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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 단편선 ㅣ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평점 :
<변신> 프란츠 카프카 / 권세훈 / 가지않은길 (2007)
[My Review MDCCCIII / 가지않은길 4번째 리뷰] 카프카의 문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부분 절망적인 비극으로 끝맺음을 하거나 매우 우울한 마무리로 독자들을 당황케 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실제로 카프카의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독자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널리 알려진 터다. 그런데도 수많은 독자들은 '카프카 읽기'에 도전한다. 무엇보다 그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이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난해한 소설들 가운데 가장 읽을 만한 내용이기도 하고, 그나마 읽고 난 뒤에 이해가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해'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 문학전문가들조차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 일쑤인 카프카의 문학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무모함'이 카프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 매력을 좀 더 비약시킨다면, 저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은 '재구성'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정답'은 없지만, 누구라도 '정답'이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은 늘 신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 '가지않은길'에서 내놓은 <변신>에는 3가지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순서대로 <선고>, <변신>, 그리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이다. <변신>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련다. 먼저 <선고>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카프카가 '하룻밤'만에 집필해 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과 그 소식을 전달받을 친구,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친구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대화에서 나타날 뿐,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친구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예술가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공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줄까? 말까?로 고민하였지만, 결국 전해주기로 결정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하면서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가 소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아버지는 그 손을 야멸치게 거부하였고, 아들의 결혼이 자신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며, 급기야 그동안 '불효'했던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린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아들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어째서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고, 아들의 결혼으로 인해 자신은 홀로 집에 남겨져야 하며, 그로 인해 더욱더 고독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불효'를 이유로 행복해야할 아들의 미래를 짓밟을 수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행복해야 할 결혼을 앞두고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읽어야 한다. 왜냐면 카프카의 글은 '세부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이 이상하리만치 '맥락'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아들이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결혼소식'을 전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대뜸 역정부터 내더니,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내다가 끝내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리고 만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아버지의 속상함이 매우 컸구나 싶을 정도로 마무리 되었으련만, 아들은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듣자마자 몸을 던져 생을 끊고 만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아들이었기로서니 '죽어 마땅할 죄'로 보이질 않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괴이한 결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결혼에 실패'한 카프카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작품 <선고>가 쓰여질 당시 카프카는 사랑에 빠졌었고, 오래지 않아 사랑과 결혼 모두 실패하고 만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그 뒤로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4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기에 <선고>는 카프카의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행복해야 마땅할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카프카는 평생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곤 하는데, 글쎄...
한편,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명하단다. 여타의 작품들이 '개인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 반면에, 이 작품에선 '종족 전체' 또는 사람으로 빗대어서는 '민족 전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작품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줄거리는 변변찮은 게 없다. '여가수'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노래라고 할 것도 없는 '찍찍!'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쥐의 종족이었던 요제피네라는 여가수는 '쥐의 언어'인 찍찍거리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노래라기보다는 '쥐의 울음소리'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쥐들이 자신들의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랫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그래서 여가수는 청중을 향해서 '찍찍'거렸고 수많은 쥐들은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래를 듣고 환호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짧은 것인지, 쥐의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인지, 수많은 군중들은 자신들의 여가수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려 하지만, 여가수는 하나이고 군중은 너무 많아서,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에 수많은 군중들이 다 모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여가수는 무작정 '긴 기다림'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신경질과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던 군중들은 그녀의 신경질과 짜증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여가수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군중들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홀연히 공연장을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은 더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뭘까? 카프카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말이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카프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짧은 자신의 소설들을 '찍찍'이라는 짧은 노래로 비유하고,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던 군중들은 '카프카의 독자들'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설속에서나마 '카프카의 단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그 인기가 자신을 향한 '존중'이 되질 못하고, 그만큼의 인기가 '영예'롭지 못하다고 느낀 탓에 홀연히 떠나버린 여가수처럼 카프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선고>도 그렇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도 그렇고. 카프카의 단편들의 '결말'은 언제나 예측불가다. 아니 엉뚱하다고나 할까? 분명 독자로서 '기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기대이상'이 아니라 '기대이하'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에서 카프카는 절대고독과 더불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느끼는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이런 '엉뚱발랄함'이 충분한 매력일 것이다. 기왕 엉뚱한 김에 '카프카의 문학'을 비극적이고 우울하게 읽지 말고, 희극적이고 유머와 해학으로 읽으면 아주 색다를 것이다. <선고>에서 생을 마감한 아들을 죽어 마땅한 불효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 죄를 달게 받아 생을 마감한 것이라면서 '슬랩스틱'을 하며 단단히 삐친 아버지 앞에서 '과장'된 죽음을 연출하는 해학적 요소를 첨가했다고 말이다. 그러니 실상은 죽지 않았지만 불효한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깨우쳤으니 앞으로는 살뜰히 아버지를 챙기겠다는 다짐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해보는 것이다. <요제피네...>를 읽을 때에는, 심각하게 진지하게 읽지 말고, 수많은 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마리의 여가수'가 진지하게 폼을 잡더니 '찍찍'하는 로래를 부르자 100만 구름관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상상을 해보잔 말이다. 먼 옛날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마이크를 붙잡으면 수많은 군중들이 숨을 죽이며 가수를 지켜보다 "기도하는~"이라는 노랫소리가 울리자마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오빠! 꺄아~"하고 외치던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나는 꽤나 귀엽고 깜찍한 상상을 하면서 읽어 나갔다.
물론, 이처럼 카프카의 문학을 '익살과 해학'으로 유머스럽게 읽는다고해도 어렵고 난해하긴 마찬가지다. 그 까닭은 '카프카의 문학'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앞뒤 문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설명이 태부족이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히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스리슬쩍 이야기를 넘겨버리곤 한다. 그리고서는 끝내 '비극적이고 우울한 끝맺음'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허탈감'을 넘어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은 카프카의 기발함에 집중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분명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없기에 저마다 '색다른 해석'으로 다른 이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어내기에 용이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