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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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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IV / 민음사 18번째 리뷰] '카프카로 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 카프카가 쓴 길지 않은 소설들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문구들의 연속이지만, 뜻밖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난해한 문구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싶어지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벌써 3일째 '카프카의 문학'을 읽고 있다. 하지만 딱히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꽤나 '자전적인 소설들'을 쓴 탓에 그의 고독한 일생만을 단편적이나마 읽어낼 수 있다는 것뿐, 여러 날을 읽었는데도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것 같지도 않은데, 딱히 이렇다할 '무엇'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카프카의 소설들을 '난해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러 책에서 반복해서 읽은 소설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먼저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는 표현을 이 책에서는 '흉측한 해충'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골의사>를 비롯해서 카프카의 소설들을 연구할 때에는 '현미경 눈'으로 카프카가 소설을 썼다는 점을 감안하라는 점도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우선 '벌레 vs 흉측한 해충'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사실 '벌레'나 '흉측한 해충'이나 같은 말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넘어가자. 하지만 누군가 "너의 어깨에 '벌레'가 있다"와 "너의 어깨에 '흉측한 해충'이 있다"라는 말을 했을 때, 느껴지는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물론 '벌레'가 대부분 흉측하고 징그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모든 벌레가 '해충'은 아니기에 징그러운 느낌은 들지언정 경악을 할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흉측한 해충'은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을 당할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소스라치게 놀랄 가능성도 매우 높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해충'의 모습이 되었다는 표현은 <변신>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또한, 해충이란 표현에서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받은 충격이 단순히 '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로 품을 수조차 없는 '구역질 나는 외모'라는 점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변신>에서 그토록 성실하고 사랑받던 그레고르 잠자가 하루 아침에 가족에게서마저도 철저히 '외면' 받게 된 것인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해준다.

한편, <시골의사> 같은 한마디로 헷갈리는 소설을 마주한 독자에게 '현미경 눈'과 같은 문체로 써내려간 카프카라고 설명을 덧붙이니, 참으로 찰떡같이 이해가 되었다. 어느 평론가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너무나도 자세하고 선명한 문장표현인데도 '전체맥락'을 파악하려 들면 곧바로 어지럼증을 잃으키게 만든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니냔 말이다. 우리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전체를 조망하기에 '현미경'은 절대로 어울리는 도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소설들이 그렇다. <시골의사>만 보아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마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상황묘사가 아주 일품이다. 그런데 멋들어진 마차를 끌고 갈 '말'과 '마부'가 없는 상태다. 그렇게 의사는 오도가도 못할 상황에 처해 있는데, 몇 번의 '장면전환'이 이루어지자 '말'을 마차에 매어있고 '마부'도 출발준비를 마치고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떠나려는 참인데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어린 하녀를 걱정하는 찰나에 마차는 출발을 하고, 온몸이 근육질인 마부는 출발하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하녀가 문단속을 한 의사의 집안으로 뛰쳐들어가고 만다. 의사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어린 하녀가 당할 봉변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마차를 멈추어야 했지만, 마차는 어느새 환자가 머무는 집에 당도해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의사는 환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환자를 살펴보았지만, 환자는 치료가 필요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에게 당신은 건강하다고 말하는 순간, 환자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피를 흥건하게 쏫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의사는 환자치료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처럼 <시골의사>의 문장 하나하나는 매우 구체적이며 상황묘사가 선명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맥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쌩뚱맞는 전개를 펼쳐낸다. 없던 말을 등장시키고, 없던 상처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독자를 당혹시킨다. 마치 '현미경 눈'으로 세세한 것을 살펴보다 살짝 움직여진 샘플로 인해서 현미경의 렌즈는 전혀 다른 세상을 펼쳐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카프카의 문체는 선명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소설'을 자아내곤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쩌면 카프카의 소설들은 '미완성'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유언'으로 자신이 죽거든 자신이 쓴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그 친구가 카프카의 유언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은 탓에 오늘날의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카프카가 그런 유언을 남긴 까닭이 바로 자신이 쓴 글들이 '미완성작'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직 '수정'과 '퇴고'를 거치지 않은 거칠고 미완의 소설들이었기에 세상에 발표되는 것을 꺼렸던 것은 아닐까? 사실의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미완성작'이라는 말을 꽤나 설득력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가 펼쳐내는 색다른 걸작을 감상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미완'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눈썹이 사라져버린 '모나리자'도 우리는 최고로 아름답다며 감상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해석'을 즐기라고 말했다. 난해한 만큼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나 많은 '해석'들 가운데 무엇을 '정답'으로 꼽을지도 난감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답'이 없다면 '오답'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 틀릴 걱정은 염려 붙들어매고서 자신만의 '정답'을 즐기듯 풀어내면 그뿐이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답'이 옳은 답일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해석'을 하는 수고를 했다면, 한 가지 수고를 더해야만 한다. 바로 상대를 '설득'해서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다. 그럴 듯한 정도를 넘어 '논리성'을 갖추고, '추론'까지 가능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카프카에게로 가는 길'을 담담히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장담컨대,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이 분명하며, 그렇게 장착한 '용기'로 다른 문학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실력(안목 혹은 눈썰미)'까지 갖추게 될 것이 틀림없다.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고 즐길 정도면 여러 문학을 읽어나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쌓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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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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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 카프카 / 권세훈 / 가지않은길 (2007)

[My Review MDCCCIII / 가지않은길 4번째 리뷰] 카프카의 문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부분 절망적인 비극으로 끝맺음을 하거나 매우 우울한 마무리로 독자들을 당황케 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실제로 카프카의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독자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널리 알려진 터다. 그런데도 수많은 독자들은 '카프카 읽기'에 도전한다. 무엇보다 그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이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난해한 소설들 가운데 가장 읽을 만한 내용이기도 하고, 그나마 읽고 난 뒤에 이해가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해'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 문학전문가들조차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 일쑤인 카프카의 문학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무모함'이 카프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 매력을 좀 더 비약시킨다면, 저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은 '재구성'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정답'은 없지만, 누구라도 '정답'이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은 늘 신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 '가지않은길'에서 내놓은 <변신>에는 3가지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순서대로 <선고>, <변신>, 그리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이다. <변신>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련다. 먼저 <선고>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카프카가 '하룻밤'만에 집필해 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과 그 소식을 전달받을 친구,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친구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대화에서 나타날 뿐,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친구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예술가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공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줄까? 말까?로 고민하였지만, 결국 전해주기로 결정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하면서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가 소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아버지는 그 손을 야멸치게 거부하였고, 아들의 결혼이 자신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며, 급기야 그동안 '불효'했던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린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아들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어째서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고, 아들의 결혼으로 인해 자신은 홀로 집에 남겨져야 하며, 그로 인해 더욱더 고독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불효'를 이유로 행복해야할 아들의 미래를 짓밟을 수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행복해야 할 결혼을 앞두고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읽어야 한다. 왜냐면 카프카의 글은 '세부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이 이상하리만치 '맥락'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아들이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결혼소식'을 전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대뜸 역정부터 내더니,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내다가 끝내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리고 만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아버지의 속상함이 매우 컸구나 싶을 정도로 마무리 되었으련만, 아들은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듣자마자 몸을 던져 생을 끊고 만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아들이었기로서니 '죽어 마땅할 죄'로 보이질 않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괴이한 결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결혼에 실패'한 카프카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작품 <선고>가 쓰여질 당시 카프카는 사랑에 빠졌었고, 오래지 않아 사랑과 결혼 모두 실패하고 만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그 뒤로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4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기에 <선고>는 카프카의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행복해야 마땅할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카프카는 평생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곤 하는데, 글쎄...

한편,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명하단다. 여타의 작품들이 '개인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 반면에, 이 작품에선 '종족 전체' 또는 사람으로 빗대어서는 '민족 전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작품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줄거리는 변변찮은 게 없다. '여가수'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노래라고 할 것도 없는 '찍찍!'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쥐의 종족이었던 요제피네라는 여가수는 '쥐의 언어'인 찍찍거리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노래라기보다는 '쥐의 울음소리'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쥐들이 자신들의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랫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그래서 여가수는 청중을 향해서 '찍찍'거렸고 수많은 쥐들은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래를 듣고 환호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짧은 것인지, 쥐의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인지, 수많은 군중들은 자신들의 여가수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려 하지만, 여가수는 하나이고 군중은 너무 많아서,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에 수많은 군중들이 다 모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여가수는 무작정 '긴 기다림'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신경질과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던 군중들은 그녀의 신경질과 짜증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여가수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군중들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홀연히 공연장을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은 더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뭘까? 카프카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말이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카프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짧은 자신의 소설들을 '찍찍'이라는 짧은 노래로 비유하고,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던 군중들은 '카프카의 독자들'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설속에서나마 '카프카의 단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그 인기가 자신을 향한 '존중'이 되질 못하고, 그만큼의 인기가 '영예'롭지 못하다고 느낀 탓에 홀연히 떠나버린 여가수처럼 카프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선고>도 그렇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도 그렇고. 카프카의 단편들의 '결말'은 언제나 예측불가다. 아니 엉뚱하다고나 할까? 분명 독자로서 '기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기대이상'이 아니라 '기대이하'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에서 카프카는 절대고독과 더불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느끼는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이런 '엉뚱발랄함'이 충분한 매력일 것이다. 기왕 엉뚱한 김에 '카프카의 문학'을 비극적이고 우울하게 읽지 말고, 희극적이고 유머와 해학으로 읽으면 아주 색다를 것이다. <선고>에서 생을 마감한 아들을 죽어 마땅한 불효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 죄를 달게 받아 생을 마감한 것이라면서 '슬랩스틱'을 하며 단단히 삐친 아버지 앞에서 '과장'된 죽음을 연출하는 해학적 요소를 첨가했다고 말이다. 그러니 실상은 죽지 않았지만 불효한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깨우쳤으니 앞으로는 살뜰히 아버지를 챙기겠다는 다짐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해보는 것이다. <요제피네...>를 읽을 때에는, 심각하게 진지하게 읽지 말고, 수많은 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마리의 여가수'가 진지하게 폼을 잡더니 '찍찍'하는 로래를 부르자 100만 구름관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상상을 해보잔 말이다. 먼 옛날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마이크를 붙잡으면 수많은 군중들이 숨을 죽이며 가수를 지켜보다 "기도하는~"이라는 노랫소리가 울리자마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오빠! 꺄아~"하고 외치던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나는 꽤나 귀엽고 깜찍한 상상을 하면서 읽어 나갔다.

물론, 이처럼 카프카의 문학을 '익살과 해학'으로 유머스럽게 읽는다고해도 어렵고 난해하긴 마찬가지다. 그 까닭은 '카프카의 문학'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앞뒤 문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설명이 태부족이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히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스리슬쩍 이야기를 넘겨버리곤 한다. 그리고서는 끝내 '비극적이고 우울한 끝맺음'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허탈감'을 넘어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은 카프카의 기발함에 집중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분명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없기에 저마다 '색다른 해석'으로 다른 이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어내기에 용이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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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 변신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최윤정 글, 김연승 그림, 손영운 기획, 윤순식 감수, 프란츠 카프카 원작 / 채우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II / 채우리 18번째 리뷰] 독일의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적인 소설 <변신>은 부조리한 사회를 다룬 대표적 문제작으로 손꼽는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도 천박했다는 것이 이 짤막한 소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현대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인간 소외' 문제에 대한 경종을 강렬하게 울렸다.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회사의 영업 사원으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변신'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잠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고 쓸쓸히 죽어 간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다. 여기에 '왜' 벌레가 되었는지, '어떻게' 변신을 하였는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변신한 것이 동물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벌레'인 것인지,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벌레'가 되고 난 뒤에는 '인간'으로서 받아 마땅한 존경과 명예, 심지어 사랑마저 깡그리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이었을 때에는 몰랐던 '자신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카프카는 말하려 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카프카는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작가다. 하지만 '전업작가'가 되진 못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계를 위해선 일(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낮에는 '재해 보험국 공무원'으로 일을 했고, 밤에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글'을 썼다. 그렇게 밤낮을 바쁘게 살아간 카프카는 41세(1883~1924)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살아있을 때 '소속감'을 느끼려 간절히 원했다. 왜냐면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도'는 아니었고,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이 아니었으며,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르주아 계급이기에는 '미흡'했고, 노동자 계급이기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이렇듯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곳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특히 '직업'을 통해서만 사회에 소속될 수 있다는 강박감마저 갖고 있기에 '전업작가'를 꿈꾸는 삶을 살면서도 관두고 싶었던 회사를 떠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살아간 '실존' 인물이었다.

그가 살던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산업 사회'를 막 벗어나 전운이 감돌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런 그가 '실존주의(불안한 존재의 부조리상을 자각하고, 그 불안을 극복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는 인간을 묘사) 문학'적 경향을 띤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변신'을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성에 주목했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것처럼 부자도 하루 아침에 빈자가 될 수 있고, 건강했던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계급적으로도 '지배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지배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란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변신'을 거친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분명 '같은 존재'였지만 변신을 거치게 되면 더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부자가 부를 잃으면, 건강한 자가 건강을 잃으면, 사회적 지휘나 명망이 높은 사람이 더는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없다면, 더는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으로 충만한 '가족 관계' 안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건실한 사업가로 부와 명예를 걸머쥐어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잃게 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삽시간에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영업사원이었다. 잠자의 가족은 은퇴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여동생으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잠자의 수익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게 일을 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은 잠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자가 성실하고 유능했기에 그럴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잠자는 '벌레'가 되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경제적 능력'이 사라져버리자 나머지 가족들은 잠자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돈을 벌어다줄 때는 당연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지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되자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르를 여전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잠자의 가족들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말이다. 하지만 흉측하게 변해버린 '외모'와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 그레고르를 오랫동안 보면서 참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인간답지' 못했더라도 '경제적 능력'만 잃지 않고 나머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 있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아무런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부담'만 늘려놓는 상황이 펼쳐지자 잠자의 가족들도 더는 참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직업'을 구하고, 어머니는 '바느질 일감'을 받아다가 생계를 꾸리기 시작한다. 그레고르가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을 때는 판판이 놀던 인간들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저마다 살 궁리를 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레고르가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갈 때에 함께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그레고르가 괜한 고생을 하며 때려치우고 싶었던 회사를 꾸역꾸역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나 능력을 감추고 '빌붙어' 살아가던 가족들은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를 천대하면서 저들만의 살 궁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차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존재는 '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서 카프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바로 '경제적 능력'이다. 경제적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한편, 이 소설은 '실존주의 문학'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실존주의란 '기존의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결단'과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경향을 띤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 인간은 기존의 가치 체계를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르지 않고, 운명조차 정해진 바 없으니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 문학작품으로 사르트르의 <구토>, <존재와 무>, <벽>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를 꼽는다. 그 가운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도 함께 선보이는데, 이는 그레고르 잠자가 '변신'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고 스스로 삶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자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선보이며 '기존의 정해진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초기적 모습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카프카 이전에는 '벌레'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 같은 존재로 변해버린 주인공일지라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결말로 끝맺었다면, <변신>에선 '삶의 가치'를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이 처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렬한 결말을 선보이자 사르트르와 카뮈도 '실존주의 문학'적 영감을 카프카에게 얻고서 명작을 선보였던 것이다.

또한, <변신>은 자본주의의 비열함을 맹렬히 비판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집필되던 시기는 1912년에서 1915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식민지 약탈자본주의'가 심각하게 펼쳐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서구열강들의 '시장 강탈'로 인해 전세계는 전쟁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부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자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노동자(무산자)와 자본가(유산자)의 계급적 갈등은 날로 심해졌으며,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선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렸는데도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진정한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고 오직 '돈의 노예'가 되버렸다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고발이 절실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신>에서는 경제적 능력을 상싱한 것으로도 '인간 존재'조차 의심받고 내버려야만 하는 비정한 가족관계를 고발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변신>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현대인들도 여전히 '경제적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 존중'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을 평가할 때 '경제적 능력'만이 아닌 다양한 가치를 고려해서 인간의 '존재가치'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연애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해서 더는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욕구 또는 품위를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 능력이 충족된다면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능력'은 그 어떤 가치보다 상위에 있으며,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자유 의지'마저 포기하라면 할 정도로 더욱 비참한 '노예적인 인간'으로 퇴화되고 말았다.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움의 다양성을 선보이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는 그 어느 곳이건 간에 '경제적 능력'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면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존재인 것일까? 우리는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물질만능주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고질병일지도 모르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는 까닭도 인류진화적인 차원에서 늘 배고프던 시절에 생존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한 탓이다. 인간은 '배고픔'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배부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과거에는 없던 병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면 대부분 '배곪음'으로 일상을 개선하면 호전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성인병을 겪으면서도 '배부름'을 부러워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을 부러워하는 지경에 다달았다. 배고픈 시절에는 굶어죽기 딱 좋을 체질(!)이었는데 말이다. 암튼 현대인들에게 <변신>은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케하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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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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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IX / 넥서스Friends 4번째 리뷰] '차이와 차별'은 '다름과 틀림'만큼 다르다. 누구나 각자의 개성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서로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두는 것일까? 막상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느니 어쩐다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에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반인반요'가 된 인물이 등장하면서 요괴 아이 돌보미 야스케와 일행들에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반인반요'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치자면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여자와 요괴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함께 살게 되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인간과 요괴의 특징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반인반요'를 어떻게 볼 것인가? 4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과 요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혈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로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여자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때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인간 여자는 이 남자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둘은 사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자신이 '요괴'임을 밝히게 된다. 인간 여자는 요괴 때문에 위험에 처했는데 '요괴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난 사실을 깨닫고 이 요괴에 함께 지내길 바란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요괴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길 바란 것이다. 인간이 아닌 요괴는 두려운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게 요괴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인간처럼 여자와 함께 지낸다. 그러다 딸 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인간 여자는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요괴'이면 어쩌나하고 말이다. 다행이 겉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라 안심이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높이 있는 서까래를 어렵지 않게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지 겁에 질려버리고 만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요괴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간 여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요괴 남자 때문에 자기 딸이 요괴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도 '요괴의 능력'을 보이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나이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탓에 '요괴의 능력'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 아이처럼 굴기 시작한다. 그렇게 딸아이는 요괴인 아빠를 멀리하고 인간인 엄마와 함께 지내며 점점 엄마처럼 '요괴'를 싫어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런데도 인간 여자의 히스테릭한 발작은 멈추지 않았고 요괴 남자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인간 여자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몸이 약했던 탓인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렇게 요괴 아빠와 요괴를 싫어하는 반인반요 딸아이만 남게 되었는데, 둘 사이는 부녀지간인데도 더욱 서먹할 따름이다. 그러다 야스케를 만난다. 요괴아이 돌보미인 야스케는 요괴 아빠인 소테쓰와 함께 다이코 공동주택을 방문한 것이다. 딸아이를 돌봐달라면서 말이다. 야스케와 반인반요 미오는 그렇게 만나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다시 돌아와 '혼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혼혈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아우르는 '양쪽의 특징'을 갖추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혼혈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쪽에서는 '저쪽의 특징'이 있으니 따돌리기 십상이고, 저쪽에서도 '이쪽의 특징'이 보이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혼혈은 '양쪽의 특징'을 모두 갖춘 능력자(?)인데도, 양쪽 모두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다. 왜 그럴까? 아마도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 테면,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중 언어생활'을 하며 두 개의 언어를 모두 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겉모습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모습을 반반 섞였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 겉모습은 '다른' 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들의 시셈과 질투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혼혈이 가진 장점이 '다수의 횡포'에 의해 잠식 당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열린 사회를 바람직하다 말한다. 그리고 '소수의 몫'으로 남겨두는 배려에 대해서도 다분히 관대한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혼혈'에 대해서는 야멸치게 굴기 십상이다. 왜 혼혈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혈통을 지키고 고유한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혼혈에 대한 차별을 올곧게 지향하는 것인가? 혼혈에 대한 편견과 따돌림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책이 '일본소설'이니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살짝 논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왜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면서도 유독 '한국인'에 대해서만큼은 '2등 국민 취급'을 하는 것인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이해하면 좋겠는가? 한국인의 뛰어난 재능으로 일본인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전통문화가 어그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본사회에 만연해 있기라도 하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내용으로 '해석'을 내린 학계의 전문가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해서 '한국 혐오'로까지 확장해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일본정계를 주름잡는 '정치인'과 '경제인' 들이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무래도 일본의 보수우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라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혐한론'은 필수이고, '망언'은 선택일 지경에 다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인 차별'로 인해서 일본사회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 폄하는 일상처럼 흔해 빠진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보면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이 얼마나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고 친근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작 '재일교포'를 향한 폭력과 횡포는 여전히 도를 넘고 있고,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못한 뿌리 깊은 악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처럼 한국의 흔적을 아주 지워버려야 겨우 그러한 '악습과 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보수우익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강경하며 '한국 말살 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기만 하다.

어린이들이 읽는 소설에서 '외국인 혐오'까지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이코 작가는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교훈을 남겼다고 믿고 싶다. 딱히 이 책의 내용이 '재일교포에 관한 차별'을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심각한 '차별문제'를 사회적으로 겪고 있으니 마찬가지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단 '외모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차이', '정치견해차이' 등등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회는 극렬한 혼란만 첨가되고, 그 혼란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문제는 점점 더 가중되어 사회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안겨줄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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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3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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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CIII / 넥서스friends 3번째 리뷰] 작가인 히로시마 레이코가 앞서 밝혔듯이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애초에 성인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었다. 그랬던 것이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어린이책'으로 재구성하는 바람에 과도한 폭력이나 살해, 그리고 선정적인 대목 들이 대폭 수정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읽다보면 묘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어차피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괴'는 무엇일까? 일본의 요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관계로 그야말로 '애니미즘의 확장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요괴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은 <산해경>에 자세히 나와 있고, 대표작으로는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요괴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그닥 없다. 대표적으로는 '구미호'와 '도깨비'가 있으나 귀신을 다룬 민담이나 설화의 수에 비해서 '요괴에 관한 이야기', 다시 말해 '요사스럽고 괴상한 이야기'는 상당히 적다. 그 적은 수마저 '불교에 관한 전래 이야기'나 '은혜 갚은 까치 / 두꺼비 / 호랑이' 등등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태반이라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귀신(원혼) 이야기'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그에 반해 일본 요괴가 등장하는 괴담은 너무나도 흔해서 '전래한 것'인지, 아님 '새로 창작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특히나 일본 요괴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쉬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며, 너무나도 적나라한 성애 장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컬트(신비주의)'나 '그로테스크(기괴함)'를 즐겨 읽는 독자가 아니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 가운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귀여운(?) 요괴들이 등장하는 관계로 '2030 여성독자'들이 즐겨 읽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레이코의 히트작인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의 인기가 원인인 듯 싶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책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담았다. 이제 막 사랑에 눈뜬 '화사족(뱀 요괴)의 공주'가 이야기의 문을 열었고, 자식을 너무도 사랑한 엄마의 죽음을 초월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와 누나(요괴이긴 하지만 가족이 있다)의 행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남매의 사랑(형제애)까지 말이다. 결국 요괴라는 것도 인간이 죽어서 새롭게 생을 이어가는 존재이고, 비록 사물에서 비롯된 요괴일지라도 '살아있던 생물의 강한 염원'이 담겨서 탄생한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생명체'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물론 실제로 살아가는 생명보다 월등히 '오랜 세월'을 누리며 살기 때문에 그 힘이 축척되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서 '현실세계의 생명'과는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천년 묵은 여우'가 재주를 넘으면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성을 유혹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요괴가 '인간처럼' 생을 살아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기 딱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요괴가 인간처럼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서 '판타지'를 펼쳐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일본 요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나라의 요괴 이야기(다시 말해, '기묘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판타지 세계관'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추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암튼, 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를 즐기는 색다른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요괴'인 화사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 책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기에 '이름'에 담긴 정확한 뜻을 유추하기 살짝 힘들긴 하지만, 화사족은 분명 '꽃뱀'이나 '꽃처럼 아름다운 뱀'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요괴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는 특징이 있단다. 한마디로 사랑에 눈 뜨지 못하면 평생 '어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사족 요괴는 '부부사이'가 좋지 않기로도 유명하단다. 뭔가 감이 오지 않은가? 분명 '사랑'을 해서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요괴 부부일텐데,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게 '부부사이'는 냉랭하다 못해 평생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남남처럼' 살아가는 요괴라니, 분명 사랑을 하긴 하되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 '부부의 연'까지 맺은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나이가 꽤 찼음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하쓰네라는 화사족 공주가 등장하는데, 이 요괴의 특기는 얼굴이 잘생긴 요괴만 만나면 '결혼'을 하자고 조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위에서는 이런 하쓰네의 서툰 행동을 보고 충고를 하지만, 화사족 요괴답게 하쓰네는 '아름다운 자신'과 잘 어울리는 미남 요괴가 아니면 제대로 된 짝을 이룰 수 없다며 고집을 피운다. 그러다 운 좋게 외모가 출중한 요괴를 만나면 어김없이 '사랑고백'을 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첫만남부터 "당신 정도의 미모라면 나랑 어울려요.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예쁘장한 미소녀 요괴의 말에 "그럽시다"라고 말할 멍청한 요괴가 있을리 만무하다. 사랑은 '외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잘생김'과 '예쁘장'으로 잘 버무린 남녀 배우가 등장해서 운명적인 사랑을 '연기'한다. 그들은 꽃 같은 외모로 가슴 절절한 사랑을 그리다가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해피한 대단원'으로 막을 내리곤 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러브스토리'에 열광하며, 그렇게 열연한 두 남녀가 '현실세계'에서도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참 많다. 남들이 보기에는 '천생연분'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드라마속의 연인이 끝내 '파경'을 맞아 둘로 갈라서는 일이 흔하다는 것 또한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왜 그처럼 아름다운 연인들이 끝내 헤어지고 마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성격차이'라고 한다. 연애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실제 성격'과 '현실적인 본심'이 드러나면서 잘 포장되었던 '내면의 욕망'이 서로 잘 어울리지 않다보면 으레 헤어짐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애중에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여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쓰네는 잘생긴 요괴만 만나면 다짜고짜 "당신은 나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눌 '자격'을 갖췄어요. 어서 빨리 나랑 사랑을 하자구요"라고 말할 뿐이다. 이렇게나 뜬금없는 고백에 잘생긴 요괴남들은 하나 같이 하쓰네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나 사랑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와 사귀면 골치 아픈 일만 가득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초보 사랑꾼' 하쓰네 앞에 그럭저럭 잘생긴 '인간남'이 등장한다. 그와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하쓰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뽐내는 요괴로 거듭나게 되는데, 느닷없는 변신에 깜짝 놀란 하쓰네는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배워나가게 된다. 과연 요괴와 인간의 '종의 장벽'을 넘어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 참고로 하쓰네에겐 '첫사랑'인 셈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식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죽음'마저 초월해버린 엄마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상 어느 엄마라도 '자식의 죽음'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이를 흔히 '모성애'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사랑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 넘치는 모성애는 십중팔구 자식에게 크나큰 화를 끼치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하기에 딱 알맞게 조절하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 '안텐'이라는 아이가 있다. 안텐은 깊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는 외로운 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텐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큰 사고를 당하거나 죽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저주 받은 아이', '어둠을 몰고 다니는 아이'라는 험한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안텐도 영문을 알 수 없기에 무어라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안텐은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쫓겨나 깊은 산속 사찰에 맡겨지게 되지만, 사찰에 살고 있단 주지스님과 두 명의 동자승도 결국 '안텐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죽기 전에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안텐은 깊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안텐이 이렇게나 저주스런 삶을 살게 된 까닭이 밝혀지자 안텐은 괴로워하게 된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탓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텐의 엄마'가 자식을 대신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안텐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안텐의 엄마는 죽어서도 '안텐의 수호령'이 되어 자기 자식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너무 잘 지켜줬던 탓일까? 안텐의 엄마는 점점 안텐을 '과보호'하게 되었고, 끝내는 '안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안텐에게 조금이라도 해코지를 하면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안텐은 '저주 받은 아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실제로는 안텐이 아닌 자식을 너무도 사랑한 엄마의 영혼이 뿜어내는 저주인데도 말이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퍼붓는 '외사랑'이나 '짝사랑'은 그래서 사랑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그런 일방적인 사랑은 결국 끝이 좋지 않다. 받지는 못하고 주기만 하다보니 '적당함'을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성애'가 그런 경향이 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게 여기지만, 그런 과한 사랑을 받은 자식은 '적당함'을 가늠하지 못하고 삐뚫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나도 사랑을 한다면 너무 뜨겁지도 않게, 반대로 너무 차갑지도 않게 적당한 '미지근한 사랑'을 해야 한다. 아직 사랑받을 '준비'가 덜 된 아기라면 더욱더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런 아기조차도 적당히..앵간히 사랑을 표현해야만 한다. 너무 과하면 '응석받이', 너무 냉정하면 '애정결핍'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은 형제애로 똘똘 무장한 남동생이 누나를 사랑할 때를 보여준다. 강력한 힘을 타고난 요괴인 남동생이 누나를 너무도 사랑한 까닭에 '누나의 남편감' 다시 말해, 매형이 될 요괴를 없애버릴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남동생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 뿐인 누나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을 신랑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서 그처럼 별볼일 없는 요괴일망정 결혼을 하게 된다. 급기야 누나의 결혼을 방해할까봐 아버지는 남동생을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이를 어이하면 좋을까?

  형제간에 우애가 좋은 것만큼 보기 좋은 장면은 없다. 그런데 그 우애가 지독해서 서로 떨어지는 것조차 싫어지게 되면 어떡해야 할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근친'에 대한 터부가 굉장히 심하다. 유전과학적으로 '근친'을 하면 비슷한 유전자끼리 조합을 해서 '면역력 감소', '기형아 출산' 등등 유리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에 부적절하다면서 금지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도 '왕가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 근친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런데 시대적 배경이 '에도막부 시절'인 이 책에서 형제간의 사랑이 지나친 설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근친'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의외로 '브로맨스(남자끼리의 찐한 우정) 스토리'로 장식을 하며, 앞서 티격태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맹인안마사 '센야'와 요괴봉행소의 동쪽 봉행 '쓰쿠요'의 과거 이야기를 펼쳐냈다. 이 둘의 옛 이름은 '바쿠란'과 '유키야'였다. 그리고 둘은 정말 '둘도 없는 우정'을 선보이는 절친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근친'으로 오해할 정도로 찐한 남매간의 사랑을 선보이다가 느닷없이 이야기가 선회를 하며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하면 서러워할 찐한 '브로맨스'를 펼쳐보인다. 그리고 절친이었던 친구가 하나 뿐인 누나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바쿠란과 유키야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된다. 엄청난 대결을 벌인 끝에 누나를 되찾은 유키야는 매형이 될 남자와 누나를 서둘러서 결혼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오해하며 지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바쿠란의 선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스토리로 마무리하였지만, 글쎄...애초에 '성인 버전'이었다면 유키야와 누나 사이에 끈적끈적한 러브씬을 연출하지 않았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어린 독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의 사랑이야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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