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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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3)

[My Review MMCCCLXXI / 넥서스Friends 1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두온 번째 리뷰는 이야기 서사의 깊이보다 캐릭터의 다채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지 고민하게 만드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이다. 일본 문학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어릴 적부터 즐겨보았다. 그 정도의 풍월로 일본 문학도 나름의 감상법(?)으로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일본 문학에서 추구하는 경향은 '캐릭터의 다채로움'이 전부는 아닐 런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싶으면 '회차'가 기약 없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도 그런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닐테지만, 대개의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소설들은 '주인공이 겪는 서사'를 다채롭게 하면서 동시에 서사의 깊이를 추구하며 읽는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장편소설을 읽는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판타지소설의 원조격인 <반지의 제왕>이나 교과서라 부를 만한 <해리포터>에서도 주인공이 다채로운 서사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에 걸맞는 답을 찾아나가며 '인생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일본 문학에서는 '문학적 깊이'를 추구하기보다 '캐릭터의 다양성'만을 밀어붙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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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관점 포인트 :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은 '호빗 종족'이다. 그 외에도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종족 등이 등장하지만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서 떠나는 '반지원정대'에 속한 주인공 일행의 서사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렇게 주인공 캐릭터는 '한정' 되었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다들 조연급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수없이 등장하지만 결국 '서사'를 풍성하게 해주는 들러리나 하객일 뿐이다. 결코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서사를 등장시켜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다. <해리포터>시리즈가 7편까지 나왔지만, 주인공은 해리포터와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로 압축된다. 그 외에 호그와트에서 함께 이야기를 펼쳐가는 조연급 캐릭터들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서사를 돋보이게 할 뿐이다. 그런데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에서는 어떨까? 분명 야스케와 센키치가 주인공인 것은 불변의 진리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서브 캐릭터(조연)'의 서사도 일일이 다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서사는 풍성해지지 않고 빈약해져 버리고, 도리어 조연급 캐릭터의 서사가 강렬하게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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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전사 세일러문>(1992)을 예로 들어 보자. 일단 시작은 '달의 요정 세라'가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으로 변신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홀로 적들을 감당하지 못하자 '동료'를 맞이해야 한다면서 '세일러 머큐리'가 합류한다. 그래도 모자라서 '세일러 마르스'가 합류하고, 곧이어 '세일러 비너스'와 '세일러 주피터'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싶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소녀전사를 도와주는 '턱시도 가면'이 등장하더니,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세일러 새턴', '세일러 우라노스', '세일러 넵튠', 그리고 '세일러 플루토'까지 결국 나올 수 있는 등장인물은 다 나오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세일러 문 세라'다. 하지만 이야기가 자꾸 겉돈다. 세라가 주인공인데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서사보다 '서브 캐릭터'를 띄워 주고, 심지어 '빌런 캐릭터'의 별도의 서사까지 다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다. 중심 방송보다 '지역 방송'이 더 많은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서사에 집중하기 어렵고 새로 합류한 캐릭터를 외우고 또 외워야 하는 일의 반복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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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전작인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의 후속작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변화가 있었다. '돌봄'에서는 센야와 야스케가 주인공이었지만, '키움'에서는 야스케와 센키치가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센야가 모든 요력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아이처럼 변한 모습이 센키치이므로 큰 변화는 아닌 셈이다. 여기까지는 준수하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조연급 캐릭터들'이 점점 늘어난다. 1회성 단발 출연만 하는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계속 출연하다가 결국 '고정'이 되어버린 캐릭터도 많다. 게다가 이야기의 핵심이 '돌봄'과 '키움'이다보니 고정캐릭터들 가운데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해서 캐릭터 풍년이 되었다. 거기에 서쪽 지궁 봉행소 캐릭만으로 부족해서 동쪽 지궁 봉행소 캐릭터까지 늘어나 버렸다. 그렇게 캐릭터 천국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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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요괴 캐릭터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그나마 간추려서 이만큼인 셈이다. 이야기를 다채롭게 꺼내기 위해서 '캐릭터 풍년'이 되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고, 그렇게 수많은 등장인물간에 얽히고 설킨 '갈등 구조'가 감상과 감동의 깊이를 더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일테니 즐겨 읽는 독자로서 오히려 환연해 마지 않아야 할 조건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연과 조연의 역전 현상'이 너무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면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채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시에는 대체로 '1인칭 주인공시점'이 딱 좋다. 독자로 하여금 '집중할 캐릭터'가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주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시점이 역전되어 있다. 주인공을 조연급으로 등장시키고 딱 한 번 등장하고 말 '조연급 캐릭터의 시점'으로 주인공이나 그 일행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 심한 것은 '외전'으로 나와야 할 조연급 캐릭터가 '주연급'으로 둔갑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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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야기 시리즈에 흠뻑 빠진 열혈 독자들에게는 이런 다채로움이 큰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주는 서사적 감동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이런 다채로운 시도는 오히려 실망을 안겨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떤 캐릭터에 집중하면 좋을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뭔가에 집중 좀 할라치면 '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좀 산만한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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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반면에 '이런 맛'을 즐기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깊이보다는 흥미와 오락적 성향을 중시하는 독자들에게는 취향저격일 것이 틀림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색다른 캐릭터들'이 계속 등장하니 재미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일본 문학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런 '다채로움'을 선보이는 경향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장편시리즈가 이런 맛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출판사들이 꾸준히 '이런 맛의 책'만 계속 출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는 '등장하는 인물'을 전문적으로 소개해주는 코너를 따로 만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도 출간할 정도다. 유튜브 영상에서도 '등장인물 정리'만 해주면 헷갈리는 줄거리도 단박에 이해가 될 정도로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모든 캐릭터가 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개는 '장편소설'의 경우에 복잡한 캐릭터관계도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는데, 일본 문학은 길고 긴 시리즈를 거듭하더라도 이야기 서사는 대체로 '단편소설' 분량인 것을 보면, 결국 '서사'로 승부하기보다 '다수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상품성만 높이는 경향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일본 문학에서조차 '캐릭터 상품 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본 책을 판매한 수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많다.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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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캐릭터를 더 추구하는 경향이 나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 문제' 없다. 이건 장단점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난 야스케는 별로야. 대신 견신 쓰즈미마루가 더 좋아. 이유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야"라면서 캐릭터 컨테스트를 펼칠런지도 모른다. 캐릭터 상품화로 더 큰 수익성이 보장된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난 이게 별로다. 캐릭터 천국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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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ㅣ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날고양이들> 어슐러 K. 르 귄 / 김정아 / 봄나무 (2009) [원서 : Catwings]

[My Review MMCCCLXX / 봄나무 9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아홉 번째 리뷰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의 판타지소설 <날고양이들>이다. 요즘 방정리 겸 책정리를 하고 있는데 예전에 리뷰를 썼던 책들도 다시 읽고 있다. 그 덕분에 '읽고 써야할 책들'조차 잠시 멈춤 신호등을 켜놓고 부랴부랴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다 오래전 2011년에 쓴 이 책의 내 리뷰도 다시 읽게 되었다. 벌써 15년이나 흘렀다니 내가 참 늙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르 귄의 판타지 <어스시의 마법사>도 우연한 계기로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줄도 모른채 집어 들었다가 반납일 하루를 남기고 뚝딱 읽어버렸던 책으로 기억한다. <반지의 제왕>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지의 제왕>보다 더 강한 흡인력으로 빨아들이는 몰입력을 발휘하는 책이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책도 다시 읽고 리뷰하련다. 그 시절에는 책을 읽기만 하던 시절이라 리뷰를 전혀 남겨놓지 않은게 아쉽기도 하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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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관점 포인트 : 르 귄은 시리즈를 많이 낸 작가다. 그래서 이 책도 '날고양이' 시리즈로 열두 편을 썼다는데, 그 가운데 4편을 엄선해서 이 책 <날고양이>로 '국내최초 완역본'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연재시기는 1988년부터 1999년까지란다. 고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만, 나는 이 시절을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굳이 '고전'으로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분류하면 나조차 '고전'으로 불려야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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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다름'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날개 달린 고양이들'이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때 '고양이들에게 왜 날개를 달아주었나?'라는 질문은 적절치 못하다. '날개'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고양이'에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개가 있든 없든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란 말이다. 그리고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다름 아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왜 다른 고양이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여야 할 내용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삶'을 사는 고양이는 단 한 마리도 없는데도, 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고양이의 평범한 삶을 침해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날개'가 달렸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날개를 달았다는 것은 '더 나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모자란 '장애'나 '질병' 따위가 아니라 무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단 말이다. 이 뜻은 그냥 평범한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평범한 고양이보다 더 천대받고 위험한 삶을 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왜 그래야 하나? 그게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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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류 사회에 속하기에 '부족'하거나 '특출'난 뭔가가 있으면 사회구성원으로 원만한 삶을 누리기에 문제가 많을 수는 있다. 그런데 부족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하기 쉬워도 특출난 무엇 때문에 '소외'를 당해야 하는 것은 왜일까? 이 문제는 조직사회를 살아본 경험에 비추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 집단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새로 합류하게 되면 그 뛰어난 인재 덕분에 조직이 발전할 가능성이 높을까?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을까? 놀랍게도 조직이 발전하기는커녕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조차 '평범하게' 변화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무능력한 사람들이 뛰어난 능력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자의 '날개'를 꺾어서라도 조직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무능한 조직의 생명연장(?)'을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어른들만 그럴까? 놀랍게도 초등학교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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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나온 못이 먼저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낭중지추'라고해서 뛰어난 재능은 주머니에 싸서 감추려고해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 패서라도 튀지 못하게 만들고야 만다. 트럼프 정부의 미국 사회 현주소를 보면 '이민 문제'가 참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트럼프 정부의 기조 덕분(?)에 미국에 정착한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에게 온갖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제추방'까지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비롯한 '백인'들도 초기에는 이민자였는데도 말이다. 흔히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원주민을 대학살하고서 '미국땅'을 차지한 백인들이 원주민이자 주인행세를 하는 꼴이 우스울지경이지만, 그 문제의 심각성은 너무나 끔찍할 정도다. 우리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기술자도 그런 푸대접을 받지 않았느냔 말이다. 저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막대한 투자금과 기술력으로 '공장'을 세워주고, 그 공장의 기계를 관리할 수 있는 '고급 기술교육'까지 시전하려 간 우리 국민인데 말이다. 고마워하기는커녕 '범죄자 취급'을 하며 쇠사슬로 묶고 강제연행한 뒤에 인권보장조차 하지 않고 구타와 모욕 따위를 함부로 사용하며 굴욕감을 주었다. 이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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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와서, 평범한 아빠와 엄마 고양이에게서 '날개'를 달고 태어난 새끼고양이 네 마리가 있었다. 아니 아빠 고양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니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갖춘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 고양이에게는 '날개'가 없다. 그렇게 평범한 엄마고양이는 네 마리의 새끼를 애지중지 키웠지만, 스스로 날 수 있을만큼 자란 새끼들에게 이제 엄마 곁을 떠나서 너희들의 능력을 발휘하여 살도록 하라며 이야기한다. 엄마는 날개가 없으니 따라갈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이웃에 살고 있는 숫고양이와 '재혼'해서 살테니 엄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면서 말이다. 네 마리 새끼고양이는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울먹이지만 더는 엄마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날지 못하는 '날개 달린 새끼 네 마리'를 홀로 키우느라 얼마나 힘든 고생을 했겠느냔 말이다. 가장 힘겨운 것은 '다른 고양이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 품을 훌쩍 떠나서 한적한 시골마을에 무사히 정착하는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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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는 엄마와 헤어져서 그리움에 사무친 새끼고양이들이 어느덧 '어른 고양이'가 되어 다시 엄마를 찾아 도시의 쓰레기통 곁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 그 도시를 떠날 때에는 아직 나는 법이 서툴러서 힘들게 고생했는데, 그동안 훌쩍 성장한 날고양이들은 아주 멋진 비행으로 엄마곁으로 날아간 것이다. 물론 네 마리 전부는 아니었다. 두 마리만 모험을 떠난 것이었는데, 그렇게 다시 돌아와 만난 고양이는 엄마가 아니라 아주 귀여운 깜장 새끼고양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귀여운 고양이에게도 날개가 있었다. 아직 너무 어려서 훨훨 날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새끼고양이는 혼자였다. 그리고 덩치도 작고 굶주림에 지쳐 곧 죽을 것 같았다. 곁에 있던 '시궁쥐'가 더 커보일 정도로 말이다. 두 날고양이는 깜장이를 정성껏 돌봐주어 함께 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킨 뒤에 엄마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찾아낸 엄마는 맘씨 좋은 할머니와 함께 편안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깜장이는 엄마의 새끼였다. 다시 말해, 날고양이들의 '씨 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엄마는 깜장이를 오빠와 언니에게 맡기며 잘 돌봐달라고 전한다. 여전히 도시에서는 날고양이들이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고양이 식구는 다섯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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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야기는 '날개 없는'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이야기다. 모험심 많은 새끼고양이였지만 처음으로 집 나간 모험에 거대한 트럭에 쫓기고 무시무시한 강아지에게 쫓겨 나무꼭대기로 도망가는데 성공해 겨우 목숨은 살아났지만, '내려가는 방법'을 알지 못해 꼭대기에서 벌벌 떨다가 하늘을 훨훨 날아서 온 깜장이와 만나서 무사히 나무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지만, 너무 멀리 나온 뒤에 정신 없이 쫓기고 쫓긴 탓에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깜장이와 함께 날고양이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 이야기였다. '날개가 있든 없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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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는 깜장이의 모험 이야기다. 깜장이도 어른 고양이가 되자 집 주변에서만 남 몰래 날아다니는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멀리 자유롭게 날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지금도 만족스런 삶이지만 말이다. 언니 오빠들이 있고, 사랑하는 '날개 없는' 고양이도 함께 있는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깜장이는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하늘을 훨훨 날아 모험을 떠난다. 더 자유롭게 말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였기 때문에 '도시의 삶'이 더 안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도시에 도착하니 깜장이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에 '열린 창문'을 통해서 우아하게 착지한 다음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공격적이지도 위협을 가하지도 않고 깜장이를 예뻐하면서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먼 거리를 날아온 터라 고되고 지쳤는데 잘 돌봐주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깜장이의 마음에 쏙든 남자는 깜장이를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소녀라며 추켜세우고 가볍게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맛난 음식을 계속 챙겨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깜장이에게 어울리는 예쁜 목걸이를 채워주고 '열린 창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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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삶은 TV에 출연한 연예인 아이돌 못지 않았다. 번쩍번쩍 사진을 찍어대고 고리 같은 것을 던지며 날아서 통과해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걸 성공하면 엄청난 박수소리에 깜짝 놀랐고, 그 뒤에는 맛난 음식을 제공받고 편안한 잠자리를 돌봐주는 남자의 배려가 뒤따랐다. 어느날 TV 화면에 '날개 달린 고양이'가 등장했다. 깜장이는 언니 오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곡예를 펼치는 날고양이라는 소개와 함께 말이다. 깜장이는 이런 삶이 싫증났다. 너무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었지만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창문 단속'을 하면서 깜장이가 탈출하지 못하게 꼼꼼하게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몰랐다. 깜장이가 '날개'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깜장이는 남자가 손님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신 없을 때 감시가 소홀한 '현관문'을 통해서 다른 남자가 문을 나설 때 함께 나가 멀리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 곳곳을 다니며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엄마고양이도 잘 살고 계셨다. 그리고 깜장이는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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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다시 '다름'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자신과 '다른 존재'와는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가? 솔직히 불편하기는 할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 서로 배려하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배척하고 공격할 이유가 있을까? 나와 달라서 불편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능력'도 출중해서 늘 비교 당하고 무시 당하는 일이 생기면,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상대적 박탈감'만 생겨도 함께 어울려 살기에는 너무 불편한 '다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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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국 사회를 드려다보자. 미국에 살고 있는 '백인'들이 왜 뿔이 났을까? 그들은 왜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를 배척하고 공격하며, 심지어 범죄자로 낙인 찍어 '강제추방'까지 서슴지 않는 것일까? 가장 단순한 이유로는 '그들이 내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저들이 '내 밥그릇'까지 빼앗아 간다고 철떡 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이민자를 강제추방하는 일은 잘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미국 주류 사회에 살고 있는 '백인들'은 그런 이민자들을 강제추방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 다수다. 오히려 '백인'인데도 비주류 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추방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민자들이 오지 않았어도 저들은 비주류로 밀려나서 먹고 살기 힘든 삶을 살 운명(?)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능력이 없어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 '애먼 화살'을 돌려서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들에게 쏴버린 것이다. 이게 본질적으로 '다름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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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양이들도 '날개 달린 고양이들'을 시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일 때 '날개를 꺾어버리자'고 선동하는 고양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니 엄마고양이가 새끼를 품에 안지 못하고 서둘러 떠나보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평범한 고양이들이 날개 달린 고양이들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엄마고양이는 새끼를 떠나보내는 결정을 서둘러 내린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날고양이들에게 닥칠 어려움은 '고양이들' 뿐만 아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선보였지만 '욕심 많은 인간들'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배부른 돼지'처럼 날개를 꺾고 길들임을 당할 우려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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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름'은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없게 하고 심지어 '자유'조차 빼앗아버리는 무시무시한 형벌처럼 다가온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다름'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는 '존재가치'를 손상시키는 무관심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다름'이 존재하는데 애써 안본척, 못본척, 없는척 하면 그건 '무시'라는 더 큰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그러니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이 가져올 '긍정적인 면'을 찾아나서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일 것이다. 단순하고 쉬운 해결법 같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긍정'보다 '부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른 존재'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더 빨리 부각시키며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을 찾았다하더라도 긍정적인 면을 더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해결법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피로감'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을 열심히 찾으려 노력하다 지쳐버리면 '반감'이 더 크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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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정한 해결법은 무엇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문제'로 축소시켜 애써 갈등을 축소하고 봉합하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너무 철저히 '다름의 문제'를 인지하고 발본색원하는 마음가짐으로 사사건건 시시콜콜 문제를 삼으면 도리어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르다고? 그게 무슨 큰 문제가 있나?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어쩌라고? 너랑 나랑 겉모습은 달라도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잖아. 설마 너랑 다르면 난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 말고, 넌 저걸 잘하고 난 이걸 잘하니 서로 힘을 합해서 잘 해보자" 이런 정도의 마인드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정 불편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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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세이 #날고양이들 #어슐러르귄 #판타지 #다름의문제 #이민자문제 #사회통합 #배려관용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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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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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3)

[My Review MMCCCLXIX / 넥서스Friends 1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여덟 번째 리뷰는 본격 요괴 육아 판타지를 담은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다. 말 그대로다. 이 소설은 '육아 판타지'를 그려 놓았다. 아주 이성적인 이상향을 담아서 말이다. 어쩌면 '일본의 육아 교본'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참고로 삼아서 자녀를 육아해보겠다면 곤란한 일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가 아닌 '요괴의 아이'를 육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귀엽다고 여긴다니 '요괴의 아이와 엄마아빠'라고 해도 자기 새끼를 키우는 정성은 가이없을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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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관점 포인트 : 바쿠란이란 대요괴가 있었다. 엄청난 요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요괴도 바쿠란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런 바쿠란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봉인하고 있었다. 자기 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봉인한 채 홀로 살아가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인간의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야스케 였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 우연이었다. 하지만 인연은 깊고 진하게 이어져 버렸다. 깊은 산속에, 그것도 한 겨울에 남자 아이 하나가 얼어서 굶주려서 기력이 떨어져서 생명의 근원이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그런 야스케를 발견한 바쿠란은 무엇보다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요괴도 아닌 '인간의 아이'를 살려냈다. 그리고 이름을 '센야'로 고치고 인간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대요괴인데도 '인간처럼' 살아가며 야스케를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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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요괴가 인간의 아이를 키운 이야기가 <요괴의 아이를 돌봐 드립니다>라는 시리즈고, 이 책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그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이번엔 인간 야스케가 센이치(센야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겉모습은 어린아이로 변했다)라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설정이 뒤바뀌었다. 다시 말해, 후속작인 까닭에 전작의 이야기설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말이다. 거기에 뒤바뀐 설정을 보완하기 위해서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왔다. 한마디로 이야기거리는 더 풍성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이야기소재'는 쪼그라든 느낌이다. 육아 이야기를 하다보니 '태교하듯' 경건한(?) 이야기거리만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 싶다. 센이치가 좀 더 자라서 '중2병'에 걸린 사춘기를 겪는 시절이 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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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명의 아이로 좁아졌다. 물론 전작처럼 다양한 요괴의 아이들이 야스케의 집으로 놀러오거나 잠시 맡기러 찾아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기본 줄거리는 야스케의 아들(?) 센이치와 규조와 하쓰네의 쌍둥이 딸 아마네(언니)와 긴네(동생)까지 세 명의 아이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작보다 덜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가 단조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다. 더 지켜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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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가짜신(허신)'이 깜짝 등장해서 긴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아마네와 센이치까지 모두 가찌신의 먹잇감이 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변태 도룡뇽(영원) 구로모리 덕분에, 아니 야스케의 헌신(?) 덕분에 센이치와 아마네, 긴네는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다. 물론 가찌신을 처치한 것은 동쪽 지궁의 봉행 쓰쿠요가 짜잔하고 나타나서 해결했지만 말이다. 암튼 까딱 잘못 되었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을 겪은 센이치는 2권 첫 부분부터 사쿠노미야를 찾아가 자신은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사쿠노미야는 견신족의 대요괴로 현재 서쪽 지궁의 봉행을 맡고 있다. 애초에 가짜신을 처치해야 할 의무가 사쿠노미야에게 있었으나, 그녀가 활약을 펼치기도 전에 쓰쿠요가 나타나서 가짜신을 대신 처치하는 일대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센이치가 위기의 순간에 '호명'한 대요괴가 사쿠노미야가 아니라 쓰쿠요였던 탓이 크지만, 어찌 되었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탓에 일이 꼬여 버렸다.

​

그러나 저러나 꼬여 버린 일은 의외의 사건으로 해결되어 일단락이 되고 만다. 센이치가 사쿠노미야를 찾아가 '주술'을 배우고 싶다며 제자로 받아들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센이치의 요청 사실을 안 아마네와 긴네도 재밌겠다면서 센이치와 함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세 명의 요괴 아이는 사쿠노미야가 거주하는 서쪽 지궁에서 주술 수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쿠노미야가 어렵사리 제자를 받아주었건만 센이치가 배우는 거라고는 사쿠노미야의 간식을 만드는 수련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간식 만드는 일만 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사쿠노미야의 네 호위무사인 '사련'들과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 수련의 전부였다. 아마네와 긴네는 그런 배움만으로도 즐겁게 지냈지만 센이치를 그렇지 못했다. 왜냐면 센이치가 주술을 배우고 싶었던 까닭이 야스케를 위기에서 구해줄 엄청난 힘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가짜신 사건 때 야스케가 위기에 빠졌는데도 센이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해야 "쓰쿠요!"라는 외침 뿐이었기 때문이다. 센이치는 사랑하는 야스케를 지키고 싶다는 일념으로 강한 힘이 담긴 주술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

하지만 사쿠노미야는 주술 수련을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다른 허드렛일'을 시키며 인내심을 시험한다. 주술 수련을 하는데 인내심(참을성)이 필요한 까닭은 강한 힘이 생겼을 때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할 때 써야만 하겠기에 그랬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런 까닭을 알게 된 센이치는 온갖 불만과 심통을 접고 사쿠노미야의 제자로 다시 예의를 갖췄다. 그 길고 긴(?) 시련을 극복한 센이치에게 사쿠노미야는 첫 번째 주술을 가르쳐 준다. 이름하야 '천향의 술'이다. 뜻을 풀이하면 '천 가지 향기를 뿜어내는 주술'인 것인데, 센이치는 보기 좋은 솜씨로 첫 주술을 어렵지 않게 성공하지만, 곧바로 배움을 끊어버린다. 고작 냄새 피우는 주술을 배워서 어떻게 야스케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센이치는 학원(?)을 끊겠다며 동쪽 지궁을 찾아가지 않고 땡땡이를 치게 된다.

​

그 무렵 수달 요괴 모녀 쓰오와 지오가 야스케의 집을 찾아온다. 한쪽 다리가 아픈 딸을 고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약재가 있는데, 그걸 구하려면 위험한 장소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린 딸과 함께 갈 수 없어 야스케에게 돌봄을 부탁하러 왔던 것이다. 그렇게 떠난 수달 요괴 엄마 쓰오는 필요한 약재를 다 구했지만 인간 퇴마사에 의해 구술에 봉인되고 마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센이치는 쓰오가 봉인된 구술을 구출(?)하게 되지만, 봉인에서 풀려난 쓰오는 억울한 심정과 엄청난 고통 속에 휩싸여 분노에 잠식된 탓에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쿠노미야는 그런 쓰오가 안쓰러워서 최선을 다해서 쓰오를 구해주려 했지만, 약한 요괴였지만 아픈 딸 지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를 구하러 했을 뿐 인간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퇴마사는 밑도 끝도 없이 '요괴 퇴치'라는 명목을 내세워 쓰오를 구술에 봉인했던 것이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쓰오는 분노에 잠식 당해 스스로를 타락시키며 저항했지만 결국 봉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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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쓰오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쓰오는 엄마였기에 아픈 딸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 못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엄마'이기에 당연한 일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엄마'라는 이름이 프리패스인 것도 아니다.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다했고 힘들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픈 딸을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있다는 사실에 그 힘듦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또다시 한 달음에 달려가 필요한 약재를 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봉인'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아픈 딸을 치료할 약재를 모두 구한 그 시점에 말이다. 쓰오는 봉인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아픈 딸을 더 걱정했을 것이다.

​

이런 쓰오의 사정을 쓰오가 뿜어내는 '냄새'를 통해서 알아챈 사쿠노미야는 전력을 다해서 쓰오를 구하려 애쓴다. 그러나 한 번 타락한 쓰오는 자신의 생명력을 다할 때까지 '타락의 요기'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딸을 치료할 희망에 목매다가 겨우 치료법을 찾아내 이제 곧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걸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한 퇴마사가 다짜고짜 봉인을 해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때문에 쓰오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못했고 타락의 요기는 쓰오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이제 쓰오는 이대로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센이치는 '천향의 술'을 발휘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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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육아' 이야기를 하다가 주술 '수련' 이야기로 빠져들고 뒷이야기는 '봉인'을 해제하는 등 이리저리 왔다갔다 정신 없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요괴의 아이'를 기르는데 모두 경험할 수밖에 없는 다채발랄(?)한 육아스토리인 것이다. 아이를 키워본 분들은 공감하실 것이다. 아이 한 명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총출동하는 일이 다반사고, 외출 한 번 할라치면 '이삿짐'을 싸듯 싸짊어지고 나설 수밖에 없고, 이제 좀 컸다고 부모의 감시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탈출한 뒤에 사건사고를 몰고다니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시키고자 '사교육'이라도 시킬라치면 천문학적인 비용 문제는 둘째치고 진득하니 '배움'을 닦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굴뚝이었을 것이다. 어제는 이런 이유로 가기 싫고, 오늘은 저런 이유 때문에 안 가고 싶고, 내일은 제발 좀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그냥 가주기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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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는 그런 부모님의 속사정을 뒤로 한 채, 오직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육아/교육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는 꼭 어른스러운 교훈적인 마무리를 하고 있어서 정말 '판타지'가 맞구나 싶다. 요즘 애들이 어떤 애들인가? 눈치가 백단이고 어른들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천상의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들의 속사정과 깊은 뜻을 단박에 깨우치고 '겸양'을 배우고 실천한다니. 그것도 단 한 번의 사고를 친 뒤에 말이다. 정말 판타지에서나 등장할 법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혹시 일본의 육아/교육 시스템은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절대불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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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세이 #요괴의아이를키우고있습니다 #히로시마레이코 #요괴소설 #판타지 #육아 #교육 #주술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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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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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2)

[My Review MMCCCLXVIII / 넥서스Friends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일곱 번째 리뷰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던 야스케가 센야의 영혼을 간직한 아이 센키치를 키우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이다. 그러고 보면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제목은 대체적으로 '직관적'이다. '이상한 과자점'이라든지 '요괴의 아이'를 돌보거나 키운다든지 말이다. 하긴 최근의 일본 만화제목을 보면 꽤나 서사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히로시마 레이코만 그런 것은 아닌 듯 싶다. 암튼 전작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에서 야스케는 봉인된 기억을 깨뜨렸고 그로 인해 센야는 어겨서는 안 되는 약속을 깨뜨리는 바람에 영원히 소멸될 운명이었다. 허나 '해피엔딩'이라고나 할까. 비록 센야는 사라졌지만 '센야의 영혼'을 고스란히 간직한 요괴 아이가 남겨졌다. 마치 센야와 야스케의 운명적 만남이 재현된 듯이 말이다. 그래서 야스케는 그 요괴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고, 센야가 야스케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워줬듯이 야스케도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자, 이렇게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새롭게 시작한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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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관점 포인트 : 애초에 '성인소설'로 써낼 작정이었던 작가 히로시마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의 시작을 꽤나 폭력적이고 야시꾸리(?)하게 설정하며 풀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어린이책'으로 분류하지 않고 그냥 '소설책'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한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애초에 어린이 독자를 위해서 쓰고자 했던 것인지 상당히 '순화(?)'된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요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잔혹하고 끔찍한 설정'이 담겨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전작'에 비해서는 그나마 어린이 독자가 읽어도 좋을 정도로 여겨질 정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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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주된 이야기는 야스케가 요괴 아이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잘 키운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매 화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야스케와 센키치를 이상하고 요상한 사건에 빠져들게 만드는 '서브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전작인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전작에서는 '센야와 야스케'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야스케와 센키치'로 바뀐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어린 야스케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요괴 아이 돌보미'로서가 아닌 '요괴 아이 보호자'로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이 확연히 달라진 점이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아이의 심정'으로 사건을 대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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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입장'이 달라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전작에서는 요괴 아빠(센야)가 인간 아이(야스케)를 기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 아빠(야스케)가 요괴 아이(센키치)를 키우기 때문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 차이가 참 묘하게 작동한다. 왜냐면 아이를 돌보거나 보호하는 아빠의 '능력'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센야는 요괴 가운데서도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나름 능력자였지만, 야스케는 고작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 아이를 키우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야스케가 사고를 치면 센야가 손쉽게 해결해내곤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센키치가 사고를 쳐도 인간인 야스케가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능력이 없다. 그래서 전작에 비해서 '인간 야스케'를 돕는 캐릭터(등장인물)가 더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그렇다면 인간 야스케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요괴 아이 센키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인간인 야스케에게 부족한 것이 많긴 하지만, 딱 하나 그 누구보다 출중한 능력이 있다. 바로 인간이든 요괴든 야스케를 돕고 싶게 만드는 '선량함'이다. 단순히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요괴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런 편견도 없이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스케가 '버려진 아이'였지만 온갖 요정과 신, 그리고 요괴까지 야스케를 살려내려 애썼고, 야스케도 그런 존재들의 배려에 부족함 없이 '선함'으로 보답을 하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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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을 읽으면 그냥저냥 '일본소설의 느낌'에서 그치지 않아서 좋았다. 기괴하다 못해 끔찍하고 참혹한 '이상한 이야기'만 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게서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선량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과응보라는 것이 작용해서 '나쁜 짓'을 일삼은 악당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잔혹한 처벌(?)을 내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끔찍한 겉모습에 해쾨망측한 짓만 하고 다니는 요괴에 대한 잘못된 편견만 부각하지 않고, 요괴일지라도 인간 못지 않은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밑바탕에 찐하게 깔아놓았다.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요괴의 아이> 시리즈에서도 그런 착한 마음씨가 엿보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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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또 우리의 정서와는 좀 달랐다. 한국고전소설에서 주로 표현되는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을 권하고 나쁜 마음에는 벌 준다는 뜻이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무작정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를 '권'한다는 마인드란 말이다. 또한 벌준다는 뜻에도 나쁜 마음씨를 '경계'하고 '멀리'하라는 뜻이지 나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을 내려서 고통을 줄지언정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갱생'하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는 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씨에 '좋은 결말'이, 나쁜 마음씨에는 '나쁜 결말'이 뒤따른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강하지, 처벌을 내리고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는 내용은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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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히로시마 레이코의 '권선징악'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거다. 후회하지 말고 나쁜 마음씨를 고쳐 먹으라.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어기면, '넌 죽음', '넌 소멸', '넌 파국'..이런 식이다. 이러면 죽기 싫고 불이익 당하기 싫어서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죽을 때까지 발악을 하고 말 것이다. 이건 진정한 '권선징악'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다른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쁜 놈이 '강자'여도 힘 없고 선량한 약자는 괴로워하고, 착한 이가 '강자'여도 힘 없고 악독한 약자는 저항해봤자 죽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속에서는 '용서'와 '관용'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용서해줄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리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겨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관용을 베풀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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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히로시마 레이코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일본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는 것으로, 나쁜 놈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으로 엔딩을 장식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인물 가운데 악당은 대부분 '다음 화'에 나오기 힘들다. 자잘한 악당들은 한 회 딱 등장한 뒤에 사라지고, 아주 강력한 '대악당'의 경우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보스'로 등장해서 최후까지 발악을 하다 장렬하게 죽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끝맺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이 참 아쉽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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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세이 #어린이책 #요괴의아이를키우고있습니다 #히로시마레이코 #일본요괴 #권선징악 #약육강식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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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초코는 달콤하다 ㅣ 초등 읽기대장
박현숙 지음, 하니 그림 / 한솔수북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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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수북 서포터즈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핫초코는 달콤하다> 박현숙 / 한솔수북 (2026)

[My Review MMCCCLXIII / 한솔수북 2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두 번째 리뷰는 '수상한 시리즈' 이야기로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시킨 박현숙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 <핫초코는 달콤하다>다. 어른들은 말한다. 폭력에 굴하지 말고 용감하게 맞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폭력 앞에 비굴하게 굽신거리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어른들도 하지 못하는 걸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듯 말하는 것은 진정한 조언이 아닌 셈이다. 그럼 용감한 어른은 어떤 어른이고, 그런 어른으로 자랄 용감한 어린이는 어때야 하는 걸까? 책속으로 풍덩 바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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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초코는 달콤하다> 관점 포인트 : 이 책의 기본 줄거리는 '학원 폭력'을 당하는 태윤이와 '가정 폭력'을 당하는 미로가 우연한 계기로 아파트 위층과 아랫층에 살게 되면서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폭력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폭력이 벌어지게 된 양상'이 천차만별이고, 그 때문에 '폭력문제 해결방법'도 천편일률적으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폭력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지 결코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애초에 폭력 상황이 벌어진 것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인데, 남의 도움을 받아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한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폭력 문제의 해결 주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뿐'이다. 주위에서 도와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자신이 해결하려는 의지도, 행동도, 전혀 없다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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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이가 당한 '학원 폭력'은 전문 용어로 '삥을 뜯긴 것'이다. 학원에 다니는 또래 친구와 잘못 엮여서 학원에서 만나는 날마다 '편의점 핫초코'를 태윤이 용돈으로 사줘야만 하는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사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친구의 기분까지 달래줘야 하며 뒤통수와 엉덩이, 종아리 등 그 친구의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맞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윤이도 처음부터 맞고 다닌 것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친구는 '지우개'도 빌려주는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지우개를 빌려준 것을 빌미로 태윤이에게 자꾸 '부탁'을 하게 되었고, 처음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기에 친구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태윤이는 늘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엮이다보니 어느새 태윤이는 날마다 그 친구에게 '편의점 핫초코'를 사줘야만 했고, 집 방향도 서로 다른데 그 친구네 집으로 바래다주어야만 했으며, 가는 내내 그 친구의 못된 손찌검과 발찌검을 당해야만 했다. 순전히 그 친구가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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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이는 그 친구에게 당하는 '폭력'이 너무 싫어서 엄마에게 학원을 바꿔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 학원이 얼마나 좋은 학원이고, 얼마나 어렵게 다니게 되었는데, 다른 학원 다닌다고 하는 거냐며, 그 이유를 물었지만, 태윤이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엄마가 걱정을 하실 것이 두려웠으며, 사실을 안 엄마가 학원으로 달려가 원장과 그 친구와 그 친구 부모님에게 당장 사과하고 보상하라며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태윤이는 자기 문제로 일이 그렇게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학원을 바꿔서 그 친구와 만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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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로는 어느 날 태윤이네 윗층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미로는 그날부터 태윤이를 가까이 대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녀야 했다. 왜냐면 밤마다 엄청 시끄러운 '층간소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윤이 엄마는 더는 참을 수 없다며 당장 윗층으로 올라가 따져물을 거라며 화를 냈지만, 윗층에 사는 미로가 태윤이와 한 반 친구라는 것을 알고서 태윤이를 윗층으로 보내 밤마다 '층간소음' 문제를 일으키 말아달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태윤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미로네 집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무시무시한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실을 알게 된다. 미로가 후드티를 머리 위로 뒤집어 쓰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까닭을 말이다. 그 아저씨가 미로의 아빠였고 밤마다 시끄러운 소음의 정체는 '부부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를 온 까닭도 '아빠 몰래' 왔던 것인데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왔던 것이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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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서로의 고민과 '폭력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며 '공감과 연대'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각자의 문제에 맞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을 찾아낸다. 미로는 태윤이에게 "너랑 그 친구랑 싸우면 태윤이 네가 이길 것 같던데? 그렇다고 맞서서 싸우라는 얘기가 아니라 너에게 함부로 대하면 그러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해. 뭣 하면 내가 도와줄테니까 말이다.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라며 어른스럽게 조언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친구가 태윤이를 또 괴롭히자 태윤이와 미로는 그 친구의 팔을 하나씩 잡아 비틀며 다시는 태윤이 괴롭히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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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미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어른들의 문제이고, '가정 내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린이가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결국 미로의 엄마는 다시 한 번 아빠 몰래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그렇게 미로와 태윤이는 이별하게 된다. 마지막 날 둘은 서로 만나서 응원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가정 폭력'은 정말 힘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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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그럼 이렇게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끝일까? 문제를 '진단'하고 '원인 분석'하는 것이 끝이 될 수는 없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해결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원 폭력'과 '가정 폭력'은 너무 다른 양상이라 '똑같은 대안'을 내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공통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있다. 바로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나도 학창시절에 '깡패학교'로 유명한 중학교를 다녔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숱한 '부부싸움'을 겪어야 했고 두드려 맞기도 엄청 맞았다. 그런 경험 때문이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게 '책속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현숙 작가로 '에필로그'에 폭력을 당한 친구를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 올려놓았는데, 그처럼 우리 주변에는 차마 말 못할 폭력을 온몸으로 겪으며 고통받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나도 경험자 가운데 한 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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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을 간직하고 있으니 '해결법'도 잘 알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어릴 적 나를 도와준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주인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 해결법을 찾아 활로를 모색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태윤이가 썼던 '문제회피'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전학을 간 것은 아니고 폭력을 쓰는 친구들 무리와 '거리'를 두는 방법이었다. 천성이 착했던 나는 학급에서 모난 짓을 한 적도 없고, 나름 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창시절에는 늘 '선생님'과 가까운 포지션에서 놀았다. 그 시절에는 적어도 폭력 학생이라하더라도 선생님은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선생님이 예뻐하는 법이라 그런 친구들이 나를 함부로 건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다 다행히 중2부터 살집이 붙고 힘 깨나 쓸 수 있는 '건장한 청소년'의 겉모습을 갖추자 더는 나를 건드리는 친구들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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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정폭력 문제는 답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이 된 나에게 손찌검하는 일이 점점 줄고, 아버지 나이가 환갑이 넘으시고 '기력'이 떨어지니 부부싸움도 덜 하게 되었다. 이런 걸 두고 '해결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한 나였지만, 그래도 몇 번은 '용기'를 내어 폭력에 저항한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저항하고 난 뒤에 무지하게 얻어 터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뒤에는 나에게 찝쩍대는 친구들도 확실히 줄었고, 아버지의 폭력도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완벽한 해결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하지 말라!"고 저항을 하니 상황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 경험이 이 책에서 비슷하게 전개되어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다시 확인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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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폭력 문제'에 완벽한 해결법은 없다. 그리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방법은 별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깡패와 싸우는 나,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나, 그 방법을 써보기도 했지만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방법이었고, 그 결과가 별로 좋은 방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부당한 일에 용기를 내니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분명히 친구가 친구를 때리는 일도 옳은 일일 수 없어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일도 절대 옳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폭력'이 멈춰지고 지속적인 '평화'를 안착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난 경험했다. 옳지 못한 일 앞에서 "부당하다"고 외치는 용기만이 부당함을 잦아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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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사람들은 '옳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하고 있으면 스스로 나쁜 짓인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는 까닭은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고, 아무도 '나쁜 짓'이라고 지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할 때 콕 집어서 "나쁜 짓을 하면 안 돼!"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외쳐주기 마련이다. 바로 이 첫 번째 목소리를 낸 사람이 바로 '용감한 사람'인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용기'를 내어준 덕분에 다음 사람들도 함께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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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용기'를 낼 수 있게 북돋아주길 바란다. 특히 '폭력 문제'는 남이 해결해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면서 용기를 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법이라고 말이다. 박현숙 작가의 '용기'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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