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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에서 유턴 ㅣ 열림원어린이 창작동화 4
이경아 지음, 조현아 그림 / 열림원어린이 / 2024년 1월
평점 :
[My Review MDCCCLI / 열림원어린이 1번째 리뷰] 우리네 가족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뀐 지는 한참이나 지났고, 이젠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그리고 '다문화가족'까지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 사뭇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과 가족을 이루어 사는 모습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듯 싶다. 가족이 '혈연'을 강조했다면 식구는 '함께 밥먹는 사이'로 더욱 폭넓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솥밥'을 같이 나눠먹는 사이라면 '한식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살린다면 현대사회에 재구성되고 있는 다양한 식구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뜻까지 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이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잦은 다툼을 벌이다 끝내 이혼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주인공인 '도은별'은 재혼한 엄마, 돈 벌러 외국에 간 아빠와 헤어져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아직 초등 6학년인 은별이는 이런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런 은별이에게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로 제작하자는 동아리 모임의 제안이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게임기'를 통해서 바리데기가 튀어나오며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기에서 나온 '바리데기'는 형체가 없는 홀로그램일 뿐이라 서로 만질 수도 없지만, 외롭게 지내던 은별이와 금세 친해져서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나누는 둘도 없는 벗이 된다.
근데 '바리데기'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딸 많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지만, 그 무정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자 '버림'받았던 막내딸이 모진 고생을 한 끝에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약수'를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효심 깊은 딸에 관한 이야기속 주인공이다.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던 옛날에는 감동스런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바리데기가 겪어야 했던 불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를 '고난극복'이란 관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보통의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수난'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암튼 바리데기는 한 여인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을 겪지만, 아버지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모든 '불운'을 견디고 견딘 끝에 '약수'를 구하고 아버지를 살려낸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바로 그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초등학생 주인공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데기도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끝끝내 견디고 이겨낸 것처럼 은별이도 한창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초등시절을 엄마, 아빠 '없이' 지내야 하는 불행을 딛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마련이지만, 한창 '질풍노도의 시절'을 겪는 사춘기 시절에는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점'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큰 상처가 되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제풀에 쓰러지기도 한다. 그럴 때 또래 친구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는데 '동질감'과 '감정이입'이 가장 크고 편한 상대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만으론 부족한 경우가 많다. 왜냐면 친구들도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어린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어른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모가 서로 쌈박질만 하고 '이혼'까지 해버리고 나면 자식들은 '어느쪽'으로부터든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부모들도 나름의 고충을 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랑이었으나 여러 가지 '차이'가 드러나면서 불화가 심해지면 이혼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지로 함께 살면서 '불행한 결혼생황'을 지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기에 그 자체를 반대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현명한 부모라면 자신들의 '이혼'으로 인해 자녀가 짊어져야할 아픔과 고난이 무엇일지 미루어 생각한 뒤에 절대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행여 자녀가 그 상처를 이겨내지 못할 때에는 삶은 '선택'하는 것일 뿐, 삶 자체에 '행복'과 '불행'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테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친 어린이가 있다면, 그 어린이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넌 정말 불행하구나. 그러니 넌 평생 불쌍하게 살아야만 해"라고 말할 텐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친 부위도 나을 것이고, 다시 씩씩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평생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일지라도 '평생불행'한 삶을 살게 되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은 '불행이자 불운'이겠지만, 그걸 극복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겠느냔 말이다. 부모의 이혼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엄마도, 아빠도 곁에 없는 '불행'을 겪게 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평생 엄마, 아빠를 못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 심지어 재혼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인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뒤에 남은 것은 '선택'뿐이다. 부모 없는 삶을 살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단지 '나의 선택'만 남을 뿐이다.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불행해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여겨 더욱더 비참해지든지 말이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선택'따위는 평생 모르고 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닥쳤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한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바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말이다. 왜 '불행한 삶'을 선택하지 않는지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점점 무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없다. 적어도 '삶'을 선택한 이들은 말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는 친구들이 있다면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너의 삶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은별이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많아서 참 좋았다. 바리데기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