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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에서 유턴 열림원어린이 창작동화 4
이경아 지음, 조현아 그림 / 열림원어린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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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I / 열림원어린이 1번째 리뷰] 우리네 가족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뀐 지는 한참이나 지났고, 이젠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그리고 '다문화가족'까지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 사뭇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과 가족을 이루어 사는 모습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듯 싶다. 가족이 '혈연'을 강조했다면 식구는 '함께 밥먹는 사이'로 더욱 폭넓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솥밥'을 같이 나눠먹는 사이라면 '한식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살린다면 현대사회에 재구성되고 있는 다양한 식구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뜻까지 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이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잦은 다툼을 벌이다 끝내 이혼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주인공인 '도은별'은 재혼한 엄마, 돈 벌러 외국에 간 아빠와 헤어져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아직 초등 6학년인 은별이는 이런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런 은별이에게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로 제작하자는 동아리 모임의 제안이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게임기'를 통해서 바리데기가 튀어나오며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기에서 나온 '바리데기'는 형체가 없는 홀로그램일 뿐이라 서로 만질 수도 없지만, 외롭게 지내던 은별이와 금세 친해져서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나누는 둘도 없는 벗이 된다.

근데 '바리데기'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딸 많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지만, 그 무정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자 '버림'받았던 막내딸이 모진 고생을 한 끝에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약수'를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효심 깊은 딸에 관한 이야기속 주인공이다.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던 옛날에는 감동스런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바리데기가 겪어야 했던 불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를 '고난극복'이란 관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보통의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수난'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암튼 바리데기는 한 여인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을 겪지만, 아버지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모든 '불운'을 견디고 견딘 끝에 '약수'를 구하고 아버지를 살려낸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바로 그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초등학생 주인공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데기도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끝끝내 견디고 이겨낸 것처럼 은별이도 한창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초등시절을 엄마, 아빠 '없이' 지내야 하는 불행을 딛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마련이지만, 한창 '질풍노도의 시절'을 겪는 사춘기 시절에는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점'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큰 상처가 되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제풀에 쓰러지기도 한다. 그럴 때 또래 친구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는데 '동질감'과 '감정이입'이 가장 크고 편한 상대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만으론 부족한 경우가 많다. 왜냐면 친구들도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어린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어른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모가 서로 쌈박질만 하고 '이혼'까지 해버리고 나면 자식들은 '어느쪽'으로부터든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부모들도 나름의 고충을 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랑이었으나 여러 가지 '차이'가 드러나면서 불화가 심해지면 이혼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지로 함께 살면서 '불행한 결혼생황'을 지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기에 그 자체를 반대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현명한 부모라면 자신들의 '이혼'으로 인해 자녀가 짊어져야할 아픔과 고난이 무엇일지 미루어 생각한 뒤에 절대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행여 자녀가 그 상처를 이겨내지 못할 때에는 삶은 '선택'하는 것일 뿐, 삶 자체에 '행복'과 '불행'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테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친 어린이가 있다면, 그 어린이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넌 정말 불행하구나. 그러니 넌 평생 불쌍하게 살아야만 해"라고 말할 텐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친 부위도 나을 것이고, 다시 씩씩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평생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일지라도 '평생불행'한 삶을 살게 되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은 '불행이자 불운'이겠지만, 그걸 극복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겠느냔 말이다. 부모의 이혼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엄마도, 아빠도 곁에 없는 '불행'을 겪게 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평생 엄마, 아빠를 못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 심지어 재혼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인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뒤에 남은 것은 '선택'뿐이다. 부모 없는 삶을 살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단지 '나의 선택'만 남을 뿐이다.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불행해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여겨 더욱더 비참해지든지 말이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선택'따위는 평생 모르고 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닥쳤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한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바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말이다. 왜 '불행한 삶'을 선택하지 않는지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점점 무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없다. 적어도 '삶'을 선택한 이들은 말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는 친구들이 있다면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너의 삶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은별이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많아서 참 좋았다. 바리데기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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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실이와 고구마 도둑
허윤 지음, 김유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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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I / 거북이북스 1번째 리뷰] 가장 완벽한 견생(개의 삶)이란 무엇일까? 지금은 '애완견(사랑스런 장난감 강아지)'이란 표현 대신 '반려견(평생을 함께 동반할 개)'로 고쳐부르고 있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강아지들 대부분은 여전히 '애완용'이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만만찮은 반론을 주장하며 자신은 '개'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기르듯 소중히 여긴다는 견주(강아지주인)도 있겠지만, 그저 비싼 사료 먹이고 동물병원에서 값비싼 치료를 받으며 한 침대에서 물고 빨고 좋아 죽겠다는 식으로 기르는 것이 과연 '강아지의 삶'으로 최적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그게 '사람의 만족'을 위한 생활인지 '강아지의 삶'을 최선으로 배려한 삶인지 말이다.

흔히 도시에서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은 어김없이 배변훈련을 받고 '목줄'을 차며 바쁜 현대인들의 삶에 최대한 적응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정작 반려동물들은 출퇴근이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왜 주인이라는 것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기 바쁘게 집을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야 좋아죽겠다면서 물고 빨다가 저들의 방에 들어가 코하고 잠을 자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반려동물'들은 평생을 외롭게 홀로 지내야만 한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얌전히 있다가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온갖 귀염을 떨면서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 자는 얌전한 '반려동물'이 되어야만 사람(주인)들에게 환영받는다. 그게 절대로 '반려동물의 삶의 질'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도리어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인데도 말이다.

거꾸로 한 번 생각해보란 말이다. 사람인 당신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서 하루종일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온갖 귀염과 애교를 떨며 밥과 간식을 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좋아 죽겠다는 시늉을 날마다 해야 하는 '반려동물의 삶'처럼 한 번 살아보란 말이다. 대부분의 개들이 소파를 물어뜯고 떠나가라 울부짓고 성질 사나운 짓을 하지 않고서는 베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암튼, 이 동화책의 줄거리는 도시에 살던 강아지 '포메라니안(견종)' 보보스'가 말썽(?)만 피우다 시골로 쫓겨나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 고구마 밭을 지키는 용감무쌍한 개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사실 '포메라니안'은 지금은 작고 귀여운 견종이지만, 먼 조상은 북극에서 썰매를 끌던 견종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덩치도 컸고 잘 짖었으며 사냥도 훌륭히 해내는 '사냥개의 후손'이었단다. 지금이야 복실복실 털 많고 장난 많은 귀여운 악동 견종으로 유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도시에 살던 '보보스'가 시골로 내려가 도둑 지키는 '복실이'로 변신한 것이 그리 큰 삶의 변화(?)는 아닐 것이다.

하긴 다양한 견종들의 조상은 대부분 '사냥개'였다. 인류가 늑대에서 개로 길들였기 때문에 '개의 본성'은 야생의 사냥 본능을 갖고 있을 것이며, 가장 최근까지도 개를 기르는 주목적이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거의 모든 개들이 '컹컹' 사납게 울부짖고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주인'이 아닌 다른 생물(!)에게 무시무시한 공격본능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그런 견종을 선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못하게 발톱도 자르고, 성대도 작살내고, 입마개까지 물리고서 '얌전'하길 바란다. 사냥개의 본능으로 충만한 강아지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복실이의 삶은 다르다. 시골로 내려간 초기에는 당혹스럽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 같아 속상하지만 '복실이(보보스)의 엄마'가 늘 말씀하신대로, "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는 아주 훌륭하고 용맹한 사냥개였단다"는 말을 떠올리며 할아버지 댁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였다. 예쁘게 치장하고서 주인에게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난감(애완견)'이 아닌 '진정한 견생'을 살아가는 당당한 사냥개로서 말이다. 그래봐야 한주먹보다 조금 더 큰 덩치일 뿐인 강아지에 불과하지만, 포메라니안이 '사냥개의 본능'으로 잃지 않은 것은 바로 덩치에 비해 엄청 큰 목청이었다.

그렇게 '복실이'는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의 고구마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것도 한밤중에 밭 한켠에 목줄로 단단히 묶이고서 말이다. 도시에 살 때는 사람처럼 낮에는 산책하고, 밤에는 주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며, 주인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는데, 할아버지댁에서는 방안은커녕 마루에조차 올라서지 못하고 쫓겨나는 설움을 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개밥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먹다 남은 밥찌꺼기'였고 말이다. 그것도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데워주는 바람에 복실이 입천장이 홀랑 타서 벗겨질 지경에 이르자 '개밥 거부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의 고구마밭을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복실이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복실이는 훌륭히 '고구마 도둑'을 쫓아내고 당당한 견생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것인가? 아니면, 견생의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충실한 '주인의 장난감'으로 생을 마감하는 평범한(?) 견생으로 만족할 것인가? 이 동화책을 읽는 어린이에게는 '변화된 삶에 훌륭히 적응하는 모습'이라는 주제를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진정한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주인공'이라는 주제를 귀띔해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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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무인 편의점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 3
서아람 지음, 안병현 그림 / 라곰스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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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XII / 라곰스쿨 3번째 리뷰] 이번엔 '무인 편의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말 많고 이상한 아저씨가 운영하던 편의점을 성실한 젊은이에게 물려주면서 이야기가 끝났다. 아이스크림 가게와 문구점에서는 없었던 에피소드다. 그리고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라는 물음이 더 적당할테지만 그보다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것인지 궁금해져서 말이다. 다음 가게는 '무인 사진관'이라는 사실만 확인한 채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련다.

'무인 편의점'에서는 [당신에게 딱 필요한 물건을 팝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와 '무인 문구점'에서는 [웃는 얼굴을 보여 주면 문이 열려요!]라고 적혀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변화는 '이상한 가게 시리즈'가 장편으로 이어질 것을 예고(?)하는 변화일까? 아니면, '편의점'이라는 성격상 '꼭 필요한 물건을 판매한다'는 컨셉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일 뿐일까? 하지만 애초에 '이상한 가게들'에선 아이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 더 소중한 '웃는 얼굴', '자기만 간직한 비밀', 그리고 '즐거운 놀이 한 판'을 하면 아이들은 갖고 싶어하는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소원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 소원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오히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가 더 소중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래서 '이상한 가게'는 그저 아이들이 '웃는 얼굴'만 보여주면 들어올 수 있게 했더랬다. 그랬는데 '편의점 편'에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컨셉으로 갈 것인지, 아님 '편의점 편'에서만 그럴 것인지 관심이 기울어진다. 하지만 '무인 사진관'에서는 다시 '웃는 얼굴'을 요구할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이란 것은 늘 '소중한 추억'을 담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한편, 편의점은 우리의 일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단지 허름한 '구멍가게'가 최신식의 '편의점'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소규모 영세상인의 몫이었던 자리를 대기업의 체인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의점'이라는 말처럼 단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가 아닌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곳으로 활용도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곳이다. 더구나 영업시간이 '24시간', '연중무휴'이기 때문에 한밤중에도 정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간단한 먹거리부터 응급처지를 할 수 있는 의약품, 그리고 택배를 보내고 맡을 수 있는 장소제공까지 우리 일상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편의점'에 설치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바꿀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런데다가 최근에는 실제로 운영되는 '무인 편의점'이 생겼다고 한다. 뭐, 아직은 '무인 판매'가 용이한 '자판기'를 주로 도입한 수준이지만, 건물에 입주할 필요도 없이 '컨테이너 박스'에다가 편의점을 꾸미고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치할 수도 있다는 장점까지 도입했다고 한다.

물론, '편의점'이 마냥 편리한 곳만은 아니다. 밤새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아르바이트 일꾼들에겐 정말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밤중에 편의점을 이용하는 불량한(?) 손님들이라도 찾아온다면 참으로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거나 강도짓을 일삼기라도 하면 크나큰 낭패를 보기도 한다. 무인 편의점이라고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CCTV가 있다고해도 '관리자'가 없다는 틈을 타서 마구잡이로 음식을 먹고 도망가거나 '물건'이나 '현금'을 훔쳐 달아나는 강도짓을 일삼는 무리도 심심찮게 나타난다는 뉴스가 방송에 나오기 때문이다. 대개는 경찰에 덜미가 잡혀 혼쭐이 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이런 '무인 편의점'에서 아이들은 '이상한 잡화'를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나쁜 습관들'을 하나하나 고쳐 나갔다. 자신감이 없어 엄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심함부터 충치로 인해 이가 뽑혀져 나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치과에서 사용하는 기계들이 무서워서 충치치료를 거부하고 도망가는 일까지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의 그런 '나쁜 습관들'이 있다는 부끄럼 때문에 볼이 빨개질테지만, 다 읽고 나면 그런 '나쁜 습관들'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냐면, '나'도 어릴 적에는 그런 나쁜 습관을 갖고 있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쁜 습관들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계기를 통해서 하나씩 고쳐나갈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스컹크 뿡뿡 너로구나 군고구마' 이야기에선 물건값도 치르지 않고 제것인냥 마음대로 슬쩍하는 나쁜 습관을 가진 학생이 등장한다. 이 학생이 '훔치는' 물건은 편의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소중한 물건도 아무렇지 않게 슬쩍 가져가버리곤 한다. 먼 옛날 배고프던 시절에는 아이들의 '서리'를 어른들이 눈감아주기도 했다. 쪼그만 녀석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랬을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농작물 손실'이 엄청나거나 '논밭'을 망치기라도 하면 어른들이 노발대발해서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시절에서 조금 지나 '도시의 어린이들'은 문방구나 구멍가게에서 슬쩍하는 일이 빈번했다. 워낙 다양한 물건을 진열해놓기도 했고, 주인어른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물건을 슬쩍하는..그 시절에는 '뽀리'라고 불렀다. 물론 그때에도 주인어른이 눈감아주었다가 '물건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이거나 여러 차례 그런 일이 반복될 경우에는 학생들의 부모님에게 '따로' 연락을 취해서 주의를 주는 일도 있었다. 왜냐면 그 시절에는 '한 동네에서 벌어진 헤프닝'인 경우가 많아서 다 알고 지내던...그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엔 다르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도 아니고, 한 동네에서 서로 다 알고 지내던 시절도 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에는 그런 '나쁜 습관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아직 '도덕적 관념'이 제대로 심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행동'을 일삼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학생의 나쁜 습관을 바로 잡겠다고 '도둑놈 취급'을 해버리면 크나큰 충격을 받고 도리어 삐뚫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어른들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을 뉘우치고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칠 수 있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도둑놈이란 낙인'을 함부로 찍어버리면, 그 아이는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게 될 수도 있고, 잘못을 뉘우칠 방법도 찾지 못하고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어 평생을 '사회부적응자'로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물건을 훔치고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아이에게 '고약한 방귀'를 뀌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방귀를 뀌는 이유가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가 아니라 '양심'이 썩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여주니 스스로 한 짓들이 정말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유방법'도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쳐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되면 저절로 낫게 된다고 했으니 얼마나 멋진 방법이냔 말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양심 군고구마'가 있지는 않겠지만,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깨닫게 된다면, 그런 고구마가 없더라도 올바른 윤리의식을 깨닫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에게 '딱 필요한 물건'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자기존중'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일테다.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할 줄 아는 멋진 사회구성원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무리해서 자기를 꾸밀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하면 그뿐이다. 자기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멋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상한 무인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딱 필요한 물건들'이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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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무인 문구점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 2
서아람 지음, 안병현 그림 / 라곰스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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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X / 라곰스쿨 2번째 리뷰] '이상한 무인가게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신비한 물건을 판다는 독특한 소재로 쓴 동화책인데,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놀라운 동화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소원을 바라는대로 다 이룬다고해서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소원이라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채워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예뻐지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라는 평범한 소원들을 봐도 그렇다. 지금 현재 '돈'이 부족해서, '미모'가 좀 빠져서, '체력'이 뒤떨어져서 지금보다 더 많은 '무엇'을 채우면 적어도 현재보다는 행복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허나 정말 그럴까? 1억을 가지고 있다가 100억을 갖게 되면, 귀여운 정도였는데 아이돌 뺨치게 변신을 한다면, 체력이 떨어졌나 싶었는데 운동선수 못지 않은 왕성한 체력을 갖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해질까?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무엇이라도 채우면 채울수록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행해졌다는 것만 더 많이 느낄 뿐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왜냐면 그런 소원은 '(남과) 비교한 결과'를 바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갖지 못한 '남의 것'을 시샘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리고 더 부자가 되었어도, 그 시점에서 더 큰 부자가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만 생길 뿐이다. 다시 말해 '욕심의 크기'만 다를 뿐, 끝없이 욕심부리게 될 뿐이다. 성적이 80점인 친구는 늘 만점 받는 친구가 부러울 수 있다.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 받는 모습이 부러워서 자신도 열심히 공부해서 만점을 받고 싶어진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렇게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하자. 만점을 받은 친구는 다른 친구들의 인정과 선생님의 칭찬을 받아 행복해질 것이다. 그 다음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고, 또 만점을 받고, 또 만점, 또또 만점...이렇게 계속 만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이라도 있어서 계속 소원을 들어줘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늘 만점을 받도록 실력을 쌓아야 할까? 그 누군가가 계속 소원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불안할 것이다. 아니면 늘 만점 받을 정도로 실력을 쌓을 정도로 공부만 해야 해서 죽을 맛일 것이다. 과연 행복한가?

이 동화책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물건'을 갖게 되어 놀랍고 재미난 경험을 하지만, 결코 그 물건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곧바로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늘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나답게 살아갈 때'라는 진리를 깨우쳐준다. '나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해야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말이다. 나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니 좋든 싫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배워야만 한다. 그 사랑에는 진심이어야 한다.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보람'차야 한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자신을 사랑하는 척하면 역시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올바르고 정직한 일을 해야 한다.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는데 남들이 보기에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이며 이 세상을 바람직하게 만들지 않고 되려 '병들게 만드는 암적인 존재'가 되면, 역시나 행복해질 수 없다.

물론, 이런 것들을 몰라도 책을 읽으며 즐길 수 있다. 훌륭한 책일수록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었을 때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책인 셈이다. '교훈'까지 이해할 수 있어서 일상생활에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지혜를 배워 내 삶에 도움이 된다면 아주 훌륭한 책이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말이다. 이 시리즈에 알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편인 <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꼬마아이인데, 그 아이가 '물건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간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이스께끼'를 훔쳐 먹고 몰래 달아난 아이인데, 그 아이가 늙지도 않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상한 무인 문구점>의 관리인으로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 벌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긴 한데, 애초에 '물건값'을 받지 않고 판매하고 있는 무인가게인데 왜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때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이래저래 끝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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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 1
서아람 지음, 안병현 그림 / 라곰스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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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 / 라곰스쿨 1번째 리뷰] 이 책을 읽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바로 히로시마 레이코의 환상동화책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2019년에 1권이 출간된 뒤에 24년 20권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한 판타지소설이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로 '판타지 소설'로는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공전의 히트를 친 대작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지만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판타지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탓이 크다. 한 번 꽂히면 '소장'을 할 정도로 좋아하는가 하면, 그 반대라면 시리즈를 다 읽지도 않고 멈춰 버리고 만다. 뭐 대부분의 '장르소설 독자들'이 비슷한 경향을 보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논술쌤이다보니 '어린이동화책'을 볼 때 두 가지 관점으로 본다. 하나는 '재미'이고, 다른 하나는 '교훈'이다. 어린이를 위해서라면 두 가지 모두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왕이면 둘 다 충족한 책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재미'가 있다면 어린이들에게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읽을 것이기에, 반면, '교훈'이 담겼다면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분명해지니 수업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라서 '필독서'로 삼는다. 그렇다면 '판타지소설'에는 재미와 교훈 가운데 무엇이 담겨 있을까? 10점 만점이라면 '재미 7, 교훈 3' 정도일 것이다. <해리 포터>를 예로 들면, 재미로 쳐도 10점 만점에 10점을 줄 수 있겠지만, 교훈으로 삼을 것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건 바로 '순혈주의의 문제점과 위험성'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해리 포터와 친구들이 덤블도어 교수들과 힘을 모아 대결을 펼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볼드모트'와 그 추종자들이다. 그들이 악당을 자처하는 까닭은 '마법사들의 세상'을 더럽히는 잡종들을 처리하고 '순수한 혈통의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새로운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마법사는 '순수한 혈통'을 따지지 않는 법이다. 그걸 자연스레 깨달은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와 맞서 싸우며 그가 꿈꾸는 세상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는 모험이야기라는 점에서 충분한 교훈이 담겨 있다. 왜냐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 가운데 '차별'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별'하면 안 된다고 배웠고, 자신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허나 우리는 아주 쉽게 '차별'을 일삼고, 쉬이 '편을 갈라' 갈등을 조장하며,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편'이 아닌 '네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그러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하는데, 차별은 차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 그들을 죽여 없애야 속이 시원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떤가? 볼드모트와 꼭 닮지 않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내었기에 <해리 포터>는 후한 점수를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은 어떤가? 재미 10점, 교훈 0점으로 평가내리고 싶다. 이야기는 무지하게 재밌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부담없이 술술 읽힌다. 그런데 읽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없다. 깊은 감동과 여운이 없다고해야 할까? 굳이 그 까닭을 밝히자면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꼽을 수 있을텐데, 그들의 '생명경시 풍조'에 대해서 솔직히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는 점이 그렇고, '약자들이 당하는 폭력'이 너무 과하고, '약자들의 희생'을 너무 당연시(?)하는 것이 살짝 거슬리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용서치 않는 '정의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해결하기도 하는데, 글쎄? 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의의 용사'가 필요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큰 문제이기 때문일까? 고작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회문제'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는 다르다. 재미 6, 교훈 4점을 주고 싶다. 재미적 요소는 <전천당>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아이템'으로 소원이나 걱정을 바로 해결해주는 이야기형식이지만, 그 속에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거울 아이스 찹쌀떡'을 먹은 아이는 어린 나이에 너무 바쁜 일과를 보내는 것에 지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과 꼭 닮은 아이가 '한 명' 더 생겨서 '자기 대신'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준다면 자신은 그 시간에 공부에서 해방되어 맘 편히 놀 수 있겠다는 소원을 바란 것이다. 이상한 무인가게에서 특별한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에 그 소원은 바로 이루어진다. 그 덕분에 아이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보낸다. 허나 노는 것도 쉬이 질리는 법, 아이는 놀만큼 놀았으니 다시 학교와 학원에 가서 '칭찬'받는 착한 아이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근데 자신과 꼭 닮은 아이가 '칭찬'은 자신이 받을 테니 너는 나가서 신나게 놀기나 하라고 한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버리고 만다. 그제서야 아이는 자신이 이룬 소원이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소원을 폐기시켜 버린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아이는 더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무척 교훈적인 이야기 아닌가. 소원을 이루고 난 뒤에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소원을 폐기'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전천당>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해 불행해진 결말로 끝맺는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 것에 비하면 <무인가게>에서는 그런 끔찍한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런 감동 깊은 '교훈'도 너무 자주 남용되면 쉬이 질리는 법이다. 그래서 어린이책이 어려운 것이다. 어린 독자를 만족시키려다가 '재미'만 추구하는 것도, 어린 독자를 위해서(?) '교훈'만 추구하는 것도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은 '균형잡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쪼록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는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다음 편인 <무인 문구점 편>이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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