 '축약본'이 필요한데, 그래도 줄거리가 '기승전결'로 분명하게 전달되는 축약본을 골라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바로 바쁜 '청소년을 위한' 그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아쉬운 점은 셰에라자드의 '서바이벌 스토리텔링'과 샤리아르의 '심적인 변화과정'이 <천일야화>의 핵심 키포인트인데, 그 원전의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샤리아르 황제가 배신을 당한 분노로 새로 맞이한 아내를 처형하는 폭군으로 변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셰에라자드가 자청해서 혼인을 청했으며, 매일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샤리아르 황제가 큰 깨달음을 얻고 분노를 가라앉히면서 셰에라자드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주된 줄거리만 요약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슬쩍슬쩍 드러나는 '서스펜스'를 전혀 맛볼 수 없고, 목숨줄을 걸고 외줄타기를 하는 살떨리는 '흥정의 장면'도 전혀 맛볼 수가 없다. 이런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읽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책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군더더기 없이 '축약'을 해놓았기에 핵심파악하는데에는 아주 탁월할 정도다. 단지 이런 '축약본'만으로 느낄 수 없는 '원전의 깊이'가 아쉬울 따름이다. 감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맛을 보아야 하는데 말이다. <천일야화>를 완독함과 동시에 '단행본'을 같이 읽으니 이런 아쉬움이 먼저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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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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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 / 넥서스Friends 10번째 리뷰]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을 남겼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말이다. 즉,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슬퍼했을 것이. 그러자 석가모니는 뒷말을 덧붙인다. '거자필반(去者必返)'. 다시 말해,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을 떠나보낸다. 죽음 뒤를 기약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 '윤회사상'이란 불가의 가르침을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명강의를 한 셈이다. 히로시마 레이코는 이런 불가의 '윤회사상'을 이 책에 담뿍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자꾸만 옛 기억을 잃어가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은 센야는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야스케와의 추억만 콕 집어서 잊혀져가는 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앞서 야스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음감옥에서 탈주한 고주'와 한 판 대결을 하기 위해 우부메에게 주었던 '바쿠란의 눈'을 되찾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왜냐면 요괴의 세계에서 '한 번 맹세한 것'을 어기게 되면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악랄한 요괴라하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요괴세계의 규칙인 셈이다. 그런데 센야가 '그것'을 어기고 말았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규칙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고, 그로 인한 저주는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센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아이, 야스케'다. 그렇게 센야는 야스케와 함께 겪었던 기억들을 하나씩하나씩 잊어버리게 된다. 끝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잊어버렸다'는 기억조차 잊어버려야 하는데, '야스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서는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기억'만큼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센야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부메가 이야기했던 '무서운 저주'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에 걸린 센야는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도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되찾지 않으면 당장 '야스케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센야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센야는 야스케의 곁을 서둘러 떠난다. 왜냐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센야는 '요괴의 본능'만 남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 야스케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스케를 모르는 요괴처럼 죽여버리고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픔만 간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센야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없애버리고도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평생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라는 기억만 간직한 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저주에 빠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센야는 야스케를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센야는 안다.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야스케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분명한 사실이 센야를 더욱더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 같은 곳에 자신을 가두고 '야스케'를 헤치지 않게 만들고서는 오직 '유일한 한 사람'만이 그곳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바로 그 느낌이다. 사랑에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때,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놓고서,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상구인 '문'을 만들고서, 자기가 사랑했던 이가 다시 찾아와주길 바라는 그 심정 말이다. 센야는 바로 그런 '감옥'을 찾아냈고, 그 감옥에서 '야스케'를 기다렸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야스케'는 그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 센야와 야스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흔히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 자주 쓰이던 말이었는데, 시대가 변하니 이젠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너무도 발달한 '통신기기' 덕분일 것이다. 옛날에는 '서신왕래'를 하면서 며칠이나 몇 달에 한 번씩 '서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탓에 편지 한 통 받고 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그러다 전화기가 대중화 되자 더 빠르고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연락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더 '연락'을 뜸하게 할 뿐이었다. '삐삐'가 등장했을 땐, 반짝이나마 소통이 활발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메시지'가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때문에 '한정된 메시지'에 어떻게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더 자주 연락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등장하자 연락은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주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 자주, 뜸하게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욱 뜸하게 연락을 취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젠 SNS로 전세계 불특정다수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별'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검색기능'으로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헤어짐이 아쉽지 않은데, 굳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 무에 기쁠쏜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일까? 10권의 '시즌1'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야스케와 센야가 다시 '만남'을 갖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옛날이었다면 '시즌1'의 결말은 '헤어지는 대목'에서 멈추고, 독자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난 뒤에야 느긋하게 '시즌2'의 서두를 '둘의 재회'로 거창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별이 아쉽지 않은 시절'이다보니, 급기야 '만남(재회)'으로 결말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둘의 '새로운 이야기'로 시즌2를 장식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렸다. 이걸 참신하다고 해야할까? 솔직히 맥이 쭉 빠지는 결말이었지만, 이야기는 재밌었으므로 '시즌2'에서 다시 리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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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 인생사 덧없다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 9
이영민 지음, 김도연 그림, 황인원 정보글 / 휴이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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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VIII / 휴이넘 1번째 리뷰] 서포 김만중의 한글소설 <구운몽>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필독서로 지정되었고,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소설이라 '수능'에서 다루지 않은 지 오래 되었더라도 '내신'과 '수행'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작품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시험에서 나올 법한 내용부터 정리해보자. 크게는 세 가지다.

하나는 <구운몽>은 사대부 양반인 김만중이 손수 지은 '순한글문학'이라는 점이다. 조선 숙종 때 여러 차례의 환국과 붕당정치로 인해 수많은 관료들이 유배를 가곤 했는데, 그 무리 중에는 서포 김만중도 포함되어 있다. 무려 6차례나 유배를 갔다고 한다. 그렇게 유배를 가니, 홀로 남겨진 어머님께 위로를 드릴 겸 편지와 글을 써서 보냈는데, <구운몽>도 바로 그런 효심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운몽>을 '유배문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이 '몽자류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꿈속'으로, 다시 '꿈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오는 '몽유계 소설'인데, 현실을 묘사한 대목에서도 '주제'가 담겨 있고, 꿈속을 그린 대목에서도 '주제'를 읽을 수 있기에 '몽자류 소설'이라 부른다. 한편, 몽유계 소설에는 '몽유록 소설'도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꿈속-현실'의 구성을 보여주지만, '현실'을 다룬 부분에서는 주제를 찾을 수 없고, 오직 '꿈속' 이야기에서만 주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몽자류 소설'과 구분이 된다.

또 하나는 <구운몽>이 불교적 색채가 강한 소설이지만,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유교적인 양상'을 강하게 띠고, 소설 전반적으로는 신선이나 용왕, 도술, 그리고 상서로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도교적인 표현'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을 '유불선 사상'이 합일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주로 시험에서 다루는 부분이기에 정리해두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해석'만이 <구운몽>의 전부는 아니다. 현실세계의 '성진'이 얻는 깨달음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무상(인생사 덧없음)'이고, 꿈속세계에서 '양소유'가 누린 삶의 즐거움이 유가에서 중시하는 '입신양명(출세하여 명성을 널리 알림)'이며, 작품 전반적으로 흐르는 도가적인 분위기에서 '신비함과 신묘함'으로 재미를 증폭시키는 것으로 <구운몽>을 모두 읽었다고 말한다면, 이 소설을 '필독서'라고 지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모범답안'이 나와 있는데, 뭘 더 읽으라는 말인가. 그저 '요점정리'한 내용을 달달 외워서 '시험성적'만 높이면 그뿐일텐데 말이다.

모름지기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은 아주 우수한 작품이란 증거다. 우수한 작품으로 실린 까닭은 '딱 한 번만 읽으면 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고 두고 읽어도 좋고,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맛이 우러나는 훌륭한 작품'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운몽>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맛을 어디서 찾으면 좋을까? 나는 '양소유의 삶'에서 그 재미를 찾으려 한다. 왜냐면 양소유의 이름부터 '양기가 철철 넘치도록 이 세상 한껏 즐기며 노닐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양소유의 곁에는 '팔선녀'가 함께 한다. 성진스님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위부인을 모시는 아름다운 시녀들이 바로 '팔선녀'의 정체인데, 이들이 모두 꿈속에서 '인간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니 진채봉, 계섬월, 정경채, 가춘운, 난양공주(이소화), 적경홍, 심요연, 백능파가 그녀들이다.

그런데 <구운몽>을 색다른 재미로 읽는 방법으로 '팔선녀'를 현생의 아이돌로 대체해도 좋단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핑클'과 '베이비복스' 멤버로 팔선녀를 구성했다. 30대에는 '소녀시대' 멤버로 꾸미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4세대 아이돌' 멤버들을 골라서 장원영, 안유진, 카리나, 윈터, 엔믹스 설윤, 해원, 뉴진스 민지, 하니 등등으로 꾸며서 읽어도 색다른 맛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아 참..이번에도 '카라'는 빼먹었네. 어차피 일장춘몽에 불과한 인생사이고, 덧없는 하룻밤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무슨 상상인들 하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할 수 있다면 '돈 잘 버는 여성', '요리 잘 하는 여성', '노래 잘 부르는 여성', '권력을 쥐고 있는 여성', '천재적 지능을 가진 여성', '애교가 철철 넘치는 여성',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 그리고 '가정적인 여성'이 남편을 한결 같이 존경하고, 부인들끼리 서로 우애가 넘치도록 한 집에서 시부모님께 효도하며 살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읽어도 좋단 말이다.

그렇다면 남성독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그럼 여성독자들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좋을까? 남성독자들에게 '팔선녀'라면, 여성독자들에겐 '팔선남', 아니 '팔꽃남'으로 각색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함께 논술수업을 진행한 여학생은 국적불문하고 '휴 잭맨'을 으뜸으로 꼽고서는 '아스트로 차은우', '공유', '현빈', '강동원', 'BTS 진', '이동욱',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선택했다. 뭐, 여성독자라면 차고 넘치는 '잘난 남자들'을 다 선택해서 읽어도 즐겁지 않겠는가? 돈도 많고, 잘 생기고, 몸매 좋고, 성격 좋고, 사회적 지위까지 누릴 거 다 누리며 사는 남자들을 자신은 '공주'가 되어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로 삼아도 좋고 말이다.

나는 이렇게 <구운몽>을 읽을 때마다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읽으며 '인생의 낙'을 즐기고 또 즐긴다. 그러나 그러한 꿈 같은 일이 결국엔 '다 부질 없다'는 주제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성진의 깨달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육관 대사'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니 말이다. 누릴 수 있을만큼 원 없이 다 누려본 뒤에 비로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부질 없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보라는 것이다. 호사도 누려보아야 '별것 아니다'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어설프게 누려보거나 아예 누려보지 못하면 '평생의 한'으로 남아,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초능력을 갖고 싶어요', '초절정 미남/미녀가 되게 해주세요' 따위의 소원을 가없이 빌기 마련이다. 그런데 <구운몽>을 완독하고 나면 비록 '꿈속일망정' 원 없이 다 누린 '양소유의 삶'이 사실은 인생의 진정한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죽을 때가 되니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저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꾸로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다. 불로장생약이 있어서 '천수(千壽)'를 누린다해도 인생의 낙을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하고, 금세 질려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재밌는 게임도 100년동안 하라면 못할 것이며, 즐거운 파티도 100년을 계속하면 지루해질 것이다. 그럼 10년동안은 재밌고 즐거울까? 우리네 인간의 청춘(젊음)이 20살부터 39살까지 대략 20년 가량이라는 것이 참 신묘할 지경이다. 40대, 50대가 되면 늙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못 노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 슬슬 지겨워져서 더는 놀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내 나이가 50대로 접어들어서 <구운몽>을 다시 읽으니, 육관 대사가 성진스님에게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 하나'를 깨우치게 되었다.

흔히들 <어린 왕자>같은 명작 소설을 '10대에 느낀 감동', '20대에 느낀 감동'이 사뭇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게 30대, 40대, 50대를 지내며 주기적으로 되새기며 읽은 책들의 재미도 사뭇 달라지기 마련이다. <구운몽>도 그렇다. 10대에는 '팔선녀의 외모'에 주목해서 멤버만 바꿔도 희희낙락하며 즐거웠는데, 20대가 되니 '입신양명'이 간절했고, 30대가 되니 '팔선녀의 외모'보다는 '팔선녀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40대가 되니 '입신양명'을 넘어 '안락한 노후마련'을 위해서라도 출세가 간절했으며, 50대가 되니 비로소 '인생무상'이란 말의 참뜻을 깨우치게 되었다. 60대가 되면 <구운몽>을 또 어떻게 이해하게 될지 몹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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